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9/10)

토끼 사냥이 끝난 후 사냥개는

외전 1

사르딜랴는 해안가에 위치한, 특출할 것 없는 조용한 도시다. 그 도시의 한구석에 작은 고서점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래된 책이라는, 영 장사가 될 것 같지 않은 상품을 다루는 탓에 드나드는 손님도 거의 없는 가게였다.

슬슬 정오로 향해 가는 시각, 고서점이 문을 열었다. 굳게 잠긴 자물쇠를 연 주인은 먼저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오래된 종이에서 풍기는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창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다.

환기하는 동안 내부 청소를 마친 주인은 빗자루를 들고 고서점 앞으로 나갔다. 밤사이 떨어진 낙엽이나 취객이 버리고 간 쓰레기 등을 쓸다 보면 한 무리의 아이들이 길을 내달려 간다. 그중 몇몇 아이들이 그를 향해 팔을 흔들었다.

“이환 형!”

“형, 안녕하세요!”

고서점 주인, 이환은 요란스럽게 인사하는 아이들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표정은 무뚝뚝한 그대로라 어딘지 우스운 모양새였지만, 아이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지 히히 웃었다.

그때 고서점에 이웃한 가게인 꽃집의 창문이 열렸다. 그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 아닌 압살롬이었다.

“이환, 점심 먹어야죠.”

아이들은 입을 헤 벌린 채 압살롬을 응시했다. 몇 번을 봐도 정신없이 보게 되는 미모였다. 그런 그들과는 달리 이환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압살롬의 말에 응수했다.

“그래.”

앞치마를 걸친 압살롬의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여서 이환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그가 웃기만 한다면 이유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압살롬도 따라서 미소 지었다.

“어제 이환이 먹고 싶다고 했던 해산물 스튜 만들었으니까 얼른 와요. 식으면 맛없습니다.”

“바로 갈게. 너희들도 그만 놀러 가라.”

덧붙인 말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움찔거리더니 자기들끼리 뭐라고 속닥거렸다. 그들 딴에야 이환에게 들리지 않도록 말하는 것일 터다.

“거봐. 둘이 사귀지.”

“우리 형은 둘이 친구라던데?”

“그걸 믿어?”

그러더니 이환과 눈이 마주치고는 어색하게 웃는다. 이환은 심드렁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다시 요란스럽게 인사한 아이들이 달음박질쳐 멀어졌다.

“인기 많네요, 이환.”

그들의 모습을 창문 너머에서 지켜보던 압살롬이 말했다. 이환은 고개를 저었다.

작년쯤, 한밤중까지 귀가하지 않는 아이들을 찾기 위해 온 동네가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확인하지 못한 곳은 도시 외곽의 야산뿐인 상황. 그러나 밤의 산은 성인에게도 위험한 곳이었다.

이환은 찾으러 들어가겠다고 울부짖는 부모를 말린 후 산으로 진입했다. 밤눈이 밝은 데다가, 신체조건이 보통 사람보다 월등하기에 할 수 있는 모험이었다. 그리고 산 중턱에서 자기들끼리 붙어 오들거리는 아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일 이후 인근 주민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때때로 압살롬이 일등 사윗감이니 뭐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불만스럽게 중얼거리는 것 이외에는 전부 마음에 들었다.

고서점에 들어간 이환은 먼지 묻은 손을 씻은 후 압살롬의 꽃집으로 건너갔다. 그를 맞이한 압살롬은 가게 문에 ‘식사 중’ 팻말을 건 뒤 문을 닫았다.

찰칵.

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다. 압살롬이 곧바로 돌아서는 것과 동시에 이환이 가까워졌다. 압살롬이 이환을 맞이해 입술을 열었다.

몇 번인가 각도를 바꿔 가며 스치듯 닿은 입술이 이윽고 깊게 맞물렸다. 셀 수도 없이 나눈 입맞춤이지만 여전히 가슴 떨리는 순간이다. 혀가 얽히고 숨이 섞였다. 어느새 밀착한 몸은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같은 온도로 달아올랐다.

흑발을 간질이듯 유영한 압살롬의 손가락이 이환의 목덜미를 스쳤다. 이환은 목을 움츠렸다. 그 바람에 둘의 입술이 떨어졌다. 이환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해산물 스튜.”

“오늘은 이환이 먼저 시작했잖아요.”

“식으면 맛없다며.”

이환은 그렇게 말하며 압살롬의 젖은 입술을 슬쩍 훔쳤다. 아, 정말. 신음처럼 중얼거린 압살롬이 한숨을 쉬었다.

“못돼졌어요, 이환.”

“못되게 군 거야.”

실쭉 웃은 이환이 보란 듯이 허리를 툭툭 두드렸다. 아무래도 어젯밤에 대한 항의인 듯했다. 밤새 끈질기게 달라붙었다는 자각이 있는 압살롬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식탁으로 향하는 이환을 얌전히 따를 뿐이다.

바다를 면한 사르딜랴는 해산물을 이용한 요리가 발달했는데, 압살롬은 그것을 응용해 이환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어 내곤 했다. 이환은 홍합 껍데기를 건져 옆으로 치우고 국물을 떴다. 이환이 흡족한 기색이자 내내 그를 지켜보던 압살롬이 미소 지었다.

압살롬은 바구니에 담긴 빵을 집어 쪼갰다. 이환이 건너오기 직전 오븐에서 꺼낸 빵은 아직 뜨거웠다. 그는 희고 보들보들한 단면에 버터와 잼을 듬뿍 발라 이환에게 내밀었다. 이환은 그것을 익숙하게 받아먹었다.

“너도 먹어야지.”

이환도 빵에 버터와 잼을 발라 압살롬에게 건넸다. 기다렸다는 듯이 받아먹은 압살롬이 그제야 식기를 들었다. 스튜를 국자로 뜨며 그가 말했다.

“내일 새벽에 꽃 시장에 갈 생각이에요. 가는 김에 근처 곡물 시장도 좀 들러 보게요.”

“같이 가.”

“해도 뜨기 전에 출발할 거라……. 이환은 자고 있어도 괜찮은데요.”

말은 저렇게 하지만 여기서 이환이 ‘그럼 안 가.’ 같은 말을 하면 어깨가 축 처질 게 뻔했다. 대신 이환은 다른 식으로 받아쳤다.

“그럼 네가 일찍 재워 주면 아무 문제도 없겠네.”

“아…….”

이환은 갈팡질팡하는 압살롬을 모르는 척하고 식사를 계속했다.

압살롬과의 섹스는 좋아한다.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고 치닫는 쾌락 속에 빠져 있다 보면 이러다 죽어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환은 밤의 압살롬을 보는 것이 좋았다. 이환을 정신없이 휘두르고 뒤흔드는 압살롬의 눈빛은 낮보다 흉포하고 어둡고 간절했다. 이환은 이쪽이 그의 진심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곤 했다. 그래서 더욱 압살롬이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다. 가끔씩은 편하게 잠만 자는 밤이 필요했다. 압살롬이 원하는 눈으로 보기만 해도 홀랑 넘어갈 자신을 아는 이환은 가끔 이렇게 사전에 못을 박곤 했다.

이윽고 압살롬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환의 입매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식사 후의 설거지는 이환의 몫이었다. 깨끗해진 그릇을 엎어 두고 돌아서자 압살롬이 이환의 젖은 손을 수건으로 감쌌다. 물기를 열심히 닦으며 압살롬이 물었다.

“오늘 새로 책이 들어왔다고 했죠? 이따가 데리러 갈게요.”

“괜찮…….”

“해 질 녘에 가겠습니다.”

압살롬이 드물게 말을 잘랐다. 표정도 단호했다. 사실 이환으로서도 할 말이 없는 것이, 새로 들어온 책의 내용을 확인한답시고 잡았다가 그대로 독서에 돌입한 적이 많기 때문이었다.

“알았어.”

백기를 들자 압살롬이 화사하게 웃었다. 이환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춘 그가 말했다.

“그럼 이따가 봐요.”

이환은 다시 고서점으로 건너가며 이마를 슬쩍 어루만졌다. 압살롬의 입술이 닿았던 부분이 괜히 간질거렸다.

