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6. (7/10)

Chapter 6.

사냥개였던 남자는

행복을 꿈꾼다

이환은 구역감과 함께 눈을 떴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을 뱉자 핏덩어리가 왈칵 쏟아졌다. 내장 조각마저 섞인 것으로 보아 안쪽이 단단히 상한 모양이었다.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물병에 손을 뻗었다. 비릿한 입안을 헹구자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들었다.

머릿속에 남은 마지막 기억은 뤼시앵의 모습이었다. 이환이 침대에서 빠져나가고자 다리를 움직이는 때였다.

철컹.

차가운 금속성이 울렸다. 이환은 이불을 걷고 발치께에 시선을 주었다. 묵직한 족쇄가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다리를 힘껏 잡아당겼으나 그것은 요란스러운 소리만 낼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의 경으로서는 무리야.”

뤼시앵의 낭랑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환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 뤼시앵은 줄곧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환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이환은 몸을 돌렸다. 뤼시앵은 창 앞에 서 있었다. 이환은 시선을 미끄러뜨려 창밖을 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새벽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검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아래로 보이는 것은 눈에 익은 황궁 정원이었다.

그렇게나 오랜 시간 정신을 잃었던 것일까. 이환은 이불 아래로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기력이 온통 빠져나간 듯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다시 뤼시앵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날 어쩌려는 거지?”

푸른 새벽빛에 물든 뤼시앵은 어쩐지 초조해 보였다. 이환은 냉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이렇게 힘을 죄 빼놓았으니 너희가 원하는 대로 싸우지도 못할 텐데. 아니면 배신자로서 심판대에라도 세울 셈이야?”

현재 이환이 걸친 것은 셔츠와 바지뿐이었다. 성물은 전부 겉옷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으므로 빼앗겼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압살롬이 이환을 데리러 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문득 이환은 쓴웃음을 지었다. 누군가 구하러 오길 기다리다니. 이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토록 의지하지 않고자 발버둥 쳤는데 결국 아무 의미도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기다림에는 한때 자신 안에서 영영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기대와 신뢰가 담겨 있었다. 이환은 그것이 기꺼웠다.

그때 날 선 목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그 드래곤을 생각하는 거야?”

뤼시앵이 이환에게 다가왔다. 그제야 이환은 그를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기분 탓인지 뤼시앵은 조금 자란 듯 보였다. 염소젖과 꿀로 가꾸어 보드랍기만 했던 손은 거칠어져 있었고, 옷차림도 화려했던 이전과는 달랐다. 무엇보다도 눈빛이 판이하게 변해 있었다.

녹색 눈에는 부글거리는 초조함과 기묘한 자신감이 섞여 있었다. 전자가 점점 후자에 좀먹힌다. 이윽고 자신만만한 빛으로 가득 찬 눈동자가 이환을 똑바로 향했다.

“경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어.”

이환은 부러 발목을 움직였다. 족쇄가 무겁게 울렸다.

“이런 걸 달아 놓고 그렇게 말하면 내가 믿을 거라고 생각해?”

침대 앞에서 발을 멈춘 뤼시앵이 이환의 발을 응시했다. 발가락 끝에서부터 천천히 기어오른 시선이 발등을 지나 발목에 닿았다. 끈적거리는 눈빛이 꺼림칙했으나 이환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경이 착각하고 있으니까.”

뤼시앵이 꿈결 같이 웃었다. 상기된 뺨이 행복해 보이기까지 했다.

“지금은 경이 드래곤의 술수에 넘어가 잘못 생각하고 있지만, 결국 경의 자리는 내 곁이야. 경이 그걸 제대로 깨달을 때까지는 나도 어쩔 수가 없어. 그러니 조금만 참아 줘. 응?”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이환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 쳤다.

뤼시앵이 곁이 자신의 자리라고, 한때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전부 허황된 자만이었다.

뤼시앵의 흰 손가락이 이환의 뺨으로 향했다. 이환은 그것을 차갑게 쳐 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내 자리가 어디인지 정하는 건 나다. 그리고 그곳은 네 옆이 아냐.”

뤼시앵은 뿌리쳐진 손을 가만히 말아 쥐었다. 그의 입술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그 색깔은 달랐다.

“그게 바로 그 드래곤이라고?”

붉은 입술이 통렬한 비웃음으로 일그러졌다. 뤼시앵이 다시 손을 뻗어 이번에는 이환의 어깨를 잡았다. 이환은 뤼시앵의 힘을 이기지 못해 뒤로 넘어갔다.

털썩.

이환은 침대 위에 드러누운 채 뤼시앵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어둑어둑한 방이라, 그늘이 드리워진 뤼시앵의 얼굴에서는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경을 구하기 위해 드래곤이 올 거라고 생각해?”

소년처럼 높고 깨끗했던 목소리가 낮아진 채 으르렁거린다. 이환은 그 소리에서 믿기지 않는 감정을 읽었다.

“경이 돌아온 지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났어. 그럼에도 드래곤은 오지 않았지. 그래도 경은 그걸 기다릴 거야?”

“뭐라고?”

이환이 있던 이르멘에서 제국의 황궁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하루 반나절 정도의 시간으로는 도무지 닿을 수 없었다.

문득 허공에 나타났던, 몬스터의 기운을 담은 구슬이 떠올랐다. 압살롬의 말에 따르면 마법은 마지르의 힘이므로, 이옐라의 피조물인 인간은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별안간 나타났던 그 구슬에는 어떤 힘이 작용한 것일까.

이환은 불길한 예감을 억누르며 물었다.

“네 조력자가 누구야.”

뤼시앵의 자신만만한 태도나 확정하는 듯한 말은 전부 그 조력자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자가 압살롬을 건드렸다면. 이환이 이를 악무는 때였다. 눈앞에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반짝이는 금발이 눈앞을 희롱한다. 이환은 스쳐 지나간 녹색에서 독사를 연상했다. 뒤이어 매끄러운 혀가 이환의 입술을 핥았다. 이환은 몸을 들썩였으나 단단히 잡힌 팔목과 내리눌린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신기해. 경이 나한테 붙들려서 꼼짝도 못 하고 있다니.”

뤼시앵이 이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댄 채 중얼거렸다. 그의 뜨거운 숨결도, 달싹이는 감촉도 이환에게는 불쾌할 뿐이었다.

“이런 건 생각한 적도 없었는데…….”

말꼬리가 잔혹한 희열로 물든다. 웃음을 흘린 뤼시앵이 이환에게 달려들었다. 이환은 그의 입술을 열심히 핥고 빠는 뤼시앵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콰득.

“윽!”

입술을 세게 깨물린 뤼시앵이 고개를 젖혔다. 이환은 그 틈을 타 손목을 빼냈다. 그대로 뤼시앵의 멱살을 잡고 몸을 뒤집었다. 거친 손이 뤼시앵의 가느다란 목을 졸랐다. 체중을 실은 손아귀는 별다른 힘이 없어도 상대의 생명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뤼시앵이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가 할퀴고 후려쳐도, 이환은 비틀거릴지언정 뤼시앵을 놓아주지 않았다.

