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 (2/10)

Chapter 1.

사냥개는

목줄을 물어뜯었다

큰 키에 단정한 얼굴, 서글서글한 성격 그리고 성실함까지. 열여덟 살의 성이환은 어디에 데려다 놓아도 잘 살 법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 이세계까지 포함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친구가 권하는 판타지 소설을 읽어 볼 걸 그랬다. 이세계에 온 첫날, 이환은 성실하게 공부만 했던 과거를 조금 후회했다.

“가끔 이런 일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차원의 유랑자라고 부르는데…….”

이환이 낯선 세계의 말을 제법 알아듣게 되었을 무렵, 그를 담당한 교사는 그렇게 말했다.

“돌아갈 방법이 있겠죠?”

이환의 필사적인 물음에 돌아온 것은 신의 영역에 속한 일은 일반인들이 알기 어렵다는 대답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의탁 중인 이곳, 황궁의 권력자에게 의지했다.

이환과 동갑이라는 황태자 샤를은 이세계 출신인 특이한 손님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초빙했다는 학자가 이환을 방문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결국 그는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고대의 기록에 따르면 차원의 유랑자를 돌려보낸 적이 있다고 합니다.”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다는 거군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족히 천 년은 묵었다는 역사서는 이환이 봐도 삭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는 문드러지고 번져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는 글자들을 핥듯이 응시했다. 저것과 같은 시대의 문서를 뒤지면 단서가 더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자 냄새나는 고문서가 향기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조사는 난항에 부딪혔다. 인력 부족 탓이었다.

이환이 머무는 제국 피에리냐크는 현재 식인 습성의 몬스터를 상대로 전쟁 중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환도 조사를 위한 인력을 내달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미안하오. 손님을 생각하면 어떻게든 사람을 투입해야 하나…….”

어느 날 황태자가 사과의 말을 전해 왔다. 저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렇게 의례적인 말을 하면서도 이환은 초조함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그런 그에게 샤를이 권한 것은 바로 몸의 단련이었다.

놀랍게도 이환은 칼에 소질이 있었다. 이세계에 오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재능이었다. 게다가 어찌 된 일인지 힘도 지구에서보다 몇 배나 강해졌다.

황실 기사단의 단장에게서 승리를 거둔 날, 이환은 생각했다. 전쟁 중이라 조사하기 어려운 거라면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면 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이환은 전화에 몸을 던졌다.

이환은 알지 못했다. 스스로 생각해 판단했다고 여겼던 그 결정이 사실은 주도면밀한 계산에 따른 결과라는 것을. 그것을 의심할 즈음, 그는 이미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알렉상드르 경.”

올해 열일곱 살을 맞이한 5황자가 뾰로통한 얼굴로 이환에게 다가왔다.

이환 알렉상드르 성. 언밸런스한 이 이름은 첫 전투에서 공을 세운 그에게 황제가 내린 포상이었다. 이 세계 사람들은 그를 발음이 어려운 이환 대신 알렉상드르라고 불렀다.

대한민국에서 나고 자란 이환이 조금 부끄럽다 생각할 만큼 화려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환은 그 사치스러운 울림이 싫지 않았다.

“어딜 갔다가 이제 와? 내가 경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사랑스러운 황자가 불러 주기 때문이었다.

뤼시앵 크르와 델 피에리냐크. 이환보다 네 살이 어린 그는 신 이옐라의 사자로서 모두에게 외경의 대상인 이환을 거리낌 없이 대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한순간이었으나 깊이는 한이 없었다. 이환은 모든 의혹을 뒤로한 채 연인을 위해 싸웠다. 수줍음 많은 연인이라 몰래 나누는 입맞춤이 전부였지만 그마저도 행복했다.

그리고 지금 스물일곱이 된 이환의 앞에 새로운 국면이 펼쳐졌다.

쿨럭, 쿨럭―

기침 소리가 막사 안에 울렸다. 무엇엔가 막힌 듯하고, 동시에 축축하게 젖은 소리였다. 잠시 이어졌던 기침은 곧 잦아들었다. 얕은 한숨이 뒤를 이었다.

이환은 피에 젖은 수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색깔이다.

작년부터 시작된 각혈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지난달에는 토혈도 했다. 정체를 숨기고 찾아간 의사는 이환에게 손쓰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말했었다. 이후 그는 제 병의 흔적을 감춰 왔다. 그의 병이 인간 전체의 사기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로 입을 헹군 후 수건을 익숙하게 태워 없애는 때였다.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막사를 향해 가까워졌다. 이환은 제복 소매로 다시 한 번 입 주위를 훔쳤다. 입가가 깨끗하다는 것을 확신할 즈음 발자국이 막사 앞에서 멈췄다.

“접니다, 알렉상드르 경.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이환의 예상대로 부관 뒤크 랭뷔르였다. 막사 안으로 들어온 뒤크는 인사조차 생략하고 입을 열었다. 평소의 뒤크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그가 이제부터 말할 소식의 중대함을 역설했다.

“황도(皇都)에서 전해진 급보입니다. 드래곤이 폐하께 휴전 제의를 전달했다고 합니다.”

“휴전 제의? 누가 누구에게?”

이환은 근면 성실한 뒤크가 시답잖은 농담을 할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되묻고 말았다. 귀를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뒤크도 이환과 비슷한 심정인지, 복잡하고 미심쩍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드래곤이 황제 폐하께……입니다.”

이환은 허리에 찬 칼을 내려다보았다. 금과 루비로 휘황찬란하게 장식된 이 칼에 몬스터의 피가 묻었던 것이 바로 두 시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휴전이라니.

이환이 다시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막사 바깥에서 급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상드르 경! 몬스터가!”

이환은 칼을 움켜쥐고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오늘 그의 적은 기동력이 우수한 몬스터인 가고일이었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아군에 큰 피해가 미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막상 밖으로 나온 이환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가고일들은 피막으로 뒤덮인 날개를 펼친 채 물러나고 있었다. 이쪽을 경계하는 듯 선두의 가고일들은 이환을 향하고 있었으나 뒤쪽 무리는 벌써 먼 곳까지 날아갔다. 뒤크가 물었다.

“추적할까요?”

“……기다려.”

망설이던 이환이 명령을 내렸다.

한 시간 후, 너른 평원에는 이환의 기사단만이 서 있었다. 그는 몬스터가 사라진 방향을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황도로 귀환한다.”

황도에 돌아온 이환과 동료 기사들은 대기를 명령받았다. 다른 기사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이환 역시 언제나처럼 제 마음 둘 곳으로 향했다.

그러나 사랑해 마지않는 연인 뤼시앵은 그의 거처에 없었다.

“영지로 순시를 나가셨다고?”

뤼시앵의 영지는 먼 남쪽 지방에 있었다. 작지만 내실이 제법 탄탄한 곳이라, 뤼시앵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하는 다른 형제들의 시샘을 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일 년에도 몇 번씩 영지로 향하곤 했다.

“급하신 용건이라면 저하께 파발을 띄우겠습니다.”

하인이 그렇게 말했지만 이환은 고개를 저었다. 공무차 떠난 사람을 그저 보고 싶다는 이유로 불러올 수는 없었다.

“돌아오시거든 내가 방문했었다고 전달해 줘.”

“필히 전해 올리겠습니다.”

이환은 혼자 제 거처로 돌아갔다. 이 세계에서 그의 거처는 황궁 내의 작은 별궁이다. 상주하는 하인들이 있는지라 내내 손을 타는 곳임에도, 돌아올 때마다 서늘함이 이환을 맞이했다. 그는 지닌 사람을 지켜 준다는 의미를 지닌 동물, 날개 달린 늑대로 장식된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하인들을 시켜 준비한 목욕물에 먼지투성이 몸을 씻은 후 침실로 향했다. 며칠 밤낮을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않고 달린 터라 매우 피곤했다. 그러나 베개에 머리를 대자 오히려 잠이 달아났다. 이환은 뒤척거리며 이런저런 것들을 생각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뒤크가 전달한 급보였다. 귀환을 보고하기 위해 찾아간 황태자에게서 그 급보가 사실임을 확인받을 수 있었다.

몬스터의 왕 드래곤이 먼저 휴전을 제안했다.

제집에 돌아와서 긴장이 풀린 덕분일까. 이제야 조금 실감이 난 이환은 그중 한 단어를 되뇌어 보았다. 휴전. 전쟁을 쉰다는 말이지만, 대한민국 출신인 그는 그 말을 전쟁이 종결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전쟁이 끝난다. 그 말은 이제 더 이상 칼을 들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그때 배 속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이 이환을 엄습했다. 그는 몸을 웅크렸다. 참을 수 없는 구역질에 속을 게웠다. 핏덩어리가 깨끗한 시트 위에 쏟아졌다.

휴전이 이뤄져 쉬게 된다면 이 병도 조금은 호전될 것이다. 그러면 내내 꿈꿔 왔던 것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뤼시앵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평화를 누릴 날을 바라며, 그는 고통에 잠긴 신음을 흘렸다.

이환이 황도에 귀환한 지 보름이 지났다. 뤼시앵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몬스터와 싸우는 것 이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지라 그는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책과 함께하는 시간은 더디 갔다. 수련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병 탓에 그럴 수도 없었다. 지루해진 이환은 몰래 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결심했다.

낡은 옷을 걸친 채 황궁을 빠져나가 번화가로 향했다. 단골 술집에 들어서자 주인이 눈짓으로 알은척을 했다. 구석 자리에 앉아 맥주와, 간이 심심한 버섯 요리를 주문한 이환은 시선을 문 쪽에 고정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것을 보며 기대와 실망을 반복했다. 이환이 내내 바라던 얼굴은 밤이 깊어진 후에야 나타났다. 이환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들어 올렸다.

“여기.”

크지 않은 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친구가 이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몇 번을 봐도 경탄하게 되는 미모의 소유자, 압살롬이 그곳에 있었다.

“이쪽이야, 롬.”

압살롬이 이환을 향해 다가왔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그런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지 이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랜만이다.”

마지막으로 압살롬을 본 것이 지난달이었다. 그때 그는 기묘한 표정으로 이상한 말을 했었다.

‘더는 무리예요.’

당시 이환은 그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두려움을 품었다.

‘다시는 날 안 보겠다는 말이야?’

지금 생각하면 좀 부끄러울 만큼 다급한 질문이었다. 그런 이환을 물끄러미 보던 압살롬이 붉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웃음 비슷한 것을 지었다. 이환은 그 표정에서 피로를 읽었다.

‘그럴 리가요.’

그때의 얼굴을 떠올린 이환은 압살롬을 살폈다. 회상 탓인지 얼굴이 해쓱해 보였다.

“안색이 안 좋은데. 어디 아파?”

그러자 압살롬이 웃었다. 지난번에 봤던 것과 비슷한 웃음이었다.

“그건 이환 당신의 이야기겠죠. 지금 당신 얼굴이 어떤지 알고 있습니까?”

이환은 얼굴을 매만졌다. 꺼칠한 피부가 느껴졌다. 뤼시앵이 보면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지금 뭘 생각하고 있나요?”

가시 돋친 목소리였다. 이환은 압살롬을 보았다. 짙푸른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 건 나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 생각은 하지 말아요.”

“미안하다.”

압살롬의 말이 친구 사이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그러니 그 말에 대해 굳이 뭔가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이환은 곧바로 사과했다.

삼 년 전, 이환은 압살롬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당시에도 뤼시앵과 사귀는 중이었던 이환은 당연히 그를 거절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압살롬은 어디까지나 친구였으므로 뤼시앵이 아니었더라도 같은 대답을 돌려줬을 가능성이 컸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친구로 지내는 중이었다. 이 세계에서의 유일한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았던 이환의 바람을 압살롬이 들어준 덕분이었다.

그리고 압살롬의 짝사랑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이환은 압살롬을 살폈다. 고운 은발, 청람의 눈동자, 성별을 착각하게 만드는 미모. 어디를 봐도 이환에게 목매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압살롬은 그에게 사랑을 말했다. 마지막 고백은 불과 이 개월 전이었다.

가끔 압살롬의 눈동자 속에 재만 남은 듯 보일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환은 오랜 짝사랑에 타들어 간 심장이 눈앞에 들이밀어진 기분이었다.

‘전부 타 버리면 뭐가 남는 걸까.’

문득 떠오른 생각에 흠칫한 이환은 얼른 맥주잔을 잡았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화만 내고 있을 거냐?”

압살롬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대로 넘어가 준다는 뜻이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이환은 추가 주문을 했다.

***

이환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는데 잠에서 깨어나는 느낌이 참 이상했다. 등으로는 딱딱한 침대가 느껴졌고, 코끝에는 기억에 없는 냄새가 스쳤다. 고개를 돌리자, 겨우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낯선 가구가 보였다.

기억을 더듬었다. 압살롬과 마주 앉아 웃었던 게 떠올랐다. 그 뒤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한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았더니 고작 맥주 몇 잔에 완전히 취해 버린 모양이었다.

그럼 이곳은 술집 2층의 방이나, 혹은 근처 여관일지도 모른다. 이환은 주정뱅이를 버리지 않고 이곳까지 데려와 준 압살롬에게 감사했다.

아직 밤은 깊었고, 창밖에서는 딱 듣기 좋을 만큼의 소음이 은은하게 울리고 있었다. 체내에 남은 알코올마저 잠을 부추겼다. 이환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들었을 즈음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가까워지는 기척이 익숙했다.

‘롬이구나.’

이환이 안심하고 계속 자려는 때였다. 부드럽고 건조한, 손가락으로 생각되는 것이 입가에 닿았다. 체온이 높은 압살롬답게 뜨거운 그것이 이환의 입가와 뺨을 문질렀다.

그즈음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이환은 입안에서 감도는 비린 맛을 깨닫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압살롬이 왜 자신의 얼굴을 문지르는지 알 것 같았다. 절로 가빠지려는 숨을 애써 차분히 골랐다.

압살롬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어쩌면 이환이 긴장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었다. 겨우 떨어진 그것은 우연인 듯 이환의 입술을 스치고는 멀어졌다.

그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때였다. 조용한 방 안에 물소리가 울렸다. 키스할 때의 소리였다. 압살롬의 행동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이환은 뺨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 발소리가 났다. 압살롬이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이환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곧 문이 열리고 희미한 빛이 방 안에 들이쳤다.

“기다려요.”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나선 압살롬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던 이환은 새벽이 다 되어서야 귀가했다.

별궁은 한밤중임에도 불이 훤하게 켜져 있었다. 사람들이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상드르 경! 어디에 계시다 이제 오십니까!”

이환을 발견한 하인이 외쳤다. 단 한 번도 그의 앞에서 소리를 높인 적이 없는 자였다. 조금 놀란 이환은 말을 잃었다. 하인은 그가 입을 다물거나 말거나 제 할 말을 이어 갔다.

