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한 여인이 노래 할 때까지 #1
“무슨 일이야?”
지도 부장인 경무는 통보했던 시간에서 이미 10분이 지나버린 지금에야 어슬렁거리면서 회실로 들어왔다. 분명 녀석, 점심을 해치우고 온 것이다. 태정은 그것이 자신에 대한 경무 나름의 시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터이나 오늘 회합은 일반 정기회의 따위가 아니었고, 말 자체에 긴장감이 도는 ‘비상소집’이었다.
“최경무, 오늘 회의는 삼펜 비상소집이라고 했을 텐데?”
희상을 흘낏 보곤 태정은 진지하고 날카롭게 경무를 추궁했다. 하지만 그것이 형식상이라고는 희상도 경무도 모를 것이었다. 태정은 이를테면―경무의 말을 빌면―적당주의자였다. 그런 레테르를 의식해서라도, 태정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외부의 시선에 스스로가 어떻게 보이는가에 대해 얼마간의 신경을 써야 했다.
경무는 평소대로 태정을 아랑곳 않고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불량하게 걸터앉는다. 다리는 양옆으로 한껏 벌리고 허리는 앞으로 빼서 엉덩이만 의자에 살짝 올려놓는, 아주 눈에 거슬리는 자세였다.
“아 그래 내가 늦었어. 늦어서 죄송합니다. 회장 나으리.”
경무의 사과는 상대를 비웃는 비아냥거림이었다. 잘못 널어진 빨래 마냥 의자 위에 사지가 팔방으로 축 늘어진 채로 고개만 까닥한다. 태정은 더 이상 경무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고 바로 안건으로 들어간다. 경무 녀석의 불만이 무엇인지, 태정은 대단히 잘 알고 있었다.
“좋아 늦게 온 경무를 위해 사건 정리를 다시 해보지. 사건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났다고?”
태정은 희상에게 사건의 브리핑을 또 한 번 요구했다. 무슨 일이 터졌는지 모르고 있었다. 저 녀석…, 다혈질인 경무가 비상소집통보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게 밥을 먹고, 저런 긴장감 없는 태도로 자신을 대하는 것으로 미뤄 볼 때 아직 입소문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사리 분별이 뛰어나고 판단력과 머리 회전이 빠른 희상이었다. 일을 당한 김영일의 입단속을 잘 시켜놓았다. 인과율을 벗어난, 난데없는 사건에 휘말린 피해자들은 대개 말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김영일이 역시 그런―왜 일을 당한 사람이 나인가 하는―억울함과 치욕에 조고의 남아로서 주위에 울분을 쏟아내지 않고는 못 배겼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상은 김영일의 그런 흥분을 용케 가라앉히고 삼펜이 결정을 내릴 때까지는 사건에 대해 함구하라고 지시했고, 또 김영일은 고분고분 그 말을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희상은 다시 한 번 경무를 위해 입을 연다.
“1학년 3반, 김영일이란 학생이 저녁 7시쯤 귀가하는 길에 일이 터졌대. 집에 가는 도중에 자전거 타이어 바람이 빠졌다는데…, 그 부근에 시로야마城山 공원이라고 있잖아…? 마침 거길 지나는 길이라 김영일이는 공원 내 자전거 보관소에 자전거를 묶어 두고 나왔고. 그런데 그때, 제 또래로 보이는 고교생 3명이 앞을 막고 보내주지 않더라는 거야”
이미 태정과 희상 둘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을 희상이 일목요연하게 나열, 정리 보고한다. 헌데 누굴 위해 이런 재방송을 하는지도 모르고 경무가 흥분한 목소리로 태클을 걸었다.
“뭐야 또 주변 녀석들이 시비 걸어 온 것 같고 비상이다 긴급이다 해서 삼펜을 소집한 거야 엉? 지금?”
푸하하… 태정은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저, 사람 말끝까지 안 듣고 무작정 대들고 보는 타이밍이며, 사태파악도 않고 일단 목소리부터 높여 상대를 비난하는, 경무의 저 단순한 반응이 예상했던 것과 한 치의 오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시답잖은 녀석이 얻어맞고 와서 감히 삼펜에 대고 깨갱거린 거야? 엉? 세 명? 세 명이면 가뿐하게 처리할 수 있는 숫자라고.”
그 새를 참지 못하고 경무는 호승심과 자신이 지닌 힘에 대한 자신을 드러낸다. 쉭쉭… 마치 적이 허공에 떠있는 모양으로, 공중으로 양손 펀치를 날리며 입으로는 효과음까지 넣는다.
