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28)

뚱뚱한 여인이 노래 할 때까지 #5

애초에 조건은 ‘제의를 받아들인다면’이었다. 즉 국사관과 일대일 대결, 고토가 내건 골목 싸움을 태정이 받아들인다면, 그쪽―국사관―역시 삼펜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싸움의 결과, 승패에 상관없이 배지의 반환이 이뤄지리라는 말이었다.

태정과 고토는 양쪽 학교 구성원들이 모두 인정하고 그들을 대표하는 기관의 명실상부한 리더, 영수領袖, 우두머리(호칭은 아무래도 좋다)였다. 둘의 이번 결투는 두 학교 쌍방 모두에게 의의가 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학교 학생들의 의사 결정 집행부라고 할 때 얼핏 유약한 브레인 집단이라는 이미지를 주기 쉬웠지만, 국사관의 생도회나, 조고의 삼펜 둘 모두 그런 이미지와는 거리를 꽤 두고 있는 조직이었다. 그렇기에 과거 두 집단의 무력 대결은 자주 있어왔던 것이고, 그들 중 정점에 자리하는 대표들의 싸움이 이전에도 종종 존재했다. 하지만, 이번 ‘골목 싸움’은 각 학교 수뇌부의 멤버전원이 입회인의 자격으로 다수 참관―응원―했던 전대미문의 대결 형식으로 공식적인 것이었다.

‘공식적’이라는 딱지가 붙음으로 해서 이 결투의 승패는 바로 두 학교의 자존심과 직결되었는데, 그랬기 때문에 이 결투는 절대 시시할 수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삼펜의 대장은, 국사관과 싸워 ‘이겨서’ 배지를 찾아 와야 했다.

하지만, 태정은 ‘졌고’ 게다가 배지를 돌려받지도 못했다.

싸움은 아주 간단하게 요약되었다. 태정은 삼펜의 기대를 아주 무참하게 저버렸다. ‘조고 패배’라는 치욕적 사실만이 삼펜 앞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결투가 있었던 다음 날 삼펜은 술렁거렸다. (결투의 승패가 가려지자 마자 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니, 삼펜뿐만 아니라 조고의 분위기 역시 심상치 않았는데, 9명의 삼펜 임원 모두 ‘골목 결투’를 관전했던 걸 감안한다면, 태정의 패전 소식이 비밀로 부쳐지길 기대하는 게 외려 더 이상한 것이다.

주말은 지나갔다. 다카기 상과 보냈던 고요하고 평온했던 시간은, 폭풍이 닥친 듯한 오늘을 위한 것일지도 몰랐다. 삼펜―특히 경무를 필두로 한 녀석들―은 격렬하게 태정을 문책했다. 회실에서 경무는 태정에게 ‘넌 삼펜의 수치’라며 울분을 터뜨렸다. 평소 빈번히 태정에게 갖고 있는 반감을 공공연히 드러냈던 경무가, 이번 국사관과의 대결에서만큼은 온 힘과 정성을 다해 그들의 대장을 응원했었다. 태정은 물론 그 모습을 현장에서 봤고 그게 거짓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태정 역시 고토와의 싸움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건 꼭 이겨야 했던 싸움이었다.

“네 녀석은 승부 근성 같은 게 없어. 결과에 상관없이 배지만 돌려받고 끝낼 생각 아니었어? 엉?”

“네가 하자는 대로 해서 도대체 뭐가 해결됐지?!! 아무것도 없잖아!!”

경무가 내리 쏟아 붓는 울화와 성질을 태정은 그저 묵묵히 의자에 앉아 모두 받아낼 뿐이다. 패장이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하지만, 어떤 말도, 아무반응도 없는 태정의 모습이 경무의 신경을 더 자극했던 모양으로, 앉아 있는 태정의 멱살을 움켜쥔다. 그리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던 목소리를 낮추곤 이를 으드득 갈면서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경무가 상대에게 자처해서 성질을 죽이는 건 자신의 화가 최고조에 달했다는 것을 반증했다.

“뭐라구, 말, 좀, 해봐아 좆.회.장. ―삼펜 자존심을 땅바닥에 떨어뜨려 놓고 어떻게 그렇게 고개가 빳빳하냐? 응 좆.태.정.군.”

경무 녀석, 이젠 아예 드러내놓고 성을 바꿔 이죽인다. 멱살을 잡아당기는 경무의 우악스러움에 태정은 어쩔 수 없이 일어서서 경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 싸움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말해 경무를 이해시키겠는가. 싸움을 가지고 태정이 할 말은 없었다. 그것에 대해 입을 연다면 그는 더 초라해질 뿐이었다.

하지만 핵심은 조고와 국사관의 승부가 아니었다. 국사관과의 협상도 고토의 제의를 수락한 것도, 1차 목적은 어디까지나 잡음 없는 배지의 반환에 있었던 것이다. 태정은 경무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국사관 자식들이 약속을 어겼어. 배지는 돌려 줬어야 옳아.”

“이지경이 되어 아직도 배지 타령이냐? 배지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우린 이겼어야 했다구.”

삼펜 임원들과 경무에게 그들의 배지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오직 국사관의 녀석을 멋지게 꺾어 주지 못한 태정에 대한 원망과 미움과 증오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겼다 해도 분명, 녀석들은 돌려주지 않았어.”

“하, 이겨놓기라도 하고 그런 소릴 하시지…, 응?”

경무에게는 오로지 태정이 졌다는 사실이 어이없을 뿐이었지만, 태정에게 중요한 것은 이번 승패보다는 그들의 말을 지키지 않은 국사관의 태도였다. 제의를 수락했을 때부터 석연치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더욱 그랬다. 모든 일이 국사관 생도회장 고토의 장단에 놀아난 일이었다.

“지도부장 말이 맞아, 조 회장. 우리는 언제나 당하는 입장에 있어 왔다구. 그런 공식적 결투에서 만큼은 꼭 이겨야 하는 거야.”

“조 회장 삼펜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라구.”

