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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Till the Fat Lady Sings #10
경무는 자원해 모인 조고의 전투원들에게 각목이나 쇠파이프나 야구 방망이 등등 적당한 길이의 무기나 손에 맞는 병기를 지니고 와도 무방하다고 했다. 그 자신은 주먹보다 더 이상적인 무기는 없다고 호언하고 다니던 녀석이건만, 아무래도 머릿수부터 한참 뒤지고 있는 조고라 걱정이 되었을 터였다. 국사관에 비해 현격히 규모가 작고 숫자가 적은 조고였다. 그중 절반을 사뭇 웃도는 게 남학생이긴 했어도, 거기서 억지로 차출해 내는 것도 아닌 자진해 나선 녀석들이 경무를 흡족하게 할 만큼의 다수는 아니었다.
마흔하고도 둘이라는 숫자가 결코 적은 건 아니었지만, 삼펜 임원 전원 구인에, 경무가 이끌고 온 복싱 부원들을 몽땅 포함해 계수計數 한 것을 생각한다면 마흔하고도 둘밖에 안 되는 숫자는 경무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조고생 중 한 명도 빠짐없는 전체가 발기하리라고, 경무는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조고의 분위기는 일본의 경기 침체와 더불어, 그리고 새로이 도래한 보수적 경직이, 그들 자신을 스스로 욱죄는 결과를 낳았다.
비록 조고의 역사를 타고 내려오는 기상과 정신이 면면히 이어지고, 남아 있다 해도, 학생들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국사관을 꺾으라고, 국사관을 치라고, 삼펜의―경무의―결정을 응원을 하긴 했어도, 선뜻 나서지는 못했다.
“비겁한 자식들. 모두 겁쟁이들이라고.”
경무는, 삼펜의 행동에 힘을 보태지 않은 녀석들을 무조건 그런 식으로 싸잡아 몰아 욕했다.
“전임 회장이 그 모양이었으니까 지금 이렇잖아. 그 자식 영향이 이렇게 크게 남은 거라고.”
태정을 들먹이며 억지스런 이유까지 끌어들이면서 말이다.
“경무야, 그건 욕할 게 못 돼. 너랑 같이 하지 않는 건 잘못이 절대 아니라고. 사실, 이건 삼펜의 선에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어. 삼펜의 본래 의무와 목적을 생각해봐. 왜 조고 전체가 시끄러워져야 하는 건데. 왜 끌어들이냐고.”
배지의 강탈이, 조고의 명예와 긴한 관련이 있었지만, 그 명예와 조고, 조고의 구성원들을 위해 삼펜이 있는 것이다. 설혹, 다수를 동원한다해도 그것은 시위로써 그쳐야 했다. 무력 충돌이라니, 배지에서 튀긴 불똥은 대규모 전으로 확산되었다.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불똥을 봐도 아무렇지도 않은 녀석들에게―특히 경무에게―희상은 계속적으로 위험을 경고하기라도 해야 했다. 아무 말도 않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미 난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었지만.
가담한 이들의 희생이 눈에 뻔히 보이는 상황이었다. 희상의 오히려 수가 ‘대단히는 많지 않다’는 사실에 조금은 위안을 찾을 수 있었다―그렇다고 희상에겐 그 수가 결코 적지만도 않았다.
눈치를 보는 녀석들은 경무의 계획에 물을―분위기를―흐려놓았고, 원해서 나왔다해도, 결집한 녀석들 모두가 싸움에 동원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분명 싸움을 할 줄 아는 진짜배기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좋아 그렇다면 무기밖에 없지.”
저조한 인원수에 실망한 경무는, 결국 이판사판으로 무기의 휴대 가능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이었다.
무기는 절대 안 된다고, 희상은 강력하게 반대했다.
“인원이 너무 적다구우…. 이번 일 만큼은 내 맘대로 할 거야. 희상이 넌 좀 제발 빠져 있어어.”
희상이 이번 일에서 거리를 두도록, 경무는 짜증 섞인 어조로 뒷말을 질질 늘이며 말했다. 경무에게 희상은, 물을 흐리는 인간들 중 하나였다.
그래도 안 돼. 네가 그렇게 무기를 고집하겠다면 난 너랑 행동하지 않아. 그리고 모인 녀석들도 설득해서 돌려보낼 거라고.
어디 그렇게 해보라고, 경무 녀석은 뻗대었다. 희상의 말을 심각하게 듣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희상은, 곧 있을 ‘대결투’의 개시로 기대에 차 있을 녀석에게, 더 없이 야비하게 들리는 말을 해야 했다.
“좋아. 정 그렇다면, 경찰에 알리겠어.”
경찰이라는 말에 경무는 얼굴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리면서, 머리는 간지러운 듯 벅벅 긁었다. 경찰에 알리면 우리가 훨씬 불리해지는 거 알지 않느냐며, 그러지 말라고, 한다. 희상의 대답이 없자, 녀석, 표정을 누그러뜨리면서, 그저, 녀석들한테 위협적인 인상을 주기 위한 소도구라고, 이번엔 희상을 회유하려는 시도까지 했다. 그래도 희상은, 경무에게 고개를 저었다.
“리희상, 진짜 너 끝까지 이럴 거야? 엉?”
“그래도 할 수 없어. 상황이 더 악화될 걸 방지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고. 무기는 어쨌든 절대 안 돼, 경무야.”
희상은 그렇게 무기 보이콧 의사를 완강하게 고집했다. 결국 경무는 손을 들었고, 매우 못마땅함을 표시하면서―주변의 쓰레기통을 콰앙 쾅! 차대는 걸로―무기 휴대령을 철회하고 말았다.
그리고 경무는 빈손의 조고생, 마흔하고도 둘을 이끌고 세타가야 구립 소학교로 향했다.
* * *
세타가야 구립 소학교 앞 운동장.
여러 모로 보나 국사관과 조고에서 등거리에 위치한 이 소학교는 꽤나 적당한 장소였다. 경무 놈이 별 생각 없이 일방적으로 결정했는데도 불구하고 다수가 모이기에도, 그리고 쌍방 모두 알고 쉽게 찾아 올 수 있는 편의를 제공한다. ―지난번의 그 클럽은 쓸데없이 길 찾는데 힘을 소모하게 했었다. 경무는 저에게 결정권이 있음에도 이쪽의 홈그라운드를 택하거나, 어떤 이점이 있는 곳을 찾아 고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운동장은 대규모의 백병전이나 접근전―바꿔 말하자면 단순히 엎치락뒤치락이 될 패싸움―을 위해서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시커먼 사내 녀석들이 무리를 지어 도달하자 그곳은 운동장이 아니라 이미 전쟁터였다. 분위기를 돋우는 조명이나, 음악 같은 건 필요 없다. 조고들이 가벼운 운동복 차림으로 의상을 통일 했는데 반해 저쪽 국사관은 검정색의 교복 차림이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늦은 밤의 어두움에 감싸여 조고는, 국사관 녀석들의 전력 파악에 어려움을 겪었다.
“저 녀석들 까마귀 떼같이, 뭐야, 잘 안 보이잖아. 한 백 명 되냐, 희상아?”
“백 명은 넘는 것 같지만 아직 다 오지 않았잖아?”
백 명 정도라면 그럭저럭 어떻게 해볼 수 있겠지만―조고의 기백과 정신으로라는 경무의 심산이다―국사관은 아직도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속속 당도하고 있었다. 정한 시각이 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다. 이미 운동장 한쪽을 압도적으로 점하고 있는 국사관의 세를 계속 불리는 중이었다. 그 규모도 규모이지만, 눈에 띄는 건 몇몇 녀석들이 손에 들고 있고, 몇몇은 들고 오는 것이었다.