“어제저녁부터 안 보이셔서 한참을 찾아다녔습니다. 들어가시지요.”

묘하게 강압적인 태도였다. 이환은 그것이 잠도 못 자고 돌아다녔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리라 생각했다. 자신이라도 화가 났을 것이므로 하인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걸었다.

2층에 있는 침실로 가기 위해 계단에 발을 올리는 때였다. 장년의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환은 그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위뱅 경?”

뤼시앵의 밀착 호위를 전담한 기사 위뱅이 그곳에 있었다. 그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뤼시앵이 황궁에 돌아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위뱅은 이환과 시선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알은체조차 하지 않았다. 이환은 지체 없이 멀어지는 등에서 묘한 불안감을 느꼈다.

아무리 연인이라도 이른 아침부터 방문하는 것은 실례다. 이환은 날이 밝고서도 한참을 기다린 후 뤼시앵을 찾아갔다. 지난번과는 다른 하인이 그를 맞이했다.

“5황자 저하께서는 회의를 위해 본궁에 가신 터라 지금 이곳에는 안 계십니다.”

“언제 돌아오셨지?”

“어제저녁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하인에게 화가 나 그렇게 물었는데, 알고 보니 전부 이환의 탓이었다. 결국 혼자 돌아선 그는 터덜터덜 걸어 거처로 돌아갔다.

이때만 해도 이환은 곧 연인을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만남은 한참 뒤에나 성사되었다. 이날로부터 꼭 사흘 뒤, 들이닥친 기사들이 이환을 감옥에 처넣었기 때문이었다. 죄목은 신성 모독 및 타국과의 내통이었다.

반역자 등 중죄인만 간다는 황궁 지하 감옥은 한산했다. 이환은 그중 가장 안쪽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쇠사슬에 꽁꽁 묶인 채인 그를 간수 여럿이 달려들어 벽에 매달았다.

이환은 손목을 당겨 보았다. 몇 겹으로 둘린 쇠사슬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아무리 이환이 괴력의 소유자라 해도 이러한 것을 끊을 수는 없었다. 그의 눈에 절망이 서리자 간수들이 비웃었다.

“신께서 내려보낸 자라더니 인간이 만든 쇠사슬 하나 못 끊어?”

이환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었으므로 저런 말에 반응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뤼시앵.’

한미한 출신의 힘없는 5황자. 뤼시앵은 황자에게 당연히 주어지는 영지조차 이환의 연인이 되기 전까지는 받지 못했었다.

지금 뤼시앵은 어떤 상황일까. 혹시 자신의 연인이라는 이유로 안 좋은 일을 당하는 것은 아닐까.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이환을 지배했다. 최근 만나지 못했던 것도 혹시 누군가에게 억류당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그조차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간수들은 온갖 고문 도구들을 가져와 이환을 다그치고, 온갖 증거들을 언급하며 자백을 종용했다. 하나같이 알지 못하는 증거들이었다. 이환은 부정했고, 곧 살 타는 냄새가 감옥 안에 퍼졌다.

가장 먼저 죄인의 낙인이 찍혔다. 다음은 손톱이었다.

손톱에 이어 발톱이 모두 사라지자 이번에는 사람 모양의 형틀에 눕혀졌다. 형틀 위에는 여러 개의 대못이 빼곡하게 솟아 있었다. 곧 시뻘건 피가 형틀을 적셨다.

간수들은 고통으로 옴짝달싹도 못 하는 이환의 팔다리를 밧줄로 묶었다. 그들 중 한 명이 어딘가로 사라진 직후였다.

끼이익―

밧줄이 이환의 팔다리를 잡아당겼다. 곧 관절이 탈구되고 이환은 비명을 삼켰다.

계속해서 손가락이 부서지고 이가 부러졌다.

그럼에도 이환은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었다. 모든 고통을 압도하는 단 하나의 얼굴 때문이었다. 만약 그가 죄인이 된다면 뤼시앵도 연루될 수 있었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그가 끝끝내 참아 내자 이번에는 황자들이 찾아왔다. 평소 뤼시앵을 무시하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이환의 머리를 짓밟으며 말했다.

“뤼시앵을 살리고 싶겠지?”

결국 이환은 제 입으로 모든 죄목을 인정했다.

이환에 대한 공개재판이 광장에서 열렸다. 이를 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은 이환을 보자 멈칫했다. 그들이 생각했던 모습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이환에게 욕설을 퍼붓고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바로 몇 달 전 이곳에서 꽃비를 맞았던 기억이 이환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이환을 믿어 주지 않았다.

죽을 고비를 무수히 넘겼다. 저도 모르게 솟아나는 두려움을 억누르며 칼을 휘둘렀다. 그 결과가 이것이라니. 이환은 군중을 멀거니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재판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잇따라 나서서 이환을 고발했다. 그들 중에는 뒤크도 있었다. 재판관은 뒤크가 내민 편지 뭉치를 받아 들었다.

[사람들은 저를 구세의 기사라고 부릅니다. 이옐라가 보낸 사자라고도 하더군요. 그들이 성당이라고 부르는, 신의 껍데기조차 존재하지 않는 공허한 공간에 들어설 때마다 구역질이 납니다. 나의 신께서는 이런 저를 긍휼히 보아 주시겠지요.]

[이곳, 제국의 우민들은 눈먼 소에 빗댈 수 있습니다. 제가 신호만 하면 그저 앞만 보고 달려들겠지요. 얼마 안 있어 그들은 제가 황제의 목을 딴다 해도 꽃을 뿌려 주게 될 겁니다. 그때가 오면 진실한 신의 교리를 이 나라에 전파할 수 있게 되리라 믿습니다.]

[이옐라! 그 거짓된 신을 찬양할 때마다 제 혀가 타들어 갑니다. 나의 신이여, 제가 이 지옥을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저를 돌보소서.]

이환이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쓰인 편지가 죄를 고했다.

그의 곁에는 사교(邪敎) 무리가 서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색출됐다는 그들은 이환의 지시를 받아 황제에게 죽음의 저주를 걸었다고 자백했다. 이제껏 이환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죄목과 증거에 긍정했다. 뤼시앵을 살릴 길이 이것뿐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환은 재판관이 치를 떨며 형을 선고하는 것을 흐린 눈으로 응시했다.

그 자리에서 이환은 두 팔을 잃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솟구친 피가 멎기도 전에, 잘린 부위를 뜨거운 인두가 지졌다. 고통에 신음하는 그에게 재판관이 말했다. 죽어 마땅하나, 지금까지 세운 공을 생각하여 자비를 베푼다고.

자비. 이것이 자비인가. 지하 감옥으로 돌아가는 걸음걸음이 피로 얼룩졌다.

이환은 지하 감옥에서 신음하며 뤼시앵을 떠올렸다. 그만 무사하면 되었다. 그가 자신을 외면하고 부정해도 좋으니 살아남길 바랐다. 끊이지 않고 흐른 눈물이 뺨의 핏물을 닦아 내렸다.

며칠 후의 밤, 마차 한 대가 황궁을 몰래 빠져나갔다. 안에는 눈을 가린 이환이 타고 있었다. 그는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한 채 며칠이나 되는 긴 시간을 마차 안에서 보냈다.

이윽고 마차가 멈추고 눈가리개가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을 껌뻑거리던 이환은 지척에 선 연인을 겨우 발견할 수 있었다.

“뤼시앵!”

이환은 황급히 뤼시앵을 향해 다가섰다. 두 걸음쯤 떼었을 때 이환을 붙잡은 병사가 다리를 걷어차 무릎을 꿇렸다. 그러나 그는 뤼시앵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넌 무사해? 괜찮아? 다친 데는!”

그간 품어 왔던 물음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잠시 대답이 없던 뤼시앵이 웃었다.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끔찍한데.”

이환이 좋아했던 우아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 뤼시앵은 언어의 칼을 휘둘렀다. 그가 애용하는 물망초 향유의 애잔한 향기가 은은하게 흩어졌다.

“아둔하긴. 내가 널 진심으로 좋아했다고 믿는 거냐?”

“……뭐?”

“전부 샤를 형님의 명령이었다. 네 낌새가 수상하니 잘 달래서 제자리에 붙어 있게 만들라고 말이야. 설마하니 내게 음심을 품고 달려들 줄은 몰랐지. 제 분수도 모르는 놈이.”

끔찍했다고, 야수처럼 돌변해 덮치는 게 아닌가 두려워 잠도 못 이뤘다고 한다. 고상한 단어와 냉정한 소리로 매도한 뤼시앵이 이환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이제 다시 안 봐도 된다니 속이 다 시원하군.”

그러더니 붉은 입술을 끌어올려 얄궂게 웃었다.

“마지막 자비로 네가 왜 이곳에 끌려왔는지 알려 주마. 이곳은 드래곤이 지정한 거래 장소다. 그가 휴전의 대가로 널 달라고 했거든. 그렇게라도 네놈을 갈가리 찢어 버리고 싶은 모양이지.”

어느덧 이환은 혼자 남았다. 다리는 자유로웠지만 그는 아무 곳에도 갈 수가 없었다. 물망초의 잔향이 그를 옭아맨 듯했다.

시간이 흘러 해 질 녘이 되자 누군가가 홀연히 나타났다. 아마도 드래곤일 터였다.

이대로 죽는가. 이환의 텅 빈 눈이 그를 좇았다. 그런데 상대의 실루엣이 눈에 익었다. 설마, 그럴 리가. 그는 이옐라가 거기까지 잔인하지는 않길 바랐다.

그러나 이 세계의 신은 그의 마지막 소원까지 짓밟았다.

“이환.”

눈앞에 있는 것은 이 세계에서 단 한 사람, 이환의 진짜 이름을 불러 주는 자였다.

노을을 비추어 붉게 보이는 은발, 원망이 일렁이는 청람의 눈동자, 딱딱하게 굳은 이목구비.

“롬.”

그때 압살롬이 기다리라고 해서 그 방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그날 돌아오지 않았던 그는 이환을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환은 맥없이 풀렸던 다리에 힘을 주었다.

“네가 드래곤이었다고?”

침묵이 곧 긍정이었다. 이환은 후들거리는 다리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시야 끝에 절벽이 보였다. 마차를 타고 한참을 덜컹거리며 올라왔으니 이곳은 고지대일 것이다. 아래쪽에서 느껴지는 이 기운은 몬스터의 것이었다.

드래곤이 눈을 크게 뜨더니 무어라 말했다. 감정에 겨운 목소리가 귀를 스쳐 지나갔다.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이환을 속이고 기만했다. 손에 쥐었다고 생각한 것은 애초에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단 하나, 본디 이환의 것이었던 목숨만은 그의 뜻대로―

이환은 몬스터가 우글거리는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몇 마리 몬스터가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짓이겨졌다. 날카로운 발톱이 이환의 몸을 찢었다.

낙조를 가르는 울부짖음이 그가 느낀 마지막 감각이었다.

***

그런데 눈을 뜨니 뤼시앵의 마차 안이다. 이환은 젖은 뺨을 닦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상황부터 확인해야 했다.

마차의 커튼을 들춰 바깥 상황을 확인하려는 때였다. 익숙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이환은 주인을 기다리는 개라도 된 양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이윽고 마차의 문이 열렸다.

“알렉상드르 경, 아직 잠들어……. 아, 일어났네?”

밝은 햇살이 환한 금발 위에서 눈부시게 부서졌다. 뤼시앵. 이환에게서 등을 돌렸던 연인이 한참 어린 얼굴로 웃고 있었다.

꿈이었나? 이환은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에도 분노와 미움이 솟구쳤다.

가슴속에서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감정과는 다르게 이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들이닥친 감정을 소화하기에 벅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환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뤼시앵이 마차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어디 아파?”

작고 보드라운 손이 이환의 이마를 짚었다. 열은 없는데.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기억보다 높았지만, 조금 서늘한 체온은 이제까지 알던 것과 똑같았다.

심장이 반사적으로 두근거린다. 몸이 분노를 기억해 움직이려 든다. 이환은 이를 악물었다. 자칫 마음을 놓았다가는 뤼시앵을 밀쳐 버릴 것 같았다.

굳어 버린 그를 두고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뤼시앵이 웃었다. 마차 안에 방울 같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일어났으면 나와. 모처럼의 피크닉이잖아.”

뤼시앵은 마차 문을 활짝 열었다. 어둑했던 마차 안으로 햇살이 한꺼번에 들이쳤다. 이환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어린 황족들이 유모의 손을 붙들고 평화롭게 산책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것은 백일몽일까. 어쩌면 누군가의 저주일지 모른다. 이환이 깨어나기 위해 뺨을 내리치려는 때였다.

먼 곳에서부터 거대한 것이 땅을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점점 가까워지는 그것에 이환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가 마차를 박차는 것과 동시에 비명이 울렸다. 그 위를 여자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뒤덮는다. 땅에 내려서자마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 명의 기사들이 어딘가를 경계하고 있었다.

이환은 웃음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았다. 상반신은 여성이고 하반신은 뱀인 몬스터 라미아가 그곳에 있었다.

이환을 본 라미아가 입맛을 다시며 웃었다. 라미아는 인간의 피를 주식으로 하며, 특히 남자의 피를 선호했다. 그들에게 건장한 기사가 몇이나 있는 이곳은 진수성찬이 차려진 식탁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라미아가 손을 곧추세웠다. 독샘을 가진 검고 긴 손톱이 위협적으로 번들거렸다. 이환은 아직도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상황이 기억에 있기 때문이었다.

볕 좋은 가을날, 단풍 구경을 위해 나선 모처럼의 피크닉, 황실 소유 숲에 나타난 라미아 무리.

선두에 선 라미아가 달려들었다. 이환은 몸에 익은 대로 움직였다. 어느새 뽑아 든, 유려하게 휘어진 신월도가 햇살 아래 번쩍이며 라미아를 베어 갔다.

촤악!

붉은 피가 가을 낙엽 위에 길게 튀었다. 고통에 찬 비명이 맑은 하늘을 가로질렀다. 이환은 몸이 가로로 두 동강 난 채 쓰러진 라미아의 명치를 짓밟고 섰다. 역으로 세운 칼이 몬스터의 풍만한 가슴을 거침없이 뚫었다.

콰득!

부드러운 살을 파고든 칼끝이 그 아래 자리한 유백색 구슬을 부쉈다. 몬스터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핵이었다. 이것이 멀쩡한 이상 몬스터는 결코 죽지 않는다.

유백색의 핵이 검게 물들며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흩어지는 모양새가 그다지 좋지 않았으나 인체에 해는 없었다. 이환은 얼마간 폐 속으로 들어온 연기를 뿌리치듯 내뱉으며 걸음을 뗐다.