“쪽 팔려. 너 같은 게 삼펜 대장이냐구!!”

회실에 있던 삼펜 멤버 넷 중 하나가 태정과 경무의 대립을 지켜보고 있다가 경무를 지지하는 발언을 한다. 그것을 시작으로 기다렸다는 듯 연달아 태정에 대한 거센 항의 발언이 뒤따랐다. 희상을 제외하고 나머지 셋은 평소 ‘경무 쪽 사람’이라 할 수 있는 경무의 지지 세력이었고, 과격한 녀석들이기에 태정을 몰아치는 극단적 비난 발언이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그들의 목소리에는 커다란 울분이 핏방울처럼 붉게 맺혀 있었다.

태정이냐 경무냐 누구 쪽인가 편가르기를 떠난 문제였다. 그들의 대장이 국사관의 녀석에게 패한 것에 그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이다. 삼펜은 맞아 죽을지언정 지는 일은 없다. 헌데 태정은 상대에게 패배를 시인했던 것이다.

경무와 태정 둘이 맞부딪치겠다 싶으면 바로 희상의 중재가 뒤따랐지만, 경무와 멤버 다수가 일방적으로 태정을 추궁했음에도 희상은 개입하지 않았다. 희상은 회실의 벽에 기대어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 서 있을 따름이었다.

경무는 움켜쥐었던 태정의 멱살을 놓아주면서 젠장할 젠장할 이라고 연달아 욕지거릴 내뱉었다.

“태정이, 너 각오해 둬.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지 않아!!”

경무는 태정을 향해 삿대질을 하면서 회실 문을 열었다. ‘가자’는 경무의 한마디에 경무 산하의 멤버들은 그들의 회장을 냉랭한 눈길로 한 번씩 쏘아보며 회실 문을 나섰다. 이미 그 눈들은 그들이 한때나마 인정했던 삼펜의 대장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멤버들이 다 나가고 난 회실에 흰색의 벽에 등을 기대고 선 희상만이 태정과 함께 남아 있어 주었다. 희상은 벽을 등으로 밀면서 몸을 바로 하고는 태정의 앞에 있던 의자를 끌어 당겨 앉았다. 태정은, 자신의 이마를 덮은 거추장스런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경무 녀석, 독단적으로 삼펜 대원들 소집한 거 알고 있어? 오늘 모두 모일 거야.”

희상이 먼저 입을 연다.

“몰랐는데. 그래, 희상이 너도 참석하니?”

“……응.”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하는 희상은 뭔가 태정에게 미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얼굴 하지 마. 나한테 미안해할 거 없어.”

희상의 마음이 그런 태정의 한마디 말로 가벼워질 리는 없겠지만, 희상이 조금은 밝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경무 그 자식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면서 혀를 찼다. 희상이 애써 가볍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오히려 태정이 안쓰러움을 불러일으켰다.

지도부장인 경무가 임시 삼펜 회의를 소집할 권한은 물론 없었다. 하지만, 녀석은 행동에 들어갔고, 삼펜 대원들은 그런 경무에게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있었다. 태정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태정은 그들의 기대를 배신했다―으로 인해 삼펜은 단단히 결속되어가고 있었다.

삼펜의 내분을 근심했던 태정으로서는 참으로 아이러니컬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당연한 현상일지 모른다. 삼펜은 역사적으로 조고 구성원들의 선망과 동경의 대상이었고 그들의 강력한 호응을 얻어왔던 소수의 정예집단이었다. 그들은 당연한 듯이 절대적인 권력을 지니게 되었고 그렇게 군림해 왔던 것이다. 군기와 규율을 지닌 그들 집단에서 내분이란 건 생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삼펜은 도전과 응전에 주춤해졌고, 그들의 위상은 점점 기울어졌던 것이다. 삼펜의 사기 또한 하강선을 그리는 건 당연했다.

그런 가운데 조고 회장인 태정을 젖혀두고 지도부장 경무가 단독으로 삼펜 회의를 소집한 사실은 반세기에 걸친 삼펜의 연혁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가장 반동적인 사건이었다. 이건 자칫 삼펜의 존립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강력한 리더십을 희구하고 있었던 조고, 그리고 삼펜으로서는 당연한 반향일지 몰랐다.

“아야야….”

태정은 저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소리를 발했다. 이런, 잠시 까먹었던 것이다. 눈이 욱신거리고 뻑뻑해서 손으로 눈을 꾹꾹 눌러 마사지로 풀어 주려는데, 그만 어제 얻어맞았던 사실을 깜박했다. 쑤셨던 눈이 더욱 아팠다.

“괜찮아?”

희상이 걱정스럽게 묻는다. 괜찮다, 고 말한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다. 공연한 엄살이다. 어디 다른 데는 이상 없냐며 희상이 녀석 걱정을 한다. 없어 없어… 웃으면서 희상을 안심시키지만, 그 웃음 때문에 얼굴이 외려 찌푸려진다. 입술은 터져 있고, 눈이 부어, 웃자니, 근육은 뻣뻣해 말을 듣지 않고 터진 살이 도지려 하는 것이다.

“그 자식…….”

희상은 누군가 뚜렷하지 않은 대상을 떠올리며 중얼거린다. 뭔가 화가 난 것처럼 분이 담긴 목소리다. 경무를 말하는 건가 언뜻 생각하지만, 희상이 경무에게 화낼 일은 없다. 그 자식이라니 그럼 누구지?

“고토, 그 자식 말야.”

이내 희상이 그 상대를 밝힌다. 아, 고토 마사키를 말한 거였군.

“잔인해. 주먹에 망설임이 없어. 안 그래? 넌 싸운 당사자니 더 잘 알겠지만…. 아무튼, 주먹을 보니까……, 고토라는 인간이 무섭더라구.”

