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사냥개는
출구를 향해 달린다
샤브리에 산에서 도보로 사흘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 산간벽지의 여관이 손님을 맞이했다. 카운터에 앉아 졸고 있던 주인은 들어서는 손님의 모습에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녀였다. 순은으로 자아낸 듯한 머리카락도, 짙푸른 눈동자도, 매끄러워 보이는 하얀 얼굴도 전부 눈부시게 빛나서, 주인은 무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잘 익은 과실처럼 붉은 입술이 살며시 열렸다.
“방 있습니까.”
주인은 귀를 의심했다. 미녀의 목소리가 여성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낮았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손님의 훤칠한 키와 넓은 어깨가 보였다. 미녀가 아니라 미남이었다.
주인이 말을 잃은 사이 은발의 손님이 고개를 돌려 뒤쪽을 보았다. 냉정했던 방금 전과는 달리 사근사근한 어조가 귀에 달짝지근하게 달라붙었다.
“방은 하나로……. 농담입니다. 두 개 잡을게요.”
들어온 손님은 한 명이 아니었다. 주인은 그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먼지투성이 망토로 몸을 꽁꽁 감싼 것으로 모자라 머리까지 후드로 가린 남자였다. 죄를 씻고자 순례 중인 자들이 흔히 하는 차림이었으나 이 손님은 정도가 심했다. 그에게서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머리카락이 검은색이라는 정도였다.
‘흑과 은이라니, 나란히 있으면 눈에 띄겠네.’
그것이 또 다른 손님에 대해 주인이 떠올린 유일한 감상이었다. 주인은 곧바로 은발의 손님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절세의 미남이 내뿜는 존재감은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1인실 두 개. 숙박은 하루만. 주인은 손님들을 2층으로 안내했다. 방을 가리키자마자 망토 차림의 손님이 손을 불쑥 내밀었다. 어리둥절한 주인에게 은발 미남이 말했다.
“열쇠 주세요.”
주인은 열쇠를 건네면서, 망토의 남자가 말을 못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자가 여관에 들어온 후 지금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열쇠를 받은 남자가 방으로 들어갔다. 주인은 조금 득을 본 기분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미남자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기분에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손님의 방은 여기입니다. 그런데 식사는 어떻게…….”
그때 하얀 손가락이 주인의 손에서 열쇠를 낚아챘다. 주인이 어어, 하는 사이 방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복도에 혼자 남은 그는 쓸쓸히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1인실에 들어선 이환은 후드부터 내렸다. 어느새 숨는 것보다 드러내는 입장에 익숙해진 터라 갑갑하게 느껴졌다.
창문 너머로 망토를 내밀어 탈탈 털었다. 흙먼지가 부옇게 일었다. 이런 것이 몸에도 쌓여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근질거렸다. 그러나 도망자 신세로 목욕처럼 눈에 띄는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망토를 의자에 걸친 이환은 셔츠를 벗고 거의 다 아문 상처를 살폈다. 어제부터 느끼기는 했지만 회복 속도가 경악스러울 지경이었다. 원인이 압살롬의 약인지 마법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험한 길만 골라 걸었던 터라 피곤했다. 침대에 등을 붙이자마자 수마가 이환을 덮쳤다. 그는 거부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설핏 잠이 들었던 차였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벌떡 일어난 이환은 먼저 망토부터 찾았다. 그러나 노크에 이어 들린 소리는 귀에 익은 것이었다.
“나예요, 이환.”
이환은 들었던 망토를 내려놓았다. 문을 벌컥 열자 압살롬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뭐야.”
“이거 받아왔어요.”
압살롬이 내민 것은 물주전자와 수건이었다. 이환은 압살롬을 물끄러미 보았다.
“여관이 작아서 이 정도밖에는 구할 수 없었어요. 제대로 된 곳이었으면 목욕도 가능했을 텐데…….”
압살롬의 말대로 작은 여관이라,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 해도 목욕은 어려웠을 것이다. 방은 작았고 화장실조차 붙어 있지 않아 목욕통을 들이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즉, 압살롬이 이환에게 내민 것은 현 상황에서 허락될 수 있는 최대의 사치였다.
“아니.”
이환은 물주전자와 수건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망설이다 덧붙였다.
“고마워.”
압살롬은 이번에도 꽃이 흐드러진 듯 웃었다.
***
다음 날 아침, 압살롬은 이환의 방 앞에 섰다. 여관에서 나가기로 한 시간을 넘겼음에도 이환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아직 자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압살롬은 한 번 더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문 너머는 여전히 조용했다. 혹시 혼자 떠난 것일까. 잠깐 의심했던 그는 방 안의 기척을 확인했다.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순순히 믿을 수 없어서 압살롬은 문고리에 손을 가져갔다.
문이 열리며 낡은 경첩이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천천히 드러난 실내는 창을 통해 들어온 빛으로 인해 제법 밝았다. 그 안에서 이환이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숨소리가 평소보다 크고 가빴다.
“이환?”
침대가에 선 압살롬이 손을 뻗었다. 그것이 닿기 직전, 이환이 눈을 떴다. 방의 어둠이 드리워져 평소보다 짙어진 눈동자가 사납게 번들거렸다.
“뭐야…….”
이환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낮게 긁힌 목소리에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제야 압살롬은 방 안의 공기가 병적인 열기와 습기로 후끈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이환은 앓기 시작했다. 당장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기는 했으나 이내 조용해졌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터다.
그리고 사흘째인 오늘. 이환은 여전히 침대 신세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땀에 젖은 채 베개 위에 흐트러져 있다. 악몽이라도 꾸는지 창백한 얼굴이 괴로움에 얼룩지곤 했다.
이환의 마른 입술 사이에 젖은 천이 물렸다. 이환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빨았다. 잠든 와중에도 힘은 세서, 그의 목울대가 움직일 때마다 천을 붙잡은 압살롬의 손도 까딱까딱 움직였다.
압살롬은 이환의 목을 주시했다. 보기 드문 밀색 피부였다. 살갗은 목 중간부터 희어졌다. 늘 첫 단추까지 잠그는 습관 탓이었다.
때로는 답답하게 생각될 정도로 채워졌던 단추가 지금은 풀어져 있다. 압살롬은 기갈난 시선으로 이환의 목을 샅샅이 핥았다. 메마른 울대와 도드라진 핏대, 맥동에 따라 톡톡 튀어 오르는 귀밑, 그곳에서 빗장뼈로 이어지는 날렵한 협곡까지.
이환의 목에 섬세한 손가락이 닿았다. 이내 그것은 목 아래까지 기어들었다. 엄지가 울대를 스치듯 어루만진다. 이대로 조금만 힘을 주면……. 짙푸른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충동을 제지한 것은 다름 아닌 압살롬의 머리카락이었다.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은발이 이환의 코끝을 스쳤다. 간지러웠는지 코를 씰룩거린 이환이 입을 우물거렸다. 별것 아닌 움직임이었지만 압살롬을 일깨우기에는 충분했다.
압살롬은 황급히 몸을 물렸다. 불에 덴 사람처럼 손을 감싸 쥔 그가 고개를 떨궜다.
“목……말라…….”
마침 이환이 물을 찾았다. 압살롬은 다시 흠뻑 적신 천을 그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충동이 채 가라앉지 않은 탓에 손이 덜덜 떨렸다. 그 바람에 천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이환의 뺨을 타고 흘렀다.
이러면 안 된다. 이환을 돌보는 것. 압살롬이 지닌 유일한 쓸모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다시 천을 적셔 이환의 입술에 물렸다. 손이 여전히 떨렸지만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다.
고열과 몸살. 그것이 이환의 증상이었다. 압살롬은 이제까지의 피로가 한꺼번에 터진 것이라 예측했다. 신의 사자로서 대중 앞에 선 열아홉 살 이후 지금까지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싸워 왔으니 지치는 게 당연했다.
신 이옐라가 보낸 사자이며 신의 첫 번째 검. 구세의 기사. 게다가 포상으로 받은 알렉상드르라는 이름에는 ‘인간의 수호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지극히 독선적인 동시에, 제국이 이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게 해 주는 호칭들이었다.
그런 화려한 수식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환이 누워 있는 곳은 허름한 여관방이었다. 침대와 의자만으로도 꽉 차도록 좁은 방은, 나무 벽이 군데군데 썩은 데다가 곰팡내까지 풍겼다. 비참하기까지 한 괴리였다.
“이환…….”
석류처럼 붉은 입술 사이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다못해 치료라도 제대로 받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산간벽지의 작은 마을에 의사가 있을 리 없었다. 설령 있다손 치더라도 이환의 입장상 함부로 부르기 어려웠을 것이다. 압살롬은 태어나 처음으로 무력감을 느꼈다.
압살롬은 이환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체온이 제법 뜨거웠다. 그래도 첫날에 비하면 많이 내려가 있었다.
그때 이환이 눈을 떴다. 제법 밝은 갈색 눈이 압살롬을 향했다.
“지금 몇 시…….”
낮게 긁히는 소리가 귓가를 자극했다. 압살롬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소리를 들은 것인지 이환이 얼굴을 찡그렸다. 압살롬은 잽싸게 입을 열었다.
“지금 몇 시인지 물었죠? 점심 먹고 두 시간 정도 지났어요.”
몇 시간만 더 지나면 이 마을에서 사흘을 꼬박 지낸 게 된다. 실종을 꾸민 이환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안 됩니다.”
압살롬은 후들후들 떨리는 이환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이환이 팔을 흔들었다. 뿌리치고 싶었겠지만 아쉽게도 지금의 그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꿋꿋이 버틴 압살롬은 다른 손으로 이환의 어깨를 밀었다.
“알 텐데요. 당신에게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이럴 시간 없어.”
“그동안 내내 무리해서 몸이 지쳤어요. 지금 움직였다가는 며칠 안 되어 다시 앓을 게 뻔합니다. 이곳에서 제대로 휴식을 취한 뒤에 움직이는 것이 효율 면에서는 더 나아요.”
이환이 입을 다문 채 불만스러운 눈을 했다. 머리로는 압살롬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지만 순순히 수긍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압살롬은 이환의 선택을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
“순순히 눕지 않으면, 누울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드리죠.”
이환은 압살롬의 손을 흘금 보았다. 희고 고운 손가락에는 무쇠 주전자가 단단히 잡혀 있었다. 한숨을 쉰 이환은 다시 드러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시위라도 하듯 압살롬에게 등을 돌린 채였다. 압살롬은 주전자를 내려놓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농담입니다. 내가 이환을 때릴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압살롬은 봉긋한 이불 무덤을 가만히 응시했다. 동행을 허락받았던 때가 떠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안 그랬으면 이환은 이곳에서 혼자 앓았을 것이고, 자신은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나서지 못했을 것이다.
고지식한 사람. 구두로 한 약속 따위는 무시하면 그만인데 이환은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무시한다는 선택지를 생각도 못 했을지 모른다.
압살롬은 다시 이환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어느새 그의 호흡이 느려져 있었다.
“이환, 자요?”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압살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을 침대 위로 기울이자 이불에 채 가려지지 않은 얼굴이 보였다. 숨을 깊이 들이쉬자 이환의 체향이 느껴졌다. 병자 특유의 열기와 습기가 섞인 냄새였지만 압살롬에게는 왕의 화원에서 나는 향기보다 근사했다.
“이환, 자는 거 맞죠?”
이번에도 역시 이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억지 부려서 미안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함께 있고 싶었어요.”
압살롬은 툭 건드리듯 이불 무덤에 이마를 댔다. 가슴이 괜히 시렸다.
팔에 압살롬의 이마가 닿는 순간, 이환은 감았던 눈을 떴다. 치가 떨렸으나 자신을 차분히 다스렸다. 어차피 앞으로 한동안은 그와 동행해야 한다. 그렇다면 가능한 익숙해지는 것이 좋았다.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현 상황을 생각했다. 퓌니르 기사단은 내규를 통해 실종자의 수색을 삼 일로 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환은 일개 기사와는 입장이 달랐다. 어쩌면 며칠 더 수색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실종 장소인 샤브리에 산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지려던 것인데 이렇게 발이 묶이다니. 다른 이유가 아닌 오로지 자신으로 인한 지연이라 더 화가 났다.
