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주인은
사냥개를 향해 손을 뻗었다
최초의 기억은 암흑이었다. 손을 뻗자 단단한 벽이 느껴졌다. 그는 본능적으로 이것을 부숴야 한다고 깨달았다. 팔다리를 휘젓고 머리로 들이받아 벽을 무너뜨렸다. 그러자 거대한 존재가 그를 반겼다.
그가 벽이라고 생각한 것은 이제껏 그를 외부로부터 보호해 주던 알껍데기였다. 그것에서 벗어나 땅에 처음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 머릿속에 한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압살롬.’
그는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대한 존재는 자신을 안드레아스라고 소개했다. 압살롬은 그가 유일한 동족이라는 것을,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자신이 혼자 남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 세대에 한 개체만 존재하는 희유의 존재, 드래곤. 압살롬은 네 번째 탄생한 드래곤이었다.
희귀한 만큼 탄생도 특이했다. 전대 드래곤이 죽을 때가 다가오면 땅은 알을 생성한다. 시간이 흘러 알에서 어린 드래곤이 태어나면, 전대 드래곤은 그가 성장하기까지 약 100년을 더 살다가 하늘로 향한다. 그것이 세대교체다.
드래곤의 수명은 5000년가량이다. 이 지상에 살아 숨 쉬는 생명 중 독보적으로 긴 수명이었다. 그 시간 동안 드래곤은 단 하나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이옐라의 감시와 세상의 균형. 드래곤은 그것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오랜 옛날, 세상에 생명체가 만들어지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주 오래전, 총 세 명의 신이 존재했다.
날개 달린 늑대를 닮은 마지르.
뱀을 닮은 시스룬.
인간을 닮은 이옐라.
당시 세계에는 그들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그들은 끝없는 적막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 움직이는 것, 즉 생명체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각각 자신의 형상을 본뜬 생명체를 만들었다. 마지르는 몬스터를, 시스룬은 동물을, 이옐라는 인간을.
몬스터와 동물은 쉽게 세계에 적응했다. 문제는 이옐라가 만든 인간이었다. 원래도 세 신 중 힘이 가장 약한 이옐라 탓인지 인간은 온갖 것들이 충돌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다. 제대로 자라지도 못하고 시들어 가는 인간을 보며 신들은 연민을 느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날개 달린 늑대, 마지르였다. 마지르는 제힘으로 가능한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그러고는 인간이 견디기에 무거운 것들을 전부 제 등에 얹어, 그것이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았다.
시스룬은 저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 그의 배 아래에는 인간이 견디기에는 가벼운 것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그는 그것들이 위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깔고 앉아 똬리를 틀었다.
그렇게 그들은 하늘과 땅이 되었다.
그제야 인간은 제대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사라진 것들을 마력이라고 부른다. 사라진 마력은 잔재만 남아 마지르와 시스룬의 피조물에게 전해졌다. 인간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긴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그들의 이름조차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다. 고작해야 풍습을 통해 흔적만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한편 마지르와 시스룬은 혼자 남은 이옐라가 독주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이 되기 전, 둘은 힘을 합쳐 그들을 닮은 드래곤을 만들었다. 이옐라를 감시하고 세상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다행스럽게도 첫 번째와 두 번째 드래곤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문제는 세 번째 드래곤 안드레아스 대에서 일어났다.
당시 잠시 현신했던 이옐라는 자신을 꼭 닮은 외모의 남자를 발견했다. 이옐라는 남자에게 자신의 권능을 퍼부었다. 한 왕국의 힘없는 막내 왕자였던 그는 이를 바탕으로 왕이 되었다.
이후 남자는 인근 왕국들을 정복해 스스로 황제라고 일컬었다. 이옐라는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 승리할 수 있도록 수를 썼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인간과 몬스터가 죽음을 맞이했다.
안드레아스는 이것이 세상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제재를 걸어 가능한 모든 것이 제 흐름대로 돌아가도록 했다.
황제이자 폭군이었던 남자는 이옐라가 주었던 힘을 쓸 때마다 몸이 썩어 들어가는 저주를 받았다. 결국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된 남자는 제위에서 쫓겨났고, 그가 이룬 제국은 갈가리 찢겨 나갔다. 남자는 모든 것을 부여했다가 빼앗은 이옐라를 원망하면서 민중의 돌에 맞아 죽었다.
이옐라는 자식처럼 여긴 인간이 파멸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안드레아스는 상당히 나이가 많았고, 그런 만큼 현명하고 강력한 드래곤이었다. 힘의 남용으로 약해진 이옐라로서는 도무지 파고들 틈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옐라는 힘을 쌓으며 기다렸다.
이윽고 네 번째 드래곤 압살롬이 태어났다. 안드레아스가 하늘로 올라간 날, 이옐라는 이 미숙한 드래곤을 없애기 위한 활동을 개시했다.
이옐라는 먼저 신탁을 통해 인간과 몬스터의 대립 구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구도 안에 드래곤을 끼워 넣었다. 어느 순간 몬스터도 아닌 압살롬이 그들의 왕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러나 압살롬은 나서지 않았다. 인간 대 몬스터의 대립 구도가 균형을 해친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상당수 몬스터는 인간을 주식으로 삼았고, 당연하게도 인간은 그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제법 시간이 흐르고, 그럼에도 끝나지 않는 긴 전쟁에 지친 사람들은 기원했다. 몬스터를 일소할 수 있는 힘을 내려 달라고. 그 기원이 이옐라에게는 힘이 되었다. 그것을 원동력 삼아 이옐라는 일을 꾸몄다.
어느 날 그에 대한 소문이 압살롬의 귀에 닿았다.
‘이옐라가 적의 수괴를 쳐부수기 위해 대리인을 보냈다.’
신마저 조율할 수 있는 권능의 드래곤을 죽이기 위해 한낱 인간을 내려보냈다니. 드물게 흥미를 느낀 압살롬은 그 대리인이라는 자를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대리인에 대한 첫인상은, 화려한 수식어나 소문과는 정반대로 수수하다는 것이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는 이곳에서도 흔한 조합이었다. 밀색의 피부가 조금 드물기는 하나, 다소 밋밋한 이목구비에 묻혔다.
그렇다고 못생겼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뜯어볼수록 묘하게 눈이 갔다. 압살롬은 좀 더 두고 보기로 했다.
며칠 관찰한 대리인은 참 재미없게 사는 자였다. 명령을 받으면 나가서 몬스터를 죽인다. 그리고 돌아와 수련하거나, 그에게 별 감정도 없는 듯한 연인을 애지중지 떠받든다.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면 자신이 가짜 대리인이라고 주입받았다는 것일까. 그것 이외에는 별스러울 것도 없는 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은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알렉상드르.’
참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름으로 불릴 때마다 대리인의 눈빛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게 거슬렸고,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접근했다.
‘압살롬이라고 합니다.’
‘……이환.’
압살롬은 이것이 대리인의 진짜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하는 갈색 눈동자를 똑바로 보며 대리인의 이름을 불렀다.
‘이환.’
그 순간 내내 무표정을 고수하던 대리인이 슬며시 웃었다. 그것은 금세 사라졌지만, 압살롬은 대리인의 얼굴에서 한참 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후로도 그들의 인연은 이어졌다. 이환이 황궁을 빠져나와 술집을 찾으면 압살롬은 자연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그 관계에 변화가 생긴 것은 몇 개월 후의 일이었다.
그날도 압살롬은 여느 때처럼 이환을 만나러 갔다. 그러나 그에게 다가갈수록 기분 나쁜 냄새가 느껴졌다.
“왔어, 압살롬?”
압살롬을 발견한 이환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웃었다. 시간은 밤이었고, 변변찮은 등불이 전부인 술집 안은 어둑어둑했다. 압살롬이 인간이었다면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난 감각은 이환의 창백한 얼굴과 희게 질린 입술을 놓치지 않았다.
술집 2층에는 대여 가능한 방들이 있었다. 압살롬은 평소보다 빠르게 취한 이환을 부축해 그리로 올라갔다. 등 뒤에서 저속한 응원과 휘파람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같으면 무시했을 텐데, 이상하게도 목이 바짝바짝 말랐다.
이환을 침대에 눕히고 아까부터 피 냄새를 풀풀 풍기던 옆구리를 확인했다. 두꺼운 외투 아래의 옷은 이미 피가 배어 있었다. 상의를 벗기자 어설프게 감긴 붕대가 보였다.
압살롬은 시뻘겋게 젖어 이미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붕대를 잘랐다. 이윽고 드러난 상처는 아주 가관이었다. 몬스터의 발톱에 당한 듯한데, 며칠 된 상처인지 피와 고름이 섞여 있었다. 제대로 치료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압살롬은 이유 모를 분노를 느꼈다.
‘이게 뭔가요. 주변에서 치료도 해 주지 않았습니까?’
‘응? 으응…….’
‘이러고 술을 마시러 옵니까? 제정신이에요?’
이환은 무작정 고개를 저었다. 압살롬은 주정뱅이의 무의미한 몸짓이라고 생각하며 상처를 치료했다.
만취해 몽롱한 눈으로 압살롬을 보던 이환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것이 묘하게 외로워 보여서 압살롬은 조금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렇게 자랑하던 연인이라도 보고 싶어졌나요?’
스스로 물었음에도 마음에 들지 않아 얼굴을 찡그리는 때였다. 손등 위에 뜨거운 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이환이 울고 있었다.
‘이, 이환? 아니 왜……. 아팠나요? 내가 너무 붕대를 세게 감아서…….’
이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만 뚝뚝 흘렸다. 그게 더 당황스러워서 압살롬은 허둥거렸다. 저 눈물만이라도 없애고 싶어서 이환의 뺨을 감쌌다. 그러자 이환이 고개를 기울여 그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쿵.
누군가가 심장을 망치로 내려친 듯했다. 아니, 얻어맞은 것은 머리일지도 모른다. 압살롬은 지독한 현기증에 눈을 감았다. 이대로 계속 이환을 보고 있으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곧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는 싫다. 여기서 나가고 싶어.’
작은 목소리였으나 압살롬의 귀에는 우레처럼 들렸다. 그는 바짝 마른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왜…… 그런 말을 합니까? 당신에게는 연인도 있잖아요. 그밖에도 당신이 좋아할 만한 것들이 잔뜩…….’
이환은 고개를 저었다. 거칠게 부르튼 입술이 진심을 내보였다.
‘이곳은 외로워.’
드래곤이 아니었다면 듣지 못했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만취 상태에서도 이토록 조심스러워야 한다니. 압살롬은 이를 악물었다.
치료가 끝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환은 곯아떨어졌다. 압살롬은 잠든 그를 조용히 응시했다.
이 세계에 단 하나뿐인 존재. 그 점에서 그들은 참 닮은꼴이었다. 압살롬은 그 공통점을 이환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그럼 그들은 그 공통점으로 묶일 수 있을 테고, 그것으로써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환은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압살롬은 드래곤, 이환이 최종적으로 무찔러야 할, 몬스터의 수괴니까. 그것을 깨닫는 순간 가슴이 써늘하게 식었다. 그렇게 그 밤은 이유 모를 차가움과 함께 지나갔다.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때 이환의 신성성에 이의를 제기한 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자는 이환이 진정으로 이옐라의 사자라면 몬스터 따위에게 상처를 입지 않을 것이며, 다친다 하더라도 신의 가호로 금세 나을 것이라 주장했다. 그래서 이환은 의사를 부르기는커녕 아프다는 기색조차 내보일 수가 없었다.
그 안쪽을 들여다보면 황태자 샤를과 관련된 권력 다툼이 있었으나 압살롬에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그 미련하고 우직한 사람이 외로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가 솔직하게 제 마음을 털어놓고 감정을 표출하도록 만들 수 있다면 그저 행복할 것 같았다.
시간이 흘러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이미 압살롬은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머리 꼭대기까지 담근 후였다.
드래곤은 타고나길 신에 대응하는 존재였다. 신이 만물을 공평하게 아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드래곤 역시 그래야 했다. 신이 한 생물에게 집착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이미 전해 듣지 않았던가.
압살롬은 자신의 마음을 있는 힘껏 부정했다. 주인에게 인정받지 못한 사랑의 말로를 모르는 자의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부정당한 사랑은 심장에 숨어 날개를 펼칠 때만 기다렸다.
‘아, 이거? 뤼시앵이 준 거야. 어때, 어울려?’
그리고 그것은 지독한 질투와 함께 제 존재를 인정받았다. 세상에는 차라리 미치는 것을 바랄 정도로 괴로운 감정이 존재한다. 압살롬은 그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몇 번이나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당신은 그저 속고 있을 뿐이며, 언젠가 저들 손에 살해당할지 모른다고. 그러나 압살롬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묻는다면 대답할 말이 없기 때문이었다. 정체를 속이고 시작한 관계의 불안정함이 그의 입을 다물게 했다.
대신하여 말했다. 진심으로 말해도 이 관계에 지장이 없을 구애의 말을.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다.
깊어지기만 하는 사랑, 끊임없이 치받아 오는 질투.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사랑한다는 것뿐인 자신.
아무리 반복해도 같은 말이 되돌아오지 않는 구애의 말은 메아리보다 쓸모없었다. 하늘 같은 자긍심이 깎여 나갔고, 그는 점점 지쳐 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눈이 돌아갔다. 이환을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드래곤으로서의 존재 의의조차 아무래도 좋았다. 결국 그는 이제껏 그 어떤 드래곤도 한 적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타협하지요. 구세의 기사, 그만 내준다면 몬스터를 뒤로 물리겠습니다.’
몬스터를 조종해 군대처럼 편성하여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러고는 이환이 그 처리를 위해 황궁을 비운 사이 본모습으로 나타났다. 그것이 이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그가 자신의 것이 된다면.
그러나 만신창이가 된 채 버려진 이환을 본 순간, 압살롬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뒷배 없는 영웅의 말로가 어떠할지 익히 짐작하지 않았던가. 휴전과 함께 쓸모가 없어진 이환을 황실이 고이 내줄 리가 없었다. 결국 이환에게 돌아간 것은 오물로 얼룩진 명예와, 복수에 대한 꿈조차 꾸지 못하도록 잘려 나간 두 팔, 생기 잃은 눈이었다.
