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한 여인이 노래 할 때까지 #7
밤대개 아침 식탁은 침묵으로 일관되기 때문에 매우 조용하다. 식물食物을 씹는 소리 국을 후루룩 넘기는 소리, 저작詛嚼한 음식을 침과 함께 목구멍으로 삼키는 소리… 를 뚫고 갑작스레 날아온 아버지의 근엄한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요새 왜 학교를 안 가는 거냐?”
태정은 물컵으로 손을 뻗어 조르르, 물을 컵에 붓고 물을 꿀꺽 목구멍으로 넘겼다. 다시 식탁 위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소리로 감싸이는 듯 했다. 하지만, 태정은 아버지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걸 알고 있었다.
태희 누나가 돌연 독립을 선언하고 집을 나가기 전까지는, 식탁 위에도 가정집의 따스한 분위기가 조금은 감돌았던 것 같기도 했는데 말이다. 누나가 나가고 나자, 누나의 부재가 집 안에 얼마나 큰 공백을 만드는 건지, 그리고 그 공백을 통해 들어와 집 안을 휘감아 도는 스산한 바람이 꽤나 차다는 걸 깨닫는 태정이었다.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고도 누나는, 추궁하는 상대의 성을 누그러뜨릴 줄 알았고, 화내는 상대를 어처구니없게 만들어 그들의 노기怒氣를 허탈한 웃음으로 바꿀 줄 아는 유머를 알고 있었고, ‘애교’라는 이름의 재주를 듬뿍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이 집의 남자 둘 사이에서 그들의 관계와 성질을 얼마나 능숙하게 조율했던가를 태정은 떠올렸다. 기실 그런 누나가 떠올랐던 것은 이제 막 날아들 아버지의 호통에 그를 감싸줄 존재가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희는 없었고 태정은 더 이상 그녀의 어리기만 한 남동생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2주간 학교 안 가도 됩니다.”
“뭐어? 안 가도 돼? 왜 안 가도 되는 건데?”
아버지는 따지듯이 턱을 뻗대며 당신 스스로 성을 돋운다. 3일을 별 말도 없이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빈둥거렸는데, 나흘 째 되는 날 그것에 대해 묻는 아버지가 태정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속사정을 떠나 학교를 안 가는 건 태정이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속사정 같은 건 아버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제 와서 학교 가는 척 하는 건 많이 늦어 있었고, 거짓말로 둘러대는 것은 꺼림직 했기에 태정은 바른대로 사실을 말씀드린다.
“정학, 이에요.”
뭐? 노기충천한 한마디와 함께 아버지의 손이 번쩍 쳐들어 지며 태정을 한 대 세게 칠 모양을 했다. 그리고 그대로 손은, 정자세로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밥그릇을 쳐다보는 태정의 귓불을 한 대, 사정없이 쳐냈다.
아버지는 예의 ‘이 바보 같은 자식’이라는 말로 고함을 치더니 꼴도 보기 싫다고 당장 나가라고 했다. 재차 아버지는 안 나가냐고 대갈大喝했지만, 태정은 잠시 앉아 화끈한 뺨에 손을 대고 열을 가라 앉혔다. 그 잠깐 사이 누나의 재주와 재능이 조금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 대로 끝났잖아? 누나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태정은 3일 동안 아버지가 자신을 내버려두었던 것을―이해는 가지 않았지만―그냥 고맙게 생각하기로 했다. 아무튼, 그 동안 만큼은 푹 쉬었고 그 덕인지 얼굴의 상처도 많이 아물었다. 뺨이 뜨거운 것도 잠시뿐이다.
태정은 식탁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 * *
아버지가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 건 최근의 일이었다. 그에게 가장 쉬워 보인 상대는 분명 태정이였던 것이다. 중등학교 2학년과 3학년을 거쳐 태정의 골격이 굵어지고 목과 어깨가 두터워지고 집 안의 모든 문머리가 낮아 보일 정도로 키가 자랐지만, 아버지가 그를 향해 함부로 물건을 집어 던지는 것도 여전했고, 태정의 귀싸대기나 뒤통수를 퍽퍽 갈겨대는 일도 다반사였다. 복싱 이전의 아버지로부터의 단련 때문에, 맷집의 형성이 어쩌면 더 쉬웠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그래도, 태정이 정학을 입에 담았을 때의 아버지가 올려붙인 한 대는 예전에 ‘고작’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꽤나 적당한 선에서 그친 것이었다. 정학을 당해놓고도 식탁에 나와 꾸역꾸역 아침을 찾아 먹는 아들자식의 뻔뻔함과 한심함에 비하면 아버지의 한 대는 아주 점잖고 양호했다고, 그렇게 태정은 생각했다.
