소설리스트

11화 (12/28)

뚱뚱한 여인이 노래 할 때까지 #11

국사관의 회장 고토 마사키가 조고 방문 의사를 삼펜에 밝혀왔다고 한다. 어제의 삼펜 회의는 그래서 소집되었던 것이다. 고토는 국사관과 조고의 화해라는 명분으로―구실로―조고에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그, 고토 마사키가 말이다. 국사관의 생도회와 조고 삼펜의 공식적인 모임으로, 두 학교가 협력의 계기를 만들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고토가 밝힌 방문의 목적이라고 했다.

이용당하는 것이다, 사진도 그랬는데 무슨 속셈이 있는 게 아니냐, 국사관의 제의로 조고가 녀석들과 화해를 하면 지금까지의 투쟁은 물거품이 된다, 갖가지 의혹과 의문이 제기되고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으나, 결국 국사관의 방문은 성사, 예고되었다. ‘대결전’ 보도의 여파로 학교 사무가 마비될 정도로 곤란을 겪고 있는 조고인데다, 조고가 국사관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것 또한 문제시 될 것을 우려한 학교 책임자와 관계자들은 국사관의 제의를 환영했다. 그리고 삼펜도 물론 녀석들을 환영해야―그런 시늉이라도 해야―했다.

이것이 태정이 어제 희상에게서 전해들은 삼펜 회의 내용이었다.

* * *

“어이, 나 찾았다면서.”

경무가 태정에게 손을 들어 간단한 인사를 하면서 복도를 걸어왔다. 태정을 반기는 표정까지는 아니더라도, 경무의 얼굴은, 이전의 불만으로 인한 경직과 마뜩찮음이 많이 풀려 있었다. 그것은 단지 태정의 기분만은 아닐 터였다. 태정은, 아닌 중 다행이라, 이야기가 좀 더 쉬워지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보았다. 이제 곧 그날이었다. 태정은 머릿속을 맴도는 ‘그날’ 의 일을 일러두어야 했기에 경무를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경무가 태정의 용무가 무엇인지 다 안다는 표정으로 태정이 꺼내려던 말을 막는다.

“아아…, 태정이 너, 국사관 방문에 대해서라면 말하지도 마. 이미 결정된 일이야 그것도 오늘 오후라고. 젠장, 그 새끼들을 또 봐야 한다니….”

“아니, 다른 이야기야.”

국사관의 방문을 순수하게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고, 매우 의심스러웠지만, 태정은 그걸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날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파친코에서의 고토의 악담과, 녀석이 의미심장하게 흘렸던 이야기들이 한데 뒤얽혔고, 그것은 태정에게 ‘그날’을 말하고 있는 듯했다.

“뭔데 해봐.”

국사관 녀석들에게 감정을 드러내며 흥분하던 경무가 팔짱을 끼며 여유를 보인다.

“내일 모레가 무슨 날인지는, 경무 너도 알고 있겠지.”

“천황 탄생일이잖아.”

‘그날’을 상기시키고자 하는 태정의 말에 경무는 그게 뭐라도 되냐는 말투로, 한마디 툭 던졌다.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그날’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천황 탄생일을 알고 있는 그 모든 이들이, 그날의 ‘행사’를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이번에, 심상치가 않아서.”

“도대체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거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태정에게 경무가 길지 못한 인내심을 드러낸다. 태정은, 경무가 그날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으면 했지만, 경무는 ‘천황 생일이 뭐 어쨌다고’라는, 그날에 대한 느슨한 의식을 드러냈다.

하긴, 매년 기념하는 것이고, 그날에 특별히 이렇다 할 일도 없었다. 달력에 빨갛게 표시되는 날이건만 그날로 인해 조고가 쉬는 일도 없었고 당연히 어떤 이벤트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배지 사건은 신호탄인지도 모른다. 그와 관련된 모든 일이 끝나주길 바랬건만, 고토의 말이 걸렸고 녀석의 작태를 보면 더더욱 그냥 지나갈 수 없었다. 게다가 질기게도 따라다니는 그 농하고도 끈적한 냄새가 태정을 가만두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경무의 태도와 반응은 그다지 나쁘지 않다. 태정은, 경무에게 ‘행사’ 에 대해 입을 열었다.

“관동 대지진 때 조선인 사냥이 있었어.”

“조선인 사냥? 하, 뭐야? 갑자기 그 얘긴 왜 꺼내는데?”

경무의 눈빛과 어투는 ‘이 자식, 웬 난데없이 헛소릴 지껄이나’ 정도로 해석될 수 있었다. 경무의 반응은 하등 이상 할 게 없었다. 확실히 이건, 진지하게 들어줄 건 못되는 이야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건 바로 태정이 우려했던 것이다. 경무는, 이 이상 더 허튼 소릴 하면, 당장이라도 자릴 박차겠다는 기운을 보이고 있었다. 태정은, 잠깐 들어보라고 경무의 팔 옆을 쥐기까지 한다.

“대지진 이후로 연례행사로 보통고 녀석들이 조고생 대상으로 똑같이 조총련 사냥이란 걸 자행했지. 그게 언제나 천황 생일날이었다는 것쯤은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고.”

경무는 코웃음을 치며 태정의 말을 잘랐다.

“하하하, 그래서, 녀석들이 우릴 죽이기라도 할 거란 말이야? 조선인 사냥이라니, 그런 구닥다리 같은 건 없어져도 이미 몇십 년 전에 없어졌다고.”

경무 녀석의 큰소리에 태정은, 스스로가 엉뚱한 생각을,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경무의 호통으로 인해 무언가가 바뀌진 않는다. 고토는 고토 녀석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고, 태정을 마취할 것 같은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근심은 근심으로 여전히 남아 있어서, 태정은 여간해서 물러서지 않는다.

“그래도, 그래도 주의하는 게 좋겠다.”

경무에게 간절한 부탁이라도 하듯 태정은, 진지하고 조심스레 말을 건넨다. 하지만 지금 어린애 타이르는 거냐며 경무가 화를 냈다.

“주의할 게 뭐가 있다고 그래 도대체 넌―! 조태정, 국사관 녀석들이 화해를 청하러 온 댄다. 낼모레 그런 황당한 짓 꾸밀 녀석들이었으면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하냐고.”