넋을 잃은 채 사과의 말을 중얼거리는 때였다. 이환이 절벽 끝에서 몸을 던졌다. 압살롬이 정신을 차렸을 때, 이환은 이미 산 아래의 몬스터 무리로 떨어진 후였다.
산산조각 나 그 형태조차 제대로 맞추기 힘든 이환의 시신을 본 순간 압살롬은 문자 그대로 미쳤다.
제국은 온통 불길에 휩싸였다. 점점 잿더미가 되어 가는 제국을 굽어보며 황궁으로 향했다. 황실이 그곳에 이환을 감춰 두고 내주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황궁 구석구석을 돌아봐도 이환의 모습은 없었다. 분노하여 황궁 일부를 불태우던 중 누군가가 외쳤다.
‘알렉상드르 경은 어디에 있나!’
알렉상드르. 이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자뿐만이 아니었다. 이곳저곳에서, 황궁만이 아닌 그 바깥에서도 ‘알렉상드르 경’을 외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압살롬도 그 소리를 따르듯 이환을 찾았다. 그러던 중 금발의 청년을 발견했다. 이환이 그토록 아끼던 연인 뤼시앵이었다. 지독한 질투와 원망이 압살롬을 움직였다. 정신을 차렸을 때 뤼시앵은 운석에 맞아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럼에도 이환은 나타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불러도, 압살롬이 찾아도, 연인이 죽어도. 그제야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그때까지도 ‘알렉상드르 경’을 부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환은 죽었는데, 그를 죽인 자들이 이제 와서 찾는 꼴이라니.
무엇보다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자신마저도 그런 자들 중에 속해 있다는 사실이었다.
황궁 위로 운석이 쏟아졌다. 운석은 생물과 무생물을 막론하고 무자비하게 내리쳤다. 이윽고 남은 폐허 위에서 압살롬은 결심했다.
지금 이곳에 이환이 없다면 그를 만나러 가면 된다.
그리고 그때는 부디 자신의 욕심대로가 아닌, 이환의 바람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길.
이야기를 마친 압살롬이 고개를 숙였다. 이환은 그의 정수리를 물끄러미 응시하다 말했다.
“고개 들어.”
머뭇거리던 고개가 느리게 올라왔다. 이환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압살롬을 보다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압살롬이 체념한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우븝!”
거친 손이 압살롬의 양 뺨을 꾹 눌렀다. 문어처럼 입술을 쑥 내민 압살롬은 어안이 벙벙하여 이환을 보았다.
“때릴 줄 알았냐?”
“느에…….”
불분명한 발음이 새어 나왔다. 이환은 픽 웃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쪽.
입술 안쪽의 점막이 마찰하며 사랑스러운 소리가 울렸다. 압살롬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환은 그를 놓아주며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나 살살 하고.”
“아닙……!”
“그래. 엄밀히 말하자면 거짓말은 안 했겠지. 하지만 전부 다 말한 것도 아니잖아. 얼씨구? 불리해지니까 입 다무는 거 봐라.”
압살롬은 슬그머니 눈을 피했다. 그러자 이환이 혀를 차더니, 압살롬으로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을 했다.
“마법이 약화된 건 회귀의 대가야?”
예상 밖의 질문을 들은 압살롬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환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할 줄 알았냐?”
“아, 그……. 숨기려던 건 아닙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말하지 않은 것뿐이에요.”
“그게 중요하지 않으면 뭐가 중요한데.”
이환은 지금 그가 가진 힘을 전부 잃은 상황을 생각해 보았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회귀 직전의 그가 정확히 그러했기 때문이다.
갈구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고, 지키고 싶은 사람을 보호하지 못했던 그때의 심정은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네가 말한 것들 중 일부는 나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어. 차원이동 했다는 이유만으로 괴력이 생길 리가 없잖아.”
그뿐만이 아니었다. 원래 세계로의 귀환에는 성물, 즉 신의 힘이 필요하다. 그것을 알았을 때 이환은 생각했다. 혹시 그를 이 세계로 이동시킨 힘 역시 신의 것이 아닐까.
이환의 차원이동으로 인해 이득을 본 세력은 크게 셋이다. 첫 번째는 제국. 두 번째는 이환이 승리함에 따라 이옐라가 칭송받으면서 덩달아 득을 본 교황청. 그리고 세 번째가 바로 이옐라 본인이다. 이환은 이 셋 중 하나가 자신을 의도적으로 불러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제국이 거짓말한 이유는 짐작이 갔다. 당시 이환은 지구로 돌아가는 것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넌 우리의 필요에 의해 차원이동 했다.’라고 말해 봐야 거부감만 커졌을 터다. 게다가 귀환을 미끼로 삼는 것이 움직이기도 훨씬 쉬웠을 것이다.
“제국에 속은 게 분하기는 하지만…… 진실을 알았더라도 별반 달라진 건 없었을 거야.”
이환은 씁쓸하게 말을 마쳤다. 방 안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압살롬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것으로 끝인가요?”
제국에 대한 복수라도 말하고 싶은 것일까. 그렇게 생각한 이환이 압살롬을 살폈다. 그러나 망설임과 두려움을 품은 얼굴을 보니 그런 의미는 아닌 듯싶었다.
달리 드는 생각이 없었던 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압살롬이 입술을 깨물었다. 몇 번이고 달싹이던 입술에서 겨우 떨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신이 그런 꼴을 당한 것은 전부 내 탓이라고요. 내가 욕심만 내지 않았다면 당신은 좀 더……!”
딱!
“윽.”
압살롬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부여잡았다. 단순한 딱밤이었지만 이환의 힘이 강하다 보니 제법 효과가 있었다. 이환이 한심하다는 빛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이걸로 퉁치자.”
“네?”
“말해 두지만 난 내 죽음에 네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네가 계속 질척거릴 것 같아서 말이다.”
압살롬이 입을 딱 벌렸다. 두서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질척…….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왜 책임이 없다는 겁니까!”
“네가 아니었더라도 난 곧 죽었을 테니까.”
당시 이환은 건강이 악화된 상태였다. 오히려 압살롬이 휴전을 요구하지 않아, 그때의 상태 그대로 계속 싸웠다면 더 빨리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환이 그렇게 말했음에도 압살롬은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다. 결국 이환은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생각을 입에 올렸다.
“나만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네가 이런 식으로 다치고 아플 필요가 없었을 거야. 그러니 사과해야 할 건 오히려…….”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온전히 피해자가 아닙니까? 원해서 온 것도 아니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이환은 압살롬이 격앙된 소리로 늘어놓는 말을 조용히 들어 주었다. 그러고는 숨을 몰아쉬는 압살롬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도 너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 롬.”
이환은 압살롬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조금 거칠어진 감촉이 안타까워서 저도 모르게 입을 맞추었다.
압살롬은 얼굴에 연신 퍼부어지는 키스에 넋을 빼앗겼다. 그가 예상한 그 어떤 미래와도 다른 결과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꿈인가 싶어 눈을 질끈 감자 눈꺼풀에 이환의 입술이 닿았다.
감았던 눈을 떴다. 이환이 상냥한 눈빛으로 압살롬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 모습을 다시 보게 되다니. 압살롬은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퉁치자.”
“뭐예요, 그게…….”
압살롬은 고개를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부끄럽게도 울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소리도 금세 사라져 버렸다.
어서 오라는 듯 스르르 열린 이환의 입술에 제 입술을 댔다. 두 혀가 얽혀 들었다. 혀를 길게 훑자 이환이 나직하게 신음했다. 그 순간 허리가 오싹 떨렸다.
깊게, 더 깊게. 압살롬은 하나가 되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해 파고들었다. 이환의 턱을 타고 흐르는 타액조차 아까웠다. 꼼꼼하게 핥고 다시 올라가자 이환이 웃었다.
“왜 웃습니까?”
압살롬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그러자 이환이 그의 뒤통수를 잡으며 대답했다.
“처음 키스했던 날이 생각나서.”
“노숙했던 날의 일을 말하는 건가요?”
“그건 키스가 아니지. 잘 봐줘야 뽀뽀 정도…….”
뽀뽀라고 말하며 뾰족해진 입술이 묘하게 귀엽다. 압살롬은 다시 이환에게 달려들어, 그만하라며 밀려날 때까지 한참을 물고 늘어졌다. 압살롬을 겨우 떨어뜨린 이환이 가쁜 숨결로 웃었다.
“나 혼자 나갔다 들어왔던 때 말이다. 그날도 네가 나한테 키스했잖아.”
“그게 뭐 어쨌길래 웃습니까?”
“별건 아닌데. 무작정 혀만 들이밀던 네가 이만큼 발전했다고 생각하니까 그냥 웃음이 났어.”
압살롬은 그날을 떠올렸다. 바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났다.
이환이 자신을 두고 혼자 뤼시앵을 만나러 갔다는 데 대한 질투, 내내 욕심만 내던 것에 손끝이나마 닿았다는 환희, 그러나 진정으로 손에 넣을 수 없으리라는 절망.
되살아난 감정에 눈앞이 흐려진다. 이환과의 거리는 그때에 비해 현격하게 가까워졌다. 그러나 결국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환은 언젠가 그의 세계로 돌아갈 테니까.
“읍!”
압살롬은 이환이 낸 외마디 소리를 삼키고 달려들었다. 사나운 기세에 눈을 휘둥그레 떴던 이환이 금세 신음을 흘리며 무너졌다.
압살롬은 그동안의 입맞춤으로 파악한, 이환이 특히 잘 느끼는 부분을 혀끝으로 문질렀다. 이환의 몸이 부드럽게 이완되면서, 압살롬의 기세를 이기지 못한 몸이 천천히 기울어졌다.
이환은 머리가 시트에 닿는 순간 눈을 떴다. 압살롬은 열기로 흐려진 갈색 눈동자를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비친 자신이 너무도 야비해 보여서, 이번에는 압살롬이 눈을 감았다.
압살롬 때문에 이 세계에 불려온 사람이다. 차원이동, 그 한 단어 속에는 무수히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환은 가족을 잃었다. 그가 삶을 위해 그때까지 들인 노력은 하루아침에 모든 가치를 상실했다. 대신 주어진 것이 무기와 위선 그리고 가짜 애정이라니, 무슨 염치로 이환을 만류한단 말인가.
할 수만 있다면 이환을 따라 그의 세계로 가고 싶다. 그렇게 생각했던 압살롬은 자조했다.
그것을 이환을 달가워하기나 할까. 어차피 압살롬도 이 세계의 부산물이다. 귀환한 이환의 입장에서는 꺼림칙한 존재일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끝없는 자괴감이 압살롬을 갉아먹었다.
차라리 이대로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얽힌 혀를 연신 비비며, 압살롬은 이곳부터 녹아서 이환에게 흡수되길 기원했다.
문득 언젠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일이 떠올랐다.
본디 드래곤이란 욕망이 거세된 존재다. 객관적인 감시를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환을 좋아한다고 깨달은 날도 그에게 욕정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어림짐작을 비웃듯 그날 밤 압살롬의 꿈에 이환이 찾아들었다. 꿈속의 압살롬은 이환의 다리 사이에 제 성기를 처박고 개처럼 헐떡였다.
꿈에서 깨어난 후, 압살롬은 지독한 갈증을 느꼈다. 드래곤으로서의 자신을 의심해야 마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단지 하나, 쾌락의 정점에 올랐던 상태 그대로 이환에게 녹아들어 하나가 되고 싶었다.
당시 꿈에서 느꼈던 감각을 떠올린 압살롬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이환이 압살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압살롬은 이환을 내려다보았다.
압살롬이 끈질기게 빨고 깨물었던 터라 이환의 입술은 붉게 부어 있었다. 헐떡이던 이환이 목울대를 크게 울렸다. 두 사람의 타액이 이환의 목 너머로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그 순간 눈앞이 아찔해졌다.
압살롬은 충동 그대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이환이 그의 이마를 밀었다.
“잠깐 기다려. 너무 많이 해서 아프다고.”
“조금만요. 응? 이환, 조금만 더요.”
“……너 진짜 어디서 그런 애교를 배워 온 거야.”
한숨을 쉰 이환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압살롬은 재빨리 그의 위에 올라탔다. 이제 이환은 어디에도 못 간다. 희열이 압살롬의 배 속을 뭉근하게 휘저었다.
압살롬은 이환의 입술 옆쪽에 지그시 입 맞추었다. 그가 봐도 아플 정도로 퉁퉁 부은 입술에 미안해졌기 때문이다. 그때 이환이 아래쪽으로 손을 뻗었다.
“흐읏!”
압살롬은 흠칫 떨며 신음했다. 이환이 그의 다리 사이를 움켜쥔 것이다.
“아까부터 이게 신경 쓰였거든.”
불룩 솟아오른 바지가 그 아래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이환은 엄지로 바지 위를 슬슬 문질렀다. 그러자 천이 조금씩 젖어 들었다.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리도 하는지, 압살롬이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이환에게 매달려 왔다. 위로는 이환의 입술을 물고 늘어진 채, 밑으로는 연신 아랫도리를 비벼 댔다.
점점 단단해지는 성기를 느끼며 이환은 목이 탔다. 저게 허벅지가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 움직였으면 싶었다. 그래서 쥐었더니 압살롬이 재미있을 만큼 민감하게 반응했다. 마치 자신이 뭘 하고 있었는지 몰랐다는 눈빛이었다.
이환은 젖어서 짙어진 천 주변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압살롬이 고조되는 성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 틈을 타 몸을 일으켰다.
압살롬의 바지를 고정한 매듭을 풀고 앞섶을 젖혔다. 속옷까지 끌어 내리자 두툼하게 곧추선 성기가 드러났다. 이환은 한 손에 그것을 쥐고 문지르며, 다른 손으로는 자신의 바지를 벗었다.
마음이 조급한 탓인지 끈을 푸는 손이 자꾸 헛돌았다. 바지를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기는데 손등에 압살롬의 손이 닿았다.
“내가…….”
한없이 고결한 인상을 주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다. 청람색 눈동자에 서린 것은 명백한 욕정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환은 아찔해졌다.
압살롬이 떨리는 손으로 이환의 바지를 풀었다. 아직 완전히 발기하지는 않은 성기를 희고 고운 손이 휘감았다. 체온이 높은 압살롬은 손가락마저 뜨거웠다. 그것이 기분 좋아서 나직한 한숨을 흘리자 압살롬이 웃었다.
