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ll the Fat Lady Sings #8
희상은 느닷없는 경무의 삼펜 소집에 종종 걸음으로 삼펜 회의실을 찾아 문을 열었다. 태정의 퇴진 이후 처음으로 소집되는 비상 삼펜 회의였다. 실내의 대원들은 경무에게 강력한 표정과 목소리로 뭔가를 촉구하는 듯 한마디 씩 하고 있었다.
“뭔가 본때를 보여 줘야 해.”
“절대 이대로 있어서는 안 돼, 회장!”
“도대체 언제 쳐들어 갈 거야!”
“녀석들에게 똑같이, 아니 배로 되돌려 주자구!!”
너도 나도 던지는 말에 회의실은 어지럽고 시끄러웠다. 무슨 일이냐는 희상의 말은 그들의 말에 파묻히고 말았다. 가만히 둘러보니 희상을 제외한 전 대원이 이미 모두 모여 있었는데, 경무를 보니 별 말없이 희상에게 고갯짓으로 앉으라는 몸짓만 보냈다.
가장 늦게 희상에게 소집령을 보내오고 와도 경무는 희상에게 소집 이유에 대해 설명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경무 녀석, 자신을 경계하는 건가? 희상은 그럴지도 모른다는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그럴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지만.
의도한 건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부회장이었던 희상의 고사로 경무가 회장의 위치에 올랐고 또, 사실이든 아니든, 삼펜 임원진들은 희상을 전 회장이었던 태정의 오른팔이라고들 인식하고 있었다. 경무 또한 희상이 제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애 같은 투정으로 간혹 입술을 내밀었고 말이다.
“우리의 자존심이 그렇게 짓밟히는 건 용서할 수가 없어.”
“벌써 두 번쨉니다. 두 번째라구.”
“그 자식들, 감히 또 배지를 노리다니!!”
듣고 있자 하니 삼펜이 소란해질 법도 했다. 떠들 법석한 가운데에서도 희상이 말의 체를 쳐내 걸러낸 요체는 ‘두 번째 배지 사건 발발’이었다.
젠장 두 번째였다.
두 번째란 것은 세 번째도 있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동일한 연쇄 사건에서 숫자는 증가할 뿐이다. 도대체 쇼와 시대 제 선배 녀석들이 그랬듯 배지 수집을 또 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조고의 회장이 바뀐 것을 안 것인가? 신임 회장 최경무를 상대로 또 한 번 주먹으로 놀아 보자는 것인지? 고토 녀석, 역시 그때 혼쭐을 내줬어야 했던 것 아닌가? 그런 녀석을 봐주다니 태정이 뭔가 잘못 생각한 것일지도 몰라. 희상의 머릿속엔 질문들이 주르륵 나열되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이나 의구심을 제치고 희상의 머릿속을 채운 건 태정의 노력이었다. 헛되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동안의 녀석의 분투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태정이 녀석, 회장 자리를 내주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그리고 온갖 욕이라는 욕은 다 먹고, 모욕적인 말까지 감내해 가며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그런데도 달라진 게 아무것도―너무나도 허탈하게―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비슷한 사건에 대한 태정과 경무의 대처 방식은 확연히 달랐다. 물론 ‘반복된 두 번째’라는 것이 첫 사건 보다 심각성을 더할 수도 있었지만 앞선 사건이 ‘수십 년 만에 재발’되었던 것임을 감안한다면 둘이 지니는 무게는, 가치의 비교 상쇄로 비등比等할 것이었다. 태정이 신속하고 은밀했던 것에 비해, 경무는 공개적이었고, 또 그렇기 때문에 행동은 지연 될 수밖에 없었다.
흥분과 소란을 가라앉힐 생각도 하지 않고 경무는 그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불끈 쥔 한쪽 주먹을 들고 결연히 말했다.
“좋아. 국사관을 친다. 이번엔 모든 것을 다시 바로 세우는 거다. 지난번과 같은 수치는 절대 없어야 한다. 사상이 무장돼 있지 않다면 결과는 필연적 패배인 것이다.”
경무는 냉정하고 근엄함을 가장하여 행동지침을 세우지만, 희상이 보기에 경무 녀석, 선동과 함성으로 들끓는 분위기의 삼펜 간부에 편승해서 흥분을, 그들의 울분을 부추기고 있었다. 감정이 치솟고, 뜨거운 호응 가운데, 다수의 뜻은 하나로 응집된다. 사실상 공공연한 신임회장의 전 회장에 대한 비난은, 효과적인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가자! 가자!”
“필!승! 필!승!”
“설욕을 위하여!! 설욕을!!”
태정의 독단을 비난하던 경무가 더 강력한 독재 체제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희상은 쓴 웃음을 지었다. 삼펜의 여론을 수렴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경무의 뜻을 지지하고 재확인하는 요식 절차에 불과했다. 내부의 에너지를 모아 밖으로 집중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것이 목적을 잃고 방향을 헤매고 있다면 끊임없는 소모전이 남아 있을 뿐이다. 태정의 경우엔 그것이 분명했지만, 경무의 연설에선 배지를 찾으려는 의지나 그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단순히 설욕에 대한 보복을 외칠 뿐이다.
경무는 국사관에 사과를 요청함과 동시에, 결투장을 그들의 얼굴에 던지리라고 공언, 공약했다. 자원하는 전투병을 소집한 후 모의 훈련과 함께 구체적인 전략 전술을 세울 것이라 하면서―이제 상황은 전쟁을 방불하고 있었다―적절한 결투의 날짜와 장소를 정해 통보하리라 기약하고, 최경무 조고 회장은 삼펜을 해산시켰다. 희상도 그들과 함께 돌아가려는 찰나 회장은 부회장을 찾았다.
“어이 부회장, 잠깐만 남아 봐.”
“최경무 도대체 너, 애들 경찰에 대량으로 줄줄이 잡혀 들어가는 꼴 보려고 그러는 거냐?”
“리희상, 진정해 진정해. 애들 싸움에 경찰이 출동할 리도 없고 혹시 그렇다 해도 상대는 국사관 녀석들이야. 잡혀도 같이 잡힐 테니, 잡혀 봤자 어차피 별일 없다구”
“그래도.”
“아 글쎄 두고 봐. 나는 내 방식대로 해. 누가 옳은 건지는 두고 보자고.”
희상의 말을 건성으로 넘기면서 경무는 두둑한 배포와 자신감을 드러내었다. 비록 말속에 태정에 대한 의식이 역력했지만…, 정학 중이었던 태정이 학교로 돌아오게 되어도 녀석, 분명 학생회와는 관계없을 태정을 내버려둘 성싶지는 않았다.
“태정이 녀석은 그냥 아무 말 말고 내버려 둬라.”
재밌게도 희상이 할 말을 거꾸로 경무가 자신에게 한다. 그리고 경무는 계속 말을 이어 붙였다.
“내가 이렇게 말해도 태정이 자식한테 아무 말 없이 지나치진 않겠지만…, 난 그 새끼 완전히 포기야. 그 자식 어떤 녀석인지는 니가 좀 알라고 하는 말인데, 새끼 얼마나 한심한 소릴 지껄인 줄 알긴 아냐? 주먹싸움도 싫고 말싸움도 싫다는데 참내…. 뭐? 그냥 조용히만 살면 좋겠다구? 그딴 소릴 참 자알도 지껄이더라.”
경무의 말에 희상은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경무에겐 겁쟁이가 아니면 임종을 코앞에 둔 노인네나 할 법한 말을, 조고 사나이로서 한 터럭의 수치심도 없이 초연하게, 태정은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와 말에 경무가 머리가 획 돌아버렸을 것은 당연했다.
“그 녀석, 원래 천성이 그런 녀석이잖아. 모두가 경무 너처럼 전투적인 건 아니라구. 그리고 이제 태정은 삼펜도 아니잖아, 그런 말이 그리 심각하거나 화낼 필요는 없어 뵈는데?”
“아니야 결국 녀석은, 삼펜 대장이었으면서도 그런 썩은 생각으로 일 처리를 했다는 거 아냐. 배지 사건도 그렇고. 생각하면 속이 확 뒤집어 진다구. 아∼아, 그리고 희상이 너도, 평화와 공존? 이해와 양보? 그런 소릴 누가 못해? 나도 듣기 좋아 그런 거. 하지만, 우린 치외법권 인생이야. 알잖아, 재일 외국인 조센징이라구. 보호받지 못하면 싸울 수밖에. 누군 싸움에 환장해서 이러겠냐고? 조용한 걸 원하면 차라리 죽지 그러냐? 엉? 태정이 자식한테 그렇게 전해. 최경무가 죽으라고, 그렇게 말하더라고.”
희상은 경무의 말에 진지한 이해를―동의는 아니다―표할 수밖에 없었다. 경무 또한 소신이 밑받침된 뚜렷하고 확고한 행동 노선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치외법권 인생이란 건 재일인들이 자조적으로 말하는 은유적 표현이었다. 외교상의 면책 특권이나, 외국에 있으면서 그 나라의 법 적용을 받지 않을 특수한 초월적 권리 같은 건, 물론 아니다. 그런 사전적 의미의 치외법권治外法權과는 완전히 다른 변용 된 뜻을 지녔다.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법망의 변두리법권: 法圈에 살고 있다는 그런 의미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인생이었기 때문에 태정이 국사관에 그렇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태정이 아마도 그의 이상적인 삶을 실현하고 싶다면 일본의 벽지 산간―이를테면 야쿠시마 같은―어딘가의 깡촌이나, 혹은 이니스프리 섬 또는 소로우의 월든 같은 그 인적 없는 숲속에서 벌을 모아 꿀을 채집하든가, 장작을 패고, 콩을 심고 살아야 할 것이라고 희상은 그런 생각을 했다. 생각대로의 정경을 떠올려 보니 녀석에겐 그런 게 썩 잘 어울릴 것 같다. 경무의 말을 그대로 옮길 생각은 없었지만, 아무튼, 희상은 태정을 한 번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았다. 경무의 죽으라는 말 대신 농사꾼이 될 생각은 없냐고 물으면 녀석이 뭐라고 할까.
* * *
………그래서 아마도 다음 주쯤이면 날짜가 잡힐 것 같은데… 국사관에 선전 포고 하겠지. 경무는 지금 당장 결투장이라도 보낼 태세야.
희상이 예기치 않게 직접 집으로 찾아왔다. 그 갑작스러움에 걸맞게 예기치 않은 소식을 들고 온 것이었다. 희상의 이야기는, 고토가 두 번째의 배지를 빼앗아가고, 경무는 그에 대한 강경책을 세웠다…,라는 사실 대단히 간단한 뉴스였다. 거듭된 거짓과 프로급 모사꾼인 고토를 생각한다면, 놀랄 일도 아니었다. 파친코에서 두고 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생각해 낸 것이 고작 동일 범죄, 자기 복제였던 것인가.
“고토 자식,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하겠어. 취미를 조고 배지 수집으로 바꾼 건가?”
태정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희상이 마치 프롬프터prompter를 보고 읽는 것처럼 입 밖으로 낸다. 배지를 가지고 뭘 하려고 하는 건가. 그것을 빌미로 억지스런 요구를 하고 태정과 조고측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경무 말대로 말이 양보인 것이고, 녀석들 앞에서 기었다. 고토에게 배지가 쏠쏠한 이용가치가 있었다지만, 그게 모두이리라 생각되진 않았다. 녀석이 꾸미고 있는 건.
“그 녀석 우연히 만났었어.”
태정이 고토를 본 이야기를 꺼내자, 희상은 귀신 본 사람같이 놀라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로 시작하는 질문들을 주르륵 열거하며, 고토를 만난 경위를 묻고 녀석이 뭘 했는지, 뭘 말했는지 매우 궁금해했다. 십여 분도 채 안 되었을 짧은 시간이었지만, 꽤나 길게 느껴졌던 당시 상황을 상기하면서, 태정은 희상에게 답해주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고토가 ‘무엇을 말했는지’였다.
“자식이 정색을 하고서는 우리가 병균이라고, 자기가 모두 없애버리겠다고, 그런 미친 소릴 하던데.”
