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사냥이 끝난 후 사냥개는 2권
Chapter 4.
사냥개는
주인의 새벽을 가로질렀다
약 500년 전, 슈탄스라는 나라에 현신한 이옐라는 성물을 남기고 떠났다. 슈탄스가 멸망한 후 세워진 뢴트너는 성물을 거둬 왕궁 지하에 보관했다. 그것이 벌써 391년 전의 일이었다.
이환은 그믐을 틈타 뢴트너의 왕궁에 침입했다. 성물이 있는 별궁의 경비는 영 형편없었다. 다른 성물이었다면 더욱 경계할 일이었지만 이환은 그러지 않았다. 이 성물에 얽힌 이야기를 알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옐라는 눈먼 남성으로 현신했다고 한다. 지팡이에 의지해 길을 가다가 가로수의 가지에 그의 머리카락이 걸렸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머리카락을 빼내는 것도 쉽지 않다. 고군분투하는 중, 나무는 제 가지를 잘라 이옐라의 머리카락이 상하지 않도록 해 주었다.
뢴트너의 성물은 바로 그 잘려 나간 나뭇가지였다. 산코냐의 성물처럼 금과 보석으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특별히 영험한 효력을 보인 것도 아니다. 즉, 성물이라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 가치가 없으니 이제 와서는 무의미한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게다가 지킨 지 4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니 타성에 빠질 만도 했다. 이환으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성물이 있는 방으로 들어서자 신의 힘이 느껴졌다. 많지는 않았으나 이환에게는 이나마도 아쉬웠다. 그는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갓 꺾인 듯 푸릇푸릇한 나뭇가지를 품에 넣었다. 이번에도 첫 번째 성물을 만졌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환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왕궁을 나섰다. 담에서 내려서자마자 압살롬이 다가왔다.
“성공했어요?”
“그래.”
“잘됐습니다.”
달도 없는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의 압살롬은 유난히도 창백해 보였다. 붉은 입술이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그렸다. 그 웃음을 마주 보기 힘들었던 이환은 슬쩍 시선을 피했다.
사실 이환은 압살롬에게 계속 성물을 찾겠다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압살롬을 좋아한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 세계에 남을 만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어쩌면 아직 선택의 기로가 목전에 다가오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환은 자신이 이기적인 속물 같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성물은 계속 찾을 생각이야.’
한참을 망설이다 꺼낸 말이었다. 이에 대한 압살롬의 대답은 허무할 만큼 간단했다.
‘그래야죠.’
다른 차원으로 돌아갈 방도를 찾는 연인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혹시 압살롬은 이환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닐까. 이환은 차라리 그쪽이기를 바랐다. 그조차 아니라면 또 다른 이유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압살롬이 사실은 이환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러한 이유 말이다.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요즘 들어 자꾸만 생각이 그쪽으로 향했다. 원인은 이환도 알고 있었다.
회귀 후 그들 사이에서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은 오간 적이 없었다.
치졸하다는 자각은 있다. 그러나 걸핏하면 떠오르는 생각은 그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환은 희미한 한숨을 흘렸다. 하얀 숨이 밤공기 사이로 길게 흩어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이환과 압살롬은 곧바로 수도를 출발했다. 들킨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환이 노리는 세 번째 성물은 뢴트너 북부 지방에 위치한 숲 바이스발트에 있었다. 그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그리로 향했다.
이환은 압살롬과의 입씨름 끝에 구매한 연회색 코트를 곁눈질했다. 희고 풍성한 모피가 달린 그것은 압살롬을 겨울의 화신처럼 보이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만족스러운 충동구매였다.
“왜요?”
시선을 알아차린 압살롬도 이환을 보았다. 이환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입가에 절로 떠오른 희미한 미소에 압살롬도 마주 웃었다.
그날 밤, 산에서 노숙을 하게 된 그들은 물가를 찾아 여장을 풀었다. 바로 어제 들렀던 마을에서 들은 바로는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산이라고 했다. 과연 여느 때보다 피로도가 높았다.
풍성한 식재료로 만든 맛있는 저녁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환은 식사에 영 집중하지 못했다.
“무슨 일 있어요?”
“조금 이상한 느낌이…….”
부르는 듯, 머리카락 끝을 기묘하게 잡아끄는 느낌이 아까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이환이 미심쩍은 얼굴로 어딘가를 바라보는 때였다.
쿵! 쿠쿵!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그리 크지 않은 그 소리는 한동안 계속되다 멈췄다. 뒤이어 바로 그 방향에서부터 몬스터의 기척이 가까워졌다. 이환이 압살롬과 동행한 이래 최초로 마주친 몬스터였다.
이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칼에 손을 가져갔다. 그런 그를 압살롬이 저지했다.
“제가 합니다.”
이환은 압살롬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바닥에 남은 것은 그의 옷자락뿐이었다. 그나마도 머물지 않고 빠져나갔다.
“압살롬!”
“빨리 끝낼 테니 조금 물러서 주세요.”
이윽고 숲에서 세 마리의 몬스터가 튀어나왔다. 얼굴은 인간과 흡사하나 몸은 사자인 몬스터, 만티코어였다.
압살롬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무엇 하나 특출한 부분이 없이 평범하고 소박한 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유려하게 움직여 만티코어를 가르고, 그 안쪽의 핵마저 단숨에 깨트렸다.
두 번째 만티코어의 꼬리가 압살롬을 향해 유연하게 움직였다. 전갈을 닮은 꼬리 끝에서 독이 발린 가시가 시커멓게 빛났다. 이환이 다급히 걸음을 떼는 순간, 붉게 물든 검 끝이 꼬리를 끊었다.
촤악!
단숨에 내려친 검이 만티코어를 양단했다. 피와 육편 사이로 압살롬의 모습이 드러났다.
거기 있어요.
피보라 속에서도 유독 또렷하게 빛나는 붉은 입술이 말을 그렸다. 이환은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세 번째 만티코어도 압살롬의 검에 목숨을 잃었다. 그는 검에 묻은 얼룩을 털어 내며 이환에게 다가갔다. 이환은 압살롬의 흰 뺨에 오물처럼 묻은 핏자국을 손가락으로 닦으며 말했다.
“수고했어.”
등 뒤에 자신이 만든 참상을 둔 채 나긋하게 웃는 압살롬은 그저 아름다웠다. 이환은 그에게 상처가 없는지 살피는 척하며 복잡한 심사를 숨겼다.
압살롬에게 상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이환은 만티코어에게 향했다. 세 마리 모두 과거에 그가 싸웠던 만티코어보다 마르고 작았다. 자신들의 왕에게까지 죽자고 달려들 만한 이유는 많지 않을 터다. 이환의 추측을 뒷받침하듯 압살롬이 말했다.
“오랜 시간 굶주린 듯하군요.”
이환은 소리가 들려왔던 쪽을 응시했다. 아까보다 희미해지기는 했으나 여전히 무엇인가가 그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환에게 다가선 압살롬이 물었다.
“가 볼까요?”
그들은 여장을 다시 꾸려 이동했다. 산길을 벗어나 나뭇가지들을 헤치며 한참을 걷던 중 인적이 발견되었다. 거기에서 좀 더 가자 분지에 형성된 마을이 나타났다.
엉성하게 지어진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작은 마을이었다. 근처에는 제법 잘 정돈된 밭이 있었다. 마을이 형성되기에는 부자연스러운 곳이었으므로, 이환은 이들이 불법 화전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티코어는 분명 이쪽 방향에서부터 왔다. 그러나 이 마을은 몬스터의 습격을 받은 흔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 소리는 또 무엇일까.
그때였다. 저편에서부터 몬스터의 기척이 가까워졌다. 이환이 나서려는 순간 압살롬이 그의 팔을 끌고 거목 뒤에 숨었다.
“압살롬?”
“잠시만. 이상한 걸 본 듯해서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놔.”
“싫습니다. 놓는 순간 몬스터에게 달려들 거잖아요.”
순간 이환이 멈칫했다. 이 세계의 인간들이 밉다고 생각했으면서 몸은 어느새 버릇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긴장했던 몸에서 힘을 뺐다.
그사이 만티코어 네 마리가 마을에 당도했다. 이환은 실랑이하던 자세 그대로 압살롬의 팔에 안긴 채 그들을 살폈다. 그때 그들의 앞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쿵!
마을을 향해 돌진하던 만티코어가 큰 소리와 함께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이환은 그쪽으로는 눈도 주지 않았다. 그의 눈은 마을에, 정확하게는 마을을 감싼 희뿌연 막에 고정되어 있었다.
“압살롬.”
방금 전까지는 너무 멀고 희박하여 알지 못했으나, 이환은 저 힘을 알고 있었다.
“이곳에 성물이 있는 모양이다.”
압살롬의 얼굴이 희미하게 굳어졌다.
희뿌연 막은 몬스터들이 돌아서서 그들을 향해 달려들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이번에도 압살롬은 이환 대신 무기를 들었다.
그가 네 마리의 만티코어를 상대하는 동안 소란을 알아차린 마을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이환은 그들을 살폈다. 차림새는 빈곤해 보였으나, 그들의 얼굴에는 이 세계 사람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공포가 없었다.
마지막 만티코어의 핵이 검게 물들며 연기를 흘렸다. 검을 검집 안에 되돌린 압살롬이 눈매를 접었다. 그러자 다소 경계하는 기색이던 마을 사람들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실례합니다. 저희는 여행객인데, 하루 묵어갈 수 있을까요?”
***
이환은 압살롬의 미모에 힘입어 머물게 된 집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살지 않게 된 지 제법 된 집치고는 상당히 깨끗했다.
잠시 후 안쪽을 살피겠다며 들어갔던 압살롬이 나왔다. 그는 이환을 보더니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표정이 좋지 않군요.”
“내 표정이 뭐.”
이환은 반들반들 닦인 금속 거울에 자신을 비췄다.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압살롬은 고개를 저었다.
“고민 중이죠?”
이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이 작은 마을의 평화는 오로지 성물로써 유지되고 있을 터다. 그런 것을 가져간다면 어떻게 될지 뻔했다.
그러나 이 세계의 인간들을 위해 목표를 코앞에 두고 빙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 정도의 일을 가능하게 하는 성물이니 그 안에 담긴 신의 힘은 어마어마할 텐데?
거기까지 생각했던 이환은 모순을 발견했다. 분명 이곳의 성물은 마을 전체를 보호할 만큼 강력했다. 그런데 그 힘이 발휘될 때까지 이환은 성물이 있다는 것을 확정하지 못했다. 또한 이런 식으로 힘을 발휘하는 성물이 있다는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상한 점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이환은 압살롬을 흘긋 보았다.
압살롬은 드래곤, 즉 몬스터였다. 그런데 이 마을을 지키는 막은 그에게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보통 몬스터와 압살롬의 차이점은 외모에 있다. 압살롬은 누가 봐도 인간―과하게 아름답기는 했지만―의 형상이고, 몬스터는 그렇지 못하다. 이 차이가 마을에의 진입 여부에 영향을 미쳤다면, 막의 형성에 누군가의 판단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뭐지, 이 마을은.”
“미심쩍은 점이 있다면 며칠 더 묵어갈까요? 아까 촌장이 슬쩍 말하더라고요. 좀 더 머물 생각이 있으면 그렇게 하라고.”
“그러고 보니 젊은 남자가 별로 없었지. 아까 네가 만티코어를 해치우는 장면도 봤으니 우릴 이 마을에 묶어 두려는 생각일지도.”
“십중팔구 그럴 겁니다. 왜냐하면 아까 이 마을에 마음에 드는 사람은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애매하게 말해 두기는 했습니다. 요즘 몬스터 때문에 이동하기 힘들어 정착하고 싶다, 그런데 마땅한 곳을 찾을 수가 없다……. 왜 그리 불만스러운 얼굴인가요?”
이환은 압살롬의 양 뺨을 잡았다. 손에 슬며시 힘을 주자 압살롬이 스스로 가까워졌다. 붉은 물이 천천히 번져 가는 뺨을 보다가 속삭였다.
“바람피우면 가만 안 둔다.”
잠시 멍하니 있던 압살롬이 천천히 미소 지었다. 새하얀 모란꽃이 만개하는 듯한 모습에 이번에는 이환이 멍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어느새 가까워진 입술이 겹쳤다. 짧게 끝난 입맞춤이 아쉬웠던 이환이 압살롬의 입술을 좇는 때였다.
“내가 할 말입니다.”
다시 만난 입술이 잠깐 얽혔다 멀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돌과 맹진만을 알던 입술이 이제 제법 애태우는 법을 배운 모양이었다. 이환은 간만 본 후 요리조리 도망치는 혀를 잡아다 슬쩍 깨물었다. 입안에서 압살롬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압살롬의 태도는 평소와 너무나 똑같았다. 몇 시간 전 동족을 참살한 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환은 안도하는 동시에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촌장이 빵을 가져다주었다. 거기에 사슴 고기로 만든 스튜를 곁들이자 만족스러운 한 끼가 완성되었다.
그들이 식사를 거의 끝마칠 즈음이었다. 뒷문 근처로 누군가의 기척이 가까워졌다. 이환과 압살롬은 입을 다문 채 상대에게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기척은 서성거리기만 할 뿐, 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압살롬이 속삭였다.
“제가 나가 볼까요?”
“내가 갈게.”
이환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문을 벌컥 열자 한 소녀가 다람쥐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손을 뻗어 도망치는 상대의 뒷덜미를 잡았다.
10대 중반으로 보이는, 빗자루 같은 빨간 머리와 선명한 주근깨가 인상적인 소녀였다. 그녀는 이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발버둥 쳤다. 어찌나 필사적인지 잡힌 옷깃이 팽팽하게 당겨져 찢어지진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놔, 놔줘!”
그러나 이환은 그녀를 가만히 볼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소녀의 허리춤에 매달린 주머니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신의 힘이 풍겼기 때문이다. 이환이 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때였다.
“그레텔?”
손수레를 끌고 나타난 촌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환은 촌장의 얼굴에 스친 초조함을 놓치지 않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대로 저 주머니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러나 시끄러워질 것이 뻔했다. 이환은 압살롬을 흘금 보았다. 안 그래도 날이 추운지라 되도록이면 노숙은 지양하고 싶었다.
