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그러나 그는 곧 웃어 보였다.
“안주 몇 가지 같이 주문해서 여기서 마실까?”
고통을 덮기 위한 일그러진 미소이기는 해도, 어쩌면 최홍서가 쓰러진 직후이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그런 꿈을 꾼 탓에 내가 예민해졌는지도.
이해성은 최홍서의 얼굴을 정성스레 매만졌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 부은 눈가를 다독이고, 뺨에 남은 물기를 엄지로 쓸었다.
“거실엔 경호팀도 대기하고 있고, 침실에서 오붓하게 마시는 게 좋겠다.”
장소는 아무래도 좋았다. 최홍서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문밖의 수행원을 불러 술과 안주를 부탁하는 동안, 얼굴을 저쪽으로 돌린 채 다시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있었다. 이해성 외에는 누구도 보고 싶지 않고, 누구에게도 자기를 보이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는 평소와 달리 애처럼 구는 최홍서의 등에 팔을 두르고 토닥여주며 수행원을 상대했다. 다시 단둘이 된 후에도, 어둑한 방 안에서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안고만 있었다.
“홍서가 이렇게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니까 나야 좋긴 한데... 조금 걱정되네? 열은 많이 떨어졌는데, 아직 아픈가? 아파서 애기 어리광 부리는 거야?”
머리카락을 살살 만져주는 다감한 손길을 느끼면서, 최홍서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무서운 꿈을 꿔서... 깼을 때 좀 놀랐어요. 그래서 그런 거고, 평소랑 별로 다를 거 없으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돼요. 조금만 더 이러고 있으면...”
“무슨 꿈을 꿨는데. 나한테 얘기하고 나면 좀 편해질지도 모르잖아.”
“......”
“말하기 힘들면 안 해도 돼.”
“말하면, 아저씨가 슬플까 봐...”
꿈에서 보았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즉각 목소리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내가 진짜 왜 이러지...
그가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감고 입술을 꾹 물었다.
“그런 거면 더더욱 말해 주면 좋겠는데. 홍서가 그랬잖아. 우린 공범이라고.”
“......”
“돌덩이같이 단단한 어둠도 나눠 가져야 한다고.”
그의 셔츠의 등 부근을 더 꽉 쥐면서, 최홍서는 마른침을 삼켰다. 타이를 풀고 셔츠의 맨 위 단추 몇 개를 풀어놓은 이해성의 목 뿌리에 얼굴의 절반을 묻은 뒤에야 용기를 냈다.
“나를, 화장하던 날을 봤어요.”
“......”
“태국에서. 지인이 형이랑 지인이 형의 그분이랑... 차에 있었고. 아저씨는 다른 차에 있었어요.”
“......”
“차 밖에서 아무리 아저씨를 불러도, 아저씨가 내 목소리를 못 들어서... 미칠 것 같아서...”
그 이야기를 담담히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굳어버린 듯이 듣고 있던 이해성은 최홍서의 손을 자기 뺨에 가져다 댔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듯이.
“괜찮아. 다 꿈이야. 이제 괜찮아. 지금은 여기서 홍서랑 같이 있잖아.”
단순한 꿈이 아니라, 있었던 일이라고. 네가 본 것은 꿈이 아니라, 과거라고. 이해성은 말하지 못했다. 상식으로 설명될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최홍서가 더 알게 돼서 좋을 게 없을 듯했다.
서로 공범이 되어야 한다던 최홍서.
아저씨 손에 피가 묻었다면 내 손에도 묻은 거라던 최홍서에게, 곧 조성현을 찌르게 될 칼을 숨겨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말하고 싶어도 입이 떨어지지 않는 한 가지.
“전부 꿈이야, 홍서야. 잊어버리자. 응? 좋은 생각만 하도록 노력해야지.”
실재하는 그의 품에서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만... 그러고 싶지만, 생각이나 바람만으로 일이 잘 풀려나가지 않는다는 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 꿈에서 깨어나면서, 최홍서는 알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알아버린 느낌이었다. 한창 푹 빠져 읽고 있는 책의 결말을 스포 당한 것 같은.
혹시 지금 이 시간이 그리 오래 남지 않은 것은 아닐까.
차마 입 밖으로 낼 수조차 없을 만큼 두려운 이야기. 두려운 결말.
얼굴을 들어 조심스레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장이라도 꿈속에서처럼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이해성은 또 웃어 보였다. 그리고 최홍서의 얼굴 구석구석을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이야 늘 조심스러울 만큼 살가웠지만, 오늘은 특히 더 애틋했다. 마치 자신의 손이 닿는 자리마다 최홍서가 아픔을 느끼기라도 할 것처럼. 화상이나 찰과상 같은 상처 위를 더듬는 것처럼.
“아까 울어서 얼굴 엉망이죠? 세수라도 좀 하고 올게요.”
“홍서야!”
그의 눈빛을 견디기 힘들었다. 손등으로 얼굴을 쓸며 일어나려는 최홍서의 손목을 이해성이 다급하게 붙잡았다. 어둑함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창백하게 질린 그의 얼굴은 분명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또, 그것을 숨기려 하고 있었다.
그는 아플 만큼 거세게 움켰던 최홍서의 손목에서 살짝 힘을 풀었다. 그리고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 있어. 타월 적셔 오라고 하면 돼. 내가 닦아줄게.”
“아저씨가 많이 안아줘서, 나 이제 괜찮아요.”
“내가 홍서랑 잠깐이라도 떨어지기 싫어서 그래.”
