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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8/10)

Epilogue

이환과 압살롬은 한 달여에 걸친 긴 여행 끝에 커다란 숲에 당도할 수 있었다. 이환은 압살롬에게 이끌려 숲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참을 가자 시든 잔디가 깔린 너른 공터가 나왔다.

“이곳이에요.”

압살롬이 가리킨 곳에 있는 것은 몬스터의 왕―날조된 호칭이라는 것을 알지만 영 잊기 어려웠다―이 살던 곳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작고 소박한 집이었다. 이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압살롬이 머쓱하게 웃었다.

“역시 너무 작은가요?”

“어? 아니, 별로 작지는 않은데. 그냥…… 드래곤으로 변했을 때 몸집이 클 거라고 생각해서. 그럼 이 집에 못 들어가잖아.”

이환은 이곳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드래곤에 대한 지식을 풀어놓았다. 그러고는 당황하지 않은 척 덧붙였다.

“둘이서 살기에 충분해 보이니까 별문제 없지?”

“아, 네. 둘이 살기에…….”

압살롬이 얼굴을 붉히며 중얼거렸다. 이환도 덩달아 수줍어졌다.

주인인 압살롬이 앞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간 이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박한 집에 잘 어울리는 세간이 내부를 오밀조밀하게 꾸미고 있었다.

“먼지 하나 없네.”

“집 자체에 마법을 걸어 두었거든요. 내가 아니라 선대가요.”

압살롬이 부엌에서 이것저것 준비하는 동안 이환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평범한 가정집 그 자체였다. 부엌에서 풍기는 음식 냄새가 어우러지자 향수마저 느껴졌다.

구경을 마친 이환은 부엌으로 향했다. 압살롬은 이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덕 앞에 서 있었다. 이환은 그에게 다가갔다.

“도와줄게.”

“요리는 집주인에게 맡기고 손님은 얌전히 기다리시죠.”

“손님 아닌데. 난…….”

이환은 말꼬리를 흐렸다. 주인이라고 하자니 건방지게 들리고, 식객이라고 하자니 결국 손님에 지나지 않는다. 몇 초 고민하던 그는 간단한 정답을 찾았다.

“집주인의 애인인데.”

결국 압살롬은 이환의 도움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요리 경험이 거의 없는 이환은 잡일을 도맡았다. 감자 껍질을 벗겨 압살롬이 지시하는 크기로 잘라 그릇에 담아 두었다. 버섯은 잘게 찢어 놓고, 당근은 잘 씻어 일정한 크기로 썰었다.

곁눈질하자 압살롬이 프라이팬과 주걱을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이 보였다. 요리하는 모습은 몇 번이나 봤지만 이렇게 본격적인 것은 처음이었다. 이환은 저도 모르게 압살롬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왜 그래요?”

“익숙해 보여서.”

“선대가 가르쳤습니다. 마법에만 의지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면서. 그렇게 말한 것치고는 여기저기에 마법을 사용했지만요.”

압살롬은 보란 듯이 벽장을 열었다. 안에는 계절에 맞지 않는 채소와 신선한 고기가 놓여 있었다. 마법으로 냉장고 비슷한 것을 만든 모양이었다.

선대라면 이옐라가 원한을 품게 만든 바로 그 드래곤이었다. 온갖 고생은 다 했지만, 그 사건이 없었다면 이환과 압살롬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덕분에 나는 이환에게 맛있는 걸 만들어 줄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와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죠.”

벽장을 닫은 압살롬이 요리를 이어 갔다. 짧아진 머리카락을 묶은 채 주걱을 휘젓는 그는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이환은 손을 뻗어 압살롬의 뺨을 감쌌다. 손끝에 흉터 특유의 오돌토돌한 감촉이 느껴졌다.

“나도 감사할 일이네.”

압살롬의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춘 이환은 다시 칼을 잡았다. 시침 뚝 떼고 당근을 썰자 압살롬 쪽에서 앓는 소리가 났다.

“두고 보자고요, 진짜.”