거품을 물고 꺽꺽거리던 뤼시앵이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이환은 뤼시앵의 호흡을 면밀히 살펴, 정신을 잃었다는 확신이 든 후에야 겨우 손을 놓았다.

압살롬이 올 것을 믿는다. 그러나 그에게 기대어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환이 족쇄의 열쇠를 찾기 위해 뤼시앵의 몸을 뒤지는 때였다.

“바빠 보이는구나, 나의 종아.”

성별을 알기 어려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 순간 무형의 힘이 이환을 얽었다. 얼어붙은 몸이 통제를 잃고 기울었다.

털썩.

뤼시앵 위에 쓰러진 이환은 간신히 눈을 굴렸다. 가장 먼저 긴 금발과 마른 몸이 보였다. 시선을 조금 올리자 하얀 얼굴이 있었다. 쉴 새 없이 색을 바꾸는 눈동자가 기묘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이환은 상대에게서 익숙함을 느꼈다. 무자비할 만큼 복종을 요구하는 눈빛, 압도적인 오만, 무엇보다도 ‘나의 종’이라는 말.

고운 입술이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건방진 눈빛이야. 하긴 그러니 내게서 등을 돌리고 어린 드래곤에게로 도망친 것이겠지만.”

이환은 이옐라를 노려보았다. 모든 일의 원흉이 눈앞에 있었다. 이옐라만 아니었다면 이환이 이 세계로 올 일도, 압살롬이 피를 토하며 고통스러워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압살롬.

두려움으로 심장이 부대꼈다. 아무리 압살롬이 이옐라를 저지하기 위한 존재라지만 지금은 회귀로 인해 약해진 상태였다. 만약 이옐라가 압살롬을 해쳤다면― 이환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때 이환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이옐라가 말했다.

“네 어린 드래곤은 아직 무사하단다.”

이환은 빛이 돌아온 눈으로 이옐라를 보았다. 그에게 다가온 이옐라가 침대가에 앉았다. 이옐라는 희고 고운 손으로 이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에게 이틀의 시간을 줬지. 올 마음만 있었으면 벌써 도착하고도 남았을 텐데 말이다. 내 가련한 종아, 그는 너를 버린 것일까?”

상냥한 척하는, 다분히 연극적인 말투였다. 이환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얼핏 다정스러웠으나 그 안에는 한 점의 온기도 없었다.

“사실 난 널 데려온 이후 네 세계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단다. 신들에 얽힌 이야기가 아주 많더구나. 특히 판도라였던가?”

이옐라의 목소리에 흥미가 서렸다. 이환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세계에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게 된 남자에게 재앙을 주기 위해 보내진 존재라……. 온갖 재앙이 풀려난 후 고작 남은 것이 희망이라는 결말도 아주 재미있었지. 잔혹하다는 점에서는 따라갈 자가 없을 것이야. 어떻게 생각하니, 나의 종아? 그저 굴복하거나 좌절하면 그만인 것을, 희망에 휘둘려 굳이 저항해야 하다니 말이다.”

이옐라가 손가락을 멈췄다. 서늘한 불길함이 이환을 엄습했다.

“하여 이번에는 네 세계의 신들을 본받을 생각이란다.”

이옐라는 이환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몇 걸음 뗀 그가 문득 뒤를 돌았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것이냐.”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뤼시앵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요란스럽게 기침한 뤼시앵이 눈을 떴다. 몽롱한 채 갈피를 잡지 못하던 눈이 이환을 담는 때였다.

“일어나라.”

“이, 이옐라 님?”

뤼시앵이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이환이 침대에 나동그라졌다. 이옐라가 그를 보았다.

“얌전히 잠들어 있으렴. 금방 끝날 테니.”

이환의 눈꺼풀이 급격히 무거워졌다. 이대로 잠들면 안 돼. 그는 자신을 다그쳤으나 세상에는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 결국 그는 눈을 감고 말았다.

이환의 숨소리가 점차 깊어졌다. 이옐라는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그가 방을 나가자 뒤따라 나온 뤼시앵이 문을 닫았다.

뤼시앵이 이옐라를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옐라는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로구나. 어디 해 보렴.”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뤼시앵은 몇 분이나 망설였다. 그를 지켜보던 이옐라가 걸음을 뗐다. 뤼시앵은 그 뒤를 따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알렉상드르 경은 무사히 회복하는 거겠죠?”

뤼시앵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역력했다. 이옐라는 걸음을 멈추고 뤼시앵을 돌아보았다.

이환을 불러왔던 당시 이옐라는 새로 탄생할 영웅이 이 세계에 미칠 영향을 잘 알고 있었다. 이환을 면밀히 살핀 이옐라는 아주 쓸 만한 약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몬스터의 핵을 벴을 때 나오는 검은 연기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옐라의 피조물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몬스터가 없는 세상에서 온 이환에게 검은 연기는 약하게나마 영향을 미쳤다.

그냥 놔두면 호흡과 함께 흩어질 정도의 독기였다. 그래서 이옐라는 저주를 걸었다. 이환이 몬스터를 죽일 때마다 들이마시는 독기가 체내로 흡수되어, 결국 장기가 썩어 들어가도록. 이환이 제 임무를 열심히 수행할수록 죽음을 재촉하게 되는 아이러니였다.

회귀 전의 이환은 이옐라의 계획대로 천천히 좀먹혔다. 느리게 쌓인 독은 손쓸 수 없을 만큼 몸을 침식해 갔다. 뤼시앵의 꿈에 따르면 죽음의 문턱을 코앞에 두었다고 한다.

한번 걸린 저주나 축복은 그 누구도, 심지어 내린 본인도 철회하지 못한다. 점점 약해지는 이환의 곁에서 안절부절못했을 압살롬을 생각하며 이옐라는 잔혹하게 웃었다.

그때에 비하면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이환이 직접 몬스터를 죽인 것이 아니므로 지금 흡수된 독기는 결국 빠져나갈 것이다. 난전 한가운데에서 타인이 죽인 몬스터의 독기까지 죄다 마시고 금세 죽어 버릴까 우려하여 걸었던 제약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물론 전부 빠져나가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이옐라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이전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구슬의 효력은 일시적이야. 내 종은 곧 힘을 되찾을 거란다.”

“그, 그렇죠.”

뤼시앵의 대답은 어딘지 시원찮은 구석이 있었다. 이옐라가 얄궂게 미소 지었다.

“마음이 변한 것이냐?”

뤼시앵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이옐라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하기야 그런 모습을 봤으니 흔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아닙니다! 저는 그저…….”

“네게 제압당해 꼼짝도 못 하는 모습이 기꺼웠을 것이다. 엉망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도 들었겠지. 이제 내 종이 힘을 찾으면 두 번 다시 이런 기회는 오지 않을 거란다. 그럼에도 내 종이 무사히 회복하기를 바라는 것이니?”

뤼시앵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대답하지 못하자 이옐라가 낭랑한 소리로 웃었다.

“솔직하구나.”