“저것 봐 리희상. 녀석들, 무장하고 있잖아. 제기랄, 내 말대로 해서 나쁠 거 없었다고. 희상이 네가 저 막대기를 맨손으로 막아낼 수 있냐고? 엉?”
경무가 생각했던 무기 휴대를 저쪽 역시 생각하지 말란 법은 없었다. 모두 다는 아니었지만, 반수 정도가 목검을―경무가 말한 막대기를―들고 있었다. 입고 있는 의상과 함께 목검이라는, 무기답지 않은 무기는 그들을 통일시켜 주었고, 그런 국사관은, 매우 잘 통제되어 보였다. 게다가 목검은 학생복에 어울리는, 지극히 학생다운 소품이었다. 특히나 국사관이 자체적으로 실시하는 훈련 교과에, 검도 교육이 포함되는 것을 생각할 때, 그들이 지닌 목검은 그것에 대고 ‘무기’라는 말을 하는 것을 주저하게끔 만들었다.
희상은, 괜찮다고, 저 녀석들이야말로 시위용일 거라고, 말을 했지만, 경무는 물론 믿지 않았다―희상을 설득할 때 무기 휴대가 위협용이라고 했던 녀석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가져 왔다는 건 상대더러 각오하라는 소리라고. 미쳤다고 쓰지도 않을 걸 거추장스럽게 손에 들고 오겠냐. 어쩔 거야, 우린 대가리 수도 적은데. 이번엔 기필코 녀석들에게 쓴맛을 보여줘야 했단 말야.”
쓴맛을, 「보여줘야 ‘한다’」가 아니라, 「보여줘야 ‘했다’」라고 경무는 말한다. 무의식적인 그런 한 마디에서 희상은, 경무가 이번 결투가 그리 잘 풀리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희상 또한 마찬가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그것이 실전에 쓰일 것임을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녀석들이 저걸 들고 있다는 건 우리 쪽이 옳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는 거야. 우린 정의롭고, 정당해.”
“난 가끔 네 녀석 입을 그냥 비틀어버렸으면 좋겠어. 그거 아냐? 응?”
경무는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성질을 참고 있다는 듯, 희상의 입에 경고를 주듯 검지를 들어 세워, 그만 하라는 사인을 보낸다. 그러곤 한숨을 쉰다.
“왜 모르는 거지? 너도 태정이 자식도, 정의는 승리하는 쪽이 세우는 거잖아. 역사는 이긴 자가 쓰는 거라며. 똑똑한 녀석이라면 그런 건 알고 있을 거 아냐.”
“난 투쟁을 부정하는 게 아니야. 나도 이기길 바란다고…. 그저, 장애물이 커 보인다고 대뜸 그걸 힘으로 부수려고 하면 안 된다는 거지. 부수는 사람도 다치지 않겠어.”
“그만하자. 내가 입으로 널 어떻게 이기겠냐.”
경무는 안 되겠다는 듯, 먼저 입을 다물며 이야기를 끝내 버렸다. 정의나 정당성 같은 건 경무에게 별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다들 성공을 위해서라면, 승리를 위해서라면, 성급하고 조급해했다. 힘이 중요하고, 숫자가 중요하다.
“쥬―, 니쥬―, 산쥬―….”
경무가 운동장 너머의 국사관 녀석들 쪽으로 고개를 빼서는 그쪽의 머릿수를 십 단위로 어림하여 계산하고 있었다. 정신 팔린 듯 경무가 웅얼거리는 숫자는 ‘와고和語:일본어’, 학교에서는 ‘국어’와 ‘와고’를 완전히 분리해서 사용하게끔 권장, 지도 하지만, 주의를 기울여도 숫자에서는 그 분리가 철저해지지 못했다. 그건 그들의 생활이었으니까.
경무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며 뭉텅이로 저편의 녀석들을 나눠, 셈을 계속 하면서, 물었다.
“태정이는 뭐래냐? 온대?
희상이 어떻게 답을 할까 고민하는데, 경무가 던진 질문에 스스로 답을 낸다.
“안 온대지? 아니, 못 올 거다. 올 거면 진작 왔겠지.”
알았어, 생각해 볼게…, 라고 했었다. 희상은 태정과의 통화를 떠올렸다. 분명 태정이 녀석, 그렇게 말했는데 생각의 끝은 결국 불참이었나. 지금까지 오지 않았으니…, 희상은, 그렇게 기대를 슬슬 접어야 할 듯 했다.
“그래도 와서 좀 머릿수를 늘려 주기라도 하는 게 전임 회장의 도리 아냐.”
경무 녀석은, 계속 머릿수 타령이었다. ‘태정더러 오라고 전하라’고 했던 건, 설마 조고의 빈약한 전력을 계산해서였던 건 아니었겠지. 희상은 잠시, ‘잔머리 같은 건 굴리지 못하는 녀석’을 의심했다. ‘태정이 녀석, 그렇게 내버려두면 안 되겠다고,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하면서 태정에게 연락을 해보라고 말을 바꾸었던 경무였다. ‘그때 진 게 미안하면, 그런 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녀석더러 나오라고 해’ 이렇게 태정에게 할 말을 알려주었다. 그것을, ‘한심하다, 태정을 포기했다’고 그랬던 걸 철회하는 것이라고 희상은 그렇게 이해했다. 입은 거칠고, 행동은 사나와도, 결국 경무는 모진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게 희상의 견해였다.
“그래도 싸움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뭐야, 저 녀석 귀신이야?”
‘시작되기 전까지는 모르는 일이다’라고 태정의 동참 가능성을 그래도 버리지 않으려는 희상의 말을 끊으면서, 갑자기 경무가 귀신 이야길 한다. 뜬금없는 소릴 하는 경무 녀석을 따라 희상은 시선을 이동한다. 저기 봐 저기, 저기 누구야, 뭐야 뭐야, 어어 왔네. 야 왔어 왔어. 누구 말야. 싸움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던 조고들의 나직한 웅성거림은, 경무의 목소리와 때를 같이하여 한층 소란을 더하고 있었다.
태정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자, 때 맞춰 나타나는 귀신은 태정이였던 것이다. 희상 주위에 하나로 모인 무리들이 유니폼으로 입고 있는, 조고의 하늘색―기실 조고생조차 촌스럽다 하는 색깔의―운동복을 입고 걸어오는 태정은, 이곳을 완전히 내리 덮고 있는 어둠에서 희미한 발광과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검은색 일생의 국사관들만이 속속 도착하는 가운데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조고 지원병들의 작지 않은 수군거림이 희상에게 들려왔다.
조 회장이잖아―그들은 태정을 알아본다. 정학 중인데 왔네, 그러게, 국사관 회장이랑 싸웠다며―태정의 상황에 대해 주고받는다. 결투서 졌다지?, 그걸 지면 어떻게 하냐―태정에게 대한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정작 본인은 어떻겠냐?, 무슨 생각으로 온 거지―태정의 속을 궁금해한다.
그러나 화제의 주인공이 다가오자 쉴 새 없이 오고가던 이야기들은, 산발적인 것으로 변하면서, 희상이 태정을 맞이하자 그것은 완전히 잦아들었다.
“야아, 왔구나.”
응, 하고 태정은 고개를 짧게 끄덕였고 희상은, 그런 녀석에게 활짝 웃으면서, 탕탕, 팔을 올려 등짝을 힘차게 두드렸다. 희상의 옆 한자리를 차지하던 경무가 그런 둘을 주시하고 있었다.
“오늘은 봐주면 안 된다.”