태정은 아버지에게 자랑스러운 아들도 아니었고 아버지도 태정에게 멋진 아버지는 못되었다. 집에서 태정은 반 벙어리였고 그의 아버지는 들을 수 있는 귀머거리였다. 둘 사이에 의사소통을 담당했던 누나는 떠나버렸다. 언제나 착한 딸이었던 그녀가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을 떠나면서 태정에게 했던 말은 지긋지긋하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도, 이 집도 지긋지긋해.」
그렇게 누나가 싫증을 담아 말했었다. 아버지와의 불화가 심각했던 것은 태정이였고, 그 마찰을 조정하는 것은 누나였다. 이 집을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언제나 태정 자신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누나가 나가리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적이 없었다. 그것도 아버지 때문에 말이다. 아버지를 지긋지긋해 했던 것은 누구보다도 누나였다. 그걸 태정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도.
「그리고 너도 지겨워∼.」
「너무해 누나.」
태희는 농담이란 듯 웃으며 지긋지긋한 대상에 그를 살짝 포함시켰고, 그것에 태정은 가볍게 투덜대었다. 하지만 그 농담의 가벼움만큼은―어쩌면 그보다도 조금 더―태정이 지겨웠으리라, 누나의 말을 듣고 그제야 생각이 미쳤다. 언제나 즐겁고 낙천적인 누나로만 알고 있었는데. 소금에 절인 듯한, 지긋지긋하다 따위의 부정적인 말이 태희의 가슴속에 담겨 있었는 줄은 몰랐었다. 미처, 전혀.
가끔가다, 떠나면서 던졌던 누나의, 그 짧은 역정의 말이 생각이 났고 그때마다 태정은 집 문을 나서던 누나가 그런 말을 하게끔 만든 것이 미안했다. 물론, 태희로서는 그런 말을 쏟아낼 대상이 태정밖에 없었겠지만.
아내는 죽었고, 믿고 기대었던 착한 딸은 당신이 지긋지긋하다면서―비록 그 말을 듣지도, 알지도 못하지만 그것이 비극이라면 더 비극일 수 있었다―나가 버렸고 아들은 자신을 소 닭 보듯 한다. 그리고 사업은 잘 돌아가지 않았다―아니 최악의 상태였다. 이것이 지금의 아버지였다.
파친코라고 하면 사람들이 현금이 엄청나게 쌓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특히나 지금 과포화 상태의 파친코 업계에서, 파친코간의 손님 유치 경쟁으로 손님이 많고 잘 돌아간다 하는 곳도 매출액의 90퍼센트 이상이 손님들에게 되돌아가고 있는데, 규모도 작은 소형 파친코 점의 수익률이 더 낮을 것이라는 건 불을 보듯 빤했다. 더군다나 번화가의 중심도 아니고 주차장을 확보해 둔 곳도 아닌 변두리의 위치가 나쁜 곳에 자리했다면 개점 휴업상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태정의 아버지는 그가 직접 운영하는 파친코를 내팽개치고 종종 다른 파친코 가게를 찾아 핀볼 게임을 했는데 ‘아 씨팔 내 가게에서 무슨 재밌는 게임을 할 수 있나!’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꼭 그것만이 다는 아닌 것 같았다. 태정에게는 자포자기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는, 그의 파친코 사업이 되지 않는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았다.