이환이 해 준 것을 고스란히 돌려주겠다는 듯, 압살롬은 귀두 끝을 부드럽게 문지르더니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기둥을 길게 훑은 손이 다시 위로 올라오길 반복했다.
느리고 감질나는 손길은 부드럽기는 했으나 원하는 것을 채우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이환은 어느 순간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여 압살롬의 성기를 자극했다. 그러자 일순 호흡을 멈춘 압살롬이 그 손을 붙들었다.
“놔 봐. 같이……!”
이환은 소리 없이 신음했다. 압살롬의 손톱이 요도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그 반응을 깨달은 압살롬이 좀 더 이곳저곳을 만지기 시작했다. 이환은 붙잡혔던 손도, 하려던 행동도 모두 잊어버렸다.
서늘했던 방이 뜨거운 숨결에 달아오른다. 조금 빡빡했던 살갗이 체액으로 찔꺽거린다. 이환은 압살롬의 입술을 삼키고 세게 빨았다. 부은 입술의 통증은 어느새 잊어버렸다.
회귀 전에는 연인 때문에, 회귀 후에는 이런저런 일들로 금욕할 수밖에 없었던 이환은 오랜만의 자극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느 결엔가 감았던 눈을 간신히 뜨자 쾌락에 젖은 얼굴이 보였다. 여기서 더 흥분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압살롬의 얼굴을 보자 감각이 더욱 고조되었다.
이환이 얕은 신음을 흘리자 압살롬의 손이 더 빠르게 움직였다. 이환은 쾌감을 이기지 못해 진저리 쳤다. 좋아요? 응? 연신 물어오는 목소리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압살롬이 다가붙었다. 그의 체향이 훅 끼치는 순간 지독한 고양감과 함께 이환은 사정했다.
잔존한 쾌감에 떨며 압살롬을 보는 때였다. 압살롬의 집요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가 자신이 가는 것을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저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보지 마.”
이환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압살롬을 외면했다. 그 순간 어깨가 강하게 밀리며 뒤로 넘어갔다. 달려든 압살롬이 이환의 성기를 틀어쥐었다.
“읏! 롬! 흐앗!”
방금 전 사정하여 한껏 예민해진 부분을 압살롬이 무자비하게 어루만졌다. 그의 뜨거운 입술이 이환의 귀와 목을 연신 지분거렸다. 지독하기까지 한 쾌감이 오히려 고통스럽다. 이환은 압살롬의 어깨를 밀었다.
“기다려!”
“싫습니다.”
압살롬의 목소리는 해소되지 않은 열기로 얼룩져 있었다. 이환은 시선을 내렸다. 아직 발기한 채인 성기가 꺼떡거리며 액을 흘리고 있었다. 같은 남자로서 지금 압살롬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알 만했다. 이환은 검붉은 기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을 압살롬이 잡았다.
“이환…….”
압살롬의 다른 손이 이환의 허벅지를 길게 쓸고 내려갔다. 회음부를 맴돌던 손가락이 그 아래쪽, 배설 이외의 용도로 사용해 본 적 없는 구멍을 쓰다듬는다. 이환은 압살롬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문득 이환은 압살롬이 자신의 욕구나 고집을 내세운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그는 돌아가지 말라는 말조차 입 밖에 낸 적이 없었다.
말하면 안 된다고, 그럴 권리조차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압살롬이 원하는 일이라면 들어주고 싶었다.
이환은 몸에서 힘을 뺐다. 무언의 허가를 알아차린 압살롬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몸을 수그린 그가 이환에게 키스했다.
자연스럽게 미끄러진 입술이 이환의 목으로 향한다. 작은 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앞섶이 휑했다. 시선을 내리자 활짝 열린 셔츠가 보였다.
이환의 셔츠를 헤친 압살롬이 유두를 핥았다. 뜨거운 혀와 숨결이 이미 빳빳하게 선 유두를 간지럽혔다.
판판한 가슴에 달린 돌기 두 개. 그곳을 통해 이토록 야릇한 감각을 느낄 줄은 몰랐다. 이환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상한 소리를 낼 것 같았다.
“거기 이제…… 그, 만……!”
“좀 더 만지고 싶어요. 더 많이, 구석구석 남기지 않고 전부.”
압살롬은 입술로 이환의 가슴을 괴롭히며, 손으로는 엉덩이를 배회했다. 구멍 주변을 슬그머니 더듬던 손가락이 조금 더 안쪽에 자리한 주름을 매만졌다.
압살롬의 손가락은 이환의 정액으로 조금 젖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빡빡한 안쪽까지 파고들기에 역부족이었다. 몇 번을 시도해도 손가락이 들어가지 않자 초조해진 압살롬이 몸을 일으켰다.
“롬?”
압살롬은 아직 허벅지에 걸쳐진 채였던 이환의 바지를 빠르게 끌어내렸다. 속옷마저 벗기자 곧게 뻗은 다리가 보였다. 압살롬은 흉터가 가득한 피부에 키스했다. 욕심껏 빨자 빨갛게 자국이 남는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시선을 내려 이환을 보았다. 자신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는 그는, 지금 자신이 하려는 행동을 알면 기겁하여 말릴 것이다.
“일단 사과할게요.”
“나한테 잘못한 거 있냐?”
방금 전 했던 대화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는지 갈색 눈동자가 슬쩍 날을 세웠다. 노려보는 눈빛이 상기된 얼굴과 어우러져 지독히도 도발적이었다. 압살롬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잘못이라기보다는 이환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요.”
“뭘?”
압살롬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단단한 엉덩이를 잡고 슬쩍 벌리자 숨어 있던 분홍색 주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을 눈으로 탐욕스럽게 핥은 압살롬이 혀를 내밀었다.
“야, 잠……! 롬! 기다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타액으로 흠뻑 젖은 혀가 엉덩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이환이 놀라 발버둥 쳤다. 압살롬은 휘적거리는 다리를 붙잡아 어깨에 걸쳤다. 그동안에도 혀는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롬! 압살롬!”
이환은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그것을 알아차린 압살롬이 먼저 무릎을 세웠다. 그러자 이환의 다리와 엉덩이, 허리까지 쭉 딸려 올라갔다.
이환이 분기 어린 시선을 들었다. 그것이 패인이었다.
다시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자신의 성기 너머로 압살롬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세상에 이보다 더 맛있는 것은 없다는 듯 열과 성을 다해 이환의 구멍을 핥고 있었다. 압살롬의 얼굴도 눈빛도 그저 음란했다.
“젠장…….”
이환은 눈을 가렸다.
회음부를 스치는 입술과 숨결에 자극받은 이환의 성기가 체액을 흘렸다. 방울방울 흘러내린 그것을 손가락에 묻혔다. 혀를 떼자 제법 부드러워진 구멍이 보였다. 압살롬은 체액에 젖은 손가락을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아까와는 달리 어렵지 않게 들어갔다.
두 개째의 손가락이 다소 빡빡하게 진입했다. 압살롬은 연신 손가락을 움직였다. 탄력 있는 조임에 앞으로의 쾌락이 상상되었다. 터질 듯 부푼 성기가 당장 저 안으로 들어가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충동대로 움직이면 이환이 괴로워할 것이다.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일 행위다. 압살롬은 이 시간이 이환에게 고통으로 기억되지 않길 바랐다.
손가락이 어느 지점을 스치는 순간이었다. 이환이 다급하게 숨을 삼켰다. 손가락에 가해지는 압박도 방금 전보다 늘어난 게 느껴졌다. 압살롬은 방금 전 건드렸던 부분을 꾹 눌렀다.
“멈춰…… 그만! 거기 싫다고! 야…… 아앗!”
평소 차분한 중저음이었던 이환의 목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소리였다. 내지른 이환도 당황했는지 입을 틀어막았다.
“그 손 치워요.”
압살롬의 말에 이환이 눈을 부릅떴다. 확고한 거부의 의사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나긋하게 웃은 압살롬이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욱욱거리는 막힌 소리뿐이었다.
저 손을 침대에 고정하고 싶다. 마법의 필요성을 지금처럼 탐욕스러운 감정으로 느낀 적이 없었다. 갈증을 느낀 압살롬이 입술을 핥았다.
이환이 느끼는 지점을 찾았기 때문인지 세 개째의 손가락은 제법 무리 없이 들어갔다. 압살롬은 욱신거리다 못해 아픈 성기를 내려다보다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이젠 한계였다.
손가락이 단번에 빠져나가자 한껏 벌려진 입구가 움찔거렸다. 그것이 꼭 얼른 자신을 채워 달라는 것처럼 보였다.
“이환.”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모로 돌리고 있던 이환이 압살롬의 부름에 반응했다. 열이 오른 얼굴도, 젖은 눈동자도, 붉어진 입술도 전부 압살롬이 만든 것이다. 만족감에 눈앞이 흐려졌다.
이환의 다리를 어깨에서 내렸다. 그 사이에 제 몸을 붙이자 이환이 움찔거렸다. 압살롬에게는 그것조차 자극이었다. 한계까지 고양한 욕망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히기 위해 몇 번 심호흡을 한 후 말했다.
“많이 아프면 말해 줘요.”
“뭐야. 그럼 멈추기라도 하게?”
힘없는 목소리로 이환이 물었다. 압살롬은 열기에 찬 웃음을 흘렸다.
“노력해 볼게요.”
이환이 팔을 뻗어 압살롬의 목을 끌어안았다. 땀으로 촉촉하게 젖은 이환의 피부가 착 감기는 느낌이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좀 더 많은 부분이 접촉했으면 하는 바람에, 압살롬은 이환의 팔에 걸쳐진 셔츠를 끌어 내렸다. 그때 이환이 압살롬의 귓가에 입 맞추었다. 압살롬은 목을 움츠리며 신음했다.
“읏!”
“꼴좋다.”
희미하게 웃은 이환이 압살롬에게 다가붙었다. 성기와 고환이 맞닿아 짓눌리는 순간, 압살롬은 이성을 잃었다.
압살롬은 이환을 덮쳐 누르고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잠깐 사이에 조금 좁아진 구멍이 그를 거부했다. 압살롬은 되도록 느리게 움직였다. 이마에서 흐른 땀이 이환의 몸에 뚝뚝 떨어졌다.
“이봐, 롬.”
귀두의 가장 두꺼운 부분이 좁은 구멍을 겨우 통과했을 즈음, 이환이 압살롬을 불렀다. 고통스러운 듯 찌푸려진 얼굴이 안타까워서, 압살롬은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떼어 말했다.
“그만둘까요?”
채워지지 못한 욕망 때문에 죽을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압살롬에게는 이환이 우선이었다. 압살롬은 괜찮다는 듯 애써 웃었다.
“너― 아니다. 네가 그렇지.”
이환이 혀를 찼다. 압살롬은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괴로워서 기분이 나빠진 걸까 생각하는 때였다.
이환이 다리를 뻗어 압살롬의 허리에 감았다. 어리둥절했던 압살롬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이환이 다리로 그를 끌어당긴 것이다.
“됐으니까 빨리해. 느리니까 더 힘들……!”
이환이 이를 악물었다. 세게 감긴 채 눈도, 시트를 움켜쥔 주먹도 전부 그의 고통을 말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압살롬은 멈추지 않고 허리를 움직였다.
두꺼운 성기가 탄력 있는 구멍 안을 빠듯하게 채웠다. 지독하게 조이는 내부 탓에 쾌감보다 고통이 밀려들었다.
“힘 빼요. 이환, 응? 계속 힘주면 나도 당신도 힘들어요.”
“그게 말처럼 쉬우…… 흣!”
귀두 끝이 한 부분을 스치는 순간 이환이 신음했다. 압살롬은 이환의 손을 재빨리 붙잡아 침대에 내리꽂았다. 입을 막으려다 실패한 이환이 그를 노려보았다. 압살롬은 모르는 체 허리를 세게 밀어 넣었다. 얼마 남지 않은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잠깐…… 움직이지 마.”
“많이 아파요?”
“아프기도 하지만 좀, 숨쉬기가 어려워서.”
명치까지 꽉 들어찬 것 같아. 그렇게 중얼거린 이환이 조금 튀어나온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 큰 게 다 들어가다니.”
당혹스러운 기색마저 느껴지는 그 말은 쾌감으로 붕 떴던 압살롬을 단번에 현실로 끌어내렸다. 내가 이환의 안에 들어갔다. 내 몸이, 이환의 일부가, 되었다.
“읏……!”
낮게 신음한 압살롬이 움직였다. 허리를 물렸다가 단번에 치고 들어갔다. 이환이 외쳤다.
“잠깐 기다리라고 했잖―! 흐앗!”
압살롬의 성기가 이환이 느끼는 부분을 제대로 훑고 지나갔다. 이환은 부들부들 떨며 신음했다. 제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늘고 높고 야한 소리였다. 입을 막고 싶었으나 두 손은 압살롬에게 단단히 붙들린 채였다.
“손 좀, 윽! 아! 천천히!”
압살롬이 어딘가를 찌를 때마다 이제껏 느껴 본 적 없는 쾌감이 이환을 치받았다. 자신의 몸인데 자신의 것 같지 않았다. 지독하게까지 느껴지는 감각이 두렵기까지 했다.
“손 놔. 롬, 압살롬! 손 놓으라고!”
이환은 압살롬의 등을 발로 찍었다. 그제야 조금 제정신을 차린 듯 압살롬이 움직임을 멈췄다. 짙푸른 눈동자가 열기에 점령당한 채 이환을 향했다.
“손 놔.”
“아, 손……. 네, 손이요.”
멍한 눈이 이환의 얼굴을 빗겨 나간다. 이환은 손목에 힘을 주어 들썩거리며 말했다.
“너를 만질 수가 없잖아.”
“……만지고 싶습니까?”
홀린 듯이 중얼거린 압살롬이 이환의 손을 놓았다. 이환은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압살롬이 손을 뻗어 그의 허리를 받쳤다.
간신히 상체를 세운 이환이 압살롬의 뺨을 감쌌다. 애타는 얼굴이 먹이를 먹기 직전에 기다리라는 명령을 받은 개와 비슷했다. 이환은 그의 입술에 쪼는 듯한 키스를 퍼부으며 말했다.