어느덧 해가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압살롬의 예상대로 책에 정신이 팔렸던 이환은 글자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어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압살롬이 오겠다고 말했던 게 떠올랐다.

실내에는 이환의 기척뿐이었다. 그러나 과거에도 압살롬의 기척을 놓쳤던 적이 있는지라 이환은 확인차 그를 불렀다.

“롬?”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환은 주변을 대충 정리한 후 고서점을 나섰다. 얼마 가지 않아 압살롬이 오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꽃집 안에 손님이 와 있었다. 익숙한 불청객을 본 이환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압살롬과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이환의 등장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눈치였다. 압살롬이 그럴 리 없으므로 이환은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꽃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 왔어, 롬.”

불청객이 이환을 돌아보았다. 화려하게 넘실거리는 짙은 금발 아래 미끈한 얼굴이 드러났다. 호슈아 그라시안. 이 도시의 상권을 장악한 대부호의 외아들이었다.

삼 년 전, 이환과 압살롬이 몬스터에게 습격당한 호슈아를 구해 준 적이 있었다. 그때 압살롬에게 반한 호슈아는 틈만 나면 꽃집에 찾아와 노닥거리곤 했다.

“어서 와, 이환.”

호슈아가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환은 무뚝뚝한 표정인 채 손을 들어 보였다. 나름대로 인사한 것이었으나 호슈아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는 이환의 손목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넌 왜 늘 그렇게 매가리가 없어. 좀 이렇게 힘차게 흔들어 보라고.”

이환은 가을 낙엽처럼 펄럭이는 손을 내버려 뒀다.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의미 없는 행동은 압살롬이 말리고서야 멈췄다.

그 뒤로도 온갖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호슈아는 한참이나 지나서야 꽃집에서 나갔다. 이환과 압살롬은 마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예정대로였다면 지금쯤 집에 도착해 함께 요리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이환은 압살롬에게 제안했다.

“오늘은 밖에서 저녁 먹자.”

“이환이 좋아하는 연어 스테이크를 만들려고 했었는데…….”

안타깝다는 듯 압살롬이 중얼거렸다. 연어 스테이크는 아쉽지만 내일 새벽부터 움직일 것을 생각하면 먹고 들어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들은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식사를 마치고 귀가하는 길은 조용했다. 이환은 곁에서 걷는 압살롬을 올려다보았다. 언젠가의 상처가 사라진 얼굴에서는 백 년에 가까운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육신의 시간이 고정된 이환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환은 조용히 압살롬의 손을 잡았다. 잠시 움찔거렸던 압살롬이 이내 마주 잡아 왔다. 하얀 뺨에 희미하게 떠오른 홍조를 본 이환이 웃었다. 이 역시 달라지지 않은 것들 중 하나였다.

***

다음 날 이환과 압살롬은 동이 틀 무렵에 집을 나섰다. 대량의 꽃을 싣고 돌아올 것이므로 짐마차를 몰았다. 마부석에는 압살롬이 앉았고 이환은 그 옆에 자리했다.

이환은 압살롬이 처음 마부석에 앉았던 날을 떠올렸다. 그때는 무심코 웃어 버렸을 만큼 어울리지 않았는데 지금은 제법 그럴싸했다.

“왜 웃고 있나요?”

“이곳에 오길 잘한 것 같아서.”

이 도시에 정착한 것은 일종의 변덕이었다. 계속된 여행에 조금 질렸던 차에 호슈아를 만나 이 도시까지 동행했다가 그대로 눌러앉아 버린 것이다. 호슈아가 귀찮게 굴기는 하지만, 그래도 압살롬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볼 수 있으니 여러모로 이득이었다.

꽃시장에 도착한 그들은 오전 내내 돌아다니며 꽃을 구매했다. 어느새 오전이 지나 점심 먹을 시간이 됐다. 그들은 꽃시장에 올 때마다 들르는 식당으로 향했다. 퉁명스러운 주인장이 스테이크를 기가 막히게 구워 주는 곳이었다. 압살롬은 이환의 무뚝뚝한 얼굴에 희미하게 어린 즐거움을 알아보았다.

“내가 한 음식과 그 집 스테이크 중 뭐가 더 맛있나요?”

이환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압살롬은 제법 진지한 얼굴이었다.

“넌 가끔 이상한 데 집착해.”

“집착이라니요? 권리입니다.”

빨리 대답하라는 듯, 압살롬이 이환의 옷자락을 잡고 슬쩍 흔들었다. 이건 또 어디서 배워 온 교태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묘하게 잘 어울렸던 터라 이환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그야 당연히…….”

문득 압살롬의 기대에 찬 얼굴이 보였다. 그냥 스테이크가 더 맛있다고 할까. 이환이 조금은 짓궂은 생각을 하는 때였다.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랜만에 듣는 와이번의 울음소리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것은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일반적인 경우 몬스터는 압살롬에게 접근하지 않는다. 사실을 몰랐을 때에는 그가 몬스터의 왕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서야 몬스터가 신이 직접 빚은 압살롬을 본능적으로 꺼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저 와이번의 접근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허리춤에 찬 칼을 확인한 이환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소리가 워낙 작았던 터라 이환과 압살롬 이외에는 들은 자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와이번의 속도라면 이곳까지 금방 당도할 것이다.

이환의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법 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설마…….”

사람들 사이로 공포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두리번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한 곳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기다!”

와이번 한 마리가 빠른 속도로 하늘을 가른다. 그 방향이 정확히 꽃시장 쪽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이환은 압살롬에게 다가붙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역시?”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압살롬이 수긍했다.

약 십 년 전, 와이번 사육에 성공한 자가 있었다. 그자는 왕에게 와이번을 바친 대가로 준남작의 작위를 수여받았다. 이후 와이번을 길들이려는 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와이번 사육은 의외로 간단하다. 와이번은 알에서 깨어나 처음 보는 대상을 부모로 생각하므로, 알을 손에 넣기만 하면 됐다. 지금 가까워지는 저 와이번도 그렇게 알을 잃어버린 것일 터다.

이윽고 와이번이 머리 위까지 당도했다. 하늘을 크게 선회한 와이번이 방향을 잡았는지 쏜살같이 내리꽂혔다. 날카로운 발톱이 노리는 끝에는 손수레를 가진 한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다급히 손수레를 끌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한발 늦은 와이번은 낡은 건물을 할퀼 뿐이었다. 부서진 건물 파편에 맞았는지 골목 안쪽에서 낮은 신음이 들렸다.

높이 날아오른 와이번이 다시 남자를 향했다. 한 번 놓쳤으니 다른 사람을 노릴 법도 한데, 와이번의 목표물은 변함없었다.

“저자인가.”

이환이 중얼거렸다. 어쩌면 남자의 손수레에 와이번의 알이 실려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알을 돌려주는 것이 사태 해결이 도움이 될 터였다. 이환이 발을 떼는 순간이었다. 와이번에게 몇 번이고 공격당한 건물 귀퉁이가 무너져 내렸다.

퍽.

예민한 귀가 미세한 소리를 잡아냈다. 이환과 압살롬이 마주 보았다. 남자의 당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런……. 저 멍청한 와이번이!”

골목 안쪽에서 손수레가 거칠게 밀려 나왔다. 와이번은 날개를 펄럭여 손수레 쪽으로 향했다. 그사이 남자가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와이번이 손수레에서 발견한 것은 깨져 버린 알이었다.

산란한 지 제법 됐는지, 알껍데기 사이로 제법 형상을 갖춘 새끼가 보였다. 와이번은 주둥이로 새끼를 건드렸다. 그러나 조금 바르작거리던 새끼는 금세 숨을 거두었다.

꽃시장에 와이번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금세 분노로 바뀌었다.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와이번은 사람이라면 발견되는 족족 이빨로 물어뜯고 발톱으로 파헤쳤다. 눈앞이 어두워진 와이번에게는 그들 모두가 자식을 해친 범인이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와이번 앞을 가로막았다. 이번에도 인간이었다. 와이번은 원한을 담이 이빨을 세웠다. 본능이 멈추라고 외쳤으나, 분노는 그것을 무시했다.

“정신 차려!”

퍽!

둔탁한 것이 와이번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일갈했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네 알을 훔친 자를 데려왔다.”

