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물어뜯긴 목줄이
사냥개의 발길에 채였다
산간벽지의 작은 여관에서 이환의 흔적을 발견한 후, 뤼시앵은 추적의 이정표를 은발의 남자로 변경했다. 여관 주인이 한 말의 반만큼이라도 아름답다면 어떻게든 눈에 띄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은발 남자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그가 외진 길만 골라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뤼시앵에게 확신을 더했다.
‘그들은 함께 있어.’
이를 악문 뤼시앵이 박차를 가했다. 불안이 그의 몸에서 피로를 앗아갔다. 상당한 속도로 달린 그는 어느 저녁 산코냐 시에 들어설 수 있었다.
도시는 어수선했다. 뤼시앵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엿새 전 새벽, 도둑이 들어와 성물을 훔쳐 갔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병사 여럿과 성직자가 살해당했다.
산코냐 시는 성물과 대성당으로 먹고사는 지역이다. 그것이 사라진 데에다 사람까지 죽었으니 도시 전체가 뒤숭숭할 만했다.
“알렉상드르 경이 가져간 게 아닐까 해.”
뤼시앵이 지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의 등 뒤에 선 위뱅이 물었다.
“확신하시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신의 사자가 신의 물건을 가져가는 데 이유가 있어야 할까? 다 쓸모가 있으니 그런 거겠지.”
뤼시앵은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한 후 위뱅을 내보냈다. 혼자 남은 순간 뤼시앵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이환은, 점점 사라져 가던 표정과는 별개로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천성이 선량한 데다가, 오랜 시간 양질의 교육을 받은 사람답게 바른 가치관을 갖고 있었다.
황실은 그의 그런 면을 파고들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환은 아무 연고도 책임도 없는 이 세계를 위해 무기를 들었고, 제국을 위해 몸을 던졌다.
올곧고, 상냥하며, 굳건한 사람. 갈색 눈동자에는 깨끗한 것만 보며 자라 온 사람 특유의 결벽이 비치곤 했다. 이환이 그런 눈으로 자신을 볼 때마다 뤼시앵은 속이 뒤틀릴 것 같았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저렇게 속을 내비치는 눈이니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환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이 뤼시앵을 불안하게 했다.
다음 날 아침, 뤼시앵은 원하던 정보를 손에 넣었다. 은발 남자의 행적이었다.
“대성당의 접객소에서 닷새를 머무른 후 떠났다고 합니다. 도시를 나간 기록도 확인되었습니다.”
“일행은?”
“순례자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동행했다고 합니다. 이름은 마르탱. 황도 출신의 평민입니다.”
“마르탱이라는 자는 따로 조사하도록. 우리는 곧바로 출발한다.”
뤼시앵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앙다문 붉은 입술이 결연했다.
***
플젠시아의 가을은 북부에서 시작된 폭풍으로 끝을 맺는다. 올해도 어김없이 거센 폭풍이 플젠시아를 덮쳤다.
이환과 압살롬은 토사와 깨진 바위, 뽑혀 나간 나무로 엉망이 된 산속을 달렸다. 폭우가 눈을 가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큭……!”
이환은 낮게 신음했다. 발밑이 불안정하다 싶었는데 결국 미끄러지고 만 것이다. 다급히 손을 뻗어 아무것이나 붙잡았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거친 감촉으로 보아 나무라도 붙잡은 모양이었다.
위험했던 순간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몇 분 전에는 부러진 나뭇가지가 이환이 있던 곳을 후리고 지나갔다. 압살롬이 잡아끌지 않았더라면 뒤통수를 정통으로 얻어맞았을 것이다. 그 이전에는 디딘 곳이 하필 젖은 흙더미라 뒤로 넘어갈 뻔했었다.
빨리 쉴 곳을 찾아야 했다. 튼튼한 고목이라도 찾아볼까 생각하는 이환의 귀에 우렛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번개가 하늘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이래서야 나무 밑이라도 위험하다. 이환은 젖어서 축 늘어진 앞머리를 짜증스럽게 쓸어 넘겼다.
“이환! 이쪽입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압살롬이 외쳤다. 손짓까지 하는 것으로 보아 그럴싸한 무엇인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환은 재빨리 그에게 다가갔다. 중간쯤 가자 야트막하게 뚫린 동굴이 보였다. 이환은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몸을 사정없이 후려치던 비가 사라지자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이환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방수 처리가 된 가방이라 다행이었다. 수건을 꺼내 젖은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던 중, 마찬가지로 몸의 물기를 훔치던 압살롬이 말했다.
“매년 이맘때 폭풍이 남하한다는 걸 잊었습니다. 미안해요, 이환.”
“폭풍이 네 책임인 건 아니잖아. 아니면, 네가 폭풍을 불러온 거야?”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뭐가 문제야.”
퉁명스럽게 말한 이환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냉기가 등골을 타고 올랐다. 몸을 부르르 떤 그가 짐을 뒤지는 때였다.
“그냥 앉으면 춥잖습니까. 이쪽으로 와요.”
바닥에 모포를 깐 압살롬이 이환을 불렀다. 이환이 잠시 망설이는데, 압살롬이 덧붙였다.
“여기에 앉아서 이환의 모포를 덮으면 더 따뜻할 거예요.”
추위가 이환을 움직였다. 그는 짐에서 모포를 꺼내 들고 일어섰다. 짧은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압살롬의 옆에 앉아 모포를 펼쳤다. 내려앉은 모포가 둘의 어깨를 동시에 감쌌다.
“저, 저는 괜찮은데…….”
점점 기어드는 말투가 압살롬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동굴 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직접 맞을 때는 전신을 얼게 만드는 폭우라도, 닿지만 않으면 아늑한 자장가가 된다. 게다가 근처에는 뜨끈한 온기도 있었다. 이환의 몸이 온기를 좇아 느리게 기울었다.
툭.
귓가에 무엇인가가 가볍게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쩐지 뺨 부근이 따뜻한 것도 같다. 지금 이곳에서 이 정도로 따뜻한 것이라고는 하나뿐이었다. 그것에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환은 몸을 바로 하고는 슬그머니 곁눈질했다. 마침 압살롬도 이환을 돌아본 터라 두 사람의 시선이 정확히 마주쳤다.
이환은 고개를 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그럴 수가 없었다. 숲에서 보냈던, 언젠가의 어색했던 밤이 생각났다. 그때도 이러했다.
뜨거운 눈, 얼어붙은 손가락, 매끄러운 머리카락.
이름이 불렸던 순간, 어지러울 정도로 강렬한 정동이 온몸을 내달렸다. 스쳤던 입술은 과실처럼 붉은 탓인지 딱 그만큼 향그러웠다.
“……이 차가운…… 조금 더 ……까요?”
압살롬이 뺨을 붉힌 채 뭐라고 말했다. 어느새 그의 입술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던 이환은 화들짝 놀랐다.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당황한 입술이 아무렇게나 움직였다.
“그, 렇지.”
“이쪽으로 와요. 아니, 내가 움직일게요.”
곧바로 압살롬이 다가붙었다. 둘 사이에 남았던 약간의 거리가 사라졌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이환의 어깨를 감쌌다. 맞닿은 부분에서 온기가 전해졌다.
“역시 붙어 앉으니까 훨씬 따뜻하죠?”
그제야 이환은 압살롬이 뭐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와 뿌리치자니 이상해 보인다. 게다가 지금의 이환에게 압살롬의 높은 체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달콤한 유혹이었다.
문득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게 생각났다.
회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당시 이환은 혼자 막사 안에 있었다. 가죽 한 장 너머에서 기사들이 내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복잡한 감정이 물밀 듯 밀려왔었다. 그래서 막사를 벗어나 아무도 없는 곳으로 향했다.
퓌니르 기사단과 팔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다. 아무리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이라고는 하나, 그들에 대한 감정이 그저 복수심일 리가 없었다.
당시에는 그런 자신에게 화가 나 그 감정의 정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감정이 조금 가라앉은 지금에 와서야 자신이 외면한 것을 돌아볼 수 있었다.
겨우 인정한 그 감정의 이름은 외로움이었다.
그때 압살롬이 나타났다. 그는 망토를 벗어 이환에게 걸쳐 주었다. 망토에 남은 온기도, 등을 가로질러 어깨에 닿은 팔도 피부가 저릿할 만큼 따뜻했다.
그래서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때까지 느끼던 스산한 외로움에 압살롬의 온기가 닿았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환이 압살롬에게나마 매달려야 할 만큼 타인에게 굶주렸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지금 압살롬은 그때와 같은 자세로, 그때와 동일한 온도를 전해 주고 있다. 이환은 차디찬 몸에 천천히 번져 가는 온기를 관조했다. 거미가 중앙에서 바깥으로 거미줄을 펼쳐 가듯 서서히 그리고 넓게 전해지는 온기가 그저 기꺼웠다.
분명 닿는 것조차 거부했던 때가 있었다. 그게 언제부터 변했을까. 이환은 여정을 거슬러 올랐다.
어제 폭우 속을 헤맬 때? 솔직히 그때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산에 들어왔을 때? 그때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름 모를 숲에서 입 맞출 뻔했……. 이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스스로도 알 만큼 체온이 확 올라갔다.
‘그 이전. 그 이전이야.’
괜히 면구스러워 여정을 건너뛰었다.
농가에 들러 음식을 구했을 때. 그때는 농부의 딸이 압살롬을 수줍게 흘금거렸다. 막상 시선을 받은 장본인인 압살롬은 이환을 슬그머니 당겨 제 뒤에 세웠다.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었지만 그날의 일만은 이상하게 선명했다. 하지만 그때도 아닌 것 같았다.
조금 더 기억을 거슬러 오르자 한 헛간이 떠올랐다. 압살롬이 이환에 대한 아주 조금의 이해를 보여 준 곳이었다.
‘고작 그걸로?’
비참하고 허탈했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는데 압살롬이 안절부절못하는 게 느껴졌다. 괜히 짜증이 난 이환은 그에게 좀 더 다가붙었다. 그러자 압살롬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환은 압살롬의 허벅지를 부러 가볍게 내리치며 말했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
“으……. 이환은 바보예요.”
토라진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이환의 머리 위에 무엇인가가 가볍게 얹혔다. 비단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 소리가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압살롬의 머리인 듯했다.
온기에 감싸인 몸이 저절로 풀어졌다. 다시 잠이 이환을 찾아들었다.
“말을 미리 풀어 주길 잘한 것 같아.”
이환이 중얼거렸다. 숨길 수 없는 나른함이 깃든 목소리였다.
“계속 데리고 다녔으면 오히려 짐만 됐을 거야. 이 동굴에도 데리고 들어올 수 없었겠지. 네 말대로 하길 잘했어.”
