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28)

Till the Fat Lady Sings #4

삐요삐요 촤르르륵 삐익삐익 철컥 철컥 또르르르 파라파라밤밤.

파친코 점내의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기계의 구슬 소리 금속의 마찰음 소리, 그리고 흥겹고 빠른 댄스 음악, 레버는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다. 확실히 몸 상태가 그리 좋은 것 같지는 않다. 여태껏 그런 소리에 짜증이 나고 그걸 성가시다고 느낀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고토와의 무의미한 싸움에서 커다란 타격은 입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하루가 지나고 나서 나타나는 증상이 그다지 가볍지만은 않았다. 섣부른 판단이었다. 확실히 타격이나 충격에 의한 타박상은 시간이 지나야 정확히 알 수 있는데 말이다. 일단 몸을 다시 한 번 점검하고 알맞은 휴식을 취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쉴 수가 없다. 고토 녀석 덕분에 아르바이트에 차질이 있었던 것이다. 태정은 아르바이트가 절실히 필요했고, 더구나 주말밖에는 할 수 없는 상황에 이곳에서 잘리면 그에 적절한 다른 일거리를 찾기도 어려웠다. 지금의 통증 따위야 아무것도 아니다.

회색 빛 공기가 떠도는 환경에서 일은 바쁘고 힘든, 근무 조건이 열악한 것이 이 파친코라는 곳이었다. 이곳은 평균 6개월이라는 상대적으로 잦은 인력의 이동 때문에 언제나 사람이 딸리지만, 그렇다고 태정이 쉽게 들어와 일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우선 자신이 지닌 이름 때문에 그랬고, 또 고교생이라는 태정의 신분 때문에 그랬다. 하지만 운 좋게도 이곳은 한국인―정확히는 한국 국적의―사장이 운영하는 대형 파친코 점이었고, 그런 이유로 태정은 이름 때문에 거부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면접 당시 이미 고교쯤은 졸업했으리라 단정한 쪽에다가 굳이 졸업 전이라 밝힐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이곳에서의 근무는 그래서 가능 할 수 있었다. 주말, 이른 오후 시간부터 자정을 넘길 때까지 일하는 태정은, 근무 시간에 비해 넉넉한 급여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페이의 유지를 위해 성실해야 할 것은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뻔한 사실인 것이다. 그런데, 어제 갑작스레 일을 건너뛰면서 매니저의 좋지 않은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런 엉망인 얼굴로 어떻게 일할 생각을 하냐는 호된 질책도 받고 말이다.

고토와의 싸움은, 무엇 하나 이로운 게 없었다. 싸울 가치도 없었고 가치 이전의 필요성은 더더욱 없었다.

“조 상. 저쪽 손님 좀 봐주세요.”

같이 근무하던 여성 스탭이 그를 부른다. 태정의 소매를 잡아끌면서 몇 걸음 인도해 가 손으로 가리킨 쪽에는 오십 줄에 들어서 보이는 남자는 게임이 잘 풀리지 않은 건지 앉은 채로 기계를 발로 쾅쾅 쳐대며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손님, 기계에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태정이 파친코 보이가 받는 교육 지침에 따라 정중히 묻자, ‘이거 순 사기잖아 조작이야 조작!!’이라고 소리를 친다. 돈을 많이 잃은 성질 나쁜 손님의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에잇, 씨팔.”

그는 한차례의 거친 말과 몸짓을 선보인 후에, 보통 일본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그러나 태정은 알아듣는―욕을 덧붙였다.

“이 기계가 그 욕을 알아들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손님.”

태정의 말에 남자가 반색을 하며 동향 사람이라도 만난 듯 들뜬 목소리가 되었다. 곧바로 입에서 나오는 말이 바뀐다.

“자네 한국인인가?”

“예. 하지만, 전 총련 쪽입니다.”

사실, 한국이냐 북한이냐, 민단이냐 총련이냐는 중요치 않았다. 그리고 조고=조선인=북한 지지자 의 공식 같은 건 성립되지 않고 말이다―종종 그런 오해가 있는 듯하다. 단지 부모세대에서 지지하는 나라의 국적을 자식에게 남겼을 뿐이니까 말이다. 태정의 할아버지는 경상도 출신 아니었던가.