눈이 번쩍 뜨이는 말이었다. 와이번은 앞에 선 두 남자를 보았다. 한쪽은 기절한 상태였는데, 다른 한쪽이 그를 내밀었다.

“네 마음대로 해.”

와이번은 원수를 건네받자마자 지체 없이 물어뜯었다. 붉은 피가 흙먼지 앉은 땅 위에 후드득 떨어진다. 그러나 그자를 해치우고도 와이번은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 결국 발톱이 남은 한 사람에게까지 향하는 때였다.

“이환. 기다려요.”

저항할 수 없는 목소리가 와이번의 감정을 조금 가라앉혔다. 와이번은 목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천을 뒤집어써 얼굴은커녕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와이번은 그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두 신이 직접 빚은 피조물. 신의 권능을 이어받은 존재.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와이번이 그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때였다.

“그 녀석은 안 돼.”

뒷발에서 강렬한 고통이 전해졌다. 와이번의 비명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이환은 피 묻은 칼을 떨쳤다. 가능한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칼집으로 상대하려 했으나, 와이번이 압살롬을 공격하려는 순간 그럴 마음이 깨끗이 사라졌다.

“네 원수를 죽인 것으로 만족해라. 그 이상은 용납 못 해.”

피로 얼룩진 칼끝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리고 네 새끼도 데려가야지. 저대로 놔두면 잡아먹힐지도 몰라.”

세상에는 기력 보강에 좋다는 이유로 몬스터 새끼를 잡아먹는 인간도 있다. 위협적으로 목을 울리던 와이번은 결국 이환의 말을 받아들였다.

새끼의 시체를 문 와이번이 날아올랐다. 이환과 압살롬은 그 즉시 등을 돌렸다. 머리끝부터 가려 정체를 감추기는 했으나 이대로 오래 버티기는 어려울 듯했다. 그들은 재빨리 짐마차를 몰아 꽃시장을 벗어났다.

그들은 중간에 발견한 식당 앞에서 마차를 세웠다. 눈에 띄지 않으려면 집으로 직행하는 것이 좋았지만, 이환을 굶길 수 없다며 압살롬이 성화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음식이 나오길 기다리던 중이었다. 압살롬이 투덜거렸다.

“가장 편한 방법을 두고…….”

사실 압살롬이 제시한 첫 번째 의견은 마법을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이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 마법이면 쓴 티도 안 날 겁니다.”

“이곳에서는 마법 없이 살아 보자고 네 입으로 말했었잖아.”

대답은 그러했으나 지금의 진심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이환과 압살롬 양쪽 모두 알고 있었다.

이환은 과거의 어느 순간을 떠올렸다.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압살롬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이환은 아무렇지도 않게 몬스터를 상대하면서.”

압살롬이 중얼거렸다. 말투는 가벼웠으나 목소리는 무거웠다.

오랜 요양과 압살롬의 살뜰한 보살핌 덕에 이환은 건강을 되찾은 상태였다. 이옐라의 축복을 받아 노화하지도 않으니, 몬스터를 죽이지만 않는다면 이대로 영원한 생을 살아간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이환은 압살롬을 찬찬히 살폈다. 길게 흘러내린 은발이나, 생채기 하나 없이 매끄러운 피부는 처음 만났을 때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마주 보고 있으면 백 년 전의 사건이 거짓말 같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는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이것도 괜찮아질까. 이환은 잠자코 압살롬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압살롬이 익숙하게 맞잡아 왔다.

슬쩍 이환의 눈치를 살핀 압살롬이 다시 입을 뗐다.

“그러니까…….”

“그래도 안 돼.”

넓은 어깨가 축 처졌다. 이환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

다음 날 오후, 고서점에 앉아 책을 읽던 이환은 다급한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곧이어 문이 요란스럽게 열리더니 호슈아가 뛰어 들어왔다.

“너야?”

“뭐가.”

이환은 시선을 다시 책으로 되돌리며 심드렁하게 반응했다. 그러자 성큼성큼 걸어온 호슈아가 책을 빼앗았다.

“어제 꽃시장! 그거 너냐고!”

과연 대부호의 아들이라 소식이 빠른 모양이었다. 이환은 시치미를 뚝 떼고 무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팔십 년 된 책이라 조심해서 다뤄야 해.”

“아, 미안. 망가지면 물어 줄……. 아니, 그게 아니라!”

이환은 호슈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한숨을 쉰 호슈아가 책을 돌려주었다.

“그래, 넌 그런 놈이었지.”

호슈아는 의자를 끌어다 이환 앞에 앉았다. 이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책을 펼쳤다.

“야, 이환.”

“뭐.”

“어제 꽃시장에서 와이번을 물리쳤다는 거, 너 맞지?”

“뭐.”

“그렇게 대충대충 반응하지 말고! 옆 가게 가서 압살롬이라도 데려와야 하나.”

그제야 이환은 책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호슈아가 입매를 삐뚜름하게 끌어 올리고 빈정거렸다.

“압살롬 이름 말하니까 반응하는 것 좀 보라지.”

“연인이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이환의 얼굴은 말과는 달리 무뚝뚝했다. 연인 특유의 달콤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호슈아가 물었다.

“무슨 대답이 그래. 너희, 진짜로 사귀는 거냐?”

압살롬이라도 떠올린 것일까. 호슈아의 눈동자가 기대로 빛났다. 그것을 본 순간 이환은 강렬한 불쾌감을 느꼈다.

탁!

이환은 책을 카운터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책과 나무가 부딪치는 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거센 소리가 고서점 안에 울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나, 난…….”

호슈아가 어물어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짙은 금발 아래에 자리한 하얀 얼굴이 점차 붉게 변한다. 그 모습이 마치 어쩔 줄 모르는 아이 같았던지라 이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한참은 어린 청년을 상대로 이러는 자신이 마뜩잖았다.

결국 이환은 화제를 돌렸다.

“와이번?”

“어? 아, 응. 와이번…….”

호슈아는 이환이 한 일이 맞는지를 물어 왔다. 즉, 소문만으로는 와이번을 물리친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호슈아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어느 정도 확신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호슈아는 이환이 몬스터를 상대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 감춰 봤자 의미 없는 일이었다.

“내가 한 게 맞긴 하지만……. 그 소문이 벌써 여기까지 퍼졌어?”

자신의 능력을 긍정하는 일은 언제나 멋쩍다. 이환은 호슈아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호슈아가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이환, 너 곤란한 거지?”

“뭐?”

“전에 나 구해 준 것도 비밀로 하랬잖아. 이번에도 얼굴 가렸다면서. 정체가 알려지면 안 되는 거잖아. 안 그래?”

“뭐…… 그렇지.”

이환이 구세의 기사로 추앙받던 때도 그랬지만, 잘 훈련된 기사조차 혼자서 와이번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번 이야기가 퍼진다면 어떻게 될지, 이환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게다가 이환은 소란의 원인이 된 사람을 와이번에게 넘겼다. 빠른 해결을 위해서라지만 비난의 소지가 있는 행동이었다.

“알았어.”

생각에 잠겼던 이환은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벌떡 일어난 호슈아가 이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다 잘될 테니까.”

호슈아는 난데없는 소리를 한 후 몸을 돌렸다. 이환은 어안이 벙벙하여 그를 응시했다. 기분 탓인지, 고서점에서 나가는 호슈아의 등이 묘하게 비장해 보인다.

“뭐지?”

이환이 눈만 껌뻑이는 때였다. 다시 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압살롬이 들어섰다. 어딘지 불쾌해 보였던 얼굴이었다.

“방금 저자와 무엇을 한 겁니까?”

“와이번 이야기와…… 뭐 그런 것들.”

이환은 입을 다물었다. 부자연스럽게 끊어진 말은 이환 자신이 들어도 수상쩍었다. 그는 압살롬이 더 캐묻기 전에 팔을 뻗어 압살롬의 뒤통수를 잡았다.

눈을 깜빡인 압살롬이 뺨을 물들였다. 이내 다소곳하게 내리깔린 은빛 속눈썹이 이환의 심장을 간지럽혔다.