이환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 바람에 두 사람의 거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지만 이환은 알지 못했다.
“앞으로 한동안 걸어야 할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나요?”
“그야, 뭐…….”
이환의 목소리가 뚝뚝 끊어졌다. 그것을 들은 압살롬이 작게 웃었다.
“졸리면 자도 됩니다. 어차피 이 비는 한동안 그치지 않을 테니까요.”
이환은 그 말에 거역하지 않았다. 압살롬의 곁에서 잠을 설친 게 언제였냐는 듯 눈이 감겼다.
이 편안함은 경계해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풀어진 채 압살롬의 온기를 좇았다. 이환은 저도 모르게 압살롬의 어깨에 얼굴을 부볐다. 맞닿은 부분에서 떨림이 전해졌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압살롬을 보았다. 붉어진 뺨과 방황하는 눈동자가 이환의 심장을 간지럽혔다. 저 표정마저 거짓일까. 이환은 도무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한번 그렇게 여겼기 때문인지 아니면 잠결이기 때문인지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압살롬이 과거에 보였던 행동이 전부 거짓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 혹은 기대 같은―
정신이 가물가물해질 즈음이었다. 부드러운 것이 그의 이마에 닿았다. 망설이듯 다가온 그것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금세 떨어진 그것의 온기가 아쉽다.
어쩌면 막사에서 빠져나왔던 그날, 압살롬이 거미줄의 첫 실을 뽑아 이환의 몸에 붙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압살롬의 말대로 폭풍은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이환은 압살롬이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동굴 안쪽으로 걸어갔다. 동굴 입구나 바닥에서 짐승이나 몬스터의 흔적을 거의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대로 동굴 안쪽에 먼저 이곳을 이용한 사람의 자취가 남아 있었다. 이환은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모았다. 모포도 찾았으나 냄새가 너무 지독해 사용하기에는 무리였다.
이환이 나뭇가지를 들고 돌아가자 압살롬이 반색했다. 곧 동굴 안에 작은 모닥불이 피워졌다.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작은 냄비로 물을 끓인 압살롬이 그 안에 찻잎을 던져 넣었다. 무거운 습기 사이로 차향이 차분하게 퍼졌다.
이윽고 두 개의 나무잔에 연한 갈색의 차가 담겼다. 그중 하나를 이환에게 건넨 압살롬이 먼저 자리에 앉았다. 어젯밤 그가 깔았던 모포 위였다. 이환도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환은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야 자신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압살롬의 옆자리에 앉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슬쩍 곁눈질하자 압살롬의 옆얼굴이 보였다. 차에서 올라온 희미한 김 때문인지 베일 한 겹을 사이에 둔 것도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보고 있자 압살롬이 고개를 숙였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가 붉었다. 이환은 시선을 슬쩍 내렸다. 그러자 자신의 것보다 아주 조금 높은 위치에 있는 어깨가 보였다.
비교하거나 측정한 적이 없어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압살롬의 체구는 기사인 이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깨로 봤을 때는 키도 조금 더 클지 모른다. 즉, 어디로 봐도 남자다.
그런 그가 고백했을 때 놀라기는 했어도 기분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역시 얼굴 때문인가.’
뤼시앵이 떠올랐다. 지금도 반반하기는 하지만, 당시의 뤼시앵은 누가 봐도 소녀 같은 외모의 소유자였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게도 그에게 첫눈에 반했었다.
이환은 자신의 감정을 깨닫자마자 인정했다. 대한민국이 남성에게 요구하는 가치관을 생각하면 상당히 의외인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뤼시앵의 외모에서 남성을 연상케 하는 구석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인 듯싶다.
압살롬의 고백도 같은 맥락이었을까. 그가 호남형의 외모였다면 싫었을지 모른다. 이환은 시선을 다시 올렸다. 그러자 귀뿐만이 아니라 뺨 전체가 붉어진 얼굴이 보였다.
툭.
심장이 튀었다. 희미한 울림이었다. 그러나 이환의 귀에는 천둥처럼 들렸다.
‘말도 안 돼.’
그는 이 느낌을 알고 있었다.
그때 압살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동굴 천장이 야트막한지라 그의 머리가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이환이 말리기 위해 입을 여는 때였다.
“설거지! 하고 오겠습니다.”
미소 짓는 압살롬의 입술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시뻘게진 얼굴 때문인지 그저 가련해 보였다. 이환은 충동적으로 따라 일어섰다.
“됐어. 내가 할게.”
여행은 둘이 하는데 온갖 뒤치다꺼리는 혼자 도맡는 게 말이 되는가. 이환은 부려 먹겠다는 당초의 결심은 잊은 채 그렇게 생각했다. 행동이 앞서는 족속인 기사답게 그는 압살롬을 지나쳐 설거지거리를 들었다.
비 오는 날의 설거지는 쉬웠다. 적당히 닦은 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자 폭우가 헹궈 줬다. 그럼에도 손이 차가워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환은 빨갛게 언 손가락을 보며 그간 압살롬이 한 고생을 생각했다.
설거지가 끝난 그릇을 들고 돌아서는 때였다. 방금 전 그 자리에 붙박인 압살롬이 보였다. 어째서인지 나라 잃은 충신 같은 얼굴이었다.
“이젠 내가 필요 없나요?”
이환이 대답을 못 한 것은 압살롬의 말이 너무 뜬금없기 때문이었다. 그 짧은 침묵의 사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압살롬의 얼굴에 점점 어두워졌다.
압살롬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시선도 아래를 향했다. 응달에서 핀 꽃이 천천히 시드는 것 같다고, 이환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시든 꽃처럼 바랜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래도…… 그래도 난 당신에게서 못 떨어집니다.”
“뭐라고?”
압살롬의 말은 여전히 뜬금없었다. 이번에는 이환도 반응을 했다. 가만히 있으면 압살롬이 한도 끝도 없는 바닥으로 떨어져 내릴 것 같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목소리는 늪처럼 깊고 축축했다.
“전에 말했잖아요. 난 절대…….”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일단 말을 끊은 이환은 압살롬에게 다가섰다. 그러자 손에 든 그릇이 덜그럭거렸다. 그것을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이환이 허리를 펴는 때였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압살롬이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엄청난 악력이었다. 이환은 신음을 삼켰다. 그것을 용케도 알아차린 것인지 압살롬이 손아귀에서 힘을 풀었다. 이때다 싶은 마음에 이환이 말했다.
“네가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그야 이환이…….”
“내가?”
설명하려다 감정이 북받쳤는지 압살롬은 말끝을 흐렸다. 하얀 이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환은 희게 질렸다가 피가 몰려 다시 붉어지는 선명한 변화에 잠시 눈을 빼앗겼다.
“……까.”
이환이 정신을 차렸을 때 압살롬의 말은 이미 끝나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의 그를 보며 이환은 진심으로 곤란해졌다.
“그, 음. 미안한데.”
이환이 말을 고르자 압살롬의 얼굴이 암담함으로 물들었다. 당장이라도 동굴을 뛰쳐나갈 것 같아서, 이환은 저도 모르게 압살롬의 팔을 붙잡았다.
“뭐라고 했는지 못 들었어. 다시 한 번…….”
“안 그래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이런 것마저 못 하게 되면 곁에 있을 수가 없잖습니까!”
압살롬이 습기 어린 소리로 외쳤다. 이환은 귀를 의심했다.
“뭐? 아, 아니. 듣긴 들었는데…….”
“한 번 더 말할까요?”
“아니. 됐어. 들었다고.”
따지듯 물은 압살롬에게 이환은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했다. 그러자 고개를 푹 숙인 압살롬이 중얼거렸다.
“너무해요, 이환. 진짜 너무 잔인해요…….”
작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말에 얼룩진 비참함이 이환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작은 온기에 매달리고 짧은 사과에 마음을 푼 자신을 알고 비참하다 생각했다. 그랬으면서 온갖 억지를 부려 동행을 허락받은 압살롬의 마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자괴감이 이환을 휩쓸었다.
동시에 그는 깨달았다.
‘믿어 버렸구나.’
가랑비가 옷을 적시듯, 천천히 자신을 물들인 온기의 비를.
“그런 거 아냐. 난 그냥, 너 혼자 고생하는 것 같아서…….”
“쓸모 많으니까 이용하라고 했잖습니까. 개처럼 부리겠다고 말해 줘서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럼 난 잡일이라도 해서 내 쓸모를 조금이라도 인정받아야 하잖아요.”
이환은 신음을 흘렸다. 압살롬이 한 말의 내용이 다소 난감했던 탓이었다. 이환이 ‘개처럼 부려 먹을 거야.’라고 말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 말이 압살롬의 입에서 나오니 이상하게 도착적으로 들렸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아무튼 난 당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을 거니까 그렇게 알고…….”
이환은 압살롬의 입을 막았다. 커다란 손바닥에 새하얀 얼굴의 반이 가려졌다. 남은 반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며 이환이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야.”
그러나 이환은 도무지 생각한 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망설임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압살롬을 괴롭히겠다고 다짐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제는 그의 비참한 얼굴을 보는 게 싫었다. 언제 여기까지 마음이 변해 버렸을까. 그러나 이환은 그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기 어려웠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압살롬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이환은 이 시간이 압살롬에게 고문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겨우 마음을 굳혔다.
“일단, 미안하다. 네가 그렇게 생각할 줄은 몰랐어. 거기까지 몰아붙인 것도 미안해.”
무엇인가가 손바닥을 살살 간지럽혔다. 그 정체를 생각하다가 이환도 뺨을 조금 붉혔다. 지금 상황에서 그럴 수 있는 게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넌 내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것처럼 말했지만 나는 나름대로 이것저것 시키고 있어.”
또다시 손바닥이 간지러웠다. 이환은 압살롬의 입을 더 세게 막았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지금은 일단 내 말 들어. 내가 뭘 시킬 거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다. 네가 날 어떤 사람으로 봤는지도 모르겠어. 말해 두는데 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냐. 세상을 멸망시키거나 몬스터를 몰살하거나, 뭐 그런 건 바라지 않아.”
이번에는 짙푸른 눈이 이환을 직시하며 항변했다. 이환은 쓴웃음을 흘렸다.
“내 말 들으라니…… 압살롬?”
압살롬의 은빛 눈매가 젖어 들더니 이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이환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투둑.
투명한 눈물이 이환의 손등에 떨어졌다. 그는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손등이 화상이라도 입은 듯 화끈거렸지만 지금은 그 감각보다 우선해야 할 것이 있었다.
“아, 압살롬.”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리던 이환이 다시 손을 뻗었다. 찬물의 여파로 아직 차가운 손이 압살롬의 뺨에 닿았다.
