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28)

Till the Fat Lady Sings #2

전화번호를 알았다고 해서 무턱대고 전화해서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상대의 케이타이는 계속 꺼져 있는 상태였다. 태정과 같은 학생이고 수업중일 것이라는 단순한 사실을 왜 간과했는지 여러 번의 통화 실패 끝에야 깨닫는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재빨리 그쪽의 번호를 알아낸 희상의 노력의 의미가 퇴색한 것이 태정은, 자신의 잘못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결국 국사관의 생도회장과 가까스로 연락이 닿은 것은 조고의 모든 수업이 끝나고 나서였다.

신호가 가고 상대가 전화를 받자, 태정은 그쪽이 국사관고의 회장임을 확인하고 자신은 조선 고급학교의 학생회장 조태정’이라고 신분과 이름을 밝히고 인사를 건넸다. 분명 ‘조선 고급학교’라고 밝혔는데도 불구하고 다 알고 있다는 투로 『아∼아, 조총련 고교?』 라고 반문 아닌 반문을 하면서, 상대도 인사에 대한 응대를 했다.

국사관의 회장은 태정의 전화를 받고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런데, 조고의 회장께서 갑자기 무슨 일로 전화를 하셨는지?』

시치미를 떼는 건지, 아니면 정말은 어제의 사건이 국사관의 생도회와 무관했던 것으로 태정을 포함한 삼펜이 과잉반응을 하고 있는지 혼란스러워진다.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정중하고 사려를 ‘배운’ 사람의 것이었다. 그저 질문의 뒤끝을 올린 것뿐이었는데 비아냥의 뉘앙스로 느낄 필요는 없다 (조총련 고교? 라는 반문에는 그런 기운이 진하게 배여 있었지만) 질문에 대한 대답은 미리 준비 돼 있었다. 태정은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어제 귀 학교 학생에 의한 조고생 린치 사건을 알고 있습니까?”

『흐음,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만…, 본 국사관의 학생은 그런 일을 할 이유도 없고, 하지도 않습니다. 조고 생도회장이라고 이렇게 무례해도 됩니까?』

어떠한 대화의 여지도 주지 않는 말이었다. 예상은 했어도 이런 반응이라니…. 국사관과 조고생이 얽힌 폭력 사건은 쉬쉬해서 그렇지, 양쪽의 학생 모두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국사관 생도회가 이번 배지 사건을 부인할 수는 있다 손 쳐도,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 알고 있다는 두 학교의 주먹에 얽힌 과거를 전면 부인하는 것은 태정으로서도 전혀 예측 할 수 없었던 반응이었다. 상대의 목소리는 여전히 처음처럼 일정하고 부드러운 톤의 세련된 말투로 응대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태정의 둔한 신경을 건드렸다. 그 매끈한 목소리는 잔뜩 오만했다. 무례하다는 말을 던진 태도보다도 더욱 그러했다.

“어떤 점이 무례하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명백히 두 학교 학생사이의 폭력 사건이 일어났고, 그건 일방적이었습니다. 피해자는 물론 우리 조고생이었고… 그에 대해 조고 학생을 대표하는 제가 전화한 것이 그렇게 무례한 겁니까?”

『증거는 있습니까?』

‘무례 시비’는 뛰어 넘어버리고 상대는 지극히 원론적인 문제를 들고 나온다. 증거는 없었다. 하지만 태정은 원론에 대응하는 방법은 변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떠한 거짓말도 해선 안 된다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는 것을 태정은 작은 삼촌에게 배웠다.

“물론 있습니다.”

『있다구요? 증거가?』

변칙이란 것은 일시적으로 효과를 발휘한다. 태정도 지속적인 효과는 물론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상대방과 협상의 실마리만 제공하면 되었다. 저편의 목소리엔 미심쩍은 기색이 역력하지만, 귀를 곤두세우며 태정의 뒷말을 기다리는 것은 그 증거라는 말이 효과를 발휘했다는 것일 터. 그게 무엇인지는 물론 태정은 언급하지 않는다. 없는 것을 존재케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것 때문인데 시간 좀 내주시죠. 다시는 이런 폭력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해서 말입니다.』

“설혹 사건이 일어났다고 칩시다. 학생들 간의 개인적 문제로 시비가 붙었을 상황은 배제하는 겁니까? 이렇게 성급하게 전화를 해서 대뜸 만나자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는군요. 원래 일처리 방식이 이렇습니까?”

오만한데다 냉정하고 사리판단도 확실한 인간이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이쪽을 무시하고 있었다. 무례하다고 한 것도 모자라 일 처리 방식을 운운하고 게다가 질문을 어기는, 노골적인 빈정거림을 있는 한껏 퍼붓기라고 하고 싶어하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를 도발해보고자 하는 것이 태정의 눈에 뻔히 보여 오히려 느긋해 진다. 전화를 타고 들려오는 톤 다운된 목소리는 한 번 정돈시켜 내보내는 목소리다―여유를 갖고, 개인적 시비라는, 이런 저런 있을 법한 일을 들먹이고, 호흡을 느긋하게 하면서도 상대를 다그친다. 녀석은 자신이 상대 위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태정은 상대를 본받아, 일처리 방식에 대한 시비라든가 녀석의 그럭저럭 논리적인 지적은 싹 다 무시한다.

“그럼 몇 시가 좋겠습니까.”

하핫……, 이거 뭐야…. 꽤 어이없었는지 상대의 반응은 그대로 전화를 타고 태정에게 전달되었다.

『지금 농담하는 겁니까?』

웬일인지 태정의 진지한 태도는 곧잘 농담으로 비춰질 때가 많았다. 태정은 농담에 별 소질이 없었고, 더더구나 학원 폭력사건으로 처음 통화하게 된 상대학교의 회장에게 농담할 성격은 더더구나 아니다.

