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ll the Fat Lady Sings #6
찬성 8 반대 1 의 비율로 태정에 대한 ‘사퇴 건의’ 안案이 통과되었다. 경무의 주도로 이루어진 회의였기에 임시 상정 안건의 명칭은 경무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경무는 희상에게, 조고 회장이자 삼펜 대장의 ‘해임 결의’ 촉구를 위한 회의라고 말하면서 ‘그러니 되도록 단결된 투표 결과가 나오도록 협조 바란다’고 말했다. 태정이 해임된다면, 그의 남은 임기는 아마도 네가 이어가리라 덧붙이면서 말이다. 경무의 말은 어느 것 하나 희상의 주의를 당기진 못했고 외려 그 말에 피식 하는 헛웃음이 나오려 했다. 하지만, 어떤 내색도 하지 않으며 희상이 조용히 말했던 건 경무가 ‘해임 결의’라 명명했던 회의의 명칭에 관한 오류였다.
설혹 삼펜 임원들의 만장일치가 이뤄진다 하더라도 조고의 회장을 해임시킬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해임 결의’라는 말은 부적절 하다고.
희상의 지적에, 경무는 눈알을 굴리다가, 탄핵 결의는 어떠냐고 한다. 그에게 탄핵의 의미를 묻자, 우물쭈물 하길래, 또 한 번 설명을 해주었다. 왜 적절하지 않은지.
경무는 그것도 아니라면, 사퇴 결의로 바꾸겠다고 자신 있게 말하면서도 희상의 어드바이스를 바라는 듯이 괜스레 눈치를 보았다. 그 눈길을 무시할 수 없어 희상은 그건 회의의 주체가 총사퇴를 결의하는 것 같지 않냐고 한마디 보태었다. 불신임안도 기각 당하고 나서 결국 낙찰을 본 게 ‘사퇴 건의’라는 것이었는데 희상이 그에 대해 또 한마디 하려 하자, ‘그만 하라’ 면서 그제야 경무는 짜증을 내며 말을 막았다.
사실 안건의 명명에 대해 희상이 왈가왈부 했던 것은 경무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그냥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협조해 달라’고 일부러 부탁한 경무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그가 바라는 만장일치라는 결론은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만장일치는 아니었어도 결국 녀석의 뜻대로 ‘사퇴 건의’ 는 무난하게 통과하였으니 더 욕심 낼 것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사퇴 건의’라……. 건의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것은 태정의 사퇴를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에는 대상 또한 생략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경무가 원한 것처럼 이번 안건에 정확한 명칭을 부여해 본다면 ‘조고 회장 강제 사퇴 처리’ 가 될 것이었다. 그렇다고 경무에게 들려줄 순 없지만 말이다. 삼펜은 그 유사이래 최초로 임기 중 사퇴하는 회장을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여러분 잠깐만, 우린 조 회장 사임 후를 생각해야 할 것 같은데요.”
태정에 대한 형식적이고도 짤막했던 투표와, 결과 공표가 이루어진 후 삼펜 임원 중 하나가 한 발언이었다.
“그건 공석이 될 회장 자리를 의미하는 겁니까?”
경무가 다시 한 번 확인 질문을 하고, 발언자가 그렇다고 답하자, 경무는 회의 시작 전 희상에게 말한 것처럼 부회장이 회장 자리를 이어 조고 49기를 이끌어 나갈 것이라고 명쾌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다시 투표에 부치는 게 낫지 않습니까? 부회장이었다고 회장직을 인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이진 않습니다만.”
제안으로 인해 회장의 퇴위를 놓고 모인 삼펜이 이번엔 또 회장의 선출을 위해 웅성였다. 그 제안은 타당성과 설득력이 있는 듯 보여졌다. 역대 삼펜을 살펴보아도 이런 전례가 없었으므로 회장직의 공백시 부회장이 잔여 임기를 잇는다는 조례나 규칙 같은 것은 물론, 없다. 총련계의 조선 고등학교라 해서 주석이 서거했다고 해서 부주석이 그 뒤를 잇는 것은 아니란 것이다.
회장 재 선출안을 놓고 경무는 약간은 당황한 듯 희상을 쳐다보았다. 경무 녀석, 어디까지나 눈앞의 목표는 태정의 추방이었을 것이다. 대담하게 삼펜을 소집해서 회장의 자격을 심사한 경무였지만, 그런 경무도 임원진이 공공연히 재선출을 요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하다. 하지만, 이제 물 밖으로 나온 의견으로 인해 그 자신의 회장 피선被選 가능성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희상은 그 가능성을 일백 퍼센트로 만들어 주었다. 자동 인계이든, 재선출이든 어떤 형식으로 회장을 세우든지 전혀 관심이 없다고 말하고 자신은 부회장 직분을 계속 유지하겠다고 입장을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예상했건, 예상치 못했건 경무는 태정의 공석을 메꿀 후보로 추대되었고, 단일 후보이기에 투표를 거칠 필요도 없이 회장직 계승이 확정되었다.