이번에는 압살롬이 눈을 크게 떴다. 그 바람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눈물 몇 방울이 더 흘렀다. 이환은 홀린 듯이 그것을 닦았다. 저 눈물을 이대로 바닥에 떨어뜨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대리석 같은 뺨에 거친 손가락이 스친다. 투박한 외양과는 달리 섬세한 손길이었다. 눈물이 더 이상 떨어지지 않자 이번에는 그 길마저 지우겠다는 듯 뺨을 타고 올라갔다.
이환의 손가락이 눈매에 닿는 순간 압살롬이 어깨를 떨었다. 정신을 차린 이환이 얼른 손을 거뒀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터라, 그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왜, 왜 울고 그래.”
마치 탓하는 것 같은 말이 나왔다. 후회하는 이환에게 압살롬이 대답했다.
“두 번 다시 그런 표정은 못 볼 줄 알았습니다.”
“그런 표정이라니?”
“방금 웃었잖아요.”
압살롬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잠시 넋을 잃었던 이환이 입을 열었다. 이전에도 분명 웃었다. 그렇게 대답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압살롬의 표정이 그의 입을 막았다.
최근 이환이 지었던 미소는 거짓이거나 혹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니었다. 압살롬은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이환은 상냥해요. 그래서 자기한테 잘못한 사람마저도 다 용서하고 이해하려 노력하죠.”
“그건 아니…….”
“하지만.”
부정하려던 이환을 심상치 않은 목소리가 가로막았다. 압살롬이 결연한, 그래서 더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나에게는 그러지 마세요.”
쿵.
다시 한 번, 이번에는 확실하게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유가 뭔데.”
회귀 전, 이해 겨울의 초입에 압살롬은 이환에게 고백했었다. 딱 이 시기였다. 그러나 지금의 압살롬에게서는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너무 괴롭혀서, 그래서 정이 떨어진 거라면. 이환은 이를 악물었다. 압살롬이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는 것마저 그런 의미로 보였다.
“내가 날 위해 움직이게 되니까요. 그것만은 안 됩니다.”
뜻 모를 소리였다. 캐물으려던 이환은 압살롬이 참담한 얼굴로 고개를 젓자 물러나고 말았다.
***
다음 날, 동틀 무렵이 되자 빗발이 눈에 띄게 가늘어졌다. 이환과 압살롬은 해가 뜨자마자 동굴을 나와 산을 내려갔다.
콜록콜록.
이환은 얕은 기침을 내뱉었다. 앞서가던 압살롬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몸이 좋지 않으면 바로 말해 줘요.”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그렇게 말한 압살롬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환은 몰래 가슴을 문질렀다. 통증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성물을 모두 손에 넣기 전에 완치될 것 같았다.
‘일단 이 산부터 벗어나야겠지만.’
이환과 압살롬은 현재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중이었다.
“이쪽 길도 막혔군요.”
걸음을 멈추고 앞쪽을 살피던 압살롬이 말했다. 이환은 그의 어깨 너머를 확인했다. 폭풍의 타격을 고스란히 받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번에는 저쪽으로…….”
이환은 하던 말을 삼켰다. 압살롬이 몸을 돌리면서 둘 사이의 거리가 대번에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가 보자.”
가까스로 말을 이으며 돌아섰다. 압살롬이 그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길을 잃은 게 다행일지 모른다. 이환은 어제부터 감돌던 어색한 공기를 절감하며 그렇게 생각했다.
이 산에 들어오기 전에도 분위기가 어색했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그때가 무산된 입맞춤에 대한 어색함이었다면 지금은 일촉즉발의 어색함이었다.
이게 터지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환은 바위를 디디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오후쯤에야 산을 벗어날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산을 넘자마자 제법 큰 도시가 나왔다.
흙과 땀으로 범벅인 채 여관에 들어섰다. 이쯤 되니 씻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이환은 당당히 목욕을 요구했다.
추가금을 얹어 주고 주문한 물은 만족스러울 만큼 뜨거웠다. 목욕통에 기대 머리를 젖히자 잿빛 천장이 보였다. 그 위로 압살롬이 그려졌다.
아직은 아니다. 이환은 고개를 저었다. 뤼시앵을 위해서라면 죄도 뒤집어쓸 수 있다고 생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저 곁에 있는 유일한 온기라 착각하는 것뿐이다.
그때 압살롬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나에게는 그러지 마세요.’
이환은 늘어졌던 몸을 바로 했다. 당시에는 압살롬의 무거운 분위기와, 바로 직전까지 이환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생각 때문에 곧바로 특정 방향으로 연결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니 이상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아니지, 나한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한다고 했지. 그런데 자기한테는 그러지 말라고…….”
찬찬히 대화의 맥락을 살피자 위화감이 느껴졌다.
“압살롬이 자기 자신을 위해 움직이면 안 되는 이유는 또 뭐지?”
한 번 조각났다 간신히 이어 붙인 믿음에 시커먼 잉크 방울이 떨어졌다.
목욕을 끝낸 이환은 방을 나섰다. 마시장에 가야 했다.
문 앞에 압살롬이 서 있었다. 이전 같으면 이환을 부르러 왔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괜히 초조해졌다.
“가자.”
절로 퉁명스러운 소리가 나왔다. 조금 아차 싶었지만 이미 말한 후였다. 이환은 짜증스럽게 걸음을 뗐다. 이런 것에 일희일비한다는 자체가 애써 부정한 가능성이 사실이라 인정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났다.
“저, 이환.”
이환에게 따라붙은 압살롬이 입을 열었다. 이환은 그를 돌아보았다.
“머리가 젖었어요. 날도 추운데 이대로 나갔다간 감기 걸립니다. 아까도 기침했잖아요.”
“……네가 말려 주든가.”
“네?”
압살롬이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이환은 대답 대신 몸을 돌렸다. 방으로 들어가자 압살롬이 문지방을 넘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들어와.”
압살롬은 이환이 재촉하고서야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이환은 마른 수건을 찾아 그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압살롬은 망설일 뿐 받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뭐든 한다더니, 이제 와서 이런 일은 하기 싫어졌어?”
압살롬은 이환이 그렇게 말한 후에야 수건을 받아 들었다. 이환은 조금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그의 검은 머리카락 위에 하얀 수건이 얹혔다.
톡톡.
대충 문지르고 마는 이환에 비해 압살롬의 손길은 섬세했다. 그는 이환의 머리카락을 수건 사이에 끼워 연신 두드렸다. 귀찮아서라도 못 할 작업이었다.
그러던 중 압살롬의 손가락이 이환의 귀를 스쳤다. 놀란 이환은 어느새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코앞까지 다가온 아름다운 얼굴이 보였다. 그도, 그의 눈동자에 비친 이환도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내 눈처럼 흰 뺨에 홍조가 번졌다.
“읏……!”
외마디 신음을 흘린 압살롬이 물러섰다. 그 바람에 수건이 바닥에 떨어졌다. 이환은 허리를 숙여 수건을 집었다. 손끝까지 맥동이 꽉 들어찬 기분이었다.
아니긴 뭐가 아냐. 이환은 자조했다.
그 시각, 도시를 향해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강행군이었는지 다들 행색이 초라했다.
도시의 검문소 앞에서 멈춘 그들 중 선두에 선 사람이 신분증을 내밀었다. 심드렁한 얼굴로 그것을 확인한 보초가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토, 통과하십시오!”
무리는 빠르게 검문소를 지나쳐 도시 안으로 진입했다. 뒤집어쓴 후드 아래에서 황금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
겨울의 초입이라 해가 빠르게 기울었다. 이환과 압살롬은 적금빛으로 물든 도시를 가로질러 마시장으로 향했다. 거리에 생각보다 사람이 많은 터라 그들은 인파를 헤치며 걸어야 했다.
인파의 이유는 마시장에서 알게 되었다. 기분 좋은 얼굴의 상인이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축제 보러 온 거요?”
“아뇨. 그저 지나는 길입니다.”
“그래도 이왕 왔으니 보고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딱 오늘이 구경하기 제일 좋은 날이라오. 나도 곧 갈 건데, 안내 필요하면 말하구려.”
그렇게 말하며 상인은 옆에 놓은 등을 가리켰다. 압살롬은 고개를 저었다.
이환과 압살롬은 각기 말을 끌고 여관으로 향했다. 사람이 하도 많아 말을 타고 가는 것은 무리였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말발굽에 사람이 밟히거나 걷어차일 수도 있었다.
손에 등을 든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아까 마시장에서 본 것과 비슷한 모양의 등이었다. 이환은 압살롬을 향해 물었다.
“다들 등을 들고 있는데, 뭔가 의미가 있는 거야?”
“……이 도시에서는 매년 이맘때 등불을 들고 다리를 건너는 행사를 합니다. 그러면서 강이 얼지 않길 기원하는데, 제법 장관이라 멀리에서도 일부러 보러 온다고 하더라고요.”
머뭇거리던 압살롬이 대답했다. 입으로는 웃고 있었으나 뺨이나 눈매는 굳은 채였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보고 갈까?”
“네?”
“다리 건너는 거. 유명하다잖아.”
뭐라도 같이 구경하면 분위기가 좀 나아질 것 같았다. 이환의 생각을 알아차린 것인지 압살롬이 살짝 웃었다. 이번에는 진짜 웃음이었다.
“그럴까요? 사람이 많을 테니 일단 말은 여관에 두고 가죠. 식사도 거기에서 하고 갈까요?”
“그게 좋겠어.”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이환과 압살롬은 맞은편에 다가오는 무리를 알지 못했다. 말을 탄 채, 망토의 후드를 올려 써 모습을 가린 자들이었다. 그들의 주변을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불평이 튀어나왔다.
“아, 거…….”
“이렇게 혼잡한데 말이라니. 내려서 걸으면 다리가 부러지기라도 하나.”
“윽! 이봐요. 조심 좀……!”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의 행색에 있었다. 그들은 낡은 망토를 걸친 데다가, 사람이고 말이고 할 것 없이 모두 먼지투성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자신들과 비슷한 신분이리라 생각했다.
선두에 선 자가 주변을 훑었다. 고압적인 눈동자였다. 어림짐작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일부는 슬슬 멀어지기도 했다.
무리 중앙에서 피곤에 찬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곁에 붙은 자가 나직하게 말했다.
“조금만 힘내십시오, 뤼시앵 님. 곧 시장 관저에 도착합니다.”
“걱정하지 마, 위뱅 경. 난 아직 멀쩡해.”
붉은 입술이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인파로 붐비는 대로에서, 두 무리는 각각 다른 방향을 향해 움직였다.
이환과 압살롬의 모습은 말의 불쑥 솟은 머리에 가려졌다. 그것은 다시 말해 그들의 시야도 제한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환은 여느 때라면 충분히 알아봤을 실루엣을 놓쳤다.