“이런, 그럼 조고를 나왔겠군!!”

조고 몇 기인가? 응? 몇 기야? 계속 캐묻는 성화에 태정은 재작년에 졸업했으니까… 그게 47기입니다… 라고 주저하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47기라면, 누나의 졸업기수였다. 우물우물하는 대답에 자칭 대 선배는 태정이 시원하게 답하지 못하는 게 기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 녀석, 자기 기수도 잘 모르다니, 그러면 조고생 자격 미달이야 미달!”

중년의 사내는 짐짓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훈계까지 한다. 하지만, 이내 자신은 조고 14기 졸업생이라며, 반갑구먼∼ 반가워∼ 하며 태정의 어깨를 두드렸다.

파친코 기계에 화풀이하는 손님이 알고 보니 조고의 선배, 그것도 대 선배, 라는 건 태정에게 그리 즐거운 상황은 아니었다. 이 사람은 뭐가 그렇게 반가운 것인가? 이렇게 어깨를 얼싸안을 만한 일은 분명 아니라 보이는데 말이다. 파친코에 꽤 중독되어 보이는―재떨이엔 꽁초 짧은 담배가 수북이 쌓여 있다―후줄근한 차림의 손님과 파친코의 보이가 나란히 조고 선후배 지간이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보아도, 조고생이다―또는 그러했었다―라는 사실이 참, 멋대가리 없는 만드는 시추에이션인 것이었다. 게다가, 태정은 아직 학교를 졸업한 것도 아니었다. 이미 옛날에 고교 졸업을 했으리라는 매니저의 착각으로 이곳에서 일하게 된 것으로, 이제 갓 열여덟을 넘겼을 뿐인 것이다.

그렇게 기계를 차대던 손님은 태정이 같은 피로 이어진 출신임을 알자 태도가 잠잠해져서는 ‘다음에 오면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하며 뒤돌아섰다. 뭘 부탁한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태정은 이곳을 떠나는 손님의 등을 조금은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시부야의 중심 번화가에 우뚝 서 있는 이 ‘마루코엔 파친코 센터 시부야’는 오사카에서 성장한 재일인 파친코 사업가의 파친코 체인점의 하나였다. 오픈한 지 몇 년 되지 않았지만, 천 대가 훌쩍 넘는 파친코 기계를 갖추고 있었고 모던한 디스플레이, 경품의 차별화와 다양화, 젊은이를 타깃으로 한 마케팅으로 규모나 설비나 영업 방침 등의 면에서 매우 좋은 호응을 얻고 있었다. 다시 말해―태정의 아버지 식으로 표현하자면―돈이 쉴 새 없이 굴러 들어오는 그런 곳이었다.

태정의 아버지는, 100대가 채 안 되는 소형 파친코의 점주였다. 지난 몇 년간 파친코가 대형화되고 손님들이 그쪽으로 몰리면서 아버지가 운영하는 곳도 그 영향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태정의 판단에 아버지는 사업에 재주가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그럭저럭 굴러가긴 했다. 실질적으로 태정의 파친코를 운영하는 것은 어머니였던 것이다. 막무가내, 주먹구구식 영업 스타일의 아버지의 막후에서 직접적으로 운영에 관여하지 않은 듯 관여하여, 가게 영업에 어머니의 뜻을 관철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자궁암 수술 후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은 채로 운명을 달리한 이 후부터 상황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태정의 아버지는 중심을 잡지 못했다. 유복하다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근 십 년 간은 파친코 경영자에게 악재에 악재가 겹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었다. 만성적인 야쿠자의 행패는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법률이 업자에게 불리하게 개정되고, 파친코 죽이기에 나선 정부와 언론의 합작으로, 파친코 의존증과 카드 변조를 통한 탈세에 포커스를 맞춘 언론과 여론에 얻어맞았다. 파친코 업계는 과포화 상태로 경쟁은 심화되었다. 상황은 안 좋게만 굴러갔다. 아버지는 돈을 끌어다 쓰기 바빴지만 수익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지난 4년 간 아버지는 8천 만 엔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고, 현재 집은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었다.