이제 태정이 사임 의사를 공표하는 것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 * *
‘이제 삼펜은 내가 맡기로 됐다’고 말을 뗀 경무는 회의의 결과를 알려왔다. 어제 있었던 회의에서 8 : 1 로 상정된 태정에 대한 사퇴 건의안이 통과되었다고 했다. 팔대 일이라…, 여덟에 동의하지 않은 ‘하나’가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경무는 굳이 들먹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희상이 그 녀석인 건 알겠지? 반대에 표를 던진 거 말야. 녀석, ‘정의’를 바로 세워야 된다고 그렇게 열변을 토하고 다녔으면서 결국 너 때문에 정의를 저버린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냐?
그러니까 경무 녀석은, 태정의 축출은 다수결의 정의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그 다수에 동의하지 않았던 희상은 정의에 속하지 않은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정의’란 것이 숫자로 ‘정의’된다면 얼마나 편리할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지만, 딱히 태정이 정의가 이편인가 저편인가를 가리려 드는 건 아니었다.
“희상이의 정의와 네 정의가 엇갈린 거지. 그렇다고 녀석의 정의와 내 정의가 일치한다고 볼 수도 없어.”
경무는 어이없다는 듯 하! 라고 짧게 웃는 듯한 탄성을 낸다.
“그런 회색분자 같은 면은 바뀔 줄 모르는 군. 역겹다구. 알아? 그건 신중한 게 아니야 비겁한 거라구!”
말을 뱉으면서 경무는 제풀에 화가 난 것 같다. 화를 가라앉히려 경무는 후우…하고 심호흡을 했다.
“넌 너무 물러, 그리고 흐리멍덩해! 네 자신은 한발자국 물러나 객관적으로 사태를 파악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쳇! 내가 보기엔 언제나 양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구. 말이 좋아 양보지, 일단 처음부터 기어 들어가는 거지 뭐야.”
태정이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자신보다 경무가 명쾌하게 진단 내려준다. 내가 무언가로부터 한발자국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인가? ‘태정이 네가 생각하기에 자신이 이러저러하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 것은 표면적으로는 그것을 부정했다 하더라도 결국 경무의 생각을 뒤집어 보여주는 것이었다. 태정은 안간힘을 쓰면서 발버둥을 치며 최선의 방책이라 생각했던 것을 따랐을 뿐이다. 그런 것이 경무에게는 뒷짐 지고 물끄러미 꽃구경이나 하는 사람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태정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묻고 또 연이어 잘못이 있다면 ‘자신의 책임’으로 돌려야 하는지를 자문한다.
태정이 주위와 세간의 그에 대한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은 외부에서 내부로 쏠리게 되는 관심의 형태가 싫기도 했지만, 너무나도 쉽게 평가하고 단죄하는 그런 사람들의 습성 때문이었다. 그들의 평가는 지극히 충동적이고 주관적인 감정에서 분출되는 사고가 생략된 말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을 알면서도, 간혹 이런 경무의 말과 비슷한 류의 평을 듣게 되면 태정은 ‘잘못’ 과 ‘책임’을 생각하는 ‘반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런 태정의 기질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의 누나는 ‘너 커서 혹시 승려나 성직자가 되는 거 아니냐’라고 재미없는 농담을 심심찮게 건네기도 했다.
“그래, 난 어차피 경무 네 기준에는 못 미치는 삼펜이었지? 이런 식으로 떠나는 것도 역시 삼펜으로서는 기준 미달이군. 하지만…….”
태정이 말을 확실히 끝맺지 못하자 경무가 그 뒷말을 궁금해한다.
“하지만 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태정은 노력했다. 그런데, 노력했다고 말하려는 순간 과연 노력했는가? 노력했는데 이런 결과인가 재차 의문이 들었다. 그 의문에 갑작스레 피곤이 몰려왔다. 어이없는 피로감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말하기 싫다는 거잖아. 하핫―, 넌 네가 말하고 싶을 때만 말해. 내키지 않으면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말이지.”
또 한 번 태정의 태도에 대해 태클을 걸면서 경무는 ‘이건 진지하게 충고하는 건데’라고 말만큼이나 심각한 표정―그리고 그렇게 충고를 할 수밖에 없는 대상에 대한 불만에 가득찬 표정―을 하면서 이어서 말한다.