“경무 넌 늦었으면 얌전히 듣기나 해라.”
말이 잘린 희상이 차가운 눈길을 경무에게 던지며 한소리 한다. 좀처럼 자신에게 던지지 않던 저런 냉랭한 시선을 받자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건지 그 한마디로 돌연 녀석이 얌전해진다. 널브러져 주먹이나 휘돌던 자세를 가다듬고 의자에 똑바로 앉는 것이다. 태정의 한마디와는 위력이 틀렸다. 저 경무를 희상은 쥐었다 폈다 한다. 태정은 희상의 능력에 속으로 찬사를 보내고, 희상은 잘렸던 말을 매끄럽게 잇는다.
“일본 보통 학교 학생들이 걸어왔던 폭언이라든가 시비 혹은, 폭력, 폭행, 협박, 금품 갈취 같은 거라면 회장이 삼펜 비상 회의를 발동할 할 이유가 없지…. 안 그래? 지도부장?”
은근히 태정을 감싸 돌며 희상이 동의를 재촉하자 경무 녀석은 못마땅한 듯 입술을 씰룩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뭐가 문제인 거야?’라고 퉁명스런 질문을 던지는, 시위용 불만이 눈에 보였지만 말이다.
“그래, 김영일이 구타를 좀 당하긴 했지만, 우리 조고생은 언제나 린치의 대상이었고 그건 네 말대로 새삼스런 일도 아냐. 이번 사건의 초점은 배지가 강탈당했다는데 있어.”
“뭐, 뭐라고? 배지가 어쨌다고?”
놀라 의자에서 튕겨 일어난 경무는, 희상과 태정을 연신 번갈아 쳐다보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배지가 어쩌고 어째? 질문이 되풀이되었다.
“경일이란 애가 배지를 빼앗겼다고.”
벌떡 일어난 경무를 올려다보며 태정은 일견 느긋하게 대답한다. 얼굴에는 사뭇 가느다란 미소마저 띄면서 말이다. 녀석의 반응이 너무나도 기대대로라 얼굴 근육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었다.
“이 자식 너 지금 웃었냐? 응? 뭐가 웃겨?”
앗, 실수했군…. 테이블을 쿵 치며 윽박지르는 경무의 화가 난동으로 확대되기 전에 태정은 조기 진화에 나서기로 했다.
“미안미안 내가 웃었나? 잠시 딴 생각이 나서 그랬나봐.”
“뭐? 딴생각을 해? 이 시국에?”
조기 진화는커녕 경무 녀석만 큰 소리 쳐댈 빌미 제공이 되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 ‘시국’에 대해 어떤 인식도 없었던 녀석이 ‘시국’을 들먹이는 것이다. 하지만 손을 들고 경무를 향해 그만하라는, 스톱 사인을 하는 희상의 개입으로 또 한 번 경무는 적절히 통제된다.
“조 회장, 이건 웃을 만한 일이 아니야. 네가 무슨 생각에 웃었는진 몰라도 지금 딴생각을 하다니. 조고의 삼펜 배지가 습격을 당했는데 조금이라도 심각한 시늉은 하지 않아야겠어? 네가 원래 안면 근육이 느슨하긴 했지만 말이야 우린 명색이 삼펜이라구. 여긴 조고의 삼펜 회의실이고. 지금 우리는 조고 배지가 약탈당한 사건에 대해 논하고 있는 중이야. 넌 지금 어떤 방법으로 대처할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해. 사건 직후의 초동 수사가 중요한 만큼 이번 일에 있어서도 재빠른 행동이 요구되는 건 당연한데 넌 네가 누구라는 자각이 있긴 한 거냐? 조태정 군”
달리 달변가이겠는가 희상이 말이 격외로 길기도 길었다. 어쨌든 그도 경무와 매한가지로 자신이 삼펜의 일원인 걸 자랑스러워했다. 그 옛날과 비교해서 삼펜이 쇠미하고 영락했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자각 없어. 저 녀석은 지가 누군지 물어도 대답 못 할걸, 아마?”
부회장인 경무가 자신을 노려보면서 다시 의자에 털썩 앉는다. 녀석이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것에는 이골이 났으므로 그냥 무시하고 희상을 향해 사과를 던졌다.
“아, 미안해. 미안…, 계속하자.”