이환이 손아귀에서 힘을 풀었다. 순식간에 엉덩방아를 찧은 소녀, 그레텔은 촌장을 향해 부리나케 달려갔다.
“이 아이가 뭔가 잘못이라도 했는가?”
“그건 아닙니다. 다만 문 근처를 왔다 갔다 하기에…….”
이환 대신 압살롬이 나섰다. 그레텔은 그를 보자마자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촌장은 그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고아인데, 마을 전체가 키우고 있지. 외지인에 대한 호기심으로 온 듯하네.”
“그렇군요. 아까 본 몬스터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웠던 터라 부득이하게 난폭한 행동을 하고 말았습니다. 미안해요, 아가씨.”
압살롬이 그레텔을 향해 빙긋 웃었다. 그러자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고 온 이불과 베개를 건네준 촌장은 그레텔을 데리고 멀어졌다. 빈 손수레 소리가 거친 길에 울린다.
그레텔은 촌장을 흘금 올려다보았다. 촌장의 가무잡잡한 옆얼굴은 경직되어 있었다. 그레텔은 식은땀이 맺힌 양손을 힘껏 맞잡았다.
“그레텔.”
별것 아닌 부름에 가느다란 어깨가 움찔거린다. 촌장은 그것을 못 본 체하며 그레텔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외지인이 궁금했던 거구나. 그렇지?”
“그, 그렇죠!”
“그래. 밖에서 온 사람이니 궁금할 만도 하지. 오늘 저녁은 뭘 먹었니?”
“한스 아저씨가 버섯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주셨어요.”
“넌 버섯을 좋아하니 맛있게 먹었겠구나.”
화제가 전환되자 그레텔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갔다.
그레텔의 집은 마을 한가운데의 작은 오두막이었다. 문 앞까지 데려다준 촌장은 돌아서려다 말고 그녀를 봤다.
“그레텔.”
촌장의 진지한 목소리에 그레텔이 바짝 굳었다. 촌장은 몸을 수그려 그녀와 눈을 맞췄다.
“너는 아기일 때에도 참 말을 잘 들었었지. 우린 널 참 많이 아끼고 있어.”
“네, 네에……. 알고 있…….”
“부디 우리를 버리지 말아 주련. 네가 없으면 우리는 하루도 안 되어 모두 죽고 말 거야.”
“버, 버리다니요! 그런 일은 절대 하지 않아요!”
그레텔은 몇 번이고 고개를 저었다. 촌장은 인자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촌장을 보내고 집에 들어온 그레텔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침대와 식탁만으로도 꽉 찰 만큼 좁았다. 문득 조금 전 봤던 남자가 머릿속에 스쳤다. 세상에 그토록 아름다운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마을 밖에서 온 사람.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곳이 세상의 전부였다. 허리춤의 주머니를 꽉 움켜쥔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끼이이이―
문이 열리며 낡은 경첩이 스산하게 울었다. 압살롬에게는 무엇보다도 기다리던 소리였다. 그는 반갑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와요, 이환.”
문을 닫은 이환이 고개를 들었다. 압살롬은 그를 유심히 보다 손짓했다.
“이리 와요.”
“뭐야? 갑자기 왜?”
“얼른요.”
이환은 압살롬에게 바싹 다가섰다. 그러자 압살롬이 그를 끌어안았다. 뜨거운 팔과 특유의 체향에 감싸인 이환은 그제야 압살롬에게 돌아왔다는 실감을 느꼈다. 그가 가늘게 한숨을 쉬자 압살롬이 작게 웃었다.
“피곤하죠? 목욕물 데워 놨으니 얼른 가서 씻어요.”
하지만 압살롬의 팔은 이환을 안은 채였다. 이환은 압살롬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은발이 흩어진 어깨에 얼굴을 묻자 선뜩하고 매끄러운 감촉이 기분 좋게 다가왔다. 뺨을 부비자 압살롬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드무네요. 당신이 어리광이라니.”
“그래서 싫어?”
“그럴 리가요.”
이환의 머리에 입을 맞춘 압살롬이 속삭였다.
“기쁩니다.”
솜사탕처럼 달짝지근한 목소리였다. 그 달콤함이 이환의 머릿속에 똬리를 틀었던 우울을 다른 색으로 덧칠했다.
좀 더 줘. 이환은 달콤한 것을 좇아 움직였다. 초여름, 비 내린 숲에 들어선 듯한 체향이 그를 이끌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압살롬의 목덜미를 따라 입술을 미끄러뜨리고 있었다.
“이환…….”
열기 서린 음성이 그를 불렀다. 그 뜨거움이 남은 우울은 물론 이성까지 녹였다. 이환은 고개를 들어 압살롬을 봤다. 청람색의 눈동자가 열망으로 뜨겁게 흔들리고 있었다.
같은 것을 원한다는 확신이 이환을 움직였다. 그는 압살롬의 목덜미를 잡았다. 뒤통수를 깊게 쓰다듬으며 올라가는 손가락이 명백한 의도를 전달했다. 압살롬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이환이 손을 당기고 압살롬이 달려드는 때였다.
쾅!
몇 번이나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소리가 마을 안에 울렸다. 이환과 압살롬은 맞물리기 직전에 떨어진 입술을 동시에 질끈 깨물었다.
“이번에는 또 뭐야.”
“그러게 말입니다.”
이를 득득 갈며 뛰어나간 그들은 희뿌연 막에 연신 몸을 부딪치는 만티코어 무리를 발견했다.
“이 근처에 서식지가 있는 모양이군요. 아예 씨를 말려 버릴 걸 그랬습니다.”
그들은 부모의 원수라도 만난 듯 만티코어를 노려보았다. 그것에 오해했는지 촌장이 다가왔다.
“이곳에 있으면 안전하니 너무 걱정 말게.”
“아까도 봤지만 신기한 현상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죠?”
“그런 중요한 걸 외지인에게 함부로 알려 줄 수는 없지만…… 특별한 비책이 있다고 말해 두지.”
압살롬과 촌장이 이야기하는 동안 이환은 다른 쪽을 응시했다. 오두막집 앞에 그레텔이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예의 그 주머니를 양손으로 꽉 움켜쥔 채였다. 느껴지는 신력은 여전히 미미했다.
***
이환과 압살롬은 마을에서 며칠을 지냈다. 촌장은 그들의 정착 의사를 끊임없이 떠봤다. 주민들은 그들 주변을 슬금슬금 맴돌곤 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그레텔도 있었다.
그레텔은 압살롬 앞에 설 때마다 얼굴을 붉힌 것과는 달리 이환에게만은 유독 경계를 보였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이환을 자주 쳐다본다는 것이었다.
“마음에 안 듭니다.”
촌장의 의사 타진에 처음으로 긍정적인 답변을 준 날 저녁, 압살롬이 수프 냄비를 건성건성 저으며 투덜거렸다. 끓어 오른 수프가 손에 튀었음에도 압살롬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옆에서 말린 과일을 그릇에 담던 이환이 대꾸했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 같은데.”
어이없다는 듯한 말투였으나 말린 과일을 옮기는 손길은 다소 거칠었다. 그러자 압살롬이 눈매를 나긋하게 휘었다. 수프를 젓는 손길이 조금 차분해졌다.
수프가 거의 완성됐을 즈음이었다. 한 기척이 가까워졌다. 며칠 사이 제법 익숙해진 촌장의 것이었다. 그들은 촌장이 문을 두드릴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소리가 들리고서야 문을 열었다.
촌장의 팔에는 빵이 담긴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압살롬은 그것을 받아 들고 미소 지었다.
“촌장님 덕분에 저희가 먹고 사네요. 저는 손재주가 없어서 빵을 못 만들거든요.”
“이웃 좋다는 게 뭔가. 다 돕고 살아야지. 어제 가져다준 토끼 고기 잘 먹었네. 오랜만의 고기라 가족들이 다들 좋아했어. 자네가 잡았다지?”
몬스터조차 굶주린 것으로 짐작했지만 이 산에는 짐승조차 드물었다. 이 근방에 나타나는 만티코어는 정착형 몬스터이므로, 이환은 그들이나 마을 사람들이 전부 잡아먹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촌장이 압살롬을 상대로 별것 아닌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환은 촌장을 조용히 주시했다.
이 마을은 마치 하나의 유기체와도 같았다. 인구가 백 명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마을 서쪽 끝에서 누가 빵을 태우면 몇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동쪽 끝 집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단 소문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이 마을에는 비밀을 공유하는 자들 특유의 은밀함이 떠돌았다. 이환은 그것이 이 마을을 몬스터로부터 보호하는 막과 관련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 확신의 이유는 바로 그레텔이었다. 그녀는 그 은밀함에서 벗어난 유일한 주민이었다. 작은 마을에서는 제법 치명적일 배제였다. 아직 어린 그레텔은 원인 모를 고립감에 떨며 어떻게든 주민들에게 가까워지기 위해 발버둥 쳤다.
단 며칠 본 것만으로도 깨달을 만큼 명백한 그 태도를 주민들이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이환은 그들이 일부러 그렇게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무슨 생각해요?”
이환의 눈이 침잠하는 때였다. 촌장을 돌려보낸 압살롬이 그에게 다가왔다. 이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압살롬이 눈을 가늘게 떴다.
“또 그 여자아이 생각인가요?”
“여자아이가 아니라 그레텔이야. 게다가 생각이라고 해 봐야…….”
샐쭉하니 입술을 달싹이던 압살롬이 이내 웃었다. 장난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수프도 다 됐고 빵도 생겼으니 저녁 먹어요. 아, 맞다. 모레 저녁에 잔치를 연대요. 헤르젠 씨가 멧돼지를 잡아 왔다던데요. 아, 헤르젠 씨는 사냥꾼인데…….”
깨달은 사실은 마을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이환은 혀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내가 조금 욕심을 부려도 될까요?’
언젠가의 밤에 들었던 간절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음 날 오후, 이환은 마을을 산책했다. 풍족하지는 않지만 모두가 화목한 작은 마을. 그림으로 그린 듯, 소박한 이상향이었다. 그러나 이환은 그런 것일수록 이루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느긋한 표정으로 산책을 즐기는 양 걷던 중이었다. 조금 떨어진 집의 문이 열리고 그레텔이 나왔다. 그녀는 배웅 나온 여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말 잘 먹었어요.”
“다음번에 또 초대할게.”
“정말요? 기대할게요!”
그레텔이 활짝 웃었다. 그 얼굴 그대로 돌아선 그녀는 이환과 눈이 마주쳤다. 얼어붙은 그레텔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기회다. 이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 기회를 어떻게 살려야 할지 암담해졌다.
여자아이와 대화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황녀 아니면 귀족 영애였고, 그들을 상대한 경험은 지금 이 순간 영 쓸모없었다.
우선 인사부터 할까 싶어 뻣뻣하게 입을 여는 때였다. 정신을 차린 그레텔이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이환은 그리 좋지만은 않은 기분으로 말했다.
“압살롬이라면 집에 있어.”
얼굴을 붉힌 그레텔이 이환을 노려보았다. 앙다문 입술이 그녀의 심기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놓치겠는 생각이 들었던 이환이 아무거나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문 안쪽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자꾸 그레텔 불러서 같이 밥 먹어야 해? 난 걔 싫단 말이야. 만날 눈치만 보고…….”
“그런 말 하면 못써.”
“엄마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서. 걔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고 했었잖아.”
“어른이 시키는 일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그만 투덜거리고 옆집에 가서 당근이나 좀 얻어 와.”
“밖에 추운데…….”
가벼운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이환은 그레텔을 붙잡아 으슥한 데로 몸을 숨겼다.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뒤이어 발소리가 멀어졌다. 이환은 팔 안을 내려다보았다. 그레텔이 새빨개진 얼굴로 떨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눈물은 보이지 않았지만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터질 게 분명했다.
“그레텔.”
단순히 부른 것뿐인데 마른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이환은 초조한 기분으로 말을 이었다.
“여기 있지 말고 어디 가서…….”
그때 그레텔이 고개를 발딱 들었다. 작은 얼굴이 분노와 오기 그리고 이유 모를 두려움으로 얼룩져 있었다.
“당신도 그거지.”
“그거?”
“모르는 척하지 마! 갖고 있잖아.”
그레텔은 허리에 찬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눈은 이환의 가슴을, 정확하게는 그가 안주머니에 넣어 둔 성물을 향하고 있었다. 이환은 굳은 얼굴로 그레텔을 보았다. 설마, 하는 의혹은 뒤이은 말에 경악이 되었다.
“왜 여기에 왔어? 내가 있는데! 마을을 지키는 건 나 혼자로도…… 읍!”
이환은 황급히 그레텔의 입을 막았다. 그 순간 실낱같은 감각이 이환의 손바닥에 느껴졌다. 그는 황급히 손을 떼고 그레텔을 내려다보았다.
“뭐, 뭐야!”
“……너야말로 뭐야.”
그레텔과 접촉한 순간 느꼈던 것은 성물을 만졌을 때와 동일한 감각이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희미했으나 그런 독특한 것이 달리 있을 리 없었다.
이환은 정신을 집중하여 그레텔을 살폈다. 그러나 몇 번을 봐도 주머니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신의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를 채뜨렸다.
“싫어! 이리 내놔! 그게 없으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린다고!”
이환은 아우성치는 그레텔의 맨손목을 잡았다. 접촉면을 통해 전해지는 성물 특유의 느낌이 조금씩 사그라지는 게 느껴졌다.
“이게 무슨…….”
이환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때였다. 그레텔이 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이리 내놔! 이 도둑놈!”
이환은 그녀가 가한 불시의 공격에 틈을 내주고 말았다. 잽싸게 주머니를 탈환한 그레텔이 얼른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안타깝게도 뒤쪽은 창고로 막혀 있었다.
그레텔이 활로를 모색하는 동안 이환은 태세를 정비했다. 그가 한숨을 쉬자 그레텔이 바들바들 떨었다.
“가까이 오지 마!”
“알았어. 알았으니까 좀 묻자.”
얼핏 휴전처럼 들리는 말과는 달리 이환의 눈초리는 날카로웠다. 그는 그레텔의 주머니를 노려보며 물었다.