“나 어디 안 가고, 그만하라는 말도 안 할 테니까 좀 천천히 하자. 이러다 죽겠어.”
“미안해요. 이환이 너무 예쁜 말을 하니까 정신이 잠깐 나갔었나 봐요.”
“예쁜 말이라니, 내가 뭐라고 했는데?”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압살롬이 허리를 가볍게 들썩였다. 안 그래도 들어온 채인 성기에 자극당하던 전립선에서 찌릿거리는 감각이 밀려들었다. 이환은 압도적인 쾌감에 몸부림쳤다.
“아! 하윽! 거기 하지, 말라고!”
“기분 좋잖아요.”
“안 그래!”
“거짓말.”
압살롬이 다시 한 번 허리를 쳐올렸다. 이환이 밀려드는 쾌감에 속절없이 신음하는데, 뜨거운 손이 그의 성기를 문질렀다.
“여기가 이렇게 되었는데 좋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앞과 뒤로 동시에 자극당한 몸이 쾌감을 좇았다. 이환은 압살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신음을 참기 위해 단단한 피부를 깨물고 빨았다.
“읏. 좋아요, 그거.”
점점 빨라진 압살롬의 움직임이 이환을 쾌락으로 내몰았다. 눈앞이 흐리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자 뺨 위로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이환, 흐으, 이환, 이환…….”
찔꺽거리는 소리에 섞여 이환의 이름이 울렸다. 그에 화답하고 싶었다. 이환은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 보이는 희고 탄탄한 목에 입술을 붙이고 충동대로 빨았다.
“안 돼요, 이환. 자꾸 자극하면……. 아으…….”
“압살롬, 롬, 읏! 롬……! 아앗!”
압살롬은 힘껏 성기를 처박았다. 이환이 가장 느끼는 곳을 꾹 누른 채 허리를 돌리고, 성기를 감싼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자 압살롬을 감싼 내벽이 강렬하게 수축했다.
순식간에 쾌락의 정점에 다다른 압살롬이 몸을 떨었다. 눈앞이 희게 물들었다. 본능에 따라 다시 한 번 허리를 움직이자 이환이 그를 꽉 끌어안았다.
전신이 온통 이환에게 감싸인다. 압살롬은 마치 그에게 먹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몇 번이나 압살롬을 조이던 내벽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이환을 눕힌 압살롬이 천천히 성기를 빼냈다. 희뿌연 정액이 이환의 허벅지 안쪽을 타고 길게 흘렀다.
그것을 보자 다시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다. 압살롬은 이환을 흘긋 보았다. 이환은 눈을 감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이환? 잠들었어요?”
“……아니.”
대답은 느리게 돌아왔다. 한숨을 쉰 이환이 무겁게 눈을 떴다. 압살롬은 그의 눈동자에서 피로를 엿보았다.
평소 같으면 힘들어하는 이환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나른한 표정이 야하다는 것부터 떠오른다. 압살롬이 갈등하는 때였다.
“너 그거 뭐야.”
“네?”
“네, 는 무슨. 섰잖아. 난 여기서 더 하면 진짜 죽는다고.”
압살롬은 시선을 내렸다. 어느새 힘이 들어간 성기가 보였다. 다시 시선을 올리자 이환이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 진짜 얼굴……. 그렇게 봐도 안 돼. 오늘만 하고 다시는 안 할 거냐? 적당히 하지 않으면 두 번 다시 못 하게 될 줄 알아.”
압살롬은 눈을 깜빡였다.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자신과는 달리, 이환은 다음을 말하고 있었다.
미인계니 뭐니 투덜거리던 이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뭘 잘했다고 웃냐? 또 그렇게 막무가내로 굴어 봐. 가만 안 둘 테니까.”
“그래요. 다음번에는 더 잘할게요.”
나긋하게 웃은 압살롬이 이환의 곁에 누웠다. 축축한 시트가 기분 나쁠 만도 한데, 이환의 체액이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쁘기만 했다.
잠시 가만히 누워 있던 이환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구겨진 셔츠를 벗으며 중얼거렸다.
“다음번에는 옷도 제대로 벗고 하자.”
압살롬은 바지 앞섶만 풀었을 뿐인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이환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시뻘게진 귀가 보였다. 잠시 멍하니 있던 압살롬은 그의 벗은 몸을 끌어안았다.
“있잖아요, 이환.”
“뭐.”
“사랑해요.”
압살롬이 회귀 후 처음으로 입에 올리는 구애의 말이었다. 이환의 눈이 커졌다. 잠시 굳었던 그가 어물어물 말했다.
“무슨 고백을 그렇게 맥락도 없이 하냐. 멋대가리 없게.”
“그래서, 싫어요?”
이전 같았으면 입에 담을 생각도 못 했을 말이었다. 헛웃음을 흘린 이환이 턱을 들었다.
“그럴 리가. ……나도 사랑해.”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방에서 그들은 달콤하게 입 맞추었다.
***
뤼시앵이 추가로 지원받은 황실 기사들 중 상당수가 두 번 다시 무기를 들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황태자 샤를에게 재차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편지지를 꺼냈다. 그러나 막상 깃펜을 들자 무엇을 써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황실 기사 스무 명. 하나같이 가문도 실력도 빼어난 자들이었다. 어쩌면 샤를은 실패에 대한 추궁을 피하기 위해 모든 책임을 뤼시앵에게 돌릴지도 모른다.
뤼시앵이 인사말만 적힌 편지지를 내려다보며 신음하는 때였다. 창문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위뱅이 유리창을 열고 팔을 뻗었다. 그 위로 전서구가 내려앉았다.
위뱅은 전서구의 다리에서 편지를 빼내 뤼시앵에게 건넸다. 편지의 내용을 확인한 뤼시앵이 얼굴을 굳혔다.
“당장 돌아오라고 하시는군.”
샤를의 친필이었다. 뤼시앵은 흘려 쓴 글씨에서 당황을 읽었다. 냉정 침착한 샤를답지 않은 일이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샤를에게서 받은 자금도 거의 다 써 버렸다. 버티려야 버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부상이 덜한 자를 추려서 반은 알렉상드르 경을 계속 쫓도록 해. 나머지 반은 나와 함께 귀환한다.”
묵례한 위뱅이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뤼시앵은 편지를 구겼다.
힘이 필요했다. 쓸 때마다 피를 토한대도 좋았다. 욕심과 질투가 들불처럼 번졌다.
***
톡. 토독.
압살롬은 덧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세계와 밀접한 몸이 그에게 아침이 밝았다고 속삭였다.
‘이환에게 아침밥을 먹게 해야 하는데.’
압살롬 혼자라면 먹으나 안 먹으나 별 상관없지만 이환이라면 다르다. 그에게는 식사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전신을 통해 전해지는 체온이 압살롬의 이성을 방해했다.
압살롬은 내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덧창 때문에 사위가 어두웠다. 그러나 그의 눈은 이 정도 어둠에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눈앞은 온통 밀색이었다. 군데군데 그가 남긴 순흔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만족스럽게 응시하던 압살롬이 고개를 들었다. 이환은 아직 숙면 중이었다. 압살롬은 연인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기사답게 단단한 체구와는 달리, 이환의 이목구비는 먼 이국의 도련님처럼 단정하고 조금은 곱상했다. 고상한 옷을 입혀 놓으면 문학도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지도 않을까. 압살롬은 방금 전 했던 생각을 부정했다. 이환의 얼굴 이곳저곳에 남은 흉터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자잘한 것들이었으나, 왼쪽 눈썹 위에서부터 관자놀이까지 이어진 흉터만은 제법 컸다.
흉터는 얼굴에만 있지 않았다. 팔, 다리, 가슴, 등, 옆구리, 다리. 없는 부분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웠다. 전부 이환이 느낀 고통의 잔재였다.
압살롬은 고개를 숙였다. 이환의 가슴이 뺨에 닿았다. 규칙적인 심장 박동이 그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소리였다.
‘두 번 다시 잃지 않을 겁니다.’
압살롬은 이환의 가슴에 입 맞추고는 몸을 일으켰다. 난 자리에 한기가 들었는지 이환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 표정이 묘하게 어려 보여서 압살롬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이환, 그만 일어나요.”
압살롬은 이환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고르며 말했다. 달짝지근한 목소리가 스스로 듣기에도 조금 부끄러울 지경이다.
느리게 눈을 뜬 이환이 압살롬을 보았다. 쌍꺼풀이 얇게 진 눈매가 부드럽게 이지러진다. 무방비한 웃음을 본 압살롬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압살롬이 굳은 사이에 이환이 꾸물꾸물 움직였다. 어느새 압살롬의 무릎을 베고 누운 그가 작게 하품했다. 겨우 정신 차린 압살롬이 이환의 어깨를 흔들었다.
“기껏 깨웠더니 다시 자는 겁니까? 일어나요.”
잠이 뚝뚝 떨어지는 갈색 눈동자가 안타깝다. 그러나 압살롬은 마음을 단호하게 먹었다. 그가 계속 깨우자 결국 이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고 밥 먹으러 가요.”
압살롬이 먼저 침대를 빠져나갔다. 몽롱한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이환이 길게 기지개 켰다. 그 순간 이환은 위화감을 느꼈다.
내내 경황이 없어 잊어버렸던 것이 있다. 압살롬을 데리고 이 여관으로 들어왔을 당시 이환은 중상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압살롬에게 진실을 들을 때에도, 심지어 정사 도중에도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롬. 너 누가 마음대로 치료하랬어.”
낮은 목소리가 방 안에 깔렸다. 덧문을 열던 압살롬이 이환을 돌아보았다. 겨울바람에 나부낀 은발이 하얀 얼굴을 감싸고 후광처럼 반짝인다.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미인계라니 너무 치사한 것 아닌가. 이환이 이를 가는 때였다.
“혹시 착각하는 건 아니겠죠?”
“뭐?”
압살롬이 창을 등지고 섰다. 비스듬히 드리워진 햇살이 그의 뺨을 말갛게 물들였다.
“치료한 건 맞지만 어디까지나 날 위해서였어요. 당신이 아파서 끙끙거리는 건 보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렇다고 피까지 토한 주제에 또 마법을 사용해?”
압살롬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스쳤다. 사실 그때 피를 토한 이유는 직전에 제법 강한 마법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바이스발트에서 나온 이환은 이옐라의 기운에 완전히 젖어 있었다. 그냥 놔두었다가는 이환이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압살롬은 동굴을 도착하자마자 그 기운을 몰아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환의 몸에서 빠져나온 기운이 압살롬을 습격한 것이다. 신의 것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뒤틀리고 변질된 기운이었다. 덕분에 압살롬은 힘의 상당 부분을 소진하고 말았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이환이 자책할 게 뻔했다. 결국 압살롬이 할 수 있는 일은 입을 다무는 것뿐이었다.
“아파서 끙끙거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건 너뿐만이 아냐. 나도 그렇다고.”
“그건…… 미안합니다.”
이환이 자신을 걱정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오랜 짝사랑의 폐해였다. 압살롬의 어깨가 조금 처졌다.
압살롬의 말을 마지막으로 방은 정적에 휩싸였다. 앓는 소리를 낸 이환이 세면기로 향했다. 잠시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이어졌다. 빠르게 세수를 마친 이환이 물기를 닦으며 말했다.
“삐졌냐?”
“아닙니다.”
“아니기는. 완전히 삐졌는데.”
“아니…….”
어쩐지 조금 울컥하여 반박하려는 순간 이환이 압살롬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금세 떨어진 그가 속삭였다.
“치료해 준 건 고맙다.”
따뜻한 숨결이 입술을 간지럽힌다. 그 감촉이 열기를 나누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압살롬이 좀 더 깊은 입맞춤을 위해 고개를 기울이는 때였다.
“밥 먹으러 가자.”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한 이환이 멀어져 갔다. 뒤이어 옷 갈아입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가만히 있던 압살롬은 이마를 짚었다. 보복이 분명한데도 화조차 나지 않았다.
“진짜 치사해요.”
붉은 입술 사이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환과 압살롬은 여관 1층의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은 아침 식사 중인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으로 제법 떠들썩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리에 앉을 즈음 모든 소음은 사라져 버렸다.
이환은 맞은편의 압살롬을 건너다보았다. 그는 다소 어둑한 식당 안에서 압도적으로 빛나고 있었다. 어쩐지 낯빛이 이전보다 부드러워 보인다.
“왜요, 이환? 할 말이라도 있나요?”
압살롬이 눈매를 접어 웃으며 물었다. 정말로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기분 좋아 보여서.”
압살롬이 뺨을 붉혔다. 그것만으로도 이환은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덩달아 쑥스러워진 그는 괜히 헛기침했다.
“주문하자. 뭐 먹을래?”
적당히 음식을 주문한 그들은 느긋하게 침묵을 즐겼다. 좁은 테이블 아래에서 맞닿은 무릎과 신발 코에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이환은 이 기꺼운 분위기가 금세 사라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금세 음식이 나왔다. 한참을 굶어 배가 고픈 이환은 빠르게 접시를 비워 나갔다. 압살롬도 말없이 식사에 집중했다.
어느 순간 압살롬이 고개를 들었다. 주변을 연신 확인하는 얼굴이 어딘지 심각해 보인다. 이환이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별건 아닙니다. 시선이 느껴져서요.”
“많이 신경 쓰이면 앞으로는 방으로 음식을 올려 달라고 하자.”
“아뇨. 그럴 정도는 아닙니다.”
고개를 저은 압살롬이 다시 식기를 움직였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이환은 방으로 들어가며 압살롬에게 말했다.
“할 이야기가 있어.”
먼저 압살롬을 침대 위에 앉힌 이환은 이제까지 손에 넣은 성물을 확인했다. 금잔, 나뭇가지, 청동 열쇠, 수정 꽃. 이제 하나만 더 손에 넣으면 귀환도 가능했다.
압살롬이 돌아가지 말라는 의사를 표한 적이 없다. 이환은 그 사실을 곱씹을수록 화가 치밀었다. 말하지 않은 압살롬이 아닌, 말하지 못하게 만든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그와 동시에 차가운 깨달음이 이환을 덮쳤다. 그는 아직도 확답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얼굴조차 잊어버린 가족들이라 해도 보고 싶지 않을 리 없다. 이환에게 가족은 단어 자체만으로도 평온한 일상의 상징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 세계가 여전히 싫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압살롬이 있다.