태정의 희상의 말에 조금 놀랐다. 주먹과, 폭력에 관해 언제나 엄격하여 희상에게 그것들은 논외의 대상이고 미지의 금역이라 분명 무지할 터인데, 녀석의 한마디는 곧추선 검 날의 끝처럼 예리했다. 아니다. 오히려 무지하기에 더 민감할 수도 있는 것이다. 지극히 단순한 인상을 담은 짧은 토막말이었지만, 희상의 논평은 고토를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일대일 싸움이라는 것은 대개 오락적인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태정과 고토의 결투는 무대라는 완벽한 장소와 그들의 결투를 둘러싸 흥분해 지켜보는 관중까지 갖추었었다. 구경거리, 쇼의 요소를 두루 구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태정에게 그것은 완벽한 놀이로 보여졌다. 그런 오락 속의 대전자들은 객물화되어 무대에서 아무리 격렬하고 잔인하게 난투극을 벌인다 해도 일단 무대를 내려온 그들이 공포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데 희상은 고토를 무섭다고 한다. 녀석의 말은 무대 아래의 고토가 두렵다는 것이었다.

“태정이 넌 싸우면서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어? 그 자식 때리면서 웃던데?”

희상이 동의를 구한다. 물론, 느낌은 확실히 받았다. 동작이 크지 않아 정확하고 빠른 주먹으로 태정의 얼굴을 내리치며 정확히 눈을 마주치는 녀석이었다. 희상의 말대로 마주했던 고토의 그 기다란 눈에는 엷은 웃음이 머금어져 있었다.

그리고…….

녀석은 확실한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맨몸 싸움의 커다란 역할 중 하나가 무기 은닉 방지라는 것이었는데, 그 틈을 아주 교묘하게 이용했던 것이다. 연달아 내뻗는 녀석의 주먹에는 빼지 않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한 번 봤던 반지였다. 녀석이 그걸 일부러 빼지 않았다는 걸 태정은 맞으면서 알았다. 미처 빼지 못했다고 말하기엔 그 반지를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맨몸으로 하는 격투에 있어서 그건 압도적인 흉기였다. 그런 주먹을 주저 없이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수치를 모르는 칙살맞은 잔인함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래, 잔인한 건 사실이지. 주먹이 거침없이 단호했고, 희상이 네 말대로 싸울 때 웃고 있었던 것도 기억나. 하하…, 아, 아퍼. (태정은 얼굴이 정상상태가 아니란 걸 또 한 번 망각했다) 게다가 대전에서 강한 흥분을 느끼는 것을 보면 평범한 녀석은 아니지.”

희상이 덕에, 녀석과의 싸움이 머릿속에 다시 떠오른다. 확실히 고토는 날래고 주먹을 쓸 줄 아는 데다 규칙 위반까지 서슴없이 하는 대범한 녀석이었다. 게다가 그 자식, 싸움을 즐기면서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 때문에 진 건 아니었다. 상대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지니고 있는, 말하자면 경무가 태정에게 반발했던 그런 어떤 태정이 내부의 요소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패인이 무엇인지 찾아내어도 그것은 결국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 태정은 패배자였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태정이 너도 이상했어…. 왜 졌지? 아니, 왜 포기한 거야?”

“응? 포기했다니? 졌다고 느꼈으니까 패배를 시인한 거지. 그걸 말하는 건가? 너도 그랬잖아, 녀석이 잔인하다고 그래서…….”

“아니야,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야,”

태정의 말을 부정하고는 희상은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 잠시 생각이 골라지지 않는 모양이다. 논리 바른 희상이 녀석이 저런 경우는 드문데 말이다.

“태정아, 너 복싱한 적 있지?”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복싱이야. 경무 녀석이 하잖아.”

“장난하지 마. 태정아, 복싱, 했지?”

희상이 대단히 진지하고 심각하게 묻는다. 그런 희상에게 불성실히 대답하면 상대를 무시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희상은 그가 복싱을 했었다는 확신을 갖고 단정하고 있었다. 그건 대단한 사실도 아니었고, 쉬쉬하는 비밀도 아니다. 태정은 순순히 인정하기로 했다.

“옛날에…, 옛날에 했었지. 근데, 경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걸 어떻게 네 녀석이 아냐? 솔직히 너한텐 두 손 들었다.”

태정은 분위기를 바꾸려 두 손을 드는 시늉까지 하며 가볍게 응수했지만, 장단을 맞춰주려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희상은 여전히 심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경무 녀석, 네가 복싱했었다는 거, 눈치 챘을지도 몰라. 아무리 눈칫자락 없는 자식이라지만 문외한인 내가 알아챈 걸 녀석이 정말 모를라구. 그리고 포기했다고 말한 건 내가 아니라 경무가 그런 거야. 고토랑 맞붙었을 때 잘 응원하다가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고 했지. 나중에 경무 말이 걔 눈엔 네가 시합을 포기한 것 같이 보였대. 그래서 더 화가 나는 거라고 했고.”

아, 그러니까 경무 녀석이 평소 보다 배로 이성을 잃고 태정에게 열불을 냈던 건, 그런 이유를 포함했던 것이었다. 복싱을 조금이라도 했다는 녀석이라면, 패전을 링 위에서―그 무대는 링이 아니었지만 여하간에―자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시합 포기에 패배 인정이라니……, 그런 건 경무에게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태정이 누나를 두고 맹세컨대, 절대 포기한 건 아니었다. 허나 그렇게 보였다면 어쩔 수 없었다.

“그건 포기한 게 아냐.”

“그럼 뭐야? 내 눈에도 그건 포기였어!”

언제나 냉정했던 녀석이 자제를 잃고 언성을 높였다. 녀석만큼은 자신의 말을 믿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런 반응이라니. 머리가 지끈거렸고 따라서 진통이 가라앉았던 눈이 다시 욱신거렸다. 태정은 희상에게만큼은 설명해주고 싶었다. 이해를 구하고 받고 싶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 권투하다가 코가 깨진 적이 있어…. 아, 권투는 초급학교 시절에 했었고.”

태정이 어렸을 때 이야기로 입을 열자 희상은 의문스런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겠지…. 하지만, 희상은 어떤 질문도 삽입하지 않고 묵묵히 귀를 기울여 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그대로 진행시킨다.