돌이켜 생각하면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절벽에서 떨어지겠다 마음먹었는지 모르겠다. 운이 좋았기에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다가는 온몸이 산산조각 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가능성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뤼시앵을, 황실을 떠나는 것에만 골몰했다. 스스로는 잘 생각해 판단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늘게 한숨을 쉰 이환은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서는 먼저 차원을 열어야 하는데, 그러자면 신의 힘이 필요했다. 회귀 전 이환이 알게 된 방법에서는 다섯 개의 성물로써 신의 힘을 대신했다.
현재 위치를 알고 있는 성물의 수는 총 여섯. 그중 가장 수월하게 손에 넣겠다 싶은 것을 추렸다.
‘일단 몸을 추스른 후…….’
곰곰이 생각하던 중 목이 간질간질했다. 기침이 나오려는 듯했다. 잠결인 척 소리 죽여 콜록거린 이환은 뜨끔거리는 가슴을 문질렀다.
회귀 전 그를 진찰했던 의사는 초기에 휴식을 취했었다면 완치됐을 것이라 말했다. 이환의 기억으로도 몬스터가 덜 극성맞은 시기에는 증상이 눈에 띄게 완화되었었다. 이대로 쉬엄쉬엄 움직이면 성물을 모두 손에 넣기 전에 완치될 수도 있었다.
정체를 숨긴 채, 무리하지 않고, 성물을 손에 넣어, 귀환한다. 하나같이 쉽지 않았다.
그때였다. 압살롬의 손이 등에 닿았다. 일순 경직했던 이환은 압살롬이 쓰다듬기만 하자 긴장을 풀었다. 손길이 그저 온화하고 부드러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입안의 혀처럼 구는 압살롬이니 편할 대로 이용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꿍꿍이를 품은 자와 함께 있는 것은 상상보다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되도록 빨리 압살롬을 떼어 내고 싶었다.
그러자면 일단 나아야 했다. 이환은 억지로라도 잠을 청하려 했다. 그러나 다년간에 걸쳐 단련된 본능은 조금의 자극에도 빠르게 반응했다.
깜빡 잠에 빠졌던 이환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벌써 몇 번이나 같은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쯤 되니 조금 짜증이 났다. 차라리 일어날까 생각할 즈음이었다.
등을 쓰다듬던 손이 머리로 올라왔다. 머리카락을 스치는 손가락이 닿을 듯 말 듯하며 잠을 유도했다. 이환은 서서히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던 이불이 슬슬 내려갔다. 답답했던 숨통이 트이자 만족감에 입매가 슬며시 올라갔다. 그에 반응하듯 낮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잘 자요.’
설탕 과자보다 달콤한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이환은 완전히 잠에 빠졌다.
***
한잠 자고 일어난 이환은 몸이 가뿐해진 것을 느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이불 끝자락이 무거웠다. 고개를 돌리자 은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누구의 것인지는 명백했다.
이환은 잠시 가만히 누워 있다가 슬며시 움직였다. 상체만 일으켜 앉자 압살롬이 제대로 보였다.
누렇게 변색된 이불 위에 은발이 흩어져 있다. 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그것은 압살롬에 대한 미움을 품은 이환의 눈에도 아름다웠다. 어째서인지 안색이 파리했으나 그조차 미모에 색을 더했다.
겉포장 하나는 기가 막히지만 이게 본모습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제까지 이환이 봐 온 몬스터는 하나같이 이형이었다. 물론 인간과 똑같은 외모로 변신할 수 있는 개체도 있기는 했다. 인간을 유혹해 이득을 취하는 몬스터들이 그러했다.
‘유혹이라.’
이환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순결하게 반짝이는 외양에 속아, 압살롬을 상냥하고 좋은 사람이라 여긴 얼간이가 여기 있으니까.
어떻게 떨쳐 낼까. 이환은 잠들기 전 했던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제 마음대로 따라다니겠다 선언했던 만큼, 압살롬 스스로가 동행을 그만두도록 만들어야 했다. 문득 동행을 허락했을 때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이환의 시중도 들어 줄 수 있고…….’
‘원하시는 대로 마음껏 부려 주세요.’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황족들 가까이에서 지냈다. 이환이 본 그들은 귀찮은 일과, 위신이 훼손되는 일을 지독히 싫어했다. 몬스터의 왕이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실컷 부려 주지.’
이환은 압살롬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 냉기를 느끼기라도 한 양, 압살롬이 천천히 눈을 떴다. 일몰과 밤 사이의 짧은 순간 하늘에 드리워지는 색―청람이 이환의 모습을 비추었다.
“이환?”
눈을 느리게 깜빡이던 압살롬이 벌떡 일어났다. 짙푸른 눈이 이환의 모습을 찬찬히 훑었다. 이환은 뻗친 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으며 멋쩍은 척 시선을 돌렸다.
“괜찮아진 것 같네요. 다행입니다.”
진심이라고 착각할 만큼 안도가 짙게 밴 목소리였다. 그것조차 듣기 싫었던 이환은 침대를 벗어났다.
창밖을 보자 태양이 높게 떠 있었다. 오전 특유의 맑은 빛이었다. 이환은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이 정도면 출발해도 되겠어. 씻고, 가다가 먹을 도시락을 챙겨 달라고 해서…… 아, 세숫물이 없잖아.”
“제가 받아 오죠. 이환은 여기 가만히 있어요.”
압살롬이 바람처럼 방을 나섰다. 이환은 그의 등을 보며 입매를 삐뚜름하게 끌어올렸다.
그들은 이른 점심을 챙겨 먹고 도시락까지 든든히 준비한 후 여관을 나섰다. 이환은 여관 주인의 시선이 압살롬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누군가 여관 주인에게 이환의 인상착의를 들이댄다 한들 제대로 대답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을을 벗어나자 울퉁불퉁한 소로가 이어졌다. 외진 곳이라 그 소로조차 텅 비어 있었지만 이환은 머리에서 후드를 내리지 않았다.
“날씨가 좋네요.”
압살롬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밝게 말했다. 이환은 하늘에 눈도 주지 않은 채 물었다.
“뭐가 그리 즐거워?”
“티가 나요?”
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압살롬이 수줍게 웃었다. 눈의 착각인지, 뺨에 희미한 홍조마저 떠올라 있었다.
“좀 들떴나 봅니다. 이제까지 여행은 많이 했지만 동행이 생긴 건 처음이거든요. 게다가 그 동행이 이환이라니…….”
압살롬은 사랑에 빠졌음을 전신으로 외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환은 내심 코웃음 치며 걸음을 빨리했다. 그런 그를 따라잡으며 압살롬이 물었다.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게 되나요?”
“일단 마시장에 가서 말을 사야지.”
질문의 의미가 다르다는 걸 알면서도 이환은 부러 그렇게 말했다. 그렇군요. 중얼거림에 가까운 대답이 이어졌다.
그들은 이번에도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빠르게 갈 수 있는 길을 찾아들었다. 그러자니 필연적으로 험한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산으로 들어간 그들은 그곳에서 밤을 나게 되었다. 마침 작은 호수를 찾아 그곳에 자리 잡았다.
식수를 넉넉하게 확보한 이환은 곧바로 옷을 벗어 던졌다. 도시락을 꺼내던 압살롬이 비명처럼 외쳤다.
“이, 이환!”
풍덩!
이환은 주저 없이 호수로 뛰어들었다. 뼛속까지 시리도록 차가웠지만 추위보다 찝찝함이 우선했다.
머리를 감은 후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이환은 흠칫했다. 압살롬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보라를 맞았는지 압살롬의 옷이 젖어 있었다. 가을인 데다 산속에서 맞는 밤이니 제법 추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압살롬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벗은 몸에 집요하게 따라붙는 눈동자가 거슬린 이환이 입을 열었다.
“이봐, 압살롬.”
이봐, 에서 움직이지 않던 압살롬은 이름이 불리고서야 움찔거렸다. 이환은 연신 뻐끔거리는 입을 보며 물고기 같다고 생각했다.
압살롬은 이내 입을 꾹 다물고 몸을 돌렸다. 그러더니 쥐어짠 듯한 소리로 외쳤다.
“미, 미리 이야기를 좀……!”
“뭐 하러? 남자끼리 내외라도 해?”
“그……!”
압살롬은 이환이 별 뜻 없이 던진 말에도 반응을 보였다. 이환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시선이 압살롬의 손으로 향했다. 그는 움켜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마치 참는 것 같다, 고 느낀 이환은 그것에 의문을 품었다.
참다니, 뭘?
잠시 생각하던 이환은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뤼시앵이 키스 이상의 진도를 무서워했던 터라 이환은 그쪽으로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곧바로 떠올리지 못했지만, 그도 남자였다. 남자의 저런 반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설정 한번 섬세하네. 이환은 이죽거리며 뭍으로 올라왔다. 물기를 닦은 후, 마을에서 압살롬을 시켜 구한 옷을 걸쳤다. 면 특유의 적당히 거친 감촉이 실크보다 기분 좋게 느껴졌다.
“옷 입었어.”
이환은 아직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등을 보인 채 섰던 압살롬이 몸을 돌렸다. 발그스름해진 눈매에 원망이 묻어 있었다.
“저기, 이환.”
“배고프다. 저녁 먹자.”
“……네.”
이환은 시간이 흘러 조금 눅눅해진 샌드위치를 빠르게 씹어 삼켰다. 그가 두 번째 샌드위치에 손을 가져가는 때였다. 내내 입술을 붙였다 떼었다 하던 압살롬이 겨우 말을 꺼냈다.
“이환, 내 말 좀 들어 봐요. 우리가 비록 가까운 사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지켜야 하는 예의 같은 게…….”
“그렇게 말하니까 굉장히 서먹하게 들리는데. 가까운 사이라면 목욕도 같이하고, 뭐 그러는 거 아닌가?”
“그…….”
“하긴 내 몸이 좀 보기 흉하지? 흉터도 많고.”
그만 입 다물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지만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긁히고 베이고 물어뜯기고. 이 세계에서의 시간은 밀색 피부 위에 그런 식으로 자신을 새겼다. 지구의 가족들이 보면 뭐라고 할까. 이환이 씁쓸하게 생각하는 때였다.
“아뇨.”
압살롬이 단호하게 말했다. 어딘지 열기마저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결코 흉하지 않아요. 오히려…….”
이환은 고개를 들었다. 압살롬이 그를 보고 있었다. 이환은 짙푸른 눈 안에 도사린 것을 읽었다. 활활 타올라 압살롬 자신은 물론 상대마저 삼켜 버릴 저것은―
착각이겠지. 이환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외면했다.
“흉하다 아니다 판단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봤다는 말이지?”
“그, 그게 아니라!”
“그래, 그래. 잘 알았어.”
“이환!”
이환은 허둥거리는 압살롬을 보며 눈매를 접었다. 그러나 짙은 눈매 안의 갈색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
이환의 실종 직후 황궁은 수색대를 조직했다. 평범한 기사의 실종이었다면 현지인을 포함시켰겠지만, 찾아야 하는 대상이 이환이다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어디에서 어떻게 말이 샐지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수색은 난항을 겪었다. 여기에는 날씨도 한몫했다. 갑작스럽게 쏟아진 폭우로 수색대의 발이 묶여 버린 것이다. 결국 내규에 따른 삼 일에, 추가로 삼 일을 더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환을 발견하지 못했다.
뤼시앵은 눈앞에 놓인 물건들을 내려다보았다. 물비린내를 풀풀 풍기는 망토, 우그러진 갑주, 익숙한 신월도.
수없이 보았던 칼을 향해 손을 뻗는 때였다.
“손대지 마라.”
황태자 샤를이 냉엄한 음성으로 말했다. 뤼시앵은 맥없이 팔을 떨어뜨렸다.
어떻게 나왔는지도 모르게 샤를의 앞에서 물러났다. 경황없이 걷다가 정신을 차리니 이환의 별궁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뤼시앵은 걸음을 멈췄다.
‘내가 왜 거기로 가고 있지?’
어차피 비어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스스로 걸음 한 적도 몇 번 없었다. 그가 발길을 돌리는 때였다.
“이런, 뤼시앵 아니냐.”
맞은편에서 지긋지긋한 얼굴이 다가왔다. 4황자 베르나르였다. 히죽거리는 것을 보니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뻔히 짐작되었다.
“소식 들었다. 우리 동생, 가엾어서 어떡하나? 그나마 기댈 곳이라고는 그 사냥개뿐이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뒈졌으니 말이다.”