이환은 침대 위에 올라가 압살롬과 마주 보고 앉았다.
“난 다음 성물을 찾으러 갈 생각이야.”
“제국에서 당신의 행보를 눈치챘습니다. 제국이 남은 성물을 먼저 손에 넣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죠.”
“물론 그것도 염두에 두고 있어.”
압살롬은 평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환은 청람색 눈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환은 압살롬의 손을 잡았다. 그것만으로도 애써 의연한 척하던 압살롬이 무너져 내렸다. 은빛 속눈썹이 서서히 젖어 들었다.
“들어 봐. 난 아직 돌아갈지 말지 결정하지 못했어.”
압살롬이 퍼뜩 놀라 이환을 보았다. 이환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을 이었다.
“결정은 다섯 번째 성물을 손에 넣은 후에 할 거다.”
귀환을 위해 필요한 모든 조건을 구비한 그 순간 이환은 선택할 것이다. 그 어떠한 영향도 환경도 배제한 채, 오로지 이환 자신만을 위해.
“저 때문입니까?”
당장이라도 꺼질 듯 희미한 음성이었다. 이환은 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날 위해서지. 그리고 어느 쪽으로 결정 날지 아직 몰라.”
그러나 압살롬에게는 그조차 달게 들린 모양이었다. 그렁그렁 고였던 눈물이 결국 넘쳐흘렀다.
“그래도 기뻐요. 이제까지는 가능성조차 없다고 생각했는걸요.”
압살롬이 뺨을 흠뻑 적신 채 웃었다. 방금 전까지의 그린 듯한 미소와는 달리 아이처럼 밝은 웃음이었다.
이환은 무릎걸음으로 압살롬에게 다가갔다. 손바닥으로 압살롬의 얼굴을 감싸고 들어 올렸다. 멈추지 않고 흐른 눈물이 이환의 손가락마저 적셨다.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압살롬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젖은 눈매가 지독히도 처연했다. 이환은 그 눈매에 입 맞추고 아래로 내려갔다.
맞닿은 두 입술이 금세 떨어졌다가, 각도를 달리해 다시 만났다. 이환은 열린 입술 사이로 혀를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짜고 단 키스였다. 입맞춤이 깊어지자 압살롬이 이환의 어깨에 매달렸다. 이환은 압살롬의 두피를 손가락으로 지그시 훑어 내렸다. 그에 따라 움찔거리는 몸이 사랑스러웠다.
“하아, 롬.”
이환은 가쁜 숨을 섞어 압살롬을 불렀다. 그러자 압살롬이 눈을 떴다. 짙푸른 눈동자에는 열기가 가득 서려 있었다. 이환은 자신의 눈도 그러할 것이라 생각했다.
“시장 가야 하지?”
“으응……. 네. 사야, 읍, 하는 물건 있……. 아…….”
압살롬의 대답은 연신 그를 방해하는 이환의 입술 안쪽으로 사라졌다. 혀와 입술이 미끄러지며 나는 물소리가 잠시 울렸다.
겨우 압살롬을 놔준 이환이 말했다.
“시장은 오후에 가자.”
맑게 웃은 압살롬이 이환을 부둥켜안고 쓰러졌다.
***
이환과 압살롬의 목적지인 엘부르즈 섬은 대륙의 동쪽 바다에 위치했다. 섬을 한참 남겨 놓은 어느 오후, 그들은 한 성을 앞두게 되었다.
“오늘은 저곳에서 머물까요?”
압살롬이 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압살롬을 흘금 본 이환이 몸을 기울였다.
“이환? 왜……!”
이환은 입을 벌려 압살롬의 코를 살짝 깨물었다. 훅 끼친 입김이 코끝을 데우고 물러났다.
“빨개졌어.”
짧게 말한 이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앞을 향했다. 압살롬은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이 꽁꽁 언 코끝을 스쳤다.
“얼른 가자.”
이환이 먼저 말을 달렸다. 압살롬은 그를 뒤따르며 중얼거렸다.
“오늘 밤 두고 봐요.”
그들은 간단한 절차를 거쳐 성안으로 들어섰다. 제법 부유한 지역인지, 사람들의 얼굴에는 윤기가 흘렀고 옷차림도 제법 두툼해 보였다.
여관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던 이환이 한 곳에서 시선을 멈췄다. 날개 달린 늑대, 즉 마지르의 형상이 그려진 깃발이 바람결에 펄럭이고 있었다. 같은 줄에 달린 색색의 깃발들을 보니 경사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대답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면 새해로군요.”
“벌써 그렇게 됐나?”
그저 달리기만 하다 보니 시간의 흐름조차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이환에게 이 세계의 새해 첫날이란 거추장스러움의 상징이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하인들의 극성스러운 손길로 단장되어, 하루 종일 황실 사람들의 신년 예식에 따라다니곤 했다. 근사한 트로피인 그에게는 단 한 순간의 자유도 주어지지 않았었다.
그들에게서 벗어나 처음으로 맞이하는 이 세계의 새해. 이환은 압살롬을 곁눈질했다. 그도 이환을 보고 있었던 듯 곧바로 시선이 마주쳤다.
“제법 볼 게 많겠네요. 여관에서 조금 쉰 후에 같이 마을 구경하러 나올까요?”
압살롬이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이환에게는 이 말이 데이트 신청처럼 들렸다. 괜히 헛기침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금세 여관을 찾을 수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이 그들을 반겼다. 이런 때 나서는 것은 주로 압살롬이었다.
“2인실 주십시오. 그리고 곧바로 목욕물도 부탁합니다.”
그 밤 이후 늘 2인실을 잡는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쑥스러웠다. 이환은 귀가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기분 탓인지 압살롬의 귀도 빨개진 듯 보였다.
방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이환은 그것을 외면했다. 구석에 짐을 내려놓고 겉옷을 벗는데 점원들이 목욕통을 가지고 들어왔다.
점원들이 나간 후 압살롬이 먼저 목욕통 안에 손을 넣었다. 물은 미지근했다. 압살롬은 작은 불덩어리를 만들어 목욕물 안에 넣었다. 물 온도가 금세 올라갔다. 압살롬이 만족스럽게 웃는 때였다.
“너 지금 마법 썼지. 또 쓰러지면 어쩌려고 그래?”
어느새 가까워진 이환이 압살롬을 지그시 보았다. 압살롬은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몸이 안 좋아서 그랬던 겁니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러자 이환이 압살롬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거짓인지 아닌지 판별하겠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켕길 것이 없는 압살롬은 평온한 표정으로 이환을 마주했다.
잠시 그러고 있던 이환이 입을 열었다.
“설마 너, 이제까지도 이런 식으로 내 수발을 든 건 아니겠지?”
압살롬은 눈을 깜빡였다. 이내 눈매를 접은 그가 웃었다.
“수발든 적은 없습니다. 그저 이환을 조금 돌봤을…….”
“말 돌리는 거 보니 진짜 그런 모양이네.”
이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입술이 느리게 움직인다. 그 순간 압살롬은 이환에게 다가섰다. 두 입술이 잽싸게 붙었다가 떨어졌다.
쪽.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쪽.
“야, 롬. 너 정말…….”
쪽. 쪽. 쪽.
“잠……!”
이환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압살롬의 뜨거운 혀가 비집고 들어갔다. 비벼 대는 살덩이가 성감을 불러일으킨다.
압살롬은 이환의 웃옷을 들추고 허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이환이 그의 손을 잡아 옷 바깥으로 꺼냈다. 압살롬은 이환의 손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겨우 떨어진 입술 사이로 달뜬 숨이 오갔다. 압살롬은 이환의 날숨을 탐욕스럽게 삼켰다. 그러고도 부족해 다시 다가갈 때였다. 이환이 중얼거렸다.
“좀 쉰 후에 나가자면서.”
“아직 날이 밝아요. 해 지기 전에는 충분히 나갈 수 있을 겁니다.”
“목욕도 해야지.”
“그렇군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압살롬이 말을 흐렸다. 그것을 아쉽지만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이환이 몸에서 힘을 풀었다.
압살롬과의 섹스가 싫은 것은 아니다. 다만 낮부터 그러는 것이 조금 낯부끄러웠다.
맞닿은 아랫도리에는 벌써 힘이 들어가 있었다. 조금 미안해진 이환이 압살롬의 어깨를 토닥이는 때였다.
압살롬이 이환의 허리를 움켜잡더니 번쩍 안아 올렸다. 어어 하는 사이 신발이 벗겨졌다. 이환은 황급히 압살롬을 보았다. 붉은 입술이 얄궂게 웃고 있었다.
“롬!”
압살롬은 이환을 안은 채 목욕통 안으로 들어가 앉아 버렸다. 목욕통 안에 반쯤 들어 있던 물이 순식간에 차올랐다. 단숨에 가슴까지 젖은 이환이 마른 웃음을 흘렸다.
“너…….”
“하지만 이환도 이렇게 됐잖아요.”
압살롬이 손을 뻗어 이환의 성기를 문질렀다. 조금 단단해졌던 것이 몇 번의 손길로 부피를 더했다. 아직 옷을 입고 있는 탓에 감질나기만 한 자극이 답답하다. 이환이 미간을 찡그리자 압살롬이 고개를 기울였다.
“이대로 목욕만 할까요?”
나긋한 목소리가 얼핏 순진무구하게 들린다. 이환은 손을 뻗어 압살롬의 멱살을 잡았다. 그대로 끌어당기자 압살롬이 순순히 끌려왔다.
“끼 부리는 건 어디서 배웠냐.”
“통했나요?”
물어 오는 목소리에는 명백한 열기가 서려 있었다. 이환은 갈증을 느꼈다.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축이자 압살롬이 작게 신음했다.
“불공평합니다.”
“뭐가?”
“어딜 봐도 내가 질 수밖에 없잖아요.”
압살롬이 얼마 남지 않은 간격을 단숨에 좁혔다. 두 입술이 닿기 직전, 이환이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다지 이긴 기억은 없는데.”
뜨겁게 섞이는 혀에 눈앞이 점멸한다. 압살롬과의 키스는 늘 이렇게 뜨겁고 정신없었다. 겨우 놓여난 입술이 숨을 요구해 헐떡인다.
숨소리는 두 개였다. 이환은 자신의 것이 아닌 소리를 따라 시선을 내렸다. 압살롬이 그를 올려다보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욕망으로 달아오른 얼굴, 젖은 채 부푼 입술, 흥분으로 물든 눈매.
새하얘서 언제나 정결해 보였던 것들이 지금은 온통 붉었다. 자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것을 깨닫자 오싹할 만큼의 정동이 이환을 덮쳤다.
압살롬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던 몸이 점차 앞으로 쏠렸다. 옷에 갇힌 성기가 압살롬의 몸에 닿았다. 저도 모르게 아랫도리를 부대끼자 다급한 손길이 다가와 바지를 벗겼다. 이환도 손을 뻗어 압살롬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흠뻑 젖은 옷이 몸에 질척하게 달라붙었다. 이환은 압살롬의 옷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흥분에 차 떨리는 손으로는 단추를 푸는 게 고작이었다. 포기한 이환은 손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바지도 젖어 있었지만 이쪽은 끈을 쉽사리 풀 수 있었다. 이환은 압살롬의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끌어 내렸다. 그러자 갑갑한 옷 안에 눌려 있던 성기가 튕기듯 솟아올랐다.
이환이 들썩이는 통에 자극받은 그것은 이미 한껏 꼿꼿해진 채였다. 검붉은 데다가 이리저리 핏줄이 불거진 성기가 흉흉하게까지 보인다. 이환은 그것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상할 만큼 입안이 근질거렸다.
문득 따가울 정도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환은 고개를 들었다. 압살롬이 타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잠시 그 시선을 마주하던 이환은 그의 무릎 위에서 내려갔다.
“좀 일어나 봐.”
압살롬이 목욕통 턱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물속에서도 위용이 대단했던 성기가 이환의 코앞에 들이밀어졌다. 이환은 젖어서 번들거리는 그것을 손으로 감쌌다. 위쪽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어딘지 참을 수 없이 즐겁게 느껴졌다.
‘좀 더.’
이환은 입을 벌려 성기를 물었다. 당황한 목소리로 이름이 불렸다. 그러나 무시한 채 혀로 성기 끝을 핥았다.
“읏!”
짜고 조금 쓴 맛이 입안에 퍼졌다. 기분 탓인지 성기가 좀 더 커진 것 같다. 이환은 고개를 좀 더 숙였다. 크기가 크기인지라 다 넣는 것은 무리였다. 손으로 할 때처럼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는데 압살롬이 그의 이마를 붙잡았다.
“그, 그만! 그만해요. 나올 것 같……!”
이환은 혀로 기둥을 쭉 핥았다. 우둘투둘한 핏줄이 혀끝에 느껴졌다. 가쁜 신음이 들려오면서 그의 이마를 막은 손바닥에 힘이 들어갔다. 이환은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압살롬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다.
두 쌍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압살롬의 짙푸른 눈이 순식간에 온도를 더했다.
“이환, 당신 정말!”
촤악!
거칠게 성기를 빼낸 압살롬이 이환의 어깨를 잡고 일으켜 세웠다. 허벅지에 걸려 있던 바지가 빠르게 내려간다. 이환은 다리를 들어 압살롬을 도왔다.
흠뻑 젖은 바지가 목욕통 바깥으로 떨어졌다. 압살롬은 이환을 돌려세우고는 엉덩이 사이에 손가락을 불쑥 집어넣었다. 풀어 두지 않은 안쪽은 이환이 느끼기에도 뻑뻑했다.
“으……. 두고 봐요. 진짜 가만 안 둘 겁니다.”
초조한 음성이 기껍다. 이환은 압살롬 몰래 슬쩍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몇 초도 되지 않아 사라졌다. 몸을 굽힌 압살롬이 엉덩이 사이에 혀를 밀어 넣었기 때문이다.