그들은 복도 끝에 있는 나선계단으로 향했다. 한참을 내려가자 광장처럼 뻥 뚫린 지하가 나왔다. 아직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일꾼들이 천에 싸인 거대한 물체를 조심스럽게 옮겼다. 그들을 감독하는 것은 다름 아닌 샤를이었다. 황태자가 맡기에는 보잘것없는 일이었으나 그의 표정은 진지했다.

운반을 마친 일꾼들이 나갔다. 그제야 샤를이 고개를 돌렸다. 잠시 뤼시앵에게서 멈췄던 눈이 흐르듯 비켜 나간다. 이옐라를 향해 선 샤를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나 이옐라는 그를 거들떠보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뤼시앵은 샤를의 곁을 지나치며 곁눈질했다. 냉정한 성미답게 표정이나 몸가짐에는 한 점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때 샤를이 뤼시앵을 보았다. 파란 눈동자 속에서 모멸감을 읽은 뤼시앵은 통쾌해졌다.

뤼시앵은 샤를을 무시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등 뒤에서 샤를의 분노가 느껴졌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옐라는 방금 도착한 물체 앞에 있었다. 뤼시앵은 그의 근처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뤼시앵의 얼굴을 본 이옐라가 웃었다.

“즐거워 보이는구나.”

즐거웠다. 모두에게 무시당하던 뤼시앵이 이제는 그들을 무시하고 있다. 힘이 있다는 것은 이런 것이구나. 뤼시앵은 새롭게 눈을 뜬 기분이었다.

뤼시앵이 이토록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이옐라가 뒷배로 있어 주기 때문이었다. 이제 곧 이환마저 손에 들어온다. 뤼시앵은 황홀한 기분에 젖은 채 입을 열었다.

“늦지 않게 도착하여 다행입니다.”

뤼시앵의 시선이 천에 감싸인 물체를 훑으며 올라갔다.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물체였다. 그는 이것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교황청에 보관 중이었던 마지막 성물. 현신한 이옐라가 가장 먼저 요구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옐라를 의심하여 분노를 산 바 있는 황제와 샤를은 그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이를 위해 교황청에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렀겠지만 그것은 뤼시앵이 알 바가 아니었다.

“바닥을 장식했다는 내용만 들었던 터라, 이만큼 클 줄은 몰랐습니다.”

“풀어 보렴.”

성물을 감싼 천은 몇 겹의 끈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뤼시앵은 매듭을 풀었다. 천이 성물을 타고 흘러내리자 티 하나 없는 우윳빛 대리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환이 갖고 있던 성물이 도합 넷. 황궁에 하나가 있고, 방금 교황청에 있던 것이 도착했다. 총 여섯 개의 성물이 지금 이곳에 있다. 뤼시앵은 내내 궁금했던 것을 입에 올렸다.

“성물로 무엇을 하실 생각이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글쎄다. 내 종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이환의 바람을 이룬다. 순간 써늘한 것이 뤼시앵의 목덜미를 스쳤다. 문득 그는 이환이 성물을 찾아다닌 이유를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안으로 떨리는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알렉상드르 경이 무엇을 바라는지…….”

“저런? 말해 주지 않았던가?”

이옐라가 뤼시앵을 향해 돌아섰다. 긴 금발이 눈부시게 산란하고, 같은 색의 속눈썹에 감싸인 눈매가 샐쭉 휘었다.

“내 종이 원하는 것이야 하나밖에 더 있겠니? 그는 집에 돌아가고자 한단다. 제 세계, 제가 원래 있던 곳으로. 그래서 난 어린 드래곤의 앞에서 내 종을 돌려보낼 셈이다. 제힘에 묶여 이 세계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살아 있음을 알면서 손조차 내밀 수 없는 꼴이라니. 아주 볼 만하겠지.”

이옐라가 소리 내어 웃었다. 맑은 소리가 벽에 부딪혀 지하 전체를 울렸다. 뤼시앵은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그가 돌아간다.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그것이 죽음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꿈속에서 느낀 고통이 되살아났다. 잃고서야 깨달은 사랑은 지독했다. 그 아픔에 사로잡힌 뤼시앵이 외쳤다.

“제게 그를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뤼시앵!”

뤼시앵의 목소리가 웃음의 메아리를 삼켰다. 조금 떨어진 채 그들을 주시하던 샤를이 황급히 뤼시앵을 만류했다. 그러나 뤼시앵에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옐라가 웃음이 사라진 얼굴로 뤼시앵을 보았다. 석고 인형처럼 섬뜩한 모습이었다. 평소의 뤼시앵이었다면 실수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기대와 자만에 부풀었던 그는 두려움을 잊은 상태였다.

“내 백성아. 잘 생각해 보려무나. 내가 네게 언제 그러한 약속을 했더냐?”

“분명히……!”

뤼시앵은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오늘, 어제, 구슬을 받았던 때, 이옐라를 처음 만났던 날. 뤼시앵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쐐기를 박듯 이옐라가 말했다.

“순리대로 되돌린다. 나는 그렇게 말했단다.”

“그, 그게…… 그렇지만! 저와 알렉상드르 경이 운명으로 이어졌다고 하셨습니다! 순리대로 돌아간다면 그는……!”

“그래. 그렇게 말했었지. 하지만 말이다, 이미 내 종 자체가 이물이란다. 그런 것에게 순리에 따른 운명 따위가 존재할 리가 없지 않겠니?”

이옐라가 손을 뻗어 뤼시앵의 턱을 움켜쥐었다. 몇 번인가 닿은 적 있는 손은 그때마다 차디찼다. 뤼시앵은 이옐라의 체온에서 시체를 연상했다.

“나의 백성아. 저 좋을 대로 해석했다 원망하는 오만함이 그 아이를 꼭 닮았구나. 하지만 너는 그 아이가 아니지.”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뤼시앵이 본능적으로 몸서리치는 때였다. 이옐라가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보석처럼 아름답고 싸늘한 눈동자에 뤼시앵의 얼굴이 비쳤다. 그는 희게 질린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내게 감사하렴, 어리석은 것아.”

용서받았다고 착각할 법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옐라의 손은 여전히 뤼시앵을 압박하고 있었다.

세상이 점점 까맣게 물들었다. 날카로운 이명이 울렸다. 손발이 천천히 굳고 소리마저 잃었다. 이윽고 시야에 이옐라만이 남은 때였다. 그가 뤼시앵에게 속삭였다.

“볼품없는 몸이나마 사용해 주마.”

털썩.

가냘픈 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샤를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뤼시앵을 보았다.

주제도 모르고 대드는 뤼시앵을 이옐라가 용서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깐의 대화 끝에 쓰러진 것은 오히려 이옐라였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왜 이옐라 님께서…….”

샤를은 뤼시앵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그러나 돌아선 뤼시앵을 보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초록색으로 선명하게 빛나던 평소의 눈이 아니었다. 익숙한 얼굴에 박힌 것은 이리저리 색을 바꾸는 눈동자였다.