두 입술이 열린 채 자연스럽게 겹친다. 젖은 혀가 느릿하게 얽혔다. 이환은 긴 은발을 흐르듯 타고 내려와 압살롬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다른 손으로 귓가를 살살 간지럽히자, 낮게 신음한 압살롬이 은근슬쩍 이환의 허리를 어루만졌다.

이대로 가다가는 가게에서 판을 벌이게 생겼다. 이환은 입술을 떼고 압살롬의 손을 붙들었다.

“거긴 안 돼.”

단호하게 말하자 압살롬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환은 그를 달래듯 등을 토닥거렸다.

“영 수상한데요. 말하다가 갑자기 키스한 것도 그렇고.”

이환은 대답을 망설였다. 질투했다는 사실을 말하기 싫었을 뿐인데, 지금 생각하니 키스를 방책으로 삼았다는 것도 제법 부끄러웠다. 그가 입을 다물자 압살롬은 질문을 바꿨다.

“둘이 무슨 이야기 했어요?”

짙푸른 눈동자에 어두운 감정이 스쳐 지난다. 그것을 감추려는 듯, 압살롬은 젖은 입술을 미끄러뜨려 이환의 목덜미에 입 맞추었다. 이환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채 움찔거렸다.

“으……. 물어 놓고 이러는 게 어디 있어?”

“이환이 빨리 대답하지 않았잖습니까.”

긴 손가락이 이환의 셔츠 사이로 파고들었다. 아직은 말랑말랑한 유두를 손끝으로 농락하자 이환이 앓는 소리를 냈다.

“네 이야기 말고 달리 할 말이 있겠냐?”

유두가 완전히 곤두설 즈음 이환이 대답했다. 순식간에 압살롬의 얼굴에서 어둠이 걷혔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이환의 가슴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쉽네요. 이게 꼭 빨아 달라는 것처럼 귀엽게 튀어나왔는데.”

“가게에서 뭐라는 거야?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게다가 너, 할 일도 많이 남았잖아. 얼른 네 가게로 돌아가.”

이환은 투덜거리며 압살롬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가 사실을 깨닫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돌려보내고 싶었다. 이환에게 등이 밀린 압살롬은 못 이긴 첫 몇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이환의 바람과는 반대로, 압살롬은 이미 결론을 도출한 후였다.

“있죠, 이환.”

“없어. 빨리 가기나 해.”

툭 튀어나온 대답에 압살롬이 웃었다. 낭랑한 웃음소리에는 즐거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이환이 잠시 멈칫거리는 때였다.

“혹시 질투했습니까?”

결국 압살롬이 알아 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더 감출 것도 없었다. 그는 압살롬을 밀던 팔에서 힘을 뺐다. 그러자 돌아선 압살롬이 이환을 끌어안았다.

“질투해 주는 거야 기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건 알죠?”

이환 역시 압살롬의 마음이 변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별개였다. 잠시 말을 고르던 이환이 대답했다.

“넌 믿지만 다른 놈은 못 믿어.”

“……이환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압살롬은 이환을 끌어안은 채 카운터까지 걸어갔다. 이환은 그가 하는 대로 놔두었다. 엉금엉금 나아가는 걸음이 불편했지만 심적으로는 만족스러웠다.

그들은 카운터 안쪽에 나란히 앉았다. 그제야 압살롬은 이곳에 온 용건을 말했다.

“꽃시장에서 있었던 일이 소문으로 퍼지고 있습니다.”

“호슈아에게 들었어. 내가 한 거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대답했지.”

“만약 그가 배신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쉽게…….”

압살롬이 입술을 실룩거렸다. 아무래도 호슈아가 못 미더운 모양이었다. 이환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게 배신 축에나 들겠냐?”

이환에게 배신의 기준은 뤼시앵와 제국이었다. 그러니 호슈아가 사실을 떠벌리고 다닌다 해도 이환에게는 배신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아는 압살롬은 이환을 끌어안았다. 이환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괜찮아. 뭐, 괜찮지 않다 해도 떠나면 되는 거니까.”

이 마을에 정착한 것 자체가 변덕이었다. 상황이 나빠진다 해도 이주하거나, 다시 여행을 떠나면 그만이다.

“그러고 보니 호슈아가 다 잘될 거라던데……. 무슨 뜻인지 알겠어?”

“그가 정확히 뭐라고 말했습니까?”

이환은 호슈아와 나눈 대화를 기억나는 대로 이야기했다. 듣는 내내 입술을 실룩거리던 압살롬이 말했다.

“이환은 그저 마음 편히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알아서 할게요.”

압살롬이 이렇게 말했을 때 해결되지 않은 일은 없었다. 이환은 지금 느껴지는 온기나 만끽하기로 했다.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음에도 이환의 주변은 조용했다. 마치 소문의 진원지 자체가 사라진 듯한 양상이었다.

압살롬은 호슈아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주었다. 인근에서 가장 화려한 저택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십중팔구 저 금력을 이용하여 목격자의 입을 틀어막았으리라.

한정된 방식만을 활용할 수 있는 인간의 입장을 생각하면 효율적인 대처법일 것이다. 이환 몰래 마법을 사용해 그와 비슷한 결과를 내려 했던 압살롬은 그 부분만큼은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불쾌한 감각이 가시지 않았다.

이환의 연인은 압살롬이다. 그러니 이환을 보호할 우선권 역시 그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환을 위해 불쾌함을 억눌렀다.

저택에서 시선을 떼어 마을을 둘러보았다. 만약 그대로 소문이 퍼졌다면 어떻게 됐을까.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압살롬이었으나, 이 가정에 대해서만큼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회상만으로도 끔찍한, 이환의 지옥. 과거를 헤집던 압살롬이 발길을 돌렸다. 한시라도 빨리 이환을 보고 싶었다.

압살롬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이환부터 찾았다. 기척에 이끌리듯 부엌에 들어가자, 물을 마시던 이환이 그를 돌아보았다. 평온했던 표정이 압살롬을 확인하자마자 일변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압살롬은 이환을 끌어안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숨을 깊이 들이마시자 평화로운 향기가 느껴졌다. 이환은 캐묻는 대신 압살롬의 등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상냥하고, 지독하게 배신당했음에도 복수조차 꿈꾸지 않았을 만큼 선량한 사람. 설령 그때의 선량함이 주입된 것이었다 해도, 본성이 선하지 않았다면 그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소문이 퍼졌다면 이환은 그러한 부분으로 인해 다시 고통받았을 것이다. 타인의 부드러운 부분을 이용하는 것만은 세상 어느 생물보다 빠른 그들은 이환의 상냥함도 놓치지 않을 테니까. 압살롬의 눈동자가 혐오감으로 어두워졌다.

‘전부 없애 버릴까.’

원칙상 드래곤은 인간을 죽여서는 안 된다. 드래곤이 이옐라를 감시해 세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옐라가 봉인된 지금, 압살롬에게는 더 이상 중립이 요구되지 않는다. 압살롬이 인간을 몰살시킨다 해도 그에게 그 죄를 물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롬.”

압살롬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이환이 그를 불렀다. 압살롬은 방금 떠올랐던 생각을 지우고 나긋하게 웃었다.

있었다. 압살롬에게 죄를 물을 유일한 존재. 그는 이환에게 매달렸다. 그러자 나직하게 한숨을 쉰 이환이 압살롬의 등을 가볍게 때렸다.

“아파요.”

“또 쓸데없는 생각이나 했을 테니 좀 아파도 싸.”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환은 때린 곳을 살살 문질러 주었다. 사실 이환의 상냥함에 가장 많이 기대는 것은 자신일지도 모른다. 압살롬은 이환의 뺨에 입을 맞추며 그렇게 생각했다.

***

한동안 오지 않았던 호슈아는 계절이 바뀌고서야 다시 그들을 방문했다. 바빴는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표정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호슈아가 다른 때와는 달리 꽃집이 아닌 고서점으로 온 것도 이상했는데, 한술 더 떠 말없이 이환을 흘금거리기만 하고 있다. 그의 의도를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진 이환은 읽던 책에 집중했다. 그러자 호슈아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넌 손님한테 대접이 이게 뭐야?”

호슈아의 트집은 익숙하다. 이환은 편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책 살 거냐?”

“……책 안 사면 손님도 아니라고?”