「정필수, 그 되먹지 못한 자식…. 씨팔, 혼자 다 해먹으려고 그런 파친코를 차렸단 말이지…. 괘씸한 놈 같으니…, 같은 동포가 눈에 뵈지도 않나 보지? 여기 이 좁은 바닥에서, 씨팔, 이쪽 인간들 대부분이 제 동지고 동포인데 말야. 아예 잡아먹지 그래? 날 잡아 먹어라 크윽….」
소주를 쓰게 넘기면서 아버지는 자주 파친코로 성공한 재일인에 대해서 한껏, 욕을 퍼부었다. ‘씨팔’이라는 욕이 없으면 말이 이어지지 않는지, 연결사로 끼워 넣으면서.
정필수라는 사람은 업계에서는 파친코 왕이라고 불리기까지 하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그의 석세스 스토리는 신화이고 전설이었다. 한국의 어느 방송국에서 그를 밀착 취재해 갔기도 하고 말이다. 아무튼, 대형 파친코의 도래를 예견하고 그러한 붐을 간파한, 그저 시대의 흐름을 잘 파악하여 부를 이뤘을 뿐인 그였는데, 아버지에게는 그저 원수이고, 죽일 놈이었다. 물론 그와 아버지 사이에 어떤 논리적인 가해나 피해의 관계를 따질 수 없었고, 옷깃 한 번 스쳐 본적 없는 그런, 그들과는 동떨어진 세계의 인간일 뿐인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태정이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마루코엔 파친코 센터 시부야’도 파친코 왕 정필수 사장의 체인 중 하나였다.
부르릉.
스쿠터를 집에서 끌고 나오면서, 줄곧 떠나지 않는 생각은 아버지와 파친코였다. 태정은, 아버지가 사실을 알게 되면 어느 쪽에 더 화를 낼지 조금 궁금해졌다. 자신이 파친코에서 일하는 것 때문일지, 아니면 일하는 파친코가 정필수 사장의 체인인 사실에 더 화가 날 것인지 실없는 생각을 한다.
빵빵. 생각에 잠긴 태정에게 주의를 주며 차가 지나갔다. 이런……, 경적 소리에 정신을 차려보니 태정이 스쿠터를 몰고 온 곳은 어이없게도 학교로 이어진 길이었다. 정학 중에 학교 주위를 배회하다니. 무의식적으로 익숙한 길로 스쿠터를 끌었던 것이다.
잠시 혼다를 길가에 세워두고, 태정은 갈 곳을 궁리해 본다. ―학교를 떠나 있는 학생은 방황하게 마련이다. 파친코나 가볼까. 생각나는 곳은 파친코다. 분명 아르바이트의 영향이다―아버지의 영향이 아니다. 그렇다고 시부야의 센터를 갈 수는 없었다. 돈이 있나… 무심코 뒤져본 주머니에서 나오는 건 웃기게도 파친코 가게의 회원카드였다. 물론, 아버지 가게의 카드는 아니다. 너무나 여전한 아버지였다. 주머니를 뒤적거려서 나오는 것이 파친코 카드라니……. 내쫓기다 시피 해서 급히 들고 나온 낡은 가죽점퍼는 아버지도 가끔 걸치는 것이었다. 점퍼의 주머니에는 아버지가 남겨둔 현금이 의외로, 꽤 되었다.
결국은, 파친코다. 방향설정이 끝난 태정은 세타가야 역 근처의, 게임센터와 파친코가 나란히 붙어 들어서 있는 곳을 떠올리곤, 그곳을 향해 핸들을 틀었다.
* * *
모자로 깊게 눌러도 감춰지지 않는 부스스한 머리에, 턱엔 수염이 거뭇거뭇하게 난 태정을 학교에서 정학을 당하고 어슬렁거리는 고등학생으로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그런 태정에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점내는 한산했다.
