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한 여인이 노래 할 때까지 #3
거기에는 다섯 명의 인간이 검은 갈색의 견고한 둥근 탁자―마치 전설 속 아더 왕의 그것 같은―주위에 둘러 앉아 있었다. 태정이가 문 앞에 서자 다섯 모두 태정이네들을 눈으로 쏘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삼대 오라. 해볼 만한데.”
태정과 나란히 선 경무가 혼잣말로 전의를 불태웠다. 대체 뭐가 해볼 만하다는 건지, 경무 녀석. 희상은 골수 비폭력 주의자였고, 태정 또한 국사관과의 무력 대결 같은 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만약―일 백 퍼센트 가정이다―여기 있는 녀석들과 붙는다면 실질적으로는 일대 오의 상황일터, 경무는 아마도 계산을 다시 해야 할 것이다.
“들어와서 앉으시죠.”
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한 녀석이 고개로 까닥, 들어오라는 제스처를 보이며 말을 던졌다. 아마도 상대에게 예의 따윌 기대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저으기 정중한 요청을 통한 만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정의 일행은 저쪽에게 불청객 또는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었다. 경무도 그들의 분위기와 상대의 태도에 대충 어떤 감을 잡았는지 불끈 하는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일단 들어오라는 대로 조고 삼펜은 열린 문을 통해 들어갔지만, 앉지는 않았다. 짧은 순간, 태정은 어떤 녀석이 국사관고 회장 고토 마사키인지, 한눈에 분별해 낼 수 있었다. 앉아 있는 다섯의, 키와 체중 그리고 얼굴을 훑고 나니, 그중에서 ’탁’ 하고 튀어나오듯 전화 통화에서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도출되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태정이 목소리만 들으면 사람을 식별해 낼 수 있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재주를 숨겨둔 능력자 같은 건 절대 아니다)
전화 속의 고토는 전체적으로 가다듬어진 깔끔한 테너의 음색과, 귀에 듣기 편한 베이스의 파장이 혼합 돼 있는 목소리였다. 그런 목소리야 저기 테이블의 다섯 중의 누구도 낼 수 있는 목소리이리라. 하지만 목소리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다. 태정은 목소리의 복합적인 정보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 다섯 중에는, 앉아 있어도 사람을 내리깔아 보는 것 같은 하나의 시선이 있었고, 그것은 오만과 독선과 편협이 한 데 뒤섞여 태정을 보고 있었다.
테이블 좌측에 의자에 팔을 걸치고 앉아 태정 일행을―정확히는 태정을―훑어보는 조용한 녀석에게서, 태정이 전화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를 보았다.
원형의 탁자가 무색할 만큼, 국사관고의 테이블에서는 권력의 구도가 보였다. 넷 중 두엇이 태정 일행을 의식하며 슬쩍 고토를 쳐다본다. 태정 일행과 대면한 상황에서 입을 열지 않는 고토의 반응을 기다리는 것으로 보아 고토가 그들의 중심이라는 것을 확연히, 그리고 너무 쉽게 보여 주고 있었다.
그러니, 사실을 말하자면 고토 마사키가 누구인지는 목소리 같은 걸 듣지 않았어도 충분히 맞출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문제였던 것이다.
희상이 쉽게 고토를 알아보고 태정에게 짧게 말을 건넸다.
“저 녀석이군. 왼쪽, 갈색 머리, 반지.”
경무는 그의 예상이 대단히 빗나가 실망했겠지만, 왼쪽의, 탈색한 갈색 머리를 한 국사관 회장 고토는 얼굴이 희멀건하지도, 금테 안경을 걸치지도 않았고, 신경질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앉아 있어서 키를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아무튼, 드러나는 골격으로 보아 그리 작지는 않은 키다. 그리고 정신과 신체의 조화로운 발달을 표방하는 학교의 회장답게 유약해 보이지도 않았다. 몸을 단련하고 있다는 듯한 증표로 구석에는 서너 자루의 죽도가 과시용처럼 책상 위에 나란히 배열 돼 있었다.
“조고와 국사관고의 기념할 만한 첫 만남인데 악수나 한 번 하지요. 조고 회장 조· 태정·이라고 합니다.”
태정은, 성과 이름을 명확히 분리해서 하나하나 또박 또박 발음해주며 (총련이나 민단과 관련된 사람 이외에는 그의 이름을 정확히 발음해내는 사람 드물었다) 자신을 그에게 또 한 번 소개했다. 그리고 드디어 얼굴을 마주하게 된 국사관의 회장에게 손을 뻗어 인사를 청했다. 다른 넷은 자신들의 회장이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숨죽이고 바라보는 것 같았다. 모습을 보아하니, 고토가 아닌 그 네 명 중의 어떤 녀석에게 팔을 뻗었다면 아마도 그는 고토의 얼굴을 쳐다보며 응락을 구했을 것이다.
고토는, 마치 태정의 얼굴에서 뭔가를 찾아내려는 사람처럼 가는 실눈을 뜨고 입매를 굳힌 채로 태정의 내민 손이 무안하게 5초를 (속으로 카운트를 했다) 기다리게 하더니 고개를 갸웃 하면서 손을 내민다.
“나는 고토, 고토 마사키.”
태정은 상대의 저런 멋대로의 반응이 자신과의 전화 통화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 작용하는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아무튼, 이쪽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로 나온다고 해서 저쪽과 같은 방식으로 나가는 것은 상대방에게 휘말리는 것이다. 귀찮다는 듯 시원찮게 내뻗었던 손치고는 악수할 때의 손아귀 힘이 꽤 셌다. 태정은 국사관의 환영 방식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똑바로 치켜올려 태정을 바라보는 고토의 짙은 갈색 눈에 그대로 곧은 시선을 되돌리며 악수를 하는데 손에 꽤 이상한 이물감이 느껴진다. 뭐지…. 악수가 끝나고 나서 그게 무엇인가를 확인하려 고토의 손을 더듬었다. 반지였나…, 아까 희상이 지적했던 반지였다. 학생이 끼고 다니기에는 상당히 화려하게 보이는 반지가 고토 오른쪽 집게손가락에 자리하고 있었다. 섬세한 세공이 들어간 금색의 반지가 꽤나 인상적이었다. 더불어 악수가 끝나도록 끝까지 일어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로, 인상적이다.
그렇게 양교 회장들의 대표 인사만으로(조고나 국사관의 나머지는 모두 회장들의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에 암묵적으로―서로를 무시하는 것으로―의견을 같이했다) 조고와 국사관의 상견례가 끝났다.
“증거부터 보고 싶은데 우리가 그쪽에 가했다는 폭력의 증거 말야.”
거두절미하고 국사관의 회장이 당당하게 증거를 요구했다.
“뭐? 그럼 증거가 없으면, 명백히 일어난 그 사건이 없어지기라도 한대? 증거 대라고 하는데, 그럼 우리가 너네한테 당하지 않았다는 증거 너흰 댈 수 있냔 말야!”
대화다운 대화, 협상다운 협상이 진행되기도 전에, 결국―드디어―경무의 성질이 폭발해버리고 말았다. 저 고토라는 녀석의 태도를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외관상, 분위기상 고토는 냉정하고 사무적인 듯이 보인다. 그런 녀석이 저렇게 대놓고 사람을 경시하고 다짜고짜 반말부터 해대는 모양은 그 외양과 태도의 커다란 갭만큼 사람의 기대를 따라주지 않기 때문에 더욱 낙차 폭이 커서 불쾌하고 떨떠름한 기분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역시 증거라는 건 없었군, 그렇지? 이렇게 목소리만 커서 소릴 질러대면 겁먹을 것 같았나? 어린애도 아니고.”