그래서 더 미심쩍은 국사관이고, 고토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경무에게 그건 단지 귀찮은 태정을 떼어버리는 구실일 뿐이었다. 그런 실없는 소리 들어주는 것 말고도 할 일이 많다고 하면서 경무는 태정을 물리치려 했다. 태정은, 경무의 팔을 더 세게 거머쥐며 놓아주지 않았다.

“경무야, 넌,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긴 뭐가아―, 이상한 건 네 녀석이야. 처음부터 고토 녀석 같은 거 충분히 이길 수 있었잖아? 아니야? 엉? 처음부터 확실히 했으면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 거 아냐.”

“지금 그 얘길 하자는 게 아니잖아.”

경무는 일대일 결투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괜찮을까 싶었지만, 결국 대화에도, 경무와의 관계에도 어떤 진척은 없었다.

“그래, 그 사냥 이야길 하자는 거겠지. 한 마디만 할게. 얼토당토않은 소리, 하지도 마.”

태정의 근심은 ‘헛소리’ 정도로 경무에게 치부되어버린다.

“일이 이 지경까지 온건 다 네 탓이야. 알아?”

태정이 꼬인 일의 사단事端이 되어버리면서 대화는 일방적으로 단절되어버린다. 경무는 태정이 붙잡은 팔을 휙―뿌리치고는, 네 탓이라고!! 라며 태정에게 모든 책임을 다시 한 번 확실히 전가시키며 왔던 복도를 다시 돌아 나갔다.

정학 중 집에 찾아 왔던 희상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하긴 했었다. 희상은 고토의 인간 됨됨이를 보면 가능성은 있지만, 그래도 섣불리 일을 추진하진 못할 것이라는 의견을 보였다. 하지만, 희상이 덧붙여 말한 것은, 조고 학생들의 신변을 위협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삼펜에서 논의해 볼 것이라고 하며, 태정의 우려를 그냥 지나치진 않았던 것이다. 그런 것인데, 오늘 경무의 반응을 보니 희상이 이야기를 꺼낼 기회가 없었다든가, 아니면 논의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단했거나였다.

경무의 말대로 ‘조선인 사냥’이란 것은 그 흔적도 희미한, 사라진 지 이미 몇십 년이 지난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작 몇십 년 전의 일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 과격하고 분별없는 일본의 일부 보통 학교 학생들이 천황 탄일誕日때 벌였던 짓거리였다. 그 일에 참여했던 이들은 그것을 가리켜 ‘성스런 의식’이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자애롭고 은혜로운 천황 폐하’에게 특별한 예물을 바치고자 했고, 그 예물이란 것이 바로 조총련 학생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성스런 의식에서 ‘산제물’로 바쳐져 죽임을 당한 학생이 얼마인지는 파악되지 않는데, 그것은 암묵적으로 그런 죽음을 방조한 사회와 정부의 덕이 컸다. 만약 삼펜의 자경 활동이 없었더라면, 조고생의 피해는 훨씬 더 크게 확대되었을 것이었다. 그리고 태정은, 바로 지금이 삼펜의 그런 활동이 다시 필요한 때라고 느꼈다. 그 ‘사냥’이 가공의 자신만의 억측이고 상상이라 해도 말이다.

그래서 태정은 어제 다시 한 번 희상에게 물었던 것이다. 희상이는, 조선인 사냥이 부활할 가능성은 낮지만, 조심을 해야 할 것 같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희상은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자고 했다. 끝까지 기본적인 믿음이라는 것을 견지하는 녀석이었다.

지금 우리는 법치국가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무모한 짓을 쉽게 저지를 만큼 어리석지 않다. 또 인권에 대한 의식이 과거 그 어느 시대 보다 높은 시대이다… 등등 희상은 낙관론을 펼쳤다. 녀석은 자신의 원칙만큼 다른 사람의 원칙도 바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가 믿는 사실과 법칙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인 만큼, 다른 사람의 그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믿는다.

태정은 희상의 논리가 너무나도 순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이상론과 낙관론이 주는 유혹은 상당히 컸다. 그 말에 기대어 ‘아무 일도 없을 거야’라고 생각해 버리면 편안한 쉼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태정은 경무의 반응과 희상의 말을 곰곰이 살펴 숙고해보았다.

아무래도 수십 년 전의 사건을 현재로 가져와 결부시키는 건 비약이 심하고, 억지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 자신은 과민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태정은, 이번만큼은, 스스로의 설득에 설득 당해보기로 했다.

* * *

태정은 학교 건물 삼층에서 화해의 방문입네 하면서 조고의 정문을 들어서는 국사관 녀석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을 맞이하며 악수를 청하는 것은 경무였고, 조고의 삼펜이었다. 조고와 국사관이 섞인 무리들 중에 태정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고토, 였다.

꽤나 먼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고토의 표정은 특별히 포커스를 맞춘 듯 선명하다. 기분이 좋은 것이다. 고토가 입을 커다랗게 벌리며 옆의 다른 국사관 녀석과 같이 웃고 있었다. 무엇을 재미있어 하는 것인지. 저 고토의 기분에 태정이 휩쓸렸고, 삼펜이 휩쓸렸고, 조고 전체가 휩쓸렸다. 지금도 태정처럼 국사관 녀석들을 구경하려 창틀에 붙어 고개를 내민 녀석들의 수가 꽤 되는 것이다.

경무가 앞장서서 모든 이들을 인도하고 있었고, 남빛 블레이저의 고토들은 그 안내를 받아 점점 조고의 본관(기실 조고는 본관, 부속 건물을 따로 나눌 것 없는 회색의 5층 건물 한 동 뿐이었지만)의 입구를 향한다. 고토는 좌우로, 위아래로 부지런히 고개를 움직이다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고, 그의 옆에서 걷는 녀석과 붙어 귀엣말을 나누다가는 또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우리를 구경하고 있는 건가.

고토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조고를 구경하고 있는 것이었다.

녀석이 웃고 있는 대상 속에 자신도 포함되고 있다는 생각에. 태정은 창가에서 한 걸음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창가를 떠나지는 못한다.

고토, 이곳에 온 이유가 뭐지? 정말 화해를 원하는 건가? 네가?