태정은 프리페이드 카드pre-paid card를 기계에 찔러 넣고 게임을 시작했지만 게임이 영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재미도 없고, 집중도 되지 않아 괜스레 기계를 바꿔 앉거나 이것저것 게임 종목을 건드려 봤지만, 정신이 산만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니 산만하다고 하기보다는 몽롱한 기분이었다. ―아버지에게 호되게 뺨 한 대를 맞았음에도. 잠을 덜 깬 듯한, 수족관의 금붕어가 느낄법한 부유감에 휩싸여 태정은 적당히 혹은 아무렇게나 버튼을 조작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촤르륵, 촤르륵, 촤르륵…. 옆자리의 구슬 떨어지는 소리가 아주 요란했다. 축하의 팡파르가 울리는 소리가 흥겨워야겠지만 혼잡하지 않은 점내에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그 소리는 유머 감각 없는 사람이 때를 잘 못 맞춰 낸 웃음소리 같았다. 뭐 그렇더라도 옆에 앉은 사람에게 찾아온 행운이 부럽지 않을 리는 없다. 뭐라 해도 바로 옆자리에서 잭 팟jack-pot이 터진 것이니 말이다.
내가 저 자리에 앉아 있었더라면…이라는 가정을 한 번쯤은 해보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도 이쪽을 쳐다보면서 마구 떨어져 내리는 구슬을 부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면 자리를 눈여겨 봐놓고 다음에는…, 이라고 맘속으로 다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와 대단하네요 아저씨… 라고, 태정은 옆자리의 사내에게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사내는 그때까지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웃음을 참고 있었지만, 태정의 인사에 결국 자신이 만난 행운에 겨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웃음을 얼굴 가득 내비쳤다. 그렇다면 나도 한 번 해볼까… 옆자리의 행운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을 터이지만, 그 터무니없음을 알면서도 은근히 주먹에 힘을 주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런 자신이 웃기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달라진 기분으로 자세를 고쳐 앉는데, ‘터억’ 뭔가가 자신의 어깨에 놓인다. 사람의 손이었다.
“이런, 이런 이게 누구신가?”
달갑지 않은 우연이다. 특별히 인상깊은 목소리인 데다, 이 목소리가 토하는 말은 더더욱 인상 깊었기 때문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확인하지 않아도 태정은 알 수 있었다. 고개를 천천히 움직이면서 동시에 어깨에 놓인 손을 잡아 허공으로 떼어 놓는다. 의자가 높았기 때문에 앉아 있는 태정과 서 있는 고토와의 시선은 그리 많이 높낮이의 차이가 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토의 시선이 조금 더 높았고 눈빛은 그 물리적 차이를 훌쩍 뛰어넘는 우월감으로 충만해 태정을 내려보고 있었다.
“대낮부터 학생이 이런 데를 어슬렁거려도 되는 건가?”
녀석에게도 파친코는 당연히 있어야 할 곳은 아니다. 피차 마찬가지의 상황이란 걸 모를 아둔한 놈은 아니었다. 다만, 비난과 힐문과 추궁을 할, 온갖 종류의 권리는 자기 자신에게만 있다고 생각할 뿐인 것이다. 모든 생각은 접어 두고 태정은 간단하게 당연한 질문을 했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은, 네 녀석 이런 곳에서 파친코나 하고 있을 처지가 아닐 텐데? 집에서 근신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온갖 종류의 권리와 온갖 종류의 뻔뻔함. 그런 상대에게 태정은 할 말이 없었다. 입을 그냥 꾸욱 다물고 있자고 생각하지만, 순간 경무의 비난이 떠올라 한마디 응대를 해주었다.
“난 근신할 게 아무것도 없거든.”
“흐응… 배지도 빼앗기고, 싸움에 지고도 사과하고 그것도 모자라 처벌을 받고 집에서 근신까지…, 이거 조고 회장의 과거 전력치고는 너무 초라하잖아?”
하고 싶은 말은 고작 이런 식의 비아냥이었던 모양이다. 회장 들먹이며 하는 말을 듣고 보니 녀석은 태정과 그 자신이 각 학교에서 동일한 타이틀을 지니고 있는 것을 꽤 의식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녀석이 원했던 건 항상 자신의 힘이나 위치를 과시하고 재확인하는 것이라 해도 그리 틀려 보이진 않는 것이다. 그런 쓸데없는 타이틀 때문에 지금 녀석과 상대를 하게 된 것이라면 한 가지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좋겠다. 태정은, 이젠 더 이상 회장이 아니라고 고토에게 말해주었다. 녀석은, ‘뭐?’라고 되묻는 듯한 입모양을 하더니 곧이어 폭소를 터뜨렸다.