“너 그게 뭔지 알고서 사용하는 거냐?”
그레텔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환은 머리카락을 거칠게 들쑤셨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건 그쪽이지.”
살쾡이 같은 음성이었다. 시선을 그쪽으로 향하자 그레텔이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이제껏 보였던 눈빛은 장난이었다는 듯, 진심으로 밉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게 뭔지 아냐고? 몰라. 촌장님께서 주시는 걸 받았을 뿐이니까. 하지만 이것의 이름이 뭔지가 왜 중요한데?”
그레텔이 씨근덕거리며 숨을 골랐다. 그동안 이환은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그녀를 보았다.
“나한테 중요한 건! 이게 있으면 사람들이 나한테 잘해 준다는 거야.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랑 같이 다니는 당신은 누가 날 제대로 불러 줬을 때의 기분 같은 거 모르지? 적어도 이걸 가진 나는 하얀 대문 집 그레텔이라고! 오두막집 고아 계집애 같은 게 아니라! 그러니까 당장 꺼져! 여긴 당신 자리 같은 거 없어!”
악에 받쳐 쏘아붙인 그레텔이 이환을 밀치고 달려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이환은 이를 악물었다.
식탁 앞에 앉아 펜을 놀리던 압살롬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이환이 들어서는 게 보였다. 신발을 터는 척 수그린 고개가 어딘지 처연했다.
“이환.”
이환이 느리게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의자를 뒤로 뺀 압살롬은 팔을 벌리며 속삭였다.
“이리 오세요.”
이환이 느린 걸음으로 집 안을 가로질렀다. 압살롬의 앞에 선 그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압살롬은 이환을 잡아당겨 다리 위에 앉혔다.
덩치 큰 두 남자가 겹쳐 앉아 서로를 마주 본다. 그 무게를 견디다 못한 의자가 삐걱거렸으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압살롬이 이환의 뺨을 감쌌다. 뜨거운 체온이 참으로 기꺼워서 이환은 눈을 감고 그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다정한 입술이 이환의 얼굴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이환……. 나 좀 봐요. 응?”
이환은 압살롬이 바란 대로 눈을 떴다. 짙푸른 눈동자가 그만을 향하고 있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동시에, 조금 전 들었던 목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모르긴 누가 몰라.’
그렇게 말하지 않은 것은 모래알만큼 남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이환은 그때의 답답함을 담아 숨을 몰아쉬었다.
압살롬은 위로의 말을 하거나 캐묻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이환의 쓰라린 속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잠시 그렇게 있던 이환은 이내 압살롬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식탁을 돌아 맞은편 의자로 향하며 물었다.
“뭐 하고 있었어?”
“아까 알아낸 사실에 대해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다 끝난 참이었어요.”
몇 자 더 쓴 압살롬이 숨결로 잉크를 말렸다. 이환은 거꾸로 보이는 문자열을 흘금 보았다. 고아하고 아름다운 글자를 예상했으나 눈앞에 보이는 것은 발가락으로 쓴 듯한 악필이었다.
“이거 대륙 공용어야?”
“당연하죠.”
“전에 나한테 준, 성물의 위치가 적힌 종이. 그거 네가 직접 쓴 거 아니지?”
“네. 아는 분이…….”
압살롬은 뭐가 문제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환은 압살롬의 얼굴과 글자를 번갈아 봤다. 별것 아닌 상황이 웃음을 불러왔다. 굳었던 입매를 부드럽게 허물어뜨린 이환이 손짓으로 압살롬을 촉구했다.
“어제 받은 빵 바구니를 돌려주기 위해 촌장에게 갔었습니다. 마침 촌장 혼자 있던 터라, 마실 거니 뭐니 준다면서 방을 비우더라고요. 그새 좀 뒤져 봤죠. 액자 뒤에 작은 장부가 숨겨져 있더라고요. 그중 두 페이지만 몰래 외워 왔죠.”
“외워……. 아니다.”
드래곤이라 인간의 한계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일까. 이환은 지적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압살롬이 내민 종이를 훑었다. 거꾸로 볼 때와는 달리 그럭저럭 읽을 수는 있었다.
종이 위에는 뢴트너 특유의 강한 억양이 돋보이는 이름들이 줄지어 있었다. 모두 젊은 여자의 것으로, 옆에 여러 개의 작은 숫자가 붙었다. 이환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숫자들, 연도로 보이는데. 태어난 해와 죽은 해 그리고 죽었을 때의 나이일까.”
“조금 다를지도 모릅니다. 마지막을 보세요.”
이환의 시선이 종이 위를 쭉 미끄러지다 멈췄다.
마르그레테. 1337. 1359. 25.
그레텔. 1348.
“올해가 1361년 아닌가? 난 그레텔이 열다섯 살은 됐다고 생각했는데.”
그레텔의 이름 위쪽에 적힌 마르그레테라는 사람도, 그리고 그 이외의 사람들도 대부분 숫자가 다소 어긋났다.
목록을 다시 거슬러 오르자 기묘한 위화감이 엄습했다. 만약 계산이 틀린 게 아니라면 20대 초중반의 여성들이 대략 10년 정도의 주기를 두고 죽었다는 말이 된다. 게다가 목록에 젊은 여성밖에 없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다른 페이지의 내용도 같았습니다. 전부 여성이고 대부분 20대에 사망했어요.”
이환은 종이에서 눈을 떼 압살롬을 봤다. 그들은 상대방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전 그레텔과 접촉할 일이 있었어. 닿은 순간, 마치 성물을 만지는 기분이 들더라고.”
“가설을 세워 보자면…….”
압살롬은 얼핏 무감정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차라리 그것이 나았다. 만약 압살롬이 눈치를 보거나 망설였다면 더 비참했을지도 모른다.
“이환은 어떻게 하고 싶나요?”
이야기를 끝낸 압살롬이 물었다. 이환은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도망치던 그레텔의 뒷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결국 그는 질문을 되돌려 줄 수밖에 없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마음 같아서는 성물만 들고 떠나고 싶습니다.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그건 제가 알 바 아니거든요. 그 여자아이는 조금 안됐지만…… 글쎄요. 저로서는 이대로 이용만 당하다 죽느니 차라리 박차고 나오는 게 낫다고 봅니다.”
매정한 말이었다. 그러나 이환의 귀에는 그것이 위로처럼 들렸다. 잠시 망설이던 이환이 말했다.
“하루만 더 두고 보자.”
내일은 잔치가 있다고 했다. 그때까지는 결정을 내릴 생각이었다.
***
다음 날은 아침부터 마을 전체가 들뜬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잔치에 쓸 음식을 만드는 냄새가 진동했다.
이환은 분주한 마을을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촌장의 집이었다. 어제 촌장이, 오늘은 빵을 받으러 그의 집으로 직접 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압살롬이 움직이지만 오늘은 이환이 나섰다. 어제 이환과 그레텔 사이에 있었던 일에 대한 반응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빵을 들고 돌아온 이환을 압살롬이 맞이했다.
“다녀왔군요, 이환. 어때요?”
이환은 고개를 저었다. 주민들과 촌장, 어느 쪽도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정말 듣지 못했던 걸까. 만약 들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하는 것이라면 정말 굉장한 마을이었다.
“아, 맞아. 촌장으로부터 전언이야. 만든 지 좀 된 빵이니 늦어도 점심에 먹으라는데? 내일까지 두면 상할지도 모른다고.”
“그런가요…….”
압살롬이 길게 말을 끌었다. 미묘한 감정을 포착한 이환이 그를 보았다.
“왜?”
“으음, 빵에서 좀 이상한 냄새가 나서 말입니다.”
“설마 독이야?”
‘이상한 냄새’에서 상한 음식이 아닌 독부터 연상한 것은 오랜 황실 생활의 폐해였다. 그런데 압살롬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합니다.”
이환은 빵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안에 야채가 들어간 탓인지 양파 냄새가 강하게 풍겨 다른 향을 찾을 수가 없었다.
“독이라고는 해도 심한 건 아닙니다. 고작해야 마비나 수면 정도일까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치명적일 수도 있지.”
만약 그들이 평범한 여행객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이 빵을 먹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환은 이 마을이 오랜 기간 유지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럼 우리는 이걸 먹고 쓰러져 있으면 되는 건가?”
농담 삼아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들은 압살롬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제법 거친 동작으로 이환에게서 빵을 빼앗았다.
“그 여자아이가 그렇게 신경 쓰이나요?”
“압살롬?”
“이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 겁니다. 당신이 마음 쓸 게 뻔히 보였거든요.”
질투일까. 이환은 압살롬을 살폈다. 청람색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이환이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읽어 내기 전, 압살롬이 시선을 피했다.
“제 말은 말입니다.”
과도하게 밝은 목소리가 오히려 이상하게 들렸다. 그러나 압살롬은 이환이 뭐라고 할 틈도 없이 말을 이어 갔다.
“이제 더 이상 기다려 줄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어요. 이환, 이들은 우리를 해치려 해요. 그럼에도 우리가 이들의 사정을 봐줘야 합니까? 아니면…… 그 여자아이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나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이환은 대꾸하려 열었던 입을 다시 다물었다. 솔직하게 말하기에는 너무 부끄러운 이유였다. 압살롬은 그것을 알고서 말한 것일까. 분노가 슬그머니 기어올랐다.
“가치를 따지자면, 그래, 없지. 아무 사이도 아니고, 내가 그레텔을 구해 줄 것도 아니니까.”
이환은 짐을 놓아둔 곳으로 갔다. 당장이라도 떠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물건만을 꺼내 뒀던 터라 여장을 꾸리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짐을 들고 돌아서자 당황한 압살롬이 보였다. 이환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턱짓했다.
“뭐 해? 짐 챙기지 않고.”
망설이던 압살롬이 짐을 꾸렸다. 그의 어깨가 축 늘어진 것을 보자 분노가 바람 빠지듯 사라진다.
‘뭐 그렇게 대단한 이유라고.’
아니, 얼마나 대단한 이유든 압살롬을 저렇게 만들면서까지 숨길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이환의 그런 태도가 압살롬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환은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어. 주변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는 것도, 의혹이 생겨도 그들에게 버려질까 입 다무는 것도, 보고 싶은 것만 보다가 제 명을 재촉하는 것도, 그러다 결국 외부에서 숨통을 트려는 것도, 전부.”
이환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말하고 보니 부끄러움보다 비참함이 느껴졌다. 그래도 그는 말을 이었다.
“숨겨서 미안하다. 이런 것까지 말하기에는 좀 그렇더라고. 영락없이 내가 날 연민하는 꼴이라 조금…… 많이……. 음, 그런 거지.”
이환은 어색하게 마무리하며 압살롬을 봤다. 압살롬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더듬거렸다.
“나, 나는…… 당신에게 그런 말까지 하게 만들 생각은…….”
“알고 있어.”
이환은 압살롬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워질수록 압살롬이 고개를 숙였다. 손을 뻗어 압살롬의 뺨을 감싸 쥐었다.
“질투하려다가 아차 싶었을 거야. 내 속을 후벼 파는 게 아닐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결국 질투를 다 삭일 수 없었던 거잖아. 틀렸냐?”
정답이었는지 압살롬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환은 손가락을 살살 움직여 그 입술을 빼 주었다. 젖은 입술이 물을 만나 활짝 핀 꽃처럼 탐스럽다. 이환은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꾹 억눌렀다.
“그런데도 내가 이걸 말한 이유는 말이다.”
중요한 이야기는 지금부터였다. 키스는 그다음에 해도 좋을 것이다.
“내가 그러지 않으면 네가 계속 입을 다물 것 같았기 때문이야. 질투가 나도 안 난 척, 궁금한 게 생겨도 없는 척. 전에 나한테 욕심부려도 되냐고 말하지 않았냐.”
짙푸른 눈이 크게 뜨였다. 이환은 부러 얄궂게 입매를 올렸다.
“그 욕심이라는 건 언제 부릴 건데?”
쌉싸래하고 조금은 달콤한 체향이 훅 끼친다 싶었다. 다음 순간 압살롬이 이환을 거세게 끌어안았다.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 진짜로 욕심부릴 겁니다.”
“그러니까 그걸 왜 나한테 허락받으려고 그래.”
심드렁하게 말하자 압살롬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가 속삭였다.
“전부 당신이 감당해야 하니까요.”
“지난번에도 뭐 대단하게 사고 칠 것처럼 말해 놓고 아무것도 안 했으면서.”
이환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압살롬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환은 압살롬의 머리를 잡고 떨어뜨렸다. 웃는 얼굴을 보자 방금 전부터 계속 하고 싶었던 것이 떠올랐다.
“눈 감아.”
압살롬이 얌전히 눈을 감았다. 입술은 여전히 미소 지은 채였다. 그 입술을 핥다가 슬쩍 깨물었다. 무언의 재촉에 압살롬의 입술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좋아해, 압살롬.”
압살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환은 벌어진 입술을 재빨리 덮쳤다.
“지금……!”
이환의 입술이 압살롬의 다급한 목소리를 잡아먹었다. 그러나 압살롬의 입안을 먼저 침범했던 이환은 금세 밀리고 말았다.
갈급하여 밀고 들어온 압살롬의 혀를 이환은 부드럽게 받아들였다. 혀뿌리가 아릴 만큼 강하게 얽힌 혀에서, 목 안쪽에서 낮게 울리는 신음에서 압살롬의 감정이 전해졌다.
문득 처음 키스했던 때가 생각났다. 무작스러울 만큼 파고들기만 하던 그때의 압살롬에게서도 지금처럼 애타는 감정이 전해졌었다.
밀어붙이는 압살롬에게 밀려 침대까지 다다랐다. 이환은 몸에 힘을 빼고 쓰러졌다. 압살롬도 그 위로 쓰러지며 입술이 떨어졌다. 자세를 고치는 사이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압살롬이 몸을 뻗어 이환을 덮쳐 눌렀다. 그의 입술이 가장 근처에 있는 것을 핥고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환, 이환, 이환…….”
하필 압살롬이 매달린 게 귀라, 이환은 지척에서 들은 낮은 목소리에 신음을 흘렸다. 어느새 셔츠 아래로 들어온 압살롬이 손이 허리를 더듬었다. 뜨거운 체온과 다급한 손길이 성감을 부추겼다.