세 번째 라미아의 핵을 부수려는 때였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라미아가 이환의 허벅지를 할퀴었다. 낮게 신음한 이환은 그 라미아의 왼쪽 가슴을 가차 없이 꿰뚫었다. 단번에 핵까지 부서뜨린 칼에 라미아는 비명도 못 지르고 절명했다.

이환은 독의 확산을 막기 위해 손수건으로 허벅지를 꽉 묶었다. 독액이 섞인 피를 옷자락으로 닦던 중, 그의 손이 얼어붙었다.

꿈인지 무엇인지 모를 환상 속에서 가졌던 흉터와 동일한 모양의 상처가 허벅지 위에 새겨져 있었다.

이환은 거울 앞에 섰다. 매끄러운 유리면에 익숙하면서도 어딘지 낯선 얼굴이 비쳤다. 거울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자신의 얼굴이 왜 이리도 어색하게 느껴지는지 깨달았다.

병마에 시달렸던 스물일곱 살 때와는 달리 지금은 안색도 좋았고 눈도 맑았다. 고통을 참느라 습관적으로 찡그려 주름이 깊게 파였던 미간도, 볼품없이 야위었던 뺨도 매끄러운 선을 그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스물다섯 살 때 몬스터에게 물어뜯겨 반쯤 잘려 나갔던 오른쪽 귀가 멀쩡했다. 이환은 동그스름한 귓바퀴를 어루만지다 제복 단추에 손을 가져갔다.

흑색과 적색, 금색이 어우러진 황실 기사단의 제복 코트가 떨어져 내렸다. 셔츠와 바지마저 벗어 던진 그는 거울에 등을 비춰 보았다. 흉터가 제법 있기는 했지만 기억 속의 등에 비하면 훨씬 깨끗했다.

스물네 살이었던 해의 늦가을, 몬스터의 습격으로 절벽에서 떨어진 일이 있었다. 충격으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이환의 위로 바위들이 쏟아져 내렸다. 목숨은 간신히 건졌지만, 등에는 보는 것만으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참혹한 흉터가 남았었다.

이환은 왼쪽 허벅지에 시선을 주었다. 같은 해 가을, 라미아에게 입었던 상처가 허벅지를 피로 물들이고 있었다.

꿈일까. 그렇다면 어느 쪽이 꿈이고 어느 쪽이 현실인 걸까. 스물일곱에 죽은 이환을 꿈으로 두기에는 오늘의 사건이 마음에 걸린다. 그렇다고 스물넷의 이환을 꿈으로 두기에는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너무나 생생하다. 게다가 피크닉 이전의 기억도 흐릿했다.

만약 둘 다 꿈이 아니라면. 이환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만약 자신이 시간을 거슬렀다면, 겪었던 고통은 곧 현실이 된다는 의미였다.

연인과 친구가 번갈아 머릿속을 스쳤다. 걷잡을 수 없는 증오와,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애정이 뒤섞인 채 솟구쳤다. 이환은 거울 앞을 떠나 침대로 도망쳤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잠을 자는 게 최고다.

이환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직 추울 계절이 아님에도 몸에 한기가 돌았다. 절로 움츠러드는 몸을 끌어안고 눈을 담았다. 일어났을 때 모든 일이 정리되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은 채.

그러나 언제나 그러했듯 이환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삼 일 후의 저녁, 이환은 막사 안에 있었다. 하루 종일 말을 달린 터라 전신이 피로를 호소했다. 간이침대에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차라리 어느 쪽이든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환을 둘러싼 생생한 감각이 도주로를 막았다. 그의 마음은 이미 회귀를 확정하고 있었다. 희망인지 원망인지 모를 것이 심장을 후볐다.

간이침대에서 내려와 가방을 뒤졌다. 가방 안에는 황실 기사단의 제복이 차곡차곡 놓여 있었다. 죽기 얼마 전까지도 평상복이나 다름없었던 제복이 지금은 보는 것만으로도 끔찍스러웠다.

제복 아래에서 잠행용 옷을 꺼낸 이환은 재빨리 그것으로 갈아입었다. 그런데 나가려다 보니 왼쪽 허리에 덜렁덜렁 매달린 칼이 신경 쓰였다.

태양 아래 화려하게 번뜩이는 황금과 루비의 칼, 디우스텔룸. 황실은 이것을 신의 무기라 선전했다. 구세의 기사와 함께 군중을 선동하기에 딱 좋은 조합이었다. 이환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도 디우스텔룸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았다. 이환은 낡은 옷가지로 둘둘 말아 칼을 감춘 후에야 밖으로 나갔다.

막사 밖에는 초저녁의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야영지 중앙에 커다랗게 피워 놓은 화톳불이 벌겋게 이글거렸다. 그림자가 일렁이는 방향을 따라 걸음을 옮기는 때였다.

“알렉상드르 경? 그런 차림으로 어딜 가십니까?”

화톳불 근처에서 동료와 담소를 나누던 뒤크가 이환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이환의 부관인 그는, 동시에 이환이 타국과 내통했다는 결정적인 증거 편지를 제시한 자이기도 했다.

‘이 이상은 제 양심이 견디지 못하여 고백합니다. 사실 저는 알렉상드르 경의 협박으로 그의 일을 도운 적이 있습니다.’

이환은 공개재판 시 스치듯 보았던 편지를 떠올렸다. 그가 보아도 헷갈릴 정도로, 자신의 것과 비슷한 글씨체로 쓰여 있었다. 그리고 뒤크는 바쁜 이환을 대신해 종종 대필 업무를 맡곤 했다.

협박 때문이라고는 하나 매국 행위를 한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뒤크 역시 공개재판 후 지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때 그는 울면서 고백했었다.

‘죄송합니다, 알렉상드르 경.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뤼실에 있는 가족들이 죽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죄는 제가 죽은 후에 갚겠습니다.’

눈물 젖은 목소리가 지하 감옥의 석벽에 부딪혀 음산하게 메아리쳤었다.

“뒤크 경. 경의 고향이 어디였지?”

“뤼실입니다.”

“거기에 가족들이 있어?”

“네. 부모님과 남동생 하나, 그리고 여동생 셋이 있죠.”

서글서글하게 웃는 모습 어디에도 남을 배신할 것 같은 기미는 없었다. 이환은 묵묵히 그를 응시했다. 그러자 뒤크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알렉상드르 경?”

“……잠시 기분전환을 좀 하고 올게.”

“새벽 전에는 돌아오시는 거죠?”

솟구치는 살기를 억누르며 대답하자 뒤크가 싹싹하게 물었다. 이환은 대강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환이 가려는 곳은 근처에 있는 마을이었다. 기억력이 영 나쁘지는 않은 듯, 걷다 보니 이때의 일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때도 그는 막사를 나와 작은 술집을 찾았었다.

같은 길을 걸어 마을에 들어섰다. 서른두 명의 기사들이 한꺼번에 묵기 어려워 바깥에 진을 쳐야 했을 만큼 작은 마을이었다. 어제까지의 그라면 결코 들어가지 않았을, 가장 작고 더러운 술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술집 안은 분주했다. 손님이 나간 테이블을 치우던 주인이 이환을 보더니 행주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뭘 드릴까요?”

“맥주와 기본 안주…… 아니, 맵게 양념해 구운 돼지고기 한 접시.”

병으로 인해 자극적인 음식을 입에 댄 지 오래되었다. 오랜만에 식도락을 즐길 생각을 하니 바닥을 기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음식이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다소 걸렸다. 이환은 음식이 푸짐하게 담긴 접시를 향해 달려들었다. 고기에서는 누린내가 나고 양념은 좀 짰지만 이환에게는 진수성찬이었다. 그는 빠른 속도로 접시를 비워 나갔다.

접시를 반쯤 비웠을 때 맥주잔은 어느덧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환은 입맛을 다셨다. 한 잔 더 마시고 싶었지만 지금은 만날 상대가 있었다. 아니, 어느 정도 취해서 기분 좋은 상태인 게 나으려나. 합리화에 가까운 선택지를 향해 천칭이 슬그머니 기울었다.

“주인장. 여기 맥주 한 잔 더.”

추가 주문을 한 이환이 다시 고기 접시에 집중하려는 때였다. 술집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섰다. 실로 강렬한 존재감에, 술집 안에 있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쏠렸다. 이환에게는 익숙한 반응이었다.

그는 입안에 든 고기를 천천히 씹어 넘긴 후에야 시선을 돌렸다. 압살롬은 아직 문 앞에 있었다. 마치 환상이라도 보는 듯, 넋을 잃은 얼굴로 이환을 보고 있다.

이환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분노와 살의가 순식간에 솟구쳤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압살롬의 목을 베어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는 압살롬에게 볼일이 있었다.

이환은 뒤늦게 깨닫고 돌아보는 척하며 다시 압살롬을 바라보았다. 압살롬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이환이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언제인가부터 불렀던 애칭 대신, 온전한 이름을.

“압살롬.”

“아…… 이환?”

압살롬의 얼굴에 희열이 번졌다. 그 순간 치미는 역겨움에, 이환은 허리춤의 칼로 향하려는 손을 간신히 억눌렀다. 경직된 턱에서 힘을 빼고 악물었던 이를 움직였다. 그럼에도 웃는 얼굴을 만드는 것만은 힘들어서, 방금 받은 맥주잔을 입가에 댄 채 눈매만 겨우 접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억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나 압살롬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듯 한달음에 다가왔다. 환상 같은 미모가 꽃처럼 만개했다.

“맙소사, 이환!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반가움이 선명히 묻어나는 목소리가 술집 안에 울렸다.

이전에 마주쳤던 술집은 이곳이 아니었다. 시간도 이보다 조금 늦었다. 그때와 다른 술집을 찾아들 때부터 예상했던 바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충격이 제법 컸다.

이날의 만남은 역시 우연 따위가 아니었다. 어쩌면 처음 만났던 날도 우연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이환은 사 년 전, 잠행을 나왔던 술집에서 압살롬을 처음 만났다. 지금의 시간대로 계산하면 작년일 것이다. 맥주를 들이켜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즈음 이환은 그를 신의 사자로만 보는 황궁 사람들에게 질려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막다른 곳에 몰려 있었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그가 어딜 가든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그들은 일정 거리를 두고 떨어진 채 이환을 관찰했다. 그러다 이환이 실수하거나, 그들의 기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질타와 비난을 퍼부었다.

숨통이 트일 구석이 필요했다. 그러나 뤼시앵에게 그것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 연인에게는 멋지고 듬직한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 황궁 내를 떠돌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황궁 구석에서 하인들이 입다 버린 낡은 옷 무더기를 발견했다. 이환은 홀린 듯이 그것을 챙겨 들고 거처로 돌아갔다. 그날 밤, 그는 처음으로 잠행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마치 죄를 짓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번화가로 나가, 그곳에서 제일 북적거리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값싼 맥주를 주문할 때에는 미성년자였던 때로 돌아간 듯한 스릴마저 느껴졌다.

‘알렉상드르 경’에 그토록 열광하던 황도 사람들은 놀랍게도 이환을 알아보지 못했다. 대중 앞에 나서야 할 때는 늘 투구를 착용해 머리카락과 이목구비를 가리기 때문이었다. 황도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알렉상드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미남자였다.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검은 머리와 갈색 눈의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좋게 말하면 이국적이고 솔직히 말하면 좀 밋밋한 이목구비가 잠깐 시선을 끌었으나 ‘돈을 벌기 위해 다른 대륙에서 건너왔다.’라고 답하자 곧 사그라졌다.

이환은 그 술집의 단골이 되었다. 찾는 횟수도 점점 늘었다. 두 달에 한 번이던 것이 한 달에 한 번, 그리고 다시 보름에 한 번으로 바뀌었다.

압살롬을 처음 만난 것은 열흘 만에 잠행을 나갔던 날이었다. 술집 주인과 눈인사를 나누고 점원에게 맥주를 주문했다. 그날따라 붐볐던 터라 테이블이 아닌 바에 앉았던 기억이 났다.

어느 순간, 시끌벅적했던 술집이 조용해졌다. 이환은 기묘한 이끌림을 이기지 못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바로 그가 압살롬을 처음 본 때였다.

그 어떤 예술품보다도 미려한 얼굴과 고결하게까지 보이는 은발을 가진,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의 색채를 바꾸는 남자. 그를 감싼 공기마저도 우아하다고 생각했다.

술집 안을 둘러보던 압살롬과, 그를 응시하던 이환의 눈이 마주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환이 시선을 마주한 채 가만히 있자 압살롬이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옆자리 비었습니까?’

술집에서의 첫 만남다운, 상투적인 시작이었다.

자신을 군인이라 말한 이환에게, 압살롬은 스스로를 장사치라고 소개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덕분에 아는 것이 많다던 그는 이환에게 좋은 대화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들의 만남은 이후에도 이어졌다.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로 발전했다.

이환으로서는 기적과도 같은 만남이었다. 비록 압살롬이 이환의 정체를 모른다는 전제가 있기는 했으나, 이 세계에서 최초로 사귄 친구인 것이다.

‘그, 내가 군인이랬잖아.’

‘그랬죠.’

‘내가 이래 봬도 윗선이랑 연줄이 좀 있거든.’

5황자의 연인에, 황태자 직속 기사단의 일원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압살롬은 가볍게 맞장구쳤다.

‘굉장하네요.’

‘그러니까 말이지……. 어려운 일이 생기면 나한테 말해도 괜찮아.’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영 어려운 이환으로서는 굉장한 호의였다. 이에 압살롬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환도요. 만약 궁금한 게 생기면 무엇이든 물어봐도 좋습니다. 난 상인이라서 이런저런 정보를 많이 접하거든요.’

상념을 지운 이환은 빈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한 잔 더 마실 건가요?”

음식을 주문하던 압살롬이 물었다. 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압살롬의 붉은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말도 없고……. 설마 벌써 취한 겁니까? 아직 초저녁이잖아요.”

이환은 그 말이 귀에 익다고 생각했다. 잔을 가지고 장난치는 척하며 기억을 떠올렸다.

‘피곤해 보입니다.’

낮은 목소리, 사근사근한 어조.

‘간만에 만났는데 말도 안 하고. 요즘 점점 말수가 줄어들고 있다는 거 알아요?’

걱정스럽다는 듯 가까워진 얼굴. 하얀 얼굴을 감싼 은발이 매끄럽게 흔들렸다.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이환?’

이환은 회상에서 빠져나와 정면을 보았다. 짙푸른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환?”

압살롬은 모른다. 본명을 알려 주던 그날, 테이블 아래로 꽉 움켜쥐었던 주먹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던 것을. 본명이 알려지지 않아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고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복잡한 심경이었던 그날의 이환을.

그것이 전부 불필요한 일이었음을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이환은 분노로 굳은 입매를 애써 끌어올렸다.