그래서 태정은 일이 필요했다. 아버지의 빚 때문은 아니다―태정이 뭘 어떻게 하겠는가! 그의 힘으론 어림도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이상한 데서 고집이 있었고 소형 점포가 속속 문을 닫는 상황에서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가게를 포기하거나 정리하려 하지 않았다. 빚이 빚만 부르고 있는 지금도 여전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태정은 스스로 앞가림을 해야 했다. 태정은, 자신의 몸 하나를 건사할 만큼은 일을 해야 했고, 또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대학에 진학해 뭔가를 배워야 할 것인지, 아니면 사회로 뛰어들어 돈을 벌어야 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고, 그 이전에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해야 했다. 대학을 간다해도 스스로 학비를 조달해야 할 것이므로, 지금부터 일을 해야 했고, 대학을 가지 않는다고 한다고 하면, 더더욱 일을 해야 했다.

조고에서 배우는 것들은 사회에 나가 모두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조고생들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일을 배우고 경험을 쌓아야 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부터, 태정은 도시락 배달, 편의점, 라면집, 찌라시 배포, 피켓 맨, 창고에 맥주 쌓기 등을 거치며 아르바이트를 했고 고교 2학년을 들어서면서 파친코에서 일하게 되었다. 파친코 때문에 집이 빚더미에 올라앉은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게 파친코 점의 보수가 월등하게 가장 좋았다.

“테짱∼∼.”

말썽이 된 손님을 무사 처리하고 자리로 돌아가려는 태정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멈칫 서서 지나친 곳을 돌아보자 파친코 앞에 살짝 웃으며 한 여성이 앉아 있다. 다카기 상이었다. 언제나 생각하는 것이지만, 2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여성이었다.

“어제는 왜 안 나왔어? 전화는 받지도 않고…. 어? 테짱 얼굴이 왜 그래?”

다카기 상의 웃는 얼굴이 놀란 얼굴로 뒤바뀌었다. 그러곤 대뜸 얼굴에 손을 대며 보통과는 다른 얼굴의 연유를 묻는다. 태정은 좀 다쳤다고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어쩌다 그런 거야…. 다른 데는 괜찮아?”

괜찮다고 하며 그녀를 안심시키지만 믿음을 사기엔 조금 부족했나 보다. 안 좋아 보인다고 다카기 상이 걱정을 한다.

“참, 지금은 근무시간이니까 길게 얘기 할 수 없지? 있다가 말해줘야 해…. 어제 난 폐장 때까지 기다렸다고 바보 같지?”

“바보라뇨…. 아녜요.”

그리고 죄송하다고 태정이 사과하자, 그녀는 손사래를 친다.

“사과 받으려고 한 소린 아니지만…, 뭐어, 있다가 톡톡히 혼내 줄 거야…. 후훗 그럼 나는 놀 테니까 테짱은 열심히 일해.”

아리송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여자는 단단히 별렀다. 그리고 다카기 상은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가볍게 의자를 돌려 자세를 바로 잡고 바로 게임 스타트, 레버를 돌리며 머신의 구슬을 눈으로 쫓았다.

올해 스물아홉인 그녀였지만, 태정이 다카기 상을 처음 보았을 땐 대학생이나 갓 졸업한 사회 초년생인 줄로만 알았다(물론 여성의 나이를 어림짐작하는 것에 태정이 영 재주가 없기도 했지만). OL인 그녀가 파친코를 찾은 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것도 아니었고 혼자 놀 거리를 찾으러 온 것도 아니었다. 이 마루코엔 파친코 센터에서 내건 경품은 매우 다양했는데 그중에 루이뷔통이 있었던 것이다. 단지 그 이유였다. 근사하게 디스플레이되어 있는 비통의 백은 그녀가 항상 갖고 싶어했던 가방이었다. 그녀는 숍에 주문을 하고 수개월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파친코 공략으로 가방을 획득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너무나 안일한 생각이라―게다가 그녀는 초보 중의 초보였다―태정은 웃음이 나왔었지만, 다카기 상 앞에서는 일절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상당히 진지했다. 어디가 좋은 자리인지, 잘 터지는 자리인지 태정에게 묻고 게임 공략법에 대해 어드바이스를 구하고 매번 올 때마다 먼저 그 가방이 무사한지를 확인했다. 이따금 그녀는 게임 중에도 누군가 운 좋은 사람이 그것을 가져가지 않았느냐고 걱정을 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태정은 그녀가 무슨 질문을 하든, 어떤 요청을 하든지 성실하게 대답하고 응해주면서 그녀를 안심시키고 독려해주었다. 까다로운 손님에 대해 친절한 직원, 조금은 까다롭지만 재미있는 단골, 태정은 서로 그런 종류의 호감을 쌓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카기 상은 태정에게 조금 다른 호감을―혹은 흥미를―가졌었던 것 같다. 어느 날 그녀는 태정의 퇴근을 기다렸다―아주 늦은 시간까지. 그게 대략 이 개월 전의 일이었다.