어린애라는 말에 이마를 상대방에게 디밀면서 한발 앞서는 경무의 앞에 슬쩍 가리면서 태정이 선수를 친다.
“폭행의 증거를 대라면 대겠지만, 그것보다 우린 이유 없이, 그리고 부정하게 빼앗긴 우리 조고의 배지 때문에 왔습니다. 돌려주시죠 그 배지.”
희상은 태정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김영일에게서 그를 구타한 집단의 구타 증거가 될 만한 뚜렷한 물증 같은 건 확보하지 못했고 정황 진술을 들어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증거가 없다는 상황을 뻔히 알고 있는데, 증거를 대겠다고 하는 태정이 미심쩍기도 했지만,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어 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확실히 배지 문제를 녀석들의 탁자위로 부상시키는 것이 제일 우선이다. 없는 증거에서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태정이 우선순위인 배지 문제를 언급한 것은 적절했다.
“배지라니? 그게 무슨 얘기지?”
“지금 그 배지를 돌려주면 우린 아무소리 안하고 그대로 조용히 저 문을 닫고 나가 드리지요.”
배지이야기를 꺼내면서 태정은 동시에 고토 주위의 넷의 반응을 살폈다. 역시 녀석들의 눈빛이 조금 달라지고, 그에 따라 탁자 위의 공기도 달라졌다. 그렇지, 녀석들밖에 없었다. 용의자 지목이야 범죄 유형과 패턴을 살펴보면 국사관 밖에 없었기에 손바닥 뒤집는 것 보다 쉬운 일이었지만, 국사관의 생도회가 직접 관여했는지는 불투명했다. 단지, 먼지 나는 과거를 들여다본다면, 배지에 관한 부분이 생도회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 그 사실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었는데 그들이 보여주는 반응은 태정의 심증이 완전히 굳어지는데 일조를 했다.
“뭘 내놓으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찾는 것이 배지라면 잘못 오셨습니다.”
고토를 대신해서 한 녀석이 대신 입을 열었다. 좋다. 대장을 대신한 지원병인가……, 아무튼, 정중한 말투가 그들의 오만 무쌍한 대장보다는 태도가 한결 나았다. 한 명이 나서자 연달아 다른 녀석이 공격을 자원해 나섰다. 눈의 꺼풀이 엷게 진, 그리고 그 엷은 꺼풀만큼 엷은 입술을 비틀면서 웃고 있었던 녀석이었다.
“있다는 증거부터 내놓으셔야지요. 주먹질이든 배지 강탈이든 우선 증거 제시가 먼저입니다.”
그들의 대장은 책상의 등받이에 깊숙이 허리를 받치고 두 손을 서로 깍지 끼고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증거증거…. 쳇 우두머리가 증거 찾는다고 똘마니도 똑같이 짖어대는군.”
경무가 심사 뒤틀린 듯 한마디 내뱉는다. 이쪽에 증거가 없다는 걸 알기에 그 불안을 저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지금 짖어댄다고 그랬습니까?”
“증거는――――!”
경무가 빚어낸 소란이 더 커지기 전에 태정은, 양자 모두 주목과 초점의 대상인 증거를 언급하며 상대의 항의를 가라앉혔다.
“증거라는 것은……, 시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이 아니지요.”
회의실 내 모두의 시선이 태정에게로 쏟아지고, 국사관의 회장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반듯한 이마와 가지런한 눈썹에―분명 정돈하고 있을 법한 눈썹이었다―긴장이 서렸다.
“사건의 피해자는 저기 목검으로 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의 구두, 끈으로 세 번 엮어 매는 바로 그 검은 구두로 채였다고 했지요. 목검 한 번 봐도 되겠습니까?”
증거라는 것을 거침없이 날조하는 태정에게 경무조차 혀를 빼어 물을 정도였다. 경무의 미간이 좁아지고(경무 녀석, 김영일이 정말 저런 진술을 했는지 의심하고 있을 것이다) 희상은 짐짓 태정과 같은 당당한 태도와 안색을 꾸민다. 상관은 없었다. 증거는 찾는 것이고, 찾아낸 것이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 그럴 리 없어.”
어이없다는 듯 고토 옆의 녀석이 중얼거렸다.
“그럴 리 없다는 건 린치하는 데 구두도 목검도 이용되지 않았다는 거겠지?”
“그런 게 아니라…….”
중얼거린 녀석이 항변을 시도하다가 고토를 슬쩍 쳐다보았다. 응원을 요청하는 건가? 스스로의 잘못을 수습하지 못하는 녀석에게 차가운 시선을 주고는 그대로 그 냉기어린 눈을 태정에게로 던진다.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이 웃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 저런 얼굴을 두고 하는 말이다.
태정이 놀란 것은, 그런 얼굴을 하다가 돌연 고토가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푸하핫―, 그런 어설픈 심문은 이쪽이 거절하지. 너무 우스워서 재미없다구. 하하하. 그럴 리 없다는 건 물론, 국사관의 구두와 목검은 더러운 녀석들에겐 사용하지 않는다는 거야. 알겠나? 조센징들.”
“그렇다면 배지 돌려주시지. 그 더럽다는 녀석들 물건은 왜 가져갔지?!”
경무가 앉아 있는 고토의 앞에 몸을 숙이고는, 주먹으로 탕탕 세지도 약하지도 않게 탁자를 두어 번 친다. 몸을 전혀 뒤로 빼지 않고 고토는 고개를 돌려, 바로 앞의 경무가 아닌 태정을 보며 말을 이었다.
“멍청하지만은 않아 조센징도, 배지는 너희들의 상징이지, 어쨌거나 우리가 가져간 것은 돌려주지 않아. 이건 룰이지. 다시 뺏어가는 거라면 상대해주겠지만 그냥은 내주지 않아. 하하하.”
어느 정도까지는 녀석들이 계속 부인하리라고 생각했었다. 웃는 모습만을 떼어놓고 보면, 절대 저런 이중적인 녀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 말이다. 전화에서, 그리고 아까까지도 계속 증거를 대라고 하고, 하지 않았다며 태연자약했던 녀석이었다. 태정에게 이것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지금 저 고토의 깔끔한 인정(태도와 말은 아주 지저분했지만)과 웃음에 협상의 여지는 없었다. 차라리 끈질긴 시치미와 사실 부인이 차라리 나았다. 차별적 언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고, 그것을 뿌듯해하며,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아주 당당하다. 이런 상대라니 좋지 않다. 상대가 배지를 돌려주지 않을 것을 예상 했었지만 상상과는 매우 달랐다. 코에서 냄새가 떨어지지 않았던 것은 이것 때문이었나.
정면 대결 선언. 선전 포고.
협상 결렬
“테러 행위를 지원하는 측과 반대 측 사이에는 중간 지대가 없다는데 정말이군.”
희상이 대상이 누구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희상은 테러와 폭력에 대해 매우 강력한 반대론자였다. 소수의 약자라고 말할 수 있는 그들의 신분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무도, 국사관의 조고에 대한 ‘테러’를 국제법의 표준정의나 테러 방지 기관의 교범에 실린 뜻의 그 ‘테러’로는 이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희상은 조고에 가해지는 폭력을 ‘심각한 국제 테러’와 동일하게 간주했던 것이다. 국사관 녀석들이 희상의 말을 듣고 ‘테러?’ ’지금 테러라고 했냐?’라고 웃으며 희상이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지만, 희상은 매우 진지하고 심각했던 것이다. 그런 희상은 진지하게 계속 말을 이었다.