샤를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시체 한 구가 지하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도, 흰 피부도, 눈부신 금발도 여전했다. 그러나 부릅뜬 눈은 회색이었다.

“치워라.”

뤼시앵의 몸을 차지한 이옐라가 명령했다. 샤를은 허리 숙여 절하는 척 이옐라의 시선을 피했다. 이러한 것이 현신이라면 물건이나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소년의 시체를 수습한 샤를이 지하를 나갔다. 다급한 몸짓에서는 애써 억누른 두려움이 물씬 풍겼다. 그러나 이옐라는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샤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샤를이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을 때 이옐라는 대리석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 기묘한 회한을 느낀 샤를은 얼른 시선을 피했다.

저것은 정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수십 명의 사람들을 단숨에 죽음으로 몰아넣은 존재다. 그런 이옐라가 회한 같은 감정을 느낄 리가 없었다.

샤를은 걸음을 재촉했다. 이옐라가 뤼시앵의 몸으로 옮겨 갔다는 것을 알려야 했다.

***

이환은 자신을 지배하던 잠기운이 물러가는 것과 동시에 번쩍 눈을 떴다. 가장 먼저 어둑어둑한 사위가 눈에 들어왔다.

다음으로 깨달은 것은 자신의 부자유였다. 의자에 앉혀진 채 팔은 등 뒤에서 결박되었고, 다리는 각각 떨어져 의자 다리에 묶여 있었다.

아직 시각은 어둠에 사로잡힌 채였다. 이환은 남은 모든 감각을 동원해 상황을 탐지했다.

습기 찬 곳이었다. 창도 없는 실내를 몇 안 되는 등불이 밝히고 있었다. 이윽고 눈이 어둠에 적응한 이환은 자신을 중심으로 뻗어 나간 수많은 선들을 보았다.

흔들리는 등불로 인해 자세히 볼 수는 없었으나 선들은 서로 긴밀하게 얽혀 하나의 그림을 이루고 있었다. 문득 이환은 그림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설마.’

황급히 시선을 움직이자 선 끝에 자리한 물체가 보였다. 투명한 꽃송이와 가지로 이루어진 그것은 이환이 바이스발트에서 가지고 나온 성물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다른 성물들 역시 그에게서 일정 거리를 두고 놓여 있었다.

이환의 발아래에 그려진 그림은 한때 그가 애타게 찾았던 귀환 수단이었다. 필요한 성물도 갖춰져 있으니, 이환을 이곳에 둔 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지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서늘한 공포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이환은 몸을 뒤틀었다. 정적만이 존재하던 곳에 소음이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를 옭아맨 밧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런 순간이 되어서야 깨닫다니. 이환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이옐라가 자신을 잠재운 후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아직 이런 상태라는 것은 압살롬이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만약 압살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이환은 이를 악물고 계속 움직였다.

거칠 밧줄에 쓸려 살갗이 벗겨졌는지 미지근한 액체가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래도 노력한 보람이 있어 밧줄이 조금 헐거워졌다. 이환이 더욱 빠르게 손목을 비트는 때였다.

뚜벅.

아주 작은 소리였다. 그러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이환에게는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발소리가 이어졌다. 단 세 걸음 만에 상대는 그나마 빛이 존재하는 곳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뤼시앵.”

이환이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붉은 입술이 미소 지었다. 내리깔린 속눈썹이 천천히 올라가며 특유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이환은 수없이 봐 온 색깔 대신 생소하나 인상적인 눈동자와 맞닥뜨렸다.

이리저리 색을 바꾸는, 세상에 단 하나뿐일 눈. 그것은 이환이 잠들기 전 보았던 이옐라의 눈과 동일했다.

이환의 지척까지 다가온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무생물을 보는 듯한 저 눈빛 역시 기억에 있었다. 그를 노려보던 이환이 입을 열었다.

“압살롬에게 무슨 짓을 했지?”

“저런? 그래도 한때는 연인이었던 아이에 대한 걱정은 없는 것이냐?”

이옐라는 허리를 숙여 이환에게 바싹 다가갔다. 고운 손끝이 이제 자신의 것이 된 몸을 훑어 내린다. 그러나 이환은 이옐라의 눈만 똑바로 올려다볼 뿐이었다. 흥이 식었다고 중얼거린 이옐라가 상체를 일으켰다.

“내가 어린 드래곤에게 준 이틀까지는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단다. 과연 그가 올지는 모르겠지만. 풀기까지 적어도 3일 이상은 소요되는 저주를 걸어 두었거든. 그때까지는 마법을 사용하기만 해도 고통스러울 거란다.”

이옐라는 붉은 입술을 삐뚜름하게 휜 채 돌아섰다. 그대로 그림 밖으로 걸어 나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 이환이 요란스럽게 굴기 직전까지 앉아 있던 소파가 그를 서늘하게 감쌌다.

이환은 반쯤 어둠에 묻힌 이옐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역시 자신은 압살롬에게 해악에 지나지 않는다. 이환은 차라리 압살롬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압살롬이 올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날 어떻게 할 생각이야.”

“건방지구나. 내가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숨통이 끊어질 것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만용인지 머리가 나쁜 것인지…….”

“죽일 마음은 있고? 압살롬에게 희망 고문이든 압박이든 하려면 내가 살아 있어야만 하잖아. 내 말이 틀려?”

이옐라가 대답 대신인 양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분명 뤼시앵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소년처럼 맑았던 이전의 소리와는 달리 어딘지 음험하게 들렸다.

“남은 시간 동안 심심할 테니 몇 가지 이야기나 해 주마. 네가 올라선 그게 무엇인지 알고 있겠지?”

“……글쎄.”

차갑게 대답한 이환은 문득 의문을 느꼈다. 그를 이곳까지 불러온 자는 다름 아닌 이옐라다. 명색이 신인데 굳이 이렇게 번거로운 방법을 쓸 필요가 있을까?

“너를 고향으로 돌려보내 줄 술식이란다. 기쁘지 않니?”

이옐라가 말에도 이환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이환에게서 무엇을 봤는지 이옐라가 애석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리 좋아하는 얼굴이 아니구나. 이제 마음이 바뀐 것이냐? 혹시 돌아가기 싫어졌다거나? 말해 보렴, 나의 종아. 그동안의 노고를 생각해 네가 바라는 대로 해 줄지도 모르잖니?”

상냥한 척 사근사근하게 이어지는 목소리가 끔찍하다. 이환은 이옐라를 노려보며 잇새로 내뱉었다.

“어차피 네가 원하는 대로 할 거,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좀 닥쳐.”

곧바로 응수할 거라고 생각한 이옐라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이환은 내심 긴장했다.

“어린 드래곤과 비슷한 소리를 하는구나.”

압살롬. 이환은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조금의 정보라도 얻을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런 그의 귀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원하는 대로 전부 이루어졌다. 어린 드래곤이 그렇게 말했었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나의 종아?”