삼펜 내부의 사정이 이러했기 때문에 ‘김영일이의 입회하에 회의를 진행하는 게 어떠냐’는 희상의 물음에 태정의 대답은 당연히 ‘NO’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경무는 자신을 볼 때마다 심히 못마땅함을 피력하지 못해 안달 나 있었고, 그런 경무를 보면서 태정은 왜인지 모르게 얼굴 실실 쪼개는―이것은 희상의 말에 의거한 표현이다―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그것에 경무는 더 노기충천하고 기세가 험악해지는 것이다. 삼펜의 마지막 이성이라고 하는, 침착과 인내, 이지와 냉철, 그 추상적 개념의 현신라고 불리는 희상이란 존재가 없었다면 49기―이것은 태정이 이끄는 현現 삼펜의 기수이자 올 졸업예정자의 기수였다―의 삼펜은 지금, 여기까지 굴러올 수 없었으리라 태정은 생각했다. 희상은 자신과 경무의 완충역할을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물론 녀석들에게 받은 대로 돌려줘야겠지?”
경무는 꽤나 호전적인 자세로 태정에게 물었다. 양 주먹을 가볍게 털고는 한 손 주먹을 다른 손으로 감아쥐고는 쓰다듬는 것이다. ‘누군지는 알고 녀석들이라고 하는 거냐’는 반문에 경무는 무슨 그런 같잖은 질문을 하냐고 핀잔을 준다.
“그거야 당연히 국사관 놈들 아냐 뻔하지.”
“희상이 너도 그렇게 생각해?”
“이건 달리 볼래야 볼 수도 없어. 너무나도 명확한 게 녀석들의 목적이 오로지 배지 탈취에 있잖아. 김영일이 꽤 얻어맞았다지만, 그건 부차적인 사실이야… 장식이지.”
희상의 말은 명료했다. 사실 사건은 회의 소집이 이전에 그 전모를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런 일을 벌인 만한 놈들은 국사관고國士館高 녀석들밖에 없었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보수적 국수적 극우 노선을 지향하는 세력이 설립하고 후원하고 지도하는 고등학교였다. 조고생들을 허탈하고 가소롭게 하는 것은, 이 지역의 일반, 보통 사람들이 그 고등학교를 들먹일 때 그 이름 앞에 ‘명문’이라는 두 글자를 자주 붙인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가진 명문학교라도 조고생들에겐, 그저 ‘보통 학교’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조고의 구성원은 특수한 이유에 의해 모집되었고, 그들은 그 특수함을 항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조고 학생들에겐 여타 고교 학생들이 ‘보통학교’였고 또 그렇게 불렀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2종류의 고교밖에 없었다.
하나는 조고이고, 나머지는 모두 보통학교였다.
“아, 답답해. 이렇게 탁상공론하고 있을 때가 아냐. 당장 쳐들어가도 모자를 판인데 뭐 하는 거야, 회장!!”
“이번 건은 배지의 반환 요청으로 마무리지어.”
“뭐라고? 반환요청?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요청한다고 사람 두들겨 패고 힘들게 뺏어간 걸 알겠습니다 하고 정중하게 돌려주겠냐구….”
“일단 그게 수순이야.”
“수순이고 나발이고 그런 건 개나 주라고 해.”
경무는 ‘에이씨!!’라고 하며 거칠게 옆쪽의 빈 의자를 걷어찼다. 콰당! 의자가 나뒹군다. 아마도 저 의자는 태정의 대물代物일 것이었다. 자신에게 직접 저런 물리적 위해를 가할 수 없으니 의자라도 걷어차 버려야 했던 것이겠지.
삼펜의 지도부장 최경무는 삼펜 내內 또 하나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고, 조고 내 독자적인 세력―그의 추종자들―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지지와 힘을 등에 업고 있으니 저렇게 기고만장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경무가 태정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갖은 불만과 불신을 온몸으로 발산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경무, 저 의자 다시 똑바로 세워 놔.”
“뭐라고 이 자식이! 나 참……, 회장이라 이거지?”
태정이 딱히 권위를 세우려고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느끼다니. 아니, 녀석은 항상 저런 식이었지…. 하지만, 정치 성향의 조직은 위계질서가 기본이다. 삼펜은 그런 경향이 특히나 강했고 그것은 조고 설립 당시의 상고적부터 대물림 된 오랜 전통이었다. 어떻게 보면 삼펜이 아직까지나마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기틀일 수도 있다. 온건주의 방식인 미온적 타협으로 활로를 모색하려는 태정이 이미 내려진 결정에 대해 쏟아질 비난과 반대의 강도를, 그런 조직의 성질을 이용하여 약화시켜보려는 교활한 술책을 부린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항변할 수는 없었다―그리고 그것은 경무에게 이미 먹혀 들어가고 있었다.