의외로, 경무는 태정의 어색할 입장―녀석이 그리 느끼는가는 별개였지만―을 배려하는 듯한 말을 던졌다. 지나간 패배는 져. 준. 것. 인 고로 무게 두지 않겠다, 는 그런 뜻일까. 물론 경무는 염두에 배려의 뜻을 두고 말하지는 않는다. 녀석의 표정은, 오늘 잘해 그렇지 않으면… 하는 인상으로 태정을 향해 팍―구겨져 있었다.
어떤 뜻이든 간에, 경무의 그 한마디로 태정의 합류가 인정되고 태정은 무리의 하나가 되었다.
“어떻게…, 생각을 바꾼 거야?”
희상은 태정의 결정이 무엇에서 연유한 것인지 궁금했다. 글쎄. 태정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다 뭔가에 희미한 미소를 띠면서, 녀석은, 남의 질문에, 충분한 한 박자를 쉬고 대답한다.
“굉장한 미인이 ‘가라’고 했거든.”
“뭐?”
“뭐―어?”
귀를 세우고 있었던 건지 경무가, 희상과 같이 아주 강한, 의문―의심―을 표했다.
“미인이라고? 굉장한 미인? 푸하 꿈이라도 꿨냐?”
경무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하며, 태정의 말을 비꼬며 현실성을 부인했다. 그래서 그 굉∼장한 미녀가 또 뭐래냐? 우리가 이긴다는 소리는 안 하더냐며, 경무의 비아냥이 계속 이어졌다. 태정이 녀석 가끔, 해석이 필요한 말을 전혀 설명 없이, 수수께끼처럼 할 때가 있었다. 희상은 일종의 농담으로 보았지만, 지금처럼 농담할 시기가 아닐 때까지 튀어나온다. 하지만, 녀석 태도를 보면 그다지 장난스럽지도 않다. 싱거운 듯 어려웠다. 녀석의 말도. 녀석도.
“맞아, 꿈이야.”
경무의 말을 태정이 그대로 긍정하며 웃어넘기자, 경무는 그런 녀석을 보면서, 쳇, 혀로 입천장을 차며 힘없이 도리질을 했다. 태정을 놀리던 흥이 깨졌나 보다.
“어, 회장, 좀 늦었네요. 왜 따로 옵니까?”
무리 중에 태정을 아는 척하며 나서는 녀석이 있다. 김영일이었다. 아, 저 녀석도 있었구나. 희상은 그제야 김영일을 인지했다. 처음 보았을 땐, 국사관 녀석들이 배지를 빼앗을 상대로 낙점한 것이 당연하다…, 싶게 생각되었던 녀석이었다. 고교 2년생이, 상당한 동안에 아직 발육이 덜 끝난 것처럼 꽤나 작은 녀석이었다. 어, 너도 있었구나, 라며 영일을 반가워하며 태정은 악수를 청한다.
“어이, 전.임.회.장. 한가하게 그럴 시간이 없어. 국사관 녀석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행동에 들어갔어. 움직이고 있잖아.”
경무가, 조금은 성급하게 둘의 악수를 갈라놓는다. 태정에 대한 김영일의 호칭을 정정하는 경무가, 괜히 국사관 녀석들을 들먹이는 가 했더니 그런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무질서한 집합체로써 뭉쳐 있던 국사관이 꿈틀거리면서, 횡으로 퍼지고 있었다. 거대하게 뭉친 검은 유기체는 몸을 옆으로 늘이면서, 원시적인 전투 대열을 형성하기 위해 스산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였다.
“모두 여기 주목해, 전열을 가다듬는다!!”
태정으로 인해 약간, 주의가 분산됐던 조고는, 운동장 건너 국사관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긴장하고 있었고, 경무의 외침으로 긴장은 대번에 증폭됐다. 9시 정각에서 딱 5분을 지나 있었고, 끊어질 듯 이어졌던 국사관의 행렬은 어느 새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대충 이백 명 정도인가….”
길게 늘어선 녀석들은, 숫자의 파악과 카운트가 좀 더 용이해진다. 경무의 지시에 따라 조고의 용사! 들도, 숨 가쁘게 움직이고, 희상과 함께 보조를 맞추던 태정이 상대의 병력을 파악했다.
“장래 헤비급 복서의 주먹을 보여주지.”
국사관의 움직임을 주시하던 경무가 그의 포부를 밝히면서 녀석들을 향해 중얼거렸다.
“너 정도면 라이트 헤비야. 헤비라면 백구십에 백이라구.”
역시 상대의 동태에 주의하던 태정이 경무를 슬쩍 쳐다보며―체격을 가늠하는 듯―그리고 경무의 원대한 꿈에 코멘트를 달았다. 희상은 가끔 권투에 대해 던졌던 태정의 말들이 꽤 자연스러웠다는 걸 기억해내고 그것은, 그가 확실히 권투를 했었던 녀석이라는 걸 실감케 만든다. 헤비급의 이상적 체격은 키 백구십에 몸무게 백 키로. 또래들보다, 웬만한 장정들보다도 키나 체격이 월등한 경무 역시 헤비급엔 기준 미달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경무는 헤비급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었다. 국사관 녀석들을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에도 바뀔 건 없었다.
“라이트 헤비? 조태정, 지금 나더러 헤비급 떨거지들이나 하는 걸 하라는 거냐? 헤비급은 복싱의 꽃!, 복싱의 진수라고. 다른 체급은 시시해.”
“그러면 황창수 선수는? 황 선수는 페더급이잖아.”
희상은, 경무의 주의를 바꾸기 위해 살짝 물어본다.
“뭐, 황 선배?”
질문에 경무가 당황을 했다. 녀석, 어떻게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모르면서 난감해한다. 곤혹스런 경무를 보면서, 이럴 때는 귀여운 녀석인데… 라고 희상은 속으로 웃는다. 다른 체급이 시시하다는 자신의 말이, 페더급인―하지만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인―황창수 선수를 모욕한 것인지를 아닌지를 헷갈려 하는 것이다.
“음, 그거랑은 달라. 아무튼 황 선배는 다르다고.”
여전히 결론을 내지 못하겠는 듯, 고개를 재차 내저으며 틀리다는 말만 반복하던 경무는 지금 이런 소릴 할 때가 아니라고 희상에게 괜한 신경질을 부리면서, 다시 전방의 국사관 놈들을 노려보았다.
어느 새 국사관은 변형을 끝내고 그 모습을 상대에게 소리 없이 과시하고 있었다. 긴, 커다란 뱀이 몸을 쭉 편 것처럼 도열한 국사관의 이백 여명은 이제 운동장 건너편에서 어떤 요동도 없는 하나가 되어, 조용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어두움이 더욱 고요하게 가라앉는 듯 했다. 빽빽이 늘어선 국사관에 비해 늘어선 조고의 대열은 듬성듬성 하다. 하지만, 불리한 점을 보기보다는 조금이라도 가능성과 희망을 보는 것이 낫다. 블레이저의 교복을 입은 상대에 비한다면 운동복 쪽의 조고가 훨씬 가벼워 보이고 기동성 있게 보인다고 희상은 이내 유리한 점을 포착한다. 그런 날랜 모습으로―체커가 들려지면 바로 뛰쳐나갈 경주용 카의 기세로―조고는 숨을 죽이고 경무의 지시를 기다린다. 가라앉은 어둠은 소리를 삼킨 듯 국사관과 조고 두 진영이 양분한 운동장에는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 희상은 기미가요君が代를 들었다.