이환은 압살롬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를 데려와, 원하지도 않았던 축복을 부여한 뒤 멋대로 써먹지 않았던가. 목적은 하나, 압살롬을 죽이기 위해―

문득 이환은 위화감을 느꼈다. 그가 이옐라로부터 받은 힘은 육체적인 것에 국한되었다. 고작 그런 것으로, 무려 시간마저 되돌릴 수 있는 압살롬을 죽일 수 있었을까?

“내가 네게 바랐던 것은 어린 드래곤의 죽음 따위가 아니란다, 아둔한 종아.”

어느새 가까워진 이옐라가 속삭였다. 이환은 그의 눈에서 증오와 분노, 고통을 읽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이냐? 제아무리 비슷한 형상을 취했다 한들, 그는 드래곤이지 인간이 아니란다. 네가 원숭이를 사랑할 수 없듯, 그도 널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이다.”

내가 아니었더라면 말이지. 이옐라가 나직하게 덧붙였다. 이환은 눈을 부릅떴다.

“무슨 뜻이야.”

“아주 간단한 거란다. 이곳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이세계의 존재를 데리고 와, 그가 원래 가지고 있던 모든 인연을 전부 떼어 나의 피조물에게 붙였지. 동시에 어린 드래곤이 평생 맺어야 할 모든 인연을 마찬가지로 전부 옮겨 붙였단다. 그래, 바로 네게.”

이옐라가 경박스럽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환의 숙인 고개 위에서 떠나지 않았다.

“처음에는 작은 흥미였을 테지. 하지만 어느 순간 자신도 어쩌지 못할 만큼 감정이 커졌을 것이다. 처음으로 욕심낸,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사람. 그 독선적인 존재가 결국 어떻게 나올지 눈에 선하지 않느냐?”

이옐라는 기감을 날카롭게 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이질적인 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가 준 이틀까지는 아직 시간이 제법 남아 있었다. 과연 어린 드래곤이 어떤 꼴을 하고 있을까. 이옐라는 기대에 차 말을 이었다.

“네가 절벽에서 뛰어내린 후 어린 드래곤이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니? 제 본분조차 잊고 미쳐서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었단다. 수억 명의 인간이 그의 손에 죽었지. 그러고서는 후회한답시고…….”

발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왔다. 이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은빛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이옐라가 말했다.

“제 심장의 절반을 떼어서 회귀의 제물로 사용했단다.”

압살롬이 걸음을 멈췄다. 창백한 면상이 볼 만했다. 이옐라는 이환에게서 떨어져 술식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나 이환도 압살롬도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이환과 압살롬은 서로를 응시했다. 이환이 압살롬의 얼굴에 난 상처와 피 묻은 입술, 피투성이 옷을 차례로 훑었다. 압살롬 역시 이환의 파리한 안색과 피투성이 발목을 살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압살롬이었다.

“다쳤잖습니까.”

“너야말로.”

지나치게 무정한 나머지 냉정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압살롬의 짙푸른 눈에 두려움이 스쳤다. 묻고 싶지 않다. 그러나 확인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 들었나요?”

“글쎄. 네가 이야기해 주지 않은 것들? 예를 들어 방금 너도 들은 심장에 대한 내용이라거나.”

이환이 오해할까 두려워 숨겨 둔 이야기가 있었다. 자신의 전부를 부정당한대도, 이환에 대한 마음만큼은 의심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될 거였다면 차라리 그때 전부 말해 버릴 것을 그랬다. 압살롬은 최후의 선고를 앞둔 사람처럼 절망적인 심정으로 이환의 말을 기다렸다.

이환이 핏기 없는 입술을 느리게 움직였다.

“너와는 어떻게든 함께였을 거라는 말?”

“……네?”

이 상황에서 들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압살롬은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을 보며 이환은 속이 좀 쓰렸다.

압살롬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짐작이 간다. 이환은 그 절망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압살롬에게 신뢰를 줬다면, 적어도 이런 상황에서 저런 얼굴을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감정의 원인이 무엇이든 지금의 관계는 이환과 압살롬이 함께 만들어 온 것이었다. 심장의 반을 떼었다는 말에는 좀 놀랐지만 그건 압살롬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이환은 압살롬을 보았다. 그는 환상이라도 마주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당장 달려가 끌어안고 싶었지만, 현재 이환은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부러 짓궂게 미소 지었다.

“드래곤이면서 새가슴이라니까.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얼른 이거나 풀어 줘.”

“……네! 잠시만요.”

이환의 허락에 기꺼움을 감추지 못하며 대답한 압살롬이 술식 안에 발을 들였다.

그가 이환 앞에 무릎을 꿇는 때였다.

“그게 전부냐?”

이옐라가 흔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환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되물었다.

“뭐가 더 있어야 해?”

“드래곤에게 심장은 힘의 원천이자, 그의 육신을 이루는 중심축 같은 것이지. 그게 축났으니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은…….”

끝없이 중얼거리는 이옐라는 넋이 반쯤 나간 듯했다. 이환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단검의 서늘한 날이 밧줄을 끊었다. 겨우 자유로워진 이환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어서 나가자. 여기 있으면 이옐라가 날 지구로 돌려보낼 거야.”

이환을 따라 일어서던 압살롬이 멈칫거렸다. 이환을 보는 청람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 안에서 조심스러운 희망과, 그것을 짓누르고자 하는 의지를 본 이환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어쩌면 압살롬이 가장 원했을 말을.

“함께 돌아가자.”

압살롬의 초췌한 얼굴에 환희가 차오르는 때였다.

“어째서?”

이옐라의 목소리와 함께 술식을 이루는 선이 조금씩 빛나기 시작했다. 한 획씩 내달리기 시작한 빛은 살아 있는 듯 일렁이더니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했다.

술식에서 완전히 떨어진 빛이 끈처럼 움직여 이환의 다리에 휘감겼다. 불길함을 느낀 이환은 황급히 발을 떼었다. 그러나 빛의 끈에 결박된 다리는 움직여지지 않았다. 손을 뻗어 빛을 없애려 했으나 이환의 손은 허공만 휘젓고 말았다.

“이환!”

압살롬이 달라붙어 빛의 끈을 잡았다. 그 순간 하얀 불꽃이 소리도 없이 일었다. 압살롬이 바이스발트를 이루는 자작나무에 손댔을 때와 같은 현상이었다. 이 불꽃이 이옐라의 힘이라는 증거였다.

화상을 입은 손이 벌겋게 부풀었지만 압살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빛은 천천히 흩어졌다.

그제야 이환은 다리에서 시선을 옮겨 압살롬을 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환은 그 의미를 깨달을 새도 없이 압살롬에게 이끌렸다.

“얼른 가요, 이환.”

그러나 두 걸음도 채 떼기 전에 몇 가닥의 빛이 이환의 왼쪽 다리를 옭아맸다. 압살롬이 다시 손을 뻗었지만 기다렸다는 듯 올라온 빛이 이환의 오른쪽 다리마저 묶었다.

이번에는 신음까지 흘리며 빛의 끈을 없앤 압살롬이 이환을 번쩍 들어 안았다. 압살롬은 그대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술식을 벗어나려는 순간, 보이지 않는 벽이 작용해 압살롬과 이환을 안쪽으로 튕겨 냈다.