“뭐? 벼엉균? 하하… 핫, 뭐 소독약으로 없앨 거래? 후생성 장관이라도 되려나? 방역이라도 해야겠네.”
어처구니없다는 웃음을 흘리며 희상이 농담으로 고토의 말에 담긴 살벌함을 희석시킨다. 하지만 가벼운 말에 이어, ‘아직 새파란 놈이, 말하는 건 완전히, 전쟁 끝나고도 대동아 경영권을 외치는 무슨 팔십 먹은 노인네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나 심각한 걱정으로 기울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보기엔 그 고토란 자식, 진짜 ‘미친 놈’이 아닌가 싶은데.”
“푸핫 녀석이 미쳤다고?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태정은 웃으면서 희상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긴 고토의 행동은 정상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그 속은 알 수가 없는 법인데, 하물며 고토 녀석이야. 헌데, 농담을 던진 것으로만 알았는데 희상은 꽤나 심각하게 표정을 굳힌다.
“농담이 아니야, 태정아. 이건 진지한 이론이 있다구.”
“이론?”
여러 가지 전문적이다시피 한 지식에 희상은 박학했다. 이론에 정통했고, 일반화에 능숙했다. 그리고 녀석은 띄엄띄엄 분산돼 있는 개별적 사건들에서 연관성을 찾아내는 체계적이고 통계적인 머리를 갖고 있었다. 분석을 잘했고, 연상을 잘해, 어떤 사실에서 남들이 볼 수 없는 숨어 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고토라는 녀석이 미친 것에 대해, 적용할 이론 같은 것도 있었나.
“음, 미치광이 이론이라구. 물론, 여기서 ‘미치광이’ 란, 정신적 문제 때문에 약물이나 전문의의 치료를 요하는 일반적 의미의, 미친 사람을 뜻하는 게 아냐. 국제 정치 이론인데… 아무튼, 그 이론에서의 매드맨mad-man 같아. 미치광이.”
태정은 으레 정신 분석 방면의 이론이려니 하고 짐작하면서 귀를 기울이는데, 의외로 그건 국제 정치 이론이었다. 희상이 녀석,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에 관심이 많으니 이상치도 않다. 게다가 정치 이론을 그대로, 인간 행동 패턴과 사고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간단히 얘기해서, 어떤 나라나 정부, 그냥 에이(A)라고 할게, 아무튼 에이의 정책이 너무 정의롭고 올바르게 추구될 필요는 없다는 거야. 아니, 사실 이 이론에선 국제법이나 조약을 지키는 건 어리석은 행위라고 까지 해. 어느 정도 타당성은 있지. 생각을 해봐, 에이가 이성적이거나, 준법적이라면 상대국이 그걸 약점 삼을 수도 있지 않겠냐? 무법이 판치는 게 국제 사회니까. 특히 강대국일수록 더하지.”
이어진 희상의 말은, A라는 국가가 미쳤거나 통제 불능이라는 인식을 적국에게 심어주면 적국은 A에게 겁을 먹거나 해서 요구를 더욱 쉽게 순응할 것이라는,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니까 미치광이 A는, 진짜 미친 게 아니라 미친 척 한다…라는 말이군?”
“그런 거지. 어쨌거나 국제 사회에선 미친 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거거든.”
상당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론이다. 어떤 이익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리고 상대를 위협하고 겁을 주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미친 척 하는 것도 필요하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핵폭탄의 스위치도 가볍게 누를 수 있는 놈이라고 보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럴 듯 했다. 하지만, 이런 말도 있다. <용감해라, 용감하지 않으면 용감한 척이라도 해라. 아무도 그 차이를 모를 것이다> 그렇다면 미친 척과 미친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의문을 제기하는 태정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인 고토에 대해서도.
“미친 척 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은데? 고토를 보면 말이야. 그 녀석은 이미 미친 것 같잖아?”
“음, 그렇긴 하지? 그 자식 너랑 결투에서 옷 다 벗고 쇼를 하는데 그걸 그렇게 즐기면서 할 수 있는 녀석이 또 어디 있겠냐. 게다가 싸우면서 발기까지 하는 녀석…, 참….”
희상은 말하다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걸 보면 사실 미친 거랑 미친 척 하는 거랑은 거의 차이가 없어 보여. 미친 척 한다는 건 위협이나 협박 따위의 말로는 통하지 않잖아? 행동으로 보여 줘야 해. 일단 행동에 들어간다는 건 미친 녀석보다 더한 미친 짓을 한다는 건데 그건 미치치 않고서야 할 수 없는 거지 않겠냐구.”
“그렇지, 미사일을 날린다 날린다 반복하며 엄포 놓으면서 못 쏘는 것보다야 그냥 한방 날려 버리는 게 진짜 미친 녀석이지.”
“그래, 근데, 고토 녀석 훨씬 질이 나쁜 건, 거기에 이유가 없다는 거야. 이익과 이해관계를 따지기 때문에 미친 척도 하고 그러는 건데 녀석은 이유가 없잖아?”
“그럼 결국 고토 녀석 더 나쁘게 미쳤다는 거군.”
하하하. 희상이 웃는다.
“그래 사실, 이론 같은 건 다 별 필요가 없어. 고토는 그냥 이유 없는 비정상인 걸지도 모르지. 아마 경무 녀석이 이론 어쩌구 하는 걸 들었다면 신발 밑창이나 열심히 긁어 대는 소리라고 할걸?”
희상은 고토가 위험해 보이긴 하지만 흥미롭다고 했다. 그래서 이론이 적용되지 않을까 생각했고. 이론으로 분석하면 녀석을 좀 더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대책도 세울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고 말했다. ‘내가 봐도 녀석은 단순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보인다’라고, 결국엔 희상 스스로 단정을 내리며 이론과 가설에 회의를 보인다. 하지만, 공허한 울림으로만 들릴 수 있는 이론은, 그가 나름대로 고토라는 녀석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이었다. 분명, 충분한 가치를 지닐 것이라고 태정은 생각했다.
“하지만, 미친 척하는 녀석의 미친 행동에는 다 이유가 깃들어 있다는 거 아닐까? 그저 미친 것처럼 보이길 원한다는 그 이유 하나라도, 이유가 아예 없는 것보단 파악하기 쉽겠지. 아직까지 고토를 미친 척하는 녀석의 범주 넣고 보면, 고토 녀석의 일거수일투족에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고…, 음?”
태정이 진지하게 말하는데, 희상이 녀석 말없는 미소를 띠고는, 그저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기만 한다. 이유를 묻듯, 태정이 눈썹을 올려도 아리송한 미소를 지우지 않는다.
“흐음, 역시 신경이 쓰이는가 보구나. 고토한테 말이지. 난, 니가 그 자식한테도 별 반응이 없길래 넌 역시 모든 사람한테 무디다고 생각했어. 아, 이건 감탄의 의미라구.”
“어떻게 신경이 안 쓰이겠어. 녀석이랑 싸울 때 자식 물건이 굉장히 신경 쓰여선 주먹도 못 내밀었잖아.”
녀석과의 결투를 우스개로 입에 올리고, 푸하핫 하고 희상이 웃는 걸 보니, 지나간 격투가 농담거리가 될 만큼은 시간이 흘렀다. 되도록 빠르게, 과거는 흘려보내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는 게 좋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태정은, 자신이 무디다는 게,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지나간 일에도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이번엔 또 녀석이 뭘 생각하는 거지?”
“어쨌거나 경무가 결투장을 띄운다고 하니까, 일단 먼저 고토의 반응을 봐야겠지.”
“그래….아, 그러고 보니, 녀석이 두고 보라고도 말했었어. 파친코에서 말야.”
“그래…? 고토답군…. 원래 미치광이 이론에서 미치광이는 상대의 반격을 용납하지 않아. 반드시 보복을 한다구. 뭐, 고토 말대로 두고 볼 수밖에 없겠는데.”
“아니, 아냐, 희상아. 그 자식 말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을 것 같아. 고토 녀석은, 다른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 두고 보라는 건 분명 뭔가를 꾸민다는 거잖아. 이번에 반복된 배지 강탈이라곤 생각되지 않아.”
“다른 거? 다른 뭔가라니? 예를 들면……?”
“예를 들자면, 조선인 사냥.”
“조선인 사냥?”
태정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희상의 목소리가 커지고 눈이 점점 커졌다.
* * *
“음? 이젠 다 나았네? 좀 더 간호해 줄까 했더니.”
1주일 만에 보는 다카기 상은 여전히 반갑다. 다카기는 오늘도 어김없이 그녀가 선호하는 자리에 앉아 웃으며 태정을 올려보고 있었다.
“회복력이 빠르거든요. 1주일이면 죽다가도 살아날 수 있다고요.”
“흐응…, 그 나이엔 그렇구나. 아니 그런데, 지금 젊다고 자랑하는 거야? 내 앞에서?”
나이에 예민한 스물아홉 살의 다카기는 태정에게 눈을 흘깃한다.
“아녜요, 그리고 다카기 상도 충분히 젊어요.”
“나보다 열 살이나 더 어린, 애한텐 그런 얘기 듣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전, 그런 말을 다카기 상한테 듣고 싶지 않구요. 전 어리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다카기 상이 그렇게 말하면 어려질 수밖에 없잖아요.”
“흐음……, 그러면 내가 테짱을 어리게 만든다는 거네?”
“그런 거죠.”
그리고 때로 다카기는 태정을 완전한 성인 남성으로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태정은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는다.
“그렇게 들으니까 지금 내 위치가 그렇게 나빠 보이지도 않잖아?”
태정과 다카기와 눈으로 웃음을 주고받으면서, 간단한 잡담을 나누었다. 이제 슬슬 다카기와의 대화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이 들 무렵, 실례합니다만… 이라고 그들 옆에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객장의 손님이라고 판단한 태정의 몸은 즉시 그쪽을 향해 돌아가 머리를 살짝 끄덕이고, 인사와 동시에 직업적인 말을 자동적으로 읊는다.
“네, 손님, 필요하신 게…….”
태정의 말이 잦아들었던 것은 상대가 상대였기 때문이다.
태정의 눈앞에 서 있는 손.님.은, 국사관의 회장 고토 마사키였다.
살짝 숙인 고개를 들자 빙글빙글 웃으며 그 고토가 태정과 다카기를 번갈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이, 여기서 일하나? 아무튼 반가워.”
저으기 예의 바른 말투고 태정과 다카기의 주의를 끌었던 고토는 태도를 바꿔, 꽤 건들거리며 손을 내밀고는 악수를 청한다. 이 녀석이 어떻게……. 난데없이 급습을 받은 사람 모양으로 순간 굳어진 얼굴의 근육을 태정은 펴지 못했다. 하지만, 반사적으로 손이 나가―악수는 거절하는 게 아니다―태정은 녀석과 손을 맞잡고, 맞잡은 그것을 두어 번 흔들었다. 누구냐고 다카기는 호기심 어린 눈과 말투로 태정에게 물었지만, 고토의 소개는 생략, 무시한다.
“잠깐만요, 다카기 상.”
태정은 그저, 다카기에게 양해의 말을 구하는 것으로 누구냐는 다카기의 물음의 답을 대신했다. 자칫 황급해질 수 있는 동작을 최대한 억제해 침착함을 가장하고는, 고토의 팔을 꽈악 붙들어 밀며 태정은 장소를 이동했다.
“무슨 일이지?”
“아까 그 여자랑 깊은 사인가 보지?”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하핫, 맞군 맞아. 내가 뭘 할 것 같나? 응? 그래서 걱정이 되나보지?”
자신의 영향력에 대해 과신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대뜸 고토는, 자신이 태정에게 가할 어떤 위협적인 요소가 도사리고 있음을 넌지시 내비치는 것이다. 고토는 얼굴에 비죽이 웃음을 흘리면서, 상대에 대한 호의가 아니라 적의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내가 걱정되는 건, 이렇게 한가하게 널 상대할 시간이 없다는 것뿐이야. 난 이만 가보겠어.”
“흐응…, 그래 가봐. 나도 한가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니까… 여기서 바쁘게 놀아야 되거든.”
“뭐라고?”
태정은 멈칫, 옮기던 걸음을 세웠다.