두 무리가 서로를 스쳐 지났다. 점차 멀어지는 그들 중 누구도 온 길을 돌아보지 않았다.
***
행사는 압살롬이 말했던 대로 장관이었다. 긴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등불을 든 사람들이 섰다. 어둠을 입은 강물은 섬뜩할 만큼 검었다. 그 위로 노란 불빛이 길게 미끄러지자, 마치 강물 속에 무수한 빛의 기둥이 드리워진 것 같았다.
이환으로서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광경이었다. 늦게까지 야간 자율 학습을 하고 돌아오던 밤, 버스 안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보곤 했기 때문이다.
먼 기억에 취했기 때문일까. 누구에게도 한 적 없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전에 말이야. 내가 고향에서 살았을 때. 그때도 이런 걸 본 적이 있어.”
“……그렇군요.”
“하루 종일 공부하다가 지쳐서 버스, 아니 마차에 타 다리를 건너면 강물 위에 저렇게 빛이 길게……. 꼭 저것처럼 말이야. 진짜 그때는 피곤해서 그런지 별생각 없이 봤었는데.”
지금은 예쁘게 보이네. 이환은 마지막 말을 삼켰다. 그것까지 말하면 분위기가 요상해질 것 같았다. 혼자 속으로 면구스러워 하는데 압살롬이 입을 열었다.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요?”
타고나길 낮은 목소리가 한층 가라앉아 있었다. 이환은 그를 돌아보았다. 옆얼굴로만 판단한 압살롬은 어딘지 괴로워 보였다.
“다시 보고 싶은 모양이군요.”
압살롬이 말을 이었다. 이환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별로?”
“거짓말하지 않아도…….”
“지금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향수니 뭐니 해도, 그 밤의 풍경을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압살롬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어느덧 행사가 끝났다. 그들은 여관으로 향했다. 이환은 이 잠시의 휴식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더 북적거렸다. 이환은 벌써 네 번째로 사람에 치인 압살롬의 팔을 잡고 골목 안으로 이끌었다. 마침 막다른 곳이라 사람이 없었다. 압살롬이 미소 지었다.
“이환은 사람 많은 거 싫어하죠?”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굳이 피할 정도로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늘 이리로 들어선 것은 사람들이 일부러 압살롬에게 돌진하는 게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이환?”
이환이 물끄러미 응시하자 압살롬이 고개를 기울였다. 성인 남성에게 어울릴 법하지 않은 동작이 그에게는 참 잘 어울렸다. 이환은 내심 감탄했다.
“계속 그렇게 보면 좀 부끄러운데요.”
압살롬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존재하는 얼룩을, 그저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덮고 못 본 체하는 쪽이 옳을까. 이미 이환은 과거에 비슷한 길을 간 적이 있었다. 그 길의 끝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죽음이었다.
회귀한 후에는 의혹을 그저 덮을 줄밖에 몰랐던 과거의 자신을 비웃었다. 그러나 다시 갈림길에 선 지금, 그는 같은 것으로 고민하고 있다.
의혹을 품은 채 걸어간다면 어디에서 복병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우려가 함께할 것이다. 그러나 의혹을 드러내면 상대가 돌아설지 모른다.
게다가 그게 다가 아니었다.
‘과연 이 녀석은 날 어떻게 생각할까.’
이전에는 그토록 명확하게 보이던 것이, 감정을 자각한 지금에 와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생각은 자연스럽게 압살롬의 마음이 식었기 때문이라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만약 압살롬이 날 좋아한다면. 그렇다면 나는 이번에도 귀환을 포기해야 하나.’
첩첩산중이란 이런 것일 터다. 이환은 희미한 한숨을 흘렸다.
어느덧 사람이 많이 줄어들었다. 이환과 압살롬은 골목에서 나왔다. 둘 사이에 친밀한 침묵이 감돌았다.
여관으로 향하는 대로를 걷던 중이었다. 압살롬이 갑자기 이환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압살롬의 팔 안에 갑작스럽게 끌려 들어간 이환은 잠시 어리둥절하며 시선을 들었다. 조금 높은 곳에 압살롬의 눈이 있었다. 이환은 짙푸른 눈에서 매서운 냉기를 발견했다.
“왜 그래?”
대답인 양, 압살롬이 팔에 힘을 주었다. 넓은 어깨, 든든한 팔, 뜨끈한 체온. 모든 것이 이환을 푹 감싸는 듯했다. 내내 타인을 보호해 왔던 이환은 묘한 기분이 되었다. 그는 괜히 헛기침을 해 간질간질한 느낌을 지웠다.
“압살롬?”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압살롬에게서 이제까지 느낀 적 없는 향기가 풍겼다.
풀과 들꽃을 한데 짓이긴 듯한 향에는 숲과 흙, 비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향수를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압살롬이 가진 본연의 체향일 것이다. 깊게 들이마시자 머리 한구석이 멍해졌다.
‘이대로는 위험해.’
이환이 압살롬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때였다.
“알렉상드르 경…….”
그 순간 이환의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는 압살롬의 어깨를 꽉 잡았다. 이환. 압살롬이 작은 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경황이 없던 이환은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깨닫지 못했다.
잠시 가만히 있던 이환이 압살롬의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압살롬은 잠깐 저항하는가 싶더니 이내 그를 놓아주었다. 이환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왜 저 기척을 느끼지 못했을까. 최근 위험한 일이 없어 해이해진 건가. 이환은 자신을 질타하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뤼시앵.”
한때 그저 사랑스럽다 여겼던 얼굴이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시장 관저에 들어갈 때만 해도 뤼시앵은 그곳에서 하루 묵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를 연신 기분 나쁘게 힐금거리는 시장을 알아차리자 한시도 그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결국 뤼시앵은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미소년으로 유명한 뤼시앵은 음욕에 찬 눈으로 그를 보는 자들이 익숙했다.
황자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부자의 첩이 되었거나 매음굴의 골방에서 뒹굴고 있을지 모른다. 언젠가 뤼시앵의 형제가 한 말이다.
어떤 자들은 뤼시앵에게 음욕도 애정의 한 단면이니 받아들이라고 말했다. 충고하는 척하고는 있으나 막상 종용하는 짓은 포주나 다름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 말이 진실이라고 믿었었다. 만약 이환이 뤼시앵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믿고 있을지 모른다.
뤼시앵은 이환의 눈빛을 떠올렸다. 뜨겁고 다정하며 진지했던 눈. 간혹 서리는 욕망마저 한없이 곧았다. 뤼시앵은 그가 그런 눈으로 볼 때마다 몸 여기저기가 근질거렸다. 기쁨이나 달가움과는 거리가 먼 그것을 당시에는 거부감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감각과 지금 뤼시앵이 느끼는 불쾌함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거부감조차 아니라면 도대체 그 감각은 무엇일까.
“사람이 많으니 조심하십시오.”
위뱅이 뤼시앵의 말고삐를 슬쩍 잡아당기며 말했다. 말발굽이 어린아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났다.
“큰일 날 뻔했네. 고마워, 위뱅 경.”
“아닙니다.”
능숙한 기수인 기사들이야 그렇다 쳐도, 뤼시앵의 기마술은 그들에 훨씬 못 미쳤다. 위뱅이 그런 뤼시앵을 내내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뤼시앵은 말을 모는 데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십 년쯤 전, 어렸던 아들을 마차 사고로 잃었다는 위뱅은 아이들의 안전에 민감했다.
‘그 아들이 금발에 녹색 눈이랬지.’
그게 아니었다면 위뱅은 지금 다른 곳에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거리가 제법 한산해졌다. 그제야 한숨 돌린 뤼시앵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곳에 그 사람이 있을까. 특별히 예민한 것도 아니고, 기사처럼 기감을 수련한 적도 없는 뤼시앵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만약 이곳에 그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가 순순히 자신을 따라올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왜 알렉상드르 경은 나에게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
그때였다. 그곳에만 달이 비친 듯, 눈부신 은빛이 시야에 들어왔다. 뤼시앵은 반사적으로 그 주변을 살폈다.
“아…….”
소리가 사라지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퇴색되었다.
고요한 잿빛 속에서 오직 한 사람, 색조를 가진 남자가 뤼시앵의 시야에 확대되었다. 검은색과 갈색 그리고 밀색으로 이루어진 남자였다. 다른 감정에 앞서 환희가 차올랐다.
“알렉…….”
뤼시앵은 이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움직인 자가 있었다.
하얀 손이 이환의 어깨를 잡았다. 이환은 그 손이 이끄는 대로 움직여 다른 이의 품에 들어갔다. 뤼시앵은 굳은 채 그들을 응시했다.
이내 이환이 있던 자리를 누군가가 차지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은발이었다. 뤼시앵이 내내 곱씹던 것이었다.
목격자 모두가 찬탄했던 은발의 미인. 그는 목격자들의 말대로 어느 한 부분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는 남자였다. 뤼시앵 정도로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뤼시앵은 이를 악물었다.
‘그를 놔.’
속으로 되새겼다. 남자가 얼마나 아름답든 이환은 뤼시앵의 것이었다. 그의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증오, 원망, 저주. 남자에게서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응축된 살의가 전해졌다. 뤼시앵은 뱀 앞의 개구리처럼 바짝 얼어붙었다.
그때 이환이 남자를 올려다보며 무어라고 말했다. 그러자 남자가 그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짙푸른 눈에 새로운 감정이 스쳤다.
‘설마 저 남자도…….’
위기감이 뤼시앵을 엄습했다. 그는 두려움을 원동력 삼아 가까스로 입술을 움직였다.
“알렉상드르 경…….”
뤼시앵이 불렀음에도 이환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왔어. 그러니 이쪽 좀 봐 줘. 소리가 되지 못한 말은 전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뤼시앵은 이름 외에는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이환이 멀어질 것 같았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이환이 느리게 남자를 밀어냈다. 그 손길에 담긴 상냥함이 뤼시앵을 초조하게 했다.
‘알렉상드르 경이 내게 돌아오지 않은 이유라는 게 설마…….’
아니다. 이환은 결코 변심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저 남자가 억지를 부려서, 상냥한 이환이 어쩔 수 없이 들어주고 있는 것뿐이다. 그래야만 했다.
그동안 외면했던 생각의 가지가 마구 뻗어 나갔다. 뤼시앵은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은 이환에게 확인하면 된다. 그때까지도 그는 이환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환이 돌아섰다. 뤼시앵은 그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뤼시앵을 볼 때마다 넘쳤던 애정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 리 없어.’
시선이 점점 집요해지던 중, 이환이 고개를 들었다. 갈색 눈동자가 뤼시앵을 담았다. 뤼시앵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늘 속내를 투명하게 내비추던 눈동자가 가을밤처럼 서늘한 빛을 띤 채 뤼시앵을 향했다.