이환은 비틀거리는 압살롬에게서 내려왔다. 다급히 그를 살피던 중, 이옐라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빛은 술식이 제대로 작동했다는 뜻이야. 술식의 대상을 안전하게 이동시키기 위해 고정시키는 거지. 이동이 끝날 때까지 대상자는 밖으로 나갈 수 없어.”

어딘지 작위적으로 들렸던 이제까지와는 다른 어조였다. 압살롬이 이옐라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이옐라의 눈은 이환에게 고정되었다.

“말해 봐.”

“뭘.”

“상관이 없다니, 어째서야?”

“무슨 말을…….”

신경질적으로 되물으려던 이환은 방금 전 자신이 했던 대답을 떠올렸다. 그사이 이옐라가 말을 이었다.

“약해진 드래곤에게 무슨 쓸모가 있지? 네 소원 하나 제대로 들어주지 못할 텐데.”

몇 개나 되는 빛의 끈이 이환의 팔과 몸통까지 휘감았다. 이환은 자신도 모르게 압살롬을 돌아보았다. 그는 밀랍 같은 얼굴로 이환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이옐라가 악을 썼다.

“대답해!”

“좀 닥쳐! 아까부터 대체 무슨 영문 모를 소리야!”

심장의 반을 떼었다느니, 그래서 힘을 잃고 몸도 축났다느니. 이환에게 있어서는 회귀 전 압살롬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어떻게 괴로워했는지를 상기시키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이옐라가 인연을 조작했다는 것을 비밀로 한 이유도 짐작이 갔다. 어차피 압살롬의 생각이야 뻔하지 않은가. 그런데 자꾸 쓸모니 뭐니 하는 이야기를 도대체 왜―

“아…….”

이환은 이옐라를 돌아보았다. 보석 같은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그런 이유였단 말이지. 순식간에 악의가 치솟았다.

“넌 그런 대접을 받았나 봐? 힘없거나 쓸모없으면 버려지는.”

인간은 아쉬울 때 신을 찾는다. 그 기원을 들어주든 외면하든, 결국 신은 인간의 머릿속에서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이옐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계속 색을 달리하던 눈의 빛이 순간 어두워졌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이환은 그런 그를 무시하고 다시 압살롬에게 집중했다.

몇 개나 되는 빛의 끈이 다시 일어났다. 압살롬이 이환을 감싸듯 끌어안았다. 전신에 마법을 두른 듯, 압살롬의 몸에 닿은 빛이 느리게 사그라들었다.

이환은 연신 터지는 하얀 불꽃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압살롬의 전신을 뒤덮을 화상을 알면서도 차마 그 품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언제나의 체향 대신 피 냄새와 매캐한 냄새가 이환의 코끝을 스쳤다.

‘매캐하다고?’

이옐라의 힘으로 인해 입은 화상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었다. 이환은 황급히 압살롬의 얼굴을 살폈다. 안 그래도 나빴던 안색이 한층 창백해져 있었다. 그때 압살롬이 그를 다급하게 끌어당겼다. 그것이 오히려 비밀이 있다고 실토하는 꼴이라, 이환은 억지로 압살롬을 밀어냈다.

“이환, 제발…….”

“가만히 있어.”

매캐한 냄새의 근원은 목덜미였다. 마치 타들어 간 종이처럼 시커먼 얼룩이 새하얀 피부 위에 번져 있었다. 이환은 천천히 타며 변색해 가는 살갗을 응시하며 물었다.

“이게 뭐야.”

“그, 별거 아니니까요. 이환이 신경 쓰지 않아도……”

“살이 시커멓게 타고 있는데 별게 아니라니!”

이환은 다른 곳도 살폈다. 팔, 발등, 옆구리 등 이곳저곳이 검게 타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점점 어두워졌다. 결국 압살롬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냥…… 내가 드래곤이라 그렇습니다. 힘도 육신도 전부 이 세계에 속해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건 이 세계를 벗어나면 죽게 된다는 의미의, 일종의 경고입니다.”

“알면서 이러고 있어?”

이환은 압살롬을 밀쳤다. 그러나 압살롬은 오히려 더 바싹 다가붙었다. 몇 번을 밀어도 멀어지지 않는 압살롬에게 이환이 외쳤다.

“당장 나한테서…….”

“떨어지라고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하는 말입니까?”

“롬!”

“또 당신 없이 나 혼자 남으라고요?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그때 이환의 팔에 빛이 휘감겼다. 압살롬이 얼른 그를 끌어안아 빛의 끈을 없앴다. 그러나 빛이 사라지는 속도는 처음에 비해 느려진 상태였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은 지구로 쫓겨나고, 압살롬은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무슨 수가 없을까. 이환은 초조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빛나는 술식, 어느새 반쯤 녹아 버린 성물, 널브러진 의자, 넋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하는 이옐라.

이옐라를 보자 분노가 솟구쳤다. 압살롬이 피투성이로 괴로워하는 반면, 일을 꾸민 이옐라는 멀쩡해 보였다.

‘차라리 이렇게 타고 있는 게 이옐라였다면.’

이 세계를 떠나지 못하는 존재는 압살롬만이 아닐 터다. 이옐라를 술식 안으로 끌어들이면 지금 압살롬이 느끼는 고통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이환이 지구에 간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지만, 이옐라야말로 이 세계에서 쫓겨나면 좋을 텐데. 그때 압살롬이 중얼거렸다.

“이옐라를 죽일 겁니다.”

“뭐?”

이환은 압살롬을 보았다. 압살롬의 눈은 이제껏 보인 적 없는 단호함을 품고 있었다. 그 순간 한 가지 사실이 이환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떻게 죽일 건데?”

“어떻게든…….”

“너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마법이라고는 요만큼도 모르는 이환도 지금의 압살롬이 얼마나 약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닌 신을 죽이겠다니. 그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어디에서 끌어온단 말인가.

“남은 심장이라도 사용할 생각이야?”

압살롬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에서 대답을 들은 이환이 눈을 부릅떴다.

“이 멍청이가! 차라리 내가 지구로 돌아가는 게 낫지!”

“하지만…….”

반박하려던 압살롬은 이환의 매서운 눈초리에 입을 다물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잖아. 이옐라가 죽어도 네가 무사하다는 보장이 있어? 이옐라를 감시하기 위해 드래곤이 만들어졌다고 했…….”

압살롬이 이 세계에서 나가지 못하는 이유. 그것과 함께 번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롬, 잠시 귀 좀.”

이환의 이야기를 들은 압살롬이 눈을 깜빡였다. 불가능해? 작은 소리로 묻는 이환에게 압살롬 역시 속삭이듯 대답했다.

“해 본 적이 없어 확답은 못 하지만 어쩌면…….”

압살롬의 목소리는 불안과 미약한 희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로 가만히 당하는 것보다 뭐라도 해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망설일 시간 없어.”

술식에서 올라온 빛을 보며 이환이 말했다. 압살롬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왼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모아 쥔 채 오른손에 든 단검을 움직였다.