때때로 은근하게, 그리고 희미하게 희상의 귀를 맴돌았던 기미가요가 공교롭게 바로 지금 시작되는 것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소리는 가느다랗고, 그것의 발원지는 저기 어딘가, 시야로 확인할 수 없는 미지의 먼 곳인 듯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것은, 뚜렷하고 커다란 소리로 변해 처음부터 다시 희상의 귀를 울렸다. 우렁찬 합창이 된 그것은 또한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국사관 녀석들이 입을 모아 기미가요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백여 명―무려 이백여 명이었다!―의 소리는 운동장을 진동시킬 만큼 크고, 강했다. 희상의 불분명한 환청은 명료한 현실의 소리에 의해 단번에 사라졌다. 그것을 과연 듣긴 들었는지를 의심할 만큼 신속하게. 노래를 하는 저편의 녀석들은 주먹을 쥐고―혹은 목검을 쳐들어―그것을 박자에 맞춰 흔들었다.
무엇을 의미하는 건가. 환청을 듣고 그것은 현실에서 이어진다. 희상이 애써 억눌렀던 불안감은 목구멍을 치밀고 밖으로까지 뛰쳐나오려 했다. 태정은 그저 병을 앓는 것이라고 했었다. 잘 떨어지지 않는 감기 같은 건지도 모른다. 가끔은 친근하게까지 느껴졌던 환청이었다. 소리는 사라졌음에도 오늘, 지금처럼, 그것을 빨리 떨쳐버려야겠다고, 버리고 싶다고 간절히 원한 적은 없었다.
“아직 저 따분한 노랠 부르는 녀석들이 있었냐…. 좋아.”
무슨 생각을 한 듯, 경무는 그의 옆 뒤에 사열해 있는 조고들을 향해 몸의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얼굴에는 비장한 빛을 띠고 꽉 쥔 주먹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크게 외쳤다.
“우리는 조고인이다!!”
경무의 개전사가 시작된다. 경무를 기다렸다는 듯이 우와와아아아 하는 호응의 소리와 쾅쾅쾅 하는 발 구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기미가요의 소리를 상쇄, 차단시킨다.
“찬란하고 영광스런 무패 조고의 신화를 이어가고자,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숫자는 숫자에 불과하다. 저 오합지졸의 무리들을 우리 조고의 정예들이 쳐부순다!!”
또 한 번의 격렬한 반응과 열광. 조고는 지금 더 강해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조고는 영원할 것이다!!!”
경무는, 즉석의 개전 연설을 훌륭하게 마쳤다. 함성을 지르면서 기합을 충전하는 조고생들의 용기와, 사기는 경무의 말이 없었다면, 일백이십 퍼센트까지 끌어 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타고난 삼펜 대장이야 그렇지 않냐면서 태정이 희상에게 가볍게 물었다. 희상은, 전임 대장에게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었다. 녀석이 저런 재주가 있는지 몰랐다고 희상은, 애매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너도 훌륭한 대장이었어.
맴도는 생각은 선뜻 말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만고의 빨치산∼∼∼.”
연설을 끝낸 경무는, 노래를 선창했다. 기미가요 따위가 이 전쟁터를 지배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선창으로 입을 연 경무를 따라, 순식간에 마지막으로 치닫는 기미가요에 맞서 힘차고 새로운 소리가 이어졌다.
“그 누구인가아아∼∼”
“(김일성 장군―!!)”
노래 가락 사이로 한편에서는 ‘위대한 수령 동지’의 이름을 소리 높여 찢어질 듯 외친다. 코러스처럼. 경무 녀석이 기미가요에 대항해 선택한 노래는 「김일성 찬가」였다. 그들―총련―의 의지와 신망을 얻고, 또, 그들의 반감과 실망과 회의를 한 몸에 받으며 관 속에 들어가 버렸던, 이제는 역사책의 활자로만 남아 있는 인물을 찬양하는 노래였던 것이다. 빠른 변화의 시대를 사는 새로운 조고들은, 그런 인물에 대해 사실상, 전혀라고 할 만큼, 어떤 감정이나 느낌을 지니고 있지 않았지만.
“절세의 애국자는 그 누구인가아아∼.”
“(김일성 장군―!!!)”
그러나 조총련 초급학교 입학식부터 시작해 주욱 불러왔던 것이다. 어떤 행사나 의식이 있으면 서곡이나 전주처럼 등장하는 노래였다. 백 개의 입을 모아 불러왔다. 때로, 음조는 지겨웠고 가사 따윈 개 같다고 느끼면서, 염증을 내며 부르기도 한 그런 노래였다. 하지만, 지금 그 노래가 넘치는 에너지를 뿜어대며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아아∼∼, 그 이름도 그리운 우리의 장구은∼∼.”
“(김일성 장구은!!!)”
인원이 부족한 조고는, 노래와 코러스를―본디 곡엔 있지도 않은 것을―바삐 번갈아 가면서 열심히 목이 터져라 불렀다.
“아아 그 이름도 빛나는 김일성 장군∼∼.”
“(김일성 장구은!!)”
찬가는, 조고생을 더 강력히 하나로 똘똘 뭉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사실, 그보다도 국사관 녀석들을 위해 더욱 적절했다. 희상은 찬가를 들으며 그것의 구실을 생각한다. 말이 다른 조고 교가나 여타 다른 노래 어떤 것이라도 일절 못 알아들을 녀석들이다. 그렇지만, 분명 김일성 세 자는 귀에 익을 국사관이었고, 조고의 함성에 실린 의지를 느낄 수 있으리라. 그렇기에 김일성 찬가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던 것이다.
“아아∼ 장군의 그 이름 영원하여라∼∼.”
“김일서엉―자앙―구은―!!”
마치 그런 사실 때문이라도 되는 듯 ‘김일성’ 세 자를 악을 써대며 조고는 국사관에게 소리치는 것이었다. 전투적인 분위기를 고조하기엔 최고였다.
“아아∼∼ 김일성 장군∼∼∼.”
노래의 막바지임을 알기라도 하는 듯, 미처 끝이 나지 않은 노래 속에서 국사관이 전방으로 나오고 있었다.
“영원하리라아아아앗∼!!”
마지막을 가장 큰 소리로 노래의 끝을 장식하지만, 일렬로 전투선을 구축해 점점 다가오는 검은 무리들을 의식한다. 그런데 녀석들 기미가요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조센―징은―.”
아니다. 포위하듯 좁혀 들어오면서 행진과 함께 외치는 건 노래가 아니었다.
“불쌍―해―.”
그저 높낮이와 길이만을 멋대로 조절한 일종의 캐치프레이즈다. 어떤 녀석은 입에 손을 모아 대고 나팔모양으로 확성기를 만들고 있었다.
맙소사, 저 자식들 저런 걸 알고 있다니.
“지진― 때문에―.”
희상은 놀랐다. 관동 대지진 때나 들었을 법한 문구였다. 희상도 어른들의 얘길 귀동냥으로나 들어 봤던 것이었다. 뿌득, 경무가 이를 갈았다. 그러곤 한 손을 올려 들고 앞으로 뻗으며 행진을 알렸다. 조고들의 일보가 디뎌진다.
“집이― 납작―.”
조고의 대오隊伍는, 몇 걸음을 가지 못했다.
“저 자식들, 다 죽여 버리겠어!!”
경무는 증오심을 담아 입으로 중얼거리더니,
돌지인―!!!!! 하고 소리를 치며 앞으로, 국사관 도당을 향해 팔을 휘두르며 내달렸다.
그리고 조고들은, 그들의 지휘관을 따라 날래게 따라 달리며 그들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그렇게 ‘대결전’이 시작되었다.