“주먹은 휘둘러야 할 때 휘둘러야 하고 할 말이 있을 땐 크게 말해야 한다구. 그렇지 않으면 니 인생은 너처럼 그렇게 기어다니는 인생으로 끝나 버리고 말 거니까.”
충고와 인생 이야기는 언제나 붙어 다니는 듯 했다. 누군가가 건네는 한 마디의 충고를 지키지 않으면 그 다음의 인생은 아주 끝장나는 인생이 되리라는 말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태정은 ‘이건 진지한 충고야’라고 시작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 대개 그러한 것은 폭언이나 불길한 사이비 예언, 저주와 아주 흡사했다. ‘진지한 충고’에 정작 충고는 뒷전이 되거나 빠져 있었다. 결국 그들이 하고 싶은 말은 상대에 대한 비난이었다.
“인생이라……. 경무야, 나는 누구와도 주먹 같은 건 겨루고 싶지 않고, 말다툼도 하고 싶지 않아. 그냥…, 그냥, 내 인생은 조용하고 평온하기만 하면 돼. 그런 게 그렇게 비겁한 거냐?”
순간의 경무의 표정은, 자신이 태정의 말을 제대로 들은 건지 아닌지 의심스러운 그런 것이었다. 경무의 입은 에엥? 하는 말이 새어나올 것 같이 벌어져 있다. 경무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다는 듯한 표정으로 눈앞의 태정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태정은, 경무의 반응이 그러할 줄을 미리 알고 있었다.
자고로 조고의 삼펜이라면―게다가 태정은 회장이었다. ―전투적 삶을 운명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당연하고 또 당연했다. 링 위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본인 복서를, 더 나아가 양키 녀석들을 때려눕히는 황창수 선수가 그들의 이상적인 삶의 모델인 것이다. 그리고 만약 비폭력과 평화주의 노선을 부르짖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상적 정치의 명분으로써 지지 받을 수 있고 이해 받을 수 있을 뿐이었다. 희상의 태도처럼 말이다. 지금의 태정과 같이 일개 개인, 자신의 안돈만을 위한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로써의 평화는 그들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었다.
“하아……, 정말 한심하군, 좆태정. 이렇게까지 한심한 줄은 몰랐다.”
경무는 두 손을 힘없이 들면서 졌다는 자세를 취했다. 태정을 계도하기 위해 들인 열성과 기합이 단번에 빠져나간 듯 맥이 탁 풀린 자세였다. 가눌 수 없는 염증에 제멋대로 튀어나와 버린 한마디는 태정의 진심이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그는 다툼과 분쟁과 소요가 지긋지긋했다. 링 위가 아니라면 주먹은 아껴야 하고 마찰과 언쟁을 줄일 수 있다면 입을 다무는 게 낫다는 것이 태정의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태정은 힘의 필요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매일 몸을 단련하는 자신이 그 증거였다. 모세혈관과 근육들이 좀 더 몸 구석구석으로 뻗어 나가도록, 그리고 좀 더 외부의 충격을 잘 이겨 낼 수 있도록, 그리고 좀 더 강.해.지.기 위해, 훈련했다. 지만, 키타무라와의 일은 그 일을 잊어버리려는 태정을 오히려 계속적인 훈련으로 몰고 갔다. ―머리를 비우려면 바쁘게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 형태가 어떻든, 이유가 무엇이든, 태정은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준비한다는 것은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태정의 내뱉은 말은 거짓이기도 하고 진실이기도 한 것이다.
경무는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네가 더 이상 삼펜의 회장이 아닌 것’이라면서 너처럼 해이한 정신 상태의 녀석과는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고 했다.
“어쨌거나, 삼펜 결의에 대한 처리에 대해서 말인데……, 어떻게 할 거지? 우리 요구는 회장의 빠른 사퇴야. 말해두는데, 이번 안건에 대해서는 성의 있는 모습 보였으면 한다.”
사퇴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지만, 태정은 이미 삼펜이 아니었다. 경무가 말한 ‘우리’는 회장인 태정을 배제하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자신은 ‘우리’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었건만 오늘은 경계 밖에 놓여 있다. 내일도 무언가는 바뀔 것이다. 이후로 이곳, 삼펜 회의실에 혹 볼일이 있다해도 노크를 하고 들어와야 하겠지…. 아니, 볼일 같은 건 없을 것이다.
“그래, 오늘 중으로, 적어도 내일까지는 모든 일이 처리 돼 있을 거야.”
성의를 보이라 하는 경무의 말은 태정의 사퇴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만큼은 경무의 걱정이 필요 없었다. 모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 내일까지라고 했다. 두고 보지.”
