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사냥이 끝난 후 사냥개는
외전 2
수면 아래로 깊이 가라앉았던 의식이 천천히 부상한다. 압살롬은 가장 먼저 느껴지는, 품 안 가득 안긴 따뜻한 체온과 매끄러운 살갗을 만끽했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익숙한 체향이 폐부 깊이 스며들었다. 전신이 온통 이환으로 충만해진 기분이었다.
압살롬은 몇 번이고 심호흡을 한 후에야 눈을 떴다. 시야 가득 이환이 들어찼다. 헝클어진 흑발과 희미한 홍조가 서린 뺨, 살짝 열린 입술을 차례로 훑었다.
세는 것이 의미가 없을 만큼 자주 본 모습이다. 그러나 압살롬은 질리지도 않고 이환을 감상했다.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이환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얼른 눈을 감은 압살롬은 절로 올라가려는 입가를 억지로 내렸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이환이 눈을 떴다. 공기의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그것을 알아차린 압살롬이 숨을 죽였다. 이불이 조금 움직인다 싶더니, 따뜻한 손이 압살롬의 뺨을 감쌌다.
“롬.”
낮게 긁히는 목소리였다. 압살롬의 속눈썹이 주인의 통제를 잃고 파르르 떨렸다. 이환이 압살롬의 눈매를 더듬었다.
이쯤에서 눈을 뜰까. 압살롬이 망설이는 때였다. 이환이 몸을 바싹 붙였다. 압살롬은 참지 못하고 이환의 몸을 팔다리로 친친 감았다. 보송보송하게 마른 두 개의 몸이 얽히고 스쳤다.
품으로 파고들자 이환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상냥한 손길이 압살롬의 등을 토닥거렸다.
“그만 일어나.”
압살롬은 대답 대신 머리를 흔들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간지러웠는지 이환이 다시 웃었다.
압살롬은 들썩이는 날가슴을 유심히 보다 고개를 숙였다. 연한 갈색의 유두를 입에 넣자 이환이 작게 숨을 삼켰다. 입술로 두어 번 우물거렸을 뿐인데, 익숙해진 돌기가 금세 단단해졌다.
혀끝으로 유두 근처의 돌기를 세심하게 핥는 때였다. 이환이 압살롬을 밀어냈다. 그의 손길은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압살롬은 타액에 젖어 번들거리는 유두를 아쉬운 눈으로 봤다.
압살롬의 머리카락을 들쑤신 이환이 곧바로 침대를 벗어났다. 그는 창으로 다가가 커튼을 걷었다. 방 안이 단숨에 밝아졌다. 압살롬은 빛 속에 선 이환을 응시했다.
단단한 어깨와 단련된 등을 따라 미끄러진 시선이 유려하게 빠진 허리에 머물렀다. 저곳에 느슨하게 걸쳐진 바지를 당장 벗겨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압살롬은 어느새 마른 입술을 저도 모르게 핥았다. 그것을 본 이환이 혀를 찼다.
“이 색골 드래곤이. 욕망이 거세된 채 태어났다는 거, 다 거짓말이지?”
압살롬은 대답 대신 방긋 웃었다. 정결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다. 이환이 헛웃음을 흘렸다.
“일어나기나 해. 오늘 할 일 많다는 거 알잖아.”
이환이 압살롬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압살롬은 그것을 잡고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좀 더 노닥거리고 싶었지만, 이환의 말대로 오늘 해야 할 일이 제법 많았다.
이불을 벗어난 압살롬이 바닥에 발을 딛는 때였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자 이환이 압살롬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압살롬은 금세 멀어지는 이환을 붙잡아 좀 더 오래 입술을 맞댔다.
***
방에 딸린 욕실에서 가볍게 씻고 나온 압살롬은 부엌으로 향했다. 거실에 있는 욕실 쪽에서 물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압살롬은 그 소리를 들으며 아침 식사 준비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환이 부엌에 들어왔다. 그는 드레싱을 만드는 압살롬의 옆에서 양상추를 씻었다.
어느덧 부엌 안에 달콤한 냄새가 감돌았다. 이환이 오븐을 곁눈질하며 물었다.
“뭐 만들고 있어?”
“크루아상이요. 저번에 이환이 먹고 싶다고 해서 한번 시도해 봤어요.”
그때 타이머에서 소리가 났다. 이환은 움직이려는 압살롬을 말렸다.