태정은 웃고 있는 고토를 향해 소리내어 질문을 던졌다. 순간 질문을 들은 것처럼 고토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친 건가? 아니다. 착각이다. 착각이 들만큼 녀석이 유심히―한자리에 우뚝 서서―태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고 있는 건가? 착각임을 알면서도 다시 의문이 피어오른다. 아니, 그럴 리 없다고 태정은 질문하고 부정하고를 반복했다. 이미 창가에서 한발자국 떨어져 있었다. 태정은 고개를 젓지만, 녀석의 얼굴에―태정을 바라보는 듯한 고토의 눈에―일부러 시선을 맞춘다. 그리고 녀석이 눈앞에 있는 것인 양 태정은 물었다.

“왜지?”

모든 것을 통틀어 태정이 고토에게 던지고 싶었던―싶은―말은 단지 왜? 라는 한마디였다.

* * *

오후 한때 꽤나 들썩였던 조고였지만, 국사관이 언제 조고를 휩쓸고 갔는가 싶을 정도로 귀갓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한산했다.

「뭐어, 그 녀석 말은 잘 하던데. 이전에 봤던 그 미치광이 녀석이 맞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은 얼굴이었어. 꽤나 엄숙한 표정을 하면서 국사관과 조고가 한발씩 양보하자고 말하는데, 그게 꽤 진지하더라니까……, 웃음이 나오다가도 다시 도로 들어갈 만큼 말야.」

희상이 태정에게 전했던 두 학교의 공식적인―화해를 위한―회합 풍경이었다. 희상의 말로 재구성되었던 그림의 중심에는 역시나 고토가 있었다. 고토는 녀석을 위해 마련한 차를 마시고, 사진을 찍고 악수를 하고, 모임을 제의한 녀석답게 말을 하고, 행동을 했다고 한다. 그것이 다였다. 태정은 희상에게 상세하고 자세한 이야기를 원하지 않았다. 모범적인 고토의 모습. 그것이 연기인지 녀석의 진실인지 태정이 알 도리는 없었다. 그리고 태정은 더 이상 녀석의 행동을 구분 지으려 하는 시도를 그만두기로 했다.

창가에서 던졌던 질문의 답을, 태정은 기대하지 않았다.

태정은 빨간색의 헬멧을 머리에 쓰고, 스쿠터의 시동을 걸었다. 스쿠터의 핸들을 쥐고, 태정은 그 자리에서 조고를, 한 바퀴 비잉 둘러보지만, 당연 학교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학교였다.

“바보같이…….”

한 점 변화 없는, 평소와 똑같은 그 모습에 태정은 스스로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비웃으며 태정은 스쿠터를 출발시킨다.

* * *

“빵빵. 빠아앙.”

태정의 귀에, 경적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집에 도착해 스쿠터를 앞마당으로 들어놓으려 하는 찰나, 빵 하고 다시금 같은 경적 소리가 들린다. 설마, 집 안으로 진입하고 있는 태정의 스쿠터를 향해 빵빵대는 건 아니리라. 하지만, 계속 울려대는 소리에 태정은 좌우를 둘러본다. 좁은 길을 오가는 차는 없었다. 태정은, 스쿠터에서 내려 문 밖으로 나와 둘러보았다. 그제야, 집에서 조금 떨어진 길 한켠에 정차돼 있는 차가 눈에 잡혔다. 소리를 거기에서 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차는 태정이 이미 한 번 보아 눈에 익은 차였다. 분명 차가 정차 돼 있는 그곳을 지나쳐 왔었다. 그런데, 그 덩치와 화려함이 인상 깊은 차를 태정은 무심히 지나쳤던 것이다. 빵빵. 빵빵 태정은 차가 질러대는 경적의 소리 속에서, 희상이 회합을 전하며 그에 덧붙인 이야기를 떠올렸다.

「고토 녀석이 널 물어봤었어. 그 자식, 조고 사정을 전혀 모르는 척 하고 있더라고…. 회장이 바뀌었냐면서 능청맞게 묻던데? 그리고 네가 없어서 아쉽다고 말했었어. 진짜 아쉬운 표정을 하면서. 너하고도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아무튼, 그 녀석, 말은 잘하지?」

그런데…,라고 말을 잇다가 희상은 한숨을 쉬었다. 태정은 희상에게 녀석과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속 시원히 말해주지 않았다. 아마도 그게 궁금한 것이었으리라. 그렇지만, 무슨 일이랄 것도 없었고, 앞으로 남아 있을 무슨 일도 없다.

정차된 차의 도어가 열렸다. 그리고 태정이 차를 알아 봤을 때부터 예상했던 주인공의 모습이 그 안으로부터 나와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녀석이 아쉬워했다고 희상이 말했지. 저 고토 녀석은 그 말처럼 뭔가 계속 아쉬운 사람 같았다. 태정의 집 앞에 차를 대기 시켜 놓고, 기다렸다가 태정의 도착을 알아보고 이내 경적을 울려댄다. 희상의 말대로 고토의 행동은 아쉬운 인간의 그것 아닌가.

“너 아까, 거기 서 있었던 건가?”

태정의 앞으로 가까이 걸어온 고토가 던진 질문은 갑작스럽고 상당히 모호했다. 하지만, 태정은 고토가 의미하는 ‘아까’라는 시간과 ‘거기’라는 장소를 알고 있었다. 착각이 아니었나. 창가에 서 있던 태정을 고토가 보았던 것이다. 아니다. 녀석은 창문에 달라붙어 있었던 조고생들을 보고 짐작으로 묻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봐, 사람이 질문을 하면 대답을 해야지.”

태정이 우두커니 녀석을 응시하고만 있자, 녀석이 답을 채근한다. 질문, 그리고 대답. 고토의 말에 태정은 창가에서 뇌까린 질문을 머리 위로 떠올린다. 왜. 도대체 왜. 하지만, 실제의 녀석을 바로 코앞에 두고 있으면서도, 묻지 않는다. ―아니, 묻지 못하는 것이다.

“대답이라…. 내가 묻는다면, 고토 넌 대답을 할 건가?”

태정은, 자신이 품은 질문을 질문으로 탐색해본다. 하지만, 그런 태정의 신중함을 고토는 여지없는 조소와 무시만으로 가볍게 부서뜨렸다. 녀석은 무슨 엉뚱한 소릴 하는 거냐며 콧방귀를 뀌었다.

“흥, 대답? 이봐, 질문은 내가 먼저 했다고.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물으면, 네가 대답하는 거야.”

“그렇군.”

태정은 희미한 미소를 내비치고 바로 거둬들였다. ―미소를 얼굴에 걸고 있기엔 힘이 부친다. 녀석은, 화살은 한쪽으로 향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접점도, 기대도, 타협도 있을 수 없었다. 화해는 더더욱 있을 수 없고 말이다.