“의자 원 위치시켜. 이걸로 두 번 말했다.”
손가락을 두개 펴서 숫자를 만들어 내 보이는 태정을 내려보며 이를 꽈악 앙 다물은 경무는 넘어진 의자의 등받이를 한 손으로 집고는 이내, 가슴께까지 높이 쳐들어 올린 그것을 바닥에 내리꽂는다. 쿠왕! 넘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면서 여보란 듯 의자는 바로 세워졌다.
삼펜은 그 이름이 나타내는 것처럼 「삼」이라는 숫자를 중시하여 많은 룰에 「셋」이라는 횟수를 적용시켰다. 삼펜의 일사 분란한 질서의 기조는 무엇보다 그 자신보다 상위 계급의 명령, 지휘, 결정에 따르는 것에 있었으며, 일단 위에서 아래로 향한 말들은 ‘세 차례’라는 관대함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관대함을 지녔다 해도 일단 세 번을 넘긴 불복종에 대해서는 가차 없는 제제와 징벌, 배척과 제명―경무가 가장 우려했을 것은 분명 이것이었다―이라는 실력 행사의 권한이 상급자에게 부여되므로 경무는 태정의 두 번째 관용에서 굴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너그러움을 나타낸다고는 해도, 절대 복종에 ‘세 차례’ 의 기회를 주는 것은 무의미했다. 오히려 생각의 겨를이 없는 지체 없는 복종 보다 더욱 나쁘다. 두세 번에 굴하는 것은 더욱 심한 패배감을 느끼게 되며 더 깊은 앙심을 갖게 할 수 있었다.
태정 그 자신, 삼펜이면서, 이러한 삼펜의 성질과 구조 분위기 그 모든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삼펜이란 이름부터가 그렇다. 한문과 영문의 저 너무나도 부자연스런 조합에 언제나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자신은 어쩌면 경무가 삼펜의 그 ‘삼’을 어겨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랬더라 해도 경무에게 태정 자신이 지니고 있는 어떤 권한도 행사하지 않았을 터. 하지만, 경무에게, 경무가 너무나도 사랑하는 삼펜의 계율을 그런 시시한 이유로, 스스로 어기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태정은 스스로를 비겁하게 만들었고, 당당한 경무‘까지’ 마찬가지로 초라하게 만들어버렸다. 삼펜의 어느 누구보다 그것의 정점에 어울리는 건 경무였다. 녀석은 의욕과 패기가 있었고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굳건한 신념이 있었다. 최고라는 위치에 대한 욕심과 집착도 지니고 있다. 모르겠다. 그러한 욕심이 좋은지 나쁜지는. 하지만, 그 욕심을 버리고 난다면 아마도 이 자리는 그의 것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욕심을 지닌 경무를 부러워하는 자신이 욕심을 버리는 경무를 바라다니 아이러니한 바람이 아닐 수 없다―이런 생각을 경무 녀석이 알 리 없지만. 하지만 생각이나 의도 따위야, 얼마든지 좋게 가질 수 있는 것이라 너무나도 쓸데없는 것이었다.
“둘 다 그만해, 삼펜의 실상이 이렇다는 게 부끄럽지도 않냐? 조고에서 가장 신망 있는 삼펜의 두 명이 이다지도 삐걱거리고 있는 건, 나부터 너무 실망스럽다. 그러니까 너희 둘, 이제 좀 적당히 하고 그만 둬. 자∼자.”
짝짝, 태정과 경무의 주의를 끌기 위해 희상이 손뼉을 치며 말했다.
“둘이 악수하고 끝내.”
애꿎은 희상이 매번 경무와 자신 사이에서 고생이다. 태정은 그런 희상의 노력이 미안했다.
태정이, ‘기분 풀어라’라며 경무를 향해 먼저 손을 내밀자 녀석은 의외로 쉽게 마주 손을 내밀었다. 경무 녀석도, 희상에겐 자신과 마찬가지의 기분이었던 것이리라.
