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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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으로 촬영한 화면처럼, 최홍서의 시야는 상공에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맑은 하늘, 번화한 중심가, 교통 체증, 지상 전철. 바쁘게 오가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 여느 대도시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기에, 처음엔 그곳이 어디인지 잘 파악할 수 없었다.
시야가 점점 어느 한 지점을 향해 좁아져 갔다.
거대한 규모의 쇼핑몰 사이, 고층 빌딩들이 즐비한 도시의 중심에 이질적으로 자리한 푸릇한 식물들 때문에 그곳은 도심의 공원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국적인 전통 양식의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아마도 눈 앞에 펼쳐지는 그곳은 동양의 불교 사원 같았다.
최홍서의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이는 시야는 문득 사원 앞의 어느 한 차량 내부를 보여주었다.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있는 두 사람은 정지인과 그의 연인이었다. 정지인의 연인이자, 이해성의 사촌 동생. 윤혜안의 몸으로 깨어나기 전에 보았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한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정지인의 재킷 칼라를 만지며 말했다.
“잘 다녀와요.”
“어.”
대답하는 정지인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지고 가라앉아 있었다. 얼굴도 수척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다른 한 남자가 뒷좌석을 힐끗 돌아보며 말했다.
“부사장님도 오신 것 같아. 대각선 맞은편에 캐딜락 차량.”
마치 영화를 촬영하는 카메라의 렌즈처럼. 최홍서가 보고 있는 시야도 남자가 가리킨 방향을 향했다.
쇼핑몰에 진입하려는 차량들 사이에 몸을 숨긴, 묵직한 덩치를 가진 온통 새까만 대형 SUV.
다음 순간, 최홍서의 시야는 그 캐딜락 차량의 내부로 옮겨갔다. 정확히는, 뒷좌석 창문 바로 앞에서 그 내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창문에 코를 바짝 갖다 대어도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짙게 선팅 되어 있었지만, 그런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뒷좌석에