* * *

영업이 끝나도, 뒷정리를 하고 센터의 문을 나서면 이미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어 있다. 하지만, 다카기 상은 별로 지루한 기색 없이 센터 앞 편의점에서 태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빵빵 하고 태정이 스쿠터에 앉은 채로 밖에서 경적을 누르자 다카기가 유리 너머로 태정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녀는 마주친 눈을 떼지 않으면서 밖으로 나왔다.

“오늘도 운이 없어.”

조금 시들한 목소리로 그녀가 입을 연다.

“얼마 잃었는데요?”

“어머 따긴 땄다고. 봐, 이 경품들…, 내 사랑을 가져갈 만큼은 안 돼서 그런 거지.”

“네에? 다카기 상 사랑은 저 아니었어요?”

태정이 약간은 놀란 듯이 그러면서도 유들유들하게 대답한다. 그녀의 사랑이 비통 백을 지칭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질투하는 연인 마냥 항의를 한다. 일종의 놀이다. 그녀와는 언제나 심각하지 않고 가벼웠고 이런 말을 농담 삼아 편하게 주고받을 수 있었다.

“어머 테짱, 내 사랑이랑 테짱을 감히 어떻게 비교할 수가 있지?”

그녀 역시 농담으로 태정의 넉살을 기세 좋게 되받아 친다.

그녀는 태정을 항상 테짱이라고 불렀다. 조,태,정,입니다. 처음 이름을 물은 그녀에게 태정은 풀 네임을 말했다.

「아, 혹시 자이니찌在日?」

놀래 동그래진 눈에 불쾌감은 없었다. (태정의 자기소개에 드러내놓고 반감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드문 건 아니다)

「그럼 성은 ‘조’이고 이름은 ‘테전’이겠네….」

약간 미묘하게 다른 발음이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고 태정이 그렇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꼭 이름을 까먹을 새라 자꾸 테전 테전 이라고 중얼거리는 게 앞으로 자신을 그렇게 부를 기세여서 태정은 지금 발음을 고쳐주는 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태,정,이에요. 태.정.」

「그래? 응… 그래 테,전. 맞지?」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발음으로 따라하면서 뭔가를 궁리하듯 눈망울을 굴렸다. 테전이면 테짱이네…, 듣기도 좋고 부르기도 좋지? 좋은 아이디어라는 듯 가볍게 손바닥까지 치면서 좋아라 웃으면서 그녀는 앞으로 테짱이라 불러도 돼? 라고 물었다. 원래부터 격의 없는 손님이었다. 왠지 모를 친밀감도 있었고 말이다. 태정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태정을 테짱이라고 불러 왔다.

“잠깐, 테짱 나한테 혼날 게 있었지 아마? 일단 집에 가서 보자구.”

늘 그렇듯이 그녀가 파친코를 찾은 주말이면 그녀의 집으로 간다. 그건 그녀가 태정을 기다렸던 최초의 토요일 이후로 암묵적인 약속처럼 되어버렸다. 태정은 편의점에서 종종 걸음으로 나온 그녀를 반갑게 맞이해 스쿠터의 뒷자리에 태운다. 빨간색의 반구형 스쿠터 헬멧을 씌워 주고, 그녀가 허리에 손을 단단히 감았는지를 확인한 다음 태정은 스쿠터를 출발시켰다.