“어차피 오늘 보게 될 테니 그냥 시간 정하죠.”

『뭐라구?』

빙고, 상대가 흥분했다. 지금까지 침착한 척하는 목소리와 태도가 너무 회장이라는 냄새를 내고 있었다. 그래봤자 이 나라에 수없이 많이 깔린 고등학교 중 한곳의 잡일 뒤치다꺼리나 하는 조직의 우두머리일 뿐이다. 그리고 일개 고등학생일 뿐. 녀석이 흥분하기 전까진 지금까지 꼭 국가 정상들이 ‘핫라인’ 통화라도 하는 것 같았다.

“시간은 늦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 쪽에서 어디라도 찾아갈 테니…. 아무튼, 오늘 자정은 넘겨선 안 됩니다.”

『이봐, 무슨 협박도 아니고… 그런다고 그쪽 요구대로 응할 것 같아?』

국사관의 회장은 예의를 들먹였던 몇 분전을 잊어버린 듯, 경어를 완전히 내던지고 성질을 드러내었다.

“시간은 그러니까….”

태정은 귀에서 폰을 떼어 액정에 표시된 시간을 들여다보았다.

“5시, 장소는 세타가야世田谷전철역. 괜찮겠죠? 국사관고와 가까우니 적당할 것 같습니다만….”

어떤 결심을 한 듯, 상대는 길게 한숨을 쉬더니 어떤 생각에선지―태정은 그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갔지만―좋다고 한다.

『좋아, 그럼 시간은 6시, 그리고 국사관고 앞.』

“좋습니다.”

태정의 마지막 대답을 들었는지가 의심스럽게, 뚝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상관없다. 태정은 원하던 대로 약속을 받아내었다. 시간과 장소는 사실 아무렇게나 들먹인 것으로, 상대가 멋대로 바꾸리라는 것은 예상했던 바였다. 태정의 끈질김과 억지로 심기가 언짢을 상대방에게 아무래도 좋을 때와 장소의 결정권을 넘겨준 것으로 체면을 세워주고 실리를 챙긴다. 6시, 국사관고, 이건 너무 생각 대로여서 비죽이 웃음이 새나왔다. 하지만, 이 이내 전화의 목적을 상기하고 마음이 가라앉는다. 전화로 얻은 것은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비록 태정이 그쪽에 배지 반환을 요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자고는 했지만, 그대로 순조로이 마무리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그럼에도 태정이 쓸모없는 절차에 시간과 노력의 낭비를 쳐들이고, 경무의 욕을 들어먹고, 희상의 불신에 찬 눈길을 자청하며 헛 짓거리를 하는 것은 자신의 코에서 떨어지지 않는 냄새 때문이었다. 그 비린 냄새를 어떻게든 떨쳐버리고자 하는 발버둥이었던 것이다.

사실 희상에게 피냄새를 들먹이며 위험하다 위험하다 고개로 사래를 쳤던 것이며 이번 배지 사건에서 신중하고 신중한 결정을 내린―그래서 자칫 겁 많은 녀석처럼 비춰지는―것으로 미루어 봤을 때 대개 주위에선 그런 태정을 조심스럽고, 큰일에 대범하지 못하고 위험이 닥쳤을 때 미리 한발 물러서는 성격이라 판단하는 듯 했다. 뭐라 하든, 태정은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귀에 들려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듣게 되기 마련이다.

경무까지도, 주위에서 좆회장이라 불리지 않으려면 제대로 하라는 충고―태정은 그것을 충고라고 생각한다―를 하지만 좆회장이든 씹회장이든, 너털웃음 한 번 짓고 그냥 내버려 둔다. 누군가가 ‘넌 이러저러해’라는 분석적 비평, ‘넌 이런 타입이지?’라는 단정형 의문 등등 온갖 유형으로 들려오는 그에 대한 말을 그저 소음으로, 음성 형태의 하나로 취급했다. 태정은 주위의 평가와 평판에 귀를 세우지 않았다. 주변에서 어떤 소릴 하는지 관심이 많다는 것, 그것은 역설적으로 한 인간의 관심이 내부―자기 자신에게―로 쏠려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태정에게 아주 느끼하고 메스꺼운 느낌을 주었다.

그런 느끼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먼저, 자신에 대해 정확한 파악 필요하다. 그렇지 못할 때의 인간이 외부의 말들에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긴장해서 바짝 털을 세운 고양이처럼 위험을 잘 감지하고 대비하는 듯 했지만, 정작 태정은 위험에 대해서 경계가 매우 느슨하다―태정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보통 무엇이 위험한 상황인지 잘 파악할 수 없었다. 판단력이 둔한 것인가? 때때로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자문해 볼 때도 있지만, 아주 드물게 묻는 질문이었다. 판단력이 둔하기 때문에 뭔가 잘못 될 거라는 불안함에 질문을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느 정도 위험에 대한 판단이 서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질문은 섬광같이 지나갔다. 이빨이 좀 아플 때, 치과에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라져 가는 속도와 마찬가지로.

하지만, 스스로 증세가 심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버스나 자동차가 다니는 대로에서 오가는 차들이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지는 않으므로. 설마 그런 바보일까. 또한 주먹이나 총은 피해야 안전하다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틀렸다. 그걸 위험 불감증이라고 했다. 그는 ‘엄습하는 두려움’이라거나, ‘정체 모를 불안감’ 같은 것이 뭔지 느껴보고, 실감하고, 싶었다. 옛날엔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말이다.