“당연히 돌려받아야 할 것을 왜 빼앗아야 하는 건지. 우린 폭력의 재생산을 지지할 생각은 없습니다.”
“굉장히 고상하시군, 하지만 내가 보기엔 단순히 겁쟁이 같은데?”
고토의 악의적인 도발에는 대꾸할 가치도 없었고 반응해서 그의 기대를 만족 시켜줄 생각도 없었기에 태정은, 삼펜에게 ‘돌아가자’고 그들의 모국어로 말을 했다. 말을 되받은 건 경무, 이렇게 돌아가는 거냐고 낮은 목소리로 불만을 터뜨린다.
“시간 낭비야, 미안하다. 이렇게 될 걸 알았는데 헛걸음 시켰다.”
“안 돼, 뭐 하나 건진 거라도 있어? 우린 녀석들 비웃음거리만 됐잖아.”
“경무야, 우린 적어도 떳떳하게 행동했어. 저 녀석들이 비열하게 나온 거지. 저런 상대로는 태정이도 어쩔 수 없다는 거 너도 알잖아.”
“돌아가자, 가서, 다른 길을 찾아보자고.”
경무와 태정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임에도 분위기로는 충분히 그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있음을 알고도 남을 고토가 한마디를 던졌다.
“흥, 집안싸움인가…. 보기 좋은데.”
“저 자식이∼∼∼!”
아주 맘에 들지 않는 불리한 형세, 꼬리를 내리고 돌아가야 하는 삼펜, 거기에 약을 올리는 듯한 고토의 한마디. 주먹으로 상대를 때려 눕혀도 사그라지지 않을 경무의 성질이 그나마 탁자를 주먹으로 쾅!! 하고 내리치는 것으로 끝났다.
“너 이 자식 앞으로 또 우릴 건드렸다간 무사하지 못할 줄 알어!! 알았어? 엉?”
비록 짧은 대면이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경무 또한 이곳에 더 있어 보았자 녀석들에게서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음이 눈에 빤히 보였던 것이다. 경무와 희상을 먼저 문 쪽으로 내보내며 뒤에서 같이 보조를 맞추던 태정은 몸을 비틀어 앉아 있는 다섯에게 고개만 까딱 하고 문을 나섰다.
“잠깐…….”
태정이 마악 문을 나서려는 찰나 뒤에서 고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삼펜 일행의 고개 세 개가 일제히 뒤를 향해 꺾이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주시하는데, 그들을 불러 세운 고토는 둔탁한 금빛을 발하는 반지를 낀 검지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튀겨대고 있다.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이다. 계속 탁자에 손가락을 놀려대다가 삐딱한 고개를 하고 태정을 직시하면서 고토가 입을 다시 연다.
“배지…, 돌려 줄 수도 있는데……….”
한동안 침묵과 공백이 회의실을 점했다.
그 다음 말을 기다리는 태정 일행을 충분히 의식하며 고토가 말을 이었다.
“제의에 응한다면 말이지만 물론.”
* * *
고토의 제의는 받아 들여졌다. 녀석의 제안에 희상은 바로 반대를 표시했고, 경무는 그에 즉각 동의했다. 태정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국사관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오로지 경무 때문이었는데, 경무는, 고토의 제안을 삼펜의 삼인三人이 아닌, 삼펜―넓은 의미의 삼펜―의 모든 대원을 임시 소집하여 안건에 상정해서라도 태정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경무의 그것은 허세나 허풍이 아니었다.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고, 또 상황이 그렇게 된다면, 호전적인 성격의 삼펜은―딱히 경무의 지지 세력이 아니더라도―십중팔구는 경무의 뜻대로 결정을 내릴 것이었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고토가 제안이라고 내놓은 것은 일대일 대결이었다. 주먹대결이 범람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만화나 영화의 상상계 속에서였다. 고토의 말을 유심히 듣던 태정의 얼굴에는 점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희상에겐 그게 꼭 응낙할 법한 표정처럼 보였는데 그 미소 끝의 태정은 흥, 콧방귀를 내면서 ‘안 합니다’라고 아주 짧게 답하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경무의 반응은 대단히 흥분하면서―심장 박동 소리가 들릴법한 기대를 내포하고 있는 흥분이었다―좋다고 호기롭게 대답했다.
누가 나오든 이 내가 상대해주지….
경무는 자신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탕탕 치며 아주 자신 만만하게 국사관 녀석들에게 큰소리를 쳤다.
넌, 해당사항에 없는데…, 안 됐지만 말이지….
고토는, 아주 버릇없는 아이 마냥 집게손가락 끝으로 사람의―경무의―코를 겨냥하면서 말했다. 사뭇 경무의 약을 올리는 듯한 말투의 고토는 상대를 얕보고 있다는 것을 버젓이 드러내고 있었다. (경무가 그 태도에 욱하여 또 한 번 불을 뿜어 낼 뻔했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겠다)
이건 조고와 국사관의 정식 대결이기 때문에 조고의 회장과 국사관의 회장이 승패를 가린다고 잘라 말하면서 (고토는 태정을 가리킨 후 연이어 자신을 가리켰다) 녀석은 태정을 쳐다보았다. 한쪽 눈을, 눈썹―잘 가다듬어 가지런한 그것―과 함께 치켜올린 녀석의 두 눈은 ‘어때 해 볼래?’ 하는 건방진 빛을 발하고 있었다.
태정은 그런 도발에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손을 예의 그 얼룩진 바지의 주머니에 찔러 넣고 회실의 문간에 기대있던 태정은, 세기의 결투라도 될 것처럼 거창하게 말하는 고토의 제의에 어떤 흥미도 내비치지 않았다. ‘말씀이 다 끝나셨다면 저는 가보겠습니다’라는 정중한 인사가 태정의 입에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단호한 거절의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거기서 경무 또한 희상과 마찬가지로 태정의 명백한 의지를 보았던 것 같다.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태정이 무시할 듯한 위기감에서 경무는, 태정에게 삼펜의 임시회의 소집을 운운했던 것이다. 경무야 답답하기도 참 답답했을 터, 희상은 경무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바도 아니다. 저 밉살맞고 아니꼬운 고토라는 녀석을 공개적으로 속 시원히 두드려 줄 수 있는 기회인데 말이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를 제한했기 때문에 가타부타 대답은 태정만이 할 수 있었다.
고토의 제안은 조고와 국사관의 정식 ‘비무’를 ‘요청’한 것이었지만, 그건 표면적인 것이었다. 희상이 보기에 그것은, 상당히 개인적으로 태정을 ‘겨냥’하고 있었다. 왠지 모를 그런 느낌을 분명 태정도 받았을 것이었다. 만약 그것을 경무도 느꼈더라면 그렇게나 태정을 윽박지르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아무튼 간에 가시적인 명분은 좋았다. (그 이면에 어떤 속내가 들어앉아 있는지 알 도리는 없지만) 국사관의 생도회장과 조고의 회장 사이의 신사적인 정식 결투, 그쪽이 장갑을 던졌고 조고는 결. 국. 그것을 받아들였다. 따지고 보면 정작 장갑을 던져야 할 쪽은 이쪽이었다. 그것이 거꾸로 되어 태정이네들이 그 장갑을 주워들긴 했지만…, 그러기까지 조고 삼펜은 또 한 번 국사관 놈들 앞에서 ‘집안싸움’이라는 추태를 보였다. 경무가 고토의 제안을 끝까지 묵살하려는 태정에게 급기야는 네 녀석이 회장이냐면서 멱살까지 잡았던 것이다. 경무는 단지 자신이 조고의 회장―그리고 삼펜의 대장―의 위치에 있지 못했기 때문에 결정권이 없는 것으로 단순하게 이해했다. 그래서 녀석은, 고토가 던진 장갑을 주워들라고 태정에게 멱살을 잡으며 어거지를 부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한바탕의 소란을 피우고 조고 VS. 국사관고의 결투가 성립되었다.