“내가 꺼낼게. 넌 오믈렛이나 마저 만들어.”
장갑을 낀 이환이 오븐을 열었다. 압살롬이 불안한 얼굴로 그를 주시했다. 이환은 프라이팬을 가리켰다.
“오믈렛 탄다.”
아무리 주방 일에 재능이 없다 해도 오븐에서 빵 꺼내는 정도는 할 수 있다. 이환은 노릇노릇 구워진 크루아상을 접시 위에 놓았다. 모양도, 부풀어 오른 정도도 전부 이환이 기억하는 것과 비슷했다.
이 세계에도 페이스트리는 있지만 꼭 집어 크루아상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었다. 그것이 아쉬워 압살롬에게 말했었는데, 오늘 이렇게 번듯한 결과가 이환의 눈앞에 등장했다. 잠깐 연습한다고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몰래 어디서 연습이라도 한 듯했다.
오믈렛과 샐러드, 크루아상 그리고 따뜻한 차로 아침 식사가 시작됐다. 이환은 크루아상을 쭉 찢어 입에 넣었다. 버터의 풍미와, 바삭하고 촉촉한 두 가지 식감이 동시에 느껴졌다.
이환의 표정에서 흡족함을 읽은 압살롬은 그제야 식사를 시작했다.
오늘은 올해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들은 매년 이 시기에는 압살롬이 자랐던 작은 집에 돌아와 대청소를 했다.
사실 대청소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이 집에는 선대의 마법이 걸려 있으므로, 설령 수백 년을 방치한다 해도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질러진 물건을 정리하고, 쓰지 않는 물건을 버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아침 식사를 마친 그들은 먼저 방으로 향했다. 이불을 걷어 볕에 넌 후, 옷장을 뒤져 입지 않는 옷을 꺼냈다. 두 사람 모두 옷에는 별 관심이 없는 터라 옷장 정리는 금세 끝났다.
그들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창고였다. 여행 중에 생각 없이 사 모은 물건이 전부 이곳에 있었다. 이중 쓰지 않는 것을 분류하며 한나절을 보냈다.
잡지와 신문을 묶어서 버리는 것으로 정리가 끝났다. 이환은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오후였다.
“이제 슬슬 저녁 식사를 준비해야 할 것 같은데.”
“어느새 시간이……. 배고프지 않아요?”
“아침을 늦게 먹어서 그런지 괜찮아.”
이환과 압살롬은 대화를 나누며 부엌으로 향했다. 아침과는 달리 이것저것 만들 것이 많았으므로 앞치마를 걸친 후, 서로 상대방의 끈을 묶어 줬다.
압살롬은 선대 드래곤 안드레아스가 만들었다는 식품 저장고―이환이 냉장고라고 부르곤 하는―에서 재료를 추렸다. 이환이 그것을 씻고 손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맛있는 냄새가 집 안을 가득 채웠다.
고기를 다져 넣은 파이가 오븐에서 구워지고, 프라이팬 위에서는 생선전이 노릇노릇 익어 간다. 이환은 냄비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클램차우더를 눋지 않게 저었다. 그 옆에 선 압살롬은 튀김을 익숙하게 건지고 있었다.
문득 이환은 수백 년 전, 성물을 찾던 시절의 한때를 떠올렸다. 어느 항구도시의 시장에서 생선을 보며 이 세계에서의 생활에 대해 새로이 마음먹었던 기억이었다.
당시의 발상은 오늘날 이토록 자연스러운 일상이 됐다.
완성된 음식 중 절반을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았다. 나머지 절반으로 저녁 식사를 마친 이환과 압살롬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빠르게 샤워를 마친 이환이 먼저 침대에 들어갔다. 마법으로 적정 기온이 유지됨에도 불구하고, 혼자 있는 침대는 차가웠다.
협탁에 놓인 추리소설을 집어 들었다. 어젯밤 압살롬의 방해로 읽지 못했던 책이었다. 첫 장을 펼치자 새 책 특유의 종이 냄새와 잉크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인기가 좋아 급하게 증쇄한 책이라는 서점 주인의 자랑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이환은 책을 어루만졌다. 일일이 손으로 받아써서 만들었던 필사본과 달리, 흐트러짐 하나 없는 글자가 어딘지 냉랭하게 느껴졌다.