어떤 사람이 위험을 느낄 수 없게 되면, 그것을 실감하기 위해 어떤 짓을 해서라도 위험이라는 것을 겪어 보려 하는데, 그렇게 해서 위험에 직면하게 되면 여전히 그는 위험 불감이기 때문에 자신을, 그리고 상황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치명적인 사태를 초래한다고, 했다.

그런 사태는 물론 피해야겠지만, 자신이 피할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알 수 없는 태정이었다. 그나마 위험을 깨달을 수 있는 건 스쳐 지나가는 피 냄새 때문이었다. 피 냄새라…. 하핫… 현실에서 동떨어져 70년대 도에이의 무슨 야쿠자 영화에서 사쿠라 회 조직 보스가 코를 킁킁거리며 ‘피 냄새가 나는걸’ 하는, 뭐 이런 장면이 떠올라 태정은 실소를 했다. 하지만, 그 비린 냄새를 달리 표현할 수 없었다. 갑작스레 코에 달라붙는 냄새를 뭐라고 설명할까…. 그만두자. 그냥 자신의 코가 잘못된 것이고, 그것은 그저 환향幻香이다. 착각이고, 위험을 정면 돌파할 용기가 없어 그것을 핑계로 빠져나갈 구실을 찾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지할 것은 그것뿐으로, 태정은 위험을 모르기에 형편 모르고 날뛰는 무모한 인간이 되기보다는 위험―태정에게 미지의 X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을 피할 수 있다면, 조심하고 신중한 인간이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태정의 삼촌은 무모하다는 것에 대해, ‘계산할 줄 모르는 둔한 머리를 갖고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삶에 미련이 없을 때 보이는 특징’이라고 말했었다.

위험이란 것과 맞닥뜨리게 되면 자신이 무모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얼핏 지나갔지만, 자신의 머리는 ‘계산’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고 있고, ‘죽음’을 심각하게 여기거나 고려해본 적은 없으니 삶에 미련이 없지는 않은 것이라 판단하고 태정은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물론 ‘위험’이 주는 위협에 대한 안심이 아닌, 경멸스런 느낌의 ‘무모’가 주는 위협에 대한 안도였다.

이런…, 시간을 확인한 태정은 혀를 찼다. 슬슬 삼펜 회의실로 가봐야 했다. 희상과 경무가 초조해하면서 태정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약속시간이 6시라 아직 시간이 꽤 남았으니 여유는 있었다. 국사관고 회장과의 통화 내용을 이야기 해주면 녀석들 뭐라고 할지…. 참, 그 자식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그쪽에서 분명히 이름을 밝히긴 했는데…. 그리고 분명히 들었고 말이다. 고토…, 고토라고 했나? 그렇다. 고토 마사키였지. 까먹어버린 줄 알았던 이름이 귀를 울리며 자연스레 떠올랐다. 첫 통화가 인상적이었으니 이름도 태정의 귀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뭐, 그럭저럭 재미있는 녀석이었다. 그 좋은 목소리만큼은 성질이 따라주지 않는 것 같긴 해도 말이다. 녀석과의 첫 통화 후 받은 태정의 인상은 그러했다.

* * *

국사관고와 조고는 도보로 약 30분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 30분은 두 학교 분위기를 상이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세타가야世田谷 역驛에서 오른쪽으로 난 제법 큰 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한적한 주택가가 나오는데 나무와 시멘트, 벽돌로 만들어진 단순히 ‘살기 위한’ 집이 아니라, 외관과 정원 담벽까지 설계부터 까다롭게 고려해 지어진 ‘보기 위해, 그리고 보여지기 위해’ 지어졌다는 느낌을 풍기는 고풍스런 저택이 이어지는 고급 주택가였다. 그 주택가를 벗어나면 탁 트인 언덕길이 나오고 가지와 잎이 풍성해 녹음이 짙은 가로수가 시원스레 늘어선 언덕길 위로 국사관이 자리했다. 한마디로 학교라는 단위의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그보다 좋을 수 없을 입지 조건에 국사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 진짜 못 봐주겠네…. 조 회장 그 바지에 얼룩은 뭐냐? 안 그래도, 녀석들 홈그라운드로 가는 건데 그 녀석들한테 얕보여서는 안 되지 않겠냐고오.

경무의 트집은 국사관고를 향하는 길에도 계속되었다. 생트집이려니 생각하며 희상이 태정을 돌아보자, 확실히 태정의 회색 교복 바지에는 커피자국인 듯도 하고 된장국이 튄 것 같기도 한 부정형의 무늬가 보인다. 그것은 바지의 색깔 때문인지 더 짙은 색으로 착색되어 태정의 허벅지께에 널따랗게 얼룩을 만들어 눈에 꽤 쉽게 잡혔다.

“엇, 그러네. …이걸 어쩌지. 이거 얼룩이 상당히 큰데…?”

태정은 얼룩이 묻은 바짓가랑이를 두 손으로 부여잡으면서 곤란하다는 듯 반응한다. 사실 희상은 태정이 자신의 바지에 얼룩이 있든 없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태정은 그저 경무에게 장단을 맞춰주는 것이다. 녀석, 덜렁거리는 성격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옷에 자주 저런 얼룩을 만들면서 다녔는데 그런 얼룩이 또 바로바로 제거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희상은 그저 태정이 녀석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꽤 되었고(햇수로 몇 손가락을 꼽을 것이다 몇 손가락인지는 잘 모른다), 그나마 태정을 돌봐주던 2살 터울의 누나가 최근 집을 나가 살기로 했다는 것을 알기에 사정이 그런가 보다고 나름대로 추측할 뿐이었다. 녀석의 누나는 대단한 미인으로 그 사실을 알았을 때 희상은 친구의 누나가 집을 나갔다는 사실에 애석해하는 것보다는―물론 그런 것도 있었지만―더 이상 그 누나를 보지 못하는 게 훨씬 안타까움으로 남았었다―그런 면에서 내심 태정에게 미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아무튼, 태정이 자식, 사정이 그런데도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경무에게 넉살좋게 저러고 있는 것이다.