썩둑.

긴 은발이 순식간에 짧아졌다. 압살롬은 잘라 낸 머리채를 이환의 손에 쥐여 주었다.

“마력을 담았으니 잠시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짙푸른 눈동자에는 망설임이 가득했다. 그러나 압살롬은 돌아섰다. 이환과 함께일 때와는 달리 순조롭게 술식을 벗어난 그가 몸을 굽혀 선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환은 그런 압살롬을 응시했다. 그가 한 말은 순간적인 발상에 지나지 않았다. 운이 나쁘거나 시간에 맞지 않으면 이대로 마지막일지 모른다.

까맣게 밀려드는 현기증을 애써 뿌리쳤다. 정말로 이것이 마지막이라면 아주 조금이라도 더 많이 압살롬을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소원마저 이루어지지 않았다. 느리게 일렁이던 빛이 이환을 향해 날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이환은 황급히 빛을 피했다. 그러나 빛은 의지라도 가진 양 방향을 틀어 이환을 노렸다. 몇 줄기는 그의 팔다리를 휘감았으나, 압살롬의 은발에 닿은 빛은 힘을 잃고 사그라졌다. 그러나 그 대가로 은발의 일부가 순식간에 타들어 갔다.

압살롬 쪽에 시선을 주었다. 단검을 세워 바닥에 무엇인가를 그리는 모습이 보였다. 이환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재촉의 말을 삼켰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압살롬이 술식 밖에 나가 있어 해를 입지 않는다는 점뿐이었다.

그 순간 빛이 이환을 덮쳤다. 한눈을 판 탓이었다. 머리에 친친 감긴 빛의 끈에 부신 눈을 저도 모르게 감은 사이 시야가 차단되었다. 손아귀도 점점 가벼워져, 은발의 마지막 가닥마저 사그라들었다.

이환은 연신 눈 주변을 긁어내렸다. 그러나 손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초조함에 이를 악무는 때였다. 머리에 휘감긴 빛이 헐거워진 것처럼 스르르 풀어졌다. 간신히 열린 시야로 압살롬이 보였다. 달음박질쳐 가까워진 그가 팔을 벌렸다. 곧 익숙한 온기가 이환의 전신을 감쌌다.

“됐어요.”

압살롬이 헐떡이며 말했다. 문득 이환은 빛이 압살롬에게 미치는 영향을 떠올리고는 다급히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빛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저쪽이에요.”

압살롬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수많은 빛의 끈이 한 지점을 향했다. 그 끝에 선 것은 우울한 낯빛의 이옐라였다.

첫 번째 빛이 이옐라의 다리를 휘감았다. 그제야 이상을 깨달은 듯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와 동시에 무수한 빛의 끈이 이옐라를 덮쳤다.

“뭐……!”

이옐라가 무어라 외쳤으나 첫음절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막혀 버렸다. 빛이 그의 머리를 틈 없이 감싼 탓이었다. 뒤이어 빛이 이옐라의 전신을 휩쌌다.

이환은 압살롬을 술식 밖으로 내보내기 직전의 일을 생각했다.

드래곤은 이 세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은 이옐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이환의 머릿속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쫓아낼 수 없다면 그 반대는 어떨까.’

술식은 성물을 중심으로 일정한 문양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환은 이것이 술식을 이루는 규칙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 규칙이 갖는 성질을 뒤집을 수만 있다면, 이환을 이 세계 바깥으로 튕겨 내려는 성질을 역이용해 이옐라를 봉인할 수도 있지 않을까.

즉흥적인 발상의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이옐라가 빛을 비집고 팔을 뻗었다. 얼굴을 뒤덮은 빛이 뜯겨 나간다. 빛 사이로 드러난 녹색 눈동자가 정확히 이환을 향했다. 그 순간 이환의 몸이 이옐라를 향해 이끌렸다. 이환은 다급히 압살롬을 붙들었다.

“롬!”

“마지막 발악이겠죠. 꽉 잡아요.”

이환을 끌어안은 압살롬이 이를 악물었다. 희미한 신음과 함께 피비린내가 훅 번졌다.

이옐라를 주시하던 이환은 새하얗기만 하던 빛에 다른 색깔이 섞이는 것을 보았다. 저도 모르게 압살롬을 살폈다. 섬세한 턱을 타고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괜찮아요.”

압살롬이 미소 지었다. 이환은 손을 뻗어 그의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 손을 잡아 자신의 옷에 문지른 압살롬이 말을 이었다.

“성물의 힘도 이옐라의 것이니, 이제까지는 저항이 수월했겠지만 이젠 다를 겁니다. 마력은 이옐라가 갖지 못한 것이니까요.”

그 말을 증명하듯 빛이 이옐라를 덮쳤다. 몇 가닥은 이옐라에게 닿아 소멸했으나, 그 몇 배나 되는 빛이 거의 동시에 그를 휘감았다.

어느 순간 이옐라의 발밑이 늪처럼 변했다. 빛에 싸인 몸이 둔탁한 파문을 일으키며 늪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옐라의 억눌린 신음이 지하에 울려 퍼졌다. 다급한 기색이 역력한 소리였다. 이환은 슬그머니 통쾌함을 느꼈다.

파문은 지하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지진이 난 듯 땅이 흔들렸다. 비틀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가눈 이환과 압살롬은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힘을 잃고 다친 이환과, 저주에도 불구하고 마법을 사용한 압살롬. 그들의 발걸음은 여느 때보다 느릴 수밖에 없었다. 등 뒤에서 연신 들려오는 굉음이 그들을 조급하게 했다.

그러나 지하에서 지상으로 이어지는 계단에 도착한 순간 이환은 말을 잃었다. 굳건해야 할 계단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뒤에는 무너져 내리는 바닥, 앞에는 망가진 계단. 이환은 다른 출구를 찾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 압살롬이 이환의 손을 잡았다.

“이곳을 통하지 않은 출구는 없어요.”

이환은 압살롬의 피투성이 얼굴과 옷,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고통으로 얼룩졌던 표정도 떠올렸다. 그러나 결국 압살롬의 손을 마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압살롬이 일으킨 마법이 그들을 감쌌다. 그들의 모습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그 직후 무너진 계단의 파편이 그들이 있던 곳을 덮쳤다.

쿠당탕!

두 사람은 얽힌 채 차디찬 바닥에 나뒹굴었다. 몸을 일으킨 이환은 압살롬부터 살폈다. 부옇게 쌓인 먼지 속에 널브러진 압살롬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더럭 겁이 난 이환이 압살롬의 몸을 가볍게 흔들었다.

“롬! 정신 차려 봐. 일어나!”

다행스럽게도 압살롬은 이내 반응을 보였다. 이환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과, 이윽고 드러난 짙푸른 눈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이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먼지가 부옇게 쌓인 것을 제외하면 눈에 익은 그곳은 바로 이환이 머물던 별궁이었다.

“지금 내 힘으로 이동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조용히 쉴 수 있는 곳은 여기뿐이더라고요.”