“그럴 리가. 이제 겨우 두 잔 마셨는걸.”

맥주 두 잔이 테이블에 놓였다. 이환은 그중 하나를 낚아챘다. 움직임이 조금 거칠었던지 맥주가 넘쳤다. 이환은 혀를 찼다.

“이런…….”

잔을 다시 내려놓고 젖은 손을 터는데 압살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들린 손수건이 그의 목적을 짐작하게 했다.

이환은 일순간 멈칫거렸다. 압살롬에게 손은커녕 머리카락 한 올조차 맡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이전의 이환이라면 압살롬이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는 사이 하얀 손가락이 이환의 거친 손에 닿았다.

짝!

본능은 솔직했다. 이환은 압살롬의 손을 쳐 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흰 손등에 벌건 손자국이 선명했다. 이환은 움직여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어 사과했다.

“미안하다.”

“……아닙니다. 갑작스럽게 가까이 간 제 잘못이에요.”

압살롬의 눈매가 울 듯 일그러졌다. 이환은 순식간에 치솟은 미움을 애써 삼켰다.

압살롬이 고백한 때가 딱 이해 겨울이었다. 작년부터 좋아했었다고 말했으니 지금은 열심히 짝사랑 흉내를 내는 중일 터다.

언제부터, 어디까지 계획적이었던 것일까. 이환은 ‘친구로서의 널 잃고 싶지 않아.’ 따위의 말을 지껄였던 과거의 자신을 두들겨 패고 싶었다.

이환은 압살롬에게 손수건을 받아 손을 닦았다. 손수건을 돌려받기 위해 압살롬이 손을 내밀었다. 실수하지 않도록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이환은 손수건을 잘 접어 품에 넣었다.

“빨아서 다음에 만났을 때 돌려줄게.”

“그래요.”

압살롬이 눈매를 한껏 접었다. 눈부신 것을 보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 이상 보고 있다가는 앞에 놓인 맥주잔이라도 집어던질 것 같아서 이환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심경을 알 리 없는 압살롬은 곱상한 얼굴과 잘 어울리는 부드러운 어조로 연신 말을 걸어 왔다.

“이환은 여기 무슨 볼일로 왔나요? 어디서 머무르죠? 얼마나 이곳에 있을 예정인지 물어도 됩니까? 난 내일 아침에 이곳을 떠나 마르슬린으로 가요. 혹시 비슷한 방향인가요?”

적당히 대답해 주던 이환은 일방적인 질문이 잦아들 즈음이 되어서야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압살롬이 나긋하게 웃었다. 이환은 부러 시선을 맞추었다. 그러자 압살롬이 수줍은 듯 눈을 깜빡였다. 은빛의 긴 속눈썹이 우아하게 나풀거렸다.

“왜 그러는 거죠?”

“알아봐 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압살롬의 얼굴에 긴장이 스쳐 지나갔다. 찰나의 일이었다. 이환은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성물의 위치. 최소 다섯.”

성물은 신의 손길이 닿은 물건을 말한다. 이환은 언젠가 손에 넣었던 정보를 상기했다.

차원은 신의 힘으로만 열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그 힘을 손에 넣을 수는 없으므로 대신할 것을 찾아야 했다. 정보를 준 자는 이환에게 성물로써 신의 힘을 대신할 수 있다고 말했다.

차원을 열기 위해 필요한 성물의 수는 다섯. 제대로 된 정보가 존재하는 성물은 몇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환은 압살롬이 제대로 된 답을 주리라 확신했다.

“어째서…… 그런 걸 묻죠?”

“그것을 이용해서라도 가야 할 곳이 있어서. 왜? 불가능할까?”

이환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기괴한 표정일 것이 분명한데도 압살롬은 아랑곳하기는커녕 끈질기게 물어 왔다.

“어디에 가려는 겁니까?”

뤼시앵을 사랑해 이 세계에서의 삶을 선택했다. 이후 방법을 손에 넣었음에도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마음이 오물 취급을 당했다.

당시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환이 달고 있는 타이틀은 선전용으로서 매우 중요했다. 그의 존재로 인해 인간은 승리를 확신했고, 그것은 희망으로 이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환을 동경한 많은 소년이 기사로 자원했다. 몬스터로 인해 교역로를 잃은 상인들은 황실을 통해 지원 의사를 밝혀 왔다. 수많은 토목공사가 알렉상드르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졌으며, 부역에 동원된 제국민은 이것이 신의 뜻이라 여겨 열성적으로 돌을 날랐다.

공부 잘하는 학생이었던 이환은 이 모든 일이 황권 강화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저 상황에서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 또한 모르지 않았다.

어디 나 없이 잘해 보라지.

“집.”

이 세계에 온 지 벌써 구 년. 이제는 가족들의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돌아가 봤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이대로 있다가는 똑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그것만은 사절이었다. 그래서 이환은 가지 않은 길을 향해 발을 내딛기로 했다.

“……알아보겠습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압살롬이 느리게 대답했다. 기묘한 표정이었다.

그래, 기분이 묘하겠지. 천적이 제 발로 사라져 준다는데 평범한 기분일 리가 있나. 이환이 압살롬의 대답을 확신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이환의 최후의 적, 이 세계 유일의 드래곤이었으니까.

***

이환은 어둠이 깊어진 후에야 압살롬과 헤어졌다. 누군가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 숨어들듯 막사 안에 들어섰다.

나가기 전 아무렇게나 벗어 두었던 제복이 잘 접힌 채 간이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뒤크가 한 일일 것이다. 이환은 순간 치밀어 오른 분노와, 그에 기인한 폭력성을 애써 억눌렀다.

이환은 가방을 열고 옷 사이로 손을 찔러 넣어 제법 큰 꾸러미를 꺼냈다. 황궁을 출발하기 전에 받은 물건이었다. 이제껏 정신이 없었던 터라 한 번도 열어 본 적이 없는 그것에 손을 댔다.

꾸러미는 방수를 위해 기름 먹인 종이와 가죽끈으로 꼼꼼하게 싸여 있었다. 그것들을 풀자 부싯돌과 상비약 그리고 지도가 나왔다.

이환은 지도를 펼쳤다. 검은 선으로 그려진 지형 위에 붉고 푸른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중 한 점에서 시선을 멈췄다. 버석하게 마른 입술이 일그러진 채 실소를 흘렸다.

“압살롬…….”

붉은색으로 선명하게 표시된 목적지는 마르슬린이었다.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던 이환은 턱에서 힘을 뺐다.

이미 알고 있었던 일이다. 배신감을 느낀 지 고작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다. 잊을 수도, 잊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압살롬은 난데없이 떨어진 세계에서 부평초처럼 떠돌던 이환의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 준 두 개의 끈 중 하나였다. 그런 그가 뤼시앵에게 배신당해 좌절한 이환을 절벽에서 떠밀었다. 떨어지는 쪽을 선택한 건 이환이었으나, 발 디딜 곳을 없앤 건 압살롬이었다.

이환은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에서 압살롬을 내쫓았다. 지금은 기억을 곱씹을 때가 아니었다.

요 며칠 넋을 놓고 있었던 터라 지금 마르슬린에 가는 이유조차 흘려들었었다. 하지만 듣지 않아도 짐작할 수는 있었다. 언제든 이환에게 주어지는 일은 전투뿐이었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정말 어리석게 굴었다. 황족들의 몇 마디 말에 넘어가 순순히 무기를 들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싸웠다. 슬슬 의심이 들 때쯤 접근한 뤼시앵을 순순히 믿고 사랑에 빠졌다. 눈이 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들은 이환을 자기들 입맛대로 다룰 수 있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어느새 가빠진 숨을 애써 가라앉힌 그는 머릿속으로 몇 가지 선택지를 꼽았다.

만약 이대로 기사단에서 이탈한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의 이환에게는 가장 매혹적인 선택지였다. 그러나 그는 일개 기사가 아니었다. 아무 방책도 없이 모습을 감추면 수많은 추적자가 붙을 것이 분명했다.

이환은 굵직한 몇 개의 사건을 떠올렸다. 어설프게 위장하느니 기회를 노리는 게 나았다. 그리고 마침 적당한 사건도 있었다.

등에 상처를 입었던 당시 이환은 정말로 죽을 뻔했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았다. 이환이 없으면 끈 떨어진 뒤웅박이 되고 말 힘없는 5황자, 뤼시앵을 위해서였다.

당시 모두들 이환이 죽었다고 생각해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 도주할 기회로는 완벽했다. 시기도 가까우니 금상첨화였다.

조금만 참으면 돼. 이환은 간이침상에 몸을 뉘며 자신을 다독였다.

***

시커먼 망토가 너른 관도를 뒤덮었다. 망토 위에는 이옐라의 상징, 올리브 가지를 쥔 손이 금실로 수놓여 있었다. 몬스터에 대항하기 위해 특별히 선별된 자들인 퓌니르 기사단만이 걸칠 수 있는 망토였다.

기사들의 정체와 목적을 알아차린 사람들이 길을 비켜 주었다. 사람들이 공통의 적인 몬스터에 대항해 똘똘 뭉친 시대였다. 저 망토를 입은 기사들의 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아서는 안 되었다. 덕분에 그들은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마르슬린은 평야 한가운데에 세워진, 제법 규모가 큰 성이었다. 인근 언덕에서 멈춰 선 기사단은 먼저 전서구를 보낸 뒤 상황을 살폈다.

평야 이곳저곳에 화살이 널려 있었다. 화살의 사정거리 너머에 미노타우로스 무리가 있었다. 아직 그들을 발견하지는 못했는지 미노타우로스 무리는 잠잠했다.

이윽고 전서구가 도착했다. 곧 망루에 사람을 보내 신호를 전달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잠시 후 망루 꼭대기에서 작은 빛이 번쩍였다.

“지금!”

낮게 외친 이환이 말의 배를 걷어찼다. 눈을 가린 수말이 사나운 기세로 땅을 박찼다.

이환을 선두로 총 서른두 명의 기사들이 쏜살같이 언덕을 내려왔다. 그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무기가 들려 있었다. 동시에 성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말발굽이 평지를 디딜 때쯤 되자 몬스터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환은 가장 먼저 가까워진 미노타우로스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우아한 신월도가 거대한 미노타우로스의 머리를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다.

스걱!

머리에서부터 목까지 비스듬하게 잘린 미노타우로스가 비틀거렸다. 그러나 몬스터는 머리와 목이 분리된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이환은 칼을 거꾸로 세워 미노타우로스의 왼쪽 가슴을 찔렀다.

반인반수의 두툼한 승모근을 가른 칼이 빗장뼈와 갈비뼈를 차례로 부수고 가슴까지 돌진했다. 인간이라면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에 위치한 주먹만 한 핵이 드러났다.

이환은 팔에 힘을 주었다. 단단한 핵에 금이 갔다. 칼끝으로 금 사이를 후벼 파듯 움직이자 핵이 산산조각 나며 검은 연기를 피워 올렸다.

이환은 다시 미노타우로스 사이로 뛰어들었다. 문득 한 기사와 시선이 마주쳤지만 모르는 척 눈을 돌렸다.

“으아악!”

등 뒤에서 그 기사의 단말마가 들렸다.

미노타우로스의 수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몬스터에 이골이 난 기사단이 참여한 덕분이었다. 앞뒤로 협공당한 미노타우로스가 당황하여 우왕좌왕한 터라 처리가 한결 쉬웠다.

이환의 칼이 마지막 미노타우로스의 핵을 부수는 것으로 전투는 끝을 맺었다. 성에서 나온 병사들이 미노타우로스의 사체를 치우는 사이, 이환은 말에서 내려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성내에 진입한 기사는 그를 포함하여 총 스물아홉 명이었다.

이환은 아까 눈이 마주쳤던 기사를 떠올렸다. 귀스타브 마리팀. 이환은 지금보다 더 나이 먹었던 그를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귀스타브는 오늘 이환에게 구해질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이환은 뺨을 훔쳤다. 투구를 쓰고 있기는 하지만 머리 윗부분을 보호하기 위한 형태인지라 뺨에 피가 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아까부터 근질거렸던 부분을 문지르자 손가락에 검붉은 피딱지가 묻어났다.

이환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육괴를 가르고 숨통을 끊어 결국 생명이 영영 사라지게 만들었던 감촉이 손바닥에 선했다. 이것을 한낱 꿈이라 한다면 현실은 얼마나 지독할 것인가.

“알렉상드르 경?”

가만히 선 이환을 이상하게 생각했는지 뒤크가 다가왔다. 이환은 가까워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기사단의 상태는 경이 확인하도록. 난 먼저 들어갈 테니까.”

“네?”

평소와 다른 태도에 뒤크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이환은 마중 나온 성주와 가볍게 인사를 나눈 뒤 객실로 향했다. 뒤에서 뒤크가 그를 불렀지만 못 들은 체했다.

안내를 맡은 것은 하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앞서가는 그의 어깨가 눈에 띄게 경직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환의 앞에서 이러한 태도를 취했다.

과거에는 제법 상처도 받았다. 이 세계에 녹아들기 위해 안간힘을 써 봤다. 그러나 이들에게 그는 이물에 불과했다.

언젠가 뤼시앵에게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것을 경외라고 일컬었다. 경외라는 말 안에 두려움이란 감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서 한 말이라면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었다.

생각에 잠신 사이 객실에 도착했다. 제 일을 마친 하인이 잽싸게 물러가려는 때였다. 이환이 그를 불러 세웠다. 그가 용건을 말하자 하인이 눈을 크게 떴다.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못 들어서 되묻는 것이 아니었다. 하인은 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이환은 조금 심술궂은 기분으로 되풀이했다.

“내 방에서 목욕할 수 있도록 준비해 줘. 물은 따뜻하게.”

이환은 뜨악한 얼굴로 선 하인을 외면하고 객실 안에 들어갔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방이었다. 비위를 맞추려는 의도에서 줬을 것이다.

그가 갑옷을 거의 벗었을 즈음 몇 개의 인기척이 객실을 향해 다가왔다.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목욕통을 든 남자였다. 그들이 나무로 된 객실 한구석에 목욕통을 내려놓았다. 따라 들어온 여자들이 안에 물을 부었다.

뜨거운 물로 목욕하기 위해서는 이런 수고를 거쳐야 했다. 황궁에서야 뜨거운 물의 조달이 어렵지 않다지만, 외부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이환은 씻고 싶을 때 차가운 호수를 이용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질없는 배려였다.

뜨거운 물에서 모락모락 올라온 김이 방 안에 퍼져 나갔다. 이환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그들의 노동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벌레 씹은 얼굴이었다.

“목욕 시중은…….”

나이 먹은 하녀가 물었다. 긴장한 얼굴을 보자 고약한 마음이 솟구쳤다.

