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1권) (1/28)

CONTENTS

1권

# zero.

김영일이가 학교 배지를 국사관고國士館高의 어떤 놈들에게 빼앗겼다면서 학생회 부회장 리희상에게 긴급 상담을 요청한 것이 오늘 아침이었다고 한다. 학교 배지라는 것이 학교의 상징이고 얼굴이라지만, 조고朝高 : 조선 고급학교, 일명 조총련 고교 학생들에게는 일본의 여타 고등학교들에서 그것이 갖는 의미를 상회, 초월한다. 보통 학교에서라면 배지의 분실로 인해 생도회에 상담 의뢰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물론, 조고가 아무리 배지를 중시하는 학풍이라지만 조고의 학생회 역시 배지의 분실 따위에는 관여치 않는다. 또한, 보통의 학교라면 배지라는 것이, 빼앗을 만한 무엇 즉, 탈취 혹은 포획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었다. 혹여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학교 전체에 파문이 일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조고생 김영일이의 배지는 분명 그런 대상으로 간주되어 강탈당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조고를 이끌어 나간다는 삼펜三pen:조고 학생회의 별칭, 범위를 더 좁혀 조고 학생회 내의 핵심 삼인三人을 가리키기도 했다이 간부를 긴급 소집할 정도의 심각한 문제로 여겨지고 있었다. 배지 하나가 국사관고 녀석에게 강탈되었다는 소식이 학교에 퍼지게 된다면 그것은 조고 전체를 분노와 흥분으로 몰아넣을 충분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김영일의 처신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사건은 김영일 개인에 국한되어 끝나는 일이 아니었고, 조고 전체에 대한 노략 행위요 적대적 행동으로 간주되기에 충분했다.

조고 학생회는 김영일 사건의 파장이 더 이상 커지기 전,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조고 학생회(말하자면 생도회이다) 부회장 리희상은 김영일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즉시 삼펜의 우두머리인 태정을 호출했고, 태정은, 삼펜三pen의 최고 의사 결정권을 가진 삼인三人 만의 회합을 점심에 가졌다. 회합에, 태정은 사건의 당사자인 김영일이를 제외시켰다. 보통 당사자는 참고인 진술을 위해 호출되기 마련이었지만 리희상을 통해 이미 정황이 파악된 태정은, 당사자가 있으면 오히려 대책 논의가 더뎌질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 의해 그를 제외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사건의 핵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당사자 김영일이 대책 논의에서 제외된 이면의 이유는 삼펜 임원이 아닌 그가 삼펜 내부의 사정을 알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