“오랜만이다, 뤼시앵.”
짧은 인사말에서 뤼시앵은 절망을 느꼈다.
이환의 말을 마지막으로 두 무리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행인들조차 슬금슬금 멀어졌다. 이윽고 주변에 인적이 사라질 즈음 이환은 한숨을 쉬었다.
회귀 전, 절벽에서 떨어진 이환을 찾기 위해 황실이 한 일이라고는 수색대를 보내는 것뿐이었다. 당시 그는 실종된 지 42일 만에 귀환했는데, 그때까지도 황실에서는 추적대를 파견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적어도 그만큼의 거리는 벌렸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행적을 감추기 위해 주로 험한 길을 선택했다. 이렇게 빨리 따라잡힐 리가 없었다. 중간부터 얼굴을 드러냈는데 그게 문제였을까.
그때 압살롬이 바싹 다가붙었다. 그의 숨결이 이환의 귀를 스치고 뺨을 간지럽혔다. 반사적으로 어깨를 흠칫 떠는데 압살롬이 말했다.
“모두 죽일까요?”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듯한 거리에 비해 말소리는 작지 않았다. 기사들 쪽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환은 뤼시앵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말만 하세요. 그럼 당장이라도 없앨 수 있습니다.”
제발, 이환. 뒤이은 말은 이환의 귀에만 들리도록 작았다. 흡사 애원하는 듯한 어조였으나 그의 눈은 여전히 뤼시앵을 향했다.
그가 느리게 입을 여는 때였다. 압살롬이 팔로 이환의 허리를 휘감았다. 무심코 신음할 만큼 강한 힘이었다. 조금 떨어뜨리려 하자 눈에 띄게 어두워진 목소리가 이환을 불렀다. 결국 그는 압살롬의 팔에 안긴 채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내 생각으로는 네가 날 쫓아온 것 같은데, 이유가 뭐지?”
다른 사람의 앞에서는 철저히 예의를 지켜 온 이환답지 않은 언행이었다. 누구보다도 뤼시앵이 그것을 절감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대답했다.
“우, 우리가 이유가 있어야 찾는…… 그런 사이였어?”
그러나 뤼시앵의 눈에 비친 이환은 여전히 서늘했다. 그는 다급히 말을 이었다.
“걱정했어! 경이 절벽에서 떨어졌다고 해서 다, 다쳤으면 어쩌나…….”
간신히 말을 잇는 뤼시앵을 압살롬이 칼날 같은 시선으로 보았다. 그 눈을 마주하자 이유 모를 공포가 뤼시앵을 조여 왔다.
두려움에 차 헐떡이는 뤼시앵을 이환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죽었다고 생각하지 그랬어. 그럼 너도 여기까지 힘들여 올 필요 없고, 나도 편했을 텐데.”
곡해하려야 곡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기사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뤼시앵 대신 위뱅이 응대했다.
“그 말, 배신이라 받아들여도 좋습니까?”
이환은 뤼시앵을, 위뱅을, 그들의 일행인 기사들을 훑어보았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삐뚜름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이게 배신이 가능한 관계였던가?”
“무슨…… 의미입니까.”
“먼저 신뢰가 있어야 배신도 있다는 뜻이야.”
뤼시앵의 최측근인 위뱅이라면 아는 것이 많을 터다. 이환은 그렇게 생각했다. 예상이 맞았는지 위뱅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환은 다시 뤼시앵을 보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신록처럼 깨끗했던 녹색 눈에 얼룩진 절망이 뤼시앵의 심정을 대변했다. 이환은 그에 반응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나 무딘 칼로 저미는 듯한 통증은 그가 원하는 대로 지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뤼시앵.”
이환이 부르자 뤼시앵이 곧장 반응했다. 이환은 무덤덤한 척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간의 인연이 있으니……. 샤를에게 가서 내가 죽었다고 전해. 그러면 놔주지.”
그 말에 양쪽 모두 반발했다. 이환은 당장이라도 튀어나갈 듯 움직이는 압살롬을 끌어안았다.
맞은편에서는 뤼시앵이 나섰다. 독기가 새파랗게 서린 얼굴을 보니, 그것을 원동력 삼아 압살롬의 압박에서 벗어난 모양이었다.
“놔주고 말고를 결정하는 건 더 강한 쪽에서 하는 거 아냐? 이쪽은 날 제외하고도 일곱 명이야. 전부 기사고, 이중 넷은 샤를 형님이 붙여 주셨지. 경 혼자 이 모두를 이길 수 있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뤼시앵은 제법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환의 대답은 무정했다.
“그래.”
이환의 눈으로 본 기사들은 대부분 수준 미달이었다. 특히 황태자가 붙였다는 자들이 그러했다.
실력이 없는 자는 상대의 실력도 깨닫지 못한다. 그를 반증하듯 기사들은 승리를 확신하는 얼굴로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이환은 혼자 어두운 표정인 위뱅을 흘금 보았다.
“개죽음이 소원이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렇게 해 주지.”
칼자루를 쥐며 그렇게 말했다. 그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위뱅이었다.
“물러나야 합니다.”
“무슨 말이야, 위뱅 경. 왜 우리가 물러나야 해?”
위뱅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 의미를 깨달은 뤼시앵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다른 기사들은 아니었다.
두 명의 기사들이 한 번에 쇄도했다. 말을 탄 그들과 지상의 이환. 누가 봐도 유리한 것은 전자였다. 그러나 거꾸러진 것은 이환이 아닌 그들이었다.
시커먼 잔상이 허공을 그었다. 거친 타격음이 이어졌다.
쿵! 쿠쿵!
연달아 말에서 떨어진 기사들이 신음했다. 순식간에 끝난 격돌에 뒤따라 달려들던 기사들이 멈칫거렸다. 이환은 그들을 향해 말했다.
“빨리 데려가서 치료하는 게 좋을걸.”
경계하며 움직인 기사들이 동료를 데려갔다. 다친 데를 찾던 중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피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통증을 호소하는 소리에 확인하니 갈비뼈를 비롯하여 몇 개나 되는 뼈가 부러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칼을 뽑지 않은 것 같은데…….”
한 기사가 중얼거렸다. 만약 이환이 칼로 공격했다면 두 기사는 이미 불귀의 객이 되었을 것이다. 신체 능력이 몬스터에 필적한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명백한 이형. 기사들의 눈에 혐오가 서렸다.
뤼시앵은 기사들의 사기가 시시각각으로 저하되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초조해하는 그에게 이환이 말했다.
“다음에는 봐주지 않을 거다.”
스릉.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이환의 칼은 자루도 집도 전부 검었다. 그 사이에 보이는 저 짧은 은빛은 분명 칼날이리라. 기사들 쪽에서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대로 물러나 나에 대해 함구한다면 조용히 보내 주지. 자, 선택해라. 이 자리에서 죽을 거냐, 아니면 물러나 비밀을 지킬 거냐.”
뤼시앵은 흔들리는 눈으로 이환을 봤다. 하나밖에 없는 선택지를 들이밀며 고르라 종용하는 저런 남자는 모른다.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해를 예고하는 자도 모른다. 그는 저도 모르게 말을 물렸다.
이환의 입매가 비웃듯 움직였다.
“그럼 잘 가라.”
말을 마친 이환이 제 일행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등을 공격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뤼시앵에게 등을 돌린 이환은 압살롬에게 향했다. 압살롬의 눈에는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기사들과 격돌하기 전, 이곳에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는데 그게 싫었던 모양이다. 이환은 그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가자, 압살롬.”
압살롬은 순순히 그를 따랐다. 그래서 이환은 그가 평소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명백한 착각이었다. 이환은 여관에 도착해서야 그것을 깨달았다.
자기 방에 들어간 이환이 자연스럽게 문을 닫으려는 때였다. 따라 들어온 압살롬이 그보다 먼저 문을 닫았다. 불을 켠 이환은 그를 향해 돌아섰다.
“할 말이라도 있……!”
쾅!
힘이 잔뜩 들어간 손아귀가 이환의 어깨를 움켜잡고 벽으로 밀쳤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하는 이환에게 압살롬이 제 몸을 바짝 붙여 왔다. 가까워진 몸에서 체향이 짙게 피어오른다. 이환은 머리가 아득해졌다.
“어째서 막았습니까.”
“뭐?”
그래서 처음에는 압살롬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반사적으로 반문하자 압살롬이 이를 으득 갈았다.
“이번에는 죽일 이유도 확실했잖습니까. 그런데 왜 날 막은 건가요? 그렇게…….”
압살롬의 악력이 한층 강해졌다. 지옥 바닥을 긁는 듯 어두워진 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나 그 사람이 사랑스러운가요? 그런 꼴을 당했으면서, 아직도?”
그쯤에서 이환이 제정신을 찾았다. 그는 이 대화의 맥락을 살폈다. 간신히 진정시켰던 심장이 다시 두방망이질 쳤다.
“지금 그 말. 무슨 의미야?”
“무슨 의미냐고요? 그걸 꼭 내 입으로 들어야겠습니까!”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소리가 이환에게 확신을 줬다. 그는 압살롬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듣고 싶어.”
말한 이환 자신이 부끄러워질 만큼 간절한 목소리였다. 그걸 압살롬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짙푸른 눈이 크게 뜨였다. 이환은 그것이 놀람을 담고 흔들리는 것을, 그리고 이내 가라앉는 것을 지켜봤다.
압살롬이 이환의 어깨를 놓고 물러섰다. 그 바람에 멀어진 온기가 허망하다. 이환은 허공에 머문 손을 느리게 떨어뜨렸다.
“압살롬.”
“그러지 마세요.”
“뭘 그러지 마.”
이환은 성큼 앞으로 나아가며 손을 뻗었다. 그대로 압살롬의 멱살을 잡아 벽에 밀치고, 방금 전 그가 그랬던 것처럼 거리를 좁혔다.
“제대로 말을 해. 내가 뭘 하지 말아야 하는 건데?”
압살롬이 차분한 눈으로 이환을 봤다. 이환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힘을 푸는데, 압살롬이 입을 열었다.
“상냥하고 정 깊은 이환. 과연 이옐라가 인간을 위해 내려보낸 사람답군요. 하지만 나에게는 다정하게 굴지 마세요. 당신이 그럴 때마다 나는 정말…… 견딜 수가 없습니다. 당장 땅속이든 하늘 위든,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어져요.”
이환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순식간에 느려졌다. 실망은 딱 기대했던 만큼 뼈아팠다.
“뭐 하자는 거냐, 너.”
“글쎄요. 정말이지, 나는 뭘 하고 싶었던 걸까요. 적어도 이런 날을 꿈꾼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압살롬은 고개를 축 숙인 채 중얼거렸다. 비참한 목소리였다. 허탈한 와중에도 신경이 쓰였던 이환이 그를 불렀다.