“미리 말해줬으면 딴 녀석 걸로 바꿔서라도 입고 왔지. 지금 뭘 어떻게 하겠냐? 그냥 눈감아줘라, 경무야.”

“말 나온 김에 말인데, 회장이면 좀 회장답게 하고 다닐 수 없냐? 타이가 제대로 목에 붙어 있는 꼴을 못 봤다구. 셔츠 단추도 그 꼴 좀 네가 직접 봐봐 그래 거기, 중간에 하나 덜렁거리잖아. 네 머리도 그래 학교 두발 기준을 위반해도 한참 위반하고 있는 거 알고는 있어? 지저분해 보이잖아. 전혀 조고 회장처럼 안 보인다구. 아아 진짜 환장한다.”

미운 며느리 발뒤꿈치까지 미워한다는 시어머니처럼 경무가 태정의 차림새를 가지고 꼬치꼬치 따지고 든다. 태정의 사정을 경무보다는 조금 더 알고 있는 희상인지라, 경무가 그만했으면 하지만, 경무가 아주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녀석의 말을 따라 태정을 한 번 살펴본다.

경무 놈, 언제 그렇게 조목조목 눈여겨봤는지. 하긴 그렇다. 다른 건 몰라도 저 머리는 좀 잘라야 한다. 머리 때문에 녀석의 의중을 더 짐작할 수도 없는지도 몰랐다. 앞머리가 이마를 덥수룩이 점하고 있고, 눈까지 찌를 태세인데도 자르지 않고 잘만 내버려둔다. 뒷머리 또한 윗머리와 마찬가지로 멋대로 자라 교복 칼라를 스치는 상태를 넘어 덮고 있는 지경이었다. 저놈의 머리형이 사람을 칙칙하고 어둡게 보이도록 했다. 하지만, 가만 보면 그것이 태정 특유의 느릿함(느긋함이나 나른함 어떤 말로 대체해도 틀리진 않다)에 더해져 의외의 효과를 발휘하는지도….

그저 까맣고, 게다가 부스스해서 희상이 보기엔 촌스러울 뿐인 머리 스타일인데도 여학우 몇몇은 그것에 대해 뭔가 다르다고 했다. 태정도, ‘누나가 있을 땐 누나가 잘라줬는데 지금은 누나가 없잖냐. 그래서 그냥 내버려뒀다’라고 말한 머리 형태로, 즉 돈을 아끼는 차원에서 자연스레 그렇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의 누나가 머리를 잘라 준다는 말에, 희상은, ‘태정이 자식, 누나 복 하난 타고난 녀석’이라고, 부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희상은 또 한 번 인상 깊은 미모의 태정의 누나를 떠올렸다. 2년 전 태정의 누나가 졸업했을 때―그녀 역시 조고 출신이었다―그들의 마돈나가 떠난다며 비통에 잠겼던 녀석들이 적지 않을 정도로 유명했는데, 그건 그녀의 아름다운 외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무랄 데 없는, 누구에게나 춘풍春風인 성격에, 재색겸비, 팔방미인이란 말이 그녀를 위한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학업이라면 학업, 운동이라면 운동 모든 것에 군계일학의 면모를 보였던 것이다. 졸업당시 그녀가 선생들의 기대를 저버리고―학교에선 조선 대학교를 은근히 권했지만―어떤 대학에도 진학하지 않았던 사실까지 신비스럽게 비춰질 정도였다.

그에 반해 태정은, 고교에 들어와 그녀와 남매인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주목의 대상이 아니었다. 복싱부나 축구부 등 눈에 띄는 부활동은 젖혀 두고서라도, 그 어떤 부활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데다, 교내에서의 생활은 언제나 조용하고 과묵했던 듯하다. 희상도 삼펜에 합류한 이후에서야 태정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

삼펜다운 구석이라고는 하나 없어 보이는 태정이 녀석이 삼펜이 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이유라는 것이 그의 누나 덕이라는―그 영향이 지대했다는 둥, 그녀가 졸업 전 삼펜 위원에 청탁을 했다는 둥―뒷말이 있었는데, 그 뒷말은 공공연히 조고생 사이에서 회자되었고, 태정은 그걸 부인하지도 긍정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현 삼펜이 유독 많은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지도…. 경무부터가 태정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태정과 녀석의 누나, 결국 두 남매는 대조적이면서도 닮은꼴이었다. 우선 남매를 두고 둘이 닮았다. 아니 뭐가, 하나도 안 닮았다… 라고 평이 양극으로 엇갈리는 매우 기묘함을 보이는 용모부터가 그랬고―언뜻 누나와 상당히 다른 타입의 이목구비를 가진 태정이지만, 또, 나란히 두고 찬찬히 뜯어보면 남매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그런 외모뿐만이 아니라,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성격이나 유명세가 그랬다. 누가 뭐래도 태정은 조고의 회장으로, 세러브리티―그들 사이에선 유명인인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여전히 그의 위치를 뚜렷하게, 어떤 심각한 인식을 가지고 수행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다음부터 신경 쓸 테니까 오늘은 그냥 넘어가자고.”

그리고 희상에게 저 다음부터란 말은, 녀석이 실상 앞으로도 타인의 말과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릴 것이라는 것으로 재해석되었다.

“뭐 다음? 오늘 국사관이랑 만나는데 다음에 신경 쓰면 뭐하냐구. 젠장 젠장….”