둘이 악수하는 모습에 흐뭇했는지 희상은 서로 어깨를 두들겨 주라고 더 힘든 요구를 한다. 희상아 그건 너무 무리한 요구야… 속으로 생각하지만, 늬 둘이 계속 그렇게 반목하고 마음이 맞지 않으면 내가 힘들다 고 말하는 희상의 약한 목소리가 경무의 마음을 건드린 건지 경무 자식이 먼저 몸을 내밀면서 어깨를 끌어 등을 두들겼다. 투닥, 투닥, 투닥, 가볍고 의좋은 소리가 났다. 미심쩍었다. 아무리 희상이 말했다지만, 아니, 희상이 아니라 제 어머니가 죽어가는 시늉을 해도―이런 경우를 들먹이다니, 경무 어머님 용서하시길―경무 놈, 고집을 꺾을 성싶은 녀석이 절대 아니었다. 자못 미덥지 못해 하면서도―한편으론 녀석의 호의를 100% 믿지 못하는 스스로를 꾸짖으면서―모처럼 그가 먼저 보인 화해의 몸짓에 태정도 따라 녀석의 등을 감쌌다.
“너같은새끼난인정못해.”
자못 호의적인 포옹이 느슨해지려는 찰나, 경무와 어슷하게 교차시킨 옆얼굴과 목을 뒤로 빼내는데, 순간 태정의 귀에 입을 바싹대고 경무는 꽉물은 잇새로 작달막히 말했다.
역시 그런 것이다. 경무는 자신의 의지를 더욱 확실히, 효과적으로 전달시키기 위해 포옹을 자청한 것이다. 못미더워 했던 바로 그 기대―아니면 불안―에 어긋나지 않는 겪어온바 그대로의 경무였다. 항시 세상을 불신하고 있으면 놀랄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태정이 염세주의에 경도 돼 있는 건 아니었다. 불신은 아마도 자기 불신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녀석의 느닷없는 암수暗數에도 불구하고 태정은 경무 등짝의 먼지를 한 번 더 털어 주었다. 투닥, 투닥. 그렇게 적개심을 불태울 필요까지는 없을 텐데. 태정은 경무를 굉장히 인정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에 반해 상대의 반응은 섭섭하기 짝이 없다.
“후….”
들리지 않을 서운함은 고개 숙인 한숨으로 끝나버린다.
“그럼 이걸로 회의 끝난 거군. 회장 말대로 국사관 생도회에 돌려달라고 한다. 이것이 김영일 배지 사건에 대한 회장의 최종 결정이고. 여기에서 더 왈가왈부해 봤자 달라질 것도 없을 테니, 그럼 회장이 국사관 쪽에 이쪽이 방문할 것을 통고해 둬.
마치 회장과 부회장이 뒤바뀐 것처럼 희상이 회의의 끝을 알리고, 회장의 할 일을 일깨워준다. 하지만,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만은 분명히 해둬야겠어. 회장 결정에 어쨌건 나는 반대야.”
경무가 태정의 귀에 으르렁댔던 건 희상이 못 들었을 것이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경무는 점잖은 방식으로 태도를 바꿔 희상에게 회장에 대한 공개적인 반대를 표시했다
“하지만, 행동은 같이하지. 삼펜의 내분이나 의불합意不合 따위 내가 인정 못하니까. 근데 말야, 조 회장, 그 명예로운 호칭이 좆회장으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신중하게 행동해줬으면 좋겠어. 조고를 위한 최선의 길이 무언지 그 머리란 걸 굴려 보란 말야.”
경무는 태정에게 반박할 시간적 여유도 주지 않은 채 문을 세게 쾅―! 닫아 버렸다.
좆회장이라…. 태정은 입안에서 그 말을 굴려본다. 사실, 이미 적지 않은 녀석들에 의해 태정의 성은 ’조’가 아닌 ’좆’이 되어 있었다. 그것을 경무 녀석 오늘, 저런 식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경무의 추종자들은 경무가 태정에게 대항, 대립하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오히려 그것을 지지, 조장했다―그들 사이에서 태정을 지칭하는 비공식 명칭은 ‘좆회장’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경무에 의해 일방적이자 적절하게―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으므로―회의가 끝났다. 삼펜 최고 회의는 최고 위원 삼인의 자율적 협의로 의견일치를 보았고 결론을 확정지었다(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태정은 ‘대체로 원만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여전히 삼펜의 앞날은 험난해 보였지만 말이다.
* * *
조고朝高, 조선 고급학교의 배지 형태는 삼각형으로, 이 삼각의 형태는 이른바 지, 덕, 체의 조화를 상징한다. 그리고 조선이라고 할 때의 「朝」라는 글자가 역삼각형 형태의 배지 안에 꿈틀거리는 해서체로 자리 잡고 있는데, 삼각형도 바른 삼각형이 아닌 역삼각형인데다, 글자도 초서체草書體여서 그런 건지 아주 역동적으로 보인다.