이옐라의 독실한 신자들은 물로써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이 더러운 자일수록 외양을 깨끗하게 유지하려 든다는 교리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몇 날 며칠을 씻지 않고 생활했다.

처음 이러한 생활 습관을 알았을 때 이환은 웃어넘겼다. 그러나 공개재판에서까지 웃을 수는 없었다. 그가 이단자라는 결정적 증거로 편지와 함께 목욕이 언급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들이 긴장한 이유도 몸에 물을 묻힐 것이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에게 화풀이하자고 목욕 시중 같은, 자신에게도 곤혹스러울 것을 요구하는 것도 우스웠다. 이 성의 사람들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목욕 시중은 됐어. 갑옷과 투구 손질을 부탁해.”

선두에서 싸운 이환의 갑주는 몬스터의 피로 얼룩져 있었다. 빨리 손질하지 않으면 부식될 것이다. 이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람들은 갑주를 들고 나갔다.

이환은 옷을 훌훌 벗고 목욕통 안에 들어갔다. 조금 뜨겁다 싶은 물이 며칠간의 피로를 풀어 주었다.

그는 천장을 멍하니 응시했다. 차원 이동에 대해 애써 외면했던 의혹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저 생각만으로도 눈앞이 시뻘게졌다. 머리를 흔들고 물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흥분은 실수와 부주의를 부른다. 방금 전에도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여 뒤크를 당황하게 만들지 않았던가. 충동을 전부 참을 필요는 없겠지만 별나게 보이면 안 되었다.

조용히 기회를 노리다가 이들을 벗어난다. 누구도 그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순간에. 그 기회가 코앞이었다. 이환은 물속의 고요한 세상을 응시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다시 물 위로 올라왔을 때 이환의 갈색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흠뻑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는 목욕통을 벗어났다.

물기를 닦고 옷을 입는데 달갑지 않은 것이 눈에 비쳤다. 성의 화려한 객실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것은 이환의 칼이었다. 칼집에서 꺼내자 몬스터의 핏덩어리가 질퍽하게 떨어져 카펫을 물들였다.

이환은 아무 천이나 잡아 피만 대충 닦아 냈다. 부식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여분이 잔뜩 있기 때문이었다.

이옐라가 내린 무기라고 알려진 칼인 만큼 남들 앞에서 망가져서는 곤란했다. 그래서 황실은 여분의 칼을 몇 자루나 만들어 이환이 가는 곳마다 함께 이동하도록 했다.

게다가 곧 이 디우스텔룸을 쓰지 않아도 될 때가 올 것이다. 그는 칼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고요한 사위와 따끈하게 데워진 몸이 기껍다. 오늘이라면 깊게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이환의 시야가 가물가물해질 즈음이었다. 누군가가 빠른 걸음으로 가까워졌다. 뒤이은 노크에 날 선 목소리가 튀어나갔다.

“뭐야?”

“알렉상드르 경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침대에서 내려온 이환은 방을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분노를 담아 문을 벌컥 열자 당황한 얼굴의 뒤크가 서 있었다.

“손님?”

물으면서도 이환은 누군가 도움을 요청하러 왔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그를 찾는 사람 대부분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뒤크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이환이 예상치 못했던 자의 것이었다.

“뤼시앵 황자님이십니다.”

이환은 일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어느 결엔가 손이 지끈거리는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2층 응접실에 계십니다. 지금 바로 안내를…….”

“아니. 잠시 기다려.”

이환은 문을 쾅 닫았다. 질끈 문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침착해. 자신을 향해 열심히 타일렀지만 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솟구쳤던 증오를 간신히 진정시키자 이번에는 끈덕지게 남아 있던 애정이 고개를 들었다. 상반된 두 개의 감정은 때로는 부딪치고 때로는 섞이며 이환을 괴롭혔다.

심호흡을 한 후 제복에 손을 뻗었다. 뤼시앵을 만날 때마다 그러했던 것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제복을 걸쳤다. 마지막 단추까지 전부 잠그고 칼을 챙긴 후에야 다시 문을 열었다. 의아한 표정의 뒤크와 눈이 마주쳤다.

“괜찮으십니까?”

이환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한 후 걸음을 떼었다. 그러자 뒤크가 곧바로 따라붙었다.

성안의 분위기는 아까 전보다 들떠 있었다. 아름답기로는 따라갈 자가 없었다는 무희를 어머니로 둔 뤼시앵은 그녀를 꼭 닮은 미모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가진 세력이 없다 해도 황자다. 사람들이 들뜬 것도 당연했다.

2층에 도착한 이환은 뒤크가 가리키는 방 앞에 섰다. 화려한 문 너머로 몇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가볍게 노크하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화답했다. 그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알렉상드르 경.”

환하게 밝혀 놓은 불빛이 뤼시앵의 고운 금발을 눈부시게 빛냈다. 초여름의 신록 같은 초록색 눈동자가 이환을 향했다. 소녀 같은 얼굴도, 우월한 유전자를 타고나 큰 덩치를 자랑하는 여타 황족들과는 다르게 가느다란 체구도 모두 처음 사랑에 빠졌던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아 한층 더 악몽 같았다.

침착해. 다시 한 번 되뇐 이환은 치받는 격정을 애써 삼켰다. 감정의 격류를 이기지 못해 목이 뜨끔거렸다. 그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황자 저하를 뵙습니다.”

머리 위에서 약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 이환이 깍듯하게 굴 때마다 뤼시앵이 보였던 반응이었다.

“편하게 행동하라니까……. 모두 나가 줘.”

안 된다. 이환은 고개를 들었다. 감정에 휘둘려 무슨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안전장치가 적어도 하나 정도는 필요했다.

“낯선 곳에서의 독대는 가능한 피하시는 게 좋습니다.”

이환이 말하자 뤼시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풍성한 금발이 그에 따라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상대가 그대라도?”

“상대가 저라 해도.”

질문을 이용해 맞받아치자 뤼시앵이 피식 웃었다.

“경은 너무 고지식해. 그런 점이 좋은 거지만.”

뤼시앵이 다시 손짓했다. 그러자 위뱅만 남기고 모두 자리를 떴다.

“이제 됐지? 위뱅 경은 내게 가족과도 같은 존재니까 편하게 행동해도 좋아.”

“……그래.”

이환이 자리에 앉았다. 뤼시앵의 맞은편이었다. 뤼시앵은 빈 찻잔에 손수 차를 따라 주었다. 차향이 느리게 피어올라 응접실을 채웠다. 이환은 숨을 깊게 들이쉬어 그 차분한 향기를 마셨다.

“오늘 전투가 있었다고 들었어. 다친 곳은 없는 거지?”

이환은 찻잔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이상했던지 뤼시앵이 가볍게 웃었다.

“뭘 그렇게 보는 거야? 찻잔에 뭔가 묻기라도 했어?”

“목이 말라서 그래.”

“빨리 마시게 해 줘야겠네.”

내리깐 눈을 들지 않은 채 말하자 뤼시앵이 찻잔을 이환에게 밀어 주었다. 이환은 고운 찻잔을 들어 그 안에 담긴 것을 단숨에 마셨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감정을 차로 씻어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즐겁다는 얼굴로 그를 보는 뤼시앵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자신이 했던 일이 전혀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사랑스러웠던 뤼시앵. 그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뿌듯했던 적이 있었다. 눈길 좀 받자고 뤼시앵의 거처 앞을 내도록 서성거리기도 했었고, 손길 한 번 입맞춤 한 번에 날아갈 듯 기뻐했었다.

한쪽으로 기운 마음이 속삭였다. 누군가 그 혹독한 미래를 그저 꿈이었다고 확답해 준다면. 그렇다면 그저 마음 편하게 뤼시앵을 사랑할 수 있을 텐데. 이환이 자신도 모르게 그런 바람을 떠올리는 때였다.

“표정이 왜 그래?”

뤼시앵이 이환을 향해 상체를 숙이며 물었다. 물망초의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문득 그에게 날카로운 말을 쏟아내던 뤼시앵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에게서는 이 향기가 났다.

까마득했던 절망이 되살아났다. 그때와 같은 감각은 두 번 다시 맛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을 다잡은 이환은 뤼시앵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늘 보석 같다고 감탄했던 눈동자 안에서 광물처럼 차가운 온도가 느껴졌다.

이환이 보고 있기 때문일까. 뤼시앵의 붉은 입술과 황금빛 눈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별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웃음이었다.

이환은 사랑에 지독하게 빠진 상태를 ‘눈멀다’라고 표현하는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뤼시앵이 이환의 머리카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신도 모르게 그 손을 피하며 이환이 되물었다.

“왜 왔어?”

뤼시앵은 이환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경이 보고 싶어서 왔어. 설마 화난 거야?”

쓸 만한 착각이었다. 이환은 뤼시앵을 외면했다.

“당연하지. 이곳까지 오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으면 어쩌려고.”

“그래서 기사들과 함께 왔잖아.”

“그래도 안 돼. 날이 밝는 대로 돌아가.”

“그럼 경은?”

“나는 다시 갈 곳이 있어.”

뤼시앵이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이환은 위뱅에게 시선을 주었다. 위뱅 역시 이환에게 동의하는지 뤼시앵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알았어, 알았다고. 양쪽에서 들볶다니.”

결국 뤼시앵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얼굴로 패배를 선언했다.

그날의 다회는 곧 끝났다. 밤이 깊은 데다가, 이환의 얼굴에 피로가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객실로 돌아온 이환은 침대 위에 털썩 드러누웠다. 한시라도 빨리 잠들고 싶었다. 그러나 달아난 잠은 그를 찾아와 주지 않았다.

멍하니 뤼시앵을 떠올렸다. 오늘의 그는 우아하지만 차갑고 의례적인 웃음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얼마나 멍청했으면 저걸 몰랐을까. 스물일곱의 자신에 대한 질책이 불길처럼 솟구쳤다.

아니, 그를 탓할 것도 없었다. 바로 지금, 스물넷의 이환 역시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펼쳐질 혹독한 미래가 차라리 꿈이길 바란다고? 그 어리석음이 배신을 부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뤼시앵의 차가운 눈은 이환에게 냉수 한 잔과도 같았다. 뒤집어쓰든 마시든, 정신을 차리기에 충분했다. 이로써 이환은 자신이 회귀했음을 확실하게 받아들였다.

그러고도 한참을 뒤척거리던 이환은 몇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눈을 감을 수 있었다. 잠들기 직전, 그때까지 떠올리지 못했던 의문이 가물거리며 머릿속을 스쳤다.

‘뤼시앵이 이런 식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던가?’

다음 날 아침 이환은 뤼시앵이 묵은 객실로 향했다. 그보다 먼저 마르슬린을 떠나는 뤼시앵은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여행 준비를 마친 후였다. 이환은 뤼시앵을 에스코트하여 중정으로 향했다.

부드러운 손끝이 거친 손가락 위에 얹혔다. 맞닿은 곳에서 강렬한 박동이 느껴졌다. 이환은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중정에 도착하자 이미 출발 준비를 마친 기사들이 보였다. 뤼시앵은 우아한 백마에 다가갔다. 마차를 애용하던 평소와는 달리 이번에는 말을 타고 온 듯했다.

무엇이 그리도 급했을까. 그러고 보면 마르슬린에 도착한 시간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환이 위화감의 정체를 찾기 위해 집중하는 때였다.

“알렉상드르 경.”

뤼시앵이 그에게 다가섰다. 고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이제 두 사람의 거리는 한 뼘도 채 되지 않았다. 뤼시앵이 턱을 살짝 쳐들었다. 키스를 조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으응?”

작은 비음을 흘린 뤼시앵이 입술을 모았다. 조금 뾰족해진 붉은 입술이 새의 부리처럼 사랑스러워서 이환은 홀린 듯 그에게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물망초 향기조차 이환을 일깨우지 못했다.

쨍그랑―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무엇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정신을 차린 이환이 얼른 물러섰다.

“사람들이 봅니다.”

중정에는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뤼시앵의 기사들이 있었고, 이들이 아니더라도 어디서 누가 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뤼시앵은 둘의 관계가 주변에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니 이환의 대처는 적절했다.

그런데 뤼시앵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찾아온 나에게 키스도 해 주지 않겠다고?”

토라진 얼굴로 말한 뤼시앵이 눈을 치떴다. 이환은 그의 이런 표정에 약했었다.

온몸이 아우성이었다.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이대로 달려들어 입 맞추거나 혹은 목을 졸라 버릴 것 같았다. 주먹을 꽉 움켜쥔 이환이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

그 순간 뤼시앵이 성큼 가까워졌다. 기사인 이환이라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그는 누군가가 심장을 움켜쥐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목에 휘감긴 팔이 이환의 머리를 끌어내렸다. 열린 입술 사이로 작은 혀가 침범했다.

정동과 혐오가 동시에 내달렸다. 지금 입안을 휘젓고 있는 이 살덩이를 혀로 휘감고 싶었다. 동시에 이로 끊어 버리고 싶었다. 두 마음이 뒤섞여 이도 저도 못 하는 사이 뤼시앵이 입술을 뗐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르니까.”

젖은 입술이 뜨거운 숨결로 이 말을 전했다. 이환은 정신을 차리고 뤼시앵의 눈을 봤다. 헤어짐의 안타까움을 말하는 입술과는 달리 녹색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환은 뤼시앵이 왜 이곳까지 왔는지 알 것 같았다. 떨어져 있는 사이 마음이 식을까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이환은 입술을 희미하게 끌어올리고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두 입술이 가볍게 부딪쳤다.

“되도록 빨리 돌아갈게.”

작게 속삭인 이환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 자리한 것은 여느 때의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황도까지 무사 귀환을 기원합니다.”

이환은 뤼시앵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뤼시앵이 머리를 끄덕여 그 인사를 받았다.

“경의 무운을 빌지.”

말에 오른 뤼시앵이 멀어졌다. 이환은 그의 뒷모습을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성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뤼시앵이 떠난 것이다. 이환은 그제야 발을 뗐다. 성안에 들어와 누구의 눈도 닿지 않을 것이 확실해지고서야 입술을 닦았다. 이미 마른 타액의 흔적마저 지워지도록, 몇 번이고.

사랑한 모습이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마음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환은 복받치는 감정이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걸음걸음마다 짓밟았다. 사랑의 사체가 발꿈치에 눌어붙어 긴 핏자국을 남겼다. 이환은 그 흔적을 돌아보지 않았다.

아무도 남지 않은 중정을 가을바람이 휩쓸었다. 잘 마른 낙엽이 흙먼지와 함께 흩날렸다. 그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깨진 사기그릇을 밟아 산산이 부서뜨린 그는 방금 전까지 이환이 서 있던 곳을 응시했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명주실 같은 은발이 섬세하게 나부꼈다.