뜨거운 살덩이가 엉덩이 사이와 회음부를 오가며 연신 자극한다. 긴 손가락이 탄탄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둔덕을 열어 그 안쪽을 연신 들쑤셨다. 물과 타액으로 젖은 곳에서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느 순간 찌르르한 쾌감이 전신을 타고 올랐다. 이환은 간신히 신음을 삼켰다. 그러나 압살롬이 이미 알아차린 후였다.
“지난번에도 여기 좋아했었죠.”
“아―!”
손가락이 한 곳만 계속해서 눌러 댔다. 채 막지 못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환은 손가락에서 도망치기 위해 허리를 비틀었다. 그 위로 압살롬이 길게 입 맞추었다.
“진짜 야해요.”
압살롬이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뺐다. 물고 있던 것을 잃어버린 구멍이 연신 뻐끔거리며 자극을 바란다. 조금만 기다려요. 중얼거린 압살롬이 이환의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버거울 만큼 크고 굵은 것이 좁은 구멍 안으로 밀고 들어온다. 이환은 허리를 휘었다. 머리가 압살롬의 어깨 위에 닿았다. 그대로 고개를 돌려 압살롬의 귓가에 키스했다.
“으읏! 자꾸 이러면…….”
“이러면?”
되묻는 목소리는 이환 자신도 놀랄 만큼 흥분에 젖어 있었다. 몸을 바르르 떤 압살롬이 말을 이었다.
“부드럽게 할 수 없어져 버리잖아요.”
“그러냐.”
이환은 입술을 아래쪽으로 미끄러뜨렸다. 귀 아래의 매끄러운 살결, 섬세한 선의 턱, 핏대가 선 목까지.
하얀 목에 입술을 묻고 세게 빨았다. 선명하게 남은 붉은 울혈이 만족스럽다. 그 위로 몇 번이고 입을 맞추는데 뒤쪽이 단번에 꿰뚫렸다.
“흐윽!”
압살롬의 성기가 이환이 잘 느끼는 곳을 길게 누르며 지나갔다. 이환이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는데, 목덜미에 압살롬의 입술이 닿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던 압살롬이 중얼거렸다.
“정말……. 이환 진짜 아까부터 너무해요.”
“그러니까.”
이환은 손을 뻗어 압살롬의 머리를 잡았다. 그대로 끌어내려 키스하고는 속삭였다.
“부드럽게 하라고 말한 적 없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렇게 덧붙이자 압살롬이 짐승처럼 목을 울렸다. 잔뜩 흥분에 찬 소리에 이환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느리게 빠져나간 성기가 거세게 들이닥쳤다. 기세에 밀린 이환이 목욕통을 짚었다. 압살롬이 치받을 때마다 손바닥 아래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잠까…… 윽! 망가질 것 같아!”
이환은 압살롬의 허벅지를 내리치며 외쳤다. 그러자 압살롬이 이환의 뒷덜미를 죽 핥아 올리며 대답했다.
“그 말도 너무 야해요.”
“뭐가 야해! 목욕통이 망가질 것 같다고!”
“아.”
외마디 소리를 흘린 압살롬이 웃었다. 그러더니 이환을 끌어안고 목욕통 안에 주저앉았다. 그 바람에 깊은 곳까지 찔린 이환은 소리도 못 내고 부들부들 떨었다.
그 떨림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압살롬이 성기를 쳐올렸다. 첨벙거리는 물소리에 질척거리는 소리가 섞인다. 이환이 본능적으로 잡을 것을 찾기 위해 손을 허우적대는 때였다.
움직임을 멈춘 압살롬이 이환의 허리를 잡고 돌렸다. 이환은 쾌감으로 뜨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압살롬이 상기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이환은 손을 뻗었다. 압살롬의 뺨을 감싸고 입을 맞추자 그도 열렬히 화답해 왔다. 압살롬 특유의 체향이 강하게 느껴졌다. 역시 얼굴이 보이는 게 좋아. 이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거 말고 날 잡아요.”
속삭인 압살롬이 입구에 걸려 있던 귀두로 세게 밀고 들어왔다. 뭉툭한 성기 끝이 정확히 이환이 느끼는 지점을 훑고 쑤시더니 지그시 눌러 온다. 눈앞에 별이 튀었다.
이환은 정신없이 신음하며 압살롬의 목을 끌어안았다. 온 힘을 다해 매달리자 압살롬이 든든하게 안아 왔다.
쉴 새 없이 찔린 부분에서부터 참을 수 없는 열기가 피어오른다. 쾌감에 겨웠던 이환은 눈앞의 살갗을 물고 늘어졌다. 핥고 빨고 깨물자 끌어안은 몸이 떨린다.
“일부러 이러는 거죠? 응?”
압살롬이 이환의 뒤통수를 잡고 떼어 냈다. 열기로 흐려진 눈에 비친 얼굴이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이환만이 알고 있을 얼굴이다. 가슴속에서 치기 어린 우월감이 치솟았다. 그가 흐릿하게 웃자 압살롬이 신음했다.
이환의 뒤통수를 확 눌러 당긴 압살롬이 거칠게 혀를 섞었다. 그와 동시에 성기가 내벽 안을 강하게 후볐다.
순간 절정에 오른 이환이 허리를 휘었다. 압살롬이 그를 뒤쫓았다. 요란하게 뒤섞이는 두 개의 혀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온다. 압살롬의 배에 문질러진 성기에서 토정하며, 이환은 뒤쪽을 조였다.
극점까지 다다른 고양감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환은 그제야 배 속이 뜨끈한 것으로 가득 찼음을 깨달았다.
“하아……. 완전히 잡아먹히는 줄 알았어요.”
이환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압살롬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이환도 압살롬에게 몸을 기댔다. 찰방거리는 물이 피부를 간질였다. 물은 조금 미지근해져 있었다. 어쩌면 몸이 뜨거워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 박자를 찾아 가는 호흡, 부드러운 물결, 압살롬의 온기. 모든 것이 평화롭다. 이환이 긴 숨을 천천히 내뱉는 때였다.
“그거 버릇인가요?”
“뭐가?”
이환이 느른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압살롬은 그 안에 깃든 열기의 잔재를 느끼고 얼굴을 붉혔다.
“그, 할 때 목 핥는 거요.”
이환은 압살롬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얀 목에 울혈이 점점이 찍혀 있었다. 두 색채의 선명한 대조가 눈부시다. 이환은 그것을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그런 거 알 리가 있겠냐. 네가 처음인데.”
“황자라거나…….”
이환은 압살롬을 살폈다. 그제야 질투로 얼룩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게 어쩐지 사랑스러워서 이환은 충동대로 팔을 뻗어 압살롬을 꽉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전부 합해서 처음이라고.”
압살롬이 침묵했다. 이환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웃음을 참느라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진 입매가 눈에 들어왔다. 짙푸른 눈동자에서 기쁨을 읽은 이환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안 봤는데, 너.”
“네, 넷?”
“내가 처음이라 기쁜 모양이다?”
“네에? 아, 아뇨. 그게…….”
이환은 부러 눈을 가늘게 뜬 채 압살롬을 보았다. 허둥거리던 압살롬이 점차 울상이 되어 갔다. 이번에는 이환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더 이상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됐을 즈음 이환은 입술을 숨기며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그가 놀렸다는 것을 깨달은 압살롬이 외쳤다.
“이환!”
“그래. 기분 좋을 수도 있지.”
“놀리지 마세요. 안 그래 보이면서 은근히 짓궂은 구석이 있다니까요.”
투덜거린 압살롬이 다시 이환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더니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나도 이환이 처음이에요.”
“그건 보면 알아.”
섹스만이 아니라 감정의 교류조차 이환이 처음일 것이다. 가볍게 대꾸하자 어깨가 뜨거워졌다.
“어쩐지 분하고 부끄러워요.”
이환은 말 대신 압살롬의 어깨에 입을 맞추었다.
압살롬이 느꼈던 기쁨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의 가장 은밀한 모습을 나만이 안다는 독점욕이라면 이환 역시도 느꼈으니까.
이환은 창을 올려다보았다. 덧문 사이로 노을빛이 보였다. 예정대로 이곳을 구경하기 위해서는 슬슬 씻어야 했다.
“그런데 롬. 이 물에 씻어도 될까?”
정액과 체액, 타액이 섞인 물이다. 목욕하는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러자 압살롬이 이환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깨끗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만…….”
“마법이냐?”
“정말로 별것 아닌걸요. 여행하는 내내 내가 힘들어하는 거 본 적 없잖아요.”
여행하는 내내 소소한 마법을 사용했다고 실토하는 꼴이었다. 이환은 손바닥으로 압살롬의 뺨을 감싸고 힘주어 밀었다.
“우븝!”
“전에도 생각했지만, 네 얼굴로도 이만큼 못생겨질 수 있구나.”
“느무해여.”
압살롬이 벗어나려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환은 툭 튀어나온 입술에 잽싸게 키스한 후 놓아주었다.
“마법 쓸 때마다 이렇게 할 거다.”
좋은지 아닌지 모를 벌이었다. 압살롬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이환을 보다가 물을 정화했다.
그들은 목욕을 끝낸 후 여관을 나섰다. 딱 저녁 먹을 시간인지라 거리 이곳저곳에서 음식 냄새가 풍겼다.
노점에서 음식을 사 들고 근처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앉았다. 상당한 거목이었는지 둘이 걸터앉아도 충분할 만큼 넓었다.
유례없는 미남자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곁의 이환에게도 덩달아 시선이 향했다. 얼마 전 여관 식당에서의 일을 떠올린 이환이 물었다.
“괜찮겠어?”
이미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문 압살롬이 이환을 보았다. 주변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입술이 우물우물 움직일 때마다 볼이 위아래로 실룩거렸다.
‘큰일인데.’
별것 아닌 그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언젠가 압살롬이 숨만 쉬어도 귀엽다고 생각할 날이 올지 모른다.
압살롬이 입안의 것을 열심히 씹어 삼킨 후 되물었다.
“뭐가요?”
“별것 아냐.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들은 사 온 음식을 먹어 치웠다. 식전 운동이 격렬했던 탓인지, 평소보다 많은 양의 음식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환은 빵 부스러기가 묻은 손을 탁탁 털었다. 내려앉은 땅거미 사이로 흥겨운 선율이 들려왔다. 밝은 표정의 사람들이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도 가 볼까요?”
먼저 일어난 압살롬이 손을 내밀었다. 이환은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머뭇거리다 떨어져 나가는 손가락을 잡고 그 사이로 깍지를 꼈다.
움찔거리던 손가락이 이내 슬그머니 마주 잡아 왔다. 이환은 힐끔 곁눈질했다. 얼굴을 붉힌 압살롬이 수줍게 웃고 있었다.
선율을 따라 도착한 곳은 광장이었다. 제법 크게 피워 놓은 모닥불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춤추고 있었다.
그들의 춤은 이환이 어린 시절 캠프에서 배웠던 포크 댄스와 비슷했다. 발을 밟히고도 깔깔대는 모습이 즐거워 보인다.
서로 몸을 부대끼다가 감정에 겨워 끌어안거나 입 맞추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띄었다. 이환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키스하는 두 여자를 응시했다. 과연 동성애를 터부시하지 않는 세계다웠다. 지구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일 것이다.
“이환.”
압살롬이 맞잡은 손을 이끌었다.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이환은 기대감에 가득 찬 얼굴을 마주했다.
“나 춤 못 추는데.”
이 세계에 온 후 사교적 소양을 갖추기 위해 춤을 배우기는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상류사회용이었지, 이렇게 활기 넘치는 곳에서 선보일 만한 춤은 아니었다.
“문제없어요. 내가 리드할 테니까 당신은 따라오기만 하면 됩니다.”
압살롬의 상기된 얼굴과 반짝이는 눈동자는 이환에게 있어 너무나 막강한 무기였다.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발 밟혀도 모른다.”
“마음껏 짓밟아도 괜찮아요.”
압살롬은 앞장서서 무리 안으로 들어갔다. 적당히 빈 곳을 찾아 자리 잡자 새 음악이 시작됐다.
이환은 압살롬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워낙 단순한 동작으로 이루어진 터라 어렵지 않았다. 압살롬의 손을 잡고 두 번째 턴을 할 즈음에는 완전히 익숙해졌다.
다음 동작을 따라 다가붙자 압살롬의 체향이 이환의 코끝을 스쳤다. 짓이긴 풀과 들꽃, 숲, 흙, 비. 마치 이 세계를 닮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이환은 깨달았다.
압살롬은 이옐라의 대척점이자, 마지르와 시스룬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는 드래곤이다. 그의 체향에서 이 세계를 느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환은 압살롬을 보았다. 흩날리는 은발이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눈부시게 반짝인다. 거장의 작품인 양 섬세한 조형의 얼굴에는 생생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제껏 이토록 활기 넘치는 압살롬을 본 적이 없었다.
귓가에서 음악 소리가 사라졌다. 발을 멈춘 이환은 압살롬의 뺨을 감싸 쥐었다. 압살롬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가 이내 내리깔렸다. 새빨개진 뺨이 사랑스러웠다.
이환은 입술을 겹쳐 깊게 입 맞추었다. 호흡을 통해 압살롬의 체향이, 이 세계의 냄새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분명 자신은 지긋지긋하게만 여겼던 이 세계를 좋아할 수 있을 것이다. 이환은 문득 그것을 깨달았다.
***
뤼시앵은 신년이 밝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황궁에 들어서자마자 그를 마중 나온 시종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뤼시앵이 몸에 잔뜩 묻은 먼지를 털어 낼 틈도 주지 않고 이끌었다.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지 모른다. 뤼시앵은 그렇게 각오한 채 시종들을 따라갔다. 그러나 그를 맞이한 것은 황제도 샤를도 아니었다.
그 사람은 햇살 속에 있었다. 금발도, 흰 피부도 전부 빛에 물들어 투명할 만큼 눈부셨다. 정교한 이목구비와 가냘픈 체구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겼던 뤼시앵은 그 사람이 옥좌에 앉아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굽어보는 눈동자가 지극히 자연스럽다. 뤼시앵은 어느 결엔가 무릎을 꿇었다. 머리를 조아리고 나서야 자신이 황제 앞에서도 하지 않던 행동을 했다고 깨달았다.
“네가 뤼시앵이냐? 얼굴 좀 보자꾸나.”