하긴, ‘아마도’라고 했었다. 태정이 끝이냐고, 클럽에서 재차 녀석에게 확인을 요구했지만 고토는 아마도, 라고 대답했었다. 지금 여기에 녀석이 있는 것이 애매한 ‘아마도’라는 말의 분명한 의미였다.

분명, 그때의 클럽에서 이미 태정은, 녀석과의 끝을 말했었다. 그리고 고토의 대답은 그것의 재확인일 뿐이다. 난투극에서 우연히 맞닥뜨렸다고, 오늘 녀석이 이런 식으로 기다린다고 해서 그 끝이 연장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토는 자신의 ‘아마도’라는 말의 의미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었다. 태정이 집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서서, 문을 닫지만, 고토의 끝이 어디까지인가는, 잠그지 않은 문을 녀석이 여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끼익―.

고토는, 초대받지 않은 집의 문을 멋대로 열고 있었던 것이다.

욱씬―.

문이 열리는 소리는 날카롭게 갈린 금속처럼 파고들어, 푸욱, 태정의 머릿속을 깊숙이 찔렀다.

“집이 납작하지 않잖아?”

허락도 없이 집으로 무단 침입을 감행한 고토의 음성이 태정의 뒤에서 들려왔다. 고토 녀석, 집 안에 누군가 있을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실례합니다 대신 무례한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납작한 집. 소학교 운동장에서 국사관 녀석들이 태정이네들을 보고 소리쳤었다. 약 오르지? 메롱∼ 하고 상대를 골려대는 어린 녀석들처럼. 고토는 그곳에 남아 있어야 했다. 아직까지 그런 소학생들의 장난질을 즐기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봐, 조센징 집은 다 납작한 거 아니냐구.”

태정을 부르며, 녀석은 또다시 납작한 집 운운한다. 태정은 옆구리에 낀 빨간 반구형 스쿠터 헬멧을 거실 테이블 위에 놓고 열쇠를 그 옆에 나란히 두었다. 그러고 나서, 뒤를―고토를―돌아본다.

“나가 줘.”

문을 향해 손을 뻗으며 조용히 나가 달라고 청하지만, 태정의 시선은 문이 아니라 고토의 발로 향했다. 고토는 구두를 신고, 말 그대로 구둣발로 거실에 올라 와 서 있었다. 발에서 시선을 치켜 올리자 태정의 시선을 마주하는 고토는, 뭐 어떠냐는 표정이지만, 녀석의 갈색 눈엔 치기 어린 장난을 뿌듯해하는 빛이 가득 차 있었다.

“아, 이거?”

말과 함께 고토는 밑창의 먼지를 떨어내듯 탁탁 타타탁 다리를 엇갈라 서너 번 씩 바닥을 치고 발을 굴려대면서 아직 신발을 신고 있음을 강조한다. 마룻바닥에 뽀얀 신발 자국이 어지러이 찍혔다. 어지럽고 머리가 아프다. 욱씬, 정수리가 쑤셨다. 고토가 내리쳤던 목검의 후유증이 꽤 길게 갔다.

’도망치지 마’

누나가 그렇게 말했었지. 그래서 도망치지 않기 위해서 경무, 희상일행과 함께 한 것이었다. 하지만, 운동장에서의 주먹질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불특정 다수인 그들에게 태정은 거리낌 없을 수 있었다. 위험 불감에 대해 생각할 여유도 필요도 없었고, 팔을 애써 안으로 굽힐 이유도 없었다. 왜, 라는 질문을 던지고자 하는 생각조차 일지 않았다. 그 녀석들은 대답을 모르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그들은 태정이 질문을 던질 대상이 아니었다.

“앉으라고 권하지 않나?”

능글맞게 웃는 고토는 신을 신은 발로 걸음을 떼며 안으로 이동해 들어오려 했다. 물론 녀석을 그대로 들일 수는 없었다. 태정은 녀석의 걸음에 맞춰 나아가 더 이상의 진입이 없도록 고토를 차단시킨다.

“흥, 뭐야? 손님을 이렇게 대접해도 되나?”

녀석의 시선이 비슷한 위치에서 팽팽하게 태정을 주시하며 불만을 말한다. 손님이라. 흙 묻은 신으로 이 집의 거실 바닥을 밟고 서서 당당히 손님이라고 밝히는 녀석이라니. 고토야 말로 묻고 싶은 녀석이었다. 아라시 체육관의 키타무라처럼.

“손님이면 구두를 벗어.”

“하하하, 그래도 집이라 이건가? 이런 시궁창 냄새나는 집이 말이지? 하하.”

녀석이 말하는 냄새 같은 건 나지 않는다. 냄새는 녀석에게서 나고 있다. 태정은 녀석으로 인해 한계 없이 증폭되는, 지금 코를 메우는 찐득한 액체의 어릿한 환향―악취―만을 맡을 수 있을 뿐이었다.

“신발을 벗으라고.”

정작 녀석에게 물어야 할 질문을 묻지 않는다. 왜 묻지 않는가? 그리고 왜 신발 따위를 벗으라는 말을 하고 있는지―또 왜 해야 하는지―태정은 그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봐, 이봐.”

탁탁, 고토가 태정의 가슴을 손등으로 두들기고 있었다.

“너무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라구. 못 들었나? 난 화해하자고 그쪽 학교에 갔었다고. 그쪽 회장이랑 악수도 했고…. (탁탁, 고토가 여전히 가슴을 두들기며 말했다) 너랑도 잘 지내보자고 여기까지 온 건데 이래도 되는 거야? 엉?”

“화해라.”

태정은 가슴팍을 치는 고토의 움직임을 멎게끔 손목을 붙들고 희미하게 웃는다. 고토가 되는 대로 말을 주워 삼키는 녀석이란 건 새삼스런 사실이 아니다. 이런가 하면 저렇게 말이 바뀌어 있고, 확연한 사실을 뻔뻔하게 부인하는 것도 그랬다. 흙발로 남의 집에 들어와 잘 지내보자는 것이나, 국사관들과 희상이 앞에서 ‘감히’라고 하며 태정의 ‘서비스’에 화를 냈던 것이나…. 마치 고토는 제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그리고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는 녀석처럼 굴었다.