“확실히 어렸는지 그땐 권투하는 사람이 가장 강해 보였어. 아버지한테 맞는 게 지겨워서 배우고 싶어했던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우리 아버지, 내가 권투하는 걸 좋아하진 않으셨어. 심하게 반대한 건 아니지만 술 먹고 들어와서는 그딴 것 그만두지 못하냐고 가끔씩 소리쳤지.”

재일인 중에는 복싱을 한다고, 그리고 주먹깨나 쓴답시고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니는 무리들이 꽤 있었다. 그런 녀석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사고를 칠까 걱정되는 것은 부모로서 당연한 것이었다. 더욱이 일본에서 재일 외국인의 사고란 매우 수습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태정의 아버지가 어린 자식의 취미 활동을 못마땅해 했던 이유는 그런 복잡한 이유나 걱정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연습하고 돌아오는 초급학교 6년생 자식에게 ‘이 바보 자식 더 바보 되고 싶어서 그딴 걸 하냐’고 소리치곤 했다. 아버지는 태정을 부를 때 언제나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바보’라고 했고 그 ‘바보’가 하는 운동은 ‘그딴 거’라고 했다. 그런 아버지에게 반발심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안 그래도 말수가 그리 많지 않았던 태정은 아버지에 대해 더욱 입을 꾸욱 다물게 되었다. 그런 벙어리 같은 아들이 더욱 바보 같아 보였던 건지도 모른다. 학교 운동장에서 공짜로 활동을 할 수 있는 축구부에서나 놀지, 굳이 돈이 드는―조선 제5초급학교 남자아이들의 수업 외 활동은 축구부, 농구부, 합주부 셋이었다―권투를 하겠다는 녀석이 못마땅하기도 했을 것이다.

다달이 내는 복싱 체육관의 관비를 내야 하는 날이면 아버지에 대해 굳게 다물었던 입도 열어야 했다. 아버지는 또 ‘바보’와 ‘그딴 것’을 입에 올리면서 화를 내고 며칠간은 관비를 내주지 않았는데, 결국 아버지를 구슬려 관비를 타내는 것은 태정의 누나였다. 체육관비 씨름이 네 번쯤 되었을 무렵 태정은 체육관의 선배라는 녀석들에게 흠씬 얻어맞고 집에 들어왔다. 기합을 준다는 명목이었지만, 초등학생에게 단순 기합을 주는 것 치고는 수위를 한참 넘어 있었다. 일본인들이 대다수였던 체육관에 어디선가 굴러 들어온 재일 조선인이 눈에 거슬렸던 것으로 보통 중학교에 다니던 녀석들에 의한 조선인 집단 구타라는 것이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때 코가 부러졌었어. ……안 보일걸, 의외로 깨끗하게 나았거든.”

희상이 유심히 코를 쳐다보기에 한 번 부러졌던 코를 만지면서 태정이 보충 설명을 했다. 그냥 보아선 부러졌던 코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러고 보니까 그런 것 같다’면서 희상이 고개를 끄덕이며 흔적을 알아보겠다는 시늉을 했다.

벌 받은 거야 벌. 잘∼됐네. 그딴 거 낼부터 그만둬!! 코와 입에서 피를 흘리며 들어온 아들 녀석에게 아버지가 던진 말이었다. 구타의 영향으로 전신을 달리는 통증에 밤새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든 다음날 아침엔 누나의 비명으로 잠이 깼었다. 코가 깨지는 듯 아팠고 머리에선 열이 났다. 열 때문에 머리가 빙빙 돌아 몸을 가누질 못할 정도였다. 누나는 엄마∼ 아빠∼를 부르면서 계속 비명을 질러댔는데 소리를 그만 지르라고, 머리 아프다고 누나에게 말하자 누나는 말없이 거울을 태정에게 들이밀었다. 어떤 흉악한 유인원 같은 게 비치는데…, 그게 자신임을 깨달았다. 태정은 왜 그렇게 누나가 놀랐는지 이해가 갔지만, 정작 자신의 모습에 놀랄 기운마저 없이 태정은 그저 너무 아프다는 생각만 들었다. 코와 이마엔 공기를 불어넣은 듯 잔뜩 부풀어 있었는데, 꼭 누르면 터질 것 같이 팽팽했다. 그 붓기에 눈을 똑바로 뜰 지경이었다.

분명 태정의 코가 부러졌다는 걸 알면서도 아버지는 무슨 생각에선지―아마도 태정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다―병원에 데려가자는 엄마와 누나에게 ‘태정이 녀석 절대 병원에 데려가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았고, 태정은 결국 병원에 가지 못했다. 한 열흘간을 그렇게 집에서 끙끙 앓아누웠던 것 같다.

“코랑 이마랑 얼굴이 퉁퉁 부어서는 다 나아도 코 삐뚤어진 병신 되는 줄 알았는데, 희한한 게, 조금씩 가라앉더니 부러진 자국조차 거의 없이 나아 버리더라. 어쨌거나, 그 이후로 도장은 그만뒀어. 처음부터 아버지 말씀들을 걸 그랬지?”

태정은 피식 자조적으로 웃으며 희상에게 물었다. 이 이야기를 꺼낸 건, ‘한 번 코가 부러졌지만 병원에 가지 않고도 잘 버텨냈지’라는 식의 사내 녀석들의 소영웅기담 같은 걸 들려주려 한 건 아니다.

“그때부터 코가 이상해졌어.”

“음……, 그렇다면, 그 피 냄새가 난다는 것도 말야. 코가 이상한 거랑 관련이 있는 거야?”

역시, 모든 걸 기억하고 있는 희상이답다. 이전에 말했던 태정의 말과 지금 이야기를 바로 결부시킨다. 잊어버리는 일이 좀처럼 없는 것이다.