* * *
고토는 자신들이 장소와 시간을 정해 따로 알려 주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사관 녀석들이 그것으로 조고에 연락을 취해왔을 때는, 태정이네들이 국사관고를 방문한 날짜로부터 이미 일주일이 경과하고 있었다. 더구나 결투 예정일―그들 멋대로 정한 날―이라고 하는 것을, 단 하루―남겨 놓고 있을 뿐이었다. 하루의 말미를 준 것을 고마워라도 해야 할 판이라고, 경무와 희상은 비뚤린 웃음을 날렸다.
태정은 고토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시간과 장소의 문제를 떠나서 이미 모든 것을 고토가 좌지우지하고 있다.
벌써 휩쓸려버린 거다.
처음부터 때와 시간의 선택에 어떤 거부나 결정의 권리가 없었던 조고였다. 조고에 어떤 준비할 여유도 주지 않겠다는 국사관의 빤―한 의도는 쉽게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태정에게 오히려 친절한 배려와도 같았다. (물론 녀석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겠지만)
애초에 대책이나 준비란 것은 필요 없었다. 정상적이지 못한 상대에겐 그런 것이 소용없는 것이다.
‘휩쓸렸다’라는 느낌은 그나마 그런 것으로 희석시킬 수 있었다.
경무는 그래도 태정이 걱정되었던 모양으로―실은 태정이 아닌 ‘조고 회장’이 걱정되었겠지만―태정을 훈련시키겠다고 자진하여 나섰다. 녀석은 제가 몸담고 있는 조고 복싱부에 나와 조금이라도 실전에 대비를 하라고 성화였다.
복싱은 모든 격투기의 기본이야. 진정한 힘과 인내의 운동이라구. 내가 체득한 방어와 공격의 요령을 가르쳐 주지 뭐. 내키진 않지만…. 그런데 너 어디가 급소인지는 아냐? 참, 황 선수의 승리 비결을 알면 분명히 이길 수 있어. 아무튼 복싱이 최고야 최고.
경무는 아예 복싱 예찬가를 불렀다. 그리고 태정을 은근히 무시하는 말을, 두서없는 말 가운데 빠뜨리지 않고 섞어 놓으면서도, 녀석은 꽤나 태정의 훈련에 의욕을 보이는 것이었다.
최고까지는 아니어도 권투가 매우 훌륭한 운동이라는 것은 태정도 알고 있다. 그리고 복싱에 대한 맹목적 애정을 지닌 경무의 모습은 사실 꽤나 보기가 좋았다. 자신도 한때는 권투 선수가 굉장히 근사하게 보였으니까.
상대의 움직임을 재빠르게 간파하는 것이 멋졌고, 그런 능력을 일컬어 ‘동체 시력이 좋다’고 했는데 그런 말조차도 멋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에 배 깊숙한 어딘가가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도, 복싱으로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생각도, 다 지난 한때의 어린 시절 이야기이다.
이제 태정에게 복싱은 ‘무모함’을 의미했다.
그건 복싱과 무모가 등가等價를 이룬다는 말이 아니었다. 또, 복싱을 무모한 운동이라 간주, 경시하게 되었다거나, 복싱을 하는 사람들이 앞뒤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 또한 아니다. 간단히 말해, 태정은 복싱을 통해 무모함의 실체를 알았다.
모처럼 경무가 보이는 우호의 제스처를, 그저 고맙게 받아들이고 성의 있게 훈련에 임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것은 고토에게 휘말려 들기 싫다는 단순한 이유를 떠나, 자신이 무모해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렇긴 해도 뱉은 말을 도로 삼킬 수도 없었다. 조고인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겁쟁이’가 되어서라도 그 ‘일대일 결투’라는 것을 물리고 싶었지만 이미 날짜는 코앞이다.
어차피 승부를 가려야 끝을 볼 수 있으리라.
적당히 하자고, 무모해지지 말자고 태정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무대는 제법 훌륭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대단히 멋졌다.
국사관에 의해 결정된―그리고 통보된―장소는 아오야마靑山의 한 클럽이었다. 세타가야世田谷에도 분명 적당한 장소가 있었을 터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그들의 동네에서 지하철을 타고 나와야 되는 지역의 한 클럽을 무대로 삼은 녀석들의 의도를 조고는 그저 또 한 번 고생을 해보라는 의미로 받아 들였다.
물론 주소와, 찾아오는 길을 간단히 일러 주긴 했지만, 오모테산도表參道 역을 나오자마자 길을 헤맨 것이다. 규모가 작은 미니 클럽이, 그런 클럽이 있을 법하지 않은 조용하고 후미진 거리의, 딱딱하고 재미없게 생긴 빌딩 지하에 박혀 있었으니 헤맬 법도 했다.
아마도 녀석들의 심술을 곡해한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장소 선정의 의도가 단지 심술이라고만 한다면 그건 장소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아니었다.
그곳은 본격적인 놀이터였다. 녀석이 일대일 결투를, 재미있는 유흥거리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놀기 위한 의도에 딱 부합하는 탁월한 장소였다. 태정의 눈에 고토는 철저하게 놀아 보려고 작정한 놈이었다.
한 가지, 국사관들에게 익숙한 홈그라운드일 것이라 예상을 했지만, 정말 이런 곳이 익숙한 녀석들이라면 그들은 분명 건전한 청소년은 아니었다.
그곳은 ‘Knock Knock’라는 이름의(이런 게 중요하진 않다) ‘공공연한 약물 거래로 인해 잠정적으로 폐쇄된’ 클럽이었던 것이다. 들어서기 전, 문 앞에 그러한 공문이 터억 붙어 있었는데, 토요일 주말 저녁, 클럽에서 이런 ‘이벤트’ 를 벌일 수 있는 것은 다 그런 설명 가능한 까닭이 있기에 가능했을 터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조고 팀이 도착했을 때엔 이미 국사관 팀이 홀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축제처럼 화려한 조명으로 내부를 밝혀 두고 조고를 맞이했다. 음악까지 걸어 놓고 고개를 끄덕이며 흥얼거리는 녀석도 보였다.
어제 고토는 흥과 분위기를 돋구기 위해 약간 명의 게스트를 초대하는 것을 환영한다는 말을 덧붙였는데, 국사관의 게스트는 약간 명 정도라기엔, 홀에 운집雲集해 있는 그 수가 상당했다. 어림하여 20명에 육박할 듯한데, 그건 조고의 두 배정도 되는 인원이었다. 고토의 말에 경무는 신속하게 희상을 제외한 8명의 삼펜 임원들에 연락을 취했고, 그들을 모두 소집, 행사에 동원했던 것이다. 지금 보이는 세력의 차이는 두 학교의 규모의 차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학생수 비례로 머릿수를 따진다면야 국사관 녀석들은 지금보다 배는 되야겠지만.