이옐라의 사냥개. 황실과 귀족 사회에서 이환을 부르는 말이었다. 뤼시앵도 몇 번이나 입에 올렸던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저 혐오스럽게만 느껴졌다.
“으음? 어째서 그런 표정이냐? 웃어야지, 동생아. 네 반반한 낯짝으로 가능한 쓸모란 그런 것뿐이니 말이다.”
베르나르는 장갑을 벗더니, 그것으로 뤼시앵의 뺨을 찰싹찰싹 두들겼다. 결투를 신청한다는 의미로, 거부하면 겁쟁이로 치부된다. 그러나 뤼시앵은 아무런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그가 무기를 다룰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까지도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이환에게는 말하면 안 되었다. 이옐라의 기사가 사적으로 움직이는 경우, 그렇게 만든 뤼시앵에게 퍼부어질 지탄과 불이익이 두려워서였다.
그렇다고 유일한 측근인 위뱅이 대리로 나서자니, 이겨도 문제고 져도 문제다. 힘이 없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짝!
날카로운 소리가 오솔길에 울렸다. 베르나르가 장갑을 세게 휘두른 것이다. 그것을 마지막으로 손을 거둔 베르나르는 장갑을 놓았다.
“오물이 묻었군. 버려야겠어.”
떨어진 장갑을 보며 아쉽다는 듯 중얼거린 베르나르가 짐짓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런, 동생아. 어디 부딪히기라도 한 게냐. 얼굴이 빨갛구나. 신의 사자마저 홀린 얼굴이니 잘 간수해야 하지 않겠니.”
베르나르는 재미있는 말이라도 한 것처럼 쿡쿡 웃으며 뤼시앵을 지나쳐 갔다. 뒤쪽에 서 있던 위뱅이 그제야 한 걸음 다가왔다.
“뤼시앵 님.”
“……아무 말도 하지 마.”
빠른 걸음으로 거처에 돌아온 뤼시앵은 침실에 틀어박혔다.
베르나르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고 한편으로는 두려워졌다. 이제 그에게는 무엇도 없는 것이다.
두려움과 막막함 그리고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섞인 눈물이 흘러내렸다.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어.’
전신에 붕대를 휘감은 채 그가 말했다. 심각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표정 변화가 줄어든 그는 적어도 뤼시앵의 앞에서만큼은 자주 웃었다. 가끔 뤼시앵은 뿌듯함을 느꼈다. 모두에게 추앙받는 사람을 제멋대로 휘두르는 것이 즐거웠다.
‘그런데 그때.’
거친 손이 뤼시앵의 손등을 덮었다. 뤼시앵은 그의 손이 싫었다. 그가 손댈 때마다 느껴지는 꺼끌꺼끌함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참고 가만히 있자 그가 긴 숨을 내쉬었다. 달콤하고 편안한 호흡이었다.
‘널 혼자 두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러니까 겨우 몸이 움직이더라.’
뤼시앵은 눈을 떴다. 시야가 온통 일렁였다. 눈을 깜빡이자 뜨거운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몸을 일으켰다. 싸늘한 어둠이 그를 맞이했다. 방금 전까지 별궁의 침실에 있었는데, 눈을 뜨니 자신의 방이다. 별궁의 온화했던 공기와는 동떨어진 서늘함이 피부에 사무쳤다. 어깨를 부르르 떤 뤼시앵이 침대를 벗어났다.
바람조차 잠든 깊은 밤, 오솔길을 따라 달음박질쳤다. 황족으로서의 품위도, 호되게 꾸중 들으며 배운 황궁 예법도 생각나지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도 두렵지 않았다. 이 끝에 그 따뜻한 곳이 있다면, 그곳에 닿을 수만 있다면.
그러나 겨우 도착한 별궁은 싸늘한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주인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제야 뤼시앵은 제가 바란 온기가 별궁이 아닌, 그 주인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툭.
누렇게 변색되어 가는 잔디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아이 같은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그 후 뤼시앵은 한참을 앓았다. 악몽인지 희망인지 모를 꿈이 그를 내도록 괴롭혔다.
그 속에서 뤼시앵은 지금보다 어리기도 하고, 혹은 더 크기도 했다. 이환의 얼굴도 조금씩 변했다. 때로는 얼굴에 흉터가 있었고, 오른쪽 귀가 반만 남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장면에서든 둘이 같이 있다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며칠 후 침대를 떨치고 나온 뤼시앵은 샤를을 찾아갔다. 한참을 기다리고서야 겨우 독대할 수 있었다.
“알렉상드르 경은 죽지 않았습니다.”
뤼시앵이 들어오든 말든 서류에 눈을 고정했던 샤를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눈동자가 뤼시앵을 향했다. 평소였다면 그 시선만으로도 주눅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뤼시앵은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직접 찾으러 가겠습니다.”
혼자 두지 않겠다고, 뤼시앵을 생각해서 살아 돌아왔다고 말했다. 이후로도 이환은 그의 곁에 있었다. 그러니 이환은 반드시 살아 있을 것이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
작은 마을에서는 마시장을 찾기 힘들다. 거래 자체가 드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환과 압살롬은 제법 규모가 있는 도시를 목적지로 삼았다.
황궁의 잡일 담당 하인에게서 슬쩍한 신분증을 제시한 이환은 도시 안으로 문제없이 들어섰다. 여관은 제일 북적거리는 곳으로 골랐다. 사람이 많이 들락거리는 곳일수록 특정 인물이 기억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도시에 보일 때부터 압살롬에게 얼굴을 가리라고 말했다. 오가는 많은 사람들 중 압살롬을 보고 이환에게까지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그들은 스며들듯 조용히 여관에 자리 잡았다.
“잠시 기다려요.”
압살롬은 이환의 방에 들어와 그 말을 남긴 후 곧바로 나갔다. 이환은 자리에 앉아 들은 말대로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돌아온 압살롬의 품에는 여러 물건들이 한 아름 안겨 있었다.
먼저 압살롬은 선반에 따뜻한 물이 가득 담긴 물동이와 잘 마른 수건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이환에게 말린 과일을 내밀었다.
“저녁 먹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라서 받아 왔죠. 일단 이거 먹고 있어요.”
이환은 군말 없이 그것을 받아 입에 넣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단맛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말린 과일을 우물거리는 사이 압살롬이 말을 이었다.
“마시장 갔다가 올 테니까 그때까지 어디 나가면 안 됩니다. 알았죠? 주인이 문 두드려도 없는 척해요.”
말을 마친 압살롬은 곧바로 이환의 방에서 나갔다. 그의 기척이 멀어지고서도 한동안 주전부리를 씹던 이환은 입안의 것을 얼른 삼켰다. 아슬아슬하게 기침이 터져 나왔다.
기침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뜨끔거렸던 가슴도 많이 괜찮아졌다. 몸이 편한 것은 압살롬의 덕이 컸다. 이환은 그의 공을 부정하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조금 거슬리기도 했다. 실컷 부려 주겠다고 다짐한 지 제법 되었음에도 성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환이 성가시게 굴기 전에 압살롬이 전부 알아서 해 주는 것이 바로 그 이유였다.
이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선반으로 다가갔다. 물동이의 물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다. 그것으로 몸을 씻은 후, 역시 압살롬이 가져온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압살롬은 저녁이 다 되어 돌아왔다. 마음에 드는 말을 고르기라도 했는지 표정이 밝았다.
“급하게 나온 매물이 있어서 싸게 샀어요. 두 마리 다 튼튼하고 순하니 어느 쪽을 골라도 괜찮을 겁니다. 내일 보고 이환이 마음에 드는 쪽을 고르세요.”
압살롬이 반짝거리는 눈으로 이환을 보았다. 기대를 잔뜩 품은 얼굴이었다.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이환은 짧게 대답했다. 그걸 끝으로 입을 다물자 압살롬이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환은 그것을 무시했다.
저녁을 먹은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도시를 나갈 생각이었다.
이제 곧 국경이었다. 그곳을 지나면 플젠시아라는 왕국에 들어가게 된다. 플젠시아 북쪽 지방의 도시 산코냐에는 이름난 대성당이 하나 있다. 이환이 노리는 첫 번째 성물이 보관된 장소였다.
***
산코냐 시의 에르멘타스 대성당은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사람들이 모여들면 필연적으로 상업과 숙박 시설이 발달하기 마련이다.
성당 부지 안에도 순례자용 접객소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협소하고, 식사로는 퍽퍽한 빵과 물만 주는 데다가, 최소한의 편의만을 봐주므로 여유 좀 있다 싶은 사람들은 외부 시설을 이용하곤 했다.
자연스럽게 가난한 자들의 차지가 된 접객소는 늘 북적거렸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같은 방을 사용하는 건 약과였다. 병자가 있는 방에 들어간 사람이 기겁하며 뛰쳐나오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방 두 개는 도저히 안 된답니다.”
그래서 압살롬이 하나의 열쇠를 달랑거렸을 때 이환은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안내하라는 의미로 턱짓하자 오히려 압살롬이 머뭇거리며 물어 왔다.
“괜찮겠어요?”
“안 괜찮을 건 또 뭔데.”
그 대답에 압살롬은 쓴웃음을 지었다.
접객소의 방은 이제껏 묵었던 어떤 여관방보다 좁고 허름했다. 두 개의 침대가 벽을 면한 채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그 간격은 팔 하나만큼도 못 되었다. 게다가 기본적인 청결조차 등한시한 것인지 오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압살롬이 앞서 들어간 이환을 잡아끌었다.
“이환은 잠시 나가 있어요. 산책을 해도 좋고, 마구간에 가서 말을 좀 돌봐도 좋고……. 잠깐이면 되니까요.”
이환은 두말없이 발길을 돌렸다.
죄지은 자는 신의 눈을 부끄러워해 몸을 가려야 한다. 이옐라의 성직자가 신자들에게 가르치는 내용 중 하나였다.
그런 연유로 성당 부지에서는 망토를 머리부터 뒤집어쓴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덕분에 이환도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나 발길을 돌렸다. 접객소의 긴 복도를 지나 방에 들어가자 향긋한 냄새가 이환을 반겼다. 말끔해진 방을 둘러보는데 대야를 든 압살롬이 다가왔다.
“일찍 왔군요. 찾으러 갈까 생각했는데.”
“고생했네.”
이환은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봐도 이것은 청소의 영역을 넘어서 있었다. 하지만 압살롬은 그저 기쁘다는 얼굴로 나긋하게 웃을 뿐이었다.
“자, 이쪽에 앉아요.”
압살롬은 딱딱한 나무 침대에 이환을 앉혔다. 그러고는 대야를 바닥에 내려놓고 그 옆에 꿇어앉았다. 이환은 그가 대체 뭘 하려나 싶었다.
마디가 섬세하게 불거진 손가락이 이환의 신발을 잡고 부드럽게 당겼다. 오래 걸어 해진 신발이 쉽게 벗겨지고 땀에 젖은 양말이 드러났다. 압살롬이 양말에 손을 뻗는 순간, 이환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뭐야.”
짧은 한마디에는 희미한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그 말에 깃든 제지를 읽은 것인지 압살롬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앞쪽으로 쏟아졌던 은발이 반듯한 이마와 매끄러운 뺨을 타고 베일처럼 흘러내렸다.
“이환?”
인간 세상의 것이라 생각되지 않는 광경을 멍하니 응시하던 이환은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초점이 잡힌 눈에 압살롬이 비쳤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저놈을 보며 정신을 놓다니. 이환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기가 찼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이환은 딱딱하게 말했다. 화가 난 듯도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압살롬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당연한 것처럼 대답했다.
“방이 좁으니까요. 다른 데라면 몰라도 발만큼은 내가 씻겨 주는 쪽이 훨씬 편할 겁니다. 물도 덜 튈 거고요.”
그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이환의 양말을 벗겼다. 압살롬을 막으려던 이환은 마음을 달리 먹었다. 도망칠 만큼 심하게 부려먹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압살롬이 이환의 발목을 조심스럽게 잡아 대야 안으로 이끌었다. 따뜻한 물이 발목까지 덥혔다.
이환은 점점 나른해지는 몸을 억지로 긴장시키며 압살롬을 내려다보았다. 은발 아래 이마와 코가 살짝 보였다. 붉은 입술도 간간이 드러났다. 압살롬의 속이야 어떻든 겉가죽은 고결하기 짝이 없는지라 어딘지 도착적인 기분이 들었다.