태정은 냄새를 명민하게 구분하지 못했는데, 언제부터라는 것을 확언하진 못해도, 스스로는 초급 6년생 당시의 그 일이 기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 당시 얻어맞은 충격으로 후각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갑작스레 풍겨오는 냄새들이 있었다. 피 냄새도 그중에 하나였다. 자신이 갑작스레 맡게 되는 피 냄새는, 피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그것을 처음부터 피의 향이리라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그것은 그가 맡아보지 못한 커피의 냄새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썩은 잉크에서 풍기는 그것 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후각은 정상이 아니니까 가공의 냄새가 뭔지 알아내려는 시도는 그만두는 게 좋다. 태정은, 여성의 향수 냄새와 나토 냄새를 구분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러니 그런 상념은 되도록 빨리 접어버리도록 한다.

“그 시합에서 냄새가 났어.”

요점은 이것이다.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 때문이고.”

분명 그걸로 모든 것이 설명될 수 없었고, 그것만으로 더더욱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구체적인, 설명의 보충이 없어도 희상은 묻지 않았다.

“나는 가끔 기미가요를 듣는걸.”

빙긋이 웃던 희상이 한다는 소리가 기미가요를 듣네 하는 이야기이다. 태정이 뚱딴지같이 들리는 이야기를 했지만, 이 희상이 녀석은 한술 더 뜨는 것 같다. 도대체가 감이 잡히지가 않는 것이다. 희상이 그랬듯이 조용히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태정은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가끔…, 가끔 말야, 아주 아주 조용한 깊은 밤에 혼자 깨 있을 때가 있거든. 그럴 때면 기미가요가 들린다구. 웃기지 일본 국가가 들린다니…. 하긴 그래, 기미가요뿐만은 아냐. 아리랑이 들려올 때도 있으니까 아, 사쿠라 사쿠라도 들었고 말야.”

희상의 이야기는 종종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를 듣는다는 것이었다. 그건 대개 밤에만 들을 수 있는 것인데, 처음 들었을 때 희상은 창문 밖에서 누군가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건 대개 일본의, 아니면 조국의 오래된 민요라고 한다.

“근데, 그게 학교에 남아 혼자 교실에 있을 때도 들리는 거야…….”

결국 깊은 밤 희상이 들었던 노래는 그 어디의 누군가가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는 것이다. 환청이라고 결론을 내렸지. 희상은 그렇게 불특정한 시간에 혼자만이 들을 수 있는 노래를 비현실적인 것이라 스스로 인정했노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머릿속에서 윙윙대는 것이 아닌 확실히 자신과 거리를 둔 어떤 지점에서 귀를 향하는 노래였다고 덧붙인다. 마지막으로 길게 더한 말은 비상식과 비정상에 기우는 희상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태정의 이야기가 어렸을 때의 영웅담을 늘어놓은 것이 아니듯이 희상이 또한 약간은 소름 돋는 괴기담 따위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태정의 붉은 냄새를 그 또한 환향이라고 도리질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것이 확연하게 자신 앞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태정은 알고 있다. 희상이 듣는 노래 또한 같은 맥락에 유사한 성질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귀신을 보는 것도 아니고, 미래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언을 하거나 또 범죄를 막을 수도 있는 멋진 능력 같은 건 기대하지도 않았다. 하물며 잠시나마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마술 같은 것도 아니고 말이다. 태정은, 남이 맡지 못하는 냄새를 맡고 소리를 듣는 것 따위, 무용지물의 그저 거추장스러운 병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질병 같은 거야. 태정의 말에 희상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을 수 있는지는 지켜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에 동의한다.

“똑똑.”

회의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짧게 울리는가 싶더니 찰칵 문이 열린다. 삼펜 임원중 한 녀석이다.

“부회장, 지도 부장이 잠깐 보자는데.”

“알았어.”

희상에게 가보라고 하면서 태정 역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임시회의 지금 하려는 것 같은데. 경무 녀석 성질 급하잖아.”

경무 녀석이 성질 급한 것도 알고 있고, 머릿속에 든 생각 또한 대강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경무가 기회를 별러 왔었던 것을 둘 다, 아니 셋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희상과 그를 부르러 온 심부름 꾼 녀석을 먼저 보내고 태정은 회의실을 한 번 둘러보았다. 어느새 이곳에 정이 들었다거나, 편안한 내 집 같다거나 하는 그런 감상 따위는 없다. 오히려 익숙했던 이곳이 돌연 낯설어 보인다. 처음부터 잘못 걸어 들어왔던 것이다. 많이 늦었다. 너무나 많이 늦었지만, 이젠 올바로 나갈 길을 찾아가기로 태정은 회실을 나서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 * *

「나는……,

 질 것이다.」

그건 선택이었다.

기세등등했던 고토를 바라볼 때 머릿속을 파고든 것은, 상대의 기세에 위축되어, 기량과 힘에 압도되어 지레 겁먹고 덜덜 떨면서 자신을 망각하며 중얼거리는 따위의 포기가 아니었다. 질 것이라는 말은 의지를 내포한 선택이었다.

시합의 개시를 울리는 공도 사회자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애당초 필요치 않았다. 짧은 탐색을 거쳐 다짜고짜 내지르는 고토의 주먹이 태정에게 제대로 된 카운터를 먹이면서 그렇게 싸움이 시작되었다.

풀 컨택트 룰full contact―rule 방식의 경기는 직접 가격으로 한쪽이 완전히 쓰러질 때까지 공격하는 룰이었다. 그리고 최대의 임팩트 존―급소―라고 할 수 있는 안면을 글러브도 없이 헤드기어의 착용도 없이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보호구도 없이 최소한의 제한만이 적용되는 이 시합은 방어적이기보다는 공격적인 쪽에게 훨씬 유리할 것이었다. 이미 모종의 선택을 한 태정보다는 핏빛 도는 눈자위를 지닌 고토가 시작부터 승기를 쥐는 것은 당연했다.