태정을 한 번 응시하면서 기한을 다짐받은 경무는 회의실을 나섰다.
* * *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태정을 찾아 왔었다. 먼저 경무가 그를 찾았고, 희상이 그를 찾아 왔고. 또 그에 앞서서는 학생 주임이 그를 찾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김영일―사건의 핵심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 모든 일에서 소외당했던 녀석―이 찾아 왔다.
김영일은 자신으로 인해 삼펜의 분열이 야기된 데다, 회장 사퇴라는 조고 초유의 정국이 형성되었다는 엉뚱한 자책감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태정 앞에서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던 것이다. 조고 vs 국사관의 자존심을 건 한판을 태정이 망쳐 놓았다고 생각하는 삼펜과 그 승부에 대해 ‘알고 있는(그 사실이 전교생에게 알려진 것은 아니었다)’ 조고생이라면 모두들 태정을 비난하고 나섰는데 이 김영일이는 사뭇 다르게 반응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정은 그런 김영일을 보자 그의 배지를 찾아 주지 못한 것이 새삼 매우 유감스러웠다. 태정이 사퇴한 지금, 희상의 회장직 고사固辭로 경무가 삼펜을 이끌고 있었다. 김영일의 배지 일은 뒤로 미뤄진 채―어쩌면 까맣게 잊어진 채―조고의 명예 회복 운동은 현 삼펜이 제일 우선하는 과제였다.
녀석은 자신이 조금만 조심을 했더라면, 그래서 배지를 빼앗기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호들갑을 떨면서 삼펜에 알리지 않았더라면, 계속해서 이랬더라면, 저랬더라면 하소연 식의 가정을 해대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그런 식으로 가정을 하고 가설을 세우고, 또 책임을 지우는 것은 도무지 쓸모없고 무의미한 짓이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자신이 왜 태어났는가를 부모님에게―혹은 신에게―묻는 것이 나을 법해 보이는 것이다. 그건 네 책임이 아니라고, 배지를 찾아오지 못해 미안하다고 태정은 그에게 말했다. 태정의 사과는 김영일이의 넋두리를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그의 관심사가 바로 다른 데로 옮겨졌다.
“아뇨 회장, 회장이 저한테 왜 사과를 합니까?”
김영일은 태정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꽤 많이 다친 것 같다고, 자기보다 더 심하게 당한 것 같은데 몸은 괜찮냐고 물었다. 정작 그를 걱정하는 녀석의 얼굴에도 배지를 강탈당했던 당시의 ‘흔적’이 보였지만, 많이 아문 듯싶었다. 그러나 태정은 그때까지도 ‘골목 싸움’에서 다친 상처가 낫지 않아 멍이라든가 터진 상처라든가 밴드를 붙인 것 때문에 얼굴이 엉망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반지’에 대한 공격에 전혀 무방비였기에 그로 인해 얼굴이 패이고 찢겼다. 그래도 태정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괜찮다’고 김영일에게 대답했다. 부러졌던 코가 그 흔적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재생력이 좋은 몸이다.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그로 인해 경무에게는 ‘평생 기어 다닐 놈’이라는 소릴 듣는가 하면 회장직을 ‘박탈’ 당했다. 당사자인 태정이 그런 것에 대해 개의치 않는다고 해도 그것이 안 좋은 일임은 누가 보아도 자명하다.
“근데 회장 이상한게요. 그 자식들……, 난데없이 배지는 왜 가져갔을까요?”
그렇다. 국사관의 조고에 대한 적대적 행위는 ‘무의미한 폭력’ 그 자체였다. 녀석들은 이제까지 조고생을 보면 구타를 해도 되는 대상이고 그들은 아무런―정당한―이유없이 폭력을 행사해 왔다. 하지만, 배지를 가져가는 행위로 인해 어떠한 상징이 개입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용도로, 어떤 의미로 배지를 노렸는지 아직은 밝혀지지 않았기에, 태정은 질문한 영일에게 ‘모른다’고 대답했다. 어렴풋이 알 것 같긴 했지만, 그 이유라는 것이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현실성이 없어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답했다. 하지만, 바로 또 그런 이유로 당부의 말이 나갔다.
“어쨌든 조심해서 다녀라.”
“하하, 회장 저도 두 번은 안 당합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의외로 회장, 소심하네요.”