“그 화해라는 건 뭐지?”

태정은, 녀석이 화해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를 묻는다.

“아아∼. 오늘 화해를 목적으로 왔다고 하니까 조고에서 극빈 대접을 해주던데? 악수를 하고 사진을 찍고, 이렇게 포옹도 하는 게 화해지.”

고토는 자신의 손목을 붙든 태정의 손과 함께 자신의 손을 흔들며, ‘이런 게 화해’라는 듯한 제스처를 보이더니, 나머지 손을 태정의 등에 두르고 포옹의 포즈까지 취했다. 녀석의 호흡이 귓가에서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우앗!”

고토의 숨결이 목을 스치는가 했더니, 녀석이 갑자기 목을 물었던 것이다―이빨로 세게 꽈악.

“그리고 이렇게 상대의 목덜미를 물고 말이지. 후하핫.”

얼결에 태정이 고함 소리를 내며 물린 목을 손으로 더듬는 것을 보며 고토는 재밌다는 듯 웃었다―목덜미를 뜯은 흰색의 이를 자랑스레 드러내면서. 태정이 손끝으로 오른쪽 목을 더듬자, 잇자국인 듯한 요철이 손가락 끝에 만져졌고, 그 손을 내려보니 피까지―아주 조금이었지만―묻어 나왔다. 이것이 녀석의 화해인 것인가.

상대의 방심하게 만들고 그 틈을 타, 이를 드러내고 급소를 문다.

도망칠 수 없어. 고토의 태도는 그저 일회성 장난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에 태정은 또 한 번의 두통을―현기증마저―느꼈다. 목을 물며 고토가 재해석한 했던 화해의 의미에, 태정은 숨통이 막혔다.

하지만, 누나는 귓가에서 속삭인다. 도망치지 말라고.

근사한 탈출은 어떻게 하는지도 모른다. 누나, 어떻게 도망치지 말라는 거야. 태정은 누나에게 질문한다. 하지만, 알고 있다. 자신은, 저 고토 녀석을 회피하고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코를 찌르는 냄새를 막아보기 위하여. 그리고 치솟는 질문은 꾸욱꾸욱 가라앉혔다. 희상과 경찰을 피했던 그날 밤, 녀석에게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던 것은 같은 이유였다.

키타무라…. 태정은 키타무라에 대한 생각을 한다. 주먹을 쓰면 안 되었다. 왜냐고 물어서도 안 되고. 키타무라는, 병원에 실려갔던 그는 혼수상태였다. 혼수상태로, 죽었다. 죽어버렸다.

태정은 머리를 흔들었다. 투욱 고토가 어깨를 밀치며 거실 안을 점령해 들어갔다. 태정은 녀석이 미는 대로 밀리고 그대로 거실을 내준다. 어지럽게 찍히는 발자국이 소파를 향했다.

털썩, 고토가 소파에 주저앉아 거만하게 기댄다. 그리고 다리를 뻗어 소파 앞의 탁자에 턱하니 발을 올려놓는다. 키타무라를 떠올리던 태정이 망연하게 녀석을 쳐다보자, 고토는 태정을 올려다본다.

“신발을 정 벗어야 한다면 네가 벗겨 보지 그래?”

탁자 위의 다리를 오락가락 좌우로 굴리듯 움직이면서 고토는 태정을 빤히 응시하고 있다. 고토는 탁자에 올려놓았던 빨간색의 헬멧이 귀찮다는 듯 발로 치워 버렸다. 헬멧은 그 위에서 굴러 떨어져 내려 반 바퀴를 구른다. 헬멧을 보다가, 태정은 또 시선을 돌려, 꿈지럭거리는 고토의 다리를 보면서, 그곳으로 무겁게 댓 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비겁해!! 네 녀석은 비겁하다고. 윙―어떤 벌레가 머릿속에 든 것처럼 멍하게 울리는 머릿속에서 경무의 음성이 호통을 친다.

‘비겁한 자식―!’

‘그만해.’

경무더러 그만하라고, 태정은 머리를 한 번 털어낸다. 걸음을 옮긴 태정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고토의 정면에 서서 등을 구부린다. 왼 손으로 녀석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린다. 왼손으로 검은 구두를 발꿈치부터 벗겨낸다. 구두와 같은 색의 양말이 드러났다. 그리고 태정은 다시 완만하게 등을 굽혀 구두와 다리를 탁자에 내려놓는다. 이어 나머지 발을 들어 올린다.

“역시 기대대로야, 넌…. 묻지도 않고 시키는 대로 하고 있잖아.”

“내가 물어야 하는 건가?”

태정은 고토의 한 발을 든 채로 묻는다. 묻고, 다시 고토의 발에 신겨진 윤나는 검은색의 그것에 손을 댄다.

“하하, 이봐 너, 물어야 하는 건지, 아닌 건지도 모르는 거야?”

이미 흙발로 이 집에 들어 선 녀석에게, 뭔가 물어야 할 의미는 말소된다. 녀석은 그만의 당위성을 갖추고 당당하게 여기, 그런 형태로 이곳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엉뚱한 당위성을 설파하고 싶어하는 녀석에겐 물어 보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였다. 하지만, 합리 이전에 태정은 질문을 포기했다. 아니, 하지 않기로 그렇게 정했다.

이제는 신을 벗은 두 다리를 탁자 위에 올린 고토는 배를 잡고 낄낄 웃는다. 웃음소리, 그와 동시에 또, 태정에게 속삭이는 음성이 있었다.

왜 포기한 거야? 포기가 아니라고 부정했음에도 금세 희상은 태정을 다그친다. 외부의 말들에는 신경을 거두고 있었는데, 그들의 말이 들려오고 있다. 띠잉―하고 울리는 머리가 오히려 그들의 산만한 울림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누나의, 경무의, 희상의 그리고 누군가의.

“묻지 않아.”

고토의 웃음이 잦아 들 무렵 태정이 간단히 대답한다. 하지만, 대답은 건성이다. 태정은 울려오는 머릿속의 속삭임과 대화하고 있었다.

“하긴, 네 녀석, 너무 주제넘었거든. 이봐 뭘 말하는지 알아?”

탕―하는 충격에 태정은 무릎에 통증을 느꼈다. 고토가 발로 테이블 가장자리를 세게 디밀었고, 디밀어진 테이블은 태정의 정강이를 받고 있었다.