이환은 소리 죽여 웃었다.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이환과 압살롬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가정집 특유의 냄새가 절로 졸음을 부를 만큼 포근했으나, 이환은 영 잠을 이루지 못했다. 조용히 일어난 그는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 앉자 서늘한 감촉에 몸이 떨렸다. 이전 같으면 이 정도 냉기는 느끼지도 못했을 것이다. 새삼 몸이 많이 축났다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황궁에서 빠져나왔을 당시와 비교하자면 많이 나아진 상태였다. 모두 압살롬이 살뜰하게 보살펴 준 덕분이었다.

체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몸을 웅크린 이환은 생각에 잠겼다.

황궁을 나와 이곳까지 오는 동안 이환은 압살롬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대부분 중요한 부분은 쏙 빼놓은, 가볍고 일상적인 이야기였다. 가능한 안정적인 상황에서 차분히 대화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안정적인 순간이었다. 별로 알고 싶지 않고, 이제 와 알아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모르는 채로 있고 싶지는 않았다.

적당한 때를 가늠하던 중, 작은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이 집에는 단둘뿐이니 발소리의 주인은 하나밖에 없었다.

이환은 압살롬을 돌아보았다. 때마침 압살롬이 양초에 불을 붙인 터라 시야가 확 밝아졌다.

“잠이 오지 않습니까?”

압살롬이 이환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따뜻한 팔이 이환의 등을 감쌌다. 잠시 온기를 즐기던 이환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옐라가 내 몸에 무슨 장난을 쳤는지 알고 있지?”

“알고 있어요. 으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차라도 마시면서 할까요?”

그들은 부엌으로 이동했다. 압살롬은 불씨를 살려 물을 끓였다. 금세 따뜻한 김이 작은 부엌을 채웠다. 압살롬은 이환에게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근력과 순발력 같은 신체적 축복은 이환도 알고 있겠죠. 이외에도 이옐라는 이환이 목적을 달성하기 전에 죽지 않도록 수를 썼습니다. 노화를 멈추고 회복력을 극대화시켰죠. 꼼짝없이 죽을 거라고 생각했던 부상에도 불구하고 살아난 적이 있지 않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너무 많아서 오히려 잘 모르겠다.’라고 말하면 압살롬이 슬퍼할 것이므로 이환은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이옐라는 이환을 의심했습니다. 혹시 이환이 축복을 악용하지 않을까 하는, 뭐 그런 생각을 했겠죠.”

이옐라가 인간의 목숨을 벌레만도 못하게 생각할지언정, 인류라는 종에 품은 애정은 확고했다. 왜냐하면 인류는 이옐라가 창조한 피조물, 즉 그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환은 몬스터를 죽여야만 하는 입장이었죠, 그래서 이옐라는 이걸 이용해 저주를 걸었습니다. 몬스터를 죽일 때 나오는 검은 연기를 마시면 조금씩 몸이 약해지도록 말이죠. 다시 말하자면…….”

말끝을 흐린 압살롬이 이환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이환은 방금 전 압살롬이 한 말을 찬찬히 곱씹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가능성에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면.”

자신의 목소리마저 멀게 들린다. 이환은 헛기침한 후 말을 이었다.

“몬스터만 죽이지 않으면 영원히 살 수도 있다는 뜻이야?”

압살롬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안에는 두려움과 환희라는, 공존하기 어려운 두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 표정이 이환에게 확신을 줬다.

“다행이다.”

“무엇이…… 말입니까?”

압살롬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짙푸른 눈동자가 탐욕스러울 만큼 이환을 들여다보았다. 이환은 그가 어떤 말을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너를 두고 나 먼저 죽는 일은 없을 테니까.”

만점짜리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이환은 울 것 같은 표정의 압살롬을 보며 작게 웃었다.

“넌 이상한 구석에서 비관적이야.”

눈앞에서 이환이 죽는 모습을 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환은 그것을 언급하는 대신, 자연스럽게 떠오른 생각을 중얼거렸다.