“이거 왜 이러시나 나도 놀려고 이곳에 온 것이라고. 손님이야 어엿한 손.님. 그리고 넌 서비스를 담당하는 종업원이고, 빨리 일하러 가봐야지? 파친코보이?”
고토는 태정의 목에 달려 있는 검은색의 보타이를―유니폼이었다―반듯하게 잡아 당겨 주더니, 그럼 열심히 일하라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태정을 지나쳤다.
* * *
“아까 전에 누구였어? 친구?”
다카기의 호기심에 찬 눈은 태정이 객장을 바쁘게 돌아보고 온 지금까지도 그대로였다. 태정이 그녀의 곁을 지나갈라 치자 태정의 허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찌르면서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어보는 것은 아까, 그 고토에 대해서인 것이다.
“그냥 좀 아는 사이예요. 친구는 아닙니다.”
태정은 다카기 상에게 고토에 대해 주의를 주어야 하는지를 생각하지만, 곧 그럴 필요성까지는 느끼지 못한다. 괜찮겠지.
“음, 완전히 테짱이랑 다른 타입이던데?”
“그런가요? “
“음, 그래…….”
다카기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태정을 바라보기만 한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눈인 것을, 그것을 말하지 않고 태정이 먼저 말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음… 역시, 결국 안 묻네? 나는 테짱이 묻기를 기다린 것인데…. 대개 다르다고 하면 궁금해 한다구…. 다른 사람과 자신이 어떻게 다른지.”
아…, 그것이었군. 말하고, 듣고, 비교하고 비교 당하고 평가하고 평가당하는 말들 말이다. 묻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어 한다면 태정은 기껍게 질문을 던져 준다.
“어떻게 다른데요?”
다카기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테짱이 물었으니 뭐, 답해주지…라고, 뒤늦게야 질문을 던진 태정의 실수를 용서한다.
으음…, 답하기 전 그녀는 조금 뜸을 들였다.
“테짱보다 더 잘 생겼어.”
푸후훗 새어 나오는 웃음에 그녀는 손으로 살짝 입을 가린다. 태정도 살짝 일었던 긴장을 풀고―말하기 전 뜸을 들이는 것에, 사람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피식, 다카기를 따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 녀석, 잘 생겼어요.”
다카기의 말은 웃음으로 끝날 농담만은 아닌, 사실이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고토의 외관이 나무랄 데 없다는 것이 문득 새로운 사실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머리의 터럭을 모두 위로 세워올리는 것이 녀석의 얼굴을 확실히 돋보이게 할 만큼―고토는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얼굴의 선에 군더더기가 없고 콧날은 반듯했고 호선을 그리는 이마가 그런 코와 깨끗하게 맞물린다. 가무잡잡한 얼굴색은 자칫 날카로워 보일 수 있는 녀석의 길게 찢어진 눈과, 입가의 비뚤린 조소를 완화시켜 주었다. 그런 녀석의 꽤나 번듯한 외모를 태정이 지금 새삼 떠올려야 했던 건, 고토의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그 성격이, 겉모습을 늘 압도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다카기는 그녀와 함께 같이 웃어주는 태정에게 그게 아니라며, 거기서 웃으면 어떻게 하냐고 한다. 질투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면서 아무튼, 테짱은 어딘가 좀 둔하다고 본인을 앞에 두고 버젓이 말한다.
“뭔가 날이 닳아 있는 사람 같아. 테짱은. 아까 그 친구는 상당히 날카로웠고. 그게 다르다는 거였어. 둘이 나란히 있는데 굉장히 대조돼 보이잖아. 하나는 날이 닳고, 하나는 서 있고.”
다카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으음, 맞다고, 그런 느낌이라며 했던 말을 스스로 재차 확인했다.
* * *
날이 닳아 있다. 무디다. 머릿속에서 다카기 상의 말과 희상의 말이 포개어 겹쳐진다. 태정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지금, 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들의 말처럼 그는 무디게 살려고 했고, 둔하게 살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발바닥을 때려도 방싯거리며 울지 않았다는 이야기의 그 갓난아기는 자기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무뎌 지고 싶다는 건 역설적으로 무디어져야만 할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다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만 둘러봐도 신경을 바싹 곤두세운 채 날카로운 칼날 위를 디디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거기에 있었고, 그리고 태정은 그런 사람들이 가득 찬 세계에서 둘러싸인 채로 살아 왔다. 너무나도 투쟁적이기에 바깥세상과의 마찰로 외상이 끝이지 않는 사람들, 혹은 피해 의식이 암세포처럼 깊이 침투해 있지만, 그 끊임없는 고통을 속으로만 삼키는 사람들.
자신은 무디긴커녕 무척 교활한 건지도 몰랐다. 눈을 감고, 귀를 가리고, 입을 닫고. 닛코의 현명한 세 마리 원숭이처럼―태정은 항상 그들이 교활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고 난 아무것도 몰라요’라는 표정이지만, 편함과 안락과 쉼을 얻기에는 훨씬 유리한 것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 또한 어느새 산자루같이 되어가고 있지 않은가.
강해지고 싶어서 선택한 복싱은 그가 무뎌지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강해진다는 건 무디어 진다는 것이다’. 이 말은 태정에게 점차로 동어 반복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조태정은 조태정이다’라는 말처럼.
마취된 머리를 갖게 되면 더 편해질 수 있는 것인가? 복싱을 하면서, 키타무라 같은 무리들에게 얻어맞으면서, 무디게 견디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뎌지기 위해’라는 말은 아직 덜 그리 됐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원한다고 해서 바라는 것을 쉽게 얻을 수는 없었다. 그것을 못 얻는 이유를, 외부로부터, 또 타인에게서 찾는 것이 빠르고 더 쉽고 간단해 보였다. 그들이, 주변이, 모든 게 태정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는 것 같았다. 왜냐고, 그 이유에 대한 답을 강요할 때면 미처 마모되지 못한 부분이 툭, ―생각지도 못하게―튀어나왔다. 그것이 키타무라의 사이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그때, 싸움의 결과는 그런 것이었다…고 태정은 가끔 돌이켜 볼 때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태정은, 강요했던 답이 없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태정을 ‘그저’ 싫어했던 것이다. 그것뿐. 그게 답이라면 답일 수도 있지만.
단순한 것은 단순함 그 자체를 미덕으로 알고 복잡한 변형을 시도하지 않는다. 옛날엔 키타무라였던 것이, 지금은 고토가 되어서 다시 나타난다. 이름이 바뀌든 무엇이 달라지든, 어차피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동일하게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태정의 앞에 나타날 것이었다. 완전히 외부와 단절 된 세상에서 고립된 삶을 사는 것이―죽은 것이―아니라면, 절대 피할 수 없었다.
태정은 여전히, 자신은 무디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무슨 말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확실히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동어 반복에서는, 새로운 사실을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나는 나야’ 따위의 말. 강한 것과 무딘 것이 동일 시 되면 강한 것도, 무딘 것도 무엇인지 알 수 없어져 버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더러 무디다고 한다. 그건 개미가 지네에게 했던 말과 유사한 성질의 말이었다.
수십 개의 다리를 지닌 지네에게 여섯 개의 다리를 지닌 개미가 감탄을 하면서 말한다. 지네 너는 그렇게 다리가 많은데 어떻게 그리도 잘 걸어다니니? (아니다. 기어다니니? 라고 물었을 거다 아마.) 그리고 그 비결이 있냐고 개미가 묻자, 지네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잘 기어다니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개미는 지나갔고, 지네는 답을 내려고 자신이 어떻게 다리를 옮기는지 다리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수십 개의 다리를 이리 저리 살폈다. 그러다 지네는 결국 가야 할 방향을 잃고, 다리는 엉망진창으로 꼬이게 되었다는 비참한 이야기였다.
지네를 떠올리면서, 태정은 더 이상 다카기 상이나 희상의 말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 * *
“어이, 이제 끝나나 보지?”
대개 어린 아이들은 장난을 어디에서 그쳐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장난치는 녀석은 고토, 태정은 그에게 손짓하며 다가서는 고토를 바라보았다.
근무 시간에 난데없이 나타났던 고토 녀석은, 태정이 시야에 들어오면 손가락을 까닥까닥하며 그를 불러서는, 구슬이 떨어졌다느니, 재떨이를 비워 오라고―단 한 개비의 담배꽁초가 있었을 뿐이었다―하면서 시시콜콜한 일에 트집을 잡아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장난을 피웠다. 녀석의 말대로 고토는 어엿한 고객이었기 때문에, 태정은 까다로운 손님을 만난, 지극히 운이 나쁜 날이라 치부하고는 교육받았을 때―이곳의 모든 직원은 일정 시간 교육을 받아야 했다―의 매뉴얼대로 대응했을 뿐이다.
센터 앞의 주차 공간이 아닌 곳에 서 있는 커다란 검은 독일제 승용차―헤드라이트가 사람 눈처럼 커다랗게 박힌 벤츠 시리즈였다―에서 나오는 인간이 누군가 시선을 주었더니, 그 누군가는 태정의 앞으로 다가와 인사를 했고, 그건 바로 고토였다.
태정이 센터 밖으로 나온 것과 동시에 녀석이 차 밖으로 나왔다는 건, 고토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의미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이제까지 장난질을 곱게 받아 주었는데 그걸로는 부족하다는 것인지.
“흐음, 손에 밴드를 붙였네?”
태정은 흘깃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고객의 발에 손을 밟혔을 때의 대응법 같은 건 매뉴얼에도 없었고 교육받은 기억도 없었다. 고토가, 버젓이 태정이 보는 데서 바닥에 담배를 버릴 때 태정은 그저 ‘이런 건 바닥에 버리시면 안 됩니다, 손님’이라고 말하며 주워 들 수밖에 없었다. 찰나, 녀석은 꽁초를 줍는 자신의 손을 발로 밟아 눌렀던 것이다. 지긋이, 하지만 확실한 압력을 실어, 담배 불을 끄듯이 발목을 돌리고 비틀어, 태정의 손등을, 신발 밑창으로 비벼댔다. 고토가 발을 뗄 때까지 손은 그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녀석은 발을 떼면서 ‘불이 확실히 안 꺼진 것 같아서’라면서 비뚤어진 입으로 웃었다.
손등이 심하게 까져서 피가 났기에, 태정이 1회용 밴드를 붙여 놓은 것을 보고는, 또, 밴드를 붙였냐면서 고토가 웃는 것이다. 하지만 그저 그 손등을 확인하려 이 늦은 시각까지 이곳에 있었던 건 아닐 것이다.
고개를 내 저으며 태정은 고토를 상대하지 않고 센터를 돌아, 원동기 파킹 장소에 세워둔 스쿠터를 찾으러 가지만 녀석이 그곳까지 따라와 태정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조그마한 회색 스쿠터 앞에 서서, 태정이 열쇠를 꺼내려 주머니를 뒤적이자, 이게 네 애마냐면서 고토가 툭툭 발로 태정의 스쿠터를 건드려 보는 것이었다.
“크큭… 굴러가긴 하냐? 이거?”
멋지게 빠진 커다란 레이싱 바이크는 아니지만, 태정은 이 작달막한 혼다를 많이 귀여워해주고 있었다. 안전하고 매우 쓸모있는 녀석으로, 학교와 아르바이트를 다니기에는 아주 평범하고, 실용적이고 기동성이 조았다(조고는 그 구성원들의 거주지가 제각각으로 흩어져 있어 학생들의 원동기 통학을 허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가끔은 다카기 상을 태울 수도 있고 말이다. 태정은 그저 칙칙한 회색의 스쿠터를 앙증맞고 사랑스럽다면서 좋아하는 다카기를 떠올렸다. ―지금 기다리고 있을 다카기 상을.
“빠각!!”
머릿속의 다카기 상이, 뭔가 커다랗게 부서지는 소리로 단번에 사라진다.
씨팔. 소리의 원인은 고토의 발을 한 번 쳐다보는 것으로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녀석, 구두로 퉁퉁, 윈드실드를 쳐대는가 싶더니, 힘껏 걷어차 완전히 부숴놓은 것이다.