아, 사실을 말하자면, 그런 식으로 보기 좋다고 말하는 것은 오로지 조고생들뿐이다. 사실, 이 조고의 배지는 수 년 전 <전일본全日本고교 배지 경연대회>(정말로 이런 대회가 있었다―과거형인 것은 현재에도 개최되는지는 모르기 때문이다)에서 가장 형편없는 디자인으로 꼽혔다고 한다.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조고가 일본 고등학교들과 함께 겨루거나 경쟁할 수 있는 공식 행사가 거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조고는 대부분의 행사에 초대받지 못하거나 참가를 금지당했다―보통 금지라기보다, 참가 자격이 없다고 말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일본 각 고등학교들의 상징, 엠블럼을 다투어 뽐내는 이 배지 대회만큼은 얼렁뚱땅 참가할 수 있었다고 한다. 헌데, 기념할 만하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는 조고의 공식 행사 참여, 그 결과라는 것이 형편없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학교 배지에 특별한 의의를 부여하고 자긍심을 지녔던 조고의 학생들이었던지라 배지 대회의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지만, 항의할 수 있는 길은 원천 봉쇄되어 있었다. 과연 그 대회의 순위 결정에 공정하게 배지 디자인만이 고려가 되었는지, 아니면 판정에 다른 요소―그들이 뿌리내리고 사는, 이 땅에 만연한 차별 심리―가 끼어들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당시 조고생들은 당연히 후자의 경우라고 굳게 믿었으며, 피억압, 피차별 민족으로서의 울분 토로로 인해 학교가 들썩거렸다고 한다.
태정은 배지 사건의 발발을 두고 조고 내에서 끊임없이 회자되는 배지에 관한 소문과 말들을 떠올렸다. 바로 어제 터진 사건은 바로 그런, 배지에 대한 조고의 자부심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였다.
배지는 바로 학교의 상징이기 때문에, 배지에 대한 긍지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소중히 하고 아끼고 보호하는 것은 모교에 대한 사랑으로 아주 모범적인 본받을 만한 학생으로서의 기본이자 표본인 것이다. 하지만, 요즘 일본 보통 학교 학생들 중 누가 소속 학교 배지에 관심을 갖고 있을 것인가.
단언하건데, 없다. 배지에 치약을 묻혀 광나게 닦는 녀석이 보통 학교 녀석 중에―단 한 명이라도―있을 리는 만무했다.
하지만, 조고생들이 바로 그랬다. 조고생들의 배지 사랑은 조고 창립 초기부터 유난했고 참으로 각별했다. 고깟 배지가 무에 중요하다고? 이라며 물음표를 떨쳐 낼 수 없는 사람이라면 조고 배지의 명성과 위상 그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쥐 불알 반쪽만큼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배지가 지닌 사연과 배경 그리고, 그들 조선 고급학교의 역사를 나머지 쥐 불알 반쪽만큼도 모르는 것이다. (쥐불알 반쪽이라는 것은 태정의 조부가 자주 썼던 표현인데, 경상도 출신의 조부는 무슨 비유를 들 때면 보통 입에 담기 어렵고 귀에 받기 어색한, 동물이나 인간의 신체 부위들을 즐거이 들먹였다)
김영일 사건에서, 김영일이 타학교 녀석들의 주먹으로 인해 신체적 상해를 입은 것엔 경무와 희상은 안중에도 없었다. 물론 태정 또한 그러했다.
그런 일은 언제나 있어왔다.
일본의 보통 학교에 재학중인 생도들에게 타깃이 되어 남학생들은 얻어맞고, 여학생들은 저고리를 뜯기는 일은 주기적으로 되풀이되어 왔었다. 그러나 배지 강탈사건은 20여 년―이 애매한 햇수를 반올림을 한다면 30년이다―만에 처음이었다. 그래서 태정은 더욱 신중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앞으로 꼭 1달이 지나면 ‘그날’이었다. 너무 앞선 생각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날’과 관련된 사건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태정의 머리를 지배하는 것이었다.