* * *

녀석들이 배지를 빼앗아 갔어요. 찾으러 갔지요. 배지 갖고 뭘 그러냐구요? 배지는 조고 자존심이거든요. 네, 어린 걸지도 모르지요 아무런 수확도 없었고 맨손으로 돌아와야 할 판이었죠. 그쪽에서 결투를 신청하는 겁니다. 그렇죠. 뭔가 거꾸로 된 거지요. 네, 받아 들였어요. 거절 한다구요? 그걸 그냥 놔둘 조고 녀석들이 아닙니다. 싸움을 피하면 그대로 겁쟁이가 돼버리거든요. 네? 아…, 왜 제가 나섰냐면 그쪽이 절 지목했어요. 이유라…. 모르겠어요. 에…, 잘 모르겠는데요.

다카기 상의 집에 도착해 태정은 그녀가 원했던 얼굴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간간이 태정의 이야기에 끼어들면서 짧은 질문을 하고, 그는 답변을 섞어 가며 상처의 사유를 들려주었다. 꼭 누나가 하나 더 있는 것처럼 태정은 다카기 상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참으로 편했다. 사건의 전모를 늘어놓다 보니 그동안의 일이 참 쓰잘데 없고 시시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덜 자란 고등학생 녀석들이 치기로 벌인 일들처럼 보이는 것이다. ‘어려 어려…, 덩치만 큰 어린애들이라니까’라고 말했던 그녀의 말처럼……. 그녀 앞에서 사건은 재일 외국인 대對 본국인의 갈등 따위가 아니라 그저 고등학생들의 주먹 다툼에 불과했다.

그녀는 태정이 아직 고교를 졸업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평일 스케줄을 묻는 그녀에게 학교를 가야 한다고 하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무슨 대학이냐고 물었는데, 대학이 아니라 고등학교라는 대답에 그녀는 태정이 그의 이름을 말해주었을 때보다 훨씬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웃음을 터뜨리며 유쾌해했지만 말이다. 알고 나니까 더 좋아지는걸…,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중에 안 거지만 그녀는 연하를 좋아했다. 어리면 어릴수록 좋아…. 언젠가 농담처럼 말했지만 꼭 농담 같지만도 않았다.

“아직도 그러고 노는구나…. 너네 때도 변한 게 없네? 왜 조총련과 일본 애들 패싸움 말야. 나도 그런 이야긴 자주 들었거든…, 신문에 나기도 했어, 그런 기사가. 그게 벌써 20년은 됐을 것 같은데? 내가 학교 다닐 때였는데… 소학생小學生 때 말야. 후훗.”

태정의 얼굴의 붙였던 밴드를 떼고 다시 소독을 해주는 그녀의 얼굴에 과거를 회상할 때의 희미한 미소가 내 비친다. 하지만 그리움에 웃는 건지 그런 일이 아직도 되풀이된다는 사실에 웃는 건지 애매하다.

그녀의 말에 따라 웃고 싶을 정도로 태정은 자신의 형편이, 그리고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한심하게 보였다. 뫼비우스의 띠다. 돌고 돌다 보면 똑같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두들 계속하여 반복해 댄다. 아니, 똑같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지도. 태정은 궤도를 이탈해보고 싶었고 그래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지만 실패했다. 그것은 강력한 자기장처럼 태정을 끌어당겨 놓아주지 않는 것이다.

“하긴 삼촌도 그런 싸움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했죠.”

그때부터의 고리는,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의 고리는 여전히 끊어지지 않았다. 태정의 말에 그것 보라면서 그녀는 남자들은 다 똑같다고 하면서 장난스런 어조로 하지만 확신에 찬 태도로 태정을 응시하며 말한다.

“나 테짱 삼촌이 어떻게 말했을지 알 것 같아…, 백전 무패라고 했지? 아, 그리고 테짱도 보나마나 이겼을 거구. 맞아?”

그녀는 태정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쉬지 않고 싸움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다.

“남자들, 그거 갖고 굉장히 으쓱댄다구 모르지? 저희들 꼭 한 번은 조총련이랑 싸운 것처럼 얘기 하지만, 내가 보기엔 하나둘 땐 열에 하나 빼곤 다 허풍이야. 근데, 정말 이기는 거 맞아? 일본애들은 지들이 이겼다고 하고 조총련은 또 자기들이 이겼다고 하니까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남자들 입에서 들을 수 없는 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임신했다는 말이고 또 하나는 싸움에서 졌다는 말이라지?”