이제까지 이렇듯 밀착하여 시중을 들어 준 사람은 없었다. 이환 자신이 어색하여 물렸기 때문이다. 그때 시중을 거부하지 않았다면 지금 압살롬을 아무렇지도 않게 부릴 수 있을 텐데. 기묘한 후회가 들었다.
이환의 발을 깨끗하게 씻긴 압살롬은 물기까지 꼼꼼하게 닦았다. 그러고는 더러워진 물이 담긴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압살롬의 손에는 새 물이 담긴 대야가 들려 있었다.
“세수할 물입니다. 이걸로 씻고 있어요. 난 먹을 만한 걸 좀 챙겨 올게요.”
이환은 압살롬이 나간 문을 노려보았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더러웠다.
앓는 소리가 밤의 적막을 울린다. 압살롬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르고 이환에게로 향했다.
이환은 잠들어 있었다. 압살롬은 그가 경계를 놓지 못해 뒤척거리다 느지막이 잠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달려서야, 아침에 일어나 제대로 수면을 취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터다.
“역시…….”
압살롬이 한숨을 섞어 중얼거리는 때였다. 이환이 발작하듯 부르짖었다.
“뤼시…… 가지 마……!”
압살롬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뤼시앵, 뤼시앵, 뤼시앵! 한낱 인간을 이토록 저주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어두운 방 안에 나직한 흐느낌이 울려 퍼졌다. 압살롬은 손가락으로 이환의 눈매를 쓸었다. 그곳에서 취한 물기는 뜨겁고 짜고 썼다.
울음 섞인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제 악몽이 끝났을까. 압살롬은 이환의 늘어진 어깨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 생각을 비웃는 것처럼 이환의 몸이 움찔 튀었다. 이제는 흐느낄 힘도 없다는 듯, 그는 숨을 몰아쉬더니 탄식을 섞어 중얼거렸다.
“……롬?”
흐릿한 외마디였으나 압살롬에게는 무엇보다 무거웠다.
“오늘도 당신의 악몽에는 내가 나오는군요.”
얼핏 무덤덤한 목소리로 속삭인 압살롬이 손을 뻗었다. 그는 이환이 꽉 깨문 채인 입술을 이에서 빼 주었다. 희게 질렸던 입술이 순식간에 붉어진다. 압살롬은 물기에 젖어 반짝이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닦아 주었다.
이환이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면 그저 그것으로 끝났을 행동이었다.
뜨거운 입술 사이에서 나온 붉은 혀가 흰 손가락을 핥았다. 숨을 삼킨 압살롬은 금세 사라져 버린 살덩이를 좇아 고개를 숙였다.
은빛 장막이 늘어져 압살롬과 이환을 가두었다. 귀에 들리는 것은 상대의 호흡뿐이고, 눈에 보이는 것은 어둠과 상대의 얼굴뿐이다.
압살롬은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 아주 조금만 고개를 움직이면 내내 탐냈던 것에 닿을 수 있다. 이제껏 단 한 번도 맛본 적 없으나 저것이 달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몸을 일으켰다. 한참을 망설인 것에 비하면 빠른 움직임이었다.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문 압살롬은 자신의 침대로 돌아갔다. 이불을 덮는 소리가 제법 거칠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누운 순간 이환이 눈을 떴다.
이환은 혀를 내밀었을 때만 해도 반쯤 잠에 빠져 있었다. 비몽사몽 간에 거슬리는 것이 있어 무엇인 줄도 모르고 핥는 순간 거칠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이 이환의 잠을 깨웠다.
모르려야 모를 수 없을 만큼 명백했다. 압살롬은 이환에게 욕정하고 있었다.
어느 쪽도 잠들 수 없는 밤이 깊어 갔다.
***
다음 날 아침, 자는 척하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한 이환과 압살롬은 이른 시간부터 움직였다.
성물은 대성당의 본관에서 보관 중이었다. 본관에 들어서자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가 그들을 반겼다. 이환은 관심 있는 척 그것을 훑어보았다. 처음 이곳을 찾는 순례자를 흉내 내기 위해서였다.
입구와 가장 가까운 곳에는 날개 달린 늑대가 표현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었다. 일견 몬스터를 닮은 이 동물은 이 세계에서 수호의 의미를 갖는다. 그런 만큼 이곳저곳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맞은편에는 뱀이 표현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었다. 이환은 그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성물이 있는 방을 향해 걸음을 뗐다. 그의 위로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색색의 빛이 번갈아 내려앉았다.
이어진 스테인드글라스는 이곳에 보관 중인 성물에 대한 내용을 나타내고 있었다. 지상을 살피고자 가난한 노파로 현신한 이옐라, 목이 말라 물을 애원하는 이옐라, 모든 이에게 외면당하다 한 소년이 준 물로 달게 목을 축이는 이옐라.
이환은 걸음을 멈췄다. 평범한 잔을 보석 박힌 금잔으로 바꿔 소년에게 건네는 이옐라가 표현된 스테인드글라스 아래였다.
그곳에 성물이 있었다. 황궁에서 온갖 아름다운 것을 접하며 지냈던 이환의 눈에는 영 투박해 보이는 잔이었다. 그러나 이환은 그것이 성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가 알려 줬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본능적으로 느꼈다. 잔 안쪽, 움푹한 부분에서 넘실거리고 있는 무형의 기운은 분명 신의 힘이었다.
망토 아래의 눈이 주변을 살폈다. 총 여섯 명의 병사가 성물을 지키고 있었다. 그중 가까운 곳에 있는 두 병사는 이환이 허튼짓이라도 할까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이환은 주변의 다른 순례자들을 따라 손을 모았다. 느리게 상체를 숙이고 잠시 가만히 있다가 일어났다. 몸을 돌리자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압살롬이 보였다.
그늘 속의 압살롬은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서늘한 표정의 그가 낯설었다. 이환은 저것이 압살롬의 본색이리라 생각했다. 그와 거의 동시에 간밤의 뜨거운 숨결이, 언젠가의 타오르던 눈동자가 떠올랐다. 이환은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이환이 걸음을 떼자 압살롬이 시선을 들었다. 두 쌍의 눈이 마주쳤다. 이환은 짙푸른 눈동자가 몽롱해지는 것을 보았다.
이환은 색색의 빛무리가 떠도는 공기를 가로질렀다. 압살롬이 그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지만 무시하고 지나쳤다.
본관을 나가자 압살롬이 곧바로 따라붙었다. 시키지 않아도 조잘조잘 잘도 떠들던 입이 오늘따라 다물려 있었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접객소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이었다. 이환은 시야를 희롱하는 금빛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금발의 소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굵게 웨이브진 머리카락도, 짧은 길이도, 햇빛 아래에서 눈부시게 부서지는 것까지도 전부 누군가를 연상케 했다. 이환이 주먹을 세게 움켜쥐는 때였다. 압살롬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환!”
이환은 눈을 깜빡였다. 압살롬이 절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금발의 소년이 보였다. 그제야 소년의 옷이 눈에 들어왔다. 성직자가 흔히 걸치는 베옷이었다.
뤼시앵이 여기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설령 있다손 쳐도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왜.”
그러나 간신히 내뱉은 소리는 이환 자신이 듣기에도 거칠었다. 그에 압살롬이 뭐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환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압살롬이 이환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이환은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접객소의 좁은 방에 도착한 이환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압살롬도 맞은편 침대에 앉았다. 그들의 무릎이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좁군요. 이환도 불편하죠?”
“그래.”
그쯤 되어서야 정신이 들어온 이환이 대답했다. 차분해진 가슴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언제 나갈까요?”
압살롬이 답지 않게 채근했다. 기분 탓일까. 원래도 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듯 보였다. 이환은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너도 알 텐데. 아직은 나갈 수 없어.”
성물의 위치를 확인했다고 무작정 집어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환은 현재 별나게 행동하면 안 되었다. 다른 순례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며칠은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좋았다.
이환의 대답을 들은 압살롬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눈동자가 눈에 띄게 가라앉아 있었다. 싫으면 혼자 떠나든가. 이환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대신 다른 말을 했다.
“가서 마실 거라도 좀 가져와. 목마르다.”
“물이면 될까요? 아니지, 와인? 맥주?”
“물이면 충분해.”
압살롬은 어째서인지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방을 나섰다. 이환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뒤로 며칠 더 접객소에 머물렀다. 이환은 순례자인 척 본관과 접객소를 오갔다. 그러던 중 가까워진 사람이 있었다. 이환을 놀라게 했던 금발의 소년이었다.
솔리노라는 이름의 이 소년을 만난 곳은 마구간이었다. 어릴 때부터 대성당에서 자랐다는 그는 바깥의 일을 궁금해했다. 마구간에 온 것도 그래서였다고 한다.
사실 솔리노는 금발을 제외하면 뤼시앵과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피부는 그을었고, 뺨에는 주근깨가 가득했으며, 웃을 때는 큰 입을 한껏 벌렸다.
“가까이하지 않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만.”
한밤중에 돌아온 압살롬이 한 말이었다.
이환이 주로 낮에 움직였다면 압살롬은 밤에 움직였다. 그는 분주하게 오가며 도주로 등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해사한 얼굴에는 피로의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럴 생각이야.”
내일이면 이곳에 도착한 지 닷새가 된다. 슬슬 떠나도 좋은 때였다. 이환이 그렇게 말하자 압살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오전에 출발하는 건가요?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겠군요.”
압살롬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환은 알고 있었다. 압살롬은 내일 몇 시에 출발하든, 그 전까지 모든 준비를 끝내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압살롬은 아침 식사 전에 출발 준비를 마쳤다. 이환은 얼마 안 되는 자신의 짐을 꾸려 마구간으로 향했다.
이환은 자신의 말에 짐을 실었다. 먼저 와 있던 압살롬이 도왔다. 압살롬이 순례자 명부에 서명하는 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났다. 이환과 압살롬은 순조롭게 대성당을 나와 산코냐 시를 떠났다.
***
그리고 며칠 후 밤, 에르멘타스 대성당은 불청객을 맞이했다.
“윽!”
“컥!”
본관 문 앞을 지키던 두 명의 병사가 차례로 짧은 신음을 내며 기절했다. 불청객, 이환은 그들을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눕혔다.
성물을 지키는 자들은 본관에만 있지 않았다. 한 조에 두 명씩, 총 두 조가 대성당 부지를 돌며 순찰했다. 다음 순찰이 이곳을 지날 때까지 한 시간 남짓 남았으니 그때까지만 들키지 않으면 되었다.
이환은 본관의 거대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성물이 있는 곳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 복도를 가로질렀다. 그럼에도 그에게서는 발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중간에 순찰 중인 병사를 발견한 이환은 재빨리 숨었다. 기둥 뒤에 몸을 감추고 있자 곧 병사가 지나갔다. 그는 병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가능한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문득 회귀 전의 끔찍했던 한때가 떠올랐다. 이환은 급히 고개를 저어 기억을 떨쳤다.
이윽고 성물이 있는 방 앞에 다다랐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동태를 살폈다. 안쪽에 있는 사람의 수는 총 여섯. 한 시간 안에 저들을 뚫고 성물을 손에 넣어야 했다.
이환은 칼을 뽑는 것과 동시에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가장 가까운 곳의 병사를 노려 칼을 휘둘렀다.
촤악!
더운 피가 스테인드글라스 위에 점점이 튀었다. 이환은 잘려 나간 목이 떨어지기도 전에 두 번째 병사에게 달려들었다. 살과 뼈가 잘리고 장기가 꿰뚫린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생생한 감각을 지우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침입자다!”
“막아!”
그때야 이환을 발견한 병사들이 외쳤다. 그들의 손에서 무기가 번쩍거렸다. 이환은 그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가벼운 칼놀림에 생명이 꺼져 간다. 이환은 이를 악물었다. 남은 네 명의 병사들도 순식간에 해치우고, 고함 소리에 달려온 두 명의 지원도 추가로 베었다. 이제 이곳에 남은 것은 그 한 사람뿐이었다.
성물 앞으로 다가간 이환은 유리로 된 덮개를 들어 올렸다. 금잔을 낚아채는 손길이 우악스럽다. 그는 곧바로 그곳을 벗어났다.
어지러운 머리로 순찰 루트를 그렸다. 지금 본관의 정문을 통해 나갔다가는 순찰 중인 병사와 중간에 맞닥뜨릴 것이다. 생각을 마친 이환은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그런데 그것이 악수일 줄이야.