뤼시앵은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그 사람의 눈동자가 보였다. 무지개처럼 수많은 색깔로 반짝이는 눈이었다. 인간이 아니다. 뤼시앵은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그 사람이 눈을 휘었다. 뤼시앵은 그의 입매에 매달린 조소를 민감하게 감지했다.
“그래도 넌 좀 낫구나. 네 아비와 형은 분수를 모르고 건방지게 굴었는데.”
그 사람이 옥좌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흰색의 치렁치렁한 옷이 발치까지 흘러내렸다. 고대에나 입었음 직한 옷차림이 그 사람의 이질감을 더욱 두드러지게 했다.
계단을 걸어 내려온 그 사람이 뤼시앵의 앞에 섰다. 그는 몸을 굽혀 뤼시앵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품평하는 듯한 시선에 거북스러워진 뤼시앵이 슬그머니 눈을 내리까는 때였다.
“그래. 네가 바로…….”
그 사람은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뤼시앵은 돌아선 그의 등에 대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느 분이신지요?”
그 사람이 몸을 틀어 뤼시앵을 보았다. 붉은 입술이 우아하게 움직였다.
“너희의 신.”
허무맹랑한 말을 하는 그의 등 뒤로 햇빛이 들이쳤다. 후광에 감싸인 그 사람을 보며 뤼시앵을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성은 저 말을 의심하라고 속삭인다. 그러나 본능은 그 의심조차 불경한 짓이라 말한다. 의심할 기미라도 보이는 순간 벌이라도 받은 듯 등줄기가 뜨끔거렸다. 뤼시앵이 할 수 있는 행동은 그저 입을 다무는 것이었다.
뤼시앵의 반응은 아무래도 좋은 듯, 자칭 이옐라가 말을 이었다.
“숲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침입해서는 내가 아끼는 꽃마저 꺾어 갔지. 살폈더니 내가 직접 데려온 종이 아니겠느냐? 옆에 드래곤까지 달고 아주 즐거워 보이더구나.”
뤼시앵은 새가 지저귀듯 가볍게 울리는 목소리에서 기묘한 한기를 느꼈다.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떠는데 이옐라가 그에게 다가왔다.
“하도 기가 막혀서 관찰했단다. 내가 뭘 발견했는지 맞혀 보겠니?”
뤼시앵의 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이를 악문 채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옐라가 차갑게 웃었다.
“드래곤의 몸에서 이상한 흔적이 보이더구나. 흐름이 아주 엉망진창이었어. 마치……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뤼시앵이 눈을 크게 떴다. 그때 이옐라가 뤼시앵의 얼굴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상한 건 드래곤만이 아니었어.”
짓눌린 뺨에서 냉기와 통증이 느껴진다. 뤼시앵은 이옐라의 손을 떼어 놓으려 애썼다. 그러나 가냘픈 손가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대로 뤼시앵에게 얼굴을 가까이한 이옐라가 말했다.
“내 종의 몸에서 죽음의 기운이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너는 알고 있니?”
뤼시앵은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문득 꿈속에서 봤던 청람의 눈동자가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그럴 리가. 혼란에 찬 그를 이옐라가 자극했다.
“내 종이 드래곤에게 붙은 까닭이 무엇일까. 너라면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는데. 응? 내 종과 운명으로 연결된 인간아.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냐?”
그 순간 뤼시앵은 화들짝 놀라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이옐라와 눈이 마주쳤다. 침을 꿀꺽 삼킨 뤼시앵이 입을 열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응?”
“운명이라니, 누가 누구와……?”
이옐라가 뤼시앵의 얼굴을 내팽개쳤다. 이리저리 색이 바뀌는 눈동자가 뤼시앵을 훑었다.
“너도 피해자라고 할 수 있겠구나. 시간의 흐름이 뒤엉키면서 내 종과 너 사이에 이어진 인연이 흔들렸지. 그것만 아니었다면 내 종의 마음은 영원히 네 것이었을 텐데, 아깝게 되었어.”
뤼시앵의 안에서 환희와 분노가 동시에 차올랐다. 그는 이옐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누구의 소행인가요?”
이옐라의 입에서 뤼시앵이 이미 짐작했던 단어가 흘러나왔다.
“드래곤.”
이옐라는 뤼시앵의 녹색 눈동자를 스쳐 가는 온갖 감정을 흥미롭게 들여다보았다. 완벽한 모양새의 입술이 움직였다.
“되찾고 싶으냐?”
은근한 음성이 머릿속에 깊이 파고든다. 뤼시앵은 멍한 눈으로 이옐라를 보았다. 꿀처럼 달콤한 말이 뇌를 절여,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내 곁에 있어 줄까요?”
몽롱하게 중얼거리자 이옐라가 웃었다. 물론. 속삭이듯 흘러나온 대답을 듣자 이환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확신이 샘솟았다.
“자, 그럼 말해 보겠느냐? 대체 내 종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그게…….”
뤼시앵은 순순히 입을 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꿈에 대한 내용까지 전부 털어놓은 후였다. 아차 싶었으나 이미 이야기는 끝난 후였다.
혹시 자신이 보낸 사자를 그런 식으로 대했다고 분노하지 않을까. 스스로 눈치채지 못했으나 뤼시앵은 이미 상대를 신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옐라가 내뿜는 신으로서의 권능에 자연스럽게 굴복한 결과였다.
이옐라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뤼시앵은 잔뜩 긴장한 채 이옐라의 안색을 살폈다.
“그런 거였구나.”
뤼시앵의 생각과는 달리 이옐라는 분노하지 않았다. 당황한 뤼시앵은 아무 대답도 못 했다.
“왜? 내가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느냐?”
뤼시앵은 슬그머니 고개를 떨궜다. 시선 끝에 이옐라의 발이 보였다. 신이라 그런 것인지 맨발임에도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채 눈부시게 희었다.
그렇게 이상한 부분에서 상대의 정체를 절감하는 뤼시앵에게 이옐라가 말했다.
“나의 백성아. 나는 어디까지나 너희를 위해 그를 보낸 거란다. 그러니 너희가 그를 좋을 대로 사용하다 버렸다 해도 내가 화를 낼 리 없지 않겠니.”
모호한 말이었다. 뤼시앵은 다시 긴장했다. 그러자 이옐라가 웃었다.
“덕분에 나 역시 득을 보았으니 화내지 않아. 그러니 그 움츠러드는 것 좀 그만두거라. 앞으로 한동안 함께 지낼 텐데, 매번 그래서야 될 일도 그르치겠어.”
“이곳에서 머무십니까?”
“그래. 모든 것을 순리대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이곳에 있는 것이 가장 좋을 테니까.”
모든 것을, 순리대로. 뤼시앵은 그것이 자신의 바람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기대에 차 이옐라를 보았다. 그러자 이옐라가 손을 내밀었다.
“도와주겠니? 나의 백성아.”
뤼시앵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얼음장 같은 손을 받들듯 쥐고 손등에 입 맞추었다. 이옐라의 입매가 만족스럽게 올라갔다.
***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한 항구도시 이르멘. 엘부르즈 섬에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이르멘에 도착한 이환과 압살롬은 사람들이 가장 활발히 드나드는 여관을 찾았다.
엘부르즈 섬은 여러모로 이름난 곳이었다. 항구를 떠나 배로 한참을 가야 도착할 수 있다는 점도 그러했지만, 살아 돌아온 자가 몇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악명을 날렸다.
수십 년 전, 한 배가 풍랑을 맞아 엘부르즈 섬까지 표류한 일이 있었다. 수십 명의 선원 중 뭍으로 돌아온 자는 열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전원이 만신창이였고, 반수 이상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겨우 정신을 유지한 자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엘부르즈 섬에는 온갖 맹수와 몬스터가 들끓는다고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것들에 쫓겨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끝을 알 수 없는 늪이 나온다. 늪에 빠진 동료를 구하려다 되레 끌려들어 간 사람도 있었다.
기록을 남긴 자는 죽어 가는 동료를 외면하고 간신히 늪을 비켜났다고 한다. 그러나 살아났다고 생각한 곳에서 사람 잡아먹는 식물과 맞닥뜨렸다. 위험에 처한 그는 동료를 밀쳐 자신 대신 죽음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살아 돌아온 선원들은 대부분 그런 식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들은 섬을 벗어난 후 죄책감과 악몽에 시달리다 결국 미쳐 갔다.
세상의 온갖 끔찍한 것들을 전부 모아 놓은 곳. 기록을 남긴 자는 엘부르즈 섬을 그렇게 표현했다.
이런 곳이니만큼 섬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숙박 명부를 작성한 압살롬이 고개를 들었다. 명부를 보느라 내리깔렸던 눈이 천천히 뜨이자 은빛 속눈썹에 가려졌던 짙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압살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여관 주인의 얼굴이 한층 더 몽롱해졌다.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혹시 요 몇 달 사이에 특이한 무리가 엘부르즈 섬을 향하지 않았던가요? 예를 들어 무기를 소지한 자들이라거나…….”
저게 의도한 미인계가 아니라는 점이 제일 무섭다. 이환은 주인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오는 대답을 들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여관 주인의 말에 따르면 단단히 무장한 여남은 명의 무리가 엘부르즈 섬을 향해 떠났다고 한다. 살아 돌아온 자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 소문에 따르면 그들은 크기가 1미터쯤 되는 붉은색 비석을 소중히 끌어안고 있었다.
방에 들어간 이환은 짐을 내려놓으며 희미한 한숨을 흘렸다.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막상 답을 들으니 맥이 풀렸다. 그때 압살롬이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실망했어요?”
옭아매듯 단단히 얽힌 팔이 마치 매달리는 것 같았다. 이환은 고개를 돌려 압살롬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압살롬이 입술을 부딪쳐 왔다.
방 안에 물소리가 울린다. 작게 신음한 압살롬이 이환의 옷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입술이 미끄러져 이환의 목을 더듬는 때였다.
빠르게 가까워진 발소리에 뒤이어 누군가가 노크했다. 그들은 동시에 움찔했다. 압살롬은 가빠진 숨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식사 가지고 왔습니다.”
여관 주인의 목소리였다. 이르멘은 바다에 면한 곳답게 겨울바람이 매서웠다. 1층 식당이 추워서 방으로 식사를 올려 달라고 했는데 그것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심호흡해 정동을 가라앉힌 압살롬이 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의 뺨은 아직 가시지 않은 열기로 홍조를 띠고 있었다.
이환은 압살롬을 만류하고는 직접 문을 열었다. 몸을 내밀자 주인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눈에 번진 실망을 모르는 척 쟁반을 받자 주인이 고개를 슬그머니 기웃거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이환은 문을 닫아 주인의 시선을 차단했다.
몸을 돌리자 기묘한 표정의 압살롬이 보였다. 이환은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일단 밥부터 먹자.”
“그래요. 그런데…….”
이환은 압살롬의 목소리에 담긴 웃음기를 애써 무시했다. 그러자 압살롬이 그의 귀를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압살롬의 체온이 이환에 비해 높은 만큼 뜨거워야 할 그것이 기분 좋게 서늘했다.
“여기, 새빨개요.”
손가락이 떨어진다 싶더니 이번에는 목덜미에 닿았다. 여기도. 덧붙이는 목소리는 즐거움을 담고 있었으나, 느릿느릿 어루만지는 손가락에서는 다른 것이 느껴졌다.
정동이 이환의 전신을 오싹하게 내달렸다. 그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입을 열었다.
“음식 식어.”
“그건 큰일이네요.”
당장이라도 콧노래를 부를 듯 경쾌하게 중얼거린 압살롬이 물수건을 내밀었다. 수건이야 방 안에 갖춰진 물건이라지만 물은 달랐다.
물수건으로 손을 닦은 이환이 압살롬을 보았다. 그는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이환을 향하고 있었다.
“이게 벌인지 뭔지…….”
이환은 투덜거리면서도 압살롬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못생긴 얼굴로 만들겠다는 애초의 목적은 어디로 갔는지, 남은 것은 키스뿐이었다. 이환은 붉은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고 떨어졌다. 그러자 곧바로 따라붙은 압살롬이 이환의 입술을 삼켰다.
깊은 곳까지 휘감고 문지르는 혀에 금세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환은 간신히 눈을 떠 압살롬을 보았다. 조금 찌푸려진 미간과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마음 한구석을 헤집었다.
최근 압살롬의 스킨십이 늘었다. 증가한 것은 횟수만이 아니었다. 점점 끈질겨지는 접촉에서는 집착마저 느껴졌다. 이환은 압살롬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번 성물을 손에 넣지 못했으니 다른 곳에 있는 것을 노려야 했다. 압살롬으로서는 결단까지의 유예 기간이 다시 미뤄진 것이다. 이환은 압살롬의 입술에서 안도와 기쁨 그리고 불안을 동시에 느꼈다.
뤼시앵을 위해 내렸던 결정은 오로지 이환의 마음만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완전한 결정을 내리고 싶었다. 이후에 무엇이 닥쳐도, 설령 앞으로 수명이 한참은 더 남은 압살롬을 남기고 먼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해도 흔들리지 않도록.
하지만 이 망설임이 압살롬을 힘들게 한다면―
“윽!”
이환은 입술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통증에 신음했다. 압살롬이 숫제 노려보듯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이 깨문 부분을 정성스럽게 핥은 압살롬이 중얼거렸다.
“다른 생각 할 정신이 있나 보죠?”
“……네가 키스를 너무 못하니까 그런 거잖아.”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기가 찬 듯 코끝으로 웃은 압살롬이 이환을 번쩍 들어 안았다. 이환은 발로 압살롬의 허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음식 식는다니까.”
“데워 줄게요. 보답은 키스로 충분합니다.”
벌이 언제 보답으로 변했냐. 그렇게 말하려는데 몸이 침대 위에 안착했다. 이환이 일어날 틈도 없이 압살롬이 덮쳐 왔다. 묵직한 무게와 뜨끈한 온도가 그저 사랑스러워 세게 끌어안자 압살롬이 속삭였다.
“이환은 그저 자신만 생각하면 됩니다. 난 그걸로 충분해요.”
상냥하고 맹목적인 말이 오히려 심장을 저민다. 이환은 눈을 감았다.