남들이 보는 눈을 의식하는 건 오히려 경무였다.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와 동시에 자신에게 초연하기란 지극히 힘든 일이다. 그런데 태정은 원래부터 그런 녀석 같았다. 그래도 태정이 삼펜 회장에 지명되어 조금은 자각이 생긴 건지, 그에 걸맞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쓰긴 하는데 그 모습이 희상에게는 영 힘들어 보였다. 태정은 회장자리가 애초부터 그에게 안 맞는 옷이라 했지만, 희상은 안 맞는 게 아니라 맞기는 맞는데―잡음이 있어도 태정은 꽤 훌륭하게 회장직을 수행하고 있었다―그가 맘에 들어하지 않아 벗고 싶어하는 것이 문제라 생각했다.

“녀석들한테 얕뵈지 않게 조심해, 넌 뭔가 물러 보이고 희미해 보여서 조고 회장 같지가 않단 말이지. 나라면 그냥 국사관고 따윈 확 뒤집어 놓을 건데. 그놈의 수순인지 뭔지로 사람 발목잡네. 이렇게 했는데 녀석들이 배지 안 넘겨주면 어떡할 거야? 조 회장 말해봐, 엉?”

“쉽게는 안 내놓겠지. 그래도, 해볼 수 있는 건 해봐야지. 테러에 대한 대응은 ‘이성과 법, 조약의무의 행로를 따라가야 한다’고 했어 그렇지 않으면 대단히 가혹한 전망이 예상된다고, 이 시대의 살아 있는 마지막 양심이 그런 말을 했지. 태정이가 내린 결정은 그가 말한 행로라고 생각되는데…. 안 그래?”

경무에게 시달리는 태정을 지원해서 희상이 끼어들어 본다. 그러자 태정이 웃으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네가 좋아한다는 그 분이 한 말이냐? 아니 숭배하고 있지, 희상이 너?”

“그런 말을 일일이 외우고 다니냐? 그런 어려운 말이 그럴듯해 보이지? 결국 주먹질은 나쁘다, 폭탄을 맞아도 점잖게 대응해야 한다는 거잖아…. 책상물림이나 할 법한 소리가지고.”

확실히 보기에도 성질도 남자다운 건 경무다. 불의에 격렬히 흥분하고 주먹이 우선인 ‘진정한 사나이’인 것이다. 하지만, 태정을 보고 남자답다고 하던 여학우들이 경무에 대해 하는 말은 ‘쟨 부담스러울 만치 남자다워서 볼 때 거북살스럽다’ ‘저건 남자다운 게 아니야 동물적인 거지’ 등의 평을 하고, 또 도대체 어디서 들은 건지 심지어 ‘쟤 졸업 후에 야쿠자로 나간다며’라는 근거 없는 말까지 한다.

같은 남성의 시선으로 봤을 때 동경의 눈빛을 받게 되는 경무는 상당히 발달된―펌핑된―근육을 지녔고 큼지막한 어깨와, 운동을 많이 했다는 자랑스런 상징, 승모근이 올라온 아주 멋들어진(물론 이건 남자들의 평가이다) 상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상체가 발달되면 자칫 하반신이 빈약해 보이는데, 경무는 그렇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척 보면 체육계라 알 수 있는 경무는 물론 운동을 하고 있지만, 그가 복싱부라고는 아무도 맞추지 못했다. 전혀 복서타입이 아닌 경무는 바로 교내 복싱부원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복서 같은 체형을 지닌 건 복싱부도 어떤 운동 클럽 부원도 아닌 태정이었다. 나란히 걷는 녀석들을 보면서 희상은 둘을 비교해 본다. 둘의 키는 엇비슷하다. 희상은 그들 키가 180을 조금씩 넘는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건장하고 떡 벌어진 경무는 그것 때문에 키가 실제보다 작아 보였고, 태정은 그야말로 복서 타입의 슬림한 몸이라 실제 키보다 좀 더 커 보였다.

경무의 말을 끝으로 한참동안 침묵이 흐르는데 또 경무가 말을 던진다.

“‘황창수’ 선수, 이번 세계 타이틀 매치 방어전 성공한 거 알아?”

태정과의 시비는 끝내려는 듯 다른 화제를 꺼낸다. 경무가 꺼낸 화제가 우연히도 복싱이라 희상은 잠시 놀랐지만, 녀석의 부활동이 복싱이니 꺼낸 화제가 복싱인 건 이상할 게 없다. 모르긴 몰라도 녀석 나름대로 신경 써서 고른 화제일 것이었다.

“아, 그 시합 생중계로 봤지. 우리 조고의 자랑스러운 선배잖냐….”

“항상 멋지지, 황창수 선수. 이번에도 K.O 승이었잖아.”

“그 선배 프로필 보면 뭐라 나오는 줄 아냐? 가장 좋아하는 것: 어머니가 직접 해주시는 조선 요리, 이렇게 나오더라구. 봤어? 그리고 현재 특기 사항은 결혼할 참할 아가씨 물색 중이라고 나오고.”