* * *
고교생 대규모 난투극
지역 신문에 난 기사의 제목이었다. 기사는 지역 신문에만 실린 것이 아니었다. 니혼 케이자이日本 經濟라는 일간지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기도 했다. 아무리 그 신문이 상당한 우익 성향을 보이기로 유명하기는 했지만, 경제 신문에 고교생의 패싸움에 관한 기사가 실린 것에 희상은 조금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커다란 표제를 달아 실렸던 지역 신문이든, 한 토막의 짧은 기사로 실렸던 일간지 건, 어느 것 하나 조총련에 호의적인 것은―호의를 떠나 객관적인 것마저―없었다. 그들은 사실 확인을 위해 조고에 연락을 취하지도 않았고, 멋대로 기사를 썼다. 그리고 조고는 그 사실을 모두 감당해야 했다.
기사에 나온 학교의 이름들은 모두 이니셜 처리가 되어 있어 학교명이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조고는 조고임을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고 이해를 돕는 수식 어구가 첨가 되어 있었다. ‘재일 조선인들이 재학하는 C고등학교’ 이런 식으로 말이다. 싸움은 고교생들의 힘겨루기 정도로 묘사되어 있었지만, 그 원인 제공은, 전적으로 조고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C고교의 결투장―경무가 국사관에게 보낸―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수백여 명이 동원된 대 난투극이라는 말에는 물론 조고의 열세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역 신문은 기사에, 사진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것도, 운동복의 조고가 국사관의 목검을―아마도 녀석들로부터 빼앗았을―들고 있는 사진이었다. 운동복의 가슴께에는 조고의 상징인 삼펜 마크가 선명했다. 복장에서 무기까지 완전 무장된 고교생의 싸움이라고 약간은 과장된 어조로 사진 설명이 되어 있다.
희상은, 어둠 속에서 어떻게, 언제 그렇게 확실하게 찍을 수 있었는지 놀랐고, 그리고 도대체 사진과 기사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놀라운 것보다, 그건 충격이었다. 총련에 대해서는 언제나 부정적인 매스컴이었고, 총련을 떠나, 언론의 의도적인 조작과, 과장, 사실 은폐 등을 알고, 그 악영향에 대해 인식하고 있던 희상이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과 관련되어 희상은 이전의 이해가 얼마나 피상적이었는지를 깨달았다.
어떤 강대국이, 미사일 폭격 결행 시, 시청률을 고려해 자국의 저녁 뉴스 시간대에 맞춰 날렸다, 라는 이야기에 국가 이익과 방송사―언론―의 거대한 관계들을 생각하며 경각심을 가졌던 희상이다. 하지만, 그런 커다랗고 어마어마한 존재들의 이야기에 비하면 지역 신문의 사진 한 장은 보잘 것 없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겪는 사건의 작은 사진 한 장은 무엇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강렬하고, 효율적으로 희상의 의식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이번 일의 모든 것이 비틀려져 있었다. 희상에게 모든 것은 의문 부호를 달고 다가왔다. 경제 신문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의도적으로 오해를 일으키기 위해 선택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 풀리지 않는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생각해보면 경찰들부터가 그랬다.
그런데 경찰이 있었다.
아비규환의 난전을 벌이고 있을 때, 경찰이 들이닥쳤다. 아니, 들이닥쳤다는 것은 적당하지 않았다. 그들의 출동 시간을 알았던 것처럼 국사관 녀석들 그 시간을 기준으로, 싸움을 끝내고 있었던 것이다―철수 시간이 정해져 있던 것처럼. 사이렌 소리가 있었지만, 녀석들의 움직임은 경찰의 사이렌 소리 때문은 아니었다. 사이렌에 허둥대던 조고에 비하면 국사관에겐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카메라가 있었다.
사진을 보고 처음에 희상은 퍼뜩 기자를 떠올렸지만, 꼭 사진을 전문인만 찍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왜곡된 기사가 있는 것이다. 신문들은 마치, 국사관의 기관지라도 되는 것처럼 녀석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쓰고 있었고 사진은 말할 것도 없다.
경찰이 출동하자, 그 전부터 해산을 준비하고 있었던 국사관은 물론 좀 더 용이하고 재빠르게 경찰을 피했지만 인원이 많았다. 조고들은 운동복으로 기동성에 소수였지만, 부상의 정도가 심각했다. 결국 양쪽 고교생 몇몇은 경찰과 서에 동행하는 처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연습용이라고요. 우린 맨날 들고 다녀요, 에이씨. 이러면서 국사관 녀석들은 목검에 대한 변명을 했다고 한다.
너무 뻔한 변명이었지만,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 그런 소릴 하는 것보다는 그럴듯할 수 있었다. 또, 그것으로 경찰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고 했고. 만약 조고가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 그날 밤 운동장을 찾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분명 국사관과는 다른 대접을 받았으리라.
목검에 대해 변명을 해야 했던 녀석들은 분명 국사관이었는데, 사진은 그 사실을 완전히 바꾸어 보여 주고 있었다. 게다가, 국사관은 그 외에 별 다른 조사를 받지 않고 훈방 조치된 반면에 조고생들은 밤이 새도록 서에 붙들려 있어야 했다.
이건 너무나도 철저해 보였다. 모든 것이 국사관을 위해 철저히 준비되어 있었던 것이다. 희상은 어떻게, 무엇이 그걸 가능하게 했을까를 추측해보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진실은 은폐되고 숨겨지기가 너무나도 쉬웠다. 세상은 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진실은 알려고도, 알고 싶어하지도 않았다.
진지하게 구전되는 역사가 없다면 진실한 역사는 사라진다고 했나.
소수의 진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조고 대 국사관 전, 의미 없는 무력의 충돌이 과연 진지하게 구전되어야 하는 대상인 것인지를 우선적으로 되묻는 희상이었다.
* * *
“태정이 왔냐?”
어지럽고 수선스런 삼펜 회의실에서 경무가 태정이를 물었다. 태정의 정학은 내일로써 겨우 끝나는데, 경무 녀석 정신이 없는 것 같다.
태정은 내일이나 되어야 올 수 있다고 하자 녀석, 그제야 머리를 친다.
경무는, ‘대결전’이 불러온 쓴맛을 곱으로 보고 있었다. 우선 그가 소속된 복싱부의 복싱 부원으로서의 집단 징계 처벌이 예고되었다―부활동의 금지까지 고려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회장으로서의 징계다. 이중의 처벌이 경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경무 자식, 제 눈앞의 일만으로도 벅찰 텐데 태정을 묻는 것은 녀석을 걱정한 것이리라.
‘대결전’의 결과는 패배였다. 일당십을 감당하며 싸워야 했던 조고다. 목검을 쥔 녀석들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그나마 경무를 위시한 복싱 부원들의, 그리고 태정의, 선전과 그것에 더한 조고의 의지와 정신으로―그것은 분명 존재했고, 뚜렷한 힘을 발휘했다―그나마 그렇게 버틸 수 있었다. 국사관 녀석들은 우세한 숫자로 포위해 압박을 해 왔지만,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다. 목검을 휘두르는 녀석들의 목검을 빼앗아 그것으로 받은 대로 되돌려 주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결국 끈질기게 이어지던 반격과 저항은 무너지고 조고는 수세에 몰린다. 막바지에는 일방적이다 싶을 정도로 코너에 몰려 목검으로 주먹으로 발길로 두들겨 맞았던 것이다.
국사관 놈들도 피해와 타격이 없을 수 없었다. 아니, 없을 수 없는 정도가 아니다. 그것은, 그 두 학교 병력의 규모차를 생각하면, 조고가 패배라는 말을 입에 담기에는 매우 억울할 만큼이었던 것이다. 지역 신문과 일간지의 기사, 그리고 대전에 참가했던 조고인들의 부상과 타격, 그리고 징계…, 침통한 학교―그리고 경무―는 다만, 그것만을 위안으로 삼을 뿐이었다.