이 녀석 도대체 원하는 게 뭐지. 남의 스쿠터를 발로 쳐부숴서 얻는 게 무엇인가 말이다. 하지만, 묻지 않는다. 태정은 녀석에게 묻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화를 내지도 주먹으로 얼굴을 쥐어박지도, 멱살을 틀어쥐지도 않는다.
“이런 어떻게 하지? 지금부터 그녀와 아니, (고토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마 다카기였지, 이름이? 다카기 짱과 심야 데이트잖아? 아니, 바로 베드 인인가? 그래 고상하게 메이킹 러브라고 말해주지 뭐.”
태정은 덜렁거리는 윈드실드를 살펴보다가, 스쿠터를 포기하고, 다카기가 기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고토는 그들이 친한 사이인 양, 태정의 곁에 바싹 붙어 따라 걸으면서 치근거린다.
“다카기 짱은, 어떻게 너 같은 녀석을 좋아할 수 있는 거지? 응? 조오센징을 말이야.”
예의 그 조센징을 들먹이며 고토가 태정을 이죽였다.
“아아, 그래. 그녀는 네가 조센징이라는 걸 모르고 있는 거군? 테짱이라고 하는 걸 보니 말야. 조센징은 이름에 목숨을 걸던데 넌 아무래도 상관없나 보지?”
녀석은 다카기 상이 사실을 모른다면 냅다 달려가서 확성기에 태정의 출신을 떠들어대기라도 할 것 같은 기세였다. 태정은, 고토가 마음껏 엉터리 추측을 하도록 내버려둔다. 오류를 바로 잡아도 고토는 끊임없이 오류를 만들어 낼 인간이었다.
“흐응… 사실은 너도 창피한 거로군? 이름을 숨기다니……, 하긴, 넌 다른 조센징이랑은 좀 틀리더군. 싸움에 져놓고도 아무렇지도 않았지? 조센징들은 모두 싸움에 목숨 거는 줄 알았는데, 의외더군.”
피식. 계속되는 멋대로의 추측에 입가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웃음은 녀석의 모순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의외로 고토라는 일본 녀석은 조센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대개 일본인들은 재일인들의 이름에 대한 의식에 대해 이해가 없었다. 이름을 바꾸는 게 왜 비겁한 건지. 왜 바꾸는지조차 흥미도 없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녀석은 이름을 숨기는 게 비겁하다는 것도 알고, 태정이네들이 무엇에 자존심을 거는 줄 아는 것이다.
거미가 싫어서 거미의 습성에 대해 연구하다가 결국 거미학자가 되어버렸다는 건가?
유사한 케이스의 이야기라 생각된 건지 문득 불쌍한 거미 학자의 일화가 머리를 스쳐지나가지만, 그리 비슷하지만도 않다. 그 거미 학자는 거미를 피하고 싶어 그것의 생태에 대해 공부를 시작했다지만, 이 고토 녀석은 별로 태정을 피하고 싶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오히려 태정과 부딪치고 싶어 안달을 내지 않는가.
“우리 조센징에 대해 굉장히 잘 아는데 그래?”
태정은 빙긋이 고토에게 웃어 주었다. 그저 횡단보도의 신호가 빨리 바뀌기만을 바라는 웃음이었다. 길만 건너면 다카기 상이 기다리고 있을 터이고, 그녀를 만나면 녀석을 떨어낼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좀체로 신호는 바뀌지 않았다.
“네 녀석, 뭘 웃는 거지?”
고토는 끊임없이 흘러넘칠 것만 같았던 여유를 거둬들인다. 그러곤, 갑자기 목소리가 마뜩찮다는 모드로 바뀌어 커졌다.
“뭐가, 우습냔 말야! 엉? 싸움에 져놓고도, 무릎 꿇고 사과할 때도 우스웠냐? 우스웠냐고?!!”
우스울 리 없었다. 태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게 네가 원한 거 아니었나?”
“그래, 내가 너무 원하는 대로 되어서 이상했지. 오히려 묘하게 기분이 나빠지더라고. 뭐, 이번에 좀 다를까.”
“이번? 그래서 또 배지를 가져간 건가?”
배지, 그게 모든 것의 발단이었지. 그리고 녀석은 똑같은 일을 두 번 반복했다.
“그래, 배지에는 여전히 신경을 곤두세우는군? 왜 또 돌려받고 싶나?”
“이제, 배지는 아무 쓸모도 없어.”
“정작 쓸모없다면서 기를 쓰고 돌려받으려고 했던 건 누구였더라? 쓸모가 있는지 없는지는 네가 정하는 게 아냐, 내가 정하지. 자아∼, 이젠, 내가 그걸 어떻게 할까?”
고토는 어린이를 상대하는 듯한 질문을 태정에게 하며, 상대의 호기심을 끌어내려 한다. 녀석의 의도가 빤하게 보였만, 그것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아주 효과적으로 태정의 의문을 자극한다. 그것이 ‘사냥’과 관계있는지를 태정은 묻고 싶었던 충동을 느꼈던 것이다. 아니다. 관계가 없다면, 그렇지 않다면 괜히 입에 올릴 필요가 없다. 고토의 입에서 나오게끔 만들어야 했다.
“마음대로 하지 그래. 어차피 시시한 놀이에 동참할, 미끼를 낚는 미끼겠지. 그때 두고 보라고 한 건, 배지 하나를 더 추가한 것 그런 거였군.”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나? 그 배지가 뭘 의미하는 건지 네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고토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다시 차로 발걸음을 돌렸다. 용의주도, 태정이 생각하는 바로 그걸 의미하는 것이라면 입에 담지도 않고 태정의 생각을 읽는 것처럼 말하고, 그것이 아니라고 해도, 또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이 말하고 있다.
쯧쯧 실망이야… 녀석의 혀를 차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새 태정더러 너도 너의 길을 가라는 듯, 신호등의 신호가 바뀌었지만, 태정은 선뜻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난, 아무것도 몰라.”
차문을 여는 고토의 등 뒤로 태정은 낮게 말을 던졌다.
“글쎄, 알고 있을 텐데?”
녀석의 몸이 차안으로 사라지고 탁, 하고 문이 닫힌다. 시동이 부드럽게―엔진 소리가 전혀 나지 않았다―걸리고 매끄럽게 차가 출발했다.
태정은,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타닥, 타닥, 타타타타닥
차가 굴러나가는 것과 보조를 맞추듯 발걸음이 절로 옮겨지다가 걸음은 달음질이 되어버렸다. 아직 속력이 붙지 않은 차를 세울 것처럼 태정은 뛰기 시작했다.
“도대체 뭘 말하는 거지?!!”
휘말리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휘말려 있었다. 녀석 뒤를 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쫓고 있다. 묻지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묻고 있는 것이다.
“이봐 이봐 고토!! 뭘 뜻하는 거냐고!!”
타탕. 탕탕 태정은 달리면서 손을 뻗어 차의 트렁크를 쳐댔다.
“이거 세워 이 자식, 차 세워 차 세우라고!! 안 들려?”
하지만, 차는 더 속력을 낸다. 차가 힘을 싣는 순간의 느낌에, 태정은 자신이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걸 별안간 자각하곤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아니, 쓸데없는 짓이 아니었나?
차가, 섰다.
출발처럼 부드럽게 차가 멈추면서 고토의 차는 십수 미터 정도의 전방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차는 오랫동안 정지해 있던 것처럼 정적 속에서 파묻혀 있었다. 고토는 나올 생각이 없는 것이다. 고토는 태정을 기다리고 있었고 태정은, 더 이상 가지 말아야 했다. 차를 세웠지만, 그건 바보짓이었다. 바보짓에 후회할 것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경고하지만, 태정과 요동조차 없는 차와의 거리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었다. 이대로 더 가야 하나.
다카기 상.
태정을 기다리는 건 고토뿐만이 아니었다. 홀연 다카기 상이 떠오르고 가야 할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다. 태정은 다카기가 기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긴가? 이정표가 되는 신호등이 저기 멀리에 서 있다. 다카기 상이 혹 보이지 않을까 눈으로 더듬지만 아무것도 눈에 띄진 않았다. 눈에 띌 리 없었다.
“달칵.”
태정의 곁에서 차 문이 열렸다. 어느새 차 앞에 다다랐던 것이다. 다카기 상을 생각하면서도. 어느 새인가 태정은 차 앞에 다다라 고토의 차문이 열리는 것을 지키고 서 있었다. 차안에서 고급스런 가죽 시트의 냄새가 풍겨왔다. 고토의 목소리를 함께 실어서.
“재밌는데 더 달리지 그래?”
약간 벌어진 문을 손으로 잡아 활짝 열고, 몸을 굽혔다. 그리고 태정은 고개를 차안으로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서 고토는 시트에 비스듬히 몸을 묻고, 팔짱을 끼고 있었다. 똬리를 감은 커다란 뱀. 태정에게 고토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 뱀의 얼굴에는 목소리의 만족스런 울림대로의, 조소가 희미하게 어른거렸다.
“제발, 그만 둬.”
질문은 접어 둔다. 묻는 것은 포기한다.
“뭘 그만 두라는 거지?”
“그게 무엇이든.”
“왜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난 네 말을 들었어. 그리고 넌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약속을 지키라…, 좋아 타.”
“뭐?”
“약속을 지키겠다고.”
“어떻게 ? 네가 약속을 지킨다고 내가 어떻게 알지?”
“그러니까 일단 차에 타라구. 약속을 지킬지 어떨지. 알고 싶으면 타.”
태정은 잠시 머뭇거렸다. 다시 한 번 다카기 상을 두고 온 방향을 향해 몸을 돌린다. 그곳엔 사람의 인영 하나가 어른거렸지만, 남자인지 여자인지 실루엣이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멀리 온 거다.
태정은 누군지 모를 그 사람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고토의 차에 올라탔다. 이미 태정의 다리는 방향을 잃은 지네의 다리처럼 엉키고 있었다.
* * *
「배지를 주지」
그것이 고토가 태정을 동승시킨 이유였다. 녀석은 아직까지 태정이 배지에 집착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쓸모없다는 태정의 말에도 불구하고.
배지는 조고생의 수만큼 있었다. 고토가 원한다면 그가 졸업할 때까지 매일같이 배지 놀이를 해도 끝이 나지 않을 것이었다. 태정은 배지를 돌려받음으로 그가 더 이상의 배지를 유희거리로 삼지 않는다는 의사를 확인하려고 했던 것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배지에 집착했던 것이고, 그런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태정은 형식과 양식을 갖춘 합의점 도달을 원한 것이지만, 고토에게 그런 것을 바란 것이 무리였던 것이다. 배지를 주겠다는 말은, 상당히 즉흥적으로 보였다. 태정이 진지하게, 그리고 절실하게 뛴 것만큼 배지에 무게를 두었다면, 녀석에겐 그것이, 더 달리지 그랬느냐고 비웃으며 추켜올린 한쪽 눈썹만큼 가벼웠을 것이다.
클럽으로, 고토가 행선지를 간단히 말하자, 운전기사는 과거 이미 여러 번 그곳으로 고토를 나른 듯, 차를 출발시켰지만, ‘놋크’로 가기에는 너무 시간이 늦었다고 걱정을 했다.
“도련님, 자꾸 이렇게 늦게 들어가시면 제가 난처해집니다. 의원님이 아시면….”
“시끄러워 당신은 입 닥치고 운전이나 해.”
고토가 일방적으로 차갑게 말을 자르자, 운전석에서는 ‘휴우’ 하고 가는 한숨이 들렸다. 나이 지긋한 중년의 사내에게 안하무인격으로 말을 하는 녀석도 놀라웠고―아니 평소 고토를 생각하면 놀라운 게 아니다―도련님이라는 말도 의외였다지만, 무엇보다 의원이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의원?”
의원님…, 이란 소린, 이 녀석 아버지를 지칭하는 건가? 무슨 말을 들은 건지 태정은 혼잣말로 의문을 표하지만, 어이없었는지 못들을 말을 들은 것 마냥 소리가 좀 크게 나간 모양이었다.
“아아, 네, 의원님이요. 고토 노부유키信行 의원 모르십니까. 이런 도련님, 친구 분은 모르셨나 보지요? 도련님이….”