“압살롬.”
“……성물. 성물만 손에 넣으면 됩니다. 그렇죠? 저들이 당신을 발견했으니 행적이 알려지는 건 금방입니다. 얼른 움직여야 해요. 바로 출발할까요?”
압살롬은 이환의 짐이 있는 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더니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여장을 꾸리기 시작했다. 부리나케 달려간 이환이 그의 손에서 짐을 되찾았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집에 돌아가겠다면서요. 그걸 위한 여행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루라도 빨리 성물부터 손에 넣어야죠.”
이환은 다시 짐을 빼앗으려는 압살롬을 피했다. 귀환을 포기할 생각은 아직 없다. 그러나 압살롬의 말에 기분이 상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부러 차갑게 말했다.
“나에게서 그렇게 빨리 떨어지고 싶은 줄은 몰랐는데. 말하지 그랬어. 원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때였다. 압살롬의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이환은 당황하여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눈물을 훔친 압살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닌 걸 알잖습니까. 왜 자꾸…….”
아닌 걸 안다고? 이환의 속에서 울컥 치밀어 오른 말이었다. 그는 언제 당황했냐는 듯 다그쳤다.
“내가 뭘 아는데? 넌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서, 내가 안다는 건 어떻게 알아?”
압살롬의 표정이 굳었다. 이환의 안에서 의심이 슬슬 몸을 불려 갔다. 그는 그것을 뿌리치고 말을 이었다.
“난 지금 네가 뭘 말하는지 모르겠어. 네가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으니까. 너도 마찬가지잖아. 내가 뭘 생각하는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 넌 알아?”
다시 한 번 압살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제야 이환은 청람의 눈 속에서 두려움을 읽었다. 가장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기대하는 게 두려워?”
생각은 말의 뒤를 이었다. 흩어진 채 의미를 잃었던 퍼즐 조각이 드디어 제자리를 찾았다.
“내가 다정하게 대하면 기대하게 될 것 같아? 그렇게 되면 네 멋대로 움직일 것 같아서 두려운 거야? 견디다 못해 도망치고 싶을 만큼?”
압살롬이 눈을 질끈 감았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고혹적이기는커녕, 잘못을 들킨 어린아이 같았다.
“말해 줘, 압살롬.”
실로 다정한 목소리였다. 압살롬이 어깨를 떨었다.
“아까 했던 말의 의미. 난 그게 정말로 듣고 싶어.”
압살롬은 붉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굳게 다물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선택한 것은 굴복이었다. 상대가 이환인 이상, 처음부터 압살롬에게 승산은 없었던 것이다.
“그 사람을…… 질투해요. 왜냐하면 이환, 당신이 그 사람을 아끼고 사랑하니까. 당신은 그를 위해 뭐든 전부 해 왔잖습니까. 그런데 같은 걸 하겠다는 내 마음은 왜 모르겠다고 그래요…….”
말이 이어질수록 목소리는 점점 꺼져 갔다. 결국 거의 속삭이듯 말을 맺은 압살롬이 이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환은 압살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들꽃과 풋과일, 바람 냄새가 섞인 달콤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그 향기에 취해 저도 모르게 다가가는데 압살롬이 이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상하게도 그가 매달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환은 언젠가 잠결에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귀여워요.’
그때 압살롬이 느꼈던 기분을 알 것 같았다.
“얼굴 좀 들어 봐.”
압살롬의 어깨가 크게 뛰었다. 이환은 소리 없이 웃었다. 공기를 통해 그 소리를 전달받은 압살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기대와 두려움이 섞인 눈이 이환을 향했다. 이환은 희미하게 남은 눈물의 궤적을 지우며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그런 꼴이 되었는데도 아직 사랑한다면 난 천하에 둘도 없는 멍청이겠지.”
“그럼 지금은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이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대와 두려움에 환희가 섞였다. 그것들이 서로 밀어내기를 반복했다. 이환은 제가 바라는 승리를 기다리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다른 생각은 하지 마. 네가 지금 가장 알고 싶은 게 무엇인지, 그것만 말해.”
압살롬은 눈을 질끈 감았다. 라벤더색 그늘을 얹은 눈꺼풀이 부들부들 떨리다 차분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에 드러난 것은 간절함뿐이었다. 이환은 그가 무슨 생각을 거쳤기에 결국 저것이 떠올랐는지 궁금해졌다.
“나를…… 친구로든 뭐든 아주 조금이라도 좋아하는지…….”
당장이라도 스러질 듯한 목소리였다. 스멀스멀 기어 나온 화를 이기지 못한 이환이 잇새로 쏘아붙였다.
“너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환은 절망으로 까맣게 뒤덮이는 얼굴을 보며 손을 뻗었다. 멱살을 잡고 강하게 당기자 압살롬이 경황없이 가까워졌다. 짙푸른 눈이 크게 뜨였다.
“읍!”
처음으로 닿았던 그때, 봄바람처럼 스치기만 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이가 부딪치고 입술이 찢어졌다. 이환은 입안에 감도는 피비린내를 무시한 채 으르렁거렸다.
“키스할 거니까 입 벌려.”
“이, 환?”
“너야말로 날 친구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면.”
이환은 압살롬의 멱살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멍한 얼굴로 끌려온 압살롬은 코앞에서 멈춘 이환의 얼굴에 정신을 차렸다.
“자, 잠시만. 이게 무슨……?”
어차피 더 가까워질 생각은 없었으므로 이환은 그의 옷깃을 순순히 놓아주었다.
그럼으로써 선택은 고스란히 압살롬의 몫이 되었다.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방금 이환이 나한테, 그걸 말이라고 하냐고…….”
“그리고?”
“그리고…….”
사실 이환은 이쯤에서 압살롬이 얼굴을 붉힐 거라 생각했다. 새하얀 얼굴이 자신으로 인해 붉어지는 건 제법 기분 좋은 광경이었으므로 슬쩍 기대하기도 했다. 큰 오산이었다.
크게 뜨였던 짙푸른 눈이 가늘어졌다. 언뜻 동공이 세로로 선 것도 같았다. 착각일까. 이환이 그렇게 생각하는 때였다.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흰 목에서 툭 불거진 울대가 움직였다. 그것이 묘하게 요염한 터라, 이환은 압살롬의 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환.”
고작 등 하나로 전부 밝히지 못해 어둑어둑한 방에 압살롬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등골이 오싹 떨렸다.
“잘못 선택한 겁니다. 당신은 이러면 안 되었어요. 자신이 한 말의, 이 행동의 무게를 알았더라면 결코 이러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뭐?”
“당신을 위해 오늘의 일은 전부 지워야…….”
“압살롬!”
이환이 이를 악물었다. 그때 압살롬이 말을 이었다.
“마땅하지만. 미안하게도 난 그럴 생각이 없어요.”
압살롬이 내리깔린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청람색 홍채 한가운데에 박힌 검은 동공이 세로로 길었다. 압살롬이 가진 드래곤으로서의 부분이다. 이환은 그것을 깨달았다.
“이환, 내가 조금 욕심을 부려도 될까요?”
신 앞에 나아간 자가 이러할까. 깊고 어두운 목소리에서 구원을 바라는 간곡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이환은 압살롬에게 신 같은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간신히 움직여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긴장을 품은 웃음소리와 함께 압살롬이 가까워졌다. 아까부터 이환을 자극하던 체향이 더 진해졌다. 뜨거운 체온이 종이 한 장도 안 되는 거리를 넘어 이환에게 전해졌다.
시각, 청각, 후각 그리고 촉각. 남은 하나의 감각마저 충족을 바라 날뛴다. 이환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압살롬의 눈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럼 다른 걸 물어보죠.”
“뭔데.”
이환이 턱을 들었다. 그에 맞춰 압살롬도 고개를 틀며 물었다.
“키스해도 됩니까.”
이환은 대답 대신 압살롬의 뒤통수를 붙잡고 당겼다. 기다렸다는 듯 달려든 압살롬이 그의 입술을 단번에 삼켰다. 거칠게 들어선 압살롬의 혀를 달게 맞이해 휘감았다. 움찔한 압살롬이 더욱 깊게 파고들었다.
두 혀가 경쟁적으로 얽혔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신음이 뒤섞였다. 좀 더. 이환은 압살롬과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정신없이 혀를 빨고 타액을 삼켰다. 열이 올라 뜨거워진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제정신을 찾은 것은 벽에 등이 닿으면서였다.
키스하면서 넋이 나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뤼시앵과 키스할 때는 혹시라도 그가 겁먹지는 않았을까 살피느라 제대로 몰두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걸 알아차렸는지 압살롬이 혀로 입안을 세게 휘저었다. 뜨거운 혀가 입천장을 길게 훑어 오자 허리께가 욱신거렸다. 이환은 눈을 꾹 감았다 뜨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손을 들어 압살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느리게 반복하자 날뛰던 혀와 입술이 조금씩 얌전해졌다.
뜨겁기만 하던 입맞춤이 조금씩 달콤함을 띨 즈음, 이환은 고개를 슬쩍 젖혔다. 겨우 뗀 입술이 다른 의미로 욱신거렸다.
금세 젖은 입술이 따라붙었다. 이환은 그 위에 가벼운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러자 압살롬이 불만스럽게 목을 울렸다.
“잡아먹겠다, 아주.”
이환이 입매를 얄궂게 끌어올리며 속삭였다. 잡아먹고 싶은 마음이야 이쪽도 마찬가지였으나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환은 압살롬의 젖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그러던 중 손끝에 오돌토돌한 감촉이 느껴졌다. 처음 이가 부딪쳤을 때 다친 부분인 듯했다.
아플 것 같아서 얼른 손을 떼려는데 압살롬이 입을 벌렸다. 평소보다 붉어진 입술이 이환의 엄지손가락을 삼켰다. 젖은 점막이 거친 손가락을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색정적으로 접히는 은빛 눈매를, 이환은 잠시 넋을 잃고 응시했다.
“……요망하기는.”
겨우 정신을 차린 이환이 중얼거렸다. 손가락에 힘을 주자 압살롬은 순순히 입을 열어 주었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배워 왔어?”
“배우다니요. 이환이 잡아먹어도 된다고 해서 그렇게 한 것뿐입니다만.”
“내가 언제…….”
이환은 기가 차서 중얼거리다가 그만 웃고 말았다. 압살롬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진짜 이럴 때가 아닌데.”
“아, 그렇군요. 당장 짐을 챙길까요?”
압살롬이 언제인지도 모르게 떨어뜨렸던 짐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이환은 그 손을 잡았다. 가볍게 당기자 압살롬이 그의 품에 와 안겼다.
“그 문제로 잠시 갈 데가 있어.”