그녀의 말로 인해 머릿속엔 골목 싸움의 승패가 떠오른다. 그녀에게 말하면 그 싸움에 대해 생각을 덜어 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맞아 터져 입 속에 고인 피를 뱉어내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못했다. 싸움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토해내도 토해내도 입 속엔 계속 피가 고이는 것 같았고 피 냄새는 가실 줄을 몰랐다.

잠깐 팔 좀 위로 뻗어봐…. 얼굴의 상처를 다 본 다카기 상은 손을 든 상의를 자연스럽게 벗긴다. 그러고는 자신이 의료 요원이라도 된 양, 태정의 상체 타박상을 손으로 세세히 눌러보면서 통증을 묻고 또 몸을 살폈다.

“테짱, 이거 다친 것 좀 봐. 멍들고 붓고 꼴이 말이 아니잖아….”

“이 정도는 별것 아니죠.”

호기롭게, 태정은 테짱을 걱정하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게 노력한다. 사실 드러나는 통증으로 끝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복부나 목 등 어떤 특정한 곳은 타격으로 내부가 손상되어도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곳이 있다. 아픈 것은 별도로, 그런 곳을 잘못 맞았다간 자칫 심각한 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었지만, 이번 일은 그녀에게 한 말처럼, 대수롭지 않은 정도로 끝난 것이다.

“후후훗, 별거 아니란 말이지…? 테짱도 똑같아, 싸움 한 번 한 것 가지고 흥분해서는…. 아픈 것도 모르겠지? 하지만 좀 흥분되긴 하네. 테짱한텐 미안한 말이지만, 재밌기도 하고. 싸움 얘긴 많이 들어서 지겨울 정도지만 처음 보거든. 갓 싸워서 상처를 안고 돌아온 사람 같은 거.”

스스로가 인정한 것처럼 흥분 때문인지, 그녀의 어투는 평소보다 살짝 빠르다. 흥분이라. 싸움에 흥분하는 사람들은 꽤나 많이 있는 것 같았다. 우선 다카기 상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떠올랐다. 녀.석.이 흥분을 했었다. 싸움 중에.

“싸움 도중에 흥분하는 건 어떤 인간이죠?”

문득 떠오르는 질문에 앞뒤 설명을 생략하고 묻기부터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카기 상이 되돌린 질문은 꽤나 날카로웠다.

“싸움 때 흥분을 하는 인간이라……. 혹시, 어제 상대가 그랬었어?”

다카기 상은 추측이 맞다는 걸 알고 흥미에 더해 강한 호기심을 보이면서 질문을 했다. 흥분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 않느냐, 상대가 어떻게 흥분을 했으며, 테짱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었냐는 둥. 태정은 그녀의 질문 공세에 이런, 하고 속으로 잠시 혀를 찼지만, 귀를 쫑긋 세운 건 그가 던진 질문 탓이다.

“그러니까…, 성적인 흥분 말입니다. 절반 정도 그게 발기해 있었는데…, 아무튼 알 수 있었어요.”

태정은 자세한 세부 사항은 간간히 생략하면서도, 그녀의 질문에 차근차근 대답했다.

“아, 싸움박질하면서 몸을 부딪치고 껴안고 하니, 그런걸 알 수도 있구나.”

빠진 설명에 그녀는 나름대로 논리를 세운다. ‘부딪히고 껴안다’라…, 싸움 구경이 없다는 다카기 상은 아마도 TV의 복싱 중계나 프로 레슬링 정도를 떠올리고 있으리라. 하지만 고토의 흥분은 시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고대 아테네 올림픽의 투사들처럼 그들은 알몸으로 겨루지 않았었던가.

“싸움에 미친 녀석일까요? 뭘까요?”

“어려울 것도 없이 간단하지. 싸울 때마다 다리 사이로 흥분을 느끼는 거면 아마 가학적인 성도착이겠지…. 간단히 변태로, 십 년 후면 풍속風俗에서 채찍을 들고 여자를 때리는 길로 빠져 있을게 빤히 보이는데? 그게 아니라면…, 혹시 테짱한테!? 어멋, 그것도 좀 비슷한 건가? 푸후후훗.”

다카기 상은 혼자 농담을 하고 자신의 농담에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러다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그치고는 태정에게 얼굴을 들이댄다.