그 짧은 사이에 익숙해진 얼굴이 이환을 올려다보았다. 흰 잠옷과 그 위에 걸친 숄이 바람에 펄럭였다. 이환은 함께 나부끼는 금발을 응시했다.
공포에 질린 채 이환을 훑던 시선이 이환의 눈에서 멈췄다. 문득 그는 이제까지 솔리노를 만날 때마다 눈만 드러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수, 순례자님?”
반드시 죽여야 한다. 정체를 확정할 만한 단 하나의 증인도 남기지 않고자 병사들을 죽였지 않은가.
이환은 칼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솔리노가 털썩 주저앉았다. 시퍼렇게 질린 얼굴 위로 다른 이의 모습이 겹쳤다.
언젠가는 너도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까.
피투성이 칼이 하늘에 걸렸다. 솔리노가 입을 벌렸다. 입술 사이로 비명의 첫 음이 새어 나오려는 순간, 이환이 칼을 내리쳤다.
방금 전까지 팔딱거리며 뛰던 심장을 차가운 날붙이가 갈랐다. 솔리노는 제대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이환은 칼을 거두었다. 그러자 영혼이 떠나 식어 가는 몸이 고꾸라졌다. 반짝이던 금발조차 피에 젖어 퇴색되었다.
금발이 아름답던 그 사람.
뤼시앵.
“아…….”
이환이 신음을 흘렸다. 꼿꼿이 서 있던 몸이 흔들렸다. 그가 비틀거리며 한 걸음 나아가는 때였다. 어둠을 찢고 기어 나온 손이 이환의 눈을 가렸다.
따뜻한 손. 살아 있는 생물의 온기였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그렇게 속삭인 이환이 덧붙였다. 압살롬. 대성당에서 조금 떨어진 산에 말을 댄 채 기다리기로 했던 자의 이름이었다.
“당신이 걱정돼서 왔습니다만…….”
말끝을 흐린 압살롬이 이환을 돌려세웠다. 밤을 덧입어 어두워진 눈동자는 어딘지 기뻐 보였다.
“잘했어요.”
그의 말에 이환은 치를 떨었다.
“잘했다고? 이게?”
“가요, 이환.”
피투성이 금발을 차갑게 일별한 압살롬이 이환을 잡아끌었다.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이환은 속절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 안 있어 산에 다다랐다. 새까만 말 한 마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환을 앞에 태운 압살롬이 뒤쪽에 올라앉았다. 고삐는 압살롬이 잡았다.
차가운 밤바람이 귓가를 윙윙 울렸다. 이환은 그것이 오늘 밤 죽은 자들의 마지막 신음 같았다.
사람을 죽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규모 소탕 작전을 수행하다 보면 군령을 위반하는 자도, 탈영을 도모하는 자도 발생한다. 이때 재발을 막는 수단 중 하나가 공포다. 스물한 살의 이환은 모두의 앞에서 탈영병의 목을 손수 벤 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전투를 치렀다.
소탕 작전은 성공했다. 몬스터의 시체가 골짜기를 채웠고, 황도의 거리는 개선한 이환을 반기는 꽃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그러나 이환에게는 이 모든 것이 악몽이었다.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었다. 입에 무엇인가를 넣는 순간 구역질이 올라왔다. 지금 씹는 것인 음식인지, 아니면 그때 베었던 병사인지 알 수 없었다.
잠들면 죽은 병사가 꿈에 나왔다. 잘못했으니 살려 달라고 비는 그를 이환은 몇 번이고 다시 죽였다.
괴로움은 뤼시앵이 이환을 끌어안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경이 나쁜 게 아냐.’
뤼시앵은 이환의 행동이 모두를 지켜 주기 위한 것이며, 나쁜 건 몬스터와 드래곤이라고 말했다. 나는 나쁘지 않아. 이환은 그 말을 마음에 새긴 후에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이후로도 같은 일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때마다 이환은 울고 괴로워했다. 당시에는 그것이 강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이환은 알고 있다. 그것은 강함도 뭣도 아니다. 그저 감언이설에 속아 제 고통을 외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환의 기준에서 그것은 나쁜 짓이었으니까.
그리고 오늘, 그는 다시 사람을 죽였다.
“원하는 게 있다면.”
이환의 귓전에 닿을 듯 가까워진 입술에 대고 누군가가 속삭였다. 낮고 깊은 목소리. 압살롬이었다.
“딱 한마디만 해요. 압살롬, 하고. 그럼 내가 다 해 줄게요.”
실로 달콤한 말이었다. 무엇이든? 이환이 물었다. 무엇이든. 압살롬이 대답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인간 따위 얼마든지 죽여 줄게요.”
압살롬이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웠다. 이 앞은 험준한 산길이라 말을 탄 채로는 갈 수 없었다. 그들은 말에서 내렸다. 말을 산에 풀어 준 압살롬이 이환에게 다가섰다.
“아니면, 이 세계를 없애 줄까요?”
몬스터의 왕, 드래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존재가 이환에게 공언했다. 그는 이 말이 진심임을 깨달았다.
이환의 세 치 혀 위에 하나의 세계가 놓였다. 그가 원한다면 이대로 씹어 부술 수도 있는 세계였다. 그것을 실감하는 순간 공기조차 무겁게 느껴졌다. 이환은 어지러운 와중에도 압살롬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제까지 그가 알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존재가 눈앞에 서 있었다.
이것이 드래곤, 압살롬.
이환의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너. 대체 뭐야.”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럼에도 이환은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이윽고 압살롬의 붉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알고 있을 텐데요. 난 압살롬이고…….”
기대가 부푼다.
“……당신을 소중히 생각하는 친구입니다.”
그러나 부풀었던 기대는 단숨에 사그라졌다.
무엇을 바랐을까. 이환은 자조했다.
그렇게 배신당해 놓고도, 어느새 이환은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압살롬이 진실을 말해 준다면, 이 시간대의 압살롬만이라도 자신을 배신하지 않는다면. 그러나 이번에도 기대는 포말로 돌아갔다.
“친구라고?”
이환이 중얼거렸다. 입술이 비틀리며 웃음 비슷한 것이 그려졌다.
“웃기고 있네.”
이환 자신이 듣기에도 비열한 목소리였다.
“너, 나한테 발정하잖아. 어떻게든 한번 따먹으려고 혈안이 된 거 모를 줄 알았냐? 그런 게 무슨 친구냐?”
상처 주고 싶었다. 이것이 정말로 압살롬에게 상처가 되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이환은 압살롬의 가슴을 세게 밀쳤다. 압살롬이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희게 질린 얼굴에서 눈만은 여전히 이환을 향하고 있다. 이환은 어쩐지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인 채, 부러 이죽거렸다.
“못 알아듣겠어? 소름 끼친다고.”
이환은 입을 다무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왜 이런 말을 내뱉었는지 깨달았다. 자괴감과 고통이 심장을 찔렀다. 결국 이환은 몸을 돌렸다.
상처 입히고 싶다면서, 고작 던진 것은 이때껏 살면서 이환 자신이 제일 아프다고 느꼈던 말들이었다. 상대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스쳐 지나가는 것만도 못한 공격이다. 이 절호의 기회에 한다는 말이 고작 이것이라니. 이환은 자신의 멍청함을 욕했다.
성큼성큼 걸은 터라 압살롬과의 거리는 빠르게 벌어졌다. 이환이 열 걸음쯤 갔을 때였다.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이환! 기다려요!”
그러나 이환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압살롬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환의 앞을 가로막은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한참이나 망설인 끝에 겨우 고른 말은 참으로 평범했다.
“미안해요.”
애타게 속삭인 압살롬이 시선을 떨어뜨렸다.
“난, 그저.”
꺼질 듯 작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환이 핏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그저, 뭐? 깔아 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압살롬은 비통한 얼굴로 이환을 보았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듯 보이기까지 했다. 속지 마! 이환은 흔들리는 감정을 향해 일갈했다.
“꺼져.”
낮게 으르렁댄 이환이 압살롬을 지나쳐 걸어갔다.
원래 이환의 작전은 이러했다. 먼저 산코냐 시를 나왔다는 기록을 만든다. 그 후 인근 마을의 여관에 방을 잡아 들어간 후, 밤을 틈타 몰래 대성당에 잠입해 성물을 훔쳐 도주한다. 그러기 위해 미리 산을 통해 산코냐 시를 출입하는 방법을 알아두었다.
압살롬과 헤어진 이환은 험한 산길을 통해 산코냐 시를 벗어났다. 여관에 도착한 것은 동녘 하늘에서 희미한 빛이 보일 즈음이었다. 그는 3층에 위치한 방에 몰래 숨어들어 갔다.
사실 이환은 이 정도로 압살롬이 그에게서 떨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상처가 되기는커녕 먼지만 한 존재감도 없는 말에 반응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가 떠올라 다시 기울 때까지 압살롬은 돌아오지 않았다.
새벽까지는 한참 먼 한밤, 악몽에 시달리던 이환은 눈을 번쩍 떴다.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것을 닦으려던 중, 눈앞이 흐릿한 것을 알아차렸다. 뺨에 흐르는 것은 식은땀이 아니라 눈물이었던 것이다.
회귀 후 수없이 많은 밤을 악몽과 더불어 지새웠다. 그러나 울면서 깨어난 적은 한동안 없었다. 오늘 꾼 꿈이 특히 괴로웠던가. 꿈을 되새겼지만 다른 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악몽이었다.
‘평소와 다른 것이라면…….’
이환은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을 쫓아내며 눈을 감았다.
그의 숨소리가 다시 나른해지는 때였다. 실낱같은 기척이 가까워졌다. 이환은 잠결에도 압살롬이 들어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 밖에 있었던 모양인지 싸늘한 바람 냄새가 이환에게 밀려들었다. 어린 시절, 퇴근한 양친에게서 맡았던 것과 비슷한 냄새였다. 저도 모르게 깊이 들이마시는데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뺨에 닿았다.
“오늘도…….”
밤에 어울리는 나직한 소리였다. 그와 함께 섬세한 손길이 이환의 뺨과 눈가를 쓸었다. 반쯤 말랐던 눈물이 점차 닦여 나갔다. 익숙한 손놀림이었다.
문득 이환은 에르멘타스 대성당의 접객소에 들어가기 전 압살롬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괜찮겠어요?’
압살롬은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다치게 할까 망설이고, 아끼는 것을 대하듯 조심스럽게.
이환은 눈을 떴다. 날 선 갈색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치워.”
압살롬의 부재는 그가 이환의 말에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다. 그것은 이환에게 기묘한 통쾌함을 가져왔다.
이환은 아직도 그의 뺨에 닿아 있는 손을 쳐 냈다. 살갗 부딪치는 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내가 한 말은 어디로 들은 거야? 소름 끼친다고 했잖아.”
압살롬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환은 고개를 들었다. 희게 질릴 정도로 꽉 깨물린 입술이 보였다.
이환과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놀란 압살롬이 눈을 내리깔았다. 내리깔린 은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누가 봐도 상처 입은 자의 반응이었다.
이환도 사람인 이상,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타인을 상처 입힌 적 없다고 자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미워서 그저 상처 입히기 위한 목적으로 의도하여 움직인 적은 없었다.
한데 지금 이 감정은 무엇일까. 남이 괴로워하는 게 통쾌하다니. 자신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이환은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그때 압살롬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그 말은 아까도 들었…….”
“저는 이환한테서 떨어지지 않을 겁니다. 이건 그에 대한 사과예요.”
압살롬이 눈을 들었다. 이환은 그의 눈동자 안에서 단단한 결심을 읽었다. 어쩌면 욕심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그것이 이환을 부추겼다.
“누구 마음대로? 네가 뭔데 떨어지고 말고를 정해?”
“저를 이용해요.”
“필요 없…….”
“저 제법 쓸모 있어요. 돈도 많고, 정보력도 있고, 무엇보다 당신이 원하는 것이라면 전부 이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못 미덥다면 이름이라도 걸게요.”
압살롬은 진심처럼 보이는 눈빛과 소리로 이환에게 말했다. 그만둬. 이환은 이를 악물었다. 자괴감을 먹고 자란 의문이 그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압살롬이 그 말에 상처받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봐.’
속지 마. 이환은 입매를 비틀었다.
“전부 이뤄 준다고? 그렇다면 몬스터를 몰살시키는 것도 가능하겠지? 물론 네 이름을 걸고 말이야.”