“그럼 회귀 전에 내가 죽은 건 몬스터 위로 떨어져서…….”

절벽에서 추락해 몬스터를 짓뭉개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때를 떠올리기라도 한 것인지 압살롬이 진저리를 치더니 이환에게 매달렸다. 이환은 압살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옐라는 널 죽일 생각이 없다고 했었어.”

“내가 죽어 봤자 어차피 새로운 드래곤이 탄생할 뿐이니까요. 이옐라는 그냥 드래곤이 자신과 똑같은 괴로움을 느끼는 게 보고 싶었을 겁니다. 내가 저한테 뭘 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압살롬이 드물게 투덜거렸다. 이후로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짧아진 은발의 감촉을 만끽하던 이환은 그 끝이 그리 고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현재 압살롬의 머리카락은 황궁 지하에서 스스로 잘랐던 상태 그대로였다. 이환은 압살롬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롬. 가위 어디 있어?”

“가위요?”

“네 머리 좀 다듬게.”

아무리 압살롬이 뭐든 다 어울린다지만, 더 어울리는 것을 찾아 주고 싶은 것이 연인의 마음 아니겠는가. 괜히 쑥스러워진 이환은 움직이려는 압살롬을 만류했다.

“가위가 어디에 있는지만 알려 줘. 그럼 내가 가서 찾아올게.”

“저쪽 서랍장 맨 위 칸에 있습니다만…….”

이환은 대답 없이 서랍장으로 다가갔다. 가장 위에 있는 칸을 열자 자질구레한 세간이 보였다. 그중에서 가위를 찾으며 대답했다.

“앞으로는 너 혼자 하지 말고 나에게 말해 줘. 이제는 여기가 우리 집이잖아.”

“……네.”

압살롬은 열심히 가위를 찾는 이환의 등을 집요하게 응시했다. 사실 그는 이환이 이옐라가 저지른 짓에 대해 더 물을 줄 알았다. 더 캐묻지 않는 모습이 압살롬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는 것 같았다. 압살롬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눈을 내리깔았다.

사랑은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든다. 하지만 이환은 이곳에 인연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옐라는 이환에게 뤼시앵을 엮어 주었다. 혹여 임무를 방폐하고 싶은 날이 오더라도 그를 통해 힘을 얻을 수 있도록.

만약 이것을 이환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옐라의 손바닥 위에서 울고 웃었던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런 후 뤼시앵에게 가졌던 애정의 발단이 압살롬의 것과 동일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칠 것이다. 압살롬은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았다.

“뭘 혼자 웃고 있어?”

“네?”

압살롬은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가위를 가지고 온 이환이 뚱한 얼굴로 손을 뻗었다. 거칠고 딱딱한 손가락이 압살롬의 입매를 어루만졌다. 그제야 압살롬은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미있는 일이라도 있는 거야?”

“글쎄요. 그냥…… 앞으로 이환과 계속 함께 있을 걸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져서요.”

이옐라가 엮은 인연을 떨치고 압살롬을 사랑하게 된 이환. 압살롬에게 이 현실은 꿀보다 달고 보석보다 반짝거렸다.

“잠시 여기 머물다 이환의 몸이 다 나으면 여행을 가요. 나도 이환도 시간은 많으니까요. 그리고 또…….”

압살롬은 감히 꿈에서조차 바랄 수 없었던 일들을 주워섬겼다. 그러다가 이환과 눈이 마주쳤다. 흥분한 어린아이처럼 굴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진 압살롬이 입을 다무는 때였다. 이환은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전부 하자. 네 말대로 시간은 많으니까.”

앞으로 남은, 영원에 가까운 시간. 둘이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 닥친다 해도 행복할 것이다.

압살롬은 꿈보다 황홀한 현실에 전율하며 이환을 끌어안았다. 이내 조금 서늘한 팔이 압살롬의 등을 감쌌다. 그것이 그들의 앞날 같아서, 압살롬은 벅찬 감정을 간신히 삼켰다.

부디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 함께하기를.

압살롬은 기원을 담아 이환에게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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