조고 삼펜이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약간은 들뜬 분위기에 웅성대었던 국사관 녀석들은 차츰 침묵을 만들면서 짐짓 무게를 잡았다. 그러고는 입장하는 조고를 빤히, 거슬리게, 건방진 태도로 지켜보았다. 기름 저장고에서 불을 든 녀석들처럼 쌍방 모두 긴장한 모습이다.
적대감이 동시에 고조되는 가운데 흘러나오는 백 뮤직은 아주 친숙한 멜로디의 아니메 송을 헤비메탈로 풀어내어 강렬한 비트와 사운드의 파워를 자랑하는 아니메탈이었다. <우주전함 야마토>의 주제가에 이어 막 흘러나오는 것은, 마치 승리를 염원하듯 <콘바토라 V>의 <비!비!비! 빅토리!>이다. 치기 어린 녀석들이 승부를 앞두고 듣는 노래로 이보다 더 적절한 음악도 없을 것 같았다.
희망찬 가사와 파괴적인 장르의 갭은, 그들 같이 덜 성숙한 사내녀석들과, 그들이 목전에 두고 있는 ‘결투’라는 말이 주는 긴장의 갭과 유사했다. 이게 만약 연출이라면 상당히 훌륭한 연출이라고 태정은 생각했다. 조작된 인위적 연출보다 여러 상황이 어우러져 맞물린, 의도되지 않은 연출이 더욱 드라마틱한 것이다. 음악으로 메워진 공기는, 탁하고 음습했다. 지하에 위치한데다 한동안 영업을 정지했던 곳인 만큼 으레 그럴 것으로 생각되어 그리 불쾌하지도 않았다.
태정과 눈이 마주친 고토가 그의 응원 군단을 헤치고 나와―그들이 만들어 주는 길을 따라―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했다.
“늦었군.”
손을 맞잡고 대뜸 하는 말이 조고의 지각에 대한 소리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늦으리라는 예상을 분명 했었을 터, 하지만 그에 대한 이의는 제기하지 않는다. 또한 이쪽의 실례를 사과할 필요도 없다. 태정은 늦었을 때 사람들이 가장 흔히 대는 변명 한마디로 간단하게 말을 맺으려 했다.
“차가 막히네요.”
태정의 대답에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고토가 질문을 한다.
“차를 타고 왔나…?”
궁금한 건 바로 알고 싶은 듯 곧바로 묻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의문이다. 그에 걸맞게 태정은 고개를 흔들며 짧게 지하철을 타고 왔노라고 대답을 해 준다.
순간 녀석의 표정이 재미있었다. 지하철을 타고 왔는데 차가 밀린 게 무슨 상관이냐…,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리라. 조금 타이밍이 늦게 고토는 태정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일찌감치 감을 잡지 못하고, 핀트 어긋난 질문을 던진 자신이 바보 같은 듯 고토는 입술을 깨문다.
“흥, 재미없는 농담이군.”
아랫사람에게 말하듯 말을 하는 고토에게 태정은 이전과 마찬가지의 정중한 말투로 상대를 대했다. 제멋대로이고 사람 깔아 보듯 하는 인간에게는 같은 격으로 나가면 안 돼…, 라고 누나는 태정에게 그녀의 처세술을 말해주었다. 끝까지 공손하게, 웃으면서 상대하면 오히려 그쪽이 불편해 한다구….
어떻게 보면 꽤나 짓궂은 말이었지만, 주변의 누구도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걸 보면 누나의 말과 행동은―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꽤나 위력적이었다. 그런 누나의 영향을 받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고토와는 공식적인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조고와 국사관의 관계, 그리고 학교를 대표하는 둘의 위치를 생각하면 고토의 태도가 상궤常軌를 이탈한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누나처럼 예의바른 정중함을 가장해 고토가 불편해하기를 태정은 내심 바랐는지도 모른다―그런 것 따위에 불편해할 녀석이 아닌 듯 했지만.
히로카즈, 지금 몇 시지?… 고토가 옆의 녀석에게 시간을 물었다. 제 팔목에도 시계가 채워져 있는데도 볼 생각을 하지 않는 걸 보고, 고토의 고급스런 시계가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태정 자신도 시간을 체크한다. 9시를 향하는 제법 늦은 저녁이었다. 측근에게 시간을 확인한 고토가 이어 상의 재킷을 벗자 시간을 답했던 그 ‘히로카즈’가 옷을 받아 말끔하게 포개 들었다.
위계질서가 엄격하다는 삼펜이 보아도 이질적인 느낌이 들 정도의 상하관계였다. 단순한 장면이지만 태정은 꽤나 강하게 그런 느낌을 받았다. 저 고토란 녀석, 태어나서 울기보다는 먼저 명령부터 했을 법하게 사람을 부리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옷에 이어 용도가 의심스러운 ‘시계’를 풀어 또 히로카즈에게 또 내미는 것이다. 태정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룰을 아직 안 정했는데…, 라며 고토는, 시합의 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고토가 말한 일대일 결투의 룰은 간단히 요약하자면―사실 요약할 것도 없이 간단했지만―허리 아래로의 공격은 금지하고, 그 외의 모든 공격은 허용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다리를 이용한 공격이 상당히 제한되기 때문에 결국 복싱에 가까운 형태의 시합이 될 것이었다. 연후에 고토는 결투의 형식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들―태정과 고토 둘―은 ‘골목 격투’ 의 모양을 따른다고 했다.
“골목 격투? 관서의 그 골목 격투를 의미하는 겁니까?”
태정은 상식을 벗어나는 결투의 형태가 언급되어 상대에게 재차 확인을 요청했다.
“맞아, 바로 그거야.”
고토는 눈을 빛냈다. 고개는 모두 다 들지 않고 눈만 치켜뜨는 것으로 태정을 직시한다. 입꼬리엔 가는 웃음을 달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랑스러워하면서, 짐짓 태정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녀석의 말을 들은 금새 주위로 흩어져 ‘뭐어? 골목 격투?’, ‘오∼ 세게 나가는데…?’, ‘오사카 애들이 하는 싸움 말야?’, ‘이거 재밌겠군’ 등등… 무리들은 서로의 귀에 대고 수군덕거리기 시작했다.
어딘가에선 휘파람소리도 들려왔다. 고토의 한마디에 시끄러워지는 국사관의 수선스러운 반응은―조고와 마찬가지로―그들도 오늘의 ‘골목 격투’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다는 소리다.
“그 형태를 굳이 빌릴 필요가 있습니까.”
“물론 있지…. 왜? 내키지 않나?”
내키지 않더라도 고토라는 녀석이 그만둘 것은 녀석도 아니었다. 태정은 더 이상 그에 대해 말을 늘이지 않기로 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원한다면 따라 주어도 좋았다. 눈앞의 녀석은 스스로의 담력이나, 숫기 따위를 과시하고 싶은 건지도 몰랐다. 태정이 주저하고 머뭇거린다면 그대로 비웃어 주려는 것처럼 기세가 등등했다. 그저 고토 녀석이 즐거움을 위해 마련한 깜짝 쇼일 뿐이다.
무대부터 놀이터라는 느낌을 받지 않았는가. 태정은 오늘만큼은 녀석이 제멋대로 놀게 내버려 두자고 생각한다. 상의를 벗고, 시계를 풀었던 것이 이해가 갔다. 모든 게 그 골목 싸움을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태정은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다만 한 가지, 배지에 대한 처리를 명확히 해 두어야했다. 모든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던가.