“이봐, 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고토가 자신의 말에 집중을 요구한다. 정강이에 맞물린 테이블을 타고 건너편의 고토가 계속 다리로 테이블에 압박을 가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고토, 난 이봐가 아니야. 난 조태정이고, 주제라면 그게 내 주제겠지.”

넘을 주제도 모자랄 주제도 없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동어 반복적인 이야기지만, 녀석에겐 그렇게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조,태,전,이라…. 좋아. 그렇다면 조…, 인가? 뭐, 이봐가 됐든 조가 되었든, 마찬가지라구. 조―. 나는 요구하고 명령하고, 너는 그걸 받아 들여야 하는 신분이잖아. 그렇지?”

신분. 주제…. 곳곳에서 숨어 있는 계급주의자를 어디에서든 찾아 볼 수 있다―고토는 숨지도 않고 나서서 그것을 자처하고 있었고.

“그리고 너의 그것은 감히 빨아서도 안 된다 라는 거겠지.”

“이제 좀 주제를 아는 건가? 하하하.”

신분과 주제가 태정에 의해 재확인 되자 고토가 만족스런 웃음을 나직이 쏟는다.

“하하… 내가 그렇게 말한 게 섭섭한 건가? 키키킥… 사실은 네 녀석의 서비스 아주 좋았었어. 내가 말하지 않았나? 넌 흥분을 돕는 녀석이라고 응? 조―.”

욱씬―뒷골을 무언가가 당긴다. 태정은 무심코 뒷목을 주물렀다. 목에 열이 있었다.

처음부터 잘했어야지. 엉? 열이 오른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태정을 비난하는 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매번 입을 다물고 있기만 했다. 태정은 그제야 머릿속의 그에게 묻는다. 무디게 견딜 필요는 없었나. 그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인가.

고토 녀석은 흥분의 대상을 찾고 있었다. 배지를 찾고, 싸움을 찾고, 사타구니의 위로를 찾아서…. 그리고 녀석의 흥분을 태정이 채워주었다. 그리고 녀석은 아직도 계속 찾고 있다.

“언제든 도울 수 있어. 그런 서비스라면 얼마든지.”

돌이킬 수는 없다. 도망칠 수도 없고. 요령 좋은 인간 같은 건 되는 방법을 모른다. 처음부터 잘 할 수 있을 리 있었겠는가. 처음부터란 건 저 녀석이 흥분을 느낄 새도 없이 라는, 그런 의미였을 텐데.

“푸하하하, 이건 기대이상인걸. 감히 빨았냐는 소릴 들어서 그런 건가? 그래서, 이젠 빨고 싶어졌다…뭐 그런 거 아니냐구. 응?”

고토는 아주 즐겁게, 태정의 의사가 무엇인지 그 본인을 대신해, 늘어놓는다.

‘그리고, 평생 기어 다녀.’

고토에 조롱에 이어, 어딘가의 경무가 저주를 한다. 말을 할 땐 크게 하고 필요할 땐 주먹을 뻗어야 한다구. 그렇지 않으면…, 이라며 녀석이 화를 낸다. 그래, 그렇지 않으면 기어다닐 거라고 했나. 하지만, 주먹을 쓰지는 않아. 손바닥을 펼 수밖에 없는 상황도 있는 거라고. 안 그래? 시끄럽게 뒷골에서 소리치던 경무를 상대하며 태정은 손바닥을 편다.

“네가 화해를 말했으니, 나도 내 화해를 말하는 거지.”

양 손바닥을 펴 보이며 고토에게 화해를 청한다.

“하하하 이거 색다른 화해인데 그래?”

고토는 웃으면서 태정이 의미하는 화해를 받아들인다. 테이블을 뒤로 밀면서 다리를 내리고, 내린 다리를 태정을 향해 벌리는 것으로 화해의 접수를 알렸다. 녀석이 목덜미를 무는 것으로 독특한 화해의 제스처를 보였던 것처럼, 태정 역시 그러하기를―몸짓을 보이기를―기다리는 것이다.

태정은 성큼 테이블을 넘어서서 고토의 앞에 선다. 자세를 낮춰 무릎을 하나씩 땅바닥에 대고 앉는다. 녀석의 태도는 서비스를 한껏 기대하고 있는 그것이었다. 편안하게 소파의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예의 그 오만한 표정으로 굽어본다. 그리고 태정은, 무릎을 꿇고 있다.

‘구조를 전복시켜.’

구조―또 구조의 문제이다. 희상이 들고 나온 문제는.

이 고토 마사키가 두 무릎을 꿇게 된다면 구조가 바뀌는 거니…, 희상아?

희상에게 물으며, 태정은 무릎을 꿇은 채로 고토가 좌악 다리 벌린 사이로 바싹 다가가 그의 바지 버클에 손을 뻗었다. 지퍼를 내리고, 브리프와 함께 끌어내리자, 녀석이 허리를 들어 올린다. 침을 삼키면서, 고토는 태정의 화해 작업을 돕는다. 화해는 매우 성적으로 이루어진다. 목을 물었던 고토의 화해가 상당히 성적인 뉘앙스를 띄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태정은 고토의 하의를 발목까지 잡아 내리고 그것을 녀석으로부터 완전히 분리 시켜 떼어놓는다. 그리고 녀석은 성적인 화해를 위해 반라가 되는 것에 아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한쪽 눈썹만을 올리며 의아함을 표하는 것 외엔.

디잉―디잉―흔들리는 머리의 통증을 가다듬고, 태정은 고토를, 녀석의 다리를, 응시했다. 고토의 허벅지 근육이 뻗어 나가고 들어오는 교차점을 알리듯 벌린 다이 사이에는 체모가 무성하게 나있다. 녀석의 눈 색깔을 띠는 암갈색의 수풀을 헤집고 태정은 고토를 뿌리부터 거머쥔다.

고토의 화해는 성적이었고, 또 적대적이었다. 목에서 피가 묻어나올 만큼.

태정은 녀석의 중심을―힘이 없이 시들어 있는 그것을―비틀어 눌렀다. 태정의 화해 역시 고토를 닮는다. 성적이고, 그리고 적대적이다.

“이 자식 뭐 하는 거야. 아앗 아프잖아.”

고토가 새되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낸다. 태정은 손가락 사이로 녀석의 살점이 비어져 나올 만큼 꽈악 손아귀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퍼억―뭐하는 거냐고 고토가 태정의 얼굴을 가격한다. 그럼에도 태정은, 녀석에게 가한 손의 압력을 풀지 않는다.