“이환, 한 번만 더 말해 주세요. 응? 나 제대로 못 들었어요.”
“어디서 거짓말을…….”
헛웃음을 흘린 이환이 압살롬의 이마를 짚었다. 턱을 지나 목을 향하던 입술이 제지당하자 압살롬이 목을 울렸다. 이환은 뜨거운 숨을 흘리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그 이유를 아는 압살롬이 원망의 시선을 보냈다.
“너무해요, 이환. 진짜 잔인합니다.”
“그 말은 전에도 들었어.”
“두고 보자고요, 진짜.”
“그 말도 전에 들었지.”
이환은 무릎을 세워 압살롬의 다리 사이를 슬쩍 문질렀다. 아름다운 얼굴이 상기된 채 신음을 뱉었다. 가라앉히라고 말할 생각이었으나, 흥분한 모습이 자신을 원한다는 증거 같아서 마음에 들었다. 한 번 더 시도하려는데 압살롬이 그의 무릎을 붙잡았다.
“자꾸 도발하면 성물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덮칠 겁니다.”
그의 목소리와 눈동자에서 진심을 느낀 이환은 순순히 무릎을 치웠다. 그러자 압살롬이 이환 위로 무너져 내렸다.
“이환.”
아직 뜨거운 숨결로 압살롬이 불렀다. 이환은 그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아직 그 말 못 해 줘요.”
압살롬의 목소리에서 서글픔이 물씬 풍겼다. 이환은 대답 대신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말해 버리면 한도 끝도 없이 나 좋은 대로 할 것 같아서…….”
이환이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려는 때였다. 압살롬이 속삭였다.
“어디에도 못 가게 가둬 버릴지도 모릅니다.”
이환은 압살롬의 망설임이 어디에 근원을 두는지 깨달았다. 쓰다듬던 손을 멈추자 압살롬이 쓰게 웃었다.
“괜찮아요. 이제 그런 바보 같은 시도는 하지 않을 테니까요.”
자리에서 일어난 압살롬이 이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환은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이환은 마을을 활보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걷는 그에게 주민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몇 개의 기척이 슬금슬금 가까워졌다. 이환은 부러 먼 곳을 응시했다. 그 순간 커다란 도끼가 그를 덮쳤다. 이환은 칼을 뽑아 도끼 자루를 베었다. 무겁게 떨어지는 쇳덩어리는 발로 걷어차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쾅!
도끼날의 넓은 부분에 얻어맞은 남자가 벽에 요란하게 부딪혔다. 이환은 피를 토하는 남자를 무감정하게 보다 고개를 돌렸다. 주민 여럿이 무기를 손에 든 채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촌장도 있었다. 그는 여전히 인자한 인상으로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만티코어를 죽인 것도, 마을에 머물 때 사냥 등에 나선 것도 압살롬이었다. 그들에게 이환은 하는 것 없이 산책으로 소일하는 한량으로 보였을 터다. 그것을 생각해 일부러 압살롬과 떨어졌는데, 역시나 거기에 넘어간 모양이었다.
“나가겠다는 사람을 이런 식으로 붙잡는 법도 있던가요?”
이환이 여상스럽게 물었다. 촌장이 반문했다.
“자네 일행은 어디 있지?”
“글쎄요? 내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집에 있었습니다만.”
“아까 준 빵은 먹었는가?”
“야채 든 거? 당연히…….”
촌장이 눈을 굴렸다. 이환은 그가 보는 쪽과는 반대 방향으로 칼을 찔러 넣었다. 뒤쪽에서 몰래 접근하던 남자의 몸통이 칼에 꿰였다.
“먹지 않았죠. 뭘 믿고 그걸 먹겠습니까.”
칼은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남자의 몸이 무겁게 쓰러졌다. 멀리서 남자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소리가 비명처럼 들려왔다.
이환은 피가 뿜어져 나오는 상처를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비난이 날아들었다.
“마르크를 놓아줘!”
“다친 사람에게 무슨 짓이냐!”
“마을 단위의 사기꾼 집단에, 자신들의 안녕을 위해 사람을 죽여 온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원히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다. 소문의 전파 속도가 빠른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의 동태가 어디에서 누구에게 어떤 식으로 전달되는지 안다면 배신은 꿈도 꾸지 못할 게 뻔했다. 즉, 이들은 비밀을 공유하는 동시에 서로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기꾼이라니. 자네 말이 너무 심하군.”
“그럼 달리 뭐라고 표현해야 하지? 여자아이를 납치해 의도적으로 고립시킨 다음, 적선하듯 정을 주며 스스로를 희생하게 만들었잖아. 아닌가?”
생몰년도라기에는 애매했던 숫자의 나열. 그리 많지 않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끊이지 않았던 적정 나이대의 여자들. 마을의 기묘한 단합. 만약 마을 내에서 희생자가 나왔다면 이렇게까지 단단한 결합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이환은 희생자들이 밖에서 왔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 물건, 성물은 절대 그런 식으로 힘을 발휘하지 않아. 분명 무엇인가를 매개로 사용했겠지. 예를 들어 소녀들의 생명이라든가?”
의미심장하게 말한 이환이 고개를 돌렸다. 그를 따라 주민들의 시선도 옮겨 갔다.
뻣뻣한 빨간 머리가 겨울바람에 너울거린다. 주근깨가 다닥다닥 박힌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창백했다. 촌장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레텔…….”
“거짓말이죠?”
그레텔의 떨리는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떠돌았다. 그 안에서 언젠가의 자신을 발견한 이환이 눈매를 일그러뜨리는 때였다. 뜨끈한 손이 그의 손아귀에 잡혔다.
“저 왔어요. 잘했나요?”
귓가에 다가온 입술이 속삭였다.
“잘했어.”
이환은 압살롬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며 대답했다.
그사이 그레텔과 촌장은 격앙된 대화를 주고받았다. 촌장이 이환과 압살롬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짓말이다. 그 보물을 손에 넣기 위해 저들이 거짓말을 한 거야. 얘야, 그레텔.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저런 외지인의 말 몇 마디에 넘어간단 말이냐.”
그레텔의 시선이 이환을 향했다. 이환은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알아보았다.
“난 이미 두 개나 되는 성물을 갖고 있어. 그렇게 힘도 약한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단 말이지. 게다가 남의 생명을 빨아먹는 물건이라니,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잖아?”
이환이 촌장을 가리켰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그레텔이 흠칫거렸다. 성물이 두 개나 있다는 것을 안 촌장이 탐욕을 드러낸 순간을 제대로 보게 된 것이다. 서둘러 표정을 수습한 촌장이 반박했다.
“증거도 없이…….”
“마르그레테. 너 이전에 성물을 사용했던 사람이다. 아는 사람이지? 게다가 성물을 사용하면서 징후가 있었을 거야. 피곤하다거나, 숨이 찬다거나, 어지럽다거나…….”
이환은 촌장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익숙한 이름을 듣고 눈을 크게 떴던 그레텔은 이어지는 증상에 얼어붙었다. 처음 봤던 날, 성물을 사용하는 그녀의 창백했던 얼굴이 떠올라서 한 말이 들어맞은 모양이었다.
그레텔이 허리에 찬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이환은 그녀가 그것을 내동댕이치길 바랐다. 그러나 떨리는 손은 이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어린 뺨을 타고 떨어진 눈물이 땅에 잿빛 얼룩을 그렸다.
“왜…… 말했어…….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고…….”
그레텔이 흐느끼며 중얼거렸다. 촌장의 얼굴의 환희가 비쳤다. 그녀가 손을 떨궜을 때부터 어두운 표정이던 이환이 한숨 섞인 소리로 대답했다.
“적어도 알면 다른 길을 선택할 수는 있을 테니까. 하지만 너는 계속 속는 쪽을 고른 모양이군.”
압살롬이 이환의 어깨를 감쌌다. 이환은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들은 몇 걸음 가지 않아 막혔다. 촌장과 주민들이 막아선 것이다.
이제는 본성을 감출 생각도 없는지, 주민들은 번들거리는 눈으로 이환과 압살롬을 응시했다. 그들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순간, 압살롬이 검에 손을 가져갔다.
‘안 돼.’
이환의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압살롬을 저지했다.
“넌 여기 있어.”
“이환?”
이환은 손에 들린 칼을 짧게 휘둘렀다. 채 마르지도 않은 피 위에 새로운 피가 묻었다.
툭. 투둑.
몇 개의 손목이 무기를 움켜쥔 채 땅으로 추락했다.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고 어리둥절했던 자들이 뒤늦게 비명을 질렀다.
부우웅!
서슬 퍼런 낫이 이환을 내리찍었다. 상당한 기세였다. 이환은 칼을 올려 쳤다. 잘려나간 팔이 이환의 힘에 밀려 하늘로 솟았다가 추락했다. 이환은 그것을 칼끝으로 걷어 뒤쪽에서 덮쳐 오는 사람에게로 날렸다. 허공에서 길게 뿌려진 피가 비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죽어라!”
옆쪽에서 긴 창이 불쑥 튀어나왔다. 몸을 숙여 피한 이환이 그대로 짓쳐 들어갔다. 두꺼운 지방층을 뚫고 들어간 칼이 등 뒤로 솟았다. 내장은 피해 찔렀으니 죽지는 않을 것이다.
쓰러지는 남자를 밟고 도약해 순식간에 촌장 앞에 내려섰다. 붉은 피와 누런 지방으로 얼룩진 칼이 촌장의 턱 밑에 파고들었다.
“여럿이 한꺼번에 덤비면 이길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촌장에게는 안타깝게도 이환은 난전에 익숙했다. 그리고 우두머리가 있는 무리를 상대하는 경우, 그놈을 얼마나 빠르게 처치하는지가 승부의 관건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주름 잡힌 목에 칼날이 박혔다. 붉은 실금이 점점 벌어지며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촌장은 사색이 되어 외쳤다.
“모두 그만! 물러서!”
주민들이 조금씩 물러났다. 이환은 무표정하게 그들을 둘러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는 죽을 각오를 해야 할 거야.”
촌장의 목에서 칼을 치운 이환이 돌아섰다. 그가 압살롬을 향해 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이환의 등을 노리고 검이 날아들었다.
촤아악!
맑은 하늘에 붉은 무지개가 떴다. 금세 흙먼지 속으로 가라앉은 그것에 뒤이어 마른 몸이 넘어갔다. 급속도로 커지는 피 웅덩이 속으로 동그란 머리통이 떨어졌다. 이환은 데구루루 굴러 발밑에 다다른 그것을 밟아 세웠다.
“더 없어?”
정적 속으로 이환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환은 압살롬을 지나쳐 걸었다. 침잠한 얼굴의 압살롬이 그를 뒤따랐다.
그들은 마을 근처의 샘으로 향했다. 압살롬은 깨끗한 천을 물에 적셔 이환의 얼굴에 댔다.
“뭐야.”
“가만히 있어요.”
살살 움직인 천이 이환의 얼굴에 튄 핏자국을 지워 갔다. 이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짝 긴장했던 감각이 천천히 풀어져 갔다.
어느덧 압살롬의 손이 멈췄다. 이환은 눈을 떴다. 화난 기색이 역력한 눈동자가 보였다.
“왜 날 막았습니까?”
“압살롬.”
이환이 압살롬을 막아선 것은 한 번뿐이었다. 이환은 진정하라는 뜻으로 압살롬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인간을 죽이는 게 달갑지 않다고 했었죠. 내내 그렇게 교육받았었다고. 그건 당신에게 있어 살인이 잘못된 일이라는 말이 됩니다. 아닌가요? 그럼에도 당신은 이런 때에 꼭 혼자서 움직이죠. 지난번에도 그렇고 말입니다.”
지난번이란 뤼시앵에게 위협하고 돌아온 밤을 말하는 것일 터다. 이환은 궁지에 몰린 심정이었다.
“압살롬.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안 됩니다.”
단 1초의 지체도 없이 들려온, 실로 단호한 대답이었다. 이환이 놀라든 말든 압살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신이 허락했잖아요. 그래서 제 욕심 좀 채워 보려고 합니다.”
이환은 슬그머니 압살롬을 외면했다. 그러나 집요하게 따라붙는 짙푸른 눈동자를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그는 한숨을 쉬었다.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환에게 있어 살인이란 애정에의 구걸이다. 황실에 버려지지 않도록, 뤼시앵에게 쓸모없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지만 모든 일은 처음이 어렵다고, 여러 번 반복될수록 충격도 차츰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환은 사람의 피를 뒤집어쓰고도 겉가죽만큼은 평온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전부 추저분한 과거의 흔적이다. 그래서 이환은 압살롬에게 그런 자신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더듬더듬 흘러나온 이야기의 끝에서 압살롬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번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렇게나 보이고 싶지 않은 장면이었다면 오히려 내게 맡겼어야죠.”
이환은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압살롬이 손을 검에 가져갔을 때의 위화감과 위기감.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네 손에 피를 묻히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
찰나간 압살롬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명백히 수상쩍은 반응이었다. 좀 더 캐물으려고 입을 열었으나 압살롬이 한발 빨랐다.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기나 합니까?”
“그래. 그러니까 이제 그만…….”
“아뇨. 당신은 전혀 모르고 있어요.”
압살롬은 이환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제는 깨끗해졌으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붉은 흔적이 남아 있던 부분이었다.
“당신 스스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죽이면 괴로워질 거라고.”
“……그래.”
“그 말은 당신 스스로 살인에 죄악감을 갖고 있다는 거 아닌가요? 즉,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당신 안에서 잘못이라고…….”
“압살롬.”
이환은 황급히 압살롬의 입을 막으려 들었다. 그러나 압살롬은 그의 손을 유유히 피했다.
“그것 봐요. 지금도 이렇게 반응하고 있잖습니까.”
“그만하자, 압살롬.”
“안 됩니다.”
“왜!”
이환은 결국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그러자 압살롬은 희미하게 웃고는 이환을 끌어안았다.
“왜냐하면 당신, 지금도 그것 때문에 괴롭잖아요. 죄악감이니 잘못이니 하는 단어조차 제대로 듣지 못할 만큼. 당신이 이런 식으로 고통을 외면하는 걸 어떻게 그냥 둬요.”