희상과 태정이 한마디씩 하자, 황 선수의 자서전을 무슨 경전처럼 모시는 경무가 황 ‘선배’에 대해 신이 나서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황창수 선수는 조고생들에겐 특급 연예인과 같은 존재였는데, 그는 도쿄 조고의 복싱부 출신이었다. 그리고 도쿄 조고의 얼마 안 되는 자랑거리 중 하나이기도 했다. 총련 인구 대부분이 밀집되어 있는 오사카 조고는 그래서 규모가 크고, 재정지원도 활발해서, 여러 다채로운 행사와 활동이 끊이지 않았다. 반면 소위 수도라는 도쿄에 위치한 조고는 오히려(당연히) 그보다 규모가 작다. 한 학년에 설치된 학급은 네 학급뿐, 전체 인원수도 작고 그래서 클럽 활동에도 애로사항이 많았다. 하지만, 그런 열악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황창수라는 도쿄 조고인朝高人은 학교 복싱부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고, 졸업하고 나서는, 프로로 활동하다가 결국 세계 권왕世界 拳王의 왕좌에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해내고, 작년에는 스포츠 에이전시로 가장 유명하다는 가네자와金澤 짐Gym으로 이적하여 몇 번의 방어전을 매번 승리로 장식했다.

그 선수에 대해 말하는 경무는 꽤나 들떠서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자신이 지금 활동하고 있는 학교 클럽의 선배였으니 경무가 그를 가까운 존재로 느끼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황 선수가 조고를 졸업한 지 오륙년이 더 지났지만, 가끔―굉장히 드물게―조고를 찾아와 학교를 둘러보고, 복싱부의 후배들 연습을 친히 봐준 적도 있었던 것이다. 경무는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되풀이 말하고 했다.

“…황 선배야 말로 남자 중의 남자지…. 선배처럼 졸업하면 넓은 세상으로 나가서 조고의 이름을 떨쳐야 조고 사나이라 할 수 있지.”

“넓은 세상으로 나가서 뭘 하려고?”

“태정이 니가 그건 알아서 뭘 하게….”

태정의 질문에 경무가 핀잔을 주지만, 그래도 녀석, 성실하게 뒷이야길 잇는다.

“뭐든 할 거야. 복싱이 제일 좋겠지만, 아무튼, 지금이랑은 분명 다른 뭔가가 있다구.”

“그래, 넓은 세상이니까. 어떤 기다리는 게 있고, 무언가는 달라지겠지.”

“아마 지금보단 나을 거고 확실히 좋을 거다.”

그들―어린 사내애들―은 항상 바깥 세계에 대해 말한다. 희상은 태정과 경무가 주고받은 대화가, 바로 그런 ‘사내 녀석들의 대화’라는 생각을 한다. 자신이 속한 곳은 비좁고 답답한 곳, 그래서 드넓은 어떤 다른 곳을 꿈꾸는 것이다―총련과 조고라는 울타리는 그런 느낌을 더욱 부채질했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곳을 향해 질주하고 싶어한다.

하긴, 여행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고 있으면 그 여행을 떠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희상은, 태정의 시니컬한 말투는 과연 무엇 때문이었을까를 생각한다. 무언가 달라진 것을 경험해도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뭔가 달라지기(확신할 수 없으니 나아진다는 말은 아껴두기로 한다) 이전의 상태와 동일한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면 달라지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희상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야 저 녀석들 어디 녀석들이냐?”

“에에 못 보던 녀석들인데.”

저기 앞에서 걸어오던 사내 녀석들이, 희상이네 앞을 스쳐 지나가면서 쑤군덕거린다. 국사관고 녀석들이다. 블레이저안의 셔츠 칼라는 새하얗게 빳빳하고, 가지런한 단추는 윤이 나고, 검은 구두는 광이 난다.(국사관은 구두까지 맞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랐던 것이다. 저기 멀리 국사관의 정문이 보이고, 자신들을 지나치는 주변의 녀석들은 국사관의 교복을 입은 녀석들이다.

‘몇 시야’라는 태정의 물음에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니 6시까지는 아직 10분이 남아 있었다. 국사관의 교문 앞에 당도해서 주위를 둘러보지만, 저녁 무렵의 학교는 휑하여 학생들의 모습은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뒤늦게 귀가하는 학생 몇몇이 간혹 교문 앞의 희상네 무리 쪽으로 다가오지만, 그냥 귀가를 서두르는 학생일 뿐으로, 낯선 일행을 아래위로 살피면서 눈을 열심히 굴리는 게 정체를 의심하는 티가 역력하다.

그런 분위기가 불편해서, 희상은 크흠흠… 거리면서 헛기침을 하면서 경무를 보는데, 경무 녀석, 자신들을 살펴보는 녀석들이 있을라치면 녀석들을 일부러 인상을 구겨 사납게 노려보면서 이미 지나간 녀석들의 뒤통수까지 눈으로 쫓는다.

시간을 두고 또 한 차례 중앙 건물에서 서넛이 몰려나와 저희들끼리 낄낄거리며 히죽거리다가 한 녀석이 뭔가 주의를 주자, 일행 녀석들 모두 일제히 태정이 일행을 쳐다본다. 조고의 교복을 알아본 기색이었다. 카악, 퉤엣 그중 한 녀석이 침을 보란 듯 뱉는다. 노골적으로 ‘조센징’이라며 이쪽을 향해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녀석도 있다. ‘저 새끼들이…’ 흥분에 경무가 한 발짝 국사관고 무리로 다가가려는 순간 ‘최경무!’ 희상은 나직한 경고를 발함과 동시에 녀석의 한 팔을 잡고 말렸다. 경무의 다른 팔은 태정이 이미 부여잡고 있었다.

실상 조고와 국사관이 이렇게 서로 으르렁거리는 게 어제 오늘 일도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여태껏 서로를 백안시하면서 마치 상대가 거기에 없는 양 그렇게 지내왔었다. 그런 것이 이 손톱만한(희상은 잠시 왼 가슴에 달려 있는 배지를 내려다 봤다) 쇠핀 하나 가져갔다고 구태여 이렇게 찾아 온 것은, 사건의 범인들이 그 옛날의 조고 배지의 내력을 뚜렷이 알고 가져갔으며 그것이 조고 명예와 관련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명백한 사실 때문이었다.