다 식은 음식을 갓 만든 것처럼 되돌린 압살롬은 쟁반을 들고 침대로 향했다. 이환이 헤드보드에 기댄 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께느른한 모습을 보자 목이 탔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 이환이 고향에 전해 내려오는 속담이라며 압살롬에게 한 말이었다. 압살롬 역시 그 말에 동의하는 바였다.
그래도 겉모습만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꾸미고 다가갔다. 침대 위에 쟁반을 내려놓는데 이환의 시선이 따가울 정도로 달라붙었다.
“나 더 못 해. 배고파.”
뜨끔해지는 소리였다. 압살롬은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그러자 이환이 슬쩍 웃었다. 조금은 얄궂은 입매가 지독하게 매력적이었다.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고 만 압살롬은 얼굴을 확 붉혔다.
“배고프다면서요. 얼른 먹죠.”
“그래.”
이환이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며 음식에 손을 가져갔다. 압살롬은 먹는 둥 마는 둥 그를 곁눈질했다.
이환은 늘 압살롬더러 아름답다고 말한다. 하지만 압살롬이 보기에 정말 아름다운 것은 이환이었다. 그 자신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상흔조차 압살롬의 눈에는 눈부셨다.
드래곤으로서의 권능을 전부 포기한다면 이환을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태어난 목적을 생각한다면 품어서는 안 될 마음이었다.
그러나 한번 고개를 든 욕망은 제멋대로 폭주해 나갔다. 어쩌면 지금껏 억눌린 데 대한 반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압살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세상도 욕망을 깨달아 버린 드래곤을 감시자로서 두느니 차라리 새 드래곤을 만드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세계에서 추방당하는 징벌이 내려진다면 정말 기쁠 텐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만으로도 지독한 행복이 밀려왔다.
“아, 여기. 잠시만요.”
압살롬은 뭐라도 묻은 것처럼 이환의 입매를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그 손가락을 입안에 넣고 핥았다. 사실은 당장 눕히고 키스한 후 좁고 뜨거운 곳에 성기를 처박고 싶었다. 하지만 이환을 굶주리게 할 수는 없으므로 이것으로 참을 생각이었다.
속내를 감추고 나긋하게 웃는데 이환이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대체 무슨 음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 또 들켰다. 압살롬은 부러 눈매를 한껏 휘었다. 그러자 이환이 빵을 쭉 찢으며 말했다.
“작작 좀 하자. 이러다 복상사하면 죽어서도 부끄러울 거야.”
복상사? 복하사? 이환은 그렇게 중얼거리다 빵 조각을 입에 넣었다. 압살롬은 숟가락을 들어 수프를 휘휘 저었다.
‘전부 말해. 내가 억측하지 않도록, 제대로.’
이환이 압살롬에게 진실을 촉구할 때 했던 말이었다. 삐죽한 가시가 압살롬의 심장을 찔렀다.
제국이 엘부르즈 섬의 붉은 비석을 앞질러 차지한 이상 이환은 다른 성물을 노려야 했다. 현재 남은 성물은 제국이 소유한 신의 무기 디우스텔룸과, 교황청 심처의 바닥을 장식한 대리석이었다.
이환은 이곳 이르멘에서 교황청까지 가는 가장 빠른 경로를 살폈다. 어떻게 해도 제국을 관통하는 길밖에 없었다.
위험도를 고려해 제국을 빙 돌아서 가면 몇 배나 되는 시간이 소요된다. 그 시간 동안 압살롬이 느낄 초조와 불안을 생각하니 조금 위험하더라도 제국을 가로지르는 것이 나을 듯싶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압살롬은 괜찮다고 말했지만 이환은 되레 미안해졌다. 이미 마음의 추는 상당히 기울어진 상태였다. 이환은 지도에서 눈을 떼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던 중 압살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환은 시선으로 그를 좇았다.
“시장에 다녀올게요.”
“같이 가.”
일어난 이환이 겉옷을 집어 들었다. 추운데, 라고 말하면서도 압살롬은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았다.
함께 여관을 나서자 매서운 겨울바람이 그들을 덮쳤다. 이환은 목을 움츠렸다. 그때 압살롬이 이환의 손을 잡아 자신의 겉옷 주머니에 넣었다.
“내 체온이 더 높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가늘어지는 눈매가 해사하다. 그런 압살롬을 가만히 보던 이환이 잡힌 손을 꾸물꾸물 움직였다. 그러자 압살롬의 얼굴에 금세 망설임이 번졌다.
“답답해요?”
이환은 대답 대신 압살롬의 손가락에 깍지를 꼈다. 그러고는 괜히 쑥스러워져서 압살롬을 흘금 보았다. 고운 뺨에 온통 분홍 물이 들어 있었다.
“가자.”
“네에.”
수줍은 듯 흔들리는 목소리와, 이와는 대조적으로 단단히 힘이 들어간 손가락. 빈틈없이 맞물린 손이 기껍다. 슬쩍 상대를 본 둘은 동시에 발을 뗐다. 이곳에서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을지 몰라. 이환은 문득 절감했다.
항구도시인 만큼 시장이 대단히 번성했다. 온통 북적거리는 터라 이환과 압살롬은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았다. 스치다 멀어지는 손끝이 아쉽다. 이환은 압살롬의 온기를 잡듯 주먹을 쥐었다.
압살롬이 물건을 익숙하게 흥정하는 동안 이환을 다른 가게를 둘러보았다. 내륙에서는 건어물로나 접했던 생선이 싼값에 팔리고 있었다. 날로 먹어도 괜찮다면 쌀과 식초를 구해 초밥을 만들어도 좋을 듯했다.
문득 이환은 이제껏 이러한 생각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귀 전에는 그저 이 세계에 녹아드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고, 회귀 후에는 이 세계를 밀어내기에 바빴다.
마음먹기에 따라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다. 이환은 새롭게 눈뜬 기분이었다.
“오늘 잡은 거야. 아주 싱싱하지.”
가게 주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환 못지않게 무뚝뚝한 인상의 노인이었다. 그게 오히려 편하게 느껴진 이환이 물었다.
“날로 먹어도 됩니까?”
“뱃사람이야?”
반문한 노인이 별걸 다 보겠다는 듯한 눈으로 이환을 훑었다.
“뱃사람도 아니면서 날생선을 먹겠다고?”
“뱃사람들은 먹나요?”
배에서야 불을 피우기 난감한 때도 있으니 날것도 뜯어먹는다지만 뭍에서까지 그러지는 않는다. 노인의 설명을 들은 이환이 말했다.
“고향에서는 날것으로도 먹거든요. 잘 손질하면 맛있습니다.”
그때 압살롬이 이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난 잠시 저쪽 좀 가 보고 올게요. 이환은 이곳에 좀 더 있을 거죠?”
“왜 혼자 가려고 그래? 같이 왔으니 같이 움직여야지.”
“지금 이환이 즐거워 보여서요. 당신 고향의 음식이라니 나도 좀 궁금하고 말이죠. 잘 상의해서 맛있게 만들어 줄 거죠?”
그들의 식사는 전적으로 압살롬이 책임지고 있었다. 압살롬은 별말 하지 않았으나 이환은 그것이 미안했다. 그러나 괜찮다는 압살롬을 밀어내고 시도한 요리는 번번이 재료 낭비라는 뼈아픈 결론에 도달할 뿐이었다.
그런데 오늘 압살롬이 처음으로 그에게 요리를 청한 것이다. 이환은 흔쾌히 수긍했다.
압살롬의 등이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이환은 그를 끝까지 지켜본 후에야 다시 노인을 향했다.
“거, 일행이 참 잘생겼군. 연인이야?”
“네.”
연인. 단어만으로도 달콤하다. 이환은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그 순간 공기가 기묘하게 요동쳤다. 압살롬이 마법을 사용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환은 그 방향을 향해 돌아섰다.
청명한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시커먼 구슬이 나타났다. 불길함을 느낀 이환이 물러섰다. 그러나 그것은 이환을 빠른 속도로 따라붙었다.
퍽!
이환의 코앞에서 구슬이 터졌다.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퍼진다. 이환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몬스터를 베었을 때와는 다르게 이 연기는 너무도 짙고 강했다.
연기가 이환을 에워쌌다. 마치 살아 있는 듯 움직인 연기는 이환의 코와 입, 심지어 모공을 통해 빠르게 침투했다.
가슴에서 시작한 열이 전신으로 퍼진다. 몸에서 힘이 빠지고 목이 근질거렸다. 이환은 목구멍을 타고 울컥 치솟은 것을 뱉었다. 선홍색의 피가 지독히도 선명했다.
이제는 꿈처럼 멀어진 회귀 전이 떠올랐다. 죽기 얼마 전에 이환이 겪은 증상이 꼭 이러했었다.
‘어째서.’
아니, 이유 따위는 상관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이환을 해치려 한다는 것이다. 그는 칼을 뽑았다. 그러나 힘을 잃은 팔은 축 늘어지고 말았다.
흔들리던 무릎이 결국 땅에 닿았다. 이환은 열로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가물거리는 시야에 반짝이는 금발이 보였다. 이환은 까마득해지는 정신으로 중얼거렸다.
“뤼시앵.”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이환이 이변을 느낀 순간, 압살롬도 그에 대해 알아차렸다. 다급히 돌아선 그는 이환을 향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도 못해 멈추고 말았다.
어느 순간 그곳은 주변과 괴리되어 있었다. 고요한 가운데 10대 중반의 소년이 허공을 딛고 압살롬의 앞에 내려섰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흰옷이 눈부시다.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뜬 소년이 압살롬을 보았다. 부러 극적으로 연출한, 지극히 그다운 행동이었다. 압살롬이 그의 이름을 내뱉었다.
“이옐라.”
햇살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금발도, 새하얀 얼굴도 그저 곱다. 그러나 저것은 이옐라의 본모습이 아니었다. 압살롬은 유일하게 이옐라의 것인, 이리저리 색이 바뀌는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가엾은 인간을 잡아먹었습니까.”
“어폐가 있는 말이로구나, 어린 드래곤아. 인간이란 본디 내가 만든 존재. 주인이 가져다 쓰는 것을 두고 잡아먹는다니.”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은 이옐라가 압살롬을 훑어보았다. 흥미로운 빛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나저나 어린 드래곤아. 참 깜찍한 짓을 했더구나. 그것이 그리도 마음에 들었더냐?”
이옐라의 눈은 정확히 압살롬의 심장을 향하고 있었다. 압살롬은 이옐라를 노려보았다.
“전부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됐지 않습니까. 그는 내버려 두세요.”
얼핏 분노한 듯한 목소리에는 불안이 숨어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이옐라가 소리 내어 웃었다.
“하찮은 이물에 눈먼 것을 비웃어야 할지, 아니면 멀어 버린 눈으로 그만큼이나 알아냈다고 감탄해야 할지…….”
오팔 같은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 순간 먼 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환!”
압살롬이 창백한 얼굴로 발을 떼는 때였다. 무형의 밧줄이 압살롬을 단단히 묶었다. 이것이 가능한 자는 하나뿐이다. 그는 이를 갈았다.
“이옐라!”
“내가 원하는 대로 되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이옐라가 압살롬에게 다가섰다. 무표정한 이옐라는 잘 만들어진 대리석상 같았다.
“이제는 너도 알겠지. 긴 생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준 존재를 잃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를.”
무정해서 오히려 고통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그러나 압살롬에게는 그런 것을 느낄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환에게 손대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 어떤 벌을 받게 된다 해도 좋다. 이환의 털끝 하나라도 상했다면 이옐라를 죽여 버릴 것이다. 압살롬이 살기를 담아 노려보자 이옐라가 코웃음 쳤다.
“약해 빠진 것이 입만 살았구나. 아까부터 바르작거려 놓고도 내 결계 하나 깨지 못하는 네가 뭘 어쩌겠다고?”
“약해진 것은 피차 마찬가지일 텐데요.”
압살롬이 낮게 으르렁댔다. 그러자 눈살을 찌푸린 이옐라가 손톱을 세웠다.
“그래. 그것을 불러와 축복까지 내리느라 힘을 많이 썼지. 하지만 건방진 드래곤아. 너는 그런 나조차 어쩌지 못하잖느냐.”
긴 손톱이 압살롬의 흰 얼굴을 천천히 그었다. 이마에서 눈을 지나 뺨에 이른 고랑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손톱에 낀 살점을 털어 낸 이옐라가 결계를 풀었다. 소음과 기척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압살롬은 그중 불길한 것을 감지했다.
“이틀의 시간을 주마. 제국의 황궁까지 어디 열심히 달려와 보거라.”
이옐라의 모습이 공기 중에 녹아드는 것과 동시에 화끈한 통증이 압살롬의 옆구리를 후볐다. 압살롬은 시선을 내렸다. 이옐라의 저주가 덕지덕지 묻은 단검이 보였다.
백주대낮의 칼부림에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솟았다. 압살롬은 상대를 응시했다. 뤼시앵의 곁에 늘 붙어 있던 기사였다.
찌른 것으로 목적을 이룬 듯 기사는 미련 없이 손을 놓았다. 이를 악문 압살롬은 단검 자루를 틀어쥐고 단숨에 빼냈다.
피투성이 단검을 내팽개치고 돌아섰다. 손으로 상처를 틀어막은 채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지혈을 위해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배 속에서 지독한 통증이 일었다. 이옐라의 저주가 발동한 것이다.
단검에 걸린 것은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몸속이 썩는 저주였다. 신이 그 대척점에 있는 드래곤에게 걸기에는 참으로 보잘것없었다. 게다가 저주 자체도 그리 강하지 않았으므로 시간을 들이면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시간. 그것이 문제였다.
지금 압살롬의 힘으로 이 저주를 풀자면 사나흘은 걸릴 것이다. 그러나 이옐라가 준 시간은 고작 이틀이었다. 저주를 다 풀고 달려간 그를 기다리는 것이 무엇일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압살롬은 남은 마력을 가늠했다. 바닥을 드러낸 우물 꼴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이옐라의 결계를 풀려 들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압살롬은 같은 행동을 할 것이다. 이환의 위험을 두고 본다는 것은 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충 지혈을 끝낸 압살롬은 제국을 향해 몸을 돌렸다. 남은 힘으로는 고작 몇 킬로미터 이동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마력을 움직였다.
압살롬의 몸이 서서히 흐려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그가 남긴 희미한 신음도 잦아들어, 골목 안에는 침묵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