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하, 내가 저런 걸…….”이라고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린 호슈아가 책장으로 다가갔다.

“산다, 사. 사면 될 거 아냐.”

아직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은 이 세계에서 책이란 필사본을 말했다. 게다가 문자 자체가 상류층의 전유물인 터라 책은 고가품에 속했다. 호슈아는 그러한 것을 몇 권이나 들고 카운터에 왔다.

“계산해.”

책을 카운터에 올려놓은 호슈아가 을러멨다. 이환은 계산하는 대신 책을 한쪽으로 밀어 치웠다. 호슈아가 버럭 소리쳤다.

“아, 또 왜!”

“어차피 안 읽을 거잖아.”

애초에 이환은 호슈아가 ‘손님 대접’이라고 말하니 그에 답한 것뿐이었다. 호슈아는 거칠게 머리를 들쑤셨다.

“내가 진짜……. 됐다.”

짧은 한숨과 함께 속내를 정리한 호슈아가 이환을 봤다. 그러더니 얼굴을 붉히며 괜히 헛기침했다. 아무래도 할 말이 있는 모습이었다.

“그, 잘 있었냐? 이상한 소문 같은 거 안 들렸을 테니 잘 지냈겠지?”

그제야 이환은 호슈아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방금 들은 저 안부 인사를 더하니 소문과 관련하여 그가 뭔가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다.”

이환의 입가가 희미한 미소로 물들었다. 그것을 본 호슈아가 얼어붙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쏟아 냈다.

“호슈아?”

호슈아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걱정스러웠던 이환이 그에게 다가가는 때였다. 압살롬이 고서점 안에 들어왔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왔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곧바로 이환에게 향했던 시선이 호슈아에게로 옮겨 갔다. 청람의 눈동자가 차가운 빛을 띠고 가늘어졌다. 압살롬의 등장으로 정신을 차린 듯 호슈아가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몸이 안 좋은 모양입니다.”

여전히 붉은 안색을 살핀 이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슈아가 압살롬을 보고 반응한 것이 신경 쓰였던 탓도 있었다. 하지만 호슈아 본인은 의견이 다른 모양이었다.

“나 멀쩡한데? 아픈 데 없어.”

그렇게 말한 호슈아가 압살롬을 곁눈질했다. 압살롬도 호슈아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환은 점점 심기가 불편해졌다.

“호슈아.”

이환이 부르자 호슈아와 압살롬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압살롬이 있는 쪽 뺨이 따가웠다.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고맙다. 오랜만이라 반갑기는 하겠지만, 얼굴은 나중에 봐도 되는 거잖아. 오늘은 몸이 안 좋아 보이니까 그만 들어가.”

“그, 그럼! 나중에 언제 둘이서 밥이나 한번…….”

이환은 압살롬을 슬쩍 봤다. 아무리 연인 사이라도 단순한 만남까지 제지할 수는 없다. 그래도 압살롬과 호슈아가 단둘이 만나는 것은 싫었으므로, 알아서 잘 대답하라는 뜻이었다.

이환이 기대한 대로 압살롬은 명쾌하게 대답했다.

“안 됩니다.”

“너무 집착하는 거 아냐? 그저 단순히 밥만 먹겠다는 건데.”

호슈아가 이환과 압살롬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일반적인 연애에 대해 잘 모르는 이환은 호슈아의 말에 일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내가 싫다는데.’

이환은 카운터 안쪽에서 나와 압살롬에게 다가갔다. 압살롬의 손을 잡자, 이환을 제외한 두 남자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안 된다고 하잖아.”

이환의 단호한 대답을 들은 호슈아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서점을 나갔다. 그를 전송하는 압살롬의 눈빛에 일말의 안타까움이 섞였다. 이환은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혹시 자신이 잘못 생각한 것일까. 압살롬이 이환 이외의 사람을 사랑할 리 없다. 그 부분에서는 믿고 있으나, 친구는 또 다른 문제였다.

“혹시 호슈아와 같이 식사하고 싶었던 거라면…….”

이환이 운을 뗐으나 불발로 돌아갔다. 별안간 압살롬이 그를 안아 왔기 때문이다.

“뭐야, 갑자기.”

“난 이환의 그런 멧돼지 같은 면을 참 좋아합니다.”

“……욕이냐?”

“좋아한다니까요.”

압살롬이 흡족한 듯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아무튼 압살롬이 좋다면 됐다고, 이환은 떨떠름하게 받아들였다.

***

다음 날, 호슈아가 다시 고서점을 찾아왔다. 시무룩한 얼굴이 이환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어쨌든 호슈아가 이환을 도와준 것은 맞다. 이환이 먼저 요청한 일은 아니니 따로 보답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밥 한 끼 정도 사는 것은 괜찮을 듯싶었다.

“이봐, 호슈아. 같이 밥 먹으러 갈까?”

오늘 압살롬이 마련한 점심 메뉴는 해산물을 듬뿍 넣은 로제 파스타였다. 그것을 먹지 못하는 것은 아까웠지만, 호슈아가 보답을 이유로 다시 압살롬에게 다가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래서 제안하자 호슈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싫어?”

“아, 아니! 좋아. 하지만 어제…….”

“어제 말한 대로 압살롬은 같이 못 가. 그 녀석은 오늘 바쁘거든.”

실망스럽겠지만 참으라고 덧붙이는 때였다. 입을 딱 벌린, 우스꽝스러운 표정의 호슈아가 눈에 들어왔다.

“너 설마 이제까지 내가 압살롬을 좋아한다고…….”

입으로 직접 들으니 더 기분 나쁘다. 이환은 손을 내저었다.

“알고 있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돼.”

“되긴 뭐가 돼! 대체 왜 그런 착각을 한 거야?”

이환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꽃집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것은 그렇다 치자. 그곳에서 호슈아는 늘 얼굴을 붉힌 채였다. 압살롬이 없을 때라도, 이환의 입에서 그의 이야기만 나오면 눈에 띄게 반응하곤 했다.

잡아뗄 걸 잡아떼야지. 이제 와 발뺌하면 누가 믿어 줄 것 같은가.

드물게 긴 설명을 늘어놓은 이환이 언짢은 기분을 담아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연인을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사실을 눈치챈 경위를 설명하다니. 수백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을 경험이 분명했다.

“아니, 야! 그건……!”

이환이 말하는 동안 입을 뻐끔거리던 호슈아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그때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제법 크게 났다.

“거기까지 하시죠.”

열린 문 사이로 압살롬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척을 통해 그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이환과는 달리 호슈아는 화들짝 놀랐다.

압살롬이 냉엄한 시선으로 호슈아를 직시했다. 호슈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알고 있어. 나도 안다고.”

호슈아가 돌아섰다. 오늘의 뒷모습은 패잔병처럼 쓸쓸해 보였다. 그가 나간 뒤, 이환은 압살롬을 향해 돌아섰다.

“타이밍 한번 좋다?”

빙긋 웃은 압살롬이 한술 더 떴다.

“눈치챘어요?”

“한두 번이어야 모르지.”

이전에도 압살롬은 이환에게 접근하는 사람이라면 무턱대고 경계했었다. 이번에도 같은 이유로 호슈아를 지켜봤을 것이 분명했다.

‘호슈아에게는 역효과일 텐데.’

오히려 시선을 받았다고 좋아할지도 모른다. 이환은 압살롬을 노려보았다. 저놈의 예쁜 얼굴이 문제였다. 좀 덜 예뻐도 괜찮을 것을, 쓸데없이 고와서 벌레들이 몰려들게 만든다.

“화났어요?”

은근슬쩍 다가붙은 압살롬이 이환의 뺨에 입술을 붙였다. 쪽, 하는 사랑스러운 소리가 책 냄새 가득한 고서점 안에 울렸다.

“이런다고 내가 풀릴 것 같아?”

“그래요? 그럼…….”

고개를 기울인 압살롬이 이환의 목덜미에 파고들었다. 밀색 피부 위를 붉은 입술과 은빛 머리카락이 미끄러진다. 이환은 흘러나오는 신음을 꾹 눌러 참았다.

“가게에서 무슨 짓이야.”

“이환의 기분이 좋아지는 짓이죠.”

