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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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계절은 초여름이었다.

    덜 익어 시큼하고, 푸르스름하게 멍이 든, 초여름.

    그날 밤 최홍서는 평창동으로 향하고 있었다. 강우현 감독의 자택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영화 〈크림 맨션〉의 투자 유치를 목적으로 하는 파티였다.

    당시 최홍서의 캐스팅은 거의 확실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흥행 성적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감독이다 보니 좀처럼 투자금이 확보되지 못했다. 영화 제작이 무산될까 초조해진 명 사장이 나서서 강 감독을 부추겨 주최한 파티였다.

    그때쯤 명 사장은 강우현 감독의 영화에 최홍서를 주연으로 출연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다.

    아이돌 출신 연기자라는 어중간한 포지션을 벗어나, 확실한 연기파배우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쉽게 말해, 몸값을 올릴 수 있는 더없는기회였으니까.

    뒷좌석의 최홍서는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턱시도 슈트를차려입고 숍에서 헤어와 메이크업까지 마친 그의 외견은 광고나 화보속 모습처럼 완벽했지만, 표정은 지쳐 보였다.

    손안에서 울리는 핸드폰의 발신인을 확인한 뒤에는 얼굴빛이 더욱어두워졌다.

    [왜 아직도 안 와?]

    전화 너머 명 사장의 목소리는 벌써부터 곤두서 있었다.

    “다 왔어요. 5분 안에 도착해요.”

    [VIP분들하고 감독님 모시고 지금 2층에 있어. 여긴 아무나 못 올라오니까, 감독님 뵈러 왔다고 하고 네 이름 대면 올려보내 줄 거야.]

    “네.”

    명 사장은 먼저 도착해 VIP들의 비위를 맞추고 있는 중이었다. 화장실 핑계라도 대고 잠깐 빠져나왔는지, 라이터에 불을 켜고 담배의 필터를 빠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기를 뿜는 소리 뒤에 명 사장이 무게를 잡으며 경고하듯 말했다.

    [영화가 크랭크인되느냐 엎어지느냐, 이게 너한테 달려있다 생각하고 실수 없이 해. 오늘 아마… 오랜만에 VIP 접대가 있을 것 같으니까.]

    접대… 어둠 속에서 최홍서의 입꼬리가 씁쓸하게 씰룩거렸다.

    하긴 접대는 접대지. 앞에 ‘성’이라는 한 글자가 빠졌을 뿐.

    [홍서야, 나도 언제까지 너 붙잡고 이러고 싶지 않다? 나라고 이런 좆같은 포주 노릇이 좋은 게 아니야. 빨리 떠서 독립해야지, 응?]

    우스운 얘기지만, 최홍서는 그간 연예 활동에만 성실히 임했던 게 아니었다. 이미 접대에도 상당한 프로였다. 준수하지 못한 외모를 가진 중년의 남녀든, TV 속 아이돌에게 호기심이 생긴 재벌가의 며느리든, 호감이 없는 사람을 상대하는 데에 무감각해져 있었다. 무감각해지는 것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저라고 좆같지 않겠어요? 다 와 갑니다. 지인이 형 만나서 같이 올라가면 되는 거죠? 끊습니다.”

    [이게 요즘 좀 뜨더니 진짜 미쳤…]

    짖어대려는 명 사장을 내버려 두고 통화를 끝내버렸다. 최홍서는 핸드폰을 움켜쥔 채 어둠에 잠긴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았다.

    ‘레이어드’를 띄우려고 안 해본 짓이 없었다. 불러주는 곳만 있으면 예능이든 드라마든 프로그램을 가리지 않았다. 몸을 아끼지 않고 성실하게 임했다. 뭘 시켜도 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찾아주는 곳도 점점 늘었다.

    그렇게 몇 년의 고생 끝에 최홍서도, ‘레이어드’도, 드디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톱스타가 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명 사장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거물이 되어서 UB를 떠나면 된다고.

    ‘박경한이처럼 한류 스타 돼서 대형 기획사로 옮겨. 내가 뭐 너희 잘돼서 내 품 떠나는 것까지 막는 사람이냐?’

    그건 명 사장도 늘 입버릇처럼 했던 말이었다.

    실제로, 접대로 얻는 수입보다 연예 활동 수입이 더 늘어나면서부터는 누구를 모시러 가라는 지시도 줄어들었었다. 그것만으로도 살 것같았고, 이 지옥이 끝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었다. 멍청하게도.

    강우현 감독의 자택 입구는 파티에 도착한 손님들로 붐비고 있었다. 양쪽으로 활짝 열린 정문 앞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던 몇몇 사람들이 최홍서를 알아보고 사진 촬영을 요청했다. 그들과 한 명 한 명 사진을 찍는 사이, 같은 UB 소속의 배우인 정지인이 도착하는 것이 보였다.

    파티 복장으로 차려입은 정지인은 불려온 배우 같지가 않았다. 투자 유치를 위해 이곳에 초대받은 부유한 젊은 게스트 중 한 사람처럼보였다.

    ‘레이어드’ 멤버들, 그리고 또 다른 배우 지망생인 현수와 함께 허름한 다세대 주택에서 함께 숙소 생활을 하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인데,정지인은 늘 격이 달라 보였었다. 그건 꼭 가지고 있는 소지품들이 고가의 명품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훌륭한 교육을 받고 자란 온화한 인품의 왕자님 같은 면이 있었다.