이환은 순간 숨을 멈췄다. 처음에는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그만큼 압살롬의 말은 이제껏 그가 염두에 둔 적 없는 단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머릿속이 이상하게 어지러워서 이환은 마른침을 삼키고 목을 가다듬었다.
“난 가해자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통용될 리 없잖아.”
“그래요. 이환은 가해자입니다. 살인자예요.”
진실이고, 스스로 말했음에도 압살롬의 단정에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런 그의 뺨에 압살롬이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사람을 죽일 때 무슨 생각을 하나요?”
지독하게 상냥한, 그래서 더욱 차갑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이환은 압살롬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단단한 팔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자신이 끔찍하죠? 아무렇지도 않게 생명을 끊는 자신이 싫지는 않나요? 자신을 벌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어요? 아니, 그때만이 아니겠죠. 그 후로도 몇 번이나 혼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놔! 압살롬!”
“상처를 헤집으면 아픔에 익숙해진다고 여겼겠죠. 그런다고 아픈 게 사라집니까? 아프지 않은 척, 익숙해지고 무뎌진 척. 그건 어디까지나 그런 척이잖아요. 그건 그냥 무의미한 자해입니다.”
압살롬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단단한 우리에서 겨우 벗어난 이환이 분노에 찬 눈으로 압살롬을 보았다.
“너……!”
그러나 이환은 그 이상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압살롬이 웃고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든 햇살을 받아 빛나는 은발도, 완벽한 곡선을 그리는 붉은 입술도, 나긋하게 접힌 눈매도 모두 그저 눈부시기만 했다. 그러나 청람색 눈동자 한가운데, 세로로 찢어진 듯한 동공이 그것을 전부 뒤바꾸었다.
백일몽에 나타난 악마가 이러할까. 당장이라도 빛 없는 곳으로 끌고 내려갈 듯 끔찍한 한편, 그래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아름다웠다.
악마가 속삭였다.
“도망치지 마세요. 당신이 범한 것은 죄입니다.”
‘경이 나쁜 게 아냐.’
“핑계 대지도 말아요.”
‘모두를 지켜 주기 위해 한 일이잖아.’
“사실은 이환도 알고 있잖아요? 당신 자신을 위해서 그 사람들을 죽였다는 걸.”
이환의 마음을 감쌌던 갑옷에 금이 갔다. 아니, 갑옷인 줄 알았던 그것은 베일이었다. 지켜 주기는커녕 눈을 가리고 진실을 멀리하게 만드는 것이 전부였던. 이환은 자신 안에 남은 뤼시앵의 영향력을, 그 끈질김을 새삼 실감했다.
압살롬의 말이 맞다. 이미 이환이 알던 사실이었고, 떨쳐 내야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 안다 해도 마음은 별개였다.
그런데 압살롬이 그것을 단번에 끌어올려 이환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아름답기가 유혹하는 악마 같다고 생각했더니, 냉엄함은 징벌하는 대천사였다.
“……나쁜 자식.”
이환이 중얼거리자 압살롬이 다시 웃었다. 눈동자는 어느새 평소처럼 변해 있었다. 이환은 그것에 아쉬움을 느끼는 자신을 깨달았다.
“미안해요, 이환. 조금 화가 났었나 봅니다.”
“조금이라고?”
이환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것으로 분위기는 여느 때와 비슷하게 돌아왔다. 안도한 그는 흘러나오는 푸념을 막지 않았다.
“꼭 지금 그걸 물었어야 했냐?”
“저도 의도한 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안 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환이 언제 다시 약해질지도 모르겠고…….”
이제껏 이환이 죽인 사람들은 대부분 기사나 병사 등 단련된 자들이었다. 그들을 죽인 때와, 범죄자라고는 하나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는 마을 주민을 죽인 때의 흔들림이 같을 리 없었다.
압살롬의 설명을 들은 이환은 눈을 가렸다.
‘난 대체 저 녀석에게 무슨 날개를 달아 준 거지.’
앓는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거기에 대고 압살롬이 박차를 가했다.
“그 사람에게는 강한 부분을 잔뜩 보여 줬잖습니까? 그러니 약한 부분은 전부 나만 알게 해 주세요.”
이환은 고개를 들었다.
“압살롬.”
지옥 바닥을 기듯 음산한 소리였다. 아차 싶었는지 압살롬이 딴청을 부렸다. 이환은 입을 꾹 다문 채 압살롬에게 손을 뻗었다.
압살롬의 턱을 스친 손이 더 위로 향한다. 이환은 말랑말랑한 귀를 꽉 움켜쥐고는 그대로 당겼다. 그러고는 놀라 벌어진 입술 사이로 단숨에 파고들었다.
입맞춤은 짧았지만 더없이 사나웠다. 금세 떨어진 이환이 젖은 입술을 핥았다. 압살롬이 멍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감당할 만하니까 어디 더 해 봐. 단, 다음번에는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거다.”
이환은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샘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못하고 몸이 돌려세워졌다. 수없이 많은 입맞춤이 그의 얼굴에 퍼부어졌다.
***
그레텔은 마을을 벗어나 인근 숲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그녀가 어린 시절 애용하던 옹이구멍이 있었다.
오래 산 거목 중간에 깊게 파인 옹이구멍은 지금의 그레텔조차 충분히 품을 만큼 컸다. 그레텔은 그 안으로 들어가 옹송그렸다.
얼마를 그렇게 있었을까. 설핏 잠이 들었던 그녀는 어느 순간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등을 타고 익숙한 긴장감이 기어올랐다. 몬스터의 접근을 알리는 감각이었다.
그레텔은 허리춤의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끔찍스러운 것을 보는 시선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몸에서 떼어 내 옹이구멍 밖으로 내밀었다. 이것을 받았던 날, 촌장이 했던 말이 귓가에 쟁쟁했다.
‘이것을 들고 마을을 지켜 주세요, 하고 빌면 된다.’
어린 입술이 몇 번이고 짓씹힌다. 머릿속에 떠도는 것은 이환과 압살롬의 말이었다.
‘당신은 이용당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남자가 한 말은 그레텔의 마음 한구석에 가라앉아 있던 의구심을 부채질했다. 그래서 촌장을 찾았다. 의구심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설마하니 그곳에서 이웃들의 진면목을 보게 될 줄이야.
“끔찍해.”
촌장도, 주민들도, 진실도. 그리고 전부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선택하고 만 자신의 미래도. 하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지금 그녀가 들고 있는 주머니 속의 물건이었다.
그레텔의 손가락에서 힘이 풀렸다.
마을은 아비규환이었다. 만티코어 무리는 마을을 마음껏 휘저었다. 주민들은 그레텔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었지만 언제나 그들을 지켜 주던 뿌연 막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만티코어가 휩쓸고 간 마을 여기저기에서 울음소리가 높아졌다. 죽은 사람만 스물이 넘었고, 다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레텔! 어디 숨은 거냐!”
“이제껏 키워 줬더니 은혜도 모르고!”
살아남은 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그레텔을 찾았다. 그들 중 한 여자가 숲으로 들어갔다. 마침 옹이구멍에서 나오던 그레텔이 그녀를 봤다.
“아, 아주머니.”
바로 어제 그레텔은 여자의 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여자는 마치 다른 사람인 것 같은 얼굴로 그레텔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식칼이 어둡게 빛났다.
“너 때문에…….”
여자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레텔은 뒷걸음쳤다. 본격적으로 도망치기 위해 등을 돌리는 때였다.
“내 딸은 잡아먹혔는데 왜 넌 살아 있어!”
여자가 식칼을 휘둘렀다. 칼은 그레텔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비명을 삼키며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세 걸음도 채 가지 못해 머리카락을 휘어잡혔다.
“죽어! 죽어! 죽으라고!”
“사, 살려……! 잘못, 했…….”
여자는 식칼을 쉴 새 없이 내리쳤다. 그녀의 애원은 여자의 소리에 묻혀 버렸다.
피가 울컥 쏟아졌다. 그 순간 눈앞을 스쳐 간 것은 볼 때마다 두근거렸던 압살롬이 아닌, 늘 경계하기만 했던 이환이었다.
늘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표정의 남자였다. 가끔 그가 자신을 가엾게 여긴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게 싫어서 더 매정하게 굴었다. 이환의 그 감정은 그녀가 살면서 유일하게 받은 진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걸 받아들이느니 거부하는 쪽을 택했다. 지금 가진 것만으로 만족하고 살 수 있도록.
‘그래 봤자 아무 의미 없었지만.’
눈앞이 순식간에 까맣게 물들었다.
그레텔의 실낱같은 목소리는 이환에게 닿았다. 그러나 그가 간신히 도착했을 때 상황은 이미 끝난 후였다. 이환은 피 웅덩이에 누운 그레텔에게 다가갔다. 부릅뜬 눈을 감겨 주자 평온한 얼굴이 남았다.
죽은 그레텔 옆에는 미친 듯이 웃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압살롬은 그녀를 기절시킨 후 옆에 떨어진 주머니를 주웠다.
“이환. 이걸 보세요.”
힘이 미약하게 남았다고는 해도 성물은 성물이었다. 이환은 치미는 혐오감을 억누르고 그것을 받았다.
주머니 안에서는 낡은 청동 열쇠가 나왔다. 거친 손이 그것을 우악스럽게 움켜쥐었다.
“가야 합니다.”
압살롬이 마을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몇 개의 기척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레텔을 내려다본 이환이 몸을 일으켰다.
멀어져 가는 그들의 등 뒤로 당황에 찬 목소리가 희미하게 울려 퍼졌다.
***
이환은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먹고 마셔야 한다는 당연한 욕구도, 말을 쉬게 해 줘야 한다는 사실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겨우 멈춰 선 것은 제법 큰 도시 근처에서였다. 아마 압살롬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보지 못하고 지나쳤을지 모른다.
“여기서 쉬고 가요. 안 그러면 당신 몸이 버티질 못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압살롬이야말로 얼굴이 해쓱했다. 이환은 자신의 무모한 행동을 돌이켰다.
“미안하다.”
이환은 압살롬의 입술을 더듬었다. 늘 꽃잎처럼 붉고 보드랍던 입술이 희게 질린 채 거칠어져 있었다.
말이 괜찮아 보인다고 무작정 달리기만 했다. 정작 확인했어야 하는 것은 압살롬인데. 이환은 감정에 겨워 충동적으로 행동한 것을 깊이 후회했다.
그들은 깨끗한 여관을 찾아들었다. 이환은 자신의 방에 짐을 놓자마자 돌아 나왔다. 먼저 1층 로비에 들른 후 압살롬의 방으로 향했다.
“잠시 실례한다.”
이환은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곧바로 돌아서서 압살롬을 살폈다. 외투만 벗었을 뿐 입고 있던 옷차림 그대로였다. 이환은 손을 뻗어 압살롬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 이환?”
“얌전히 있어.”
셔츠와 바지만 남겨 두고 전부 벗겨 냈을 즈음 점원이 물과 수건을 가져다줬다. 이환은 수건을 적셔 압살롬의 손을 닦았다.
“저, 이환. 굳이 이러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환이 이러는 이유를 눈치챈 압살롬이 말했다. 이환은 수건을 빼앗으려는 손을 피하며 대꾸했다.
“거의 다 됐어.”
이환은 압살롬의 발까지 깨끗하게 닦은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압살롬이 얼굴을 붉힌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침대에 앉은 압살롬과, 그 발아래 무릎 꿇은 자신. 그는 압살롬의 손을 쥐고 손등에 입술을 가져갔다.
“마치 기사 같네요.”
압살롬이 중얼거렸다. 구세의 기사가 아닌 드래곤의 기사도 괜찮았을지 모른다. 이환이 대꾸했다.
“기사 같은 게 아니라 기사야. 자, 이제 누워.”
몸을 일으킨 그는 압살롬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압살롬은 순순히 침대 위에 몸을 뉘였다. 이환은 이불을 들어 압살롬에게 덮어 준 후, 베개 위에 흩어진 은빛 머리카락을 살살 모아 정돈했다.
“뭔가…… 안 그래도 된다고 말하기는 했는데 기분은 좋네요. 금방이라도 잠들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 그걸 바라고 한 거거든.”
벌써 어스름이 내린 시각이었고, 식사는 방에 올라오기 전에 이미 마쳤다. 당장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환은 압살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더 필요한 건 없어?”
“필요하다기보다는 바라는 게 있습니다. 말해도 괜찮을까요?”
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압살롬은 조금 머뭇거렸다.
“옆에 있어 주세요. 내내 같은 집에서 지내서 그런지, 당신이 같은 공간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오던 잠마저 달아날 것 같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바람이었다. 이환은 압살롬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자 압살롬이 얼른 말을 이었다.
“계속 있어 달라는 건 아닙니다. 잠들 때까지만…….”
이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에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압살롬이 허망하게 보았다.
괜히 말했을까. 압살롬이 입술을 깨무는 때였다. 다시 문이 열리고 이환이 들어섰다. 손에 짐을 든 채였다.
“방 하나 취소하고 왔어.”
짐을 풀지 않아 다행이라고 말하는 이환을, 압살롬은 넋을 잃고 올려다보았다.
후다닥 씻은 이환이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까지도 압살롬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옆으로 좀 가 줘.”
“아, 네.”
얼떨떨하게 대답한 압살롬이 이내 빠르게 움직였다. 이환은 그의 옆자리에 들어갔다. 압살롬의 체온으로 뜨끈뜨끈해진 침대 안이 기껍다. 이불을 잘 덮고 눕자 곧바로 압살롬과 눈이 마주쳤다.
“이상한 말입니다만.”
“뭔데?”
해 진 후의 어둑어둑한 방, 침대 안. 잘 말린 침구에서 느껴지는 기분 좋은 감촉. 주고받는 목소리마저 어스름을 닮아 나직했다.
“당신과 연인이 되었다는 걸 지금처럼 실감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한 압살롬이 아래쪽으로 꾸물꾸물 내려갔다. 그러더니 이환을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이환은 언젠가 비슷한 자세로 잠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이렇게 자는 게 좋았나 봐?”
“네. 당신 심장 소리가 잘 들려서…….”