***

몇 시간 후 퓌니르 기사단도 마르슬린을 떠났다. 목적지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사흘 정도 말달리면 나오는 자유도시 비샤였다. 상업의 요충지인데 얼마 전부터 몬스터가 출몰하여 상인들이 오가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 며칠 전 파발을 통해 전달되었다.

마르슬린은 떠나 두 번째 맞이하는 밤, 기사단은 숲에서 노숙하게 되었다. 기사들은 이환의 막사부터 마련한 뒤 말을 먹이고 음식을 만드는 등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환은 완성된 막사 안에 들어앉았다. 저녁 식사도 뒤크가 가져다주었다. 대충 먹고 물린 후 하릴없이 있는데 귓가에 기사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함께 몬스터에 대항한다는 이유 때문인지 퓌니르 기사단은 대체로 사이가 좋았다. 이환만이 떠도는 섬이었다.

이전에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어 이런저런 노력을 해 봤지만 지금은 그것이 무의미한 행동이었음을 안다. 그들에게 이환은 언제까지고 이방인이었다.

이제 생각하면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가까워져 봤자 배신감만 더해졌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환은 막사에서 나갔다. 왁자하게 떠들던 기사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따가운 정적을 헤치듯 걸음을 옮기는데 뒤크가 달려왔다.

“알렉상드르 경, 어디에…….”

“따라오지 마.”

뒤크의 살가운 말을 무정하게 끊은 이환이 걸음을 재촉했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저들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과 더불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그를 괴롭혔다.

이환의 발이 멈춘 곳은 작은 시냇가였다. 기사단과 제법 멀리 떨어졌는지, 야영지 쪽에서 느껴지는 것은 희미한 불빛뿐이었다.

이환은 커다란 바위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위에 등을 기대자 서늘한 냉기가 얇은 셔츠 너머에서 전해졌다. 막사 안에 있다가 무작정 뛰쳐나온 탓이었다. 바위에서 등을 떼는 때였다. 도톰한 천이 이환을 감쌌다.

아무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긴장한 이환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놀란 듯한 외마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마찬가지로 익숙한 은빛 실타래가 눈앞에서 흩어졌다.

“……뭐야.”

이환은 고개를 들었다. 짙푸른 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불시의 습격이었다. 마음을 진정시킬 틈도 없이 속내가 튀어나왔다.

“왜 네가 이곳에 있어.”

숲의 밤이 고스란히 드리워져 어두워진 눈동자가 압살롬을 노려보았다. 날카로운 눈빛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은 손을 부지런히 움직일 뿐이었다.

“이환이야말로 이런 곳에서 그런 차림이라니. 그러다 얼어 죽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압살롬이야말로 가을의 숲에서는 추울 법한 차림새였다. 그제야 이환은 압살롬이 그의 망토를 걸쳐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까지 그가 걸치고 있던 덕분인지 온기가 남아 따뜻했다.

압살롬은 망토를 꼭 여민 후에야 떨어졌다. 그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마음을 가라앉힌 이환이 입을 열었다.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야?”

방금 전 했던 것과 동일한 내용의 질문이었으나, 말투가 누그러진 터라 전혀 다른 말로 들렸다.

“마르슬린에 간다고 했었잖아요.”

“그랬었지.”

“이환은 군인이라고 했었죠? 혹시 비샤의 몬스터가 언제 퇴치될지 알고 있습니까? 나 같은 상인에게 비샤는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라…….”

압살롬은 이환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환은 허리춤을 흘금 보았다. 그의 상징과도 같은 칼이 망토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추위는 핑계고 진짜 목적은 이걸 모르는 척하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실소가 터졌다.

“이환?”

눈 가리고 아웅이라지만 이 정도쯤 되니 우습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을까. 보고도 못 본 척 외면할 때마다 얼마나 자신을 비웃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피가 거꾸로 치솟는 기분이었다.

이환이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관계는 처음부터 아무 의미도 없었던 것이다.

“비샤의 몬스터는 곧 퇴치될 거야. 기사들이 파견되었다고 들었어.”

미끼처럼 정보를 던졌다. 압살롬의 반응을 살필 생각이었다. 그러나 압살롬은 이환의 생각과는 다르게 나왔다.

“그렇군요.”

짧은 대답이 어딘지 건성이었다. 몬스터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은 기사들의 움직임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이환은 과거를 더듬었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 압살롬 앞에서는 기사단과 관련하여 입도 뻥끗하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그는 내게 왜 접근했던 거지?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압살롬이 몸을 움츠렸다. 춥다고 중얼거리던 그가 이환을 보며 물었다.

“이환은 왜 이곳에 혼자 나와 있죠?”

“……글쎄.”

막사 너머의 기척을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툭.

어깨에 무엇인가가 가볍게 닿았다.

“미안. 좀 춥네요.”

멋쩍은 듯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시선을 조금 돌리자 어깨에 닿은 작은 머리통과 긴 은발이 보였다. 뒤이어 압살롬의 팔이 이환의 등을 가로질렀다. 온기가 좀 더 넓게 번졌다.

이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망토도 벗어 던지려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여밈을 고정한 부토니에를 뒤늦게 발견해 억지로 잡아 빼려는 때였다.

“할 말이 있어요.”

“나중에…….”

“성물의 위치에 대한 겁니다.”

부토니에를 움켜쥔 손이 일순 멈췄다. 이환은 압살롬을 내려다보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말해.”

“최소 다섯 개라고 말했었죠? 현재 위치를 확정한 성물은 총 네 개입니다. 지금 예상으로는 여섯 개까지 확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거기까지 말한 압살롬이 입을 다물었다. 초조해진 이환이 재촉했다.

“그 네 개라도 먼저…….”

“조건이 있습니다.”

압살롬은 여느 때의 웃음은 전부 걷어치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가. 이환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때 하얀 손이 이환의 뺨을 감쌌다. 춥다던 말이 무색하게 따뜻한 손이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짙푸른 눈동자가 이환을 응시했다. 영혼까지 깊게 관조당하는 감각에 등줄기가 오싹 떨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압살롬의 목소리는 중성적인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깊고 낮았다. 벨벳 같은 음성이 조용히 흘러 이환의 귀를 간지럽혔다.

“따뜻하게 옷 잘 입고, 밥 잘 먹고, 잠도 잘 자고. 그렇게 한다고 약속하면 말해 드리죠.”

의외의 말이었다. 압살롬의 손이 멀어졌지만 이환의 고개는 고정된 채였다. 그는 의심에 찬 눈으로 압살롬을 보았다. 놀랍게도 압살롬은 진심인 것처럼 보였다.

‘무슨 속셈이지.’

이환은 일그러지려는 눈매를 애써 펴며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뤼시앵은 이미 이환을 완벽하게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허점을 보였다. 그러나 압살롬은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진심인 척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이다.

“그거면 돼?”

이환은 뤼시앵에게 했던 것처럼 옅게 웃었다. 그러자 압살롬이 눈매를 부드럽게 접었다.

“네. 그거면 충분합니다.”

어딘지 서글퍼 보이는 웃음이었다. 과연 드래곤이라 연기력도 범상치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게 안 된 것 같아 보이니 성물의 위치는 나중에 알려 줄게요.”

“뭐……?”

압살롬이 몸을 일으켰다. 따라 일어난 이환이 물고 늘어지려는 때였다.

“안색은 안 좋고 피부도 거칩니다. 눈 밑의 시퍼런 그거, 다크서클이죠? 옷이야 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잘 입고, 잘 먹고, 잘 자고. 이 세 가지 중 충족된 게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죠.”

“이봐, 압살롬.”

이환은 낮은 소리로 으르렁댔다. 그가 바싹 다가서자 압살롬은 두 손을 들어 진정하라는 듯한 제스처를 보였다.

“그렇게 조급하게 굴지 않아도 성물은 도망가지 않아요. 아니면…… 급하게 움직여야 할 다른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환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흥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또 이렇게 감정에 휘둘려 버리다니. 그는 압살롬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마음이 급했나 봐. 미안하다.”

“곧 전부 알 수 있을 테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줘요.”

“……부탁해.”

이환은 머뭇거리다 툭 내뱉었다. 그 말에 압살롬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이내 나긋하게 웃었다.

시간이 제법 흘렀으니 이제 돌아가야 했다. 이환은 이번에는 차분한 손길로 부토니에를 뺐다. 고정해 주던 것을 잃은 망토가 어깨를 타고 스르륵 흘러내렸다.

이환은 망토를 잡아 압살롬에게 내밀었다. 압살롬은 냉큼 그것을 받아 품었다. 백설처럼 흰 뺨에 엷은 홍조가 번졌다.

“이환은 따뜻하군요.”

“……갈게.”

돌아선 이환은 빠르게 걸었다. 압살롬의 선명한 시선이 등에 와 닿았다.

어느 정도 걸어 압살롬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싶을 즈음 걸음을 멈췄다. 이성과 감정이 격렬하게 맞부딪쳐 혼란스러웠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이환은 지금 살아 있다. 그가 떨어졌던 나락은 현재 존재하지 않았고, 뤼시앵과 압살롬도 아직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고통을 기억하는 마음이 자꾸만 그를 충동질했다.

차라리 제대로 된 성자였다면, 그래서 전부 포용해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편했을까.

“이런 게 무슨 신의 사자냐.”

한때 바랐던 적이 있다. 누구의 눈에도 완벽한 이옐라의 사자, 구세의 기사를. 그 지위가 완벽하게 어울리는 사람이 된다면 뤼시앵을 비롯한 모두가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환은 입매를 비틀었다.

***

기사단은 자유도시 비샤를 위협하던 만티코어 무리를 일소하고 황궁으로 귀환했다. 출발했을 때는 서른두 명이었으나 돌아온 것은 스물네 명뿐이었다. 퓌니르 기사단의 창설 이후 최저의 귀환율이었다.

퓌니르 기사단의 모든 일원은 동등한 지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몬스터에 대적하는 무리인 만큼 단장에 가장 가까운 것은 이환이었다.

귀환 직후 황태자 샤를에게 피해 상황을 전달한 이환은 곧바로 연무장에 틀어박혔다. 사람들은 책임을 통감한 그가 좀 더 강해지고자 애쓰는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벌써 닷새째 연무장에서 칼을 휘두르는 중인 이환은 그 소문을 접하자마자 내심 비웃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꽃처럼 곱게만 키워진 뤼시앵은 땀 냄새 지독한 연무장 방향으로 걸음도 하지 않는다.

그래도 가능성이 전무한 것은 아니므로 이환은 매일 아침 시종을 통해 뤼시앵에게 꽃을 보냈다. 말하자면 선수를 친 것이다. 덕분에 귀환한 후 뤼시앵의 금발 한 가닥조차 보지 못했다. 제법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그리고 엿새째 되는 날 오전,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연무장에서 칼을 휘두르는 이환에게 시종이 찾아왔다. 황태자궁에 소속된 자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오찬을 함께하자 청하십니다.”

빠르게 땀을 씻어 낸 이환은 제법 들뜬 채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그가 예상한 대로 황태자는 그에게 몬스터 퇴치를 명령했다. 이환이 노리던 바로 그 기회였다.

출발 준비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이동하는 것에 이골이 난 덕분이었다. 그리고 황궁을 출발하기 전날 밤 뤼시앵이 이환을 찾아왔다. 바쁜 척 피하고 있었던 일이 도래한 것이다.

둘 다 식사를 끝낸 후라 차를 마시게 되었다. 시종이 두고 나간 티세트를 다루던 이환이 뤼시앵을 보았다. 안색이 나빠 보였다.

“몸이 안 좋은 거 아냐?”

아픈 곳이 있다면 그걸 빌미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뤼시앵은 대답 대신 테이블 위 어딘가를 가리켰다. 깊은 푸른색의 유리 화병이었다.

“저거 좀 치워 줘.”

핑계가 아니었는지, 이환이 그것을 다른 곳에 두고 왔을 때 뤼시앵의 안색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저 색깔을 좋아하지 않았어?”

하늘처럼 파란 눈의 소유자인 황제를 따라 대부분의 황자들이 같은 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뤼시앵은 어미를 닮아 녹색 눈의 소유자였다. 그는 그것을 비천한 출생의 상징처럼 여기고는 평소 자신에게 부족한 푸른색을 가까이했다. 물망초 향유조차 그 꽃이 푸르기 때문에 사용하고 있으니 이쯤 되면 집착이었다.

이환으로서는 별 의미 없이 한 말이었다. 그런데 뤼시앵의 행동이 기묘했다. 어깨를 바르르 떤 그가 고개까지 절레절레 저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 있었어?”

“그냥 꿈을 좀……. 아무튼 이제 푸른색이라면 진절머리가 나.”

“꿈?”

이환은 이야기가 길어지게 될 것이라 짐작하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이 밤만 넘기자. 모든 인내심을 긁어모으며 그는 그렇게 다짐했다.

의외인 것은 뤼시앵의 반응이었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환에게로 향했다.

“뤼시앵?”

이환은 내심 경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뤼시앵에게서 살기나 분노 같은 부정적인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이어진 뤼시앵의 행동은 어쩌면 김빠지는 것이었다. 이환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고 가슴에 얼굴을 묻은 것이다. 그러나 이환은 이 별것 아닌 행동에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왜, 왜 그래?”

이환은 지금의 이 떨림이 연인의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당황한 숙맥의 반응으로 생각되길 바랐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몸을 다잡으며 시선을 내리자 구불거리며 흩어진 금발이 보였다. 그는 가까스로 팔을 들어 올렸다.

이환의 팔이 뤼시앵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자 뤼시앵이 이환에게 더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장미 봉오리 같은 입술에서 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상한 꿈을 꿨어.”

“어떤?”

“드래곤에게 살해당하는 꿈. 이상해. 실제로 본 적도 없으면서 그게 드래곤이라는 걸 알다니.”

“……꿈이라는 게 다 그렇지.”

그 말에 뤼시앵이 팔을 풀었다. 이환의 품에서 빠져나온 그가 미소 지었다.

“그렇지? 꿈이라는 게 다 그런 건데.”

물망초 향기 대신 다른 향이 이환의 코끝을 스쳤다.

다음 날 아침 퓌니르 기사단 소속의 열아홉 기사가 황궁을 나섰다. 죽여야 할 몬스터는 키마이라와 하피. 어느 쪽도 까다로운 상대였다.

두 종의 몬스터가 출몰하는 지역은 황궁에서 열흘쯤 말을 달리면 나오는, 샤브리에라는 이름의 산이었다. 그 지방에서는 험준하기로 정평이 났다고 한다.

황궁을 떠난 지 이레째 되는 날 오후, 이환은 평소보다 이르게 휴식을 지시했다. 내도록 달린 터라 사람도 말도 한계에 다다랐을 것이 분명했다.