고가의 필사본은 금속 활자와 인쇄술의 발달에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말과 마차만이 교통수단이던 시대가 지나, 자전거가 등장한 지 오래였다. 다음 세기에는 자동차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때마침 압살롬이 침실에 들어섰다. 이환은 책을 다시 협탁에 되돌렸다. 손을 뻗자 압살롬이 자연스럽게 수건을 건넸다. 이환은 압살롬의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쌌다.
긴 은발을 살살 문질러 말리던 중, 압살롬과 눈이 마주쳤다. 섬세한 눈매가 염려와 애정을 담고 부드럽게 이지러졌다.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요?”
“그냥…… 시간이 빠르다는 생각.”
“그건 다행이군요.”
아름다운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환은 눈을 감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자 언제나처럼 설렜다. 익숙하게 입을 열자 압살롬의 혀가 느리게 파고들었다.
호흡을 나누듯 천천히 키스한 압살롬이 입술을 뗐다. 이환은 압살롬의 젖은 입술을 닦으며 물었다.
“뭐가 다행인데?”
“시간이 빨리 간다는 건, 나와 있어도 지루하지 않다는 뜻이잖습니까.”
이환의 투박한 손이 압살롬의 뺨을 감쌌다. 고개를 기울여 그 손에 입 맞춘 압살롬이 이환 위에 지워졌다. 청람의 눈동자에 욕망이 옅게 깃들었다. 이환은 압살롬의 머리카락을 일부러 거칠게 문질렀다.
“수건 두고 와.”
압살롬은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다른 때라면 좀 더 입질을 시도하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젖은 수건을 빨래 바구니에 넣은 압살롬은 재빨리 침대로 돌아갔다. 이불을 들추고 파고들자 이환이 팔을 벌려 그를 맞이했다. 압살롬은 이환의 뺨에 키스했다.
“잘 자요, 이환.”
“잘 자, 롬.”
이환이 압살롬의 뺨에 키스를 돌려줬다.
***
다음 날, 동이 트기 한참 전에 깨어난 이환과 압살롬은 나갈 채비를 했다. 차가운 겨울바람에 대비해 두툼하게 차려입은 후 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섰다.
사위는 아직 검었다. 그들은 산을 올라갔다. 목적지인 절벽에 다다랐을 즈음, 동녘 하늘이 조금 뿌옇게 변했다.
이환과 압살롬은 절벽 근처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압살롬이 곧바로 음식 바구니를 열었다. 어제 둘이서 함께 만들었던 음식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바구니 자체에 마법을 걸어 둔 덕분에 음식은 갓 만든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압살롬은 뜨끈뜨끈한 파이를 꺼내 이환에게 건넸다. 그동안 바구니에서 병을 꺼낸 이환이 클램차우더를 컵에 따라 압살롬에게 내밀었다.
새벽부터 움직인 터라 배가 많이 고팠던 이환은 빠르게 바구니를 비워 나갔다. 가지고 온 음식을 싹 먹어 치운 그들은 뜨거운 차를 마시며 동쪽 하늘을 지켜봤다. 어느새 맞잡은 손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천천히 퍼진 빛무리가 어둠을 사른다. 적금빛의 태양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태양이 완전히 떠오른 순간, 이환은 압살롬을 돌아봤다. 언제부터 이쪽을 보고 있던 것인지 곧바로 압살롬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기울였다. 다정한 입맞춤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이환은 웃는 얼굴인 채 말했다.
“올해도 잘 부탁해.”
이로써 둘이 함께 맞이하는 627번째 새해가 밝았다. 몸을 일으킨 이환은 압살롬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난 압살롬이 이환의 몸에 붙은 검불을 떼어 줬다.
살뜰한 손길 때문인지, 졸음이 이환을 엄습했다. 이환은 작게 하품했다. 그러자 압살롬이 웃으며 이환의 손을 잡아끌었다.
“집에 가서 좀 더 자요, 우리.”
한 손에는 이환의 손을, 다른 한 손에는 바구니를 든 압살롬이 가벼운 걸음을 옮겼다. 이환은 그를 곁눈질했다. 세상을 다 가진대도 지금의 압살롬보다 더 즐거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이환은 익숙한 그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세상이 전부 바뀐다 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분명 있다. 예를 들어 압살롬의 애정이라거나, 그와 함께하는 내일 같은 것. 미소 지은 이환이 압살롬과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토끼 사냥이 끝난 후 사냥개는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