“테짱은 그때, 흥분하지 않았어?”

커다랗게 치켜 뜬 눈, 다카기 상은 그 눈으로 태정을 응시하며 단지 어깨를 살짝 밀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시작임을 깨닫는다. 태정이 눈치가 빠른 편이 절대 아니었고, 넉살도 결코 좋은 편이 아니다. 그렇지만 다카기 상과 있을 때는 달라진다. 그녀의 냄새가 좋다. 이건 현실의 냄새, 올바른 냄새이다. 그 편안한 내음에 코를 파묻고 안식을 얻고 싶다.

“그때 얘긴 그만해요, 다카기 상. 지금, 흥분했는지 봐줄래요?”

그녀가 밀고 있는 어깨를 잡아당기면서, 태정은 다카기의 매끄럽고 하얀 목에 얼굴을 묻었다. 흐읍… 여성의 좋은 향내가 물씬 났다. 아무렇지도 않았던 가벼운 접촉은 이내 농밀한 접촉으로 변해간다. 태정은 한 손으로 바지 버클을 풀면서 나머지 손은 그녀의 턱을 감아 올렸다. 태정의 입은 다카기의 목에서 턱으로, 턱에서 입으로 옮아갔다.

* * *

이 개월 전 그녀는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태정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자신은 더 이상 루이뷔통 백 때문에 이곳에 오는 게 아니라고. 그리고 다른 경품이 마음에 든다고…. 태정은 심각한 태도로 말하는 그녀에게 미간을 좁히면서 되물었다.

「다른 경품이라면… 뭐죠?」

조 당신, 이라는 다카기의 말에 태정은 상당히 당황했지만, 또렷하게 올려보는 다카기의 눈에는 미세한 흔들림이 있었다. 그 흔들림은 오히려 태정의 당황을 멈추게 했다.

「그렇다면 다카기 상은 이미 당첨되신 겁니다. 축하드립니다.」

크게 터진 손님에게 건네는 축하 인사처럼, 객장에서의 영업용 스마일을 짐짓 가장하면서 태정이 행동하자, 그녀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태정은 다카기 상의 인도대로 그녀의 맨션으로 가서 갔다. 오늘처럼.

또래의 아이들은 섹스에 대하여 노골적인 호기심을 드러냈다. 호기심이 없는 녀석들도 그런 척해야 했는데, 그래야 남자다운 것이고 그런 류의 경험은―꾸며냈을지라도―자랑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은, 당면한 수행 과제 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된다. 하지만 그런 법석이 의아할 만큼, 섹스는 태정에게 자연스러운 부분이었다. 섹스가 미치도록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글쎄, 없는 것 같다. 그것이 강도 있는 운동 때문인지, 자신의 섹스 판타지가 소박한 것일 뿐인지, 아니면 거절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런지도. 여성들의 은근한 성적 유혹을 말이다. 그렇다고 유혹이 많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저 태정은 권유에 응할 뿐이었고, 그것을 할 수 있을 때 그것에 충실히 임해 왔을 따름이다.

주위의 다른 녀석들이 섹스로 고민할 때, 태정은 집안의, 그리고 자신의 돈 문제를 생각해야 했다.

태정의 문제의식을 형성하는 건 섹스가 아니라 돈이었다.

정체성의 문제는 뒤로, 맨 뒤로 미뤄놓는다.

행위가 끝나고 그녀는 담배를 폈다. 물 먹을래? 다카기는 태정에게 물을 권했다. 네, 주세요…. 그녀가 담배를 입에 문채로 가져다 준 물을 태정은 기꺼이 받아 든다. 벌컥 벌컥 태정이 물을 들이켜 금세 컵을 비우자, 그녀가 조그맣게 웃었다.

“뭐가 재밌어요?”

“태정이 물을 너무 잘 먹어서 그래…. 갈증이 날 만큼 섹스에 집중했다는 거잖아?”

“그래서 물을 갖다 주겠다고 한 거예요?”

다카기는 빙그레, 입을 벌리지 않고 부드럽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만 웃지 말라고 하자 다카기는 그녀만의 생각을 그제야 입에서 꺼내놓는다.