“네 기분이 좋아지는 짓이겠지. 비켜. 할 일 많다고.”

이환은 압살롬의 얼굴을 붙잡아 밀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하면 압살롬도 슬쩍 물러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예 작정한 모양이었다.

압살롬이 혀를 내밀어 이환의 손가락을 느리게 핥았다. 손끝을 입술로 오물거리더니 입을 벌린다. 이환은 약지가 압살롬의 입술 사이로 천천히 사라지는 것을 멍하니 응시했다.

압살롬의 고개가 움직이고, 뜨거운 혀가 이환의 손가락을 길게 훑었다. 다시 나타난 손가락은 타액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이환은 부러 눈살을 찌푸렸다.

“그만…….”

압살롬이 순식간에 약지를 삼켰다. 혀끝이 손가락의 주름 하나하나를 확인하듯 움직였다. 이환은 그가 어젯밤 이환의 성기를 입으로 애무하던 순서를 되짚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환은 저도 모르게 압살롬을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압살롬은 눈매를 한껏 휘며 웃었다. 발그스름하게 물든 눈매에서 욕정이 뚝뚝 떨어진다. 이환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 소리가 쑥스러워 고개를 외로 꼬았다.

“아, 정말. 마음대로 해.”

허가까지 받은 압살롬은 거칠 것이 없었다. 몸을 일으킨 그가 예고도 없이 이환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통각으로 판단하건대 이 잇자국은 내일까지도 남아 있을 것이다. 온 동네가 둘 사이를 알지만, 그래도 부끄럽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자신이 낸 잇자국을 만족스럽게 어루만진 압살롬이 좀 더 아래로 내려갔다. 긴 손가락이 이환의 셔츠 단추를 어루만지더니 그대로 지나쳤다.

슬슬 몸에 열기가 오른 터라 옷이 거추장스러웠던 이환은 압살롬을 의아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압살롬이 싱긋 웃었다.

“여기에 더 귀여운 단추가 있으니까요.”

압살롬은 손가락을 세워 셔츠 위를 긁었다. 셔츠에 가려진 유두가 몇 번의 자극으로 금세 볼록해졌다.

“봐요. 이렇게 귀엽잖아요. 계속 이것만 가지고 놀아도 충분할 것 같아요.”

이환이 뭐라고 하려는 때였다. 압살롬이 대뜸 이환의 가슴을 깨물었다. 혀끝이 돌기 위를 오갔으나, 옷감 한 겹을 사이에 둔 탓인지 어딘지 부족했다.

이환은 압살롬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쑤셔 넣고 가까이 당겼다. 그러자 압살롬이 낮은 소리로 웃었다.

“좀 더 세게?”

뻔히 알면서 되묻는 꼴이 얄밉다. 이환은 대답 대신 셔츠 앞섶에 손을 가져갔다. 단추를 툭툭 풀어 내린 후, 그를 삼킬 듯 바라보는 압살롬의 턱을 잡고 당겼다.

두 개의 뜨거운 입술이 겹친다. 압살롬의 입속을 혀로 질척하게 휘저은 이환이 씩 웃었다.

“할 거면 제대로 해.”

“……네.”

대답만 얌전했다. 대번에 달려든 압살롬이 이환의 입술에 매달렸다. 뜨거운 손가락이 목을 어루만지고 내려가 가슴을 배회했다. 절로 흘러나오는 신음은 압살롬의 입안으로 빨려들었다.

한 손이 유두를 꼬집고 문지르는 동안, 다른 한 손은 좀 더 아래쪽으로 향했다. 단단한 가슴을 느리게 쓸어내린 손바닥이 배를 더듬다가 더 아래로 향했다. 답답한 바지 안에 갇힌 이환의 성기는 제법 두둑해진 상태였다.

이환의 입술을 놓아준 압살롬이 몸을 바싹 붙였다. 이환은 압살롬을 내려다보았다. 화사하게 웃는 압살롬의 얼굴이 뭔가 기도하는 듯 수상쩍었다.

“뭘 노리는 거야?”

“음, 글쎄요? 이환을 더 많이 즐겁게 해 주고 싶다?”

경쾌하게 대답한 압살롬이 무릎을 꿇었다. 길게 늘어진 은발의 커튼 사이로 우아한 콧날과 붉은 입술이 보였다.

이환은 압살롬의 입술이 느리게 열리는 것을 멍하니 보았다. 몇 번이나 봐서 이제는 익숙해진 장면이다. 그러나 볼 때마다 아랫배가 욱신거렸다.

붉은 입술이 이환의 허리띠를 물고 천천히 잡아당겼다. 리본이 점점 작아질수록 이환의 심장박동도 함께 빨라졌다.

툭.

허리띠가 완전히 풀렸다. 슬며시 벌어지는 앞섶 사이로 속옷이 드러났다. 그곳에서 작은 얼룩을 발견한 압살롬이 웃었다.

“봐요, 이환. 벌써 젖었어요.”

달궈진 목소리가 희미하게 긁힌다. 우미한 손가락이 속옷 위를 더듬다 바지와 함께 끌어 내렸다. 이내 이환의 구두와 옷가지가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드러난 피부에 압살롬의 숨결이 닿는다. 손으로 이환의 성기를 훑어 조금 더 세운 압살롬이 입을 벌렸다. 성기 끝이 따뜻한 점막에 감싸이는 순간, 이환은 허벅지에 힘을 줘 신음을 참았다.

까슬까슬한 혀가 선단을 쓸고 물러났다. 입을 좀 더 벌린 압살롬이 성기를 문 채 고개를 숙였다. 기둥을 따라 매끄러운 입술이 미끄러진다. 가장 약한 부분이 압살롬에게 조금씩 먹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묘한 고양감이 느껴졌다.

이환의 성기를 느리게 삼킨 압살롬이 시선을 들었다. 파르르 떨리다 천천히 올라가는 속눈썹과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정결하게 빛났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눈동자와 뺨은 색에 물든 채 이환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 강렬한 대비에 이환이 눈을 빼앗긴 때였다. 압살롬이 입과 혀로 성기를 조였다. 익숙하지만 매번 새로운 감각이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이환은 뜨거워진 숨을 몰아쉬었다. 여전히 마주한 시선 속 열기가 새파랗게 타오르고 있었다. 손을 뻗어 압살롬의 이마를 뒤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러자 압살롬이 보란 듯이 뺨을 홀쭉하게 만들었다.

미끄러운 점막이 예민한 기둥을 감싸고, 까슬까슬한 혓바닥이 귀두를 연신 문질렀다. 압살롬이 내쉬는 숨결 한 조각조차 전부 쾌감으로 연결됐다. 눈앞이 쾌락으로 흐릿해질 즈음, 이환은 압살롬의 머리를 밀었다.

“이제 그만해. 나올 것……!”

압살롬이 입술에 힘을 주어 세게 빨아들였다. 뾰족하게 모인 혀끝이 요도를 파고들 듯 후비고, 긴 손가락이 성기 뿌리와 그 아래의 고환을 연신 자극했다.

“야, 롬! 읏―.”

순식간에 찾아온 사정의 쾌락이 눈앞을 희게 물들인다. 압살롬은 이환이 주는 것이라면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겠다는 듯 목구멍 깊숙한 곳까지 성기를 품었다. 이환은 압살롬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빛이 점멸하던 시야가 겨우 정상을 되찾는 순간, 이환은 앓는 소리를 흘렸다.

“너, 또…….”

이환의 성기를 느리게 입안에서 빼낸 압살롬이 싱긋 웃었다. 이환은 세게 들쑤셨던 머리카락을 위로하듯 쓸었다.

두피를 훑는 손가락이 기분 좋았는지, 눈을 감은 압살롬이 희미한 신음을 흘렸다. 그 입술이 평소보다 붉다. 이환은 그 위에 묻은 정액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그러자 압살롬이 혀를 내밀어 그것을 다시 핥았다. 이환은 맥없이 웃었다.

“기분 좋았어요?”

“그래. 좋기는 했는데…….”

이환은 발을 들어 압살롬의 다리 사이를 꾹 눌렀다. 바지 안쪽에서 단단하게 부푼 것이 느껴졌다.

“넌 아직 안 좋은 것 같다?”