“회장이 아니라구? 푸하하 회장 자리에서 잘린 건가? 이것 재밌는데 그래?”
“그래, 아주 재미있지 하지만, 난 이 게임이 더 재미있거든…. 그러니까 게임 하게, 이제 가줘.”
태정은 고토에게서 고개를 돌려 공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사람 모양으로 진지하게 기계의 화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대뜸 화면에 손이 나타나 화면을 가린다. 예의 두께가 굵고 색이 화려한 반지가 눈에 띄는 고토의 손이었다.
“난 아직 볼일이 남았는데.”
“이제 좀 그만하지. 난 더 이상 조고 회장도 아니고, 남아 있는 볼일 같은 건 없어.”
태정은 알 수가 없었다. 녀석이 사과를 요구했다. 불합리하다는 걸 알지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사과를 하러 가서 사과를 했다. 국사관 녀석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때 이 고토 마사키라는 녀석은 태정이 찾아와 사죄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표정을 하면서 사과의 말을 거두었지만, 그 외의 생도회 녀석들은 키들키들 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고토는 뛰어난 연극 배우였고, 웃었던 녀석들은 그것이 연극임을 알고 있는 관객이었다. 그런 상황에서의 정중한 사과라는 것은, 승패를 가리는 싸움에서 자발적으로 졌다고 시인하는 일보다 더 굴욕적인 일이었지만, 태정은 그렇게 했다.
무릎을 꿇으면 넘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태정의 신조였다.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것만을 의미하진 않지만, 무릎을 꿇는 것으로 그들을 만족시키고 그들을 멈추게 할 수 있다면 태정은 얼마든지 꿇어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녀석들과의 인연도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건 그저 바램이었나.
“볼일이 없다니, 난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데. 그렇게 일방적으로 끝낼 수는 없지.”
“뭘 더 바라는 거지?”
태정은 화면을 덮은 녀석의 손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고토에게 물었다.
“뭘 바라냐고?”
귓가에 뜨듯한 숨결이 느껴졌다. 고토가 태정의 귀에 입을 가져와 속삭이듯이 말을 이었다.
“네 녀석들, 병원균같이 더러운 녀석들을 모두 없애 버릴 거야 난.”
그러곤 태정을 보고 씨익 한 번 웃는다. 그 웃음에 뒤섞여 버린 고토의 말은 망상증 환자의 고백, 허풍쟁이의 공언, 사기꾼의 거짓말 같은 구석이 있었다.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능숙하게 거짓말을 잘하는 녀석이라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거짓으로 포장된 진실이 치명적일 때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녀석의 말은 어떠한 실현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네가 원한다고 우리들이 멸종하거나 하진 않아. 왜 모르지? 더럽다고 하는데 말야, 그래, 우리는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을 거라구.”
태정 역시 웃으면서 고토에게 말을 돌렸다. 녀석의 병원균 발언에서 왠지 바퀴벌레가 연상되었다. 생명력이 지구 위 어떤 생물체보다 뛰어나다는 바퀴벌레 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이 상기된 순간만큼은 바퀴벌레가 어떤 벌레보다도 근사해 보였다.
“마사키! 어이 마사키 뭐해?”
누군가 열심히 소리치는 소리에 고토가 반응한다. 녀석의 이름이 마사키였지…. 고토가 시선을 돌려 자신을 부른 녀석에게 손을 들어 알았다는 시늉을 했다. 일행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고토는 일행의 부름에 바로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여전히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걸치고는 고토는 거슬린다고 중얼거렸다.
“살아남는다 ? 후후… 그래? 그럼 기대하라구. 내가 끝내지 않은 일이 뭔지, 살아남아서 말야.”
녀석은 그러고 나서야 태정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자신을 부른 일행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아직 남아 있는 볼일이 무언지 끝내 말하지 않고 그저 기대하라는 말로 마무리를 짓다니…….
하지만 머리를 스치는 생각은, 저 녀석이 이곳에서 논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젠 이곳을 피해야겠다는 엉뚱한 것이었다. 태정은 자리를 뜰 때 악담이나 의미심장한 말을 읊조리는 전형적인 악역을 오버랩 시키면서 고토의 뒷머리를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