“같이…….”
“나 혼자.”
팔 안의 몸이 뻣뻣해졌다. 이환은 압살롬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확인만 하고 올 거야.”
이환이 팔을 풀자 이번에는 압살롬이 그를 부둥켜안았다. 이환은 슬쩍 고개를 돌려, 바로 앞에 있는 뺨에 입을 맞추었다.
“가능한 빨리 돌아올 테니까.”
귓가에 속삭이자 이번에야말로 압살롬의 뺨이 물들었다. 다시 한 번 입 맞추고 압살롬의 팔을 잡았다. 부드럽게 떼어 내자 이번에는 얌전히 물러났다.
“다녀올게.”
압살롬이 대답 없이 웃었다. 이환은 문을 열었다. 나가기 전,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도 그는 그린 듯이 웃고 있었다.
탁.
문이 닫혔다. 이환은 얼른 걸음을 뗐다. 마음먹은 이상 한시라도 빨리 볼일을 끝낸 후 돌아오고 싶었다.
거리로 나간 그는 망토에 붙은 후드를 올려 썼다. 마침 밤이 깊은 시간이라 얼굴이 완전히 감춰졌다. 여관에서 제법 떨어졌다 싶을 즈음, 행인을 하나 붙잡았다. 이 근처에서 신분이 높은 자가 묵을 만한 곳을 묻자 행인은 두 곳을 대답해 주었다.
이환은 선택지에서 시장 관사를 제했다. 아까 뤼시앵이 향하던 방향과는 정반대였기 때문이다.
남은 하나의 선택지인 여관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 이환은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뤼시앵 일행은 이환과 헤어진 후 인근 여관으로 들어갔다. 의사를 불러 부상자를 치료한 후, 그들까지 모두 뤼시앵의 방에 모였다. 이후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지만 방 안에는 침묵만 감돌았다.
이 인원으로는 이환을 사로잡을 수 없다. 결국 그를 기사를 충원해야 한다는 말인데, 시간이 늦어 도시의 모든 출입문이 봉쇄되었으니 사람을 보낼 수도 없다. 결국 무엇도 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들 중 두 기사가 서로를 향해 눈짓했다. 샤를이 뤼시앵에게 붙인 자들이었다. 총 넷이었으나, 둘이 무모하게 달려들었다 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그들만 남았다.
그들은 모두 뒷배가 있어 황실 기사단에 적을 두고는 있으나 실력과 행실로 인해 도태된 자들이었다. 허송세월하던 그들은 이번 일을 처음 들었을 때 잠시의 외유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말이나 제대로 탈 수 있을까 싶은 5황자는 물집과 근육통에 시달리면서도 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 게다가 죽었으리라 생각한 이환이 정말로 살아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고생길이 더 길어질 게 뻔했다.
“5황자님.”
기사들은 뤼시앵을 향했다. 독기 서린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는 모습이 어딘지 섬뜩하다. 기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이 인원으로는 더 이상 알렉상드르 경을 쫓을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지간한 증원으로도 어림없을 테지요.”
“적어도 기사 열 명, 아니 스무 명 정도의 증원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 정도로 충분하겠어? 아까 보니까 거의…….”
“그렇지. 아무리 기동성을 위해 갑옷을 입지 않았다지만 그렇게 단번에 해치울 줄이야.”
대화는 뤼시앵을 제치고 이어졌다. 이전부터 뤼시앵을 수행하던 기사들마저 동조했다.
위뱅은 침통한 눈으로 그들을 봤다. 오늘의 격돌도 아무런 명령 없이 선행되었다. 이들이 뤼시앵을 얼마나 얕잡아 보는지를 알려 주는 단적인 예였다. 그러나 그것을 꾸짖어야 할 장본인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기사 중 하나가 헛기침을 했다. 방금 전까지 가장 큰 목소리로 떠들던 자였다.
“조용히, 조용히. 여기서 우리끼리 이래 봤자 결론은 나지 않는다고. 그래서 말입니다만, 5황자님? 저희는 일단 황궁에 귀환하여 다시 제대로 준비한 후 추적을 계속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만 5황자님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뤼시앵은 이번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기사들의 얼굴에 불만이 서리는 때였다.
“너무 예상대로라 조금 허탈한데.”
이곳에서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음성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한 점에 집중되었다. 언제 들어온 것인지, 이환이 굳게 닫힌 문에 기대서 있었다.
“알렉상드르 경!”
이때껏 어떤 말에도 묵묵부답이던 뤼시앵이 대번에 반응을 보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한 걸음 뗐다. 그런 뤼시앵을 위뱅이 만류했다.
“놔!”
“안 됩니다!”
위뱅이 눈짓했다. 그제야 뤼시앵은 이환의 오른손이 칼자루에 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오늘 들었던 말이 꼬리를 물듯 떠올랐다.
이환의 말을 생각해 낸 것은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뿐인 문 앞에는 이환이 버티고 섰다. 그렇다고 창문으로 뛰어내릴 수도 없었다. 이곳이 여관의 최상층인 6층이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은 저마다 무기를 들고 공격에 대비했다.
이환이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심드렁한 얼굴이 지루한 일이라도 하러 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한 기사가 떨리는 음성으로 외쳤다.
“보, 보내 준다고……!”
“보내 준다고 했지. 이대로 얌전히 돌아가 나에 대해 함구한다면 말이야. 하지만.”
이환의 칼날이 느리게 모습을 드러냈다. 기사들의 눈에는 조잡하게 비칠, 동네 대장간에서나 볼 법한 칼이었다.
“너희가 하는 말을 들으니 다음번에는 더 귀찮아질 것 같아서. 그럴 거라면 본보기를 보이는 게 낫지 않겠어?”
이환은 그렇게 말하며 팔을 떨쳤다. 새것인 듯 깨끗한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순간이었다.
탁.
아주 작은 소리였으므로 제대로 들은 기사는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첫 공격의 신호를 놓치고 말았다.
빨려들듯 움직인 칼이 가슴을 관통했다. 등 뒤로 삐죽 솟은 칼끝이 피와 지방에 젖어 번들거렸다. 단번에 폐를 관통당한 기사가 입을 벌렸다. 숨을 쉴 생각이었겠지만 입에서는 거품 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음 순간, 칼은 폐와 심장을 잇달아 가르고 몸 밖으로 빠져나왔다.
칼은 죽은 기사가 바닥에 몸을 뉘이기도 전에 다음 희생양을 찾아갔다. 단번에 목과 몸이 분리된 기사가 휘청거렸다. 뤼시앵은 품에 날아와 안긴 머리통을 내던지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뤼시앵 님!”
위뱅이 그를 끌고 문으로 향했다. 부상자를 제외하고 남은 기사의 수는 자신을 포함해 다섯. 최대한 시간을 벌어 뤼시앵만이라도 빼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뒤이은 네 명분의 단말마가 미약한 희망마저 사그라뜨렸다.
쾅!
이환은 위뱅의 머리를 움켜쥐고 벽에 박았다. 일순 커졌던 위뱅의 눈이 힘없이 감겼다. 그가 기절한 것을 확인한 후 뤼시앵의 발아래에 던졌다.
“뤼시앵.”
당연한 일이지만 뤼시앵에게서는 제대로 된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덜덜 떠는 모습이 안타깝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식어 가는 사랑 특유의 모진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지금 눈앞에서 떨고 있는 뤼시앵보다, 여관에 혼자 남은 압살롬이 더 신경 쓰였다. 새로 시작된 사랑을 해칠까 걱정되어, 지난 사랑의 찌꺼기조차 용납 못 하는 무정함이라니. 이환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뤼시앵을 발끝으로 걷어 바닥에 눕혔다. 가슴 위에 발을 올리자 공포로 얼룩졌던 얼굴에 치욕이 스쳤다. 이환은 칼을 들어 뤼시앵에게 겨눴다.
칼날에 맺혔던 피가 빠르게 굴러 칼끝에 모이더니, 그예 뤼시앵의 얼굴에 떨어졌다. 미적지근한 그것에 그가 몸을 떨었다. 이환은 비웃듯 입매를 끌어올렸다.
“이런 것조차 견디지 못할 거였으면 아까 내 말을 듣지 그랬어. 그랬다면 적어도 저들이 개죽음당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아, 아, 알렉상드르 경…….”
점점 가까워지는 칼끝을 보며 뤼시앵이 이환을 불렀다. 그러다 이환이 들은 척도 하지 않자 큰 소리를 쥐어짰다.
“아, 알렉상드르 경! 내, 내 말 좀…… 내 말 좀 들어 봐!”
이환이 뤼시앵의 코앞에서 칼을 멈췄다. 뤼시앵은 떨리는 눈으로 그것을 보다 조심스럽게 시선을 들었다. 갈색 눈과 녹색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가까워질수록 잘 보이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랑이나 공포, 미움 같은 것들. 그러나 갈색 눈동자는 그저 깨끗했다. 정말 자신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지워 버린 것일까. 뤼시앵은 이 순간 그것이 가장 절망스러웠다.
침묵 속에서 이환이 한숨을 쉬었다.
“시간 없으니까 할 말 있으면 빨리해.”
뤼시앵의 시선이 이환의 입술에 닿았다. 평소와 달리 붉게 부푼 데다가 작은 피딱지까지 앉아 있었다. 뤼시앵의 머릿속에 누군가가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는 그 남자야?”
황실에서 나고 자란 뤼시앵조차 이제껏 본 적 없는 미모였다. 문득 비틀린 의문이 떠올랐다.
“그자를 사랑하기라도 해?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그 정도 외모의 소유자가 이제껏 아무 소문도 없었다는 게. 그 사람이 아무 꿍꿍이 없이 접근했다고 어떻게 믿어?”
이환의 표정이 굳어졌다. 뤼시앵은 묘하게 통쾌한 심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작은 승리는 얼마 가지 못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지. 네가 그렇게 접근했으니 그도 그럴 거라 생각하는 거냐?”
뤼시앵이 숨을 들이켰다. 아까도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들었으나 황실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넘어갔었다. 그러나 지금의 말은 그렇게 넘기는 것이 불가능했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왜 경에게……. 대체 무슨 오해를…….”
뤼시앵은 떨리는 입술을 애써 끌어올렸다. 이환은 그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
“더 말해 봐야 서로 구질구질해지기만 하겠지. 이제 그만하자.”
“아냐. 아냐, 알렉상드르 경! 나는 경을 진심으로……!”
뤼시앵이 이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환은 칼의 옆면으로 그의 손을 쳐 냈다.
“그렇게 부르지 마. 내 이름은 알렉상드르가 아냐.”
이환은 뤼시앵의 가슴에서 발을 치웠다. 그러고는 쓰러진 위뱅을 툭툭 걷어차 깨웠다.