각도를 달리해 가며 문지르자 압살롬이 눈시울을 붉혔다. 벌떡 일어난 그가 이환을 돌려세웠다. 뒤를 풀려는 모양이었다. 이환은 압살롬이 편하도록 상체를 카운터에 댔다. 자연스럽게 내밀어진 엉덩이를 보며 압살롬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압살롬은 늘 상비하는 작은 오일병을 꺼내 손가락을 적셨다. 남은 것 중 반을 이환의 엉덩이골에 쏟아부었다. 약간의 점성을 지닌 황금빛 액체가 밀빛 살결을 타고 흘러내리다 두 개의 언덕 사이로 사라졌다. 압살롬은 더 참지 못하고 이환에게 달려들었다.

오일에 젖어 미끄러운 손가락이 엉덩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입구가 연인의 손가락을 익숙하게 받아들였다. 그래도 불쑥 집어넣을 수는 없으므로 압살롬은 연신 손가락을 놀렸다.

다른 한 손도 바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환의 허리를 팔로 뱀처럼 휘감은 압살롬은 앞쪽으로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방금 사정해 예민해진 성기를 붙잡힌 이환이 당황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압살롬은 알고 있었다. 여기서 좀 더 자극하면 이환은 다시 숨을 몰아쉬며 그에게 매달릴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아랫배가 뻐근해졌다.

압살롬은 움찔거리는 이환의 목덜미를 핥고 빨아들였다. 입술을 쭉 미끄러뜨리다 아까 벗기지 못했던 셔츠에 걸렸다. 하던 것을 전부 멈추고 벗기기에는 압살롬의 욕구가 시급했다. 그는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셔츠 위로 입술을 문질렀다.

세 개째의 손가락을 입구에 들이밀었다. 일부러 민감한 부분을 꾹 누르자 이환의 허리가 움찔 떨렸다. 야해요. 압살롬은 이환의 귓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금세 벌겋게 변하는 귀가 기꺼웠다.

하지만 공격당하기만 해서는 이환이 아니다. 그가 압살롬을 돌아보았다. 단정한 이목구비도, 짙은 눈매도 전부 색으로 젖어 들어 있었다. 압살롬은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반 남은 심장을 누군가가 세게 움켜쥔 것만 같았다.

“너야말로 엄청 야한 얼굴이잖아.”

씩 웃는 얼굴이 어딘지 짓궂다. 이유는 곧 알 수 있었다. 뒤쪽으로 손을 뻗은 이환이 압살롬의 성기를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이게 자꾸 날 찔러서 말이지.”

거친 손바닥이 우둘투둘한 기둥을 쭉 미끄러진다. 중간쯤에서 손을 멈춘 이환은 압살롬의 성기를 엉덩이 사이로 인도했다. 압살롬은 거부도 못 하고 이끌렸다.

오일로 질척하게 젖은 입구에 성기 끝이 닿았다. 압살롬은 이환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만……. 안 됩니다, 이환. 좀 더 풀어야 해요.”

“싫은데? 나도 급하다고.”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연인은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압살롬은 이환이 일부러 저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몸을 달구는 욕정이 이환을 따르라고 촉구했다.

카운터에 놓아두었던 오일병을 거칠게 낚아챈 압살롬이 남은 오일을 그의 성기에 부었다. 안 그래도 선액에 젖었던 귀두가 흉포하게 번들거렸다.

압살롬은 이환의 엉덩이를 벌리고 안쪽을 응시했다. 이제 곧 저 안이 자신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상상하자마자 눈앞이 아찔해졌다. 머리를 흔든 압살롬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넣을 겁니다.”

“뭘 일일이 중계하고 있어?”

이환이 웃었다. ‘진짜, 귀엽기는.’이라는 중얼거림도 들렸다.

압살롬은 입구에 성기를 맞추고는 단숨에 진입했다. 거친 움직임이었다. 그는 일순 숨을 멈춘 이환의 귓가에 연신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귀여워요? 이래도? 응?”

세모꼴로 부푼 귀두가 독사 대가리처럼 사정없이 이환을 노렸다. 전립선이 깊게 할퀴어진 이환은 소리도 못 내고 부들부들 떨었다.

평소의 압살롬이었다면 이대로 이환이 진정하길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느리게 허리를 뺀 압살롬이 다시 빠르게 안쪽으로 진입했다. 오일과 선액으로 질척해진 살덩이가 마찰하는 소리, 살갗이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억눌린 신음 소리. 그와 이환이 만든 온갖 음란한 소리가 청각을 휩쓸었다.

손을 미끄러뜨린 압살롬은 이환의 성기를 스치듯 어루만지고는 멀어졌다. 이환이 원망의 눈길로 그를 돌아보았지만 모르는 척했다.

문득 짙푸른 눈이 어딘가를 향했다. 뜨겁게 달아올랐던 눈매가 일순 냉정함을 품고 가늘어지는 순간이었다. 이환의 내벽이 그의 성기를 쫀득하게 빨아들였다. 순식간에 치고 올라온 쾌감이 전신을 잠식했다. 겨우 사정의 욕구를 억누른 압살롬이 이환에게 매달렸다.

“방금 이건 일부러 한 거죠?”

“그러게 누가 다른 생각 하래.”

이환이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낮은 소리로 웃은 압살롬이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럼 이제부터 이환에게만 집중할게요.”

다정한 말투와는 달리 허리 아래는 제멋대로였다.

“읏! 롬! 너무…….”

이환이 감각에 겨워 무어라 중얼거린다. 그러더니 점점 속도를 올려서 치받아 오는 압살롬을 견디다 못한 듯 카운터에 체중을 실었다.

압살롬이 몰아칠 때마다 카운터가 삐걱거렸다. 그는 이환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아랫도리만 빠르게 움직였다. 이환이 제 팔을 이마로 누른 채 정신없이 신음했다. 압살롬은 이환의 목덜미에 달라붙어 세게 빨았다. 붉은 자국이 진하게 남았다.

“보이는 데……! 남, 기지……! 아!”

이환이 헐떡이며 외쳤다. 압살롬은 못 들은 체하며 빼냈던 성기를 다시 꽂아 넣었다. 흐느낌을 닮은 신음이 이환의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왔다. 그 소리가 귓구멍을 통해 들어오자 머리가 후려 맞기라도 한 듯 뒤흔들렸다.

“그럼, 고개…… 흣, 돌려서, 응? 나 봐요.”

거칠게 들이치며 요구하자 이환이 마구 도리질 쳤다. 싫다기보다는 쾌감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모양새였다.

압살롬은 손을 뻗어 이환의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흐려진 갈색 눈동자와 젖은 채 붉어진 눈시울, 달아오른 뺨. 너무 예뻐요.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압살롬이 몸을 숙였다.

이환의 입가에 흘러내린 타액을 쭉 핥은 후 곧바로 입술에 매달렸다. 내벽만큼은 아니지만 입술도 델 것처럼 뜨거웠다. 이상하게 목이 타서 그 안쪽을 혀로 휘저었다. 서늘한 입안에서 달큼한 감로수가 솟았다. 압살롬은 그것을 샅샅이 훑어 삼켰다.

그가 입술을 떼자 이번에는 이환 쪽에서 달려들었다. 압살롬의 달아오른 입술을 잘근잘근 깨문 이환이 잇새로 쏘아붙였다.

“앞에! 제대로……!”

“만져 줄까요? 손으로?”

이환이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압살롬은 손을 앞쪽으로 가져가 이환의 성기를 주물렀다.

흘러나온 액으로 질척거리는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분명 꼿꼿하게 선 채 번들거릴 것이다. 이 상태일 때 입에 넣으면 듣기 좋은 신음을 흘리며 곧바로 사정할 텐데. 순간 눈앞이 어두워진 압살롬은 욕망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리와 손으로 이환을 더 빠르게 몰아세웠다. 앞뒤에서 동시에 전해지는 감각이 너무 강렬했는지, 이환이 팔로 카운터 위를 기어 도망쳤다. 압살롬은 그를 쭉 끌어당겼다.

“어디, 어디 가게요? 읏, 못 가. 여기 나랑……!”