조고 배지가 삼펜 배지라 불리는 이유는 거꾸로 된 삼각형 형태를 둘러싸는 테두리를 유심히 살펴보면 펜대의 모양이기 때문인데 그것이 국사관의 사냥감이 되곤 했던 건, 이삼십 년도 더 된 옛날 이야기였다. 그게 바로 어제 다시 재현된 것이다. 조고와 국사관의 끈질긴, 이 넌더리나는 인연―악연―을 간단히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산란을 위한 물고기처럼, 역사를 잠시 거슬러 올라가 봐야 하는 것이다. 국사관을 말하고자 하면, 120여 년도 더 된 오래된 역사를 먼저 언급하게 되는데 국사관의 전신은, 당시 일본 귀족 가문 자제들의 신체 단련과 정신 수양을 가장 이상적으로 조화시키는 것을 표방한 교육 기관이었다. 그랬던 것이 세계 대전 이전부터, 대학의 역할을 병행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군 간부와 정계 의원들을 다수 배출해 내었다. 현재 국사관은 대학 운영, 장학 재단 설립 등, 교육 사업 재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것이 국사관의 변천사인데, 그 하부 교육 기관 중의 하나가 국사관 고등학교인 것이다. 기실 고등학교의 연혁만 따지자면, 국사관이라는 기관자체의 역사의 절반밖에 되지 않지만, 아무튼, 보수주의적이고 우익적인 상부 조직의 성격과 운영 방침에 지대한 영향을 받아, 이 세타가야의 국사관 고등학교는, 이민족 집단인 조고와 잦은 마찰을 빚었고, 분란을 만들었다. 조선인으로 목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었다는 그 시대 상황에서 두 학교가 얽히는 잡음과 소음은 항상 일방적으로 국사관에서 걸어온 시비가 도화선이 되었다.

그렇다고, ‘대륙의 후예’인 조고의 남아들이 그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눈뜨고 가만히 지켜볼 리는 없었다. (당시 제주도 출신이 아니면 모두 대.륙.출.신.이라 말했다. 하나, 우스운 것은 이 땅에서 차별 받는 동등한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대륙 출신은 제주도 출신을 차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륙이란 말은 대체로 이 섬나라 녀석들을 상대적으로 경시하고자 할 때 쓰였다) 그들은 자위自衛와 자경自警을 기치로 내걸며 삼펜을 조직하였는데,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것만으로 손가락질을 당하고, 생존을 위협받았던 무리, 숫자부터 맥없이 밀리고 힘없던 형편의 조고였는지라, 당시 조고 남학생들이라면 모두 삼펜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또한, 삼펜 발족 초기에 삼펜은 자경과 자위를 말하였지만, 그땐 유사전쟁의 분위기로, 순번에 따라 순찰을 돌 때면 삼펜 대원들(삼펜의 정식 명칭은 삼펜회會도, 삼펜당堂도 아닌, 삼펜대隊였다) 모두 무장을 하고 다녔다고 전해졌다.

아무튼 이런 삼펜의 조직적 활동과 훈련, 노력으로 인해 조고생을 함부로 건드리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조고생에 대한 린치가 아주 없어진 건 아니었다. 녀석들에게 조고생들은 건드릴 수 없는 대상, 쓰러뜨리기 어려운 강한 대상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여 그들의 호승심, 승부근성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 무렵을 전후해서 국사관 녀석들은 조고생에 대한 린치와 함께 린치한 녀석의 조고 배지를 떼어갔던 것이다.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무서운 녀석들’을 감히 건드린 자신의 용기를 과시하기 위한 용도로써 녀석들은 그것을 전리품이자 증거로 삼았다. 결국 일단의 시간을 거쳐 ‘조고 배지 소유’는 국사관 녀석들뿐만 아니라 그 외 보통 고교 녀석들에게까지 ‘주먹과 힘’을 나타내는 일종의 지표가 되었고 그것은 하나의 장식품 역할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고 배지에 대한 이야기는, 마치 전설 같아서, 당시 남학생 사이에서는 시너와 함께 삼펜의 배지가 암거래 품목에 오르기도 했다고 하는가 하면, 주머니 사정이 열악한 조고생이 보통 고교(물론 조고생들이 이해하는 보통고교의 정의에 따라 국사관도 포함된다) 녀석에게 배지를 팔기도 했다는 웃지 못할 비화도 있는 것이다.

“정말 여기 맞는 거야? 시간이 지나도 녀석들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뭐하자는 거야, 이 자식들!!”

6시에서 약 5분이 경과할 무렵 경무가 슬슬 성질을 돋구기 시작한다.

“내뺀 거 아냐? 덜컥 우릴 본다고는 했는데, 나중에 후회를 했던 거지. 삼펜의 명성에 겁이 나버렸던 거야…. 맞아. 그런 거야.”

이제 아예 경무는 그들이 도망갔다고 단정을 짓는다. 그의 성급함에 태정이 얼굴을 딴 데로 돌려 희미하게 떠오르는 미소를 경무가 보지 못하도록 딴청을 피운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띠라라라라.”

어디선가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네.”

바지춤에서 전화를 꺼내 받는 건 태정이었다. 태정은 두어 번 네, 네 하고 짧게 끊어 대답을 하고는, 이내 전화를 끊었다.

“누구야?”

“국사관 회장, 들어와서 지금 정면에 보이는 건물 3층 생도회의실로 오라는데.”

“하하…이 새끼들이, 그럼 우리들 여기 와 있는 거 지금까지 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거야? 넌 거기다 대고 그냥 하이, 하이, 하면서 아무 말도 안 해줬냐?”