고토는 영리하고 재주 있는 싸움꾼이었다. 주먹을 겨루는데 쓸데없는 두려움 따위도 없었고 주저하거나 머뭇거리는 게 없었다. 펀치나 킥(허리 아래에 대한 공격은 금지라는 것은 상체에 대한 킥을 금지한다는 건 아니다)을 어디에 먹일 것인지, 공격에 대한 판단이 정확했다. 반지를 이용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상체의 반동을 이용해 팔꿈치로 얼굴을 찍어눌렀다. 훌륭했지만 모든 게 변칙과 잔꾀의 경기 진행이었다. 녀석의 포악하고 잔혹한 기질을 여과 없이 반영했다. 녀석이 정한, 시합에 제한이 없다는 룰은 기본 상식을 따른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으로 비열해져도 좋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리고 녀석은 주먹을 휘두를 때―파괴와 폭력을 실감할 때―그것을 사타구니로 느끼는 인간이었다. 다카기 상은 태정의 의문을 농담처럼 넘겨 버렸지만, 고토는 농담거리 이상以上의 이상異常을 지니고 있었다. 격투 전의 흥분이 섹스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것을 태정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극히 소수의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런 흥분을 공공연히 드러내며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은, 단연 희귀하다 할 정도로 없다. 하지만 녀석은, 어떤 수치감도 없이 발기된 사타구니를 드러내고 자랑스러워했다.

골목 격투의 끝은 시작과 마찬가지로 고토 녀석이 먹인 카운터로 마무리되었다. 충분히 맞고 피를 흘리고 시간이 흘러갔을 때, 태정은 뒤로 당겼다가 커다랗게 휘두르며 내지르는―위력은 클지 몰라도 기실 피하기엔 용이한―고토의 주먹을 방어하지 않았다. 태정은 비틀거렸고 무릎을 꿇었다. 고토는 무방비의 태정에게 달려들어 무너진 태정의 상체를 발로 찍어댔고 태정은 얼마간 그것을 견디다가, 손을 들어 패배를 시인했다.

졌음을 자인한 후에 태정이 입에 고인 피를 삼킬 때, 고토는 양 주먹을 불끈 쥔 승리한 사람의 포즈로 국사관들의 열렬한 축하를 거두고 있었다. 그리고 패배해 넋이 빠진 태정의 진영을 향해 돌아 검지로 발기한 제 물건을 가리켰다.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이것을 보라’고 제스처를 취한 고토가 태정과 조고를 향해 씨익 웃으며 그대로 허리를 앞으로 당겨 내밀었다.

이거나 먹지 그래? 조센징 놈들!! 핫하하하

그것이 고토가 연출한 화려한 쇼의 대미였다.

폭력의 희열과 성적 흥분이 직결되어 있고, 자신의 가학적 이상 성향이 외부로 노출이 되어 있어도 거리낌이 없다. 타인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길 바라며 온갖 짓거리를 해대고, 그런 사람들을 눈을 한껏 의식하며 즐긴다.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받아야 하고 강하다는 것을 다수에게 증명하고 싶어한다.

한 사람의 부자가 있으려면 오백 명의 가난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었나? 마찬가지로 강한 인간이 하나 만들어지기 위해선 오백의 약자가 필요하다. 고토 마사키는 나머지 사백구십구 명의 희생자를 더 원할 것이리라.

* * *

희상에게 말했던 것처럼 태정이 한때 복싱을 한 것은 사실이었다. 어렸을 때 코가 부러진 이후로 그만 둔 것도 사실이고 말이다. 아버지는 기분이 나쁘거나 술을 들었을 때 당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그래서 네가 쓴 맛을 본 것 이라고 고장난 레코더처럼 되풀이했다. 그래서 태정은 다시 복싱을 시작했다. 그걸 알게 된 아버지는 어린 게 벌써부터 반항이냐고 태정을 향해 술잔이며 술병, 재떨이를 던졌지만, 그건 반항이 아니었다. 1년 동안 아무런 대꾸도 반박도 하지 않고 아버지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아버지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화면만 나오는 TV속의 인물처럼, 뻐끔대는 수족관의 붕어를 보듯이. 그때 태정은 이젠 해도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일자리를 구할 때처럼, 태정을 반겨 받아주는 체육관은 물론 없었다. 여러 체육관의 거절을 당하고 나서 등록할 수 있었던 곳은, 하마다濱田라고 하는 관장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하마다 관장은, 자기 자신이 기억할 만한 멋진 시합을 치러 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처음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실력이 뛰어나 모든 시합이 시시하게 느껴졌다’고 착각을 할 만큼 그의 입담은 상당했다. 하지만 관장은 사실, 경력이 변변치 못했고. 과거 전적戰績은 형편없었다―그걸 알게 된 지망생이 체육관을 떠날 정도로.

 그러니까 하마다 관장은 이름 한 번 날려 보지 못한 무명의 저니 맨journey man, 떠돌이 복서, 즉 삼류 권투 인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체육관이 엉망이거나 시설이 형편없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중간은 갈 법한 번듯한 곳이었는데, 그래서 그가 어떻게 돈을 모아 체육관을 차린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았다.

아내의 유산이라는 둥, 말 잘하는 재주로 잡다한 외판을 했었다느니, 주먹은 형편없지만 조직에 들어가 보스의 신뢰를 받아 차려 나온 것이라고 꽤나 구체적인 추측의 여러 가지 설이 있었고, 관원들은 그에 대해 부풀려 떠들어대는 것을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들먹이기 좋아했던, 유력한 가설은 바로 불법 격투 시합에 손을 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도장은 쓸모 있는 놈들이 있나 없나 살펴보는 장소라고까지 말하는 관원도 있었다. 하지만, 하마다 관장의 성격으로 미뤄 보자면, 어딜 가도 구설수에 오르내릴 법한 성격으로, 아마도 관원들은 그런 관장과, 체육관의 분위기에 휩쓸려 관장에 대해 이런 저런 추측을 한 번씩은 해보게끔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루하면서도 험난한 훈련과의 싸움에서 낄낄거리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한마디씩 던질 수 있는 농담이라 관원들은 관장에 대한 그 화제를 아낀다고 말해도 될 만큼 꽤 좋아했던 것 같다.