압살롬이 이환의 안쪽 가장 예민한 부분에 성기를 처박았다. 단단한 끝부분이 짓뭉개듯 후비자, 이환은 소리도 못 내고 절정에 다다랐다. 그와 동시에 내벽이 압살롬의 것을 확 조였다.

뜨거운 정액이 요동치는 안쪽을 채운다. 이환의 몸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는 듯 연신 압살롬의 성기를 쥐어짰다. 압살롬은 길게 신음하며 이환을 꽉 끌어안았다.

압살롬이 쾌감에 젖어 내키는 대로 이환의 귀와 목덜미, 뺨에 입 맞추던 중이었다. 살결과는 다른 말랑한 것이 입술에 닿았다. 압살롬은 얼른 그것에 파고들어 혀를 섞었다.

흥분으로 고조됐던 호흡이 차츰 가라앉을 즈음, 압살롬이 이환에게서 입술을 뗐다. 타액에 젖어 붉어진 입술이 음심을 자극한다. 한 번 더 키스하려는 압살롬의 입술을 이환이 살짝 꼬집었다.

“흑심 다 보이니까 그만하고 빼라.”

“……네.”

압살롬은 침울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환이 기가 찬 듯 웃었다.

“넌 대체 대낮부터 뭘 얼마나 하자는 거냐? 게다가 여긴 가게라고.”

이환은 문 쪽을 확인했다. 일은 다 벌어졌으니 마음의 안정을 위한 행동일 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문은 잠겨 있었다. 압살롬이 이환 모르게 마법이라도 사용한 모양이었다.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지만, 생각해 보면 문을 잠그게 된 원인도 압살롬이었다. 이환의 눈이 가늘어졌다.

“마법을 쓰지 않겠다고 말한 건 너 아니었냐. 그런데 툭하면…….”

“누가 들어올까 봐 걱정돼서 그랬습니다. 이환도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거 싫잖아요.”

“그럼 처음부터 걱정할 만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면 되는, 윽……!”

아직 그의 몸에 지워져 있던 압살롬이 허리를 느리게 뺐다. 안에 들어찼던 성기가 질척한 소리를 내며 빠져나갔다.

문득 이환은 의아해졌다. 여느 때의 압살롬이라면 이환을 꼬드겨 한 번 더 했을 것이다. 낮부터 달려들었던 것을 반성하는 중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전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환에게서 완전히 떨어진 압살롬이 옷을 정리했다. 바지 앞섶만 풀어헤쳤던 터라 금세 멀끔해진 그가 이환을 향해 돌아섰다.

이환은 아직 셔츠만 걸친 채였다. 셔츠 아래로 드러난 다리를 훑어본 압살롬이 애써 눈을 돌렸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지만, 그에게는 처리할 것이 있었다.

“이환은 옷이 다 구겨졌으니 다시 입기 어렵겠죠? 집에서 새로 가져다줄게요. 금방 다녀올 테니까 그때까지 문 잠그고, 누가 와도 열어 주면 안 됩니다.”

새끼 염소를 집에 두고 외출하는 어미 염소 같은 말이었다. 이환 입장에서는 압살롬보다 더한 늑대는 없었다.

“다녀오기나 해.”

“빨리 오겠습니다.”

압살롬은 마법으로 잠갔던 문을 열고 고서점에서 나왔다. 그의 시선이 곧잘 어딘가로 향했다. 그 끝, 고서점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호슈아가 서 있었다.

“아직도 가지 않았습니까?”

압살롬의 감각이면 근처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물었다.

호슈아가 누구를 마음에 뒀는지는 알고 있다. 얼핏 압살롬을 좋아한다고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하곤 했으나, 호슈아의 눈은 언제나 이환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환이 오해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환은 어지간한 일에는 무심했고, 그에게서 반응을 이끌어 내자면 압살롬에게 접근하는 것이 가장 빨랐기 때문이다. 한번 믿으면 의심하지 않는 이환의 곧은 성격도 거기에 한몫했을 것이다.

압살롬은 알면서도 이환의 오해를 정정하지 않았다. 그가 보여 주는 자잘한 질투가 즐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슬슬 불쾌함이 즐거움을 넘어서고 있었다. 압살롬은 호슈아에게 다가갔다. 압살롬은 분한 얼굴의 호슈아를 보며 냉담하게 웃었다.

“감사 인사는 드리지요. 이환이 이곳을 제법 마음에 들어 한 터라, 여기서 가능한 오래 머물고 싶었거든요.”

“인사라면 이미 이환에게 들었어.”

그러니 네 인사는 필요 없다. 호슈아는 그런 눈빛으로 압살롬을 노려보았다.

“나와 이환은 연인이니까요. 이환의 바람이 곧 나의 소원이니만큼 인사 정도는 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습니까?”

압살롬이 고개를 기울였다. 슬슬 기울어 가는 햇살의 적금빛이 그의 은발 위에서 부서졌다. 이환이 봤더라면 감탄했을 장면이지만, 호슈아의 눈에는 가증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이 일을 빌미로 이환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 내려는 생각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 생각한 적 없어. 사람을 뭘로 보고.”

무엇인가를 바라고 움직인 것은 아니다.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이환을 돕고자 했다. 이환이 고맙다며 웃는 순간, 뛸 듯이 기뻤다.

그 웃는 얼굴을 다시 떠올리자 용기가 솟았다. 호슈아는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리 이환이 네 것이라지만, 고작 식사 정도로 예민하게 굴 건 없잖아? 친구끼리도 밥은 같이 먹는다고.”

압살롬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짙푸른 눈동자가 냉랭한 빛을 품는다. 호슈아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쳤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 이환의 고향에서 사용되는 속담이라고 합니다. 늘 시작은 소소한 법입니다만…… 결말까지 그럴까요? 정말로 바라는 것이 없었다면 당신이 한 일을 조용히 묻어 뒀겠죠. 내 말이 틀립니까?”

마치 천둥이라도 내리치듯 냉엄한 목소리였다. 마음속 한구석의 욕망을 들킨 호슈아가 압살롬을 외면했다.

“그리고 착각하지 마시죠. 이환이 내 것인 게 아니라, 내가 이환의 것입니다. 어딜 그 사람을 두고 멋대로 소유물 취급을…….”

압살롬은 싸늘하게 쏘아붙인 후 돌아섰다. 더 이상 대화할 가치도 없었다.

집에서 이환의 옷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호슈아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압살롬은 마법으로 문을 열고 고서점에 들어갔다. 셔츠만 여민 채 카운터 안쪽에 앉아 있던 이환이 그를 반겼다. 압살롬은 옷을 카운터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누가 오지는 않았나요?”

이환이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압살롬은 카운터에 기댄 채 그 모습을 감상했다. 벌어진 앞섶 사이로 드러난 건강한 피부를 응시하던 중, 이환이 대답했다.

“들어온 사람은 없어.”

어딘지 얄궂은 말투였다. 그러더니 압살롬이 가져온 옷들을 헤집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부터 서성거린 사람은 있지만. 그런데 롬, 옷가지 좀 들고 온 것치고는 오래 걸리지 않았냐?”

아무래도 한창 달아올랐던 중 호슈아의 기척을 느낀 것은 압살롬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압살롬은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카운터에 팔꿈치를 댄 이환이 부쩍 가까워졌다. 그가 아직 옷을 입지 않은 터라, 압살롬은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이환이 별안간 손을 뻗었다. 거친 손이 압살롬의 옷깃을 틀어쥔다. 그대로 끌려 내려간 압살롬은 물어뜯을 듯한 입맞춤을 받았다.

호흡을 위해 잠시 입술이 풀려난 틈을 타 압살롬이 얼떨떨하게 물었다.

“이, 이환? 갑자기 왜…….”

이환의 뺨에 붉은 기가 번진다. 그는 압살롬을 외면하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호슈아랑 둘만 있지 말라고.”

그 말을 들은 순간, 압살롬은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환의 붉어진 얼굴은 그의 귀가 정상이라고 주장했다.

“두 번 다시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 호슈아가 다시 접근하는 일이 있다면 그때는 마법을 사용해서라도 쫓아낼 생각이었다. 압살롬은 충족감에 휩싸인 채 고개를 기울였다. 두 입술이 다시 겹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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