드래곤인 압살롬이 결코 긍정할 수 없을 요구였다. 이환은 압살롬의 망설임 혹은 침묵을 비웃을 준비를 했다. 그때 압살롬이 하얗게 웃으며 되물었다.
“그거면 되나요?”
조금의 지체도 없었다. 이환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알겠습니다.”
이환의 침묵을 긍정이라 받아들인 것인지 압살롬이 몸을 돌렸다. 이환은 손을 뻗었다. 그러나 압살롬의 옷자락은 그의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급히 침대에서 뛰어내려 압살롬을 붙잡았다. 돌려세우자 짙푸른 눈에 두려움이 서렸다.
압살롬이 이환의 손을 떼어 냈다. 이환은 다른 쪽 손으로 다시 압살롬을 잡았다.
“놔주세요, 이환.”
흡사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속으면 안 돼.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두려워하며 속삭였다. 그러나 이환은 결국 묻고 말았다.
“너 진짜 뭐야.”
이환이 꼭 하루 전 압살롬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질문이었다. 압살롬이 망설이다 입술을 움직이는 때였다. 다시 이환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게 너한테는 아무 일도 아닌 거냐? 그렇게 쉬워?”
따뜻한 손이 이환의 손등을 덮었다. 방금 전까지 그를 떼어 내려던 손이었다. 뿌리치려는 순간 짧은 대답이 들려왔다.
“네.”
몬스터의 왕이라고 했다. 그 말은 압살롬도 몬스터라는 말이다. 그러니 지금 그는 동족을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진심일까. 이환은 어느 결엔가 압살롬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짙푸른 눈동자는 단호했다. 그 너머에서 희미하게 흔들리는 빛은 혹시 희망일까.
“어째서.”
무심코 중얼거린 이환은 입술을 깨물었다. 무엇을 바라고 저런 것을 물었을까. 마치 듣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 같지 않은가.
‘그럴 리가 없잖아.’
이환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속고도 부족한지, 심장은 조금의 여지만으로도 쉽사리 흔들렸다.
그때 압살롬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가 무엇을 말하든 듣고 싶지 않았던 이환은 고개를 저었다.
“됐…….”
“이게 이환이 편해지는 길이니까요.”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이환은 혼란스러운 눈으로 압살롬을 보았다. 만약 저 말에 담긴 의미가 이환이 생각한 것과 동일하다면, 압살롬은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수많은 거짓의 벽을 하나 부수고 있는 것이다.
“알고 있었어요. 구세의 기사 알렉상드르. 알고서 접근했어요.”
이환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왜?”
“그냥…… 흥미가 생겼어요. 그래서 당신을 좀 더 알고 싶어서 다가갔습니다.”
저건 진실이다. 이환은 멍하니 압살롬을 보았다. 이환. 눈앞의 붉은 입술이 파르르 떨리다 그를 찾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압살롬의 손을 뿌리쳤다.
진실인 게 뭐 어쨌다는 거야. 이제 와서 고작 저런 반쪽짜리도 못 되는 것으로 흔들릴 셈이냐. 이환은 자신을 차갑게 질타하며 압살롬을 노려보았다.
“멍청하긴. 내가 몬스터의 몰살 따위를 정말로 바랄 것 같아?”
압살롬의 눈에 절망이 들어찼다. 이환은 침대로 돌아갔다. 압살롬이 따라붙었다.
“그럼 내가 뭘 하면 됩니까? 뭘 해야 함께 있을 수 있죠?”
“너 아까 뭐랬냐? 나한테서 떨어지지 않을 거라며. 내 의사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서, 그래서 나한테 사과한 거 아니었어?”
이죽거린 이환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러는 동안 압살롬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본, 밀랍으로 빚은 양 핏기 없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후회할지도 몰라.’
꺼트려지기 직전의 불씨처럼 희미하고 덧없는 속삭임이었다. 압살롬의 희멀겋던 얼굴과 만난 그것이 제 몸뚱어리를 키워 갔다. 결국 이환은 이불을 홱 걷었다.
압살롬은 이환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비유지만, 그는 마치 어미에게 내쳐진 아이처럼 보였다. 어린아이에게 화풀이한 듯한 거북함이 이환을 괴롭혔다.
압살롬의 앞에 서자 흔들리는 눈동자가 이환을 향했다. 저열한 복수심과 그에 대한 망설임이 교차했다. 결국 승리한 쪽은 후자였다.
“……너와 이야기하다 보면 내가 참 나쁜 놈처럼 느껴져. 그러니까 좀 가라. 내가 여기서 더 못되게 굴기 전에.”
평생을 바르게만 살았고, 또 그런 삶을 강요받아 왔다. 그런 이환에게 감정적 횡포는 뒤끝이 나빠도 너무 나빴다.
속내를 드러내 조금 시원해진 이환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압살롬이 성큼 다가섰다. 길고 단단한 팔이 뻗어 나와 이환을 끌어안았다.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환은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압살롬의 입술이 뺨에 닿았을 때였다.
체온이 높은 압살롬답지 않게 차가운 입술이었다. 미지근한 숨결이 뒤따랐다. 분노에 차 입을 열었던 이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압살롬의 입술이 덜덜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술은 금세 떨어졌다. 뺨을 벅벅 문지른 이환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무감정한 음색에는 이환 자신이 들어도 서늘한 구석이 있었다. 압살롬은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
“못되게 굴어도 괜찮아요.”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목덜미에 입술이 닿았다. 이환은 압살롬의 허벅지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제법 아플 것이 분명한데도, 압살롬은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봐요. 지금도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환은 화내도 됩니다. 못된 게 아니라 정당한 분노니까요.”
이환은 가슴 앞에서 단단히 교차한 팔을 내려다보았다. 놔. 무겁게 가라앉은 소리로 말하자 압살롬이 팔을 풀었다. 몸부림쳐도 꿈쩍하지 않았던 것이 말 한마디로 움직이는 기분은 제법 이상했다.
몸을 돌려 압살롬을 보았다. 그는 무엇인가를 꾹꾹 눌러 참는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이환은 압살롬의 눈동자 너머에 숨은 비참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압살롬이 저런 얼굴을 할 때마다, 착각이 태어난다. 문제는 이환이 그 착각을 희망이라 믿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압살롬의 멱살을 잡고 끌어당겼다.
거친 움직임에 압살롬의 은빛 머리카락이 베일처럼 흔들렸다. 함께 들이닥친 서늘한 향기가 이환을 감쌌다. 그는 한동안 압살롬을 보다 입을 열었다.
“널 믿지 않을 거야.”
“네.”
“미워서 괴롭힐지도 몰라. 화풀이하고 때릴 수도 있어.”
“괜찮아요.”
“개처럼 부려 먹을 거야.”
“바라던 바입니다.”
이환이 말할수록 압살롬의 눈에서 희망이 피어났다. 저것도 거짓일까. 이환은 자조하며 결국 압살롬이 원하는 대답을 했다.
“마음대로 해 봐.”
압살롬은 환희가 역력한 얼굴로 웃었다. 이환은 밀치듯 그를 놓았다.
아직 새벽이 밝지 않았다. 압살롬을 그의 방으로 쫓은 후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러나 쫓겨난 잠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뒤척이던 중,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너무나 지당하나, 머리에 피가 몰렸던 때에는 생각도 못 했던 것이었다.
‘압살롬은 왜 그렇게 저자세인 거지?’
이환이야 회귀했으니 그렇다 쳐도, 압살롬의 입장에서는 만난 지 고작 일 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만난 횟수를 따지면 여남은 번쯤 될 것이다.
그럼에도 압살롬은 이환을 기껍게 떠받들었다. 알아서 시중들고, 이환이 시키는 일이라면 전부 해냈다. 그에게 그래야 할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모든 일의 이유가 사랑이라고?’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 바로 이환이 그러했지 않은가. 일 년은커녕 만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사랑에 빠졌다. 명백히 존재하는 의혹마저 외면한 채, 눈가리개를 씌운 군마처럼 뤼시앵이 지시하는 방향으로 내달렸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압살롬의 행동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다만 여기에는 압살롬이 이환을 사랑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환은 그 전제를 믿을 수 없었다. 동녘에서 번진 뿌연 빛 사이로 긴 한숨이 흩어졌다.
***
이환은 아침 일찍 대장간으로 갔다. 도주 시부터 그와 함께했던 칼이 에르멘타스 대성당에서의 전투로 인해 날이 말렸기 때문이었다. 나쁘지 않은 칼을 구입한 덕에 제법 흡족한 기분으로 돌아온 그를 맞이한 것은 습기 찬 공기였다.
“어서 와요, 이환.”
목욕 용품을 든 압살롬이 이환을 반겼다. 방을 가로지른 압살롬은 목욕통 옆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목욕통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물이 찰랑이고 있었다. 이환은 그를 흘금 보았다.
압살롬은 평소 풀어 내리던 긴 머리까지 질끈 묶은 채 목욕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열기에 익어 발그스름한 뺨이나, 젖은 머리카락이 붙은 새하얀 목덜미가 등골이 오싹할 만큼 요염했다. 이환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수건은 여기, 면도기는 여기 있어요. 이건 비누니까 거품 내서 사용하세요. 목욕 후 얼굴과 몸에는 이걸 바르면 됩니다. 아, 그리고……,”
목욕 용품을 하나하나 설명하던 압살롬이 문득 얼굴을 붉혔다. 그러더니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혹시 목욕 시중이 필요한가요?”
이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가.”
“끝나면 불러 줘요.”
압살롬이 나가자마자 이환은 옷을 훌훌 벗고 목욕통에 들어갔다. 얼마 만인지 모를 호사에 몸은 물론 기분마저 느긋해진다.
이환이 방을 비운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사이에 이만한 양의 물을 끓여 방까지 올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역시 마법일까. 그는 물에 젖어 거추장스럽게 늘어진 머리카락을 넘기며 생각했다.
압살롬을 곁에 두면 몸 하나는 확실히 편해질 것이다. 비단 목욕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몬스터와 싸우느라 세상 물정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이환을 섬세하게 보살피고 이끌어 주었다. 압살롬이 없으면 이 여행이 몇 배는 힘들어질 것이다.
일단은 그 이유로 곁에 두자. 언젠가 압살롬이 다시 배신의 기미를 보인다면 그때 내쳐도 충분하다. 이환은 목욕통에서 나오며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몸을 대충 닦고 옷을 걸친 후 압살롬에게 갔다. 옆방 문을 두드리자 압살롬이 나왔다.
“끝났어요? 그럼 목욕통 치우는 동안 내 방에서 잠시……. 로션 안 발랐군요?”
황궁에서 지낼 때야 뤼시앵에게 잘 보이기 위해 화장품을 사용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환은 대답 없이 압살롬을 지나쳐 방에 들어갔다. 그러자 한숨을 쉰 압살롬이 이환에게 다가갔다.
“귀찮아서 그러는 거죠?”
이환을 침대에 앉힌 압살롬이 화장품 병을 들고 왔다. 그는 눈치를 슬쩍 살피더니 이환의 머리카락에 쓸어 넘겼다. 젖은 머리카락이라 금세 이마가 드러났다.
“잠시 눈을 좀…….”
압살롬이 손에 화장품을 덜며 말했다. 이환은 순순히 눈을 감았다. 곧 상쾌한 향기가 가까워졌다. 차가울 것이라고 생각한 화장품은 압살롬의 체온 덕분인지 따뜻했다.
차닥차닥.
조용한 방에 작은 소리가 울렸다. 따뜻하고 적당히 어두운 방, 규칙적인 소리, 뺨에 닿는 온기. 잠들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다. 이환은 감은 눈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압살롬이 작은 소리로 웃었다.
“몰랐는데,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었군요.”
“시끄러워.”
“투정도 많고.”
귀여워요. 작은 속삭임이 봄바람처럼 사뿐하게 이환의 귓가를 스쳤다.
이환의 얼굴에서 떨어진 손이 어깨에 닿았다. 이환은 그 손이 미는 대로 누웠다.
“좀 더 자요.”
안 그래도 이환은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곤한 상황에서 잠까지 이루지 못한 터였다. 그런 그에게 압살롬의 말은 그저 달콤하게 들렸다. 그는 남아 있던 일말의 긴장까지 모두 놓은 채 잠이 들었다.