* * *
점심때의 삼펜 회의로부터 딱 한 시간 후 희상은 바로 태정의 반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국사관 고의 생도회장의 연락처를 태정에게 알려주었다. 그사이 언제 어떻게 그쪽 회장의 케이타이 번호를 알아냈는지 조고의 회장은 희상의 재주에 감탄했다. 시간도 촉박했고, 국사관 쪽의 연락처는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개인의 전화 번호 하나 알아내는 것 따위 언뜻 보면 쉬운 것 같지만, 막상 하려들면 막막한 것이었다. 특히나 사생활이라면 히스테릭하다 싶을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우는 현대 사회에 말이다. 그런 어려움을 들먹이며 태정은 희상에게 어떻게 정보를 입수했는지를 물어보지만, 희상은 그냥 ‘이 정도쯤이야’라고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그의 능력을 슬쩍 드러낸다. 사실, 조총련 중급학교 시절의 동기가 일본 국적 취득 이후―하필이면―국사관에 다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용한, 어찌 보면 간단한 일이었다. 그 동기라는 녀석이 과거의 노출을 극히 꺼리고, 이쪽과는 거의 연락, 관계 두절의 상태였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말이다. 아무튼, 어떤 일이 주어지더라도 신속 정확히 처리해 내는 것, 그것은 바로 희상의 장기였다.
“내가 먼저 전화해 볼까 하다가, 장소라든가, 시간 논의, 그리고 면담 요청 이유에 대해서는 회장이 직접 해야 될 사항이라고 생각해서 하지 않았어.”
“그렇군. 그런 건 내가 해야겠지?”
당연한 걸 물어보는 태정은 회장으로서 별로 자각이 없어 보인다. 뭐 언제는 안 그랬냐마는, 경무 패거리에게 좆회장이라고 불리면서 보이는 반응이라는 것이 ‘뭐, 조 회장보단 임프레시브하군’ 하고 장난스레, 넉살좋게 넘기는 것으로 그만이다. 경무에게 그리 불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불쾌한 내색조차 하지 않았고, 오히려 유쾌해 한다. ‘태정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경무가 희상은 오히려 딱해 보일 정도였다.
“그건 당연히 회장인 네가 해야 하는 거야.”
“알아, 알아 내가 삼펜 회장으로서 별 생각 없이 행동하고 있다는 거지? 하지만 희상이 네 앞에서나 이러지 경무 앞에서 이러겠냐…….”
태정은 봐 달라는 듯 희상에게 히죽 웃어 보인다.
녀석의 말투와 행동거지는 항상 느긋하고 긴장감이 없었다. 오늘 같은 긴급상황에서조차 말이다. 경무는 저 녀석의 저런 분위기에 많은 사람들이 속아넘어간다며 분노했다.
태정을 유심히 지켜보면 녀석의 나직한 한마디(화를 낼 때조차 목소리의 톤이 올라가지 않는다) 가벼운 손동작 하나, 느슨히 웃고 있는 눈이나 입의 모양이 ‘자신감과 여유’에서 비롯되는 태도라고 보여진다. 하지만, 그것이 실로 내부의 자신감에서 비롯되는 건지, 아니면 그저 선천적인 것으로 정말로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인지 언제나 애매했다. 경무야 후자라고 단언하고 있었지만.
평소라면 태정의 웃음에 희상도 그냥 넘어갔지만 오늘은 틀렸다. 오늘 회의에서 드러내진 않았지만, 이 일에 대해 희상이 어느 쪽인가를 말하자면, 경무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일은 상대와 ‘해결’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고 단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만이 있을―당연히 있어야 하는―대국인 것이었다. 상대방에게 ‘돌려달라’고 정중히 묻는 것이라니… 조고생이라면 그런 걸 용납할 리 없었다.
“태정아 너 이 일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거 아냐? 이전에 있었던 군마 조고 여생도가 당했던 때가 한 달 전 일이야 그때 군마 조고 교장이 기자회견까지 했던 거 기억나? 뉴스까지 나오고 그랬던 거.”
“이런 배지 사건이 최후로 발생한 게 언제인지 기억해?”
희상의 질문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태정은 질문으로 질문에 응했다.
“이십 년은 넘지? 1969년 공식적으로 일본인에 의한 조선인 테러가 금지되었잖아. 하지만, 그 후로도 오륙 년은 지속되었다고 하던데…….”
“거의 80년 초까지 배지 강탈이 이어졌다고 해도 무방하지. 우리 작은 삼촌만 해도 자기 중급 고급학교 시절에는 항상 보통학교 녀석들이랑 싸우는 게 일이었다고 자랑스레 떠들거든. 하핫.”
무엇이 웃긴 건지 삼촌의 이야기를 하면서 태정이 지긋이 웃는다. 하지만, 희상은 그것이 쓴 웃음인 것을 안다.