이해성은 침대 아래로 내려가려 무릎으로 버티고 선 최홍서의 손목을 자꾸 잡아당겼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기를 속이는 일쯤은 간단히 해낼 거라고. 최홍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간단히 속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게 최홍서를 점점 불안하게 했다.
그의 앞으로 되돌아가서, 이번에는 최홍서가 이해성의 얼굴을 감쌌다. 그가 늘 해주는 것처럼. 그가 놓아주지 않았기에 왼손은 여전히 붙잡혀 있어서, 오른손으로만 그를 만질 수 있었다.
“왜 그래요. 나 잠들어 있는 동안 무슨 일 있었어요? 그래서 그래요?”
물기 없이 마른 그의 입술은 누적된 피로와 수면 부족으로 꺼칠하게 갈라져 있었다. 그 입술이 숨을 들이쉬며 달싹였다. 그러나 그는 입술 밖으로 말을 밀어내지 못했다. 이렇게까지 망설이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몇 번이나 마른침을 삼키고 입술을 벙긋거리면서, 그의 두 눈이 최홍서의 얼굴 곳곳을 헤매었다. 턱, 입술 옆, 귀밑... 그런 곳들을 스치는 눈길은 우연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
한순간, 최홍서는 그 시선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알아버렸다. 읽고 있는 책의 결말을 알아버린 것 같았던 그 꿈처럼.
자신의 손목을 감은 이해성의 손 위를 가만히 감쌌다. 도드라진 강한 마디 하나하나를 부드럽게 훑었다.
“괜찮아요. 금방 세수하고 올게요.”
차분한 목소리에서 이해성도 느꼈을 것이다. 최홍서가 이유를 알아버렸음을.
침대 아래로 완전히 내려서자, 손목을 붙들고 있던 이해성의 손이 툭, 끊어졌다. 그는 그 손으로 얼굴을 덮어 짓뭉갰다. 차마 최홍서를 보지 못했다.
침실에 딸린 욕실은 휘황했다. 여러 조명 중 가장 간단한 간접 조명에만 불을 밝혔다. 세면대 앞으로 걸어가는 걸음걸이가 곧지 못했다.
“......”
그렇구나. 예상한 대로네.
거울 속 얼굴을 보며 짐짓 괜찮은 척 속으로 말해본다.
턱, 입술 옆, 귀밑, 뺨, 눈 아래... 그의 시선이 닿았던 자리마다 반점이 올라와 있었다.
얼굴까지 번진 반점은 어째서인지 얼굴 아래의 그것들보다 훨씬 흉측하게만 보였다. 지워내고 싶었다. 그에게 이런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얼굴인 것도 모자라서, 이런 징그러운 병... 아니, 병도 아니지. 병 때문에 쓰러지는 게 아니고, 병 때문에 이런 자국이 온몸을 뒤덮는 게 아니니까.
송장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 것을 사랑해야 하는 그는 무슨 죄일까.
몇 번이나 물을 끼얹었다. 귀한 연고도 듣지 않는데, 물로 씻어 낸다고 해서 없어질 리가 없겠지만. 의식을 잃은 동안 그가 갈아입혀 주었을 티셔츠의 앞섶이 흠뻑 젖을 정도로 정신없이 물을 퍼부었다. 손바닥으로 벅벅 문질렀다.
그리고 흐느낌 같은 숨을 몰아쉬며 젖은 얼굴을 들어 올렸을 때, 거울 속에 그가 서 있었다.
타월을 집어 물기를 닦아내는 척, 얼굴을 가렸다.
“아저씨 이거 때문에 그랬어요?”
명랑을 가장했다. 명랑하게 구는 게 더 어색하다는 걸 알면서도.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닌데요, 뭐. 몸에도 엄청 많고, 손에도 있고, 우리 이미 다 봤는데. 얼굴에 생겼다고 그건 뭐가 다른가? 언젠가는 얼굴에도 번질 줄 알았어요. 우리 아저씨, 진짜 진짜 강한 사람인데. 겨우 이거 때문에 그렇게 울 것 같은 얼굴 했던 거예요?”
“홍서야...”
그의 목소리가 가까워졌지만, 그를 마주 볼 수는 없었다.
“나 괜찮아요. 이제 하루만 참으면 되는 거잖아요. 내일 미국 가면, 다 해결되는 거잖아요.”
“최홍서, 나 봐.”
얼굴을 붙잡으려 하는 그의 손을 피했다. 침실 쪽에서 문을 여닫는 소리, 무언가를 끌고 옮기며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홍서는 앞에 선 그의 어깨를 지나치려 했다.
“술이랑 음식 왔나 봐요.”
최홍서의 양 손목을 감아쥔 이해성이 거칠게 팔을 당겼다. 타월을 쥔 손이 허공에 떠 있어 얼굴을 감출 수가 없었다.
“괜찮다면서. 왜 날 못 보는데?”
그렇게 거친 표정과 말투, 강한 힘으로 제압해오는 이해성은 처음이었다. 거울을 보고도 울지 않았던 최홍서의 눈시울이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 나에게 화가 난 게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최홍서를 서럽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이해성이었으니까.
“감추지 마. 죄졌어?”
거친 음성과 달리, 말끝에 그는 움켜쥔 손목을 당겨 최홍서를 끌어안았다. 절대 뺏기지 않겠다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라도 하듯 품에 가두었다.
“얼굴이 다른 것도 신경 안 썼어. 그까짓 반점에 변심이라도 할까 봐?”
뜨거워진 눈시울에 가둬두기만 했던 눈물이 그제야 뺨으로 주욱 그어졌다. 그의 등을 마주 껴안았다.
“아저씨 우리 술 마셔요. 취할 때까지 마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