이환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강렬한 빛이 방 안을 점령하고 있었다. 한낮인 모양이었다. 압살롬은 보이지 않았다. 이환은 침대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압살롬을 발견했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 씁쓸한 얼굴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환은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검은 천 뭉치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휘감긴 천 사이로 바랜 듯한 황금이 한낮의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손에 넣은 첫 번째 성물은, 황금과 보석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볼품없었다.
이환은 그것을 향해 다가갔다. 몸을 숙여 성물을 잡는 순간, 접촉한 부분을 통해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처음 만졌던 당시에는 경황이 없어 느끼지 못했던 그것은, 성물을 보는 순간 진품이라 단정했던 때의 감각과 비슷했다.
“축하합니다.”
압살롬이 말했다. 내용과는 달리 우중충한 얼굴이었다. 이환은 성물을 잘 갈무리해 짐 깊숙한 곳에 넣었다. 그를 지켜보던 압살롬이 물었다.
“다음 목적지는 어디인가요?”
“……뢴트너.”
“뢴트너라면 왕궁에 성물이 있죠. 이번처럼 왕궁 안에 들어가 동태를 살필 거라면 하인 자리라도 마련해 둘게요. 그편이 돌아다니기…….”
“아니.”
이번에는 압살롬이 가져온 정보를 완전히 믿을 수 없어서 대성당 접객소에 묵는 과정을 거쳤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르게 행동할 생각이었다.
“너라면 이전에 넘겨준 것보다 좀 더 자세한 정보를 가져올 수 있겠지. 그걸 토대로 잠입할 생각이야.”
빠르고 깔끔하게 끝내려면 이쪽이 나았다. 이환은 의도적으로 한마디를 추가했다.
“부탁해.”
“물론입니다. 걱정 말아요.”
압살롬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이환은 고소를 삼켰다.
***
뤼시앵은 샤를에게서 기사와 지원금을 받아 곧바로 황궁을 출발했다. 그의 목적지는 이환이 실종된 장소인 샤브리에 산이었다.
일행은 쉴 새 없이 말을 달렸다. 때때로 만나게 되는 몬스터조차 속도로 뿌리쳤다. 다행스럽게도 큰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열흘째 되는 날 저녁에 이르러서야 샤브리에 산의 기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모두를 멈추게 한 뤼시앵은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그런 그를 향해 한 기사가 물었다.
“설마 산으로 들어가실 생각이십니까?”
탐탁지 않은 기색이 완연한 말이었다. 뤼시앵은 대답 대신 차가운 눈으로 기사들을 훑었다.
기사들의 수는 총 일곱. 이중 위뱅을 포함한 셋은 원래부터 뤼시앵을 지키던 자들이었고, 남은 넷은 샤를이 내준 자들이었다. 방금 물어 온 기사는 후자였다.
뤼시앵은 고개를 휙 돌려 그들을 외면했다. 무시당한 기사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러나 뤼시앵은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 한 사람에 대한 것 이외에는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시 시선을 지도로 향했다. 그의 눈은 산이 아닌 그 주변을 훑고 있었다.
뤼시앵은 기사의 위력을, 그들이 가질 수 있는 힘의 한계를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래서 생각에 제약을 받지 않았다. 다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죽는다.’라고 말했음에도, 뤼시앵만은 이환이 산을 빠져나갔으리라 확신했다.
산 주변에는 몇 개의 마을이 있었다. 희고 고운 손가락이 그중 몇 개의 마을을 짚었다. 하나같이 좁고 험한 길을 거쳐야만 닿는 곳이었다.
“알랙상드르 경이 그리로 갔으리라고 보십니까?”
위뱅이 물었다. 이번에도 뤼시앵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제는 누구도 그 본명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구세의 기사. 세상의 모든 영예가 그의 손아귀에 있다. 그가 원한다면 금은보화로 산을 쌓는 것도, 일국의 왕이 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 사람이 고립된 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렇다면 다음 행동은 무엇이어야 할까.
“5황자 저하께서는 알렉상드르 경이 목숨을 건졌음에도 황궁에 연락하지 않았다,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번에는 샤를이 붙여 준 다른 기사가 물었다. 이환이 황실을 배반했냐고 묻는 듯한 뉘앙스였다. 아무리 뤼시앵이라도 이 말에는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부상을 입은 자에게 인근 지리를 생각할 겨를이 있을까? 아무 곳으로나 향했을 수도 있지. 나는 그 가능성을 생각해 수색대가 가지 않은 마을을 짚었을 뿐이다. 산길이나, 혹은 겨우 당도한 마을에서 정신을 잃었다면…… 경들 같으면 황궁에 연락할 수 있었을까?”
말과 달리 뤼시앵은 이환이 정신을 잃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짚었던 몇 군데의 마을 중 한 곳을 가리켰다.
“오늘은 근처 마을에서 머무르고, 내일 이곳으로 가 보겠어.”
뤼시앵의 호언장담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두 번째 마을에서도 이환의 흔적을 찾지 못한 그들은 세 번째 마을로 향했다.
“일부 기사들의 불만이 큽니다.”
위뱅이 작게 속삭였다. 뤼시앵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샤를이 뤼시앵에게 쓰라고 내준 자들이다. 기사로서의 소양을 갖추기는커녕, 버려도 좋은 자들만을 추렸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뤼시앵이다. 그들로서는 불만을 갖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위뱅 경도 내가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생각해?”
“뤼시앵 님께서 생각하신 일이니 다 이유가 있으리라 봅니다.”
“고마워.”
뤼시앵의 메마른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자신을 가꾸는 일에 소홀한 적이 없었던 그는 입술이 마르면 터져서 피가 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뤼시앵은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희미한 깨달음이 가슴 한구석에서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것을 들여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번째 마을에 도착했다. 뤼시앵은 심장이 이상할 만큼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기사들이 흩어져서 탐문하는 사이, 그는 위뱅과 함께 여관으로 향했다. 두 사람 모두 어깨 아래를 전부 망토로 가린 덕분인지, 여관 주인은 편안한 말투로 답했다.
“검은 머리와 갈색 눈의 20대 남자? 글쎄, 흔한 인상착의라……. 게다가 외부인이 들어왔다고 해도 전부 여관으로 오는 것은 아니라서 말이오.”
“많이 다쳤을 거요.”
“그렇게 말해도…….”
난감해하던 얼굴에 슬슬 짜증이 섞이는 것을 보니 정말로 아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위뱅과 주인이 말하는 사이 뒤로 물러나 있던 뤼시앵이 입술을 깨물었다.
“거, 안 묵을 거면 나가시구려. 괜히 장사 방해하지 말고.”
주인의 말투가 험해졌다. 다급해진 뤼시앵은 이환을 처음 봤을 때 떠올렸던 감상을 그대로 내뱉었다.
“그럼 혹시 특이한 손님은 없었어? 눈에 띈다거나, 이상하게 생겼다거나.”
“어린놈이 어디서 반말을…….”
화내려던 주인의 얼굴이 꿈이라도 꾸는 듯 몽롱해졌다. 뤼시앵은 위뱅에게 눈짓했다.
“누구요, 지금 생각하는 사람이.”
“댁들이 찾는 사람은 아닌데……. 내 평생 그런 미인은 처음이었지. 눈보다 하얀 얼굴에, 진짜 은도 그 사람의 머리카락처럼 반짝거리지는 않았을 거요. 눈동자는 또 어떻고. 강 밑바닥처럼 진한 푸른색 눈동자로 날 볼 때마다 심장이…….”
주인이 황홀한 표정으로 미인의 외모에 대해 주절거렸다. 아무리 들어도 이환과는 거리가 먼지라 위뱅이 뤼시앵에게 신호했다. 그러나 뤼시앵은 그것을 알아볼 정신이 없었다.
“은발에 푸른 눈……?”
기억의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한 조각이 있었다.
뤼시앵이 이환을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때였다. 당시 샤를은 이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위해 사람을 붙였었다. 바로 그자가 전한 말이었다.
‘알렉상드르 경이 잠행을 나갔습니다. 황궁 근처 번화가의 술집으로 들어가, 밤이 깊어질 때까지 술을 마신 후 황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샤를도, 뤼시앵도 이환에게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닐지 우려했다. 그러나 판에 박힌 듯한 보고가 반복되면서 그들은 마음을 놓았다.
달라진 보고가 들어온 것은 그즈음이었다.
‘은발에 짙은 푸른색의 눈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와 접촉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사감이 들어간 보고였다. 뤼시앵은 긴장했다. 미인계로 이환을 꼬여 낸 그에게 다른 미인의 등장이란 경계해야 마땅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샤를도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그 남자에 대한 조사를 요구했다.
그러나 뤼시앵은 그 조사 결과에 대해 들은 기억이 없었다.
별것 아닌 내용이라 잊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이제 와서 생각난 이유는 무엇일까. 뤼시앵은 위뱅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그 의미를 알아차린 위뱅이 뤼시앵의 입술 앞에 귀를 대 주었다.
“은발에 푸른 눈. 기억나? 분명 그때 알렉상드르 경이 술집에서 만났다고 했던……. 경도 함께 들었잖아.”
“네?”
위뱅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뤼시앵은 초조해졌다.
“기억 안 나?”
은발 자체가 지극히 드문지라 어지간해서는 기억 못 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위뱅은 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한 얼굴이었다.
“정확히 언제의 이야기입니까?”
“그러니까…….”
뤼시앵은 말을 잊었다. 기억이 아니었다.
“꿈…….”
“뤼시앵 님?”
“아, 아냐. 아무것도.”
뤼시앵은 얼른 말을 돌렸다. 다시 여관 주인에게로 향한 그가 물었다.
“그 사람에게 일행은? 혼자였어?”
혼자 몽상 중이던 주인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던 것인지, 그렇게나 불쾌해했던 뤼시앵의 반말에도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일행이 있었군. 맞아.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였어. 은발의 미인과 확연히 차이가 나서 기억하고 있지.”
찾았다. 뤼시앵은 희열에 차 웃었다.
***
플젠시아에서 뢴트너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동쪽으로 한참을 가야 했다. 이환과 압살롬은 여관을 나섰다. 성문을 통과할 때 조금 긴장했으나, 보초병은 산코냐 시에서 나온 날짜를 확인하는 것으로 검문을 마쳤다.
순조로운 여정이었다. 도주하기 전, 걱정거리의 하나였던 몬스터는 그들의 앞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환은 그 원인이 압살롬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새삼 발견한 쓸모였다. 이환은 어느 결엔가 마음을 놓았다.
나흘째 되던 날, 노상강도가 그들을 덮쳤다. 모닥불에 달려드는 부나방 꼴이었다.
이환은 몇 대 때리는 것으로 간단하게 강도를 제압했다. 그러고서도 마음이 영 좋지 못했다. 강도가 피골이 상접한 꼴을 했기 때문이었다.
짐을 뒤지자 빵 덩어리가 나왔다. 이환은 강도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강도는 코앞에 내밀어진 빵을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보았다.
“받아.”
강도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단 채 고개를 조아렸다.
이환은 빵을 들고 어딘가로 달려가는 강도를 끝까지 지켜봤다. 그는 연신 군침을 삼키면서도 빵을 먹지 않았다. 이환은 그에게 부양하는 가족이 있을 것이라 추측했다.
강도의 모습이 점이 될 즈음 이환이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압살롬과 눈이 마주쳤다. 내내 이환을 보고 있었던 듯, 흔들림 없는 눈빛이었다. 잠시 그를 마주 보던 이환이 말을 향해 걸어갔다. 그들은 곧 그 자리를 떠났다.
압살롬의 시선이 가진 의미를 이환이 알게 된 것은 그날 밤이었다.
작은 마을에 들어간 그들은 빈 헛간을 빌려 하룻밤 묵게 되었다. 바닥을 쓸자 제법 그럴싸한 잠자리가 마련되었다.
어느새 가을도 막바지에 접어든 시기였다. 문틈과 창을 통해 새어 들어온 바람이 싸늘했다. 이환과 압살롬은 이장에게 빌린 화로를 가운데 놓고 누웠다. 그러나 마을 공용 헛간이라 제법 컸던 탓에 작은 화로로 공기를 데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환은 모포로 몸을 둘둘 말았다. 그럼에도 목이나 발에 새어 들어오는 바람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저기, 이환.”
목 주변의 모포를 꼼꼼하게 여미던 이환이 고개를 돌렸다. 압살롬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까 그 강도 말입니다. 어째서 죽이지 않았나요?”