‘구조를 바꿔 버려.’

희상이 태정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뺨을 치댄 고토의 주먹이 머리의 둔통을 증가시킨다. 야, 너 내 말 안 들려? 고토가 무어라 하지만, 그 말은 둔통으로 희미하게 울릴 뿐이다.

뚜렷한 건 머릿속의 말이었다. 그들의 말들. 계속 외면했었다. 줄곧 막아 왔었다. 도망치지 말아 태정아. 기어 다니지 그러냐, 평생. 폭포수처럼 그들의 말, 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네 탓이라구. 네 탓.

아아. 그만해 알아, 알겠어…. 태정은 그들에게 대답을 한다. 그들이 원하는 대답은 여전히 몰랐지만. 태정은, 눈에 들어오는 붉은 헬멧을 집어 들었다. 일어나서 보니, 소파에 앉아 태정에게 열심히 지껄이는 저 반라의 녀석은 상당히 우스꽝스럽다. 쿠쿡…. 목구멍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빡―.

빠악―.

빠각―.

고토 녀석이 우습게 보이는가 싶더니 태정은 헬멧으로 그 우스운 녀석의 머리를 내리치고 있었다. 세 번. 이 정도로는 별일 없을 것이었다. 난사하는 주먹도 아니었고 고작 플라스틱 헬멧이었다. 세 번 정도로 힘없이 부서지는. 고토가 머리를 붙들고 거실 바닥에 쓰러졌다.

녀석에게 주먹을 쓸 수는 없었다. 키타무라. 또 키타무라 얘기다. 하마다 관장이 아니었다면 태정은 아주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역시 태정은 곤란해지고 싶지 않았다. 네가 곤란해지는 일은 없을 거야. 그때, 하마다 관장이 말했었지. 관장의 말대로 태정은 책임을 면할 수 있었다. 키타무라가 혼수상태 그대로 죽었건만.

소파 앞에 쓰러졌던 고토는, 진탕된 머리를 흔들면서 충격에서 회복을 꾀하려고 한다.

‘조, 널 곤란하게 만들지 않아.’ 관장이 말하고 있다.

태정은 고토의 머리카락을 틀어쥐었다. 녀석의 짧은 뒷머리는 손에 감아쥐기 딱 알맞았다. 아주 억세게 틀어쥐지 않으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니까 말이다. 태정은 고토의 머리를 강하게 잡아 당겨야 했다.

뒷머리를 잡힌 고토는 팔을 뒤로 휘둘렀다.

퍽―.

팔꿈치로 태정을 공격하지만, 공격에 중심이 잡혀 있지 못했다.

“너 이 자식, 이거 못 놔?!! 못 놔?!!”

자신의 공격이 유효하지 못함을 알고 고토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만, 콰앙―태정은 녀석의 머리를 테이블에 처박는 것으로 항의를 차단시켰다. 구조의 변혁에서 반항의 몸짓과, 반항의 언어는 무시당한다.

‘구조는 쉽게 전복되지 않아.’

희상이 나지막이 태정을 일깨운다. 태정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폭력을 이용하는 것도 희상이 원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기다릴 수 없다. 누구보다도 초조하고 조급해 했던 건 태정인지도 모른다.

* * *

굉장히 쉬운 거였다. 구조의 전복이라는 것―아니, 고작 이것으로 구조를 말할 수는 없다―그럼 위치의 역전이라고 할까. 위가 아래가 되고 아래가 위가 되는 것 말이다. 이렇게 쉬운 것이었다니. 고토의 얼굴을 두 번 마룻바닥에 박고, 엎어진 녀석의 등을 콰악―발로 내리쳐 바닥에 배가 붙도록 만든다―녀석의 배가 바닥에서 한 번 튕긴다. 고토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태정은 녀석의 등에 올라 그 형태를 고정시킨다. 고토는 태정의 다리 사이에 깔려 평평한 지반이 되어버린다.

“미쳤냐…, 너? 갑자기 미쳤냐구 엉?”

태정에게 눌린 고토가 숨을 힘겹게 후우, 후우 내쉬었다. 가슴과 복부의 힘든 호흡을, 느리게 들썩이는 녀석의 등을, 녀석을 깔고 있는 허벅지로 느낄 수 있었다.

“미친 건, 고토 너 아니었나.”

태정은 멀쩡했다. 머리에 조금 열이 있고, 주변의, ‘그들’의 말이 계속 뒷머리를 울려 욱신거리긴 했지만 괜찮다. 미쳤냐는, 그런 소릴 들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 때. 만큼은 결코 아니었다.

미쳤냐고 했지. 내일의 조가 아니라 미친 조라고. 키타무라가 체육관에 나올 수 없는 상태임을 알았을 때, 관원들은 태정을 보며 수군거렸다. 태정은 고개를 젓는다. 지금 그렇게 주먹을 날리지는 않는다. 고개 저으며 태정은 그 아래 엎어져 있는 녀석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가까스로 얼굴을 비틀어 뺨을 바닥에 붙이고 있는 고토가 잇새로 경고하고 있었다. 그만 두라고. 지금 그만 두면 용서를 해주겠다고.

용서라…. 용서는 엎드려 있는 사람이 비는 것이다.

위치가 전도되어 녀석을 위에서 내려다보자, 태정은 다리 밑에 깔려 있는 이 녀석이 상당히 나약해 보이고 하찮게 보였다. 그리고 이 나약하고 하찮은 인간 위에 올라 있는 태정, 그 자신은 매우 거대하게 느껴진다.

고토, 네가 느꼈던 우월감은 이런 것이었나? 그리고…,

이게 네가 느꼈던 그 흥분인가 말이다.

녀석은 싸움으로 인한 고상한 흥분을 말했었다. 이봐, 고토 지금도 그런 고상한 흥분을 느끼고 있나? 응? 내가 느끼는 것처럼 말야….

태정은, 고토가 말했던 그런 종류의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마치 녀석에게서 전이된 것처럼.

미친 것일 수도 있다. 고토 녀석만큼은 말이다. 고토는 그 성질답게 계속 으르렁대고 있었다. 태정은 녀석의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아 비딱한 얼굴을 바르게―고토가 바닥을 볼 수 있도록―돌려놓는다. 그대로 녀석의 뒤통수를 내리 누르자, 녀석의 항의는 점점 알 수 없이 변해 갔다. 입이 눌리고 코가 눌릴 것이다. 절대 태정을 볼 수는 없다. 태정은 녀석의 머리를 누른 채로, 몸을 굽혀 녀석의 목으로 얼굴을 가져갔다.