압살롬이 눈매를 한껏 휘며 웃었다. 크림을 잔뜩 핥은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이환은 그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답답해지면 말해.”
“더 세게 안아도 괜찮아요.”
그다음은 정적이었다. 포근하고 달콤한 공기에 호흡이 오가는 코끝이 아렸다. 이환은 은빛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피곤하기는 했는지 가물가물 잠이 왔다.
“사실은.”
깊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친다.
“자고 있는 사이에 당신이 사라질까 봐 무서웠던 적도 많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이환은 그렇게 반박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혀는 이미 수면에 잠식되어 있었다.
“오늘은 밤샐 일이 없겠군요. 밤새도록 당신만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는데, 그건 그거대로 아쉽네요.”
아침이 되면 기억도 못 할 말을 들으며 이환은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이환은 날이 밝는 것과 동시에 잠에서 깨어났다. 원인은 어젯밤 덧문을 제대로 닫지 않은 창으로 새어든 햇빛에 있었다. 짜증스럽게 목을 울리며 돌아누우려던 그는 이내 눈을 번쩍 떴다. 팔 안이 묵직했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은을 고스란히 자은 듯한 머리카락이었다. 시선을 내리자 반듯한 이마와 우아하게 뻗은 코가 보였다. 라벤더색의 눈꺼풀은 굳게 감긴 채였다. 좀 더 아래쪽을 보자 살짝 다물린 입술이 있다. 어느 한 곳 못난 구석이 없는지라, 이환은 잠시 넋을 잃고 압살롬을 감상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햇살이 조금씩 이동했다. 그게 닿을까, 이환은 압살롬을 품 안 깊이 끌어당겼다.
그러나 태양은 무자비했다. 어느새 압살롬의 눈매가 햇살로 물들었다. 이환은 손을 뻗어 차양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빛 조각은 제대로 가려지지 않았다.
그가 인상을 쓰는 때였다. 품 안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멋쩍어진 이환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일어났으면 말을 해야지.”
“애쓰는 이환이 귀여워서요.”
이환은 헛웃음을 흘렸다. 팔을 풀자 압살롬이 몸을 일으켰다. 긴 은발이 빛줄기를 가로지르며 이환의 눈을 희롱했다.
침대에서 빠져나간 압살롬이 창으로 다가갔다. 열린 덧문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온 터라 방은 제법 추웠다. 그는 덧문을 활짝 열었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압살롬을 희게 물들였다.
이환은 문득 아주 오래전 언젠가의 아침을 떠올렸다. 단골 술집의 허름한 방 안에서 맞았던 그 아침은 그 어느 때보다 편안했었다. 그때도 압살롬은 저런 식으로 창을 열어 어두운 방 안에 빛을 끌어들였다.
“혹시 기억하냐? 아마 작년쯤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술집 2층에서 묵었던 적 있잖아.”
현 시간대로는 작년이지만 이환에게는 4년 전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토록 뚜렷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니 그 아침이 마음에 들기는 했던 모양이었다.
“그랬었죠.”
“기억하는구나.”
압살롬이 침대로 돌아왔다. 기쁜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당신에 대한 것을 잊어버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몸을 굽힌 압살롬이 이환의 이마에 입 맞추었다.
“일어나세요, 이환. 네 번째 성물이 코앞입니다.”
“……그래.”
이환은 침대에서 내려섰다. 겨울 아침의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날카롭게 찔렀다.
***
위뱅은 창문 너머로 팔을 내밀었다. 기다렸다는 듯 전서구가 위뱅의 팔에 내려앉았다. 그는 다리에 매인 편지를 익숙하게 빼내 뤼시앵에게 넘겼다.
뤼시앵은 편지를 펼쳤다. 익숙한 필체가 작성자를 알려 주었다.
“형님의 직속 보좌관이 보낸 거야.”
아무래도 샤를은 이번 사안에 제법 큰 비중을 둔 모양이었다. 얕은 웃음을 흘린 뤼시앵이 편지를 읽어 내렸다. 뢴트너의 왕궁에서 보관 중이던 성물이 사라졌다는 내용이었다.
“알렉상드르 경은 성물을 손에 넣어 뭘 어쩌려는 것일까.”
그게 무엇이든 뤼시앵에게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환은 지금 드래곤에게 홀려 조종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뤼시앵은 흔들리는 촛불에 편지를 가져갔다. 시커먼 연기가 흩어졌다.
“알렉상드르 경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지?”
“뢴트너 북부입니다.”
그곳에 위치가 확정된 성물은 없다. 공식적으로 보자면 그렇다. 그러나 뤼시앵의 정보원은 제국 황실이고, 이환의 정보원은 드래곤이었다. 뤼시앵은 자신이 아는 정보라면 이환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바이스발트로 가자.”
방을 나선 뤼시앵은 1층에서 대기 중인 스무 명의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먼저 동행했던 기사들과는 달리 제대로 된 자들이었다. 이들이라면 아무리 이환이라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어두운 미소가 뤼시앵의 입가에 스쳤다.
***
바이스발트. ‘하얀 숲’이라는 뜻을 가진 이 숲은 자작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옐라가 휴식을 취하고자 할 때 내려오는 장소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숲을 가리켜 성역 혹은 이옐라의 숲이라고 일컬었다.
이환과 압살롬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숲을 응시했다. 잎은 일찌감치 모두 떨어졌는지 앙상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보통 숲이면 을씨년스러울 법도 한데, 온통 흰 자작나무뿐이라 그런지 그 모습마저 백록처럼 우아했다. 과연 사람들이 그런 별칭을 붙일 만했다.
그러나 별칭과는 달리 숲 어디에서도 신의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환과 압살롬은 말을 몰아 숲 가까이로 다가갔다.
딱히 입구나 길이라고 할 만한 것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이환은 말에서 내렸다. 후리후리한 자작나무에 말을 묶는 때였다.
“윽.”
압살롬이 작게 신음했다. 이환은 그에게 다가섰다. 흰 손가락 끝이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다쳤어? 부딪친 거야?”
“글쎄요.”
압살롬이 손을 들어 근처 자작나무에 댔다. 그 순간 소리 없는 불꽃이 하얗게 일었다.
“압살롬!”
이환은 얼른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이미 손가락에는 다시 붉은 흔적이 남아 버렸다. 이환이 그것에서 눈을 떼지 않자 압살롬이 중얼거렸다.
“직접 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변명조의 말을 듣자 목구멍에 걸렸던 다그침이 스르르 내려갔다. 작게 한숨을 쉰 이환은 압살롬의 손을 놔주었다.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라. 말로 해도 충분하니까.”
“미안해요.”
“사과도 하지 마. 네가 뭘 잘못했다고.”
“그렇지만.”
압살롬이 손을 뻗었다. 다치지 않은 손이었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이환의 뺨을 섬세하게 쓰다듬었다.
“이환이 속상하다는 표정인걸요.”
아름다운 얼굴이 가까워졌다. 이환은 눈을 감았다. 아직 조금 거친 입술이 느껴졌다. 그것에도 속이 쓰렸다. 군림하며 살 수 있었을 압살롬이 자신을 만나 이렇게 된 것 같았다.
이환은 그 생각을 지우고자 압살롬에게 달려들었다. 입술을 열고 혀를 들이밀어 열렬하게 매달렸다. 그러자 압살롬이 목을 울리며 웃었다. 낮은 웃음소리에 이환의 허리께가 저릿저릿 울렸다.
떨어질 만하면 어느 한쪽이 쫓아오는 바람에 입맞춤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겨우 정신을 차린 이환은 압살롬의 어깨를 눌렀다. 압살롬의 젖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뜨거운 날숨을 들숨으로 삼키며 그가 말했다.
“일단, 압살롬. 이야기를 좀…….”
“으응, 그래요.”
이환의 입술을 물고 늘어지며 압살롬이 중얼거렸다. 짙푸른 눈은 몽롱하게 흐려진 채였다. 이환은 압살롬의 입술을 손으로 막았다.
“숲에는 나 혼자 들어가야 할 것 같아.”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압살롬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무슨 말입니까, 그게.”
“난 저 숲에 닿아도 아무렇지 않아. 하지만 넌 아니야.”
말을 묶는 동안 자작나무에 몇 번이나 닿았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무는 그에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환의 말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압살롬이 입술을 깨물었다. 몇 번이고 열렸다가 다시 닫히는 입술이 안타깝다. 이환은 그의 뺨을 톡톡 두드렸다.
“나만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뭐, 이옐라도 자기 기사는 알아보는 모양이지.”
“그……렇겠죠.”
“그러니 얼른 들어갔다 나올게. 넌 여기서 말이랑 짐을 지키고 있어.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이것도.”
이환은 품에 넣어 두었던 성물을 꺼내 압살롬에게 내밀었다. 압살롬은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환이 손을 흔들어 재촉하자 그제야 미적미적 받아들인다.
“이걸 나에게 맡겨도 됩니까.”
낮은 목소리에 어둠이 깔린다. 이환은 대수롭지 않은 척 응수했다.
“그럼 너 말고 누구에게 맡기겠어.”
“……그렇네요.”
압살롬이 입매를 기묘하게 허물어뜨렸다. 그 모습이 심장 어딘가를 쿡쿡 찔러서, 이환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그때 한 걸음 다가선 압살롬이 그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뭐, 뭐야.”
“나는 같이 갈 수 없으니까요. 당신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입맞춤입니다.”
입술이 닿은 이마가 어쩐지 뜨겁다. 그럼에도 이환은 그 부분을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러면 압살롬의 기원이 흩어질 것만 같았다.
이환이 무뚝뚝한 표정인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압살롬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다녀오세요.”
“갔다 올게.”
칼과 작은 물통, 약간의 육포만을 챙긴 이환이 자작나무 사이로 들어갔다. 그 모습은 금세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압살롬은 이환이 있는 방향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자작나무에 닿아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이환만이 아니었다. 압살롬은 말이 자작나무 둥치를 머리로 툭툭 치는 것을 봤다. 이환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던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망설이는 그를, 이환은 부드럽게 받아들여 줬다.
“미안해요, 이환. 이런 겁쟁이라…….”
압살롬은 성물을 꽉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숲에 들어선 이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수한 자작나무들이 찌를 듯이 솟아 있었다. 제법 위압적인 광경이었다.
안쪽으로 갈수록 빛이 사라졌다. 어느 순간 이환은 숨이 조금 가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환은 며칠 밤을 새워도 지치지 않는 체력의 소유자였다. 평지를 잠시 걷는 것만으로 이렇게 될 리가 없었다.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환은 이 숲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척을 느낀 적이 없었다.
‘기분 나쁜 숲.’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압살롬이 준 정보에 따르면 성물은 숲 한가운데에 있다고 한다. 이환은 방향을 잃지 않고자 태양의 위치를 시시때때로 확인하며 걸었다.
숲 한가운데에 가까워지지 않았을까 생각할 즈음이었다.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 사이로 희미한 빛이 보였다. 저곳일까. 이환은 그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가까워질수록 그곳의 모습이 보였다. 빛이 잘 드는 빈터였다. 얼핏 꽃 비슷한 것도 확인되었으나, 계절이 겨울인 만큼 잘못 본 것이라 생각했다.
신의 힘도 풍겼다. 이제껏 알아차리지 못한 게 이상할 만큼 강렬했다.
그러나 이환은 그곳을 다섯 걸음쯤 남겨 둔 곳에서 발을 멈추고 말았다.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식은땀이 손바닥을 흠뻑 적셨다. 더 이상 다가가면 안 된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환은 억지로 한 발을 떼어 놓았다. 이 정도로 신의 힘을 강하게 풍기는 성물이라면 지구로의 귀환에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두 번째 걸음을 내디딘 순간, 이환은 그 자리에 무릎 꿇고 말았다.
공포라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단순화된 정의였다. 지금 그를 지배하는 감정은 압도적인 대상에 대한 경외와 이끌림, 저 안에 용해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그것에 대해 자아가 일으킨 거부감이었다.
뇌의 과부하가 생리적 반응으로 나타났다. 이환은 치미는 구역질을 억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저런 것이 성물이라고?’
이 숲에서 벌레 한 마리 보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전부 저 힘에 잡아먹혔을 것이 뻔했다. 신의 힘이 머무른다고는 하나, 고작해야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것이 이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이환은 빈터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몸을 움직였다. 옆쪽으로 얼마쯤 가자 빈터의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평화롭고 온유한 햇살이 내리쬐는, 넓지 않은 공간이었다. 둥근 빈터의 바닥에는 꽃과 풀이 융단처럼 깔렸다. 그리고 빈터 주변에는 수많은 동물이 고개를 조아린 채 미라가 되어 있었다.
억지로 고개를 돌려 빈터 중앙을 향했다. 그곳에는 꽃과 덩굴이 얽혀 만들어진 요람이 있었다. 그 안에서도 신의 힘이 풍기고 있었다. 성물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다른, 생생하나 어딘지 그늘진 기운이었다. 이환은 요람 안에 누운 누군가를 보았다.
이곳은 성역. 신이 쉬어 가는 곳.
그렇다면 지금 저곳에 있는 것은―
요람 안에서 신의 힘이 일렁거렸다. 기상의 전조와도 같은 움직임이었다. 이환은 황급히 빈터를 둘러보았다. 요람 안의 것과는 조금 다른 힘이 지척에서 느껴졌다. 그것이 바로 그가 찾는 성물일 것이다.
이환의 시선이 겨우 한 점에 가 닿았다. 빈터 가장자리에 수정으로 이루어진 꽃이 피어 있었다.
저것이다. 이환은 떨리는 다리로 걸음을 내디뎠다. 순식간에 머리가 멍해졌다. 여기서 더 가까이 가면 저 동물들처럼 미라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경배하라.’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속삭였다. 그 말에 기꺼이 따르고 싶은 열망이 솟구쳤다. 이대로 하나가 되어 저 온유한 빛 안에 녹아들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듯했다.
바라던 꽃을 지척에 둔 채, 이환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그의 발끝이 부드러운 흙을 파고들었다. 그것이 다시 한 걸음을 내디디면 이제 영영 돌아갈 수 없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환은 망설이지 않았다.
발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당신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입맞춤입니다.’