“내 말 못 들었어? 입을 바늘로 꿰매줄까?”
태정에게 말을 건네던 것이 고토에게 이어지자마자 사내의 말은 사납고 가차 없이 잘렸다. 그것으로 운전석 사내의 말은 꼬리 잘린 듯 반 토막이 났지만, 굳이 뒷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능히 짐작 할 수 있었다.
고토 노부유키 의원.
태정은 그를 알고 있었다. 과거 내각 개편 때마다 몇 번인가 수상감으로 거론되었던 고토 노부히로가 근자에 타계하고 그의 뒤를 이은 2세 아들이 바로 고토 노부유키였다. 치바 현을 정치 기반으로 하는 고토 가家는 말하자면, 정치 명문이었다.
겨우 몇 년 안 된 새내기 의원이 아버지가 쌓아 놓은 세력을 발판삼아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었는데 그 목소리라는 게 항상 총련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카메라를 잘 받는 의원은 매스컴에 상당히 자주 오르내렸는데, 보통학교를 다니지 않는 총련계의, 재일인이라면 모두 고토 노부유키를 알고 있었다.(재일은, 정치적으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타계한 고토 노부히로는 보수 우익의 대표적인 목소리였고 그 유지를 받드는 것은 2세 의원으로서 당연한 것이었다. 북송선, 미사일 문제와 관련하여 강경 발언을 하고, 야스쿠니 신사 참배객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고 말이다.
고토 노부유키는 정계에서 차근차근 그 목소리를 키워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고리타분한 우익이라는 인식을 주기보다는 젊고 준수한 2세 의원, 소신 있는 발언을 하고 있다는 이미지 메이킹을 하고 있었고 또 그것은 성공적으로 유권자의 머리에 박히고 있었다.
국사관에서 회장을 하는 것을 본다면 분명 평범하지만은 않은 녀석이었겠지만, 평범을 부정하는 것 이상의 매우 특별한 배경이었다.
도를 넘는 고토 마사키의 적개심, 적대감이 비이상적으로 표출되는 건 그런 집안을 생각하면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고토는 아버지보다도 더 강경하고 열성적인 우파 당원일 뿐이다. 아마도 고토의 조고, 재일에 대한 적개심은 거의 본능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몸과 눈에서 흘러넘치는 저 오만함도 설명이 될 수 있었고 말이다. 그런 배경에서 태어나, 지금껏 도련님이라 불리며 자랐던 거다. 저런 걸 타고 났다고 하는 건가?
「조, 너처럼 어릴 때는 겸손보다 오만을 먼저 배워야 해.」
그건, 관장이―아라시의 하마다 관장 말이다―태정에게 했던 충고였다. 관장은 어느 날 청소년 아마추어 경기에 참가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했었는데, 태정은 물론, 거절했다. 너무 깨끗하게 거절한다면서 관장은 섭섭해했지만, 더 이상의 종용은 하지 않고 태정의 옆에 앉더니 갑자기 알리가 타이슨의 등장을 두고 한 말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뜬금없긴 했지만, 그건 너무 유명한 일화라 태정은 알고 있다고 대답을 했다. 무덤에서 꽃이 핀다고 했었지요. 관장은 그래, 그거라면서 무릎을 쳤다. 일본 복싱계는 지금 희망이 없어. 다 죽어가고 있는 거지. 조 나는 네가 꽃이라고 생각한다. 그 알리가 본 꽃, 타이슨 말이다. 라고 했는데, 관장은 결국 경기에 참가해보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하마다 관장이 워낙에 언행에 과장이 심했고, 화려한 수식을 좋아했고 입에 기름칠한 듯 말을 잘했기에 태정은 싱겁게 웃었다. 관장님, 꽃이랑 타이슨 이야기는 너무 부풀리셨는데요. 그래서는 안 넘어간다고 농담처럼 넘기자 관장은, 미간을 잔뜩 좁히며 정색을 하고 말했다. 말은 그렇게 이해하는 게 아니라고, 칭찬은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어린 녀석이 그런 게 겸손이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일장 연설을 하더니, 마지막으로 겸손과 오만의 우선순위에 대해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겸손보다 오만을 배우라는 말이, 그저 입심 좋은 하마다 관장이 둘러치기 위해 즉흥적으로 갖다 붙인 말이었는지, 아니면 노老 복서의 진지한 철학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너나없이 겸손을 미덕으로 떠드는데 반해 그 한마디가 무척 색달랐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관장이 설마 고토라는 녀석의 오만함을 보았어도 그것을 배우라고 말했을까.
띠리리리리리…, 클럽으로 가는 중간에, 고토의 오만을 생각하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다카기의 전화였다. ―그녀에게 전화할 생각조차 못하다니! 태정이 연락을 취하지 못한 것에 대해, 그녀를 기다리게 한 것에 대해 미안해하며 사과의 말을 전하는데 고토가 갑자기 얼굴을 바싹 들이대며 웃었다.
“오호, 다카기 짱인가?”
말과 동시에 태정은 우윽―목에서 신음을 울렸다. 다리사이에 굉장한 압력이 가해졌던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고토가 사타구니를 세게 틀어쥐고 있었다. 씨팔―엉겁결에 욕이 입 밖으로 튕겨져 나왔다. 무슨 소릴 하냐고 전화 속으로 다카기 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녀의 질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지만 절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거세지는 압력과 통증을 견디며 태정은 다카기 상에게 무슨 말을 건넸는지도 몰랐고 어느새 전화는 끊겨 있었다.
“어쩌지 그녀에게 못 가서? 이쪽이 상당히 아쉽겠는데.”
고토는 여전히 페니스를 움켜 쥔 채로―비틀기까지 하면서―오늘 예정이 어긋난 것에 대해 염려하며 걱정해주는 척을 한다. 눈이 가늘게 웃고 있었다. 씨팔―어떻게 응대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니, 나오는 건 욕밖에 없었다. 이 손 치우라고, 태정이 목을 울리며 잇새로 말하자, 고토가 사타구니에 가한 힘을 풀고 손을 뗐다. 떼는가 했는데, 툭툭 치고는 다시 손을 다리 사이에 한참 올려놓았다.
“이거, 떨어지지 않게 잘 돌보라고.”
키킥 웃는 고토를 보며 태정은 씨팔이라는, 또 한 번의 욕을 나직이 뱉는 것밖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 * *
클럽의 분위기는 들어가는 입구부터 훨씬 스산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이전보다 훨씬 늦은 깊은 밤이었고 가장 인적이 드문 때이니 그렇기도 하다.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불빛이 없고, 클럽의 문으로 인도하는 건 계단을 딛는 발목 아래 웅크린 어둠뿐이었다. 앞장서서 성큼성큼 암흑으로 깊이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간 녀석이 문 앞에서 뭔가 덜컥, 부스럭대는 소리를 댔다. 뭘 하는가 태정은, 계단 벽에 기대어 어둠 속을 움직이는 형체를 주시하고 섰다. 그것의 움직임은 매우 참을 성 없이 보인다. 부산한 고토의 움직임도 잠깐, 피싯, 피싯 소리와 함께 갑자기 균일하지 못하게 일렁이는 불빛이 생겼다. 라이터가 점화 소리와 함께 빛을 내는 것이다. 고토가 한 손에 라이터를 받쳐 올려 들고, 태정을 보고 있었다.
“그게 바로 네 녀석이야.”
영문 모를 소릴 고토 녀석이 던졌다. ‘그것’이 어떤 건지는 몰라도 좋은 것이 아닌 것쯤은 알겠다. 태정을 올려다보는, 그런 낮은 물리적 위치에서도 이미 태정을 자신의 발아래 두고 있다는 말투였다. 고토는 혹, 태정이 이해하지 못할까 친절을 가장해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거기 서 있는 것 말야. 내려오긴 하지만, 계단 중간에서 멈춰 있지. 그게 바로 네가 겁쟁이란 소리라고.”
무슨 소릴 하는가 했더니, 녀석은 무슨 만화 잡지나 여성 잡지의 심리 테스트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한다. 고토의 말은 비교의 형태를 띠고 있지는 않지만, 분명 비교 분석이었다. 끊임없는 상대의 비하를 통해 우월감을 강조하는 것이다.
“아아 그래, 넌 용감하고 말이야. 어둠 속의 계단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그렇게 단번에 내려가다니 용감하군.”
복싱에서는, 상대의 몸의 위치가 높을수록 자세를 낮춰 파고들기가 쉬웠다. 초보자도 알 만한 간단한 이치다. 고高자세인 고토의 악의적 장난에, 태정은 박자를 맞춘다. 몸을 낮추고, 상대를 올려준다.
겁쟁이란 소릴 듣고도, 별 생각 없이, 어려움 없이 태정은 그렇게 될 수 있었다. 내려치는 펀치에 반사적으로 몸이 반응하듯이. 하지만 태정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며 득의만만한 녀석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벽에 고정된 장식용 등잔 케이스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찾던―아마도 열쇠라고 보였다―녀석의 움직임도 굳어 있다. 라이터를 켠 것은 열쇠를 위한 것이었을 터인데도, 그 불은 태정을 향해 들려 있다.
“하―! 네 입장을 잊어버렸군? 그런 건방진 소릴 해?”
나름대로 장단이 어울리는 말이었지만, 고토에겐 그렇게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별로 의미 없이 던진 농담에―하긴 상대가 누구도 아닌 고토였다―정색을 하고 대번에 태정의 입장을 상기시킨다. 하지만, 잊어버리면 큰일나기라도 할 것 같은 태정의 입장이란 게 무엇인가. 태정은 고토가, 자신이 어긴 약속을 이행하겠노라는 말을 듣고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 게 농담 한마디 던져도 안 되었을 곤란한 입장이었나.
“내 입장은 아주 정당한 입장인데. 잊어버렸다는 건 그걸 말하는 건가?”
머리 위쪽 벽에 붙박이로 장식되어 있는 글라스로 된 등잔 박스에서 손을 빼낸 고토의 손에는 열쇠가 들려 있다. 누군가와―아마도 같은 무리, 일당들일 것이다―장소를 공유하는 모양이었다. 꺼낸 열쇠로 문을 여는 녀석의 옆얼굴엔, 슬쩍, 초승달의 반쪽 같은 혼자만의 웃음이 떠올랐다.
“저엉당? 하핫”
그 웃음은, 상대방을 버젓이 조롱하는 혼잣말과 커다란 비웃음으로 뒤바뀐다. 그건, 자신의 선에서 모든 논리를 차단하는 웃음이었다. 상대의 말은 바닥으로 동댕이친 채, 그저 한 번의 웃음으로 자신의 논리만이 옳다고 정해버리는 그런.
“아, 들어와.”
여전히 웃는 표정을 유지하면서, 고토는 문을 열고는 태정에게도 한편으로 길을 내주었다. 고토가 잡고 있는 반쯤 열린 문에는 클럽의 임시 폐쇄를 알리는 글이, 붉은 테두리 안에서 뚜렷하게 여전히 그곳이 폐쇄중임을 알리고 있었다. 아아, 이곳은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태정에게 들어가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두 번 째의 경고를, 태정은 또 한 번 무시해야 했다.
태정이 클럽의 내부로 먼저 발을 들여놓자, 등 뒤에서 문이 기세 좋게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딸칵 거리는 소리와 함께 낮은 조도의 등이 켜졌다. 어두운 빛에 드러난 내부는, 결투 당시의 보았던 그곳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냈다. 화려한 조명도 음악은 어딘가로 떠나 버린 듯이 음울했고, 이곳을 메운 사람들은 모두 사라져 적막하다. 마치 두 명만이 그곳에 남은 것처럼.
고토는 마치 이곳의 주인처럼 보였다. 열쇠를 쓰는 것이 그렇고, 등의 스위치를 올리는 것이 그렇고, 곧장 바를 향하면서 ‘어디 좀 앉지 그래’라고 손님에게 자릴 권하는 게 영락없이 오너의 그것이다. 태정에게 아무데나 앉으라고 하지만, 사실 바bar 주위로 늘어선 의자 외에는 딱히 적당한 자리가 없었다. 골목 싸움에 몰려들었던 흥분한 사내 녀석들로 인해 엉망이 된 내부는, 회복 된 것 같지 않았다. 태정은 그냥 그대로 서서―서 있는 곳은 당시의 싸움터, 무대 위였다―고토를 지켜본다. 녀석은 그나마 쓸 만한 바 테이블 앞에서 의자는 내버려두고, 팔을 뒤로 뻗어서는 몸을 바 테이블 위로 올려 그곳이 모두 제의자인 양 엉덩이를 걸쳤다.