그나마 위안거리가 있을 수 있는 것에는 경무와 태정의 기여를 빼놓을 수는 없었다. 복싱을 한 녀석들답게 포즈가 잡혀 있었고, 펀치는 그리 크지 않은 동작만으로도 정확히 덤벼오는 적을 효율적으로 공략했다. 국사관들 중 많은 인간들은, 사내 녀석들의 싸움에 대한 어리석은 투지가 넘쳤다. 하지만, 그것만 뺀다면, 그중엔 희상과 비슷한 녀석들이 적지 않았다―희상은, 주먹을 어떻게 뻗어야 하는지 조차 모르는 문외한이었다.
그런 손쉬운 ‘국사관의 희상이’들은 경무와 태정, 두 녀석들의 주먹에 무력했다. 키와 체격에서 우세를 보이는 두 녀석들의 주먹에는 파워가 있었다. 희상은 권투가 왜 어렵고 까다롭게―사람 머리 아프게 말이다―체급을 따지는지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의 차이만큼 주먹에 실리는 힘이 틀려지는 것이다.
한 주먹 감도 안 되었다, 는 조고 선배들의 말이 말만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희상은 둘의 활약을 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 자식, 분명 뭔가 했었어. 역시, 복싱인가….”
경무가 뭔가 분한 듯이 부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때의 태정이 도대체가 이해가 안 간다고 고개를 내저으면서 말이다. 그때란 건 고토와의 일대일 격투를 말하는 것이겠지. 경무의 얼굴은 ‘대난투극’ 에서의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선명한 멍이 들어 있었고 그로 인해 부어 있는 얼굴은 태정의 이야기를 하면서 더 부어올랐다. 꼭 태정에게 사기 당한 것 같은 표정이다.
하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힘의 유무가, 힘의 세기가,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는 경무이니 그럴 만도 했다. 태정은 그것을 전혀 드러내고 있지 않았으니 경무의 속았다는 표정이 이해가 가는 것이다. 경무는 벌써 태정을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었다 (하지만, 경무의 기준이 기준이니 만큼, 희상으로서는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희상 역시 ‘난투극’으로 태정의 본 모습을 엿본 느낌이었다. 그건 보고 싶기도 했고 보고 싶지 않기도 했던 그런 모습이었다. 녀석에게 그런 면이 있었다니…. 권투를 했다는 건 이미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것은, 골목 싸움 때와는 확실히 틀렸다.
아마, 희상처럼 그곳을, 그 현장을 직접 겪은 조고의 전우들도, 그들의 삼펜의 전임 대장이 이전에 보았던 것과, 들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으리라. 긴장이 풀어져 웃는 듯하기도 한 눈이 무심하고 냉정하게 변하고, 마찬가지의 느낌이 국사관 녀석들을 날리는 절제된 주먹에 실려 있었다―그것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펀치보다 더 강력하다. 삼펜의 절도를 기대할 수 없었던, 덥수룩이 기른―언제나 그 모양이었던―머리가 쉴 새 없는 공방으로 엉망으로 헝클어졌고 땀이 배어 축축이 젖은 머리에서는 땀방울이 흘러 내렸다.
그런 모습을 그때까지, 녀석은 용케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때늦게 과시하고 싶었을 태정이 아니다. 경무야 태정이 고토와의 격투에서 얻은 치욕은 이것으로 어느 정도 만회됐다고 말했지만…, 분명 태정은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상관없을 녀석이었다.
‘치욕의 만회’라….
경무는, 대 난투극의 현장을 벗어난 후의, 고토와 태정의 조우를 몰랐다.
* * *
경찰의 출동으로, 희상은 태정이 이끄는 대로 녀석의 뒤를 좇아 세타가야 구립 소학교 운동장을 벗어났다. 처음 겪는 패싸움이었다지만, 희상은 경무와 태정의 그늘 아래서 치명적인 부상은 그럭저럭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정은 상당히 지쳐 보였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까맣게 덤벼드는 국사관 녀석들 처리로 만도 벅찼을 텐데, 희상에게까지 신경을 뻗쳐 두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희상은 두 녀석들에게 미안하고, 자신의 무기력이 한심하기까지 했다. 사이렌이 울렸고, 태정이 힘든 모습에도 불구하고 경찰이라며, 희상을 거두어 팔을 붙잡아 끌었다. 그 무렵 희상은 아수라장을 바라보면서 이곳에 아예 오지 말았어야 했는지를―그 와중에 한가하게!―자문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멍히 가만있는 사람을 잡아끄는 건, 썩이나 에너지의 소비가 많은 일인 것을.
자신이 태정의 짐이 되었던 것은 거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다.
태정은 적절해 보이는 퇴로를 찾아 뛰었고 녀석의 판단은 꽤 정확해 보였다. 사이렌 소리가 꽤 멀어질 때까지 경찰과 마주치지 않았고, 한산한 길로 접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경찰이 그리 많이 출동한 것 같지는 않다, 다른 녀석들 다 잘 빠져나갔는지 모르겠네…, 한두 마디 태정과 나지막이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숨을 돌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숨을 그리 오래 돌릴 수는 없었다.
야, 저 녀석들 잡아!!
갑작스런 외침이었다. 선택한 퇴로가 그들만의 것일 순 없었다. 고개를 돌리자 검은 녀석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국사관들이다. 탓, 태정의 반사적인 출발에 비해 희상의 그것은 한 발짝 느렸고, 희상은 태정의 등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격차는 더 벌어졌다.
터억, 어깨를 잡아채는 손에 희상은 자신도 모르게 태정을 불렀다.
태정아!!!
태정을 부르고 희상은 아차, 아래 입술을 깨물었다. 잡은 녀석과 함께 곧바로 네댓이 희상을 둘러싸며 포박하듯 양팔을 한 녀석씩 뒤로 틀어쥐었다. 연이어 또 그만큼의 수가 그들 뒤에서 나타났다. 어딘가 낯익은 얼굴들…, 그리고 대단히 인상 깊은 얼굴 하나. 거기엔 국사관의 우두머리, 고토가 있었다. 녀석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른 한 손은 가볍게 든 목검으로 톡, 톡, 가볍게 다리를 두드리면서 말했다. 아―아, 우리, 본적 있지? 라고. 이런 식의 우연한 만남을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자신은 또 태정의 짐이 되고 말았다. 태정이 그의 짧은 외침을 듣지 못했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하지만, 바람은 바람에서 그치고 어둠 저편에서 희미한 인영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늘색 운동복. 태정이었다. 희상은 혀를 얼마나 깨물고 싶었는지 모른다. 왜 녀석을 불렀는가.
톡톡 두들기던 목검을 어깨에 획, 뒤집어 돌려 가볍게 올려놓으며, 고토는 걸어오는 태정을 맞았다.
야아―, 이거 마지막이 아니라 어쩌지?
처음부터 녀석의 말은 이상했다. 무엇이 마지막이라는 건가? 다가온 태정이 무리들 앞에 서서 고토를 보고, 희상을 보았다. 미안해. 의문은 제쳐두고, 두 녀석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 못했던 희상은 태정을 보면서 입만을 움직이며 소리 없이 사과했다. 태정이, 그 사과를 알아보고 살짝 고개를 저어 아니라는, 괜찮다는 뜻을 알렸다. 그리고 태정은 다시 고토를 직시했다.
그 녀석은 놔줘.
오오…, 조센징의 동지애가 나왔군…. 뭐어, 그럼 이 녀석의 몫도 네가 받겠다는 건가?