“물을 얼마나 먹느냐를 보면, 음…, 그게 좋았는지 좋지 않았는지, 얼마나 좋았는지 알 수 있거든.”

“그걸 측정하는 게 다카기 상은 재미있는 거구요.”

“응, 재밌어. 테짱을 놀리는 것도 재밌고…. 테짱 오늘, 아프다는 사람이 평소보다 더 적극적인 것 같던데?”

다카기는 태정을 가볍게 골리며 웃었고, 태정은 그런 그녀를 곤혹스런 얼굴로 그만두라고 말린다. 하지만, 다카기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태정은 아플 때나 감기가 들었을 때의 행위에서 기분이 더 고조되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전 아플 때 좀 더 잘 흥분하나봐요.”

그때의 기억을 상기하자, 태정은 멋쩍은 느낌에 괜히 머리를 긁적인다.

“어머 싸울 때 흥분하는 누구와는 반대 체질인 거잖아? 아무튼 그거보단 나으니까 괜찮아. 괜히 쑥스러워 하지 말라고. 후훗.”

여전히 태정을 가지고 농담을 하면서 그녀는 참, 이라며 뭔가 생각난 듯 그를 응시했다.

“근데 ‘옛퍼 옛퍼’라는 말이 무슨 뜻이지?”

“옛퍼 옛퍼요?”

“으응 가끔 태정이 굉장히 흥분했을 때 그렇게 말해…. 기억 안나? 그러면서 허벅지를 세게 들어올린단 말야. 더 거칠어지고 세게 들어오고.”

그녀의 말을 듣고 태정은 왠지 창피한 느낌이 들었다. 태정은 앞으로 쳐진 머리에 손을 찔러 넣어 쓸어 올렸다. 다카기는 태정의 ‘예뻐’라고 했던 말이 ‘옛퍼’라고 들렸던 것 같다. 그리고 태정은 오늘 다카기와의 행위 중 ‘예뻐’라는 말을 상당히 많이 입 밖에 낸 모양이었고 말이다.

“왜 얼굴이 붉어지고 그래…. 의외로 순진한 거 아냐? 테짱.”

오늘 따라 다카기 상이 짓궂다. 태정은 정말 자신의 얼굴이 붉게 되었는지 아닌지 확인할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이냐고 재차 묻고 태정은 머리를 긁던 손을 옮겨 애꿎은 뺨을 검지로 긁으면서 대답했다.

“그건요…, 카와이이귀엽다 하다는 거예요…. 아니, 키레이? 아무튼, 그런 의미가 섞인 거예요.”

“그래? 후후훗 역시 재밌단 말야…. 테짱은 신선해. 대개 최고조에 달아서 피스톤 운동 할 땐 이이, 이이좋아 좋아 라고 하거나 이쿠 이쿠간다, 이러잖아? 처음 유혹할 때 속삭이거나 끝나고 나서나 말해주지, 하는 도중엔 그런 말 대개 안 한다구. 으음…, 뜻을 알고 나니까 다음부터 그 말 들으면 더 흥분할 것 같은데?”

태정은 재차 듣기 멋쩍고 민망한, 그리고 거침없는 다카기의 평에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자 다카기는 쓸어 넘기지 말라고 하며 태정에게 살짝 손을 젓는다.

“파친코에서는 뒤로 빗어 넘겨 이렇게, 헤어젤로 고정시키잖아. 그거보다는 머리 내리는 게 더 어려 보이고 귀여워…. 음, 옛퍼.”

화제가 다른 걸로 넘어가 다행인가 싶었더니 ‘예뻐’라고 다카기는 태정을 따라 발음을 한다. 그 바람에 태정은 또다시 그 말을 상기한다. 자신은 다카기 상의 안에서 그녀에게 숨이 가쁜 어조로 예뻐 예뻐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무의식중에 나오는 말이 지적을 당하고 멀쩡한 정신의 의식을 파고들자 태정은 심하게 무안했다. 그리고 슬며시 혼자 목을 붉혔다.

하지만, 태정은 이렇게 그녀와 계속―집과 학교를 잊고―시간을 더 보내고 싶었다. 어제는 나쁜 꿈을 꾼 것 같고 지금은 아주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 가자고 태정은 생각했다.

굉장히 평온하고 안온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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