“배지는? 승패와 관계가 있는 겁니까 ?”
질문에 고토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태정을 조소했다.
“하하하, 이 녀석 자신이 없나 본데?”
“제의를 수락하면 반환한다고 했으니 승패에 관계없는 거 아닙니까.”
“어쨌든, 좋아 네가 져도 돌려주지…. 뭐어, 네가 날 이기리라 생각하진 않지만. 불쌍하잖아 안 그래 얘들아?”
퍽이나 너그러운 선심을 쓰듯 그렇게 약속을 한다.
그렇게 고토와의 대화가 매듭지어지고 조고와 국사관은 양쪽으로 갈라져 싸움을 준비했다.
야, 볼륨 높여!
목청을 돋운 고토의 명령에 쿵쾅거리는 음악소리가 세기를 더한다. 그리고 형형색색의 사이킥 조명이 아주 현란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미 화려하다고 생각했던 조명이었는데 누군가 스위치를 올린 모양이다. 음악과 조명이 한층 업그레이드되자, 내부의 분위기는 한층 뜨거워진다. 혈기 왕성한 십대 사내놈들의 맥박이 증가하고 혈관이 팽창하는 때는 바로 싸움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인 것이다. 마치 자신이 링 위에 올라갈 승부사인 것처럼 상의를 벗고 휘두르는 녀석이 이미 몇몇 눈에 들어왔다.
무대 세팅은 완료되어 있었다. 이런 비정규 뒷골목의 시합 무대로는 아주 훌륭한 세팅이었다. 빛과 음악 그리고 성난 관중들……. 그런 의미상의 무대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무대―원래는 춤꾼들을 위해 설치되었을 스테이지―역시 그것에 뒤지지 않았다.
한 치가 될까 말까한 낮은 높이에 나무로 짜인 그것은 중앙 홀 한쪽 벽면에 기대어 자리 잡고 있었다. 넓지는 않지만 아주 좁지도 않았는데, 복싱 경기 시합에서의 사각 캔버스처럼 아주 적절한 경기장처럼 보인다. 놀이터라는 말은 그런 의미였다. 무대 위에서도 무대 아래에서도 즐기고 싶은 만큼 즐길 수 있으리라.
무대를 반분하여 양쪽에서 각각 무리지어 이제 막 링을 오를 파이터에게 용기와 기합을 불어넣느라 모두들 정신이 없어 보였다. 고토의 진영―주먹 다툼을 앞두면 모든 것은 전투적으로 바뀌기 마련이다―에서는 떠들썩하게 응원가를 불러 제끼는가 하면 발을 쿵쿵대며 구르기도 한다. 태정의 진영도 별로 다를 것은 없었다.
회장, 꼭 이기는 거닷!!
태정아, 긴장 풀어. 심호흡하고. 긴장하면 근육이 굳는다고 치명적이야 알지?
회장만 믿는다. 괜히 삼펜 대장이 아니란 걸 보여줘.
역사적으로 보통고普通高 애들은 우리 조고 한주먹감도 아니었다구
K.O로 기냥 눕혀버려!!
천천히 셔츠의 단추를 풀러가는 태정을 보고 삼펜 녀석들이 한마디씩 던졌다. 가벼워 보이지만 결코 가볍게 치부할 것이 아니다. 하나하나의 말에는 그들의 기대가, 싸움에 거는 의미가, 간절한 당부가, 응집되어 있다. 경무를 포함해 태정과 편을 갈랐던 녀석들조차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이런 전례가 없었지만, 태정으로서 이런 현상은 절대 바람직해 보이지 않았다.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이건 그저 고토의 쇼야
그럼 왜 여기 있는 건가. 태정은 답을 구한다. 끌려 온 거지, 빌어먹을, 끌려 왔다구. 막을 수는 없었나. 막을 수 없었어.
답은 나오지 않고, 생각은 한자리를 빙빙 돈다. 아무리 해도 태정은 이곳의 공기에, 저들의 흥분에 융화될 수 없었다.
그들에게 그저 고개 끄덕이며 애매한 웃음으로 화답하면서 태정은 정면을 응시했다. 고토의 눈이 먼저 이쪽을 쏘아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녀석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천천히, 쓰윽, 핥아갔다. 직시하는 고토의 눈은, 내밀어 전시한 그의 혓바닥처럼, 붉게 보였다.
그것은 먹잇감을 눈앞에 두고 곧바로 있을 포식을 기대하는 육식동물의 모습이었다. 그를 둘러싼 동료들의 응원과 환호성은 증폭되어 있었고, 고토는 흥분하여 자신을, 타인을, 그리고 상대를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에 도취되어 있을 것이다. 녀석의 얼굴과 전신에서 그러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사카모토 에이조坂本英三의 노래와 뒤범벅이 된 소란은 귀를 멀게 만들었고, 조명은 눈을 흐리게 만든다. 눈은 고토를 보지만, 고토의 형상은 부옇게 무리에 흡수되어 뭉그러져 있다. 공기는 달구어져 있지만, 태정의 피부는 식어 있었다. 감각이 둔해져 간다. 그 속에서 오로지 태정이 느끼는 건 냄새, 그것 하나뿐이었다.
태정아, 괜찮아 ? 저 자식, 너무 신경 쓰지 마….
녀석한테 말려들지 말라고 희상이 고토와의 시선 대치를 캐치한 듯 괜찮냐고 물으면서 주의를 준다. 괜찮다고 답하지만 실상 고토는 이미 태정의 염두에 있지 않았다. 그저 코에서 맴도는 역한 내음의 실체를 타인에게서 확인 받고 싶을 뿐이었다.
희상아, 냄새 안나니?
희상에게 냄새를 물었다. 희상은 킁킁거리며 코로 공기를 채취하고는 뭐가 이상한 건가? 라는 표정으로 확인해 본다. 하지만 희상의 표정이 거기에서 바뀌지는 않는다. 뭐가 이상한 거지? 여전히 의문을 지닌, 아무것도 발견해내지 못하고, 어떤 이상도 느끼지 못한 표정이다. 무슨 냄새?…별다른 냄새는 안 나는데… 희상의 대답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해졌다.
자신에게서 현실은 사라져 갔고, 남은 것은 환각뿐. 그렇지만, 환각이라 해도 헛것은 아니다. 이건 태정에게 분명히 존재하는 냄새였다. 부인할 수 없이 여기에, 지금, 있다.
그렇기에 그것만이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 그 비릿한 향은 태정을 각.성.시키기에 충분했다.
나는…….
* * *
대결의 기본은 복싱이라지만. 그건 말 그대로 어디까지나 기본이었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이종 격투기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룰이 복잡할 필요는 없었다. 허리 아래의 공격만이 유일하게 금해졌고, 그런 기준이 룰이라면 룰이라 칭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그들의 격투는 속칭 ’골목 격투’라고 불리우는 것이었다.
희상은 그저 입에서 입으로 떠다니던 ‘골목 격투’를 실제로 관전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명칭에서 좁고 기다란 어떤 한정되고 협소한 장소가 먼저 떠오르는 이 주먹 싸움은 실제로 장소와는 관련이 없었다. 아니, 관련이 있긴 했다. 어린애들 장난 같은 그 명칭이 어떻게 유래되었는가에 그 연결 고리가 있었는데, 유아적이고 어릴 적의 향수를 살짝 일으키기까지 하는 이름의 분위기와는 사실 아주 동떨어진 연결 고리였다. 그것은 야쿠자와 관계가 있었다.