한없이 다정하지만 어딘지 씁쓸한 음성이 귓가에 울렸다. 그와 동시에 이마가 불붙은 듯 뜨거워졌다.
“윽……!”
이환은 짧은 신음을 흘리며 이마를 감싸 쥐었다. 압살롬. 성물. 이환의 머릿속을 순식간에 스쳐 간 생각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수정꽃을 우악스럽게 낚아챘다.
보물을 빼앗긴 숲이 노했다. 바람조차 일제히 울부짖었다. 달리는 이환을 향해 자작나무가 뾰족한 가지를 뻗었다. 그러나 그는 방어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환은 들어왔을 때와는 달리 빠르게 숲을 가로질렀다. 시야에 비치는 비슷비슷한 나무들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나아갔다. 전부 이마 위의 작은 열기가 그에게 방향을 일러 준 덕분이었다.
드디어 희미한 빛이 보였다. 이환은 마지막으로 덮쳐 온 가지를 본능적으로 피하며 그 빛에 몸을 던졌다. 단단한 팔이 그를 끌어안았다.
“이환!”
롬. 그렇게 응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빠져나오는 것은 헐떡이는 숨이었다. 그런 이환을 끌어안고 압살롬이 물러났다.
이환은 그가 자신을 말에 올린 것도, 숲에서 멀어진 것도 몰랐다. 다만 자신을 감싼 온기에만 집중했다. 이것이 없으면 이환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질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압살롬은 이환이 파고들수록 더욱 굳건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나 여기에 있어요, 이환. 이제 괜찮아요…….”
***
차가운 물방울이 뺨에 떨어졌다. 빠르게 미끄러지는 그것을 따뜻한 무엇인가가 지워 없앴다. 눈앞을 어른거리는 희고 매끄러운 것. 이환은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았다. 익숙한 온기가 느껴졌다.
“롬?”
이환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소리가 된 이후에야 그것이 회귀 이후 단 한 번도 부른 적 없는 압살롬의 애칭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환이 그 애칭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스물다섯 살 때였다. 지금의 이환이라면 아직 몰라야 했다.
“네, 이환.”
그러나 압살롬은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저 이름의 마지막 글자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환의 생각은 압살롬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날아가 버렸다.
해쓱한 얼굴에, 눈 밑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어디선가 희미한 피 냄새도 났다.
“어디야.”
“네?”
“다친 곳!”
압살롬에게 가까워지려던 이환은 자신이 그에게 온전히 감싸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지 못했던 상황에 당황하기도 전에 압살롬이 그의 몸을 다시 끌어당겼다.
“난 멀쩡하니까 가만히 있어요.”
“압살롬!”
“숲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내내 상태가 좋지 않았어요.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서 내내 안고 있어야 했습니다. 게다가 품에 파고들면서 어떻게든 접촉하려는 통에, 정말 참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뭐?”
“귀에 대고 계속 내 이름 부른 건 기억하나요? 난 살면서 평생 들을 이름을 오늘 다 듣는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이건 심술입니다. 압살롬은 이환의 귓가에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이환은 귀를 벅벅 문질렀다. 그러다 체온이 떨어졌다는 것을 실감하고는 순순히 압살롬에게 몸을 맡겼다.
그쯤 되어서야 깨달은 이곳은 동굴 안이었다. 특유의 축축한 싸늘함이 피부로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던 이환의 시선이 압살롬의 손에 닿았다. 희고 고운 손가락에 어울리지 않는 물집이 제법 크게 잡혀 있었다.
이환은 그의 손을 잡아 눈앞으로 이끌었다. 그 바람에 압살롬의 소매가 당겨지며 손목이 슬쩍 드러났다. 화상은 그곳에도 있었다. 이환은 그의 소맷자락을 풀었다.
“자, 잠깐…….”
등 뒤에서 압살롬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소매를 쭉 내리자 희고 단단한 팔에 길게 잡힌 물집이 보였다. 뜨겁게 달군 회초리로 내리친 듯한 모양이 원인을 짐작케 했다. 압살롬이 재빠르게 말했다.
“보기에는 좀 흉하지만 괜찮아요.”
이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압살롬이 덧붙였다.
“이환은 더 심하게 다쳤는걸요. 여기저기 할퀴고 긁히고…….”
이환은 욱신거리는 부분에 손을 댔다. 연고 특유의 끈적끈적한 감촉이 느껴졌다. 조금 울컥한 그는 압살롬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약 이리 내놔.”
압살롬에게서 약을 건네받은 이환이 치료를 시작했다. 잠시 동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물집이 터지지 않도록 살살 약을 바른 이환이 팔을 잡았다.
“아프지는 않아?”
“괜찮아요.”
이환은 익숙하게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그러고는 압살롬의 팔을 잡아당겨 붕대 위에 조용히 입술을 댔다.
‘흉터라도 남는다면 저 자신을 원망하게 될 테니까요.’
황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몸을 던진 날, 압살롬이 이환에게 했던 말이었다. 이환은 그때 그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이환의 체온이 평소와 비슷한 정도까지 돌아왔다. 그들은 동굴을 벗어나 말에 올랐다.
“고맙다.”
말을 출발시키기 전, 이환은 압살롬을 향해 말했다. 경황없는 와중에 자신은 물론 말까지 챙기는 것이 쉬웠을 리 없다. 그에 대한 고마움의 인사였다.
뜬금없는 말에 압살롬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환은 말갈기를 슬쩍 쓰다듬었다. 그러자 압살롬이 눈부시게 웃었다.
“천만에요.”
이환과 압살롬은 전날 묵었던 도시를 향해 출발했다. 그곳에서 하루 묵은 후 다음 성물을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반나절쯤 달리자 제법 큰 폐허가 나왔다. 날개 달린 늑대에 뱀이 휘감긴 형상의 거대한 조각상이 파손된 채 나뒹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는 익숙한 이옐라의 조각상이 쓰러져 있었다.
을씨년스러웠으나, 도시로 향하는 길을 제대로 달리고 있다는 표시였다. 그러나 이환은 황급히 말을 멈추었다. 갑작스럽게 멈춘 말이 제힘을 이기지 못해 앞발을 드는 때였다.
쐐애액―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날아든 화살이 언 땅에 들이박혔다. 이환이 계속 달렸더라면 말 머리에 명중했을 것이다.
그는 연이은 화살을 피해 말을 물렸다. 어느새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쏟아지는 화살을 칼로 쳐 내며 압살롬을 살폈다. 그 역시 화살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환은 화살의 정확도와 힘을 가늠했다. 도둑 정도로는 불가능한 실력이었다. 적어도 정규 군인이다. 그리고 지금 이환에게는 예상 가는 상대가 있었다.
“압살롬! 물러서!”
“하지만!”
“안 돼.”
이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와 동시에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인지, 투구에서 갑옷까지 전부 문장 하나 없는 것들로만 걸친 자들이었다. 그러나 이환은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이들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샤를이 작정한 모양이군.”
황실 기사단, 그것도 정예들이다. 이환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어느 순간 화살이 멈추었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이 이환을 사방에서 에워쌌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공격이 시작되었다.
묵직한 칼이 이환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그것을 흘린 이환이 반격했다. 기사는 흉갑이 우그러진 채 물러났다. 그러나 이환은 그를 쫓을 여력이 없었다. 다른 기사가 그의 옆구리를 노려 창을 찔러 왔기 때문이다.
이환은 창을 아슬아슬하게 막았다. 두 개의 무기가 찰나간 대치했다. 순식간에 밀려난 기사가 빈정거렸다.
“이전보다 실력이 좀 떨어진 것 같은데. 아니면 어디서 다치기라도 했나?”
이환은 대답 대신 기사의 목을 향해 칼을 내질렀다. 가느다란 사슬을 이어 만든 체인 메일이 이환의 힘을 못 이겨 기사의 목에 파고들었다. 기사는 끔찍한 비명과 함께 낙마했다. 이환은 말을 움직여 그를 힘껏 짓밟았다.
남은 것은 중갑주의 기사 열다섯 명. 이대로 가다가는 한도 끝도 없었다. 폐허 근처에서 대기 중인 나머지 기사들이 언제 합류할지도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이곳에는 압살롬이 있었다.
이환은 칼을 휘두르는 한편, 압살롬을 슬쩍 살폈다. 그는 이환의 말대로 제법 떨어진 곳에 멈춰 서 있었다. 입술을 질끈 문 모양새가 울 듯, 혹은 분한 듯 보인다. 이환은 저도 모르게 조금 웃고 말았다.
그때였다.
“어딜 보는 거지?”
화끈한 통증이 옆구리를 후볐다.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눈동자가 보였다.
“브라크 경.”
황실 기사단의 차기 단장으로 유력시되는 자였다. 큰 덩치만큼 힘도 세서 무거운 무기를 선호하곤 했었다.
이환은 브라크의 손목을 잡고 비틀었다. 그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보통 인간과 궤를 달리하는 이환을 당해 낼 수는 없었다. 꺾인 손목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이환은 브라크가 탄 말에 발길질을 하며 말했다.
“이건 잘 받아 갈게.”
이환은 브라크의 말이 멀어지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옆구리에 박힌 모르겐슈테른을 뽑았다. 무쇠로 만든 구에 가시를 박아 묵직한 곤봉 끝에 고정한 무기였다. 가시 돋힌 모습이 마치 별처럼 보인다 하여 샛별이라는 뜻의 예쁜 이름이 붙기는 했으나, 갑옷 입은 병사를 상대하기에는 이만한 것도 없었다.
과연 모르겐슈테른은 위협적이었다. 기사들은 팔다리가 부러진 채 낙마했다. 그러나 그들도 정예 중의 정예다. 익숙하게 치고 빠지는 기사들을 상대로 이환은 빠르게 지쳐 갔다. 몸 상태가 평소 같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
긴 창이 이환의 어깨를 찔러 들었다. 신음을 삼킨 그는 창을 움켜쥐었다. 전체가 무쇠인 창이라 부러뜨릴 수도 없었다. 칼이라도 집어 던질까 생각하는 때였다.
공기의 흐름이 뒤바뀌었다. 이질적이고, 어딘지 거부감마저 드는 흐름이었다. 이환은 본능적으로 압살롬을 돌아보았다.
“압―.”
“괜찮아요.”
압살롬이 부드럽게 말했다. 제법 거리가 있음에도 지척에서 듣는 듯 들려왔다. 사근사근한 말투가 오히려 기괴하게 느껴졌다.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이환의 어깨에 박힌 창이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다. 텅 빈 손아귀에 놀란 이환이 시선을 돌리는 때였다.
거센 물줄기가 기사들을 덮쳤다. 살아 있는 듯 움직인 그것은 기사들을 붙잡아 땅 위로 메다꽂았다. 그러고는 방향을 바꿔 그들의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물은 기사들이 축 늘어지고서야 사라졌다. 이환은 압살롬을 향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아까 그냥 말할 걸 그랬어요.”
압살롬의 말투는 여전히 사근사근했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고 정말 괜찮은 것은 아니다. 이환은 그를 향해 피투성이가 된 손을 내밀었다. 압살롬의 얼굴에 망설임이 스쳐 지났다.
“이리 와.”
그리 상냥한 어조는 아니었다. 그러나 압살롬은 그것으로 충분했는지, 빠르게 말을 몰아 다가왔다. 이내 두 개의 손이 단단히 얽혔다. 압살롬이 속삭였다.
“조금만 참아요.”
다시 한 번 공기가 뒤흔들렸다. 이환은 피가 멎고, 새살이 차오른 후, 피부가 매끄럽게 수복되는 광경을 경이에 차 지켜보았다.
압살롬은 이환이 다쳤던 곳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그렇게 하면 이미 느꼈던 고통마저 사라진다고 믿는 사람 같았다. 이환은 그를 저지하며 말했다.
“괜찮아. 네가 다 치료했잖냐.”
“그렇지만 혹시 남은 상처라도…….”
그때 말발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환은 압살롬을 자신의 뒤로 숨겼다. 모르겐슈테른을 쥔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다가온 것은 저만치 떨어져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자들이었다. 그중에는 뤼시앵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가까이 다가선 그가 이환을 보았다.
“이후안 경.”
얼핏 ‘이환’이라고도 들리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울리는 순간, 압살롬이 이환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환은 그의 손을 토닥였다.
만약 회귀 전이었다면 이 정도만으로도 감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환의 곁에는 제대로 이름을 불러 주는 연인이 있었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 그건 이 녀석만 부를 수 있는 이름이야.”
냉랭하게 말하자 뤼시앵의 얼굴에 초조함이 스쳤다.
“알렉상드르라는 이름은 경의 것이 아니라고 했었잖아. 그래서 본래의 이름을 찾아…….”
“아예 부르지 말라는 뜻이었어. 사람을 시켜 서류 좀 뒤지게 한 모양인데, 안 됐네.”
입술을 깨문 뤼시앵이 이환에게서 압살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초록색 눈동자 안에서 독기가 타올랐다. 그 눈빛으로 그는 생긋 웃었다.
“단단히 빠진 모양이야. 그런데 그거, 뭔지 알고는 있어?”
뤼시앵은 ‘그거’라고 말하며 압살롬을 가리켰다. 이환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거?”
“그래, 그거. 뭐가 이상해? 어차피 그건…….”
예쁜 얼굴에 악의가 담긴다. 뤼시앵이 활짝 웃었다.
“드래곤―몬스터잖아.”
이환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뤼시앵이 말을 이었다.
“어라, 설마 몰랐던 거야? 방금 전에 쓴 거 마법이잖아. 인간을 마법을 사용하지 못해. 마법이 가능한 건 전부 몬스터뿐…….”
“알아.”
독을 뿜는 뱀. 이환의 눈에 지금의 뤼시앵은 그렇게 비쳤다. 저런 사람을 그리도 애지중지하며 사랑했다니. 이환은 끔찍함을 담아 다시 말했다.
“알고 있어. 근데 그게 뭐.”
툭.
이환의 어깨에 향기로운 것이 닿았다. 긴 은발이 그의 어깨를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이환은 뒤쪽으로 손을 뻗어 압살롬에게 내밀었다. 압살롬이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어, 언제…… 언제부터 알았…….”