“니들은 말야, 존재 자체로 부정당하고, 부정해. 정당한 입장? 이 땅에 빌붙어 사는 주제에. 네가 아무리 정당해봤자 조센징이라구. 죽을 때까지 그건 변하지 않아.”
고토는 태정이 표명한 ‘정당한’ 입장이란 말을 되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녀석은 뚜렷하게 태정의 입장을 다시 ‘이해시켜’ 주었다. 한 팔로 지탱하고 있는 상체가 옆으로 기울어져 있고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집게손가락을 태정을 향해 흔든다. 그 집게손가락은 태정 만을 가리키는 건 아니었다. ‘니들’이라고 말한 것에는 태정과, 그 외의 다른 모든 태정 일행, 즉 녀석이 이해하는 존재 자체로 부정당한 것을 가리킬 것이다.
태정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다.
‘처음부터 그런 구조’라는 소리다.
그리고 구조는 몇 마디 항의에는 바뀌지도 끄떡도 않는다. 그따위의 구조 속에선 태정이 구태여 정당한 입장에 집착할 이유도 고수해야 필요도 없다. 남아 있는 것은 가치를 떠난 사실뿐이다. 태정은 그에게로 한 발짝씩 다가가면서 고토가 확실히 듣도록 또박또박 말했다.
“아, 그래, 나는 조센징이야. 그리고 죽을 때까지 난, 그렇게 살고 싶다구. 그러니까 그냥 나를, 우리를, 내버려 둬줘.”
“뭐, 그렇게 살고 싶어? 그렇게 살고 싶은 게 아니라 살 수밖에 없는 거잖아. 핫하.”
오류를 지적해 뿌듯하다는 듯 으쓱한 녀석을 보면서, 태정은 쓴웃음을 삼키면서 고개를 저었다.
고토, 넌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겠지. 안 그래?
“아니, 살고 싶은 거야.”
단호하게 태정은 의지를 밝힌다. 어떤 형태이든 살고 싶은 삶인 것이다. 태정 일행의 존재를 부인한 고토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녀석이야말로 ‘그런 형태로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일지도 모른다.
냉정한 녀석의 한 쪽 눈이 가늘어지며 얼굴엔 불만스런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뭐가 살고 싶은 거야, 라고 콧방귀를 뀌며 태정의 말을 비웃지만, 여느 때처럼 그런 가벼운 무시만으로 불만을 털어 내지는 못한다. 미세한, 얼굴 근육의 못마땅한 구김이 여전했다.
“역시…, 마음에 안 들어. 네 녀석이 배지를 받으러 왔을 때부터 그랬지.”
“하지만, 넌 돌려주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이고. 이제 그만 돌려주지…?”
아아아아 그래 배지. 고토는 그제야 기억났다는 듯이 과장스럽게 목에서 탄성 소릴 길게 빼낸다. 녀석은 꼬은 다리를 풀고는 앉아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매우 불편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손이 들어갈 여유가 보이지 않는 주머니 속을 한참 동안 뒤졌다.
배지는 쭉 주머니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이곳을 찾을 이유가 없었을 터였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배지가 클럽 같은 곳에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인지……, 태정은 스스로의 착각을 조소했다. 녀석은 파친코에서도 차안에서도 줄곧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걸 말하는 거지?”
천천히, 주머니 속에서 손을 뺀다. 잠깐 펴서 내밀어 보인 손바닥에는 배지가 올려져 있었다. 녀석은 금세 손을 회수하여 두 손을 포개 공 모양으로 만들어 그 속에서 잘그락거린다. 고토의 손가락과 손바닥이 놀리고 있는 배지는 두 개인 것이다. 그러다가 또 녀석은 한 개씩 한 개씩 양손에 나눠 엄지와 검지로 집어 태정에게 전시하듯 내 보였다. 살짝씩 좌우로 흔들면서… 손과 함께 고개가 박자에 맞춰 흔들린다.
“어때? 갖고 싶나?”
태정의 의중을 말로 묻고 치켜 올린 눈으로는 상대가 반응을 보이길 기다리며 답을 재촉한다.
“갖고 싶은 게 아니야. 넌 그걸 반환해야만 해. 네 것이 아니라고.”
“아니, 이건 내 거야. 흐음… 뭐 사실 네 말이 옳아. 그래도 이건 내 손에 있으니, 내 거라구.”
네 것이 아니라는 태정의 말을 시인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소유를 버젓이 주장한다. 막무가내 논리였지만, 그것이 바로 저 고토에겐 올바른 이치였고 오류 없는 진실인 것이다.
“어때 이게 내 것일까 네 것일까? 말해 봐. 응? 어이 응? 말해보라구.”
이건 채무 관계였다. 그것도 괴상한. 녀석은 빚진 돈을 왜, 어떻게 빌렸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돈의 액수만이 남아 있다. 그리고 돈은 빌려간 녀석의 것이 되어버려 있었다.
휘익―탁!
눈앞에서 파리처럼 오락가락 하는 그것에 태정은 조급하게 손을 뻗었다. 배지 소유권자가 누구냐고 당치도 않는 것을 용케도 묻는 뻔뻔한 녀석에게 말로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녀석의 손에 든 배지를 넘겨보지만, 녀석의 재빠른 방어에 막혀 실패한다. 고토는 태정의 손을 팔로 막아 쳐내면서 이런 이런 하고, 혀를 끌끌 찼다.
“안 되지 이러면 안 돼, 반칙이라고.”
고토가 세운 검지를 절도 있게 흔들면서―어린이에게 하는 것처럼―주의를 준다. 녀석이 반칙을 말하는 것에 어이없어 하지만, 그런 것에 배지는 아랑곳 않고, 다시 주머니로 들어가 버렸다. 젠장. 배지를 노골적으로 빼앗으려 하다니. 조금은 평정을 잃은 것 같았다. 아니다. 평정을 잃었던 건 고토의 차 꽁무니를 쫓았을 때부터였다.
“주겠다고 한 건 너였어.”
“그랬지. 누가 거저 준다고 했나?”
맙소사. 이제 빚쟁이가 된 것은 태정이었다. 채무관계가 완전히 뒤바뀐 것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하지만, 퍼억―이내 날아오는 녀석의 주먹 때문에 어처구니 없어하는 것도 잠시뿐이었다. 어느새 바의 테이블에서 내려와 고토는 태정을 향해 주먹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쉬익―빠악!
으응? 도무지 이유가 없었다. 난사하는 주먹이 무얼 의미하는지. 퍽―팍―태정은, 영문을 모른 채로 고토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좌우로, 상하로 온갖 빈 공간을 찾아 피하고 혹은, 주먹에 주먹으로 맞서야 했다.
“도대체 뭘 하자는 거지? 왜 이래?”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쉭―따악!! 대체 뭐야 이건.
또다시 묻기엔 정신없이 날아오는 주먹에 바삐 몸을 놀리기에 바빴다. 고토가 스탠스를 재빠르면서도 여유 있게 바꿔가면서, 태정을 노린다. 어느 새 고토의 공세로 태정은―고토와 함께―다시 무대 위로 올라와 있었다. 또 한 번의 결투인가. 어퍼컷을 먹이고 훅을 휘두르고, 퍼―억!! 우욱―고토가 다리를 들어 내뻗는 킥이 배를 직격한다. 빈 곳을 잘 파악하고 노리고 있었다. 태정은 정신을 차려서 몸을 낮추고 녀석의 주먹을 똑바로 보았다. 고토의 공격적인 펀치와 움직임을 느껴서 살짝 피하는 건 몸이 알아서 하도록 한다.
그리고 타이밍에 맞춰 허술한 곳을 공략하는 건 머리가 아니라 주먹이 결정한다.
“퍼억.”
좋아. 제대로 먹혔다. 태정의 주먹이 정통으로 고토의 안면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고토는 정신을 잠깐 잃은 듯 흠칫 했다. 뒤로 넘어갈 정도는 아니다. 녀석은 태정의 재킷을 억세게 잡은 채로 잠시 고개를 흔들었다.
“푸하하하핫.”
녀석의 재공격을 염두에 두고 태정은 경계를 게을리 않지만, 의외로 경미한 펀치 드렁크에서 깨어서 보인 고토의 반응은 커다란 웃음이었다.
“하하하, 이거 흥분되는데? 아주 좋다구.”
고토는, 태정의 셔츠자락을 붙들고는 그것을 놓지 않을 듯이, 더 강하게 틀어쥐면서 흥분을 말한다. 녀석이 좋다고 하는 것은 그리 좋은 것이 못되는 것을 태정은 알고 있다. 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자식, 실제로 흥분하고 있었다. 결투에서 흥분을 보인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랬지. 이 고토라는 녀석, 주먹을 주고받고, 그렇게 피를 살짝 데우는 것만으로 다리 사이가 뜨거워지는 놈이었지, 라는 과거의 사실을, 태정은 그제사 떠올린다. 눈앞에서 씨익 웃으면서 고토는, 태정을 좀 더 가까이 그러쥔 옷깃 채로 끌어당기며 몸을 밀착 시켰다.
“그땐 잘 몰랐었지. 뭔가 이상했지만, 느낌 뿐 이었어. 그냥, 이상하다는.”
태정은 귓가로 녀석의 숨결을 느꼈다. 그것에 더해, 허벅지 바깥으로는 고토의 사타구니가 느껴져 왔다. 수치를 모르고 노골적으로 흥분한 것을 고토 녀석, 아무 거리낌 없이―아니 오히려 자랑스럽다는 듯이―바싹 갖다 대면서, 태정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말하는 것도, 행동도 이상한 건 고토였다. 미친 녀석, 그렇다. 고토는 미친―아니면 그런 척하는―미치광이였지.
“미처 몰랐어, 설마, 승패에 관계가 없다 해도 말이지, 그럴 줄이야.”
골목 싸움의 이야기를 하는 건가. 뜨문뜨문 뱉어내는, 앞 뒤 연결이 되지 않는 고토의 말을 태정은, 뒤늦게 간신히 줄기를 잡아 이해했다.
“이런 흥분은 드물지. 주먹을 쓰면, 살과 뼈가 주는 쾌감은 증폭되고 말이지.”
가끔은, 섹스 보다 더…, 라고 고토는, 물리적 힘을 휘두르는 것으로 흥분을 얻는 사실을―태정은 짐작만 했을 뿐인 가정을―고백하고 그것이 주는 쾌감도를 섹스와 비교한다. 그것을 느껴보란 듯이 고토는 부푼 자신을 압력을 더해 태정의 허벅지를 밀어 눌렀다. 흥분한 사내 녀석의 사타구니가 주는 아주 생경하게 다가오고, 고토가 말하는 흥분의 종류는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그래서, 이런 싸구려 흥분을 위해 우릴 건드린 건가?”
태정은 그의 다리 위에서 존재를 주장하는 ‘싸구려 흥분’ 을 다리로 되밀어 내면서 물었다. 하지만, 꾸욱―하고 그것과의 압착이 더해질 뿐이었다.
“싸구려? 이건 어떤 형태보다도 더 고상한 흥분이지. 순수해. 네가 그…, 파친코의 그 여자 가슴을 주무르고, 침을 섞으면서 헉헉대며 하는 짓이 확실한 싸구려라구. 안 그래? 이 세상에 흔하고 깔린 싸구려, 바로 그런 흥분이지.”
태정의 질문에는 대답이 없다. 고토는, 인정되지 않고 인정될 수 없는 드물고 해괴한 성적 성향을 고상하다 찬양하고, 태정과 다카기를 함께 예들어 저속하게 묘사하면서 녀석만의 특이한 쇼맨십을 발휘한다.
“우후…, 으으음….”