기사들은 노숙을 위한 최소한의 준비만 마치고 고꾸라졌다. 반면 그들에 비해 반도 지치지 않은 이환은 산책하듯 주변을 거닐었다. 곧 그의 예상대로 압살롬이 모습을 드러냈다.

“찾느라 고생했습니다.”

압살롬은 우연히 만난 척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눈 가리고 아웅은 해야 하므로 이환은 아무 무늬도 없는 망토를 전신에 휘감아 제복을 감추고 있었다.

문득 이환은 이 상황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황궁 안에서는 내내 뤼시앵을 피해 다니더니, 이곳에서는 알아서 압살롬을 마중 나오는 꼴이라니. 자조하던 그는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이환이 압살롬을 만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용하기 위해서다.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해야 했다.

“날 찾았다는 건…….”

압살롬은 말없이 이환의 얼굴을 살폈다. 짙푸른 눈동자가 당혹스러울 만큼 샅샅이 그를 훑었다.

“조사가 끝났다는 말이죠.”

소맷부리에 손을 넣은 압살롬이 각지게 접힌 종이를 꺼냈다. 이환이 그것을 받으려는 때였다. 압살롬이 종이를 다시 소매 안에 넣었다.

“뭐야?”

“상인에게서 무엇인가를 받고 싶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누가 봐도 꿍꿍이가 있다고 생각할 만한 미소가 압살롬의 미려한 얼굴을 물들였다. 이환은 느리게 대답했다.

“……잘 입고, 잘 먹고, 잘 자면 되는 거 아니었던가.”

“그건 조건이죠. 지불과는 다른 겁니다.”

소문에 따르면 드래곤은 창고에 어마어마한 보물을 쌓아 놓는다고 한다. 그런 주제에 이제 곧 도망자 신세가 될 인간에게 지불을 요구하다니. 이환은 압살롬을 도전적으로 응시했다.

“원하는 게 뭐지?”

어차피 서로 속고 속이는 기묘한 균형 위에 성립된 관계다. 한쪽이 먼저 터트리지 않는 이상, 다른 한쪽도 비밀을 모르는 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지금 압살롬이 요구할 수 있는 것에는 ‘일개 군인인 이환으로서 지불 가능한’이라는 한도가 정해져 있었다.

보석일까. 혹은 금화일지도 모른다. 대답을 기다리는 이환에게 압살롬이 말했다.

“지금은 생각이 나지 않네요. 다음에 만났을 때 이야기할게요.”

압살롬의 신출귀몰함을 생각했을 때 드래곤에게는 특유의 이동 방법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 만날지 모르는 자에게 기회를 주다니.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격이었다.

이환이 입술을 굳게 다물자 압살롬이 다급하게 덧붙였다.

“무리한 거 바라지 않을게요.”

“……좋아.”

어차피 지금의 이환에게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가 마지못해 대답하자 압살롬이 종이를 다시 꺼냈다. 이환은 부디 그 ‘다음’이라는 때가 오지 않길 바라며 그것을 받았다.

압살롬과 헤어져 막사에 돌아온 이환은 손바닥을 펼쳤다. 잘 접힌 채인 종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보잘것없는 종이 안에 그가 원하는 정보가 담겨 있다. 지구, 집, 부모, 일상. 한때는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돌려받고 싶었던 것들이다.

이환은 눈을 감았다. 한때 포기했던 것들이 코앞에 있다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 나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오래 포기하며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다시 눈을 뜬 이환은 종이에 손을 가져갔다. 종이 특유의 질감이 손끝에 닿았다. 꿈이나 환상이 아닌 현실이다. 종이의 감촉이 이환에게 그 사실을 일깨웠다.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빠르게 종이를 읽어 내렸다. 총 여섯 개의 성물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중 둘은 세간에 잘 알려진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는―

이환은 허리춤에 매인 칼을 내려다보았다. 종이에는 이옐라가 내린 진짜 디우스텔룸이 황궁 보물 창고에 있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그저 선동용 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조금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황궁을 떠난 지 이레가 지났다. 이제 와서 돌아가는 것은 어불성설인 데다가, 황궁 보물 창고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이번 기회를 이대로 보내고 황궁에 가 진짜 디우스텔룸을 손에 넣을 것인가, 아니면 다른 성물에 눈을 돌릴 것인가. 결론은 빠르게 도출되었다.

안 그래도 이환과 한 쌍처럼 여겨지는 칼이다. 어찌어찌 손에 넣어 도주한다 해도 자칫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소문이 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게다가 이번 기회를 놓치는 것도 문제였다.

황궁은 나중에라도 들어갈 수 있고, 정 안 되면 다른 성물도 있으니까. 그렇게 결론을 내린 이환은 다음 성물에 대한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샤브리에 산 아래에 도착한 기사단은 근처 마을에 여장을 풀고 정보를 수집했다. 그들이 이번에 상대해야 할 몬스터는 키마이라와 하피였다. 이중 하피는 비행형 몬스터라 상대하는 데 주의가 필요했다.

기사들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산에 들어섰다. 초반에는 새와 벌레 소리로 시끄러웠으나, 깊이 들어갈수록 조용해졌다. 위험한 존재가 도사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선두의 이환이 소리도 없이 말을 세웠다. 뒤따르던 기사들도 그를 따라 멈춰 섰다. 이환의 바로 뒤에서 말을 몰던 뒤크가 속삭였다.

“준비할까요?”

이환이 고개를 끄덕이는 때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튀어나왔다. 한껏 긴장했던 기사들이 날을 세웠다.

그러나 모습을 드러낸 것은 작은 뱀이었다. 최근에 들어온 기사가 피식 웃으며 칼을 휘둘렀다.

“괜히 긴장했잖아. 저리……!”

퍽!

어린 기사의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머리가 통째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갑주에 감싸인 목을 단번에 물어뜯은 사자가 엄니에서 피를 뚝뚝 떨궜다. 그 옆으로는 염소의 머리가 붙었고, 꽁무니에서는 방금 전의 뱀이 기사들을 비웃듯 간들거렸다.

“키마이라!”

누군가 몬스터의 이름을 외쳤다. 그것이 절 부른 것인 줄 안 듯 세 개의 머리가 입을 길게 찢었다. 그와 동시에 기사들의 머리 위에 수많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상반신은 여성이나 하반신과 날개는 새의 것이다. 창백한 얼굴이 기사들을 굽어보았다. 반인반조의 몬스터 하피의 등장이었다.

석궁이 장전됐다. 깃대에 밧줄을 매단 채였다. 화살에 적중된 하피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사이, 기사들이 달려들어 굵은 나무 둥치에 밧줄을 친친 감았다. 하피가 발버둥 칠 때마다 갈고리처럼 생긴 화살 끝이 살을 아프게 후볐다.

석궁용의 짧은 화살 끝에 그물을 장치한 것도 있었다. 공중에서 펼쳐진 커다란 그물이 하피를 덮쳤다. 날개를 퍼덕일수록 복잡하게 엉키는 그물로 인해 몇 마리의 하피가 추락했다.

한쪽에서는 기사들이 키마이라를 상대 중이었다. 키마이라는 총 다섯 마리였지만 머리가 세 개인 터라 그보다 많은 숫자와 싸우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환은 키마이라의 사자 머리를 베어 낸 후, 곧바로 칼의 방향을 바꾸어 염소 머리를 갈랐다. 물 흐르듯 유려한 움직임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푹.

키마이라의 몸통을 찔러 든 신월도가 핵에 닿았다. 위험을 감지한 키마이라가 도망치려 했지만 이환이 조금 더 빨랐다. 핵은 금세 부서져 검은 연기를 흘렸다.

“큭! 쿨럭…….”

죽은 키마이라의 시체를 지나던 이환은 기침을 토했다. 기시감을 느낀 이환은 자기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고 입가를 닦았다. 사레들렸다고 생각할 법도 했으나, 머릿속을 스친 것은 회귀 전 그가 걸렸던 병이었다.

지금과 같은 기침에서 시작한 그 병은 원인도 이름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증세가 비슷한 병은 있었다. 이 세계의 아이들이 가볍게 앓고 지나가는, 현대의 지구로 따지자면 수두 같은 병이었다. 그래서 이환은 이곳의 풍토병이 이방인인 그에게 혹독하게 작용했다고 추측했다.

어쩌면 벌써 병이 진행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병이 깊어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지구에 돌아가야 했다. 이환은 귀환하겠다는 결심을 다졌다.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는 도중에도 몸은 착실히 키마이라를 척살하고 있었다. 이환은 두 번째 키마이라의 가슴을 갈라 칼끝으로 핵을 깨트렸다.

이제 키마이라는 단 한 마리만이 남았다. 총 열세 마리였던 하피는 현재 다섯 마리로 줄어 있었다. 열세라고 판단한 그들은 몸을 돌려 도망치기 시작했다.

“쫓아!”

짧게 외친 이환이 말에 올랐다. 고삐를 세게 내리치자 말이 달리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은 산 정상을 향해 도주했다. 그들을 따라갈수록 길이 점점 좁아졌다. 아래로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보였다. 그럼에도 말은 두려움 없이 질주하고 있었다.

말은 원래 겁이 많은 생물이다. 본성대로라면 이렇게 몬스터를 쫓는 일은 생각도 못 할 것이다. 그러나 말의 눈을 가림으로써 이것이 가능해졌다.

뤼시앵이 이환에게 이렇게 했다. 예쁜 웃음으로 눈을 가리고 상냥한 말로 귀를 막았다. 그로 인해 이환은 황실의 의도대로 놀아나게 되었다.

이제는 두 번 다시 그렇게 되지 않겠어.

급격하게 꺾인 길을 도는 순간, 몸을 숨긴 채 기회를 엿보던 하피가 이환을 덮쳤다. 세차게 퍼덕거리는 날개에 잠시 비틀거리는 틈을 타 다른 하피가 이환의 말을 밀어붙였다.

“잡으십시오!”

뒤따라오던 뒤크가 비명처럼 외치며 손을 내밀었다. 그런 그를 바위의 비가 덮쳤다. 하피들의 짓이었다. 뒤크는 신음을 내뱉으며 물러났다. 그사이 이환은 그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까지 가 버렸다.

저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세찬 바람에 이환의 망토가 나부꼈다. 이정표처럼 빛나던 은빛 갑주도 이내 어둠 속에 묻혔다.

“알렉상드르 경!”

뒤크가 울부짖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낸 메아리뿐이었다.

이환은 몇 년을 사용했어도 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이름을 들으며 입매를 끌어올렸다.

이때의 일은 충격이 컸던 터라 제법 상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오차가 있으면 안 되므로 가능한 그때와 비슷하게 움직이려 애썼는데 결과가 제법 나쁘지 않았다.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바위들조차 그대로였다.

회귀 전에는 이대로 절벽 중간에 떨어졌었다. 그래도 중간중간 나뭇가지에 걸린 덕분에 추락하는 속도가 제법 줄어들어 크게 다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진짜는 그다음이었다. 떨어진 바위가 이환을 덮친 것이다. 덕분에 등이 완전히 으깨지고 이곳저곳의 뼈가 부러졌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이환은 바위를 쳐 냈다. 떨어지는 중이라 움직임에 제약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해냈다.

그래도 살고 싶다고 발버둥은. 그는 잠시 자조했다.

바위를 쳐 내는 순간에는 알지 못했으나 이로 인해 떨어지는 궤도가 바뀌었다. 이환은 순식간에 가까워진 강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는 아직 갑주와 망토를 착용 중이었다. 이대로라면 강 밑바닥에 가라앉을 게 뻔했다.

다급히 망토를 풀고, 갑옷을 고정한 끈을 칼로 끊었다. 투구도 벗어 던졌다. 다행스럽게도 늦지 않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환은 홀가분한 몸으로 안도했다.

그때 그런 생각을 비웃듯 하피 한 마리가 다가왔다. 잿빛 날개에서 노린내가 풍겼다. 이환이 칼을 곧추세웠지만 공중에서 인간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둑어둑한 허공에 붉은 피가 뿌려진다. 하피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날아올랐다.

풍덩!

어두운 강에 거대한 파문이 일었다. 이환은 차디찬 물속에서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회귀 직전 몰릴 대로 몰렸던 터라 사인인 추락에 별 트라우마가 없다지만, 겨우 얻은 두 번째 삶마저 같은 방법으로 끝맺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버릴 칼을 놓고 팔다리를 움직였다. 도중에 숨이 부족했지만 견뎠다. 이윽고 수면 너머로 희미한 빛이 보였다. 이환은 사력을 다해 위로 향했다.

촤악!

“크헉! 헉, 흐아…….”

물 위로 고개를 내밀자마자 정신없이 숨을 들이쉬었다. 태어난 직후의 첫 숨이 이러했을까. 처음으로 공기가 달다는 생각을 했다.

차갑게 굳은 몸을 간신히 움직여 기슭으로 향했다. 하피에게 당한 등이 그제야 쓰라렸다. 겨우 헤엄쳐 기슭에 닿은 이환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 강을 빠져나왔다.

“됐……다!”

전신이 온전히 땅에 안긴 순간 내뱉은 환호였다. 그것이 마지막 기력이었다. 이환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등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가 기껍다. 너무 따뜻해서 이 감각에 안긴 채 이대로 영원히 잠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원할수록 그는 점점 수면에서 현실로 부상해 갔다.

이환은 조용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낙엽과 젖은 흙의 냄새였다.

다음으로 느낀 것은 약간의 통증이었다. 하피의 손톱에 입은 상처가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느껴지는 통증은 정신을 잃기 전에 느꼈던 것에 비하면 미미했다. 게다가 등 한 부분이 계절에 맞지 않게 따뜻했다. 살아 있는 생물만이 가질 수 있는 온기였다.

이환은 다가붙은 생물의 기척을 살폈다. 조용한 기척 속에는 살의나 사나움 같은, 남을 해치려는 자 특유의 느낌이 없었다.

사슴이라도 다가온 것일까. 아직 떠나지 않은 잠기운 덕인지 기분이 온화했다. 그는 엎드려 있던 몸을 조심스럽게 돌렸다. 선한 짐승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누운 이환의 눈에 비친 것은 사슴 같은 것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은빛 실타래가 몽환적으로 흔들렸다. 크게 뜨인 짙푸른 눈이 이환을 향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를 마주하자 회귀 직전 마지막으로 봤던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

그날도 이러했다. 압살롬은 저 눈에 깊은 원망을 담아 이환을 응시했다. 그때 그가 무엇인가 말했던 기억이 났다.

‘무슨 말이었더라.’

시뻘건 노을에 젖었던 은발도, 알 수 없는 광증을 담았던 표정도 전부 기억난다. 그러나 당시 압살롬이 했던 말만큼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

졸음이 잔뜩 묻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환은 자신의 그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절벽 위에서 압살롬이 뭐라고 말했든 이제 와 그게 중요할까. 그는 입을 다문 채 압살롬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얼어붙었던 압살롬이 허둥거렸다.