“마음 같아서는 너까지 전부 죽여서 후환을 없애고 싶지만, 정말 이번만 봐주지. 그러니 돌아가서 제대로 전해. 알렉상드르 경은 죽었다고.”
이환은 그대로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미리 벗어 두었던 망토를 뒤집어써 몸에 튄 피를 가렸다.
그 길로 여관을 빠져나온 이환은 왔던 길과는 반대 방향으로 향했다. 그가 향한 곳은 압살롬과 함께 왔었던 강이었다. 밤이 늦은 터라 강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옷을 벗은 이환은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물은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가웠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몸을 씻었다.
머리까지 깨끗하게 감은 후 피가 튄 옷을 빨았다.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알았지만 적어도 냄새만이라도 없애고 싶었다.
문득 뤼시앵이 생각났다. 처음 사람을 죽인 때, 그의 손에 구원받았다 여겼다. 뤼시앵을 사랑한다 여긴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랬는데 오늘 그 뤼시앵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이환은 쓰게 웃었다.
핏물이 다 빠져 희미해질 즈음 강에서 나왔다. 젖은 옷을 한껏 비틀어 짠 후 다시 걸쳤다. 물에서 나온 후 조금 올라갔던 체온이 다시 내려갔지만 이 역시도 참았다.
벗어 두었던 망토를 다시 집어 들었다. 몸에서 옮은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것은 중간에 버리고 갈 생각이었다.
“이제 돌아가자.”
압살롬에게. 그 생각을 하자 피로한 몸에 활력이 돌았다.
이환은 여관 복도에 들어서기 전까지 어느 방으로 가야 할까 따위를 생각하고 있었다. 필요 없는 고민이었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스며들듯 조용히 들어갔다.
이환의 말대로 압살롬은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환은 눈을 꼭 감은 압살롬을 내려다보았다. 평화로운 얼굴을 보자 혼자 갔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발과 흰 얼굴이 어둠 속에서 곱게 떠올랐다. 문득 이환은 행적이 들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런 얼굴을 옆에 끼고 있었으니 걸어 다니는 광고탑이나 다름없지 않았겠는가.
마른 옷으로 갈아입은 후 압살롬의 옆자리에 파고들었다. 압살롬의 덕분에 이불 속이 뜨끈뜨끈했다. 이대로 달라붙으면 압살롬이 추울 것 같아서 몸이 따뜻해지길 기다렸다. 그러자 그 잠시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압살롬이 다가붙었다.
“안 자고 있지?”
뻗어 오는 뜨거운 팔이 대답이었다. 압살롬은 이환의 허리를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이환은 그의 어깨를 느리게 토닥거렸다. 파고들듯 연신 머리를 가슴에 부비적거리던 압살롬이 중얼거렸다.
“몸이 차가워요.”
“이제 겨울이니까.”
“물 냄새도 납니다.”
“아까 같이 강에 갔었지.”
압살롬은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환은 그 침묵이 더 켕겼다. 하지만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자니 마음에 걸리는 게 너무 많았다.
사람을 죽이는 자신을 압살롬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다. 압살롬이라면 이 말을 듣는 순간 그 너머의 이유까지 단숨에 파헤칠 것 같았다. 그것만큼은 싫었다.
“오래 기다렸어?”
달래듯 이마에 입 맞추며 말했다. 미안해. 이어진 사과가 조용히 흩어졌다. 잠시 가만히 있던 압살롬이 곧 얕은 한숨을 쉬었다.
“비겁해요.”
“알아.”
“다음번에는 이렇게 얌전히 있지 않을 겁니다.”
“그거 무섭……!”
압살롬이 이환의 어깨를 잡고 끌어내렸다. 이환의 입술이 막히고 입안으로 뜨거운 혀가 밀려들어 왔다. 마구 휘저으며 핥아 대는 혀에 휘둘려 주다가, 틈을 봐 치고 들어갔다.
휘젓기만 하던 압살롬의 혀를 감았다 풀고, 혀끝을 달콤하게 간지럽히다 아래쪽으로 파고들었다. 어느새 빼앗긴 주도권에 압살롬이 목을 울렸다. 그러나 그 소리는 금세 낮은 신음으로 바뀌었다.
머리가 멍해질 즈음 입술을 뗐다. 뜨거운 숨결이 젖은 입술을 달궜다. 마찬가지로 헐떡이던 압살롬이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왜 이렇게 익숙합니까?”
발갛게 물든 눈매가 색정적이다. 이환은 그것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그래서, 싫었어?”
압살롬이 분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숨결이 차분해질 즈음에야 대답이 돌아왔다.
“……아뇨.”
눈을 깜빡인 이환이 입매를 허물어뜨렸다. 압살롬이 그런 그를 노려보았다. 평소처럼 동그랗게 돌아온 동공이 보였다.
“웃지 마세요.”
“안 웃어, 안 웃어.”
그러나 삼키고 뱉는 숨마저 웃음기가 역력했다. 급기야 돌아눕는 이환에게 압살롬이 쏘아붙였다.
“언젠가 나 때문에 흐물흐물해진 얼굴을 볼 겁니다. 두고 보시죠.”
“그래. 기대할게.”
간신히 웃음을 멈춘 이환이 다시 압살롬을 향해 누웠다. 그러자 압살롬이 토라진 얼굴로 꾸물꾸물 다가왔다. 이환은 그의 어깨를 잡아 품 안으로 당긴 후 머리에 입 맞추었다.
“잘 자, 압살롬.”
“……잘 자요, 이환.”
이환의 턱 끝에 답례가 닿았다. 그는 눈을 감았다. 명치끝에 얹혀 있던, 살인에 대한 죄책감이 슬그머니 무게를 덜었다.
***
여관에서의 살인 사건은 조용히 처리되었다. 제국으로서는 이환이 제국을 배신하고 도주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져서 좋을 게 없었고, 시장으로서도 타국 황족의 호위 기사가 도시 안에서 살해당했다는 것은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위뱅은 뤼시앵을 데리고 인근 성으로 자리를 옮겼다. 뤼시앵은 벌써 사흘째 방에서 두문불출이었다. 굳게 닫힌 문 앞에서 한숨을 쉰 위뱅이 가볍게 노크했다.
“접니다, 뤼시앵 님. 들어가겠습니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문을 열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어두울 것이라 여겼던 방 안은 제법 밝았다.
“위뱅 경.”
침대 위에 앉아 있던 뤼시앵이 그를 불렀다. 위뱅은 황급히 다가갔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그동안 괜찮지 않았던 것은 몸이 아니라 정신 쪽이었으나 두 사람은 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지원은 언제쯤 도착하지?”
위뱅이 가져다준 음식으로 배를 채우며 뤼시앵이 물었다. 기사들은 뤼시앵을 주인 취급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산코냐의 대성당에서 이환일지 모를 자의 흔적을 확인한 후, 뤼시앵은 위뱅과 상의하여 몰래 황도에 추가 지원을 요청했다. 또한 각국의 성물 위치를 알고 싶다는 내용도 함께 전달했다.
“좀 더 지원을 요청하도록 해. 알렉상드르 경이 살아 있다는 게 확실해진 이상, 형님도 보다 확실한 지원을 허락하실 거야.”
방에 틀어박힌 동안 뤼시앵은 수없이 많은 꿈을 꾸었다. 늘 그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꿈이었다. 꿈은 반복될수록 선명해졌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 찬, 기묘하게 이질적이던 청람의 눈동자. 그런 것이 둘이나 있을 리 없다.
“인간도 아닌 주제에 뻔뻔하게 알렉상드르 경에게 달라붙다니.”
불과 물을 다루고, 심지어 하늘에서 운석의 비를 내리게 하는 드래곤이 고작 인간의 정신 하나 마음대로 못 할 리 없다. 뤼시앵은 그렇게 판단했다.
“알렉상드르 경이 이상한 건 전부 그자 탓이야. 그게 아니고서야 나에게 이럴 수는 없어.”
사흘 전, 이환이 사라진 후 뤼시앵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상실감이었다. 그제야 그는 이제껏 외면해 온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적어도 꿈에서 느꼈던 지독한 후회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기만 했어도 이렇게 늦게 깨닫는 일은 없었을 텐데.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을 거야.”
상실을 확신한 후에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이 말은 한 번 잃어 본 자의 미련이었다. 그로 인해 깨어난 소유욕은, 뤼시앵이 있는 줄도 몰랐던 황족 특유의 잔혹성을 일깨웠다.
현 상황에서 이환이 황궁에 끌려간다면. 평생을 황실에서 보낸 뤼시앵은 이환에게 일어날 일을 예상할 수 있었다.
황실은 본분을 잊은 사냥개에게 단 하나 남은 쓸모나마 활용하기 위해 박제하여 전시할 것이다. 그리고 그 쓸모마저 사라지는 때야말로 뤼시앵이 이환을 완벽하게 손에 넣는 날이 될 것이다.
꿈속의 자신은 어리석었다. 고문을 당해 만신창이라도, 팔이 잘려도 이환은 이환이었다. 그걸 다른 자에게 넘길 생각을 하다니.
‘그런데 알렉상드르 경을 달라고 한 자가 누구였지?’
아직 완성되지 않아 중간중간 빈 꿈은 이렇게 의문점을 남겼다. 이환의 특색 있는 외모를 탐내던 몇몇 귀족을 주워섬기던 뤼시앵이 문득 한 존재에 생각이 미쳤다.
“설마…….”
아닐 것이다. 만약 꿈속의 드래곤이 이환을 손에 넣었다면 뤼시앵을 원망하고 미워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뤼시앵은 고개를 저었다.
“뤼시앵 님?”
“아무것도 아냐. 아, 나 그 사슴 고기 더 먹을래.”
매번 입이 짧은 뤼시앵 때문에 걱정이 많던 위뱅이 반색했다. 사실 그것은 뤼시앵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본래 이환의 연애 상대는 여성에 한정되었다. 샤를은 그것을 경계했다. 이환이 뒷배 있는 여자와 결혼하거나, 혹은 후계를 얻게 된다면 정국이 복잡해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샤를은 여자 같은 외모의 뤼시앵을 그에게 붙였다. 그래서 뤼시앵은 스무 살이 된 지금까지도 소녀 같은 얼굴과 가녀린 체구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 왔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별 의미가 없었다. 뤼시앵은 이환을 감싸 안았던 드래곤을 떠올렸다. 훤칠한 키와 넓은 어깨, 커다란 손. 그는 뤼시앵이 포기한 것들을 가진 채 이환에게까지 손을 뻗쳤다.
녹색 눈을 서느렇게 빛낸 뤼시앵이 포크로 고기를 세게 찍었다.
토끼 사냥이 끝난 후 사냥개는 1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