    제멋대로 날뛰는 망나니 왕자가 아니라, 모두에게 상냥하고 품위가있는 진짜 왕자님 같다고. 엄청난 부자였다가 부모님 사업이 망하면서어쩔 수 없이 빚을 떠안은 도련님일지도 모른다고. 정지인이 처음 UB에 들어왔을 무렵에는, 현수와 최홍서 둘이서 그런 얘기를 하기도 했었다.

    “형, 기다렸지?”

    “최홍서 얼굴 얼마 만에 보는 거야? 우리 같은 집 사는 거 맞아?”정지인이 웃으면서 최홍서를 맞아주었다.

    “그러게 말이야. 지난번에 녹스 호텔에서 형 얼굴 좀 보려고 했더니, 계속 안 보이더라.”

    “아… 그때, 예전 친구하고 우연히 만나서… 구석에 박혀서 옛날얘기 좀 떠들다 보니까…”

    평소의 정지인답지 않게 장황한 변명이었지만, 최홍서는 그런 것에일일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대강 고개를 끄덕이며 정지인의 팔을끌었다.

    “들어가자. 사장님은 감독님하고 같이 2층에 계셔.”

    강 감독의 자택은 평창동 내에서도 상당한 규모를 가진 대저택이었다.

    그의 부에 대해서는 최홍서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다. VIP 고객들을 위해 명품 브랜드들이 개최하는 이벤트에도 강 감독은 빠지지 않고 초대되었으며, 국내 미술 시장에서도 큰손으로 통했다. 영화로 대박을 터뜨리는 감독은 아니어도 굉장한 명예를 가진 감독이었기에 개인자산이 적지는 않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그의 부는 수상할 정도의 규모였다.

    길이가 족히 30m는 될 법한 거실로 들어서자 감탄부터 새어 나왔다.

    “와… 이게 집이야?”

    활짝 열어둔 폴딩도어 너머로는 넓은 정원과 그 너머 서울의 야경까지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정원의 가장자리에는 DJ 부스와 바가 꾸며져 있고, 한가운데에는 대형 간이 수영장까지 설치되어 있었다. 수영복을 입은 젊은 남녀들이 풀 안에서 웃고 떠들며 춤을 추었다. 모델처럼 키가 크고 늘씬한 그들은 파티에 초대된 손님이 아니라,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었다. 부유한 VIP들을 위한 예쁜 구경거리, 눈요기인 셈이었다.

    명 사장이 고안해낼 만한 파티였다. 썩어 남아돌 만큼의 돈을 가진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뭔지, 귀신같이 잘 아는 남자였으니까.

    자신의 젊음과 육체가 고깃덩이처럼 값으로 측정되어 탐욕스러운 눈들 앞에 던져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영장 안의 그들은 즐거워 보였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본인들이 즐기고 있으니, 예전의 나보다는 나은 건가?

    그런 생각으로 피식거리던 최홍서는 정지인에게만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강 감독님 말이야, 재벌 총수의 혼외 자식이라는 거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소문이 있었어?”

    “수익도 못 내면서 계속 영화에 돈을 대 달라고 해서 아버지에게 튕됐다는 얘기가 있어. 업계 내부에서 도는 소문이라고 그대로 다 믿는건 아닌데… 영화감독치고는 인맥이 조금 세긴 하더라고. 재벌 친구들도 많고.”

    단독으로 오디션을 보고 여러 차례 미팅을 가지는 동안 강우현 감독에 관해 몇 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상당한 미술품 애호가라는 것.

    점이나 굿 같은 무속 신앙을 열렬히 신봉한다는 것.

    그리고 몇몇 상류층들과 깊숙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부호라는것.

    그런데 직접 자택에 와서 보니 예상보다도 더 대단한 부를 가진 것같았다. 평범하고 소박한 영화감독은 절대 아니었다.

    명 사장이 알려준 대로,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경호원이 출입을통제하고 있었다. 신분을 확인시켜 주고 2층 복도로 올라서자, 정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심한 풍경이 더욱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아줌마 아저씨들 아주 눈 호강 잘하고 계시네. 그래, 저런 거 보고즐기려고 이런 데 오는 거지. 잘하면 마음에 드는 애한테 용돈 좀 찔러주고 재미 볼 수도 있는 거고.”

    비아냥거리는 최홍서의 눈에 경멸의 빛이 강하게 서렸다. 수영장을채운 그들에게서 자신을 겹쳐 볼 수밖에 없었다.

    요즘 세상에 화류계에서 일하고 싶어 제 발로 걸어오는 남녀는 넘쳐났다. 굳이 빚을 씌워 발목을 잡거나 협박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극소수에게는 그런 일이 벌어졌다. 큰돈이 되는 상품이 떠나려고하는데 손 놓고 잘 가라고 등 떠밀어줄 바닥이 아닌 것이다.

    우연한 계기로 인생이 더럽게 꼬여 버렸지만, 아직 희망이 있다고믿었다. 톱스타, 많은 돈, 인기, 영향력… 그거면 이 진창에서 해방될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역할은 최홍서에게도 간절했다.

    “근데 우리 오늘 여기 왜 불려 온 거야? 넌 뭐 아는 거 있어?”

    명 사장과 강 감독, 그리고 VIP들이 기다리는 안쪽 응접실로 막 걸음을 옮기려는데, 정지인이 홍서에게 물었다.

    “감독님 차기작에 우리 회사에서도 조금 투자를 할 것 같아.”“UB가?”

    “회사 차원에서 하는 건지 사장님이 개인 투자자 중 한 명으로 이름올리는 건지, 나도 거기까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사장님 열의가 대단해.”

    “그런데 왜 UB에서 굳이 투자를 하려는 건데.”

    “사장님이… 나를 주연으로 넣고 싶어 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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