그곳의 관원들은 모두 링네임ring name을 갖고 있었다. 링을 미처 디뎌보지도 못하고 기초 체력 단련만 하는 연습생조차 그랬는데, 그건 하마다 관장의 운영 방침이었다. 희망하는 링네임을 미리 지어 놓고 미래에 그 이름을 날리기를 꿈꾸면서 훈련하라고.

아라시―체육관의 이름이었다―의 복서들 사이에서 태정은 ‘조’라고 불렸다. 그게 태정의 링네임이었다. 태정이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생각하고 있을 때 벌써 그건 그렇게 굳어져 있었다. 그가 마악 도장에서 줄넘기만 넘길 무렵부터 대부분이 태정을 ‘조’라고 성만 떼어 불렀는데, 하마다 관장이 이름이 좋다고 링네임을 따로 지을 것 없이 그걸로 하라고 했고, 모두들 그것을 따랐던 것이다―거기엔 다른 이름으로 바꿔 부를 필요가 없다는 편의가 많이 작용했다. 아무튼, 관장은 복싱계의 경전이자 고전인, 찬란한 만화 ‘내일의 조’를 생각해보라면서 얼마나 좋은 이름이냐고 말했는데, 만화를 즐겨 보는 편이 아니라 제목만 들어 익숙했던 그것을, 태정은 얼떨결에 갖게 된 링네임 때문에 들춰보게 되었다. 처음엔 거창한 만화 주인공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졌지만, 점차로 익숙해지다 보니 자신의 성姓과 유명한 복서의―비록 만화주인공이라 해도―이름이 똑같은 음으로 발음된다는, 그 우연의 일치가―별것 아닌 사소한 것이었지만―나쁘지만도 않았다.

하마다 관장이 태정을 받아주고 링네임까지 붙여주면서 그 나름대로 신경을 써주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태정은 아라시에서 이질적인 존재였다. 아라시는 거친 사람들의 장소였고 그건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거부감을 여과 없이, 극명하게 표출해 내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었다.

모두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 중에서도 태정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겼던 건 키타무라北村라는 사내였다. 태정은 아라시에서 삼 년을 넘기고 있을 무렵 그가 프로 입단 경기를 갓 통과하여 어깨를 세우고는 한껏 으스대고 다닌 것이 기억한다. 그때 이미 앞 이빨 두 개를 새로 해 넣었던 키타무라는 프로치고 자기 관리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자격 미달―물론 태정의 관점에서―의 복서였다. 그는 자신은 술도, 담배도 하면서 충분히 복싱을 할 수 있다고 자신하면서 이를 드러내며 웃곤 했는데, 누렇게 변색된 이빨과 새로 해 넣은 하얀 앞니 두 개의 색깔이 매우 뚜렷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키타무라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끊이지 않고 태정에게 시비를 걸어왔는데, 말로 지분거리기―조가 니 링네임으로 가당키나 하냐? 혹은, 냄새난다 김치 냄새나―도 하고 글러브를 이유 없이 엉뚱한데 던지고는 태정에게 가져오라고 하기도 하고, 벤치 프레스에서 역기로 근력 단련을 하는 태정의 역기에 제일 무거운 바벨을 얹어 주기도―그것도 한쪽에만―하는 등 그 방법이 간단하면서도 다양하였다. 어느 날인가 키타무라는 아주 친절한 웃음을 흘리며 태정에게 펀칭 미트 연습을 좀 도와 달라고 하였다. 속셈 있는 웃음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던 태정은 미트를 받아 들었는데, 키타무라에게 펀칭 미트는 펀칭 미트가 아니었고 그것을 잡아든 태정이 진짜 살아 있는 펀칭 미트meat였던 것이다. 그는 사정없이 빈 공간으로 주먹을 뻗었는데, 그 이후에도 태정은 키타무라의 ‘인간 샌드백’의 역할을 몇 번인가 더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그런 키타무라에 동조하던 다른 녀석들의 ‘공용 샌드백’이 되기도 했고 말이다.

프로 심사 통과 후 키타무라는 두 번의 시합을 모두 판정승으로 이겼다. 랭커 순위에도 오르지 않은 풋내기 프로―비랭커 복서―는, 얼마 되지도 않는 파이트머니를 파친코와 술로 날려 버리고 오랜만에 체육관에 관장을 만나러 왔다. 둘만의 회담이 끝나고 키타무라는 돌아갔고 이야기가 잘 안 풀린 건지 그 다음 날 그는 또 나와 관장을 찾았다. 관원들 얘기로는 키타무라가 관장에게 부탁을 하는 것 같다고 했는데 의외로 그 부탁의 내용이 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날 키타무라는 관장의 사무실에서 나와―그 안에서 관장이 키타무라에게 화를 내는 소리가 들려왔었다―관내를 한 번 훑어보더니 태정을 불렀다.

「야 어제의 조!! 일루 와봐.」

그는 태정에게 까닥 손짓하며 크큭 웃었는데 태정을 그런 식으로 부를 때마다의 어김없는 반응이었다. ―키타무라 자신은 이게 상당히 재밌는 유머라 생각했다. 그는 간만에 체육관을 나왔으니 몸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으로, 거기에 딱 맞춰서 태정이 눈에 띈 것이다.

「네가 어제 이하라井原를 케이오 시켰다면서? 흥, 어떻게 운 좋게 쓰러뜨린 모양인데 나한테는 안 통하지. 빨리 글러브 끼고 올라와」

태정은 실전 스파링을 거의 하지 않았는데 이하라는 그 몇 번 안 되는 실전 연습 상대였다. 키타무라는 헤드기어도 없이, 마우스피스도 끼워 넣지 않고 곧바로 태정을 링 위로 끌어 올렸다.