태정의 몸에서 밀착을 겨우―마침내―푼 녀석은, 태정의 눈앞에서 한 손으론 바지로 감싸인 부푼 그것을 쥐고 가볍게 주무르고 있다. 그러고는 들으란 듯이 일부러 꾸민 신음소릴 웃으면서 냈다. 태정의 눈에 정확히 시선을 맞춘, 고토의 추켜올린 눈엔 즐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조명에 반사된 갈색의 눈이 반짝였다.
“네 녀석과의 싸움, 꽤 좋았어, 정말 흥분했지. 그때도 오늘도. 헌데, 지난 번 건 가짜였단 말이지… 널 쓰러뜨리고는, 싸움의 대미에는 도취되기까지 했는데…, 그런 내가 바보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 속았어, 멍청이처럼.”
골목 싸움에서 희상이 눈치 챘던 걸 고토가 말하고 있었다. 희상은, 포기라고 했었다. 그걸 고토 녀석은 가짜라고 하는 것이다. 싸움을 통한 명백했던 자신의 성적 고양이, 나중에 다시 되짚어 보니 진짜가 아닌 가짜에 의한 것이었다…, 이런 모양이라면서, 상대에게 속았다고 한다.
조고의 배지를 어떻게 회수할 것인지, 정체 모를 냄새로 인해 호소할 수 없는 두통을 겪으면서도 고토 녀석과 맞서 겨뤘는데, 녀석이 그 싸움을 기억하며 지껄이는 것은 고작, 하반신의 발기가 허위로 인한 것이다, 거짓이라는 것이었다.
“가짜? 뭐가 가짜라는 거지? 그런 건 없어. 속은 건 우리 쪽이라고.”
“그렇게 부인하는 게 바로 가짜가 있었다는 거지.”
고토는, 태정의 한마디를, 곧바로 자신의 논리―억지―에 짜 맞추어 입장을 강화하는데 교묘히 이용한다.
“일단 힘겨루기로 들어가면, 조총련 녀석들은 죽기 살기로 덤빌 줄 알았거든…. 네 녀석들, 머리가 비었잖아? 주먹 싸움에선 무식하게 자존심을 지키려 드는 게 니들 아니었냐고….”
고토는, 태정의 어깨를 툭툭, 먼지를 털듯이 두들겼다.
“그런데, 아니 그래서!, 내가 오판을―했지.”
태정의 어깨를 털던 녀석은 돌연, 과거 저질렀던 대단한 잘못을 떠올리는 사람처럼 두 손바닥으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과장스럽게 붙들었다. 요란한 손놀림, 과장된 쇼맨십…, 고토는 바디를, 제스처를 큼지막이 사용하는 녀석이었다.
이런, 그때 생각을 하니까 흥이 깨지는데…, 라고 머릴 붙든 채로 중얼거리면서 녀석은 다시 바로 돌아가 처음 앉았던 그곳에 다시 기어 올라가 앉는다. 태정은 그저 요동 않고 무대 위의 위치를 고수하면서 녀석의 행동거지를 지켜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클럽이라 고토와의 거리라고 해 봤자 예닐곱 걸음 정도의 간격이 있을 뿐이다. 고토는 다시 바지 허리춤을 뒤적이고 있었다.
“이거, 돌려주질 않길 잘했지….”
주머니에는 물론 배지가 있었다. 또 한 번 배지를 꺼내든 고토는, 그것을 올려 들어 바위의 조명에 그것을 비춰 보았다. 녀석의 손에서 조그만 물체가 빛을 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이따위로 호들갑이나 떨고. 니들, 조고 녀석들 참 한심해.”
태정은 배지를 들고 미적거리는 고토의 행동을 보러 온 것도, 이죽이는 말을 들으러 여기 있는 건 아니었다.
“이 따위라면 왜 가져 간 거지…? 그것도 두 개씩이나. 호들갑은 네 녀석이 떨고 있어. 한심한 것도 너고.”
팔짱을 끼고 고토의 말에 천천히 그리고 명확하게 말하면서 반박한다. 사람 말을 귀로 흘려 듣는 녀석이 제발 말을 알아듣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덧붙여 ‘이쯤해서 신사적으로 돌려달라’고 고토에게 부탁까지 한다. 녀석도 조금은, 알아들을 법도 했고, 그보다는 이제 슬슬 지겨워질 법도 하지 않은가.
“내가 호들갑을 떤다…, 신사적으로 돌려 달라구?”
태정의 말을 고토가 되풀이하면서 뜻을 되새긴다. 좋아, 라고 간단하게 긍정의 답을 건네면서, 녀석은 태정을 향해 미소를 씨익 날린다. 어떤 미소인지 그 의미 파악이 되지 않는, 그러나 어떤 의도가 분명 녹아 있는 웃음이었다.
고토는 바 테이블 위, 다리를 벌려 걸터앉은 채로 그대로 셔츠 자락을 바지에서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바지허리 앞부분을 잡고는 앞쪽으로 벌린다.
그렇게 생긴 여유 공간에, 녀석은 주먹 쥔―배지를 쥐었을―손을 그곳으로 집어넣었다.
“잘 봐. 이게 내 신사도니까.”
고토는 입으로 자신의 신사도를 말하면서, 아주 저열하고 천박한 행위를 선보였다. 바지 속으로 들어간 주먹 쥔 손은 나오면서 좌악 펼쳐져 있었다. 녀석은, 편 손을 태정을 향해 흔들면서 그 손에 아무것도 없음을 이쪽에 알려왔다.
“자 가져가봐. 오―, 이거 꽤 느낌이 좋은데?”
고토는 앉은 채로 엉덩이를, 그리고 사타구니를 앞뒤 옆으로 움직이며 흔들면서, 바지 속으로 들어간 배지가 그.곳.에 있음을 보였다.
저 자식…. 저건 조고에 대한 모욕이었다―태정도 어쩔 수 없는 조고인이자 삼펜이었다. 동시에 녀석은 태정을 조롱하고 있었다.
“못 가져 갈 줄 아나?”
태정은, 다리를 움직여 고토 쪽으로 몇 걸음을 떼면서 묻는다.
“그러니까, 가져가라고.”
가져갈 수도 없었고, 가져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태정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좀 더 확실히 가까워진 고토가 앞에 앉아 있다. 녀석이 앉아 있는 바가 꽤나 높아 아래 늑골 정도의 높이까지 올라오고 있었고, 태정은, 그 높다란 바에 걸터앉아 녀석이 벌린 다리 앞에 섰다. 고개를 들어 고토를 보자, 내리깐 시선으로 가느다란 미소를 띠며 자신을 보고 있다.
태정은 생각을 가다듬었다. 뒤를 돌아 나가는 것과 끝까지 녀석의 요구를 들어 주는 게 남아 있다. 어떻게 되든, 아마도 결과는 같다. 고토는 또 한 번 승리에 도취되어, 조소할 것이다. 내가 결정에 시간을 끌수록 너의 그 기대감은 배가되겠지. 그런가?
기대로 고조되어 상기된 웃음을 짓는 고토를 마주 똑바로 응시하면서, 태정은 똑같은 미소를 되돌리며 녀석에게 그저 웃는 눈으로만 기대의 고양에 대해 묻는다. 그 웃음의 의미를 묻듯이 가늘어진 입술 모양으로 고토가 눈을 가늘게 내리 뜨는 것을―뭔가 의심스러울 때 짓는 고토의 습관적인 표정이었다―보면서, 태정은 고토의 다리 사이로 손을 올렸다. 바지위로도, 녀석의 꿈틀대는 흥분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직은 모르겠다. 배지가 정말로 거.기.에. 있는 건가? 주저 없이 한 번 더 그것의 위치를 확인하며 태정의 손은 고토의 가랑이를 더듬었다.
“흐음, 아주 잘하고 있는데?”
타인의 손이 사타구니를 만져 대는 것을 격려하는 녀석이다. 그런 격려가, 고토의 즐거움을 그리 길게 끌어서는 안 된다는 걸 경고한다.
태정은, 두 손으로 고토의 바지 버클을 풀고, 바지허리와 팬츠를 양옆으로 붙잡아 강하게―녀석을 향하는 진절머리에 힘줄이 선 손으로―끌어 내렸다.
“어이 어이, 이거 꽤 과격하잖아. 신사적으로 하라고. 신사적.”
제 옷을 벗기는, 강도를 높인 태정의 행동에 놀라기는커녕 여유를 보이면서 고토는 어드바이스까지 했다. 당연, 제일 먼저 태정의 시선을 장악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고토의 중심이었다. 녀석은, 옷과 함께 테이블 아래로 같이 끌어당겨지지 않고 여전히―균형을 유지하면서―바 테이블 위에 앉아 있었다. 셔츠 아래의 하반신이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노출하고 있는 채로도 태정의 시선을 받는 만만한 여유를 보인다. 녀석의 성기, 말 그대로 성적인 기관은, 성적 대상과 성적 자극 없이도 고상한 흥분―녀석의 말을 고대로 빌자면―을 발산하고 있었다.
젠장, 처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침착할 수 없었다. 태정은 애써 당혹감을 물리치며 배지의 수색에 집중했다, 허물이 벗겨진 것처럼 녀석의 허벅지에 걸려 널브러진, 바지와 팬츠를 여기 저기 쥐어 보지만, 어떤 것 하나 손에 잡히는 건 없었다. 왜지? 없다. 찾는 게 없는 것은, 당혹감 때문도, 고토의 흥분을 눈앞에 둔 때문도 아니었다.
“이걸 찾는 거였지?”
고토가 던진 말과 함께, 태정의 시선은 자위를 하는 고토의 손에서, 새로이 뻗어 내리는 다른 손으로 이동되었다. 엉성히 접혀 있는 손가락은 답답할 정도의 속도로 펴졌다.
그 안에 배지가 있었다.
“크후훗 이거 정말 재밌잖아? 어때? 매직이라구. 매,직, 요술 말이야.”
그저 간단한 트릭이었다. 바지로 들어간 주먹 속에는 애당초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네 녀석도 꽤 보기 드문 녀석이야…. 이것 보라고, 언제나 내 흥분을 돕고 있거든….”
녀석은 태정을 앞에 두고, 완전히 발기하지 않은 암적색의 그것을, 한 손으로 감싸면서 더욱 곧추세웠다. 후으, 하아…, 고토는 듣기 민망한 신음을 부러 내면서, 그에 맞는 표정을 꾸며 보인다. 자신의 흥분에 스스로가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입은 턱까지 늘어뜨릴 만큼 벌리고 또 붉은 혀를 쑤욱 빼 내밀어 입술을 전체를 핥는다.
도를 지나친 퍼포먼스는 외려 사람의 감각을 둔하게 떨어뜨린다. 외설은 외설에 의해 더 잘 방해되는 것이다. 또 한 번의 미친 녀석의 쇼임을 인식하자, 당혹감은 일순에 사라지고, 태정은 담담하게 녀석을 구석구석 응시할 수 있었다.
“그 재밌지도 않은 스트립 쇼, 그만하지. 오늘 일이 그것으로 끝이라면, 집에 돌아가서 빼내고. 도련님.”
배지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이 미치광이 녀석이 제정신으로 돌아오길 바랄 뿐이다. 일의 매듭을 지어야 했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과연 그게 언제는 가능한 걸까. 잠시 꼬였던 다리를 풀어서 돌아가는 거다. 그 결정을 태정이 녀석에게 통보하려는 찰나, 고토가 말했다.
“해봐―.”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 당당히 말했다.
태정은 그저 서서 말도 움직임도 없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고토는 눈썹을 꿈틀인다―이해를 못하는가, 라고 눈썹이 말하고 있다.
“해보라고.”
양팔을 벌리고 자극으로 꿈틀거리는 다리를 벌려, 자신의 다리 사이를 보란 듯이―그리고 그 자신을 내려다보면서―고토는 재차 요구했다.
* * *
구체적인 대상과 별도의 설명 없는, 해보라는 녀석의 말의 의미를, 태정은 구태여 물을 필요도 없었다. 알고 있었기에 그것에 놀라지 않는다. 고토가 요구하는 건 의외성이 없었다. ―녀석의 욕망은 아직 풀어지지 않고 있었다.
“아직 끝나려면 멀었어.”