확실히 조고생들은, 가족이나 일가친척, 총련 관계 주위 사람들에게서 항상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녀석들은 한주먹 감이었다’라든가, ‘자신들은 일당백으로 싸웠다’느니,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보통고 애들이 약해서 싸울 맛이 안 났다’라든가….
대개의 이야기에서 그들은 불패신화의 주인공이었다. 기억을 떠올리며 희상의 입에도 덩달아 쓴웃음이 배어 나왔다. 그때나 지금이나 현실은 별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제 김영일은 반항다운 반항도 못해보고 흠씬 얻어맞고 배지를 빼앗겼다.
이게 현실이다.
“조고생에 대해 테러가 빈발하고 있어 그렇지?”
태정은 웃던 얼굴을 굳히면서 동의를 청하듯 희상을 바라본다. 이럴 때의 태정은 조금 조고의 회장답게 보인다. 조금 더 잦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여느 때와 그리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이는데… 희상은 그대로 그 생각을 드러낸다.
“횟수가 늘어나긴 했지만 이지메 방식은 거기서 거기라 위협적이진 않아. 배지 사건도 냉정하게 보면 기실 조고의 명예 실추 때문에 그렇지 뭐 치명적이라곤 할 수 없지. 배지 사건까지 다시 등장했겠다 이젠 더 나빠질 것도 없어 보이는데….”
“아니, 상당히 좋지 않아 냄새가 나 냄새가…….”
희상은 무슨 냄새이냐고 물으려다 묻지 않았다. 심상치 않은 냄새라든가 안 좋은 냄새, 불길한 냄새 뭐 그런 손쉽게 짐작할 수 있는 말이려니, 그렇게 간단한 추측으로 넘겨 버린다. 일단 시급한 건 국사관고에 연락하는 것이다. 또한 국사관에 연락을 취해도 염려되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국사관 녀석들, 발뺌하면 어떻게 하지?”
“발뺌하진 않을 거라 봐. 문제는 그쪽에서 원만한 해결을 거부할 경우인데…그쪽에서 도발해 왔는데, 그대로 꼬리 내리진 않을게 자명하지. 조용히 해결보긴 이미 글렀어. 그냥 지나가진 못해.”
어떤 감정도 배제된 목소리로 조용히 중얼거리듯 태정은 말했다. 그것은 어떤 확신에 찬 어조보다, 어떤 비장한 각오보다, 어떤 날이 선 기합보다, 더 큰 소리로 희상의 귀에 울렸다. 언제나와 같은 느슨한 태정처럼 보이지만, 여느 때와는 틀리다. 그것은 예언과 같은 느낌을 주어 섬뜩하기까지 했다. 예언가의 예언에는 언제나 우매한 질문이 따른다. ‘오 그러면 예언자시여, 그 다음은 어떻게 되나이까?’ 하는 그런 신화의 한 장면 같은 영상을 떠올리며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어리석은 인간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희상은 불가항력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피를 보겠지… 이건 피냄새가 나.”
아까의 그 냄새라는 것이 이거였나.
태정이 ‘냄새가 난다’고 할 때 희상은 그저 관용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었다. 무언가 확실하지 않을 때, 정확한 근거가 없을 때, 대충 얼버무릴 때, 하지만 쓸데없이 자신의 직감을 과시하거나 의미심장한 뉘앙스를 풍기고 싶은 경우 사용하는 그런 말이려니 했는데… 아까 태정이 중얼거렸던 냄새가 피의 그것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저 긴장감 하나 없는 표정으로 피를 말한다. 그게 오히려 희상을 경직시켰다. 웃고 넘기려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피비린내가 콧속으로 스며드는 착각마저 드는 것이다. 그 스멀한 느낌을 떨쳐내기 위해 희상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설마…’라고, 태정의 말을 부정했다.
“그래, 피라니… 너무 심각했지? 푸핫…, 근데 희상이 너 좀 굳어 보이던데 무서웠냐?”
희상의 진지한 반응에 무거워진 공기를 녀석이 경쾌한 웃음으로 날려버린다(이거야 말로 얼버무리는 건지 모른다). 전화부터 걸어야겠다고 중얼거리며 태정이 케이타이를 꺼내 들었지만, 마침 수업 들어가는 선생이 수업시작 종을 못 들었냐며 교실로 들어가라고 주의를 주었다. 공교롭게도 선생은 이번시간 희상 네 반 수업 담당이라 희상은 태정의 전화 통화를 듣지 못하고 자신의 반으로 발길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방과 후 회의실에서 모이기로 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태정과 국사관고 회장과의 통화가 상당히 궁금해지는 희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