이환은 더듬거리는 뤼시앵을 무시했다. 그의 뒤쪽으로 시선을 넘기자 다섯 명의 기사가 보였다. 하나는 위뱅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황실 기사단 소속이었다.
이환은 그들 중 특히 눈에 익은 한 사람에게 집중했다. 베르나르 뷔넬. 황실 기사단의 부단장이자, 이환이 처음 칼을 들었던 당시 그를 가르쳤던 사람이기도 했다.
“이곳에 매복했다는 건 우리가 이곳을 지나리라 예측했다는 뜻이겠지.”
압살롬에게서 정보를 받은 성물은 총 여섯 개. 그중 셋을 이환이 가지고 있다. 남은 성물은 피에리냐크 제국의 황궁, 이옐라 교단의 교황청 그리고 지금 이환과 압살롬의 목적지인 어느 섬에 각각 존재했다.
그나마 수월하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마지막 성물이다. 그러나 만약 이환의 목적을 눈치챘다면, 그리고 그 성물의 위치를 알고 있다면 이미 황실에서 손썼을 가능성도 있었다.
“5황자님께 확인해라. 전부 그분의 작전이니까.”
베르나르의 대답에 이환은 뤼시앵을 보았다. 뤼시앵이 빈정거렸다.
“의외라고 생각해?”
솔직히 말하자면 그랬다. 이환이 아는 뤼시앵은 상당히 수동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알고 있지?”
“답을 듣고 싶다면 내 질문에 먼저 대답부터 해.”
이환은 뤼시앵이 했던 질문이 무엇인지 생각했다. 흘려들었던 탓인지 영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자 압살롬이 속삭였다.
“내가 드……인 걸 언제부터 알았냐고 물었어요.”
무엇이 그리도 두려운지 ‘드래곤’이라는 부분만 흐지부지 흩어졌다. 이환은 압살롬의 머리를 툭툭 두드려 주며, 문득 머릿속을 스친 의문을 입에 올렸다.
“황실은 원래 네가 누군지 알고 있었어?”
“그럴 리가요.”
답을 들은 이환은 압살롬에게로 틀었던 몸을 돌려 뤼시앵을 향했다.
“가을부터. 말했으니 너도 대답해. 압살롬이 드래곤이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그저 미심쩍은 것을 물었을 뿐이다. 그런데 뤼시앵은 얼어붙은 얼굴로 이환과 압살롬을 번갈아 보았다.
“중요한 게 그쪽이야?”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이환이 미간을 찌푸리는 때였다. 베르나르가 앞으로 나섰다.
“알렉상드르 경.”
눌러쓴 투구 아래 드러난 입술이 경멸로 일그러진 게 보였다.
“지금 저런 몬스터 따위에게 홀려서 제국을, 제국의 모든 신민들을 외면하겠다, 그런 뜻이냐? 너 하나만을 희망으로 생각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제국민들에게서 등을 돌리겠다고? 그들은 전부 몬스터의 밥이 되도록 만들 셈이냐!”
신 이옐라가 인간에게 내린 최후의 희망. 세상을 구원할 유일무이의 존재. 눈부신 명예였다. 그러나 지금은 알고 있다. 그것은 멍에였고, 그가 없으면 모두 죽게 될 거라는 협박에 지나지 않았다.
다리가 묶이고 어깨가 짓눌렸다. 그럼에도 이환은 가라앉지 않고자 안간힘을 다해 버텼다. 그러나 결국 그것조차 무의미한 발버둥일 뿐이었다.
베르나르의 말은 이환에게 그런 끔찍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이환은 입술을 길게 늘인 채 베르나르를 마주 보았다.
“그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
“알렉상드르 경!”
“너희 나라잖아. 그럼 너희가 지켜야지. 나에게 책임 전가하지 말고.”
그때였다. 뒤쪽에서 질척한 소리가 났다. 뒤이어 피비린내가 풍기며, 어깨 위의 압살롬이 묵직해졌다. 이환은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압살롬의 몸이 기울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길게 나부낀다. 그 사이로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피에 젖은 입술이 끔찍할 만큼 붉다.
“압살롬!”
이환은 압살롬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감긴 눈은 이환의 부름에 반응하지 않았다. 마치 이것이 대답이라는 듯 입술 사이로 피가 울컥울컥 흘러나올 뿐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으나 뤼시앵으로서는 기회였다. 뤼시앵이 눈짓하자 기사들이 이환을 향해 달려들었다.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울린다. 선두의 기사가 칼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이환의 어깨를 노리고 날아든 칼은 순식간에 두 동강 났다. 다음 순간 기사의 머리가 땅에 뒹굴었다. 몸뚱이만 태운 말은 영문도 모르고 한참을 달려 나갔다.
모르겐슈테른의 가시에서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자루를 단단히 움켜쥔 손이 힘을 이기지 못해 부들부들 떨린다.
더 이상 사람을 죽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쓰러진 압살롬을 보는 순간 그런 생각 따위는 단번에 날아갔다.
이환은 압살롬을 당겨 자신의 말에 태웠다. 축 늘어진 채 미동도 없는 몸이 그에게 공포를 불러왔다. 한 팔로 압살롬을 단단히 안은 채 고삐를 잡았다.
이환과 압살롬을 태운 말이 질주했다. 가로막는 기사들을 향해 모르겐슈테른이 번득였다. 순식간에 두 명의 기사가 목숨을 잃었다.
“드래곤을 노려라!”
베르나르가 외쳤다. 긴 창이 압살롬을 찔러 들었다. 그것을 걷어내고 기사의 숨통을 끊은 순간 번득이는 칼이 이환의 등을 깊게 베었다. 이환은 뒤쪽을 향해 모르겐슈테른을 휘둘렀다.
퍽!
불쾌한 소리가 들렸으나 이환은 그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고 베르나르를 향해 달려 나갔다. 베르나르가 맞설 준비를 하는 것이 보였다. 격돌하기 직전, 이환은 고삐를 조종해 방향을 바꾸었다.
베르나르의 칼이 이환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는 것과 동시에 모르겐슈테른이 움직였다. 둔중한 무쇠 무기는 이환의 손을 떠나 베르나르의 머리를 향했다.
피하기에는 늦었다. 그렇게 직감한 베르나르는 그것을 막기 위해 칼을 들어 올렸다. 다음 순간 칼이 부서져 나갔다. 모르겐슈테른 특유의 별 같은 머리가 시야에 확대되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세상은 검게 물들었다.
이환은 그대로 말을 달려 그곳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 그의 등 뒤에서 뤼시앵이 악을 썼다.
“성물을 찾는 중인 거 다 알아! 이미 손에 넣은 것도! 형님께서는 경이 원래의 자리에 돌아오기만 한다면 나머지 성물도 손에 넣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제안하셨어!”
이환은 고삐를 힘주어 움켜쥐었다. 불거진 손마디가 새하얗게 질린다. 그러나 말의 속도에는 변화가 없었다.
귀 기울일 가치조차 없는 말이다. 같은 방법에 이미 한 번 속지 않았던가. 무엇보다도 지금은 압살롬이 먼저였다.
이환은 한참을 말달려 도시에 도착할 즈음이었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압살롬은 드래곤이다. 과연 인간 전문의 의사가 그를 제대로 치료할 수 있을 것인가. 갈팡질팡하던 중 압살롬이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압살롬!”
“이환……. 무사…….”
“난 멀쩡해. 지금 널 의사에게 데려갈까 하는데 괜찮겠어?”
압살롬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환은 그의 입술에 귀를 가져다 댔다.
“의사는 됐, 습니다. 힘을 많이, 써서 그런…… 거라 쉬면…… 나아요…….”
결국 이환은 전날 묵었던 여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피투성이의 그들을 보고 질색하는 주인에게는 돈을 찔러 줬다.
이환은 압살롬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뉘였다. 토혈은 멈췄지만 안색은 여전히 나빴다. 붉게 물든 입술과 턱을 닦고 옷을 갈아입혔다. 그러자 압살롬이 느리게 눈을 떠 이환을 보았다.
“치료…….”
“치료? 의사 불러올까?”
“내가 아니라 이환이……. 피 냄새가 납니다.”
조금 나아졌는지 목소리에 제법 힘이 돌아와 있었다. 이환은 안도했다. 그제야 등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이환은 돌아서라는 듯 옷을 물고 늘어진 압살롬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 냈다.
“알았으니까 쉬어.”
“바로 치료를…….”
“알았다니까.”
“등…… 보여 주세요.”
이환은 압살롬이 말하는 ‘치료’가 의사를 통한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마법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는 이환이지만 압살롬이 토혈한 이유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생각은 동굴 안에서 맡았던 피 냄새에까지 뻗어 나갔다. 그때도 마법을 사용한 후 지금처럼 피를 토했을 것이다.
“치료받고 올게.”
입을 악다문 이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칼에 베인 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압살롬이 숨을 삼켰다.
“잠깐……. 기다, 려요. 이환……!”
이환은 말없이 방을 나가 문을 닫았다.
1층에 따로 방을 잡은 뒤 여관 주인에게 말해 의사를 불렀다. 상처가 등을 길게 가로지른 터라 꿰매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치료가 끝난 후 다시 압살롬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압살롬이 자고 있으리라 생각한 이환은 조용히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이 열리자마자 보인 것은 깨어 있는 압살롬이었다. 피로가 가득 고인 눈을 연신 깜빡이던 그는 이환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이……!”
그러나 갑작스럽게 움직인 통에 현기증이 난 압살롬은 그대로 침대에 풀썩 쓰러졌다. 이환은 그에게 황급히 다가갔다.
“몸도 안 좋으면서 왜 갑자기 움직이고 그래. 좀 자긴 했어?”
이환은 압살롬을 잘 뉘어 이불까지 덮어 주었다. 그러자 겨우 현기증에서 벗어난 압살롬이 손을 뻗어 이환의 팔을 잡았다.
“내가 태평하게 잠이나 자게 생겼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나갔는데.”
이환이 치료를 위해 나갈 때까지만 해도 숨이 부족해 끊어지던 말이 이제는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그래서 이환은 그 내용을 조금 늦게 이해하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나가기 직전의 상황이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이환은 심호흡하며 머릿속을 차분히 정리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그러나 지금은 압살롬의 휴식이 최우선이었다.
“치료 잘하고 왔어. 그러니 너도 누워. 제대로 쉬어야지.”
이불에 싸인 가슴을 가볍게 토닥거리자 압살롬이 눈을 치켜떴다. 충혈된 눈이 제법 무섭다. 이환은 손바닥으로 그의 눈을 감겼다.
“어서 자. 이야기는 한숨 자고 일어난 뒤에 해도 되니까.”
피로하긴 했는지 압살롬은 금세 잠들었다. 이환은 잠든 그를 물끄러미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환은 회귀라는 현상을 일으킨 후보를 셋으로 압축했다. 첫 번째는 신 이옐라, 두 번째는 이환 자신, 세 번째는 압살롬이었다.
오늘 이환은 마법의 효과를 똑똑히 확인했다. 과연 수적으로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인간이 몬스터를 전멸시키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은 힘이었다. 그러나 이환은 다른 쪽에 집중했다.
압살롬의 힘은 절대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만약 절대적이었다면 아까와 같은 상황이 됐을 리가 없다. 같은 맥락에서 유한하기까지 했다.
그런 힘으로, 다른 것도 아닌 시간을 되돌린다? 이환은 압살롬이 자신을 두고 그런 모험을 했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생각은 여러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아무리 고심해도 압살롬이 손해났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등에 기대고 있던 압살롬이 힘없이 고꾸라지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이환은 차라리 이옐라가 그를 회귀하게 만들었기를 바랐다.
***
이환은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길에 잠에서 깨어났다. 잠이 덜 깨 몽롱한 정신으로도 알 수 있을 만큼 달콤한 손길이었다. 이환이 아는 한 그에게 이런 식으로 다가오는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이환은 엎드려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예상대로 압살롬이 그를 보고 있었다. 마주친 눈길에서 어색함이 감돌았다.
침묵 속에서 압살롬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잤어요?”
덧문을 단단히 닫아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방 안에서 압살롬은 홀로 반짝이고 있었다. 초췌한 안색 때문인지, 사그라지기 전 마지막으로 빛나는 듯 보인다. 이환은 저도 모르게 팔을 뻗어 압살롬을 끌어안았다.
“이환?”
망설이던 압살롬이 이환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쌌다. 나쁜 꿈이라도 꿨습니까? 나직하게 물어오는 목소리가 한없이 상냥하다.
잠시 그렇게 있던 이환이 조용히 떨어졌다. 그는 압살롬의 안색을 살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때보다 눈에 띄게 나아졌기는 하나 평소의 상태에는 훨씬 못 미쳤다.
대화를 미루는 것이 나을까. 그러나 이런 일은 바로바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망설이던 이환은 결국 많은 것이 함축된 말을 했다.
“……롬.”
압살롬의 얼굴에서 그나마 돌아왔던 핏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무엇이 그리도 두려운지 눈도 맞추지 못한다. 바로 몇 시간쯤 전, 애칭으로 불렀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혹시 그때도 두려움을 억누르고 억지로 웃었던 것일까.
“날 봐, 롬.”
이환은 압살롬의 어깨를 단단히 붙들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가 당장이라도 도망칠 것 같았다.
내리깔린 채인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윽고 그것이 천천히 움직였다. 짙푸른 눈동자가 겨우 이환을 향했다.
“실망했습니까?”
먼저 말을 꺼낸 쪽은 압살롬이었다. 이환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말을 이었다.
“혹은 화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무슨 소리야.”
이환은 압살롬을 찬찬히 주시했다. 아름다운 얼굴을 절망으로 물들인 압살롬은, 두려워 죽겠다는 얼굴로도 이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치 이것이 마지막으로 그를 보는 순간인 것 같은 절박함에, 이환은 눈매를 좁혔다.
이환은 압살롬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 작은 동작만으로도 압살롬은 세상이 멸망한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떨어진 손은 곧장 압살롬의 얼굴로 향했다. 언제나 따뜻했던, 지금은 조금 서늘한 뺨을 감싸자 압살롬이 눈을 크게 떴다.
“롬.”
단 한 글자였으나 압살롬을 멈추기에는 충분했다. 이환은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전부 말해. 내가 억측하지 않도록, 제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