태정은 그런 녀석과 싸우려고, 주먹을 겨루려고 복싱을 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힘의 세기를 다투고 싶어서 안달 난 녀석들은 어딜 가나 꼭 있었다. 키타무라같이 그리고 고토처럼. 언뜻 전혀 다른 세계의 많이 다른 두 사람처럼 보였지만 아마도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동류이지 않을까 태정은 생각했다. 키타무라가 복서임에도 불구하고 주위에 자신의 주량과 흡연 사실을 자랑스러운 듯 공표하는 것은 남에게 과시를 하고 싶었던 것이고, 상대를 물색하며 힘을 겨루고 싶어하는 것은 분명 쓸데없이 강한 승부근성 때문이었다.

승패에 집착하고 과시욕이 남다른 것, 바로 고토 마사키이지 않은가.

모두들 강해지고 싶어했다. 그 또한 강인한 인간이 되길 원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올바른 힘을 올바른 방식으로 소유하고 싶을 뿐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어떤 식으로 얻고 싶은 건지 태정도 잘 알지는 못했지만…. 막연했다. 그래도 그렇게 된다면 삶이 조금은 쉬워질 것 같았을 뿐이다. 하지만 세상은 태정이 원하는 방식을 찾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어딜 가나 키타무라같이 달라붙어 시험해보려는 녀석들이 있게 마련이었다. 태정이 복싱을 한 사실을 희상이나 주위에 굳이 밝히지 않았던 것은 그런 인간들과의 충돌을 최소한으로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비록―결국―언젠가는 충돌하게 되더라도.

키타무라는 프로 심사를 거뜬히 넘긴 데다 그 이후로도 진 적이 없어―비록 두 번의 경기에 판정승이었다 해도―기고만장해 있었다. 아직 아마추어 심사 시합도 거치지 않은 태정 따위야 손쉽게 여겨졌을 것이리라. 키타무라와 글러브를 처음으로 부딪는 것이라 해도 여러 번 샌드백 역할을 한 경험이 있었던 터라 태정은 그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었다. 고작 연습생과의 싸움에서이긴 연습생에게, 새삼스레 키타무라가 전의를 불태우는 것이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그를 아는 만큼 요령 있게 피하거나 방어하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맷집으로 견디면 될 것이고 말이다. 태정은 맷집이 좋았는데, 그건 키타무라의 덕인지도 몰랐다. 많이 맞을수록 좋아진다는 맷집이었으니.

하지만 상대는 어엿한 프로였다. 그것도 상대를 두드려 넉 다운을 시키려는 의욕으로 들끓는 프로였다. 피하는 것만으로, 든든한 맷집만으로 버티고 있을 수 없었다. 키타무라의 공세에 두 팔을 세워 붙여 방어에만 여념이 없었던 태정은 툭, 툭 치는 키타무라의 주먹에 반응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 주먹은 태정의 신체를 두드렸다기보다는, 그의 내부 어딘가를 툭, 툭, 건드렸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어느 샌가 태정은 주먹으로 키타무라를 올려붙이고 있었다. 관원들이 링 위로 올라와 키타무라와 태정의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을―정확히는 태정을―제지했을 때에야 태정은 정신이 들었다. 그때 태정은, 코너로 몰아붙인 키타무라를 옴짝달싹못하게 막고 그의 얼굴을, 복부를 두 주먹으로 연타하고 있었다.

관원들이 태정을 간신히 키타무라에게서 떼어 놓자, 키타무라는 힘들게 숨을 몰아쉬다가 미끄러지듯 캔버스 위로 쓰러졌다.

「적당히 해야지. 그만하란 소리도 못 들었어?!! 이러다 사람 죽겠다구」 한 관원의 큰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고, 그때서야 태정은 자신도 거칠게 숨을 들이 내쉬고 있음을 깨달았다. 키타무라의 상태를 살피는 녀석들이 태정을 쳐다보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태정은 거친 호흡을 들이 내쉬며 키타무라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의 벌어진 입에서 쿠룩쿠룩 피가 새어 나왔고, 키타무라의 하얀 앞니도 누런 이빨도 모두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곧바로 앰뷸런스가 도착했고, 하마다 관장이 나서서 일을 수습했다.

키타무라가 병원으로 실려 갈 때, 관장이 어깨를 두드렸던 손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의 일은 태정에게 위기 불감이라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만들었다. 위기 불감이라는 말은 자신에게 닥쳐올 위험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에게 위해를 가할 때 상대가 처할 위험도를 측정 못하는 것 또한 위험 불감이었던 것이다.

분명 키타무라와의 그 싸움에서 풍겼던 그 비릿한 향은 지금도 나고 있는 듯 생생했다. 그리고 그때, 태정은 그것을 무시했다. 무시한 것이 그 결과였다. 코의 비현실적인 냄새 지각과 위험 불감과의 상관관계를 태정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은 서로 보완적인지도 몰랐다.

「태정아, 네가 태어났을 때 말이지……, 간호사가 발바닥을 때려도 울기는커녕 방싯거렸단다.」

어머니는 태정이 갓 태어났을 때의 일을, 웃으면서 몇 번이고 그에게 들려주었었다. 누나는 그 이야기를 태정을 놀리는 데 자주 이용했고 말이다. 넌 천성적으로 무딘 애야. 복싱할 때 얻어터지면서도 혹시 방실거리는 거 아니니? 라고…….

생각해보면 발바닥을 맞고도 웃었다는 그것은 위협을 위협으로 느끼지 못했던, 불감의 일종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코가 부러지면서 발생한 후각의 문제는, 태정의 모자란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이상한 냄새를 지각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고, 태정은 두 가지를 연결해 상관시켜 본다. 그러나 억지스럽고, 근거 없고, 단지 쓸모없을 뿐인 상상에 불과했다. 상상에 누구보다 먼저 쳇, 하고 비웃는 것 바로 태정인 것이다.

누나의 말대로 태정이 천성적으로 무디었다면, 키타무라와의 그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일…….

그 일고 태정은 반대도 강제도 아닌 자신의 의지로 체육관을 그만 두었다.

고교 1년 겨울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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