고토는 목검을 까닥거리며 그 끝으로 희상과 태정을 번갈아 가리키다가, 순간 두 손으로 목검을 쥐더니 서 있는 태정의 배를 가격했다―야구 배트를 휘두르듯이.
빠악―하는, 소리만 들었던 희상의 배가 괜히 지끈했을 만큼, 그 통증이 실감나는 한 대였다. 태정은 신음소리 없이 어깨를 크게 한 번 들썩일 뿐이었다.
그래 너 정도는 되어야 이걸 휘두르는 맛도 있겠지?
마치 아까 전의 그것은 시험용이었다는 듯한 말이었다. 풀어주라는 고토의 한마디로 희상은 두 녀석의 억센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태정은, 고토를 위시한 다른 놈들의 펀치를 견뎌내야 했다. 안 된다고 소리를 치며 다가가려는 희상에게, 꼼짝 말라고, 가만있으라고 태정은 말했다.
희상은 태정이 운동장에서의 활약을 보여주길 바랐지만, 태정은 그러지 않았다. 국사관에 둘러싸여, 녀석은 고작 서서 목검과 주먹이 가격한 자리를 감싸 쥐고, 그리고 머리를 감싸는 정도로 최소한의 보호를 할 뿐이었다. 그러다가 태정은 집단으로 덤비는 녀석들에 밀려 무릎을 꿇었고, 그러고 나선 몸을 말았고, 나중에는 땅에 엎드려 등으로 발길질과 목검의 세례를 받았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었다. 들개처럼 물어뜯는 녀석들이. 물어뜯기는 태정이. 그리고 그것을 입만 벌리고 멍한 자신도. 그보다 더 비현실적인 건 고토의 말이었다.
일체의 저항을 하지 않는 태정을 실컷 두들겼는지 고토가, 다른 두 녀석을 시켜 태정을 일으키고 말했던 그것. 예의 그 목검으로 태정의 배를 찌르면서 했던 말. 희상으로서는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저히 이해 불가능했다.
「이봐, 너, 내 가랑이에 얼굴을 쳐 박고 빨았던 거 기억나나? 네 녀석의 혓바닥을, 감히, 내 아들 녀석에게 갖다 댔지? 넌 내 이것에 키스할 자격도 없다구.」
고토는 이것을 말하며 자신의 사타구니를 짧게 두들겼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하핫―짧게 웃었다.
퍼억, 빠악, 빠각―.
딴 녀석들에게 양팔을 속박 당해 부자유한 태정이었다. 고토 녀석은 목검을 세 번, 그다지도 무방비한 태정의 어깨를, 복부를, 정수리를! 매끄러운 연속 동작으로 후려갈겼다. 연타에 태정의 악다문 잇새로 단속적인 신음이 새나왔다. 고토가 검을 내리고, 바싹 태정에게로 다가가 손바닥으로 툭툭, 가볍게 태정의 뺨을 두들겼다.
「조센징의 서비스? 날 웃겼어…. 이게 서비스 봉사료다.」
녀석이 태정에게 일그러뜨렸던 얼굴을 시원하다는 듯 활짝 폈다. 그리고 이제는 목검이 필요 없다는 듯 딴 녀석에게 던져 주면서. 가자, 는 한마디로 고토는 그들의 무리를 이끌었다.
무슨 말이야? 녀석이 네 걸 빨았냐? 진짜야? 등등 국사관 녀석들도 사정 파악이 안 되는지 고토의 어깨와 등짝에 바싹 붙어 녀석을 따르며 질문을 퍼부었다. 저벅, 저벅, 저벅, 멀어지는 무리들…. 그 가운데에서 고토의 목소리가 하늘로 치솟아 올라 사방으로 크게 울렸다.
저 자식이 배지를 돌려 달래잖아. 빨 수 있으면 준다니까 녀석이 진짜 빨았어.
퉤엣, 더러운 조센징 같으니. 컴컴한 밤을 메아리치는 고토의 욕설에 이어, 정말이야? 그런다고 진짜? 푸핫하하 와하하… 떠들썩하게 웃는 소리가 희미해져 갔다.
희상은 태정의 본모습을 조금 더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일로 또 무엇인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가랑이. 혓바닥. 빨다. 서비스. 성적인 용어들. 희상은 그. 것.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해 낼 수도 없었고, 다른 것일 수도 없었다. 고토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 고토랑 너, 둘 사이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거냐고?
태정을 부축해 일으켰지만, 희상은 먼지와 땀과 피로 엉망이 된 태정의 얼굴에 대고 감히 물어 볼 수가 없었다. 자신이 태정을 이런 꼴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태정의 옆얼굴은 무심할 뿐이다. 도대체 태정이 너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차마 묻지 못한 말이 경악으로 머릿속에서조차 끝까지 조합을 이루지 못했다. 희상은 녀석에 대한 죄책감과 자책, 그리고 녀석에 대한 추궁과 책망, 상반된 감정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희상은 끝까지,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낼 수가 도무지 없었다.
* * *
“몸은 괜찮아?”
정학이 겨우 풀려 나온 태정에게 희상이 던진 첫 마디였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고작 한다는 소리가 진부하고 의례적으로 들리는 판에 박힌 인사였다. 태정의 바싹 말라 있는 입엔, 입술 주름을 따라 피딱지가 져 있다. 뺨은 수척해 보인다. 저리도 초췌해 보이는데도 굳이 학교에 나오다니. 괜찮다는 태정의 대답에 정말 괜찮은 거냐고 희상은 또 한 번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자신 있는 건 맷집뿐이야. 얼마든지 맞아도 괜찮아.”
그렇게 보일 듯 말 듯 희상에게 웃으며 대답하던 태정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손으로 관자놀이께를 마사지하듯 꾹꾹 누르며 주물렀다. 괜찮을 리 없었다. 대뜸 희상은 정수리를 내리친 고토의 목검을 눈앞에 떠올린다. 고토. 희상은 고토 녀석을 화제에 올릴 수 없었다. 회피하게 되는 것이다.
“신문에 목검 든 녀석 멋지게 나왔던데?”
태정은 희상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농담을 한다. 녀석, 농담이 잘도 나왔다.
“그거 봤구나? 그것 때문에 학교가 곤욕을 치르고 있잖아. 전화로 항의나 욕설을 엄청나게 퍼부어 대는가 보더라고. 학생들도 위축돼 있고. 살얼음판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총련 차별이나 악성 기사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그래도 이번 일은 이해가 안 가. 국사관이 도대체 뭐야? 뭔데 경찰이나, 신문이나 한 통속으로 똘똘 뭉치냐고.”
지금의 조고의 처지와 상황을 상기하자, 또다시 의문이 일렁이고, 그 답답함을 태정에게 토로하는 희상이었다.
“가능해.”
응? 태정이 뒷목을 주무르면서 하는 말에 희상은 미간을 찌푸렸다. 가능하다니?
“고토 마사키.”
희상의 얼굴에 실린 의아함에 태정이 고토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고토? 녀석이 왜? 희상의 의문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지만, ‘또 녀석인가’ 하는 왠지 알 수 없는 수긍이 간다.
“그 녀석 아버지가 고토 노부유키 의원이었어.”
고토 노부유키라니. 그랬나? 고토 마사키는 그 고토 가家의 고토였던 것이다. 희상의 놀람은 잠시였고, 알 수 없는 수긍은, 확실한 이해로 바뀐다. 그랬군. 그 고토라면, 이름 하나만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터였다.
불순한 단체로 낙인찍힌 조총련, 그 산하의 힘없는 조고 따위를 상대로, ‘고토’로서 협조를 요청했다면 희상이 품었던 의문을 만들어 내기란 아주 손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국사관 녀석들이 그쪽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고토 녀석…, 역시 그냥 배경이 아니었군.”