고토는 배지를 들어 보이고 나서 얌전히 테이블에 내려, 한편으로 밀어 놓았다. 이제 배지는 고토의 팔이 뻗을 수 있는 반경의 끝단―제일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건, 태정이 아무 때나 가져가도 된다는 의미였다.
“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 단, 내가 끝까지 가도록 해 봐. 입으로.”
녀석은, 다시금 배지를 미끼삼지만, 배지는 일치감치 미끼로서의 구실을 마감했다. 그것을 두고 태정과 고토, 둘은 서로 엉뚱한 것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같은 것을 보게 될 일은 없었다. 태정은 배지를 다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녀석의 요구를 묵살하고 이곳을 돌아 나갈 수 없었다.
“이게 끝인가.”
거짓이든 아니든 태정에게 그 답은 중요했다.
“그래 끝이야.”
고토는 거무스레 사타구니의 거웃이 타고 올라와 있는 자신의 하복부를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가볍게 답했다.
도련님, 그게 아니야. 태정은 고개를 저었다. 이 녀석, 도무지 말을 못 알아듣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끝까지’ 갈 수는 없었다. 오늘의 끝, 이 일의 끝, 녀석과의 끝말이다. 태정은 다시 자신의 말을 이해시키고자 노력한다.
“아니, 내 말은, 이게, 끝, 이냐구.”
태정의 두 번 반복된 질문은 같지만 같지 않았다. 똑같은 걸 되풀이 묻는 게 아니다―그건, 질문 수용자의 의미 파악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머리가 나쁘지 않았다. 눈 흰자위가 훤히 들여다보일 만큼 눈을 굴리다가 내키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마도.”
질문의 의미가 틀려지자 녀석의 답이 틀려졌다. 애매한 말을 뱉으면서, 녀석은 태정을 얇은 입술에 미소를 걸고 내려다보며, 한 손을 뻗어 태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벌린 다리 안으로 바싹 다가서게끔 끌어 당겼다. 더 이상의 말을 거부하고 차단하면서, 행위의 시작을 재촉한다.
“도―죠.”
미소 덕에 더욱 얇아진 고토의 입술이 ‘요청’의 어휘로써, 태정을 강요했다.
크큭, 크흐. 재밌어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웃음이 목구멍을 울리며 맞물린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말로만으로 부족한지, 녀석은, 태정을 향해 벌어져 중심이 한껏 노출된 다리를 최대한 벌어뜨린다.
좋아. 끝까지 가보는 거다.
태정은 끝을 생각했다. 끝은, 고토가 말한 흥분의 끝도, 또, 태정이 그에게 질문했던 또 다른 끝도 아니었다. 그건, 태정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뜻했다.
등을 구부정하게 늦추고 고개를 숙여, 바로 앞에 벌어진 고토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노폐물을 배출하는 남성기관의 머리에 입술을 대었다가 이내 입을 벌려 그 생물의 전체를 입 속으로 담는다.
그런 말이 있다.
입에 넣을 수 있는 건 더러운 게 없다.
이내 행위와 입 속의 고토가 주는 느낌은 효과적으로 배제된다.
태정은, 그 생물을 머금고, 그것이 원하는 것을 생각한다. 네 소원을 들어 주지. 손을 더하여 생물이 뿌리내린 아래, 둥그렇게 밑동을 이루는 주머니를 감싸쥐고 주무른다. 다카기 상도 이렇게 했었지. 태정의 머릿속엔 다카기가 떠오른다―단지 그녀가 태정을 돕기 위해 어떻게 했었는지 그 행위만이. 아직 경화되지 않은 붉고 어두운 생물의 몸체를, 부드럽게 쓸어주고, 다시 그것을 태정이 얕게 머금었던 곳 깊숙이 들여보낸다. 작달막히 흥분을 보였던 것은, 타액이라는 습기와 36. 5도의 온기를 지닌, 최적의 장소에서 배양되어, 슬며시 크기를 더해갔다.
태정은 코로 숨을 들이마시고, 녀석의 허벅지 바깥으로, 테이블 라인을 한 손으로 짚고 녀석의 사타구니로 엎드려 기울어진 몸을 지탱한다. 나머지 손을 고토의 아랫 둥치를 감아쥐며 지지대로 삼아 고토를 세워, 그대로 고개만을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여 생물의 전신을 훑으며 세워준다. 후욱…, 으으음…. 생물이 기생하는 숙주이자 본체가, 움찔거리며, 만족스런 신음을 내뱉었다.
녀석의 욕망 덩어리를 부풀리면서, 태정은 이것의 빠른 끝을 예감했다. 그때, 고토의 허벅지가 꿈틀거리고, 녀석의 상체가 비틀리는 것이 느껴졌다. 뭘 하는 거지? 태정이 그의 움직임을 인식하는 것과 동시에,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피싯 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태정이 다시 한 번 목구멍까지 넣은 그것을 입 밖으로 뽑아내며 고개를 올릴 때, 후우, 하는 고토의 긴 호흡이 있었고, 태정은 뿌연 담배의―태정의 코가 제대로 인식해 내었다면―냄새를 느꼈다.
태정은, 잠시 토해낸 고토의 중심에서 입을 뗐다. 고개를 들자, 고토의 입에 물려, 담배가 자신의 몸을 태우는 빨간 불빛이 눈에 잡힌다. 아까 전의 부산함을 담배를 찾기 위한 것이었나. 고토는, 접근 가능권 내의 담배를 찾아내어―아니, 녀석은 위치를 알고 있었다―태워 피고 있었다.
“지겹잖아, 더 열심히 해봐.”
엄지와 검지로 태우던 담배를 가볍게 집어 들어 보이며 고토는, 태정에게 담배의 의미를 말해주었다. 녀석의 널브러진 사타구니에 솟구쳐 꼿꼿이 직립한 존재는 녀석의 표정과 말을 배반하고 있었지만 그걸 굳이 들먹일 필요는 없었다. 고토가 밝힌 이유와 담배의 필요성을 새로이 이해하며, 태정은 고토의 말을 그저 조용히 따른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그것을 다시 물고, 묵묵히 그리고 무디게 녀석의 단단히 성장한 욕망을 먹어준다―끝에서 끝까지. 이제는 딱딱해져 우뚝 솟아 터질 듯 요동치는 것은 조급하게 마지막을 열망하며 몸부림하고 있었다.
흐읍, 후우… 우… 후…, 고토의 담배를 들이마시는 소리는 깊고 길었고, 내쉬는 호흡은 조심스럽고 가늘다. 고토의 호흡과 목구멍 울림, 움찔거리는 허벅지, 긴장된 복부를 느끼며 태정은 타이밍을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태정의 목 안에서, 입 속에서, 태정의 입으로, 입술로, 크게 자라난 고토의 그것을, 태정은 밖으로 해방시켜 준다. 그리고 절정을 자랑하는 고토의 중심을 태정은, 뽑아 낼 듯이 손으로 늘여 짜낸다. 손아귀에 압력을 가해 쥐어 반복해 비틀듯 훑어 올리자, 꽈악―, 고토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낀 채 태정의 머리카락을 틀어쥐었다.
아아, 아아, 좋아, 좋아, 더, 더.
고토는, 흥분의 말을 두 번씩 해야 하는 사람처럼 반복했다. 그리고 태정의 손에서 고토의 ‘기관’은 이내 망가질 기계처럼 꾸르륵거렸다. 쿠륵 쿠륵, 고토의 신음처럼 ‘두 번’을 요동치며 기관은 희뿌연 기름을 토해낸다. 이어서 고토는 자신의 기관에서 허연 액체를 질질, 쉼 없이 흘려 내보냈다. 그것은, 태정의 손을 타고 주룩 흘러내렸다.
끝이다.
* * *
마지막의 한 방울까지 방출시키고 나서 고토는 뻔뻔스런 웃음을 지으며 사뿐하게 바에서 내려왔다. 그러곤 옷을 추슬렀다. 매무새를 가다듬고 나서는, 다시 담배를 꺼내 들고, 불을 붙여, 입에 물었다. 계속 녀석의 의자구실을 했던 ?욕망의 해소에 더할 나위 없이 적격이었던―바에 걸터앉는 대신, 고토는 한쪽 팔꿈치를 뒤로 해 바 테이블에 올려놓고 허리를 기대어 비딱하게 서 있었다. 후우…, 길게 담배 연기 한 모금을 허공으로 내뿜고는, 담배를 낀 손을, 태정을 향해 가리키는 모양으로 까닥였다.
“넌 말이지…, 네 녀석 말이야, 확실히, 어딘가 좀 틀려. 딴 놈들이라면 날뛰고도 남을 일을, 그냥 태연하게 넘겨버리거든.”
녀석은 담배를 또 한 모금, 짧게 들이마셨다 뱉어낸다.
“아! 이걸(고토는 담배 든 손을 내려 자신의 가랑이를 가리켰다) 빨아댄 것도 포함해서 말이지.”
고토는, 해야 될 말을 잠시 까먹었다는 듯 찰나의 탄성을 발하곤, 경멸의 어조로 말을 이어 붙였다.
“그냥 둔한 건가? 음, 그게 그런 거군, 좀 틀려 보이는 건 네가 그냥 멍청한 바보 녀석이라 그런 거지?”
“너도, 확실히 틀린데.”
태정은, 고토의 도발의도가 명백한 비아냥거림을 무시하고 말한다. 어딘가 틀리다니, 틀린 것은 저쪽이었다.
“난 당연히 달라. 너 따위 녀석하곤 물론, 비교도 되지 않아. 난 특별하거든.”
정말, 오만이 뚝뚝 흐르는 말이었다.
“난 선택받은 인간이야. 넌, 그렇지 못하고…. 그래, 그리고, 너흰 버림받은 인간들이지. 골칫덩이, 병균 덩어리들이라고. 그런데, 정당해? 그렇게 살고 싶다고 했나? 내가 빨라고 하면 빨 수밖에 없는 거잖아. 엉덩이로 밤송이를 까라고 하면 까는 거지 넌. 좀 틀려봤자 어차피 조오센징이니까.”
고토는 명백히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라고 믿는 녀석이었다. 나, 나, 나, 녀석의 세상은 그것 하나로 돌아간다. 너, 너, 너, 그가 돌려대는 세상에, 자신의 발아래 깔린 하찮은 인간들이다.
“그래도 네 녀석은 그렇게 살고 싶다고 말하겠지? 응? 내 이거나 빨면서 말야. 흐하핫.”
그러면서 녀석은 배지를 가져가라고 여전히 웃으며 배지가 놓인 곳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아, 참 노력 좀 더 하라고. 담배 찾지 않게 말이야.”
그런 거다. 태정은 녀석의 삶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로운 구조 속에서, 이롭기 때문에 ‘그렇게밖에 살 수 없는’ 삶을 태정은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그럴 때 태정은 말을 포기하고 입을 꾸욱 다문다. 하지만, 궁금했다. 단순히 의아할 뿐이었다.
“그런가, 고작 배지를 뺏고, 그걸 구실 삼아, 조센징의 혓바닥에서 흥분하고……, 넌 그렇잖아? ‘그렇게’ 살고 싶은 건 너 아닌가? 물어 보고 싶은 건 이쪽인데, 정말 그렇게 살고 싶은 건가? 아니, 네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건가? 너무 흥분해서 담배로 그걸 식혀야 할 그런 흥분을 매일 찾으면서?”
녀석은, 주체 못할 정도로 꼴사납게 물건을 세우고는 스스로가 억제 할 수 없어했다. 담배를 피며 그것을 가라앉혀야 할 만큼. 흥분이 머리끝까지 잠식해, 컨트롤이 되지 않았던 걸 알고 있다. 사정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담배가 필요할 만큼의, 그런 흥분을 원했던 것이리라. 그리고 그걸 태정에게서 찾지 않았는가.
“배지는 받지 않겠어.”
태정은 이게 끝이라는―더구나 ‘아마도’라는 애매한―말을 믿는 건 아니었다. 녀석의 흥분 찾기가 계속되는 한 배지의 반환은 무의미했다. 하지만 그렇길 바랐다. 이게 끝이길.
“마지막이니, 이건 조센징의 서비스라고 해두지. 도련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