이른 바 ‘골목 격투’라는 것은 대립하던 두 조組의 돌발적인 충돌에서, 쌍방의 조직원들의 부상과 손실이 커질 것을 우려한 양자 간의 즉각적인 합의를 통해 이뤄지는 싸움의 형태였다. 그것은 아주 좁은 골목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이 붙여졌다고들 했는데, 왜 하필 비좁은 골목에서 이뤄졌는지는 정확히 아는 이가 없었다. 경찰의 출동에 대비해 집산集散이 용이하다는 이유를 대는가 하면 그들이 구분 지은 구역의 경계를 싸움터로 삼기 때문에 그렇다고도 했고, 아니다 시초가 골목에서였기 때문인데 생각 없는 야쿠자들이라 그냥 그렇게 굳혀진 것이다, 등등등…, 이런 저런 이유가 있는 듯 했지만 대개 근거가 미약했고 어떤 것도 신빙성을 갖고 있지는 못했다.
희상은 주워들은 것을 더듬어 그 형태를 상상해보았다. 골목 가장 바깥쪽으로는 두 조직의 조직원들이 각각 양쪽 통로를 하나씩 맡아 지켜 서서 밝은 대낮, 없지 않을 행인의 왕래와 시선을 차단시킨다.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오면 양분된 무리들이 그들의 명예를 책임질 파이터―대부분은 현장의 최고 우두머리―둘에게 제공된 결투 공간 바깥에서 그들의 전사를 시끄럽게 응원한다. 골목의 가장 정중앙이 신성한, 순수한 의미의 결투 장소이다. 그 곳에서 상대의 허점을 노리며 두 주먹을 뻗을 기회를 보는 둘은 모두 맨몸이다.
그렇다. ‘골목 격투’는 그 이름에서 장소를 내걸며 주의를 끄는 듯하지만 정작 ’골목 격투’를 논할 때 장소에 주목하는 녀석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속된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골목 그 깊숙한 속에서 일어나는 결투의 형태였다.
골목 싸움의 선수들이 맨몸이라는 말에는 어떤 비유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무기가 없다는, 맨주먹이라는 뜻을 포함하는 것은 물론이고 맨몸의 의미는 ‘적나라赤裸裸’라는 말인 것이다. 그들은 모든 옷을 벗어 던짐으로써 상호간에 신체 어디에도 은닉해둔 무기가 없음을 증명했다. 거기엔 무기의 은닉을 방지하는 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자신이 소속된―한편으론 이끄는―조직의 조원들에게, 또 상대에게 공개적으로 알몸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어지간한 담력과 그들의 당당함을 드러내었던 방식이었다. 진정, 집단의 우두머리이자 사나이라면 그런 옷의 착탈 같은 사소한 변화로 평정을 잃지 않을 것이었다.
‘골목 격투’는 관서關西지방의 것이라는 게 정설이었고, 그래서 관동關東 사람들은 그쪽 지방 사람들이니 그런 무식한 짓거리를 벌건 대낮에 벌일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대부분은 격투에 대해 경멸적인 어조로 내뱉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목 격투’라는 싸움 형식은 꽤 옛날부터 이 관동에서도 행해져 왔던 것이다. 어떻게 언제 이곳 도쿄까지 흘러 들어오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의론이 분분했지만.
어쨌든 그것도 과거의 일이다. 현재 도쿄에서 그런 결투는 공룡의 화석처럼 아주 옛날의, 그리고 닌자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하지만, 오사카 쪽 조고 녀석들의 말에 의하면 그쪽에서는 지금도 아주 가끔씩 볼 수 있다고 했다. 목격담이 간간이 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구시대의 모범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는 야쿠자의 행태를 사내다운 멋진 힘의 대결로 인식,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일부 고교생들이 모방 심리로 종종 흉내 내고 있기까지 하다는 말을, 듣기는 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그쪽 세계의 그들만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 골목 격투를, 눈으로 직접 보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희상이였다.
고토는 아주 느긋하고 여유 있게 옷을 벗고 있었다. 입가에는 사뭇 즐겁다는 웃음을 방긋 띠면서, 연신 붉은 혀를 날름대며 마르지도 않은 입술을 축이고 있다. 무대 조명의 빛을 반사하여 화려한 보랏빛의 라운드 네크 니트의 색이 더욱 그 빛을 뽐내고 있었다. 녀석의 움직임에 따라 옷이 반짝 거렸는데―녀석 옷에 금이라도 섞인 게 아닌지 희상은 의심스러웠다―그것은 격투 직전의 번쩍번쩍한 금빛의 가운을 입고 등장하는 파이터를 연상시켰다. 고토 녀석, 무대 의상에까지 신경을 쓴 건가.
상의를 훌훌 벗어 던지자, 단지 그것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던 모양으로 녀석의 상반신이 바로 드러났다. 성장기를 갓 넘기고 성인 남성의 모양을 갖추어가는 가슴 근육이 운동으로인지 바싹 당겨져 있었다. 복부 역시 마찬가지로 죄어져 있어, 녀석이 몸을 꽤나 가다듬고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제법이네. 물렁해 보이진 않잖아. 성질만 드러운 줄 알았는데….”
옆에 있던 경무가 툭하니 내 뱉었다.
“그래도 아직 멀었어. 저건 좀 더 몸을 불려야 해. 보긴 뭐 그럴싸하지만, 파워가 좀 딸려 보인다구.”
경무는 고토의 몸이 썩 괜찮다고 인정했던 말에 스스로 트집을 잡아, 덧말을 길게 이었다. 운동하는 녀석이라 그런지 경무는 타인의 근육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고 그에 대해 품평하길 좋아했다. 꽤 단단해 보이는 고토의 몸을 인정하다가도, 희상은 경무의 말에 무엇이 모자란 건가 하고 다시 고토를 살펴보니 그런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라해도 경무는 운동, 힘, 근육에 대해서만큼은 희상보다 이해가 깊으니까 말이다.
스니커즈를 벗고 난 고토 녀석은 발을 내밀어 앞에 펼쳐진 스테이지를 디딘다. 그리고 그 위에서 녀석은 바지 벨트의 버클을 풀었다.
옷을 벗으면서 녀석은 계속 이쪽을―정확히는 태정을―주시하고 있었다.
자신감 넘치는 스마일이 전혀 요동되는 기미도 없이 옷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면서도 동태를 날카롭게 살피는 것이다. 아니, 동태를 살핀다기보다는 미리 저 거슬리는 웃음으로 심리적인 교란을 시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태정에게 주의를 주려 고개를 돌려보니 녀석은 주위에 소란에 전혀 반응이 없다. 고토가 바지를 내리자 갤러리의 환성과 환호가 갑절이나 높아졌는데도 말이다.
무대를 가로질러―예의 고토가 있는―정면을 향하는 시선에 고토를 의식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눈이 뭔가를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괜찮으냐고 묻지만 녀석이 하는 말은 엉뚱하게 냄새에 관한 것이다. 적당히 그 말에 응해주긴 했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을 남겨두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미심쩍음은 이내 지워지고 그 뜬금없는 질문이 괜히 불만스럽다. 태정이 이 자식, 원래 이런 녀석이긴 했지만, 긴장이 없어도 너무 없는 것 아닌가. 자신은 심장이 두근거리는데 당사자인 태정은 전혀 그런 기미가 없다. 또 저 무감각한 표정은 자칫 긴장에 굳은 것으로 보이겠지만, 희상은 긴장도 무엇도 어떤 것도 아니라고 느껴졌다. 거기선 아무것도 읽을 수 없었다.