그런 배경을 등에 지닌 고토, 그 어린놈이 벌써부터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대단한 배경이지.”
“그런데 태정이 너….”
이런, 고토의 화제를 피하려 했는데 이야기는 어느새 고토의 이야기로 흘러가 버렸다. 고토의 배경을 태정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건가를 물으려 했지만, 질문은 그것을 제쳐 두고, 그 일이 무엇인가를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질문의 순위는 뒤바뀌어 또다시 말이 끊어지는 것이다.
고토가 이야기했던, 희상이 회피하고자 했던 그 일은 또다시 희상의 머리를 점령했다. 이것도 저것도, 두 녀석들 사이에 심상치 않은 뭔가가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었다.
“내가…, 그리고 뭐야?”
끝내지 못한 말이 무엇이냐고 태정이 묻고 있다. 녀석은 질문이 뭔지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조용히 자신의 눈을 응시하는 태정을 보니, 희상은 녀석이 기다리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상은 그것이 뭔지, 기다리고 있는 태정에게 물어야 했다.
“너, 고토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깊숙이 희상을 바라보던 태정의 눈엔 흔들림이 없었다. 역시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그러려고 하지 않았는데, 희상의 어조는 ‘무슨 일’을 묻는 오르막의 질문 투가 아닌, ‘무슨 일’이 있었음을 불신하는 사람의, 가라앉은 내리막 어투가 되어버렸다.
“녀석이, 원했어.”
이미 ‘무슨 일’임을 알고 있는 희상에게, 설명 같은 건 필요 없었으리라. 설명은 생략되고, 태정은 늘 그랬듯, 또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을 뱉고 있었다. 이유를. 그것이 녀석의 이유였다. 원해서 조용히 들어주었다, 라는 것이. 단지 원했기 때문에―!
희상은 할 말을 잃고 녀석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숨을 쉬고, 다시 고개를 태정에게로 향한다. 차라리 고토가 거짓말을 했다고, 터무니없는 소릴 했던 거라고 해도 자신은 믿어주었을 텐데. 하지만, 모든 걸 한마디로 밝힌 태정은, 희상의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티끌의 요동 없이 마주하고 있었다. 희상은, 그것이 잘못이었는지를 그러면 안 되었던 건지를 말할 수가 없었다. 태정의 안색이 좋지 않아서, 그게 안 되어 보여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건, 너무나도 녀석다웠다.
그리고 곧 희상은 그 말만이 진실임을 깨달았다. 태정은 한 마디로,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을 다 했던 것이다. 희상의 다른 말은 필요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모든 어떠한 말도 녀석에겐 쓸모없으리라. 태정은, 과거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똑같이 행동했겠지.
“미안하다, 태정아.”
희상은, 태정에게 때늦은 사과를 했다. 녀석이 싸움터로 오도록 강권하다시피 한 건 자신이었다. 고토와 마주치게 된 것도 희상의 탓이다. 그리고 태정이 하지 말아도 될 말을 하게 한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뭐가 미안하다고 그래.”
“그때 나만 아니었으면……, 많은 일이 없었어.”
경찰의 포위와 수색에도 무사히 빠져나갔는데, 태정의 부상도 경미한 정도로 그칠 수 있었는데…. 국사관 녀석들의 폭행을 당하고, 고토 자식의 무자비한 목검 세례에, 녀석의 불알을 빨았다고 비웃음 당하고, 그 일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고토 자식 때문에 국사관 모두의 조롱을 샀다.
그리고 희상은 몰라도 됐을 일을 알아 버렸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악화된 상황으로 몰아가 놓고, 태정과 고토의 일을 묻다니. 그것도 원망의 어조로, 의심의 눈길로 말이다.
“그만해 희상아. 자책하지 말라고…, 그건, 내가 견뎌내야 할 몫이었으니까.”
희상은, 그의 자괴를 달래고 어루만지는 태정의 말에 그저, 다시 미안하다고 중얼거릴 뿐이었다.
* * *
태정은 고토가 굳이 그때의 오럴을 들먹였던 이유를 생각했다. 물론 미쳤다고 심각하게 의심될 정도인 녀석에게 필요한 이유 따윈 없다. 그저 또 한 번 미친 짓거리를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또, 태정에게 굴욕과 모욕을 주려는 의도일 수도 있었고, 그랬더라면 의도의 성공을 자축하며 고토는 꽤나 뿌듯해하고 있으리라.
감히, 라고 말하면서 고토는 자신의 그 물건에 입을 댔냐고 했다. 큰 소리로 외치면서 그곳의 모든 인간이 다 듣도록 했던 과장은, 녀석이 또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순간 들게 했다. 하지만, 그때 고토의 목소리엔 분함이 실려 있었고, 일그러져 험악한 얼굴은, 보통 녀석이 연기를 즐겼던 모습과는 차이를 보였다. 태정은, 왠지 고토의 그런 모습이, 자존심이 꺾인 누군가가 그것의 회복을 위해 몸부림치는 그것과 겹쳐 보였던 것이다. 그 둘은 꽤나 흡사했다.
내가, 녀석의 자존심을 건드린 건가?
고토는 자존심이 단단히 상한 녀석처럼 굴고 있었다. 녀석이 원해서 뜻대로 그것을 빨았다. 그런데 고토 녀석, 자신의 물건을 빨았다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 소리를 질렀다. 고토가 화가 난 것은 소리를 친 말 그대로의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고토는, 마지막으로 서비스료에 대해 말했었다. 그리고 서비스 금액을 넘칠 만큼 되돌려 주었다. 목검으로.
그렇다면 서비스 때문에 자존심에 금이 간 것인가? 겨우 그것 때문인지? 태정의 입에 터질 듯이 흥분 된 것 때문에? 고토는 담배를 더듬어 찾을 만큼 흥분했었다. 그 이전에 싸움으로 흥분하고, 하체를 드러내놓고 마음대로 사타구니를 쓰다듬는 녀석이었다. 전시하듯 타인의 시선에 한껏 노출 시켰던 흥분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손상된 자존심은 흥분 그 자체 때문은 아니었다. 고토는 담배로 흥분을 삭혔다. 하지만, 태정은 도리어 그것을 반대 의미로 말했었고. 결국 흥분을, 붉게 부푼 샅을 드러내도 아무 거리낌도, 문제도 없지만, 태정이 그것을 지적하면 안 되었다, 는 말이었던 것인가.
허튼 녀석의 허튼 자존심일수록, 사소한 것에 자존심을 생각하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런 녀석인 고토 마사키는, 허튼 자존심의 회복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은 욕구로 안달이 났던 것이다.
쓸데없는 말을 한 건가…. 의문을 참지 못해 나왔던 말이건만. 이제 코앞으로 다가온 ‘그날’을 생각하면 고토의 반응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었다. 태정은 우선 희상에게 다시 말해보자고 생각하면서 시계를 보았다. 삼펜의 회의가 언제 끝날 것인가 대충 시간을 어림하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려는 태정을 붙잡고 ‘아무튼, 회의 끝날 때까지 벤치에서 기다리라’고 하면서 희상은, 급하게 삼펜 회의에 들어갔다. 사정 설명도 없는 일방적인 희상의 요구에 태정은 거절도 못하고 벤치를 지키고 있어야 했던 것이고, 결국 고토 녀석의 자존심 같은 걸 떠올리며 하릴없이 시간을 죽여야 했다. 하지만, 희상에게 불평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학교 상황이 상황이라 동분서주할 수밖에 없는 희상이나 경무나 삼펜을 생각하면 태정은 상당히 형편 좋은 처지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