“이게 네 화해라고 했지.”

콰악―태정은 고토의 뒷목을 한입 베어 물었다. 므으으―바닥으로 입이 막혔을 고토의 신음이 둔하게 들려왔다. 고토의 목은 상당히 매끄럽고 탄력적이었다. 입을 떼자, 녀석의 목에 남아 있는 태정의 이빨자국이 선명했다. 태정은 고토의 화해가 주었던 매우 성적인 느낌을 상기한다. 흥분은 거세진다. 그리고 태정은 교복 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그의 페니스가 속박에서 빠르게 벗어나고 싶어하고 있었다. 태정은 놀랐다. 그 욕망이 상당히 거셌던 것이다.

모든 것은 이 녀석이 알려 주었다. 흥분의 이유. 흥분의 대상. 흥분의 방법.

성적일 수 없는 대상에게 성적 흥분이―발기가―가능하고

성적 행위가―성교가―가능하다는 것

그건 고토가 보여주었던 것이다.

태정은 고토를 눌러 내렸던 허리를 들고 일어난다. 태정의 압력이 조금 풀어지자, 고토가 일어나 앉으려 재빠른 몸을 움직였다. 안 돼, 안 돼. 그러면 반칙이라고. 클럽에서의 룰은 고토를 따르지만, 이곳에서의 룰은 태정을 따르는 것이다. 태정은 쥐고 있는 고토의 머리를 다시 힘껏 눌러내렸다. 그 힘이 상당히 거세 태정은 두 손으로 고토의 양쪽 귓가를 보듬어 쥐고 퍼억 퍼억 퍼억 바닥으로 패대기를 쳤다.

“그만해 고토, 나도 이러고 싶지 않다고.”

태정은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비틀어 이마를 바닥에 박고 있는 고토를 가까이에서 본다. 이마에 피가 보이고 그것이 문대인 자국이 바닥에 붓질한 모양으로 보였다. 고토가 자신이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진 않다―아니 못 듣는 것일 수도.

태정은 더 이상 살피지 않고 그대로 녀석의 허리를 들어 올렸다. 고토의 흥분이 태정의 입을 찾았던 것처럼. 태정도 흥분을 받아줄―배설구를―찾는 것이다. 태정은 자신의 바지를 잡아내리자, 흥분으로 채워진 그것이 모습을 드러낸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태정의 흥분이 잘 알고 있다.

주먹을 어디 내뻗어야 하는지는 주먹이 아는 것처럼.

* * *

태정은 처음 샌드백을 쳤던 그 주먹을 기억한다. 주먹의 울림은 인상이 매우 선명했다. 그때 태정은 손목을 타고 흘렀던 상당한 압박에 꽤나 놀랐던 것 같다. 단지 주먹만이 샌드백을 받아내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주먹으로 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손목과 팔에까지 전해 오는 충격이 생각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라 눈이 크게 떠졌던 것이다.

경험과 상상의 차이는 그런 것이다.

고토의 뒤로 태정의 흥분을 끼워 넣는 것도 그런 느낌이었다. 충격과 반동을 예상하지만, 그건 짐작 이상으로 훨씬 컸다. 흥분한 태정은 목적한 지점을 두들겨 보지만, 저항으로 튕겨 나올 뿐이다. 꾸욱―저항을 무시하고 디밀어 보아도 제대로 받아들여지지―들어가지―않았다.

태정의 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고토가 뒤늦게 알았던 것 같다. 아마도 고토는, 현실성을 잃고 있는 듯 보였다. 당연했다. 그건 태정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고토는 태정이 끌어안은 팔 속에서 늘어진 허리를 수습해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태정이 고토의 안으로 손가락을 드세게 집어넣자 녀석이 허리를 들썩이며 비틀었다. 고토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는 매우 거칠었지만, 움직이고자 하는 대로 몸이 따라 주지 않는 듯 몸이 경직되어 있었다. 그 경직 때문에, 태정은 녀석의 몸속에 삽입시킨 손에 힘을 주어 크고 세게 휘저어 주어야 했다. 태정은 시행착오를 거쳐 예비 작업의 필요를 느꼈던 것이었다. 샌드백을 치고 난 후에 손목에 더 신경을 썼던 것처럼.

사전 준비는 전적으로 태정을 위한 것이었다. 태정은 길게 시간을 끌지 않았다. 흥분을 위한 길이 닦여지자 태정은 지체 없이 재 시도를 했다.

가벼운 주먹은 샌드백이 튕겨 내는 법이다. 하지만 깊숙이 쑤셔 박는 주먹의 충격은 깊이 흡수해 버린다. 콰악―허벅지와 허리에 힘을 실어 고토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자신을 꽂아 넣은 태정은 처음의 그 반동이 사라졌음을 감지했다. 꾸국 구국―삽입된 그것을 더 깊숙이 찔러 올리고 고토의 허리를 끌어 당겼다.

그것은 결코 즐거운 행위가 아니었다. 쾌감을 선사하는 남녀 사이의 그것과는 다른 것이다. 쾌락을 배제한 행위였고, 정치적인 행위였다. 태정은 녀석의 속에서 잔인하게 날뛰었다―정치적인 그것은 잔인할 수밖에 없다. 태정은 그 짓을 할 때 이렇게 잔인한 적이 없었다. 그 따위의 행위가 구조의 전복일 수 없었고, 원하는 형태일 수 없었다. 내게 무엇을 원하냐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를 누군가에게 물어도 때는 늦었다. 어느새 목소리는 사라져 있었다. 그들과 함께 사라졌던 것이다.

의미는 사라지고 행위만이 남는다.

고토와의 행위 속에 태정은 귀에 감아 도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예뻐 예뻐. 분명 고토 녀석을 향했을 말이 아닌 그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고토의 깊은 곳에 자신을 깊숙이 찔러 넣고 한 팔은 녀석의 머리카락을 바싹 틀어쥐고 허리를 흔들면서 내뱉었던 말은 예쁘다는 말이었다.

그것은 고조된 행위를 할 때의 태정의 입버릇이었다.

고토와의 행위는 확실히 섹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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