그저 소심한 것이면 다행인 것이라고 태정은 생각했다. 그렇게 웃으면서 김영일은 태정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태정의 상황에 대해 일말의 책임감과 자책감을 지녔던 그 녀석이 미처 몰랐던 것은 태정이 정학을 당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모르는 게 녀석을 위해서도 나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김영일이는 쓸데없이 다시 한 번 자신을 책할 것이었고, 그랬으면 녀석의 넋두리도 늘어났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태정은 학교로부터 정학이라는 징계 처분을 받은 상태였다. 경무에게 약속했던 ‘모든 일’을 처리하고 나서 바로 다음 날, 학교 게시판에 태정의 정학을 알리는 공고가 나붙었다. 징계 사유는 ‘이웃학교의 학생에게 폭행을 가하여 상해를 입힌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날, 경무가 찾아와 회장 사퇴를 요구한 날, 태정은 일찌감치 학생 주임의 호출에 불려갔다 온 상태였다. 주임 선생은 평소의 선생다운 근엄함을 잃고 있었는데 태정을 보곤, 국사관에서 연락을 받았는데 이게 무슨 소리냐고 했다. 그러곤 성치 않은 태정의 얼굴을 보면서 정말 그쪽 이야기가 사실이었다면서 고개를 연달아 좌우로 흔들었다. 학생 주임은 영문 모를 표정으로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며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이면서 태정에게 설명을 했는데, 횡설수설하는 이야기였지만, 그것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국사관고에서 항의가 들어왔다. 항의 이유는 조고생에 의해 그 학교의 학생회장이 물리적인 공격으로 신체에 손상을 입은 것이다. 시비를 걸어온 학생도 적지 않은 부상을 입은 것 같으니 범인을 색출해 내라. 그리고 정식으로 사과를 하도록 하고 처벌을 하라.
학생 주임의 설명에 태정은 자신이 어느새 전개도, 논리도 엉망인 뒤죽박죽 희극의 세계로 걸어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누가 누구에게 항의를 하며,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이며, 범인인가…. 태정은 선생에게 ‘그게 아니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전도된 사실은 ‘그게 아니라’ 는 항변으로 다지 뒤집어 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학생 주임과 교장은 (일의 파장은 교장이 나서서 수습해야 할 상황으로 번져 있었다) 이해는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지금 주변 상황을 봐서도 ‘우리’는 그들의 요구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국내 분위기가 극우 보수 성향을 보이고 있다고, 내셔널리즘이 강조되고, 군국주의의 향수에 젖는 일반인들도 상당수고, 국사관 학생들이 그런 분위기를 타고 휩쓸렸다고 보지만……, 이라고 태정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초들어 말하지 않아도 무엇보다 선생들의 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국사관에서 이 사건의 처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지역 신문에 기사를 싣겠노라 협박성이 농후한 발언을 한 것이다. 국사관고가 이 지역의 민보民報와 예로부터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새롭지도 않은 사실이었다. 일개 고등학교의 행사나 인사 정보가 빠짐없이 실리고 졸업생들이 운영하는 사업체의 광고가 우선해서 실리며, 또 국사관 출신 지역 인사들의 건네는 자금으로 조성되는 기금이 적지 않았다.
이 모든 사태의 추이는 엉킨 실타래처럼 어지러웠다. 태정은 그것의 실을 이처럼 악의적으로 꼬아 풀고 있을 녀석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오로지 한 녀석밖에 없었다. 젠장, 언론 플레이를 하겠다니…. 치사하고 더럽고, 또 아주 영리했다. 녀석은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일개 고교생일 뿐이다. 그런데도 사실을 조작하고 그런 허위 사실을 유포하고, 또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실로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벌써부터 그런 책략과 교활함을 능란하게 펴 보이는 녀석, 희상은 그런 고토를 두고 ‘무섭다’고 했었다. 태정은 무섭다는 느낌에 앞서 역겨웠다. 녀석은 자신의 힘과 위치와 똑똑함에 도취되어 있었다. 날조된 근거로 협박을 가해도, 이쪽으로서는 방법이 없음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리라.
진학률 우수한 지역 명문고의 학생이 정식 고교로도 인가 받지 못한 조고의(그렇다. 조고는 통상적인 일본의 교과과정을 따르고 있지 않고, 문부성 관할이 아니기 때문에 특수 교육 ‘시설’로 분류되었다) 학생에게 린치를 당했다고 보도된다면, 안 그래도 어려운 조고의 입지는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었다.
결국 태정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다시 한 번 국사관으로 발걸음을 해야 했다.
태정의 회장직 사퇴는, 자의에 의해서도 아니었고 삼펜의 탄핵에 의해서도 아닌 것이었다. 태정은 폭력 사건을 ‘일으킨’ 대가로 징계 처분을 받았고, 학교는 그런 문제를 만든 학생을 계속 회장직에 남겨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학교는 태정을 징벌함과 동시에 그의 회장직을 박탈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