“이환! 이, 일어났……. 아직 움직이면 안 돼요!”

압살롬이 말렸으나 이환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등을 깊게 할퀴어졌으니 작은 동작으로도 제법 고통스러워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압살롬이 조치를 취한 모양이었다.

회귀 전에도 이랬을까. 그때도 이환은 한 번 기절했다가 깨어났었다. 그를 진찰한 의사는 걷는 것이 기적일 상처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모두들 이옐라가 이환을 돌보았다고 말했다.

그것이 압살롬이 한 일이라면 기적보다는 마법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이 세계에서 마법은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힘이었다. 그러나 드래곤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드래곤은 마법을 통해 자연을 다루고, 몬스터를 복종시키며, 생과 사를 결정할 수 있다고 한다. 지구에서였다면 코웃음 쳤겠지만 이곳은 이세계다. 신이 실제로 현신하여 증거까지 남기는 마당에, 고작 마법이야 우스울 것이다.

그러나 현상을 안다고 인과마저 이해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환은 압살롬에게 대적하기 위해 신이 직접 불러온 자다. 압살롬에게 이성이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 이환이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이득이라는 것 정도는 충분히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째서 날 살렸지?’

상대방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고를 더듬어야 한다. 이환은 그 이상의 생각을 멈췄다.

어차피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다. 이때 압살롬의 속내가 어떠했든, 결국 이환을 속여 죽음으로 몰아넣지 않았던가.

이환은 덥수룩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압살롬이 움찔거렸다. 그걸 보다가 압살롬의 정체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척하기로 마음먹었다.

“절벽에서 떨어진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저 강에 빠진 날 네가 구한 거야?”

압살롬이 눈을 깜빡이더니 이환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내가 왔을 때 이환은 기슭에 몸을 걸치고 있었어요. 자력으로 빠져나온 거겠죠. 난 조금 더 바깥쪽으로 끌어다 놓은 것뿐이니까 고맙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환은 눈을 가늘게 떴다. 생색내기 좋은 상황이라 미끼처럼 던졌는데 압살롬은 받아먹지 않았다.

“그래도 치료는 필요할 것 같네요.”

압살롬은 품에 손을 넣어 붕대와 약 등을 꺼냈다. 이환은 망설이다 웃옷을 벗고 등을 보였다. 오른쪽 어깨에서 시작하여 등을 가로질러 왼쪽 옆구리까지 선명하게 새겨진 상처가 드러났다.

“……아팠겠군요.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도 괜찮을까요?”

“하피에게 당했어. 그 바람에 여기까지 떨어지게 된 거고.”

“부대로 돌아갈 생각은…… 없는 거죠?”

성물의 위치를 물었다는 자체만으로도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의미나 다름없다. 뻔히 짐작 가능한 사실을 속일 이유는 없으므로 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양쪽 모두 이렇다 할 화제를 찾지 못해 입을 다물었다. 압살롬이 내는 옷 스치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는 유일한 것이었다. 등을 온전히 보이고 있다는 상황이 이환을 긴장하게 했다. 그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느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이는 압살롬에게 말했다.

“대충 발라도 돼.”

“아뇨. 그랬다가 흉터라도 남는다면 저 자신을 원망하게 될 테니까요.”

“여기서 하나 정도 늘어 봐야 티도 안 나.”

별 의미 없이 한 말에 압살롬이 숨을 들이켰다. 약을 바르던 손도 어느새 멈춰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몇 초 흘러, 이환이 이상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툭.

따뜻한 것이 어깨 위에 가볍게 얹혔다. 흘러내린 은발 몇 가닥이 온기의 정체를 짐작하게 했다. 떨리는 숨을 몰아쉰 압살롬이 무어라 중얼거렸다.

속삭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숨결이라 말할 수 있는 그 소리는 이환에게조차 제대로 닿지 않을 만큼 작았다. 띄엄띄엄 들려온 음절로 단어를 유추한 이환은 안 그래도 치받던 혐오에 분노가 더해지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요.’

절로 경직한 턱이 부르르 떨렸다. 이환은 움직여지지 않는 그것을 간신히 움직여 입을 열었다.

“떨어져.”

곧장 입을 다문 것은 자신도 모르게 나올지 모르는 욕설을 삼키기 위해서였다.

이환은 회귀 전의 압살롬을 떠올렸다. 마주친 횟수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압살롬은 만날 때마다 사랑을 고백해 왔다. 그럴 때마다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어쩔 줄 몰라 당황했었다.

이제는 그 모든 것이 거짓임을 안다. 몬스터의 왕께서 친히 미인계라니 송구하네. 이환은 답지 않게 이죽거렸다.

압살롬은 이환의 말에 고분고분 고개를 들었다. 어깨를 타고 내려왔던 은발이 이환의 가슴을 스치며 느리게 올라갔다.

문득 이환은 그것이 거미줄 같다는 생각을 했다. 먹잇감을 꽁꽁 묶어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기 위한 아름다운 장치. 끔찍한 생각이었다.

생각에 잠긴 사이 압살롬이 약을 다 발랐다. 이환은 그의 손에서 붕대를 빼앗았다. 붕대를 감는 척하며 끌어안게 되는 상황은 사절이었다.

이환이 붕대를 감고 압살롬이 뒤에서 그걸 도왔다. 가슴 앞에서 붕대 끝을 단단히 매듭지은 이환은 남은 것을 압살롬에게 건넸다.

“잘 썼다.”

“별말을 다 하네요. 우리 사이에.”

“……그러게.”

이환은 치미는 욕지기를 억누르며 간신히 대답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러나 압살롬은 그 말을 듣자마자 꽃처럼 웃었다.

압살롬을 외면하고 몸을 일으켰다. 바지에서 흙과 낙엽 부스러기를 툭툭 털었다. 아직 덜 말랐지만 입을 만은 했다.

뒤이어 이환은 주변을 살폈다. 그러나 압살롬 이외에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말에 실어 뒀던 짐에 한 가닥 기대를 걸어 봤는데 역시나 전부 물에 빠진 모양이었다.

현재 소지한 물건들을 머릿속으로 헤아렸다. 옷 안쪽에 단단히 고정해 뒀던 지갑과 신분증은 무사했다. 지금은 강바닥에 가라앉아 있을, 광고판과도 같은 화려한 신월도는 처음부터 버릴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평범한 칼도 챙겨 왔다.

문제는 옷이었다. 하피의 손톱에 찢긴 웃옷은 등 부분이 너덜너덜했다. 망토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살기 위해서 버린 후였다. 이환이 재킷과 셔츠를 난감하게 살피는 때였다.

“옷이 필요한가요?”

방긋 웃은 압살롬이 무엇인가를 들어 보였다. 셔츠와 망토였다.

“제 옷이지만 저와 이환은 체구가 비슷하니까 잘 맞을 겁니다.”

“고마…….”

이환이 인사하며 그것을 받으려는 때였다. 압살롬이 슬그머니 팔을 움직였다. 이환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옷은 고맙지만 장난치고 싶은 기분 아냐.”

“아니, 그…….”

이환은 어딘지 초조해 보이는 압살롬에게 시선을 주었다. 붉은 입술을 우물거리던 압살롬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도 데리고 가 줘요.”

“미……안하지만 어려울 것 같은데. 무엇보다, 내가 어디에 가는 줄 알고 데려가 달라는 거야?”

이환은 욕설을 내뱉으려던 입술을 질끈 물었다.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어떻게 말을 돌릴 수 있었다. 미친놈. 내가 널 왜 데리고 가. 그러자 압살롬이 저돌적으로 달려들었다. 방금 전 보였던 망설임은 어디에 갔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성물 찾으러 가는 거잖아요. 아니라고 할 생각 마시죠. 다 아니까. 그렇다면 그 정보를 가져다준 내가 안내자로서 함께 가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겠어요?”

“가면 어떻게든 해결될 거야. 굳이 안내자 같은 건 없어도…….”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혼자 가려고 합니까?”

이환은 기가 막혀 압살롬을 보았다. 다년간에 걸쳐 몬스터와 전투를 치러 온 몸이다. 게다가 차원이동자 특혜로 생각되는 근력과 민첩성, 동체시력도 있었다.

이렇듯 온몸이 흉기나 다름없는 이환에게 세상이 험하다니. 지금 상황이라면 오히려 이 세계가 그에게 험한 짓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이환이 입을 다물자 자신감을 얻었는지 압살롬이 열심히 말을 이어 갔다.

“난 상인이고 타국도 많이 가 봤습니다. 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지름길도 많이 알고 있죠.”

“이봐.”

“물건을 보는 법, 정보를 얻는 법, 그 외에도 이환이 하려는 일에 도움이 될 만한 재주를 많이 갖고 있어요. 군인인 이환이 모르는, 여행자만의 비법도 알고요. 그리고 또 이환의 시중도 들어 줄 수 있고…….”

이대로 두면 압살롬이 자신의 장점에 대해 한도 끝도 없이 읊을 것 같았다. 이환은 손을 들이밀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러자 압살롬은 언제 떠들었냐는 듯 조용해졌다.

“왜? 그렇게 해서 네가 얻는 건 뭔데?”

압살롬이 무슨 재주를 가졌든 이환은 그와 동행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환의 귀환은 압살롬이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생물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이성뿐이던가. 언제 마음을 바꿔 성물을 가로채거나 부술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상인이라고 주장하는 압살롬이라면 반드시 따져야 할 부분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압살롬과의 관계에 선을 긋는 것이기도 했다. 너와 나는 단지 친분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움직일 수는 없는 사이라고.

이환이 손을 떼었음에도 압살롬은 한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이환은 그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이환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그저…… 같이 있고 싶습니다. 그것으로는 부족한가요?”

“그러니까 왜?”

답답하여 한 말이었다. 그것에 압살롬이 입을 다물었다. 문득 이환은 이 상황이 익숙하다고 느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압살롬이 이렇게 굴었다.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는 대신 침묵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침묵은 사랑의 호소로 대체되었다.

이환이 생각에 잠겨 있자 압살롬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의 입술에서 궁색한 변명이 흘러나왔다.

“우린 친구잖습니까.”

이환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것을 봤을 텐데도 압살롬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친구. 이환은 가만히 중얼거리다 이를 질끈 물었다. 그렇게라도 저 얄팍한 단어를 씹어 부수고 싶었고, 혀끝에 달라붙은 욕설을 삼켜야 했다.

그가 밉다. 할 수만 있다면 이환이 맛봤던 쓰라림을 압살롬에게 고스란히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그때마다 이환은 그 당연하지만 저열한 욕망을 꾹꾹 억눌러야만 했다.

이환은 지금 스물네 살이고, 그를 배신한 자는 아직 아무도 없다. 단 하나, 그 이유로 이환은 압살롬은 물론 뤼시앵이나 황실에게 향하는 복수심마저 잊으려 애썼다. 그러니 적어도 그들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는 것 정도는 바라도 괜찮지 않을까.

이환의 눈동자가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다. 압살롬은 그것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래도 안 된다고 하면……. 말했듯 난 지름길을 잘 알아요. 아무리 당신이라도 우연히 만나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을 겁니다.”

즉, 이환이 어딜 가든 쫓아가겠다는 말이다. 동행하는 것보다 더 거슬리는 행동일지 모른다. 그래도 이환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몸이 피곤할 여행이라면 마음이라도 편하고 싶었다.

결국 압살롬이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이환은 아직 내게 정보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죠. 이걸로 하겠습니다.”

이환은 일순 멈칫거렸다. 안 그래도 압살롬이 내세울 대가가 내내 마음에 걸렸다. 짜증스러울 동행과, 무엇을 바랄지 모를 대가. 한숨이 나오는 상황이지만 불안 요소는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어떻게 해도 따라붙을 거라면 차라리 부담 하나라도 없애는 것이 나을 터였다.

“……그럼 네 이름을 걸고 한 가지만 약속해. 내가 하는 일을 결코 방해하지 않을 거라고.”

“물론입니다.”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은 신인 이옐라조차 어기지 못한다. 이 세계의 절대 명제 중 하나였다. 그것을 압살롬은 가볍게 받아들였다. 그것마저 마음에 안 들어서, 이환은 이를 갈며 압살롬을 노려보았다.

“실컷 부려먹어 주지.”

“네. 원하시는 대로 마음껏 부려 주세요.”

압살롬은 태연히 대답했다. 뻔뻔스럽다고 느껴질 만큼 천연덕스러운 태도였다.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 낸 압살롬이 셔츠와 망토를 내밀었다. 그것을 낚아채듯 받아든 이환은 강을 향해 걸어갔다.

물로 대강 흙만 닦아 낸 후 옷을 입었다. 붕대가 친친 감긴 상체를 흰 셔츠가 감싼다. 짙은 회색의 망토까지 걸친 이환은 압살롬을 돌아보지도 않고 걸음을 떼었다.

“같이 가요, 이환.”

압살롬도 만면에 미소를 띤 채 걷기 시작했다. 둘의 그림자는 어느새 산의 어둠에 묻혀 버렸다.

***

“헉!”

뤼시앵은 눈을 번쩍 떴다. 사위는 검었지만 사물을 구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잠시 후 자신이 침실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또 그 꿈이야…….”

한숨처럼 새어 나온 목소리에는 약간의 짜증이 배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벌써 한 달 가까이 같은 꿈을 반복하여 꾸고 있는 것이다.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같은 꿈이라고 아는 것도 꿈속에서 그렇게 여겼던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었다. 유일하게 뚜렷한 것은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의 장면이었다.

꿈속의 뤼시앵은 주저앉은 채 어딘가를 올려다보고 있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은백색의 거대한 생명체가 있었다.

‘드래곤.’

단 한 번도, 심지어 그림으로도 본 적 없는 존재였지만 알 수 있었다.

드래곤이 뤼시앵을 굽어보았다. 청람의 눈동자에는 미움과 원망이 가득했다. 그 눈이 무서워 떨고 있자니 하늘에서 운석 무리가 떨어졌다. 그것에 깔려 죽기 직전 뤼시앵은 무엇인가를 지독하게 후회했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기분 나빠.”

다시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미련 가득한 감정이 잠에서 깨어난 지금까지도 질척하게 따라붙고 있었다. 무서운 꿈을 꾸고 일어난 아이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뤼시앵이 아는 한 가장 강한 남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알렉상드르 경이 돌아오면 꿈에 대해 이야기하자. 그라면 분명 날 끌어안아 위로해 줄 테니까.

다시 찾아온 잠의 손길이 뤼시앵의 부드러운 눈꺼풀을 상냥하게 쓸어내렸다.

다음 날 아침, 이환이 실종되었다는 급보가 황궁으로 날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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