“경무, 너도 녀석들이 우릴 정중하게 모시러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거 아냐…. 오기 전에 통화로 성질을 돋워 놨는데…. 아무튼, 그 녀석들 우리보고 있을 텐데 들어가자구.”

태정에게서, 국사관 회장 고토와의 약속을 어떻게 잡았는지 자세히 전해들은 삼펜 일행이다. 상대의 심기가 그리 편하지는 않으리라 짐작은 했지만, 설마 일행을 기다리게 하고 또 어딘가에서 살펴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희상은, 그들이 어디에 있을까 하는 생각에 넓은 운동장 트랙의 건너에 서 있는 눈앞의 건물을 유심히 창문들을 훑어본다. 태정의 말로 국사관 놈들의 시선이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음을 새삼 의식한 경무가 ‘앗 그렇지’라는 표정을 짓는다. (꽤 느리다 녀석, 국사관이 지켜보는 것에 화냈으면서 태정이 다시 사실을 지적하자 그때서야 표정과 자세를 관리한다) 경무는 넓고 두터운 어깨에 기합을 팍팍 넣고, 양손을 바지주머니에 찔러 넣어 녀석 나름의 ‘돌격 앞으로!’ 자세를 잡는다.

“이건 고의적으로 골탕 먹인 거야 고토 그 자식, 억지로 약속 잡아서 약이 좀 올랐나 보지? 쳇, 이런 걸로 사람 물 먹이면 속이 후련한가? 속 좁기는 계집애도 아니고 분명 얼굴은 희멀건하고, 금테 안경에 신경질적인 얼굴, 현재 인생 목적은 오로지 도다이동경대 입학일 거고 몸에 근육 따위는 한 개도 없을 놈이야 분명해. 내가 장담한다.”

10분을 기다린 것이 그토록 억울했던 건지, 경무는 씨근덕거리며, 한 번도 본 적 없는 국사관 회장 고토를 친구처럼 허물없이 부른다. 그리고 나지막이 입을 달싹거리며 욕을 지껄인다.

“선입관을 가지면, 상황판단과 대응이 느려질 수 있다는 거, 경무 넌 복싱하니까 알고 있을 텐데?”

“자식 꼭 복싱하는 녀석처럼 말하네, 복싱을 네가 쥐뿔이냐 알고는 말하냐?”

“상대가 주먹을 뻗기 전까진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건 경무 네가 한 말이야.”

“어 그런가? 사실 황창수 선배가 한 말이야 그건. 대단한 명언이지 명언.”

“그래 황 선수는 너한테 루이스 레녹스보다, 타이슨보다 위대한 선수니까.”

“아니야, 나한테만 그런 게 아냐, 황 선수는 뛰어나다거나 위대하다는 말 한마디로 표현 할 수 없어.”

이럴 때면 희상은, 태정이 경무보다 오히려 복싱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경무는 황 선수에 대해 맹목적이었고, 권투에 관한 견해는 가끔 억지스러웠다. 물론 객관적인 복싱 이론에 대해 정통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말이다. 복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무조건 자신이 옳았고, 상대는 틀렸다. 가끔은 태정이 경무에 대해 던지는 말을 들을 때면, 희상은 그가 복싱을 알고, 실제로 해본 적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간혹 태정이 상처 나고 멍든 얼굴을 하고 나타날 때면 아버지에게 맞았다’고 간단한 이유를,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투로 말을 했고, 그 이유를 믿지 않을 이유 또한 없었지만, 희상은 괜히 태정의 그 상처에 그럴싸한 멋진 이유가 붙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혼자 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로 보자면, 경무 아버지도, 복싱을 하는 그 커다랗고 단련된 아들 경무를 개 패듯이 쥐어 패는 것이 실상으로, 경무는 ‘아버지인데 그럼 그저 맞을 수밖에 더 있냐’고 했다.

그들―재일 동포―사회에서 폭력은 대물림되고 일상화 되어 있었다. 태정이 복싱을 하고 있기를 바라는 것은 ‘삼펜의 회장은 좀 더 힘센 녀석이어야 한다’는 경무 녀석들의 단순한 주장에 희상이 휩쓸린 건지도 모른다. 그래, 저런 긴장감 없고 매사 시큰둥해 보이는 태정이 그런 고도의 집중력과 긴장을 요하는 복싱을 하리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웃기는 일이다.

국사관고 건물은 세 개의 동으로 동이 각각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가까이 다가가자, ‘ㄷ’ 자 형으로 배열된 건물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 통로로 서로 연결 돼 있었다. 희상이네들이 중앙 건물의 안으로 들어가자 나무―색깔을 보니 아마도 오크 같다―로 된 바닥과 같은 재질로 고급스럽게 마감된 내부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치 건물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 했다. 발을 내딛으며 으레 나무 밟는 소리가 나려니 했지만, 삐꺼덕 거리는 소리는 나지 않는다. 건물의 보수 유지가 완벽하게 되고 있다는 말이다.

계단을 따라 삼층으로 올라가면서 셋 중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태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경무는? 희상은 다른 두 녀석들의 의중을 의식적으로 궁금해하면서, 긴장하고 있는 자신을 달래려 했다.

태정은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3층으로 오르자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성큼 성큼 걸어갔는데, 아마도 그쪽에서 위치를 정확히 알려준 모양이었다. 목적지는 복도의 끝인 것 같다. 희상은 경무와 함께 태정의 뒤를 바짝 따라 걸었고 몇 걸음 걷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끝에 벌써 이르렀다. 이 복도의 끝에는 혹시 금패로 장식된 ‘생도회실’이라고 적혀 있는 문이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상상했던 희상은, 잠깐 멈칫했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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