이환은 주변을 확인했다. 그러나 힘이 약해지면서 함께 무뎌진 기감으로는 별궁 안의 기척을 감지할 수 없었다.

“여긴 우리뿐이야?”

“네. 그러니 안심해도 괜찮습니다.”

쌓인 먼지로 봤을 때 한동안 사람의 출입이 없었던 듯했다. 이환은 압살롬을 부축해 침실로 향했다. 싸늘한 공기가 그들을 맞이했다.

이환은 침대의 이불을 걷어 먼지를 털어 낸 후 압살롬을 눕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침대 안은 차가웠다. 이환은 겉옷을 벗은 후 압살롬의 옆에 파고들었다. 그러자 압살롬이 미소 지었다. 세상 전부를 손에 넣는대도 이보다 흡족하게 웃을 수는 없을 것이다.

“뭐가 좋아서 웃냐?”

이환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압살롬의 행동을 돌이켜 생각하자 울화가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저주에 걸렸으면 얌전히 그걸 풀 생각이나 하지, 더 심해지라고 마법을 사용해 여기까지 오지를 않나. 거기에 뭐라고? 심장 반을 어쨌어? 게다가 얼굴은 또 왜 이래. 웬 손톱자국이야?”

위기에서 벗어나 안심했기 때문일까. 이환은 어느 결엔가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나 압살롬은 주눅 든 기미 없이 여전히 웃었다. 되레 힘 빠진 이환이 입을 다물었다. 압살롬이 이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그날 이옐라가 화풀이로 긁어서 생긴 상처예요. 보기 흉한가요?”

“뭐, 네 얼굴에 있으니까 상처가 아니라 화장 같아.”

아픈 사람에게 잔소리한 것이 미안했던 이환은 헛기침을 섞어 중얼거렸다. 그러자 압살롬이 이환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다른 것도 변명해 볼까요?”

“됐어. 잠이나 자.”

어차피 전부 이환을 위한 일이다. 이환은 압살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다시 저주에 생각이 미쳤다. 이옐라는 분명 압살롬 스스로 저주를 풀 수 있다고 말했었다.

“저주부터 해결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러려면 마력이 필요한데 지금으로서는 좀 힘들어서요. 며칠 쉬고 나서…….”

정말로 지친 듯, 압살롬은 말하던 중 잠들어 버렸다. 이환은 그를 응시했다. 핏기 없는 안색도, 초췌한 얼굴에 묻은 피도, 들쑥날쑥 잘린 머리카락도 전부 이환을 붙잡기 위해 행동한 결과였다. 죄책감과 함께 기묘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이 선택은 분명 틀리지 않았다. 압살롬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이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

며칠 쉰다고 말한 압살롬은 그 기간을 잠으로 보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환은 내도록 깨지 않는 압살롬을 살폈다. 점점 좋아지는 안색이 아니었다면 흔들어 깨웠을 것이다.

압살롬이 잠든 첫째 날, 하루 종일 압살롬 곁에 붙어 있던 이환은 다음 날이 되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떴다. 굶주림 때문이었다.

창고에서 병조림 등 보존식품을 찾아 침실로 돌아온 이환은 내친 김에 발목도 치료했다. 제법 따가웠던 터라 몇 번인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평소 같으면 벌떡 일어났을 압살롬은 깨어나지 않았다.

다행히 사람이 들이닥치지는 않아 방해받지 않고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하릴없이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대부분 미래에 대한 것이었다.

지금 이환의 몸은 죽기 직전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상태였다. 오늘 아침만 해도 피를 토했다. 이대로 얼마나 살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압살롬은 드래곤을 설명하면서 수명이 5000년 정도 된다고 말했다. 반만 남은 심장이 수명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나, 평범한 인간인 이환보다는 오래 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차이를 감수해야 하는 쪽은 분명 이환이 아니라 압살롬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참을 수 없이 안타까워진 이환은 압살롬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이옐라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중얼거렸다.

이옐라는 이환을 판도라에 빗댔다. 온갖 좋은 것으로 꾸며졌지만, 실은 신이 인간에게 재앙을 내리기 위해 안배했던 신부. 명민한 형은 경계했으나 아둔한 동생은 신부의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기쁘게 그녀를 맞이했다.

“내가 딱히 아름답, 뭐 그랬다는 게 아니고…….”

어쩐지 부끄러워진 이환이 저도 모르게 변명하는 때였다. 상냥한 손길이 이환의 손을 어루만졌다. 얼른 고개를 돌린 이환은 잠이 묻어 몽롱해진 눈동자를 마주했다.

“일어났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인 압살롬이 웃었다. 얼결에 따라 웃은 이환은 다음 순간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이환은 충분히 아름다워요.”

따뜻한 손가락이 이환의 뺨을 더듬었다. 그것이 이윽고 입술에 닿는 것과 동시에 이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환의 필사적인 설명을 들은 압살롬이 생각에 잠겼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듯 눈동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맑았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압살롬은 이환의 발목을 어루만졌다. 압살롬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입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사랑을 ‘어리석다’라고 표현하다니, 그 세계의 사람들은 참 못됐네요.”

“그러냐.”

이환은 조금 허탈하게 웃었다. 해결된 일은 하나도 없음에도 어쩐지 명쾌해진 기분이었다.

며칠이 지나 압살롬의 저주마저 모두 해소한 후, 그들은 별궁을 나섰다. 주변을 둘러본 이환은 황궁 내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던 본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옐라가 봉인되던 날 무너진 모양이었다. 다들 무너진 본궁에 신경이 팔려 이환과 압살롬이 별궁에서 나올 때까지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어디로 가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상관없다. 이환은 그런 생각을 하며 목적지를 물었다. 압살롬도 비슷하게 여겼는지 별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잠시 고심하던 압살롬이 조금 쑥스러운 기색으로 말했다.

“이환만 괜찮다면 갈 만한 곳이 있어요. 마음에 들면 거기서 계속 살아도 되고…….”

“어딘데?”

“내가 살던 집입니다. 여기서 조금 먼 편이라, 이환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여행하려면 말을 타고도 한 달 정도 걸릴 거예요.”

이미 압살롬에게서 언젠가 몸이 회복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후였다. 이환은 부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궁에서 나가요. 이 정도 마법은 사용해도 괜찮겠죠?”

압살롬이 슬그머니 손을 내밀며 물었다. 이환은 탐탁잖은 눈으로 그 손을 응시했다. 그러나 현재 이환의 몸 상태로 황궁을 몰래 빠져나가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환은 압살롬이 내민 손을 잡았다. 마주 잡은 손에서 즐거움이 전해졌다.

압살롬의 마력이 움직이는 순간, 이환은 뒤를 돌아보았다. 위압감 넘치는 황궁이 자리하고 있었다.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광경이었다.

이환은 압살롬을 보았다. 그는 생기 넘치는 얼굴로 이환을 향해 웃고 있었다. 앞으로 줄곧 함께할 얼굴이다. 이환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곧 두 사람이 서 있던 자리에 차가운 겨울바람만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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