태정은 고토의 페이스와 약간의 간극을 두고 탈의를 진행시켰다. 두 녀석이 옷을 벗을 때의 스타일은 매우 달랐다. 고토는 이제 바지를 벗고 삼각의 진한 감색 브리프만이 남은 몸을 그들 무리를 향해 과시하듯 드러냈다. 엉덩이를 매끄럽게 감싼 브리프는 신축성 좋게 몸에 착 감기며 달라붙어 있었다. 광택까지 지니고 있어서인지, 그건 마치 수영 팬츠처럼 남의 눈앞에서 전시되기 위해 선택된 느낌이었다.
태정의 바지도 마찬가지로 시간차를 두고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여전히 이곳의 누구와도, 무엇과도 피드백은 없다. 하지만 방금처럼 뭣엔가 사로잡힌 듯한 모습은 없어졌다. 태정은 이제 단호한 의지를 보이면서 조용히 옷을 벗는다. 고토가 떠들썩하고 요란하게 허리까지 돌리며 관중의 엄청난 호응을 받으며 쇼를 하는 것에 비하면, 태정은 탈의를 위한 최소한의 동작만을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둘에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양쪽 모두 어색함이나 주저가 없다는 것이었다.
양말을 벗은 태정은 이제 몸에 남아 있는 사각의 흰색 브리프―고토의 그것과 비교하면 제 기능에 충실할 뿐인―만을 남겨 두었다. 시간을 끌지도 않고 그렇다고 조급하지도 않게, 지금까지의 충실한 리듬으로 브리프를 근육이 힘차게 갈라진 허벅지로, 다리 아래로 내려 한쪽 발목을 꺼낸다.
태정이 전라가 될 때까지도 경무 녀석은 고토의 근육을 평가했을 때만큼은 섣불리 입을 떼지 않았다. 태정의 등과 어깨가 더 넓게 보이고 팔과 다리가 옷을 걸쳤을 때의 느낌과는 사뭇 다른 것이, 단지 희상이 태정을 눈 앞 바로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옷의 착탈은 녀석을 매우 다르게 보이게 했다. 태정의 벗은 뒷모습이 옷을 입었을 때보다 크고, 두텁고, 또 이전에 느껴 보지 못한 긴장을 느끼게 했다.
“태정이 저 녀석 뭔가 하고 있는 거 아냐? 이상한데….”
팔짱을 끼고 무대 위의 녀석을 지켜보다가 경무가 중얼거린 것은, 근육에 대한 평이 아닌 의문이었다. 희상은 무슨 의미냐는, 설명을 요하는 눈으로 경무를 보지만 무대 주위의 소란에 들릴 듯 말 듯한 혼잣말을 할 뿐이었다. 목청을 높여 말이 안 들린다고 하자, 경무는 고개를 돌려 똑같이 희상에게 목소리를 돋운다.
설마 저 고토 녀석한테 지지는 않겠지? 라고….
희상은 경무의 ‘설마’에 담겨 있는 의미가 태정에 대한 기대인 건지 아니면 확신인 건지를 생각하며 ‘저 고토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팔을 벌려 제자리를 돌면서 분위기를 고취, 동료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다가 멈춰 서고는 엉덩이를 보이면서 속옷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러곤 보란 듯이 엉덩이를 가볍게 좌우로 흔들고 있다―바로 희상 일행, 조고를 향해 말이다!!
대단한 쇼맨십이군. 오히려 희상은 고토에게 감탄의 말까지 보내고 있었다. 털을 세운 동물처럼 머리털은 비쭉비쭉 위로, 옆으로, 사방으로 세우고, 엉덩이를 흔든다. 저런 원숭이 같은 볼썽사나운 짓을 해도, 그리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은 것이다. 무대를 둘러싼 관객들은 즐거워하고, 녀석은 그들의 시선을 매우 즐기고 좋아하고 있었다.
“저 자식, 저걸.”
경무가 녀석의 모욕적인 행위에 이를 갈지만 저런 건 인간이 영장류 동물의 흉내를 내는 것일 뿐이었다.
“경무야, 화내지 마. 원래 저런 건 암컷 원숭이가 성난 수컷을 달래기 위한 동작이라구.”
희상은 고토가 보이는 쇼의 기원을 경무에게 설명해주며 그를 달랜다. 동물의 성적 표현이 왜 상대를 모욕하는 것으로 의미 전환이 되었는가, 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희상의 설명에 경무는 크하하하 재밌어라 웃어대었다.
“크흐흐…, 뭐야, 그러니까 저 자식이 지금 우리한테 구애하고 있다는 거지? 우하하.”
경무의 기분 전환은 상당히 쉬웠고 신속했다.
태정과 고토, 둘은 말하자면, 스트립을 한 것이지만, 희상에게 그건 일종의 의식을 앞둔 퍼포먼스이자 제의로 보였다. 둘은 사뭇 다른 의식을 보여주었지만, 거기에는 모두 성性이 추방되어 있었다. 그것이 쇼다울 수 있었던 건 둘의 당당함 때문이었다. 어색함은 티끌만큼도 허용되지 않았다. 어떤 녀석도 감히 그들을 희화하려는 엄두는 내지 않았다.
희상은, 골목 싸움에 대해 들었을 때, ‘수치’의 역학이 기저에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맨몸으로 싸우게 되면 아무래도 신체 노출에 신경이 쓰이게 되고, 일말의 수치심이 작용하게 된다면 그것은 곧바로 승패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둘에게는 그 기제가 작용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벗었지만 벌거숭이가 아니었다.
나체는 마치 자연스러운 그들의 의복 같았다. 녀석들이 멋지게 드러낸 몸의 단단한 근육과, 배꼽 밑의 선으로 시작해 다리사이까지 이어진, 거무스름하게 자라난 거웃과, 움직임에 털럭이는 돌출된 성기까지도.
알몸이 된 고토와 태정은, 그들만의, 둘을 위한 스테이지에 서서 서로를 응시했다. 지금, 저들은 자웅을 가릴 투사였고, 그들의 몸은 천혜天惠의, 딱 들어맞는 규격의, 바느질 따위 같은 가공의 흔적 없는, 전투복인 것이다. 회전하는 사이킥 조명이 현란하게 그들의 몸을 비추어 화려한 무늬의 유니폼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둘이 무대에서 대립을 하며 서로를 탐색을 시작하자, 끼요오오 하는 환호성과 동물의 울음과도 같은 괴성, 분위기를 북돋기 위한 응원 박수와, 삐익하는 커다란 휘파람 소리 온갖 소리가 클럽 안을 강도 세게 울려대었다.
골목 싸움은 바야흐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눈앞에서 앞으로 벌어질 이 ’골목 결투’에 희상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주먹과 힘, 폭력과 테러를 목청을 높여 반대하며 세계의 평화와 화합을 구현하기 위해 정말 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진지하게 고뇌하는 희상이었지만, 앞으로 일어날 고토와 태정의 대전에 절로 가슴이 뛰고, 긴장으로 손에 땀이 베이는 것을 스스로 제어 할 수 없다. 이제 곧 시작될 원시적 힘의 대결이 더욱 빨리 시작되길 바라며 기분이 거센 파도처럼 고조된다.
머리와 가슴이 일치하기에 희상은 아직 어린 나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