일상적인 말투와는 어울리지 않게 피비린내 나는 질문이었다. 이환이 되물었다.
“그런 건 왜 묻는데?”
“그저 알고 싶어서요. 당신이 그자를 죽이지 않는 이유가 따로 있는지, 있다면 무엇인지…….”
이환은 첫 번째 성물을 손에 넣었던 밤과 그다음 밤을 떠올렸다. 그때 압살롬은 몬스터의 몰살을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렸다.
동족 살해에 대해 압살롬이 가진 의식이 어떻든 이환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함께 여행 중이었다. 압살롬의 유별난 행동이 이환에게까지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사람을 죽이면 안 되는 이유가 따로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게 없으면 죽여야 하고?”
“그자는 당신을 봤어요, 만약 그자가 당신에 대해 소문이라도 퍼트린다면 어쩔 생각입니까?”
“노상강도라는 건 그 사람이 범죄자라는 뜻이지. 대체 누구를 대상으로 소문을 퍼트릴 수 있겠어?”
“그야…….”
압살롬이 말끝을 흐렸다. 이환이 말을 이었다.
“봐서 알겠지만 난 사람을 죽이는 게 달갑지 않아. 내내 그렇게 교육받아 왔으니까. 나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걸.”
그럼에도 압살롬은 납득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슬슬 피곤해진 이환이 쏘아붙였다.
“아니면 뭐야. 넌 내가 그 사람을 죽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후에 내가 괴로워하든 말든 아무래도 좋다고?”
이환을 좋아하는, 혹은 좋아하는 체하는 압살롬이라면 닥칠 수밖에 없는 화법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환이 생각한 대로의 반응을 보여 주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럼 된 거지 뭐가 문제야.”
이환은 그를 등지고 누웠다. 헛간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정적이 한참이나 유지되었으므로 이환은 압살롬이 잠들었다고 생각했다.
“이환, 자요?”
밤에 잘 어울리는 낮고 깊은 목소리가 정적을 가르고 울렸다. 이환은 못 들은 척했다. 잠시 후 압살롬이 있는 쪽에서 옷감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희미한 기척이 느리게 가까워졌다.
툭.
무엇인가가 팔에 닿았다. 이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은발 몇 가닥이 손등에까지 떨어져 있었다.
“미안해요. 그때 그런 말 해서…….”
뜻 모를 말이었다. 그러나 방금 전의 대화 때문인지, 이환은 그가 무엇에 대해 사과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벌써 한참은 지난 것 같은 대성당에서의 어느 밤, 압살롬은 무고한 소년을 죽인 이환에게 잘했다고 말했었다. 그때 이환이 표출했던 분노를 그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때의 말을 지금에 와서야 사과하다니.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더욱 우스운 것은, 그때의 괴로움이 저 말 한마디에 천천히 녹아 간다는 것이었다.
이환은 눈을 감았다. 모포 너머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그저 기꺼웠다.
다시 눈을 뜬 이환이 가장 먼저 본 것은 눈부신 빛무리였다. 그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불쾌함을 담아 작게 신음하는 때였다. 따뜻한 손이 어깨를 느리게 토닥거렸다.
“으응……. 괜찮아요, 이환. 괜찮아…….”
이환은 눈을 번쩍 떴다. 그제야 빛무리의 본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압살롬의 머리카락이었다. 이환의 어깨를 타고 흘러내린 은발 위로 창을 통해 쏟아진 햇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코앞에 압살롬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이환의 어깨에 뺨을 댄 채 잠들어 있었다.
압살롬의 잠든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인 듯싶었다. 이환은 그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비현실적이라 느껴질 만큼 아름답기 때문일까. 눈을 감은 압살롬은 정교한 인형처럼 보였다. 어쩌면 대리석 같은 피부나, 혹은 일부러 칠한 것처럼 붉은 입술 때문인지도 모른다.
속눈썹이 은색이라 눈매도 같은 색이었다. 지금은 미동도 없지만 이환은 그것이 어떤 식으로 떨리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조금 차가운 색의 눈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이쪽을 향할 때마다 냉기는 온데간데없이 따뜻하게 혹은 뜨겁게 빛나던―
이환은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압살롬이 그의 어깨를 다시 토닥거렸다. 방금 전에는 경황이 없어 몰랐던 그 움직임은 그저 상냥했다.
“괜찮아요, 이환. 다 잘될 거예요…….”
웅얼거리는 소리가 위로를 말한다. 말도 행동도 모두 익숙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이환 자신이 압살롬의 언동을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환은 언젠가 잠결에 흘린 눈물을 닦아 주던 손을 떠올렸다. 매번 이런 식이었을까.
‘이런 게 연기라고?’
압살롬을 믿고 싶다는 기분이 속삭였다. 이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그 소리가 압살롬을 깨운 모양이었다. 그가 후다닥 몸을 일으키는 순간 이환은 얼른 자는 척했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당황 어린 신음을 흘리던 압살롬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그렇게 중얼거린 압살롬은 잠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환은 따가울 정도의 시선을 느꼈다. 괜히 온몸이 근질거렸다. 그러나 달리 방도가 없으니 계속 잠든 척하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 그렇게 있던 압살롬이 이환에게서 멀어졌다. 곧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환은 헛간 안의 기척을 면밀하게 확인한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뭐야, 대체.”
말의 내용과는 달리 소리에는 혼란이 가득 서려 있었다. 이환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마구 들쑤셨다.
출발 준비를 마친 이환과 압살롬은 이장에게 갔다. 감사 인사도 하고, 음식도 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장은 그들의 말에 난색을 표했다.
“우리도 먹을 게 부족해서…….”
“돈은 얼마든지 지불하겠습니다.”
압살롬이 은화를 보여 주며 말했다. 반짝이는 은빛에 유혹당할 만도 하건만 이장은 고개를 저었다.
“도시나 큰 성에서야 그런 게 사용될지 모르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그건 별 쓸모가 없는 물건이라네.”
결국 그들은 빈손으로 마을을 나서야만 했다. 그래도 이전에 들렀던 성에서 사 둔 육포와 말린 과일 덕분에 굶는 일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이틀을 더 달려 당도한 농가에서 음식을 구할 수 있었다.
시간이 애매했던지라 이환과 압살롬은 그 농가를 떠나 좀 더 말을 몰았다. 오후 즈음 숲에 들어서게 되었다. 제법 긴 숲이었던지라 결국 그곳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이환을 앉혀 놓은 압살롬은 혼자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환은 따뜻한 모닥불을 쬐며 그런 압살롬을 바라보았다.
모닥불 위에 걸쳐 놓은 냄비 속에서 우유가 부르르 끓었다.
“자요, 이환. 배고프죠? 이거 먼저 마시고 있어요.”
압살롬은 나무잔에 우유를 따라 이환에게 쥐여 주었다. 이환은 그것을 천천히 마셨다. 뜨끈한 온도가 배 속까지 데워 주었다. 압살롬이 남은 우유에 이것저것 집어넣자 금세 수프가 완성되었다.
그들은 수프와 육포 그리고 빵으로 저녁을 먹었다. 제법 여유가 있어 보이는 농가에서 샀음에도 불구하고 빵은 대성당의 접객소에서 먹었던 것에도 훨씬 못 미쳤다. 이환은 퍽퍽하다 못해 부스러져 내리는 빵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합니까?”
압살롬의 목소리가 이환을 일깨웠다. 이환은 압살롬을 보았다. 언젠가 비슷한 질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한없이 뾰족하게 들렸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제법 온화한 소리였다.
“플젠시아가 너무 가난한 것 같다는 생각.”
“사람 좋은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린 압살롬이 한숨을 쉬었다.
“산코냐 시와 그 인근이야 대성당 덕분에 상업이 발달했다지만, 원래 플젠시아는 그리 부유한 나라가 아닙니다. 특히 제국과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가난한 사람들이 늘어나죠. 그 이유가 뭔지 알겠습니까?”
“글쎄. 제국과의 거래가 어려우니까?”
그토록 긴 시간을 제국에서 지냈음에도 이환은 그곳의 정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환 자신이 몬스터와 싸우느라 바빴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주변에서 철저하게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니 제대로 대답할 수 있을 리 없다. 고개를 저은 압살롬은 이환이 생각도 못 했던 내용으로 대답했다.
“이환, 당신입니다.”
“나?”
“제국에 가까울수록 몬스터의 침범을 덜 받습니다. 다른 곳으로 향할 몬스터마저 당신이 전부 해치워 버리기 때문이죠. 반대로 말하자면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곳에서는 이환이 누구인지 알지도 못합니다. 안다 해도 ‘왜 우리는 도와주지 않느냐?’고 원망이나 하지 않으면 다행일까요.”
압살롬은 냉소적으로 말했다. 평소 이환을 대할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태도였다. 이환은 그런 압살롬을 조용히 응시했다.
지금 그 말은 마치―
“우리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망토, 답답해했잖아요.”
“……그래.”
“다 먹었으면 그릇 이리 주세요. 설거지하고 올 테니까요.”
이환은 혀끝까지 올라온 ‘내가 할게.’라는 말을 삼켰다. 그릇을 모아 건네자 압살롬이 손을 내밀었다.
“아.”
압살롬이 외마디 소리를 흘렸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살짝 스쳤기 때문이었다. 이제까지 몇 번이나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발그스름해진 귀가 드러났다. 압살롬은 그것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다녀올게요.”
이환은 멀어지는 압살롬을 응시했다. 뒷모습만으로도 그가 무슨 기분인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설거지하면서 들떠 보이는 드래곤이라니.’
트집 잡고 텃세 부리겠다는 이환의 계획은 영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릇을 들고 돌아오는 압살롬의 손이 벌겠다. 얼음장 같은 물속에 손을 담갔으니 저럴 만도 했다. 이환은 그럼에도 즐거운 듯한 압살롬을 보다가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그거 내려놓고 이리 와.”
“네?”
이환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언제 돌려줄까 고민했던 물건이 손끝에 닿았다. 그것을 꺼내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으로는 압살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 이환!”
압살롬이 비명 비슷한 소리를 냈다. 이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일을 했다. 그러자 잠시 허둥지둥하던 압살롬이 시선을 내렸다.
“이건…….”
이환이 꺼낸 것은 언젠가 압살롬이 줬던 손수건이었다. 이환은 그것으로 압살롬의 손에서 물기를 훔쳤다.
“가지고 있었군요.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남의 물건을 왜 버려.”
이환 자신이 들어도 부루퉁한 목소리였다. 압살롬이 웃었다. 나직한 소리가 밤의 어둠을 타고 울렸다.
이환은 압살롬의 손을 꽉꽉 주물렀다. 그러나 손수건 너머 느껴지는 체온은 영 올라가지 않았다. 압살롬의 손을 입가에 가져가 입김을 불었다. 별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머리 위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이, 환…….”
이환은 고개를 들었다. 압살롬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짙푸른 눈동자가 뜨겁게 일렁였다. 선연한 욕망이었다.
압살롬의 손가락이 이환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그것이 느리게 움직여 이환의 뺨을 살며시 건드렸다. 아직 차가웠지만 이환은 그에 대한 어떠한 반응도 보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통째로 삼켜질 것만 같았다.
거미줄로 짠 듯 섬세한 은빛의 베일이 가까워져, 아직 허공에서 멈춘 채인 이환의 손가락에 걸렸다. 황궁 내 그의 거처에 있을 실크 침구처럼 선뜻한 감촉이었다.
이환. 붉은 입술이 떨리는 소리로 그를 불렀다. 강렬한 현기증에, 그는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뜨거운 숨결이 서로의 입술에 닿았다.
푸드덕!
무거운 날갯짓 소리가 울렸다. 이환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압살롬을 밀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밀려난 압살롬이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미, 미, 미안해요! 이환, 내가 잠깐, 어, 정신이 잠깐……. 서, 설거지! 아직 덜 마쳐서!”
압살롬은 이미 설거지가 끝난 그릇을 주워 들고 물가로 달려갔다. 그나마도 몇 개는 빠뜨린 채였다. 그러나 이환은 그것을 지적할 정신이 없었다.
‘미쳤어? 드디어 돌은 거냐? 저게 뭔 줄 뻔히 알면서!’
이환은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손등에 피가 묻어나도 계속했다. 그러나 한순간 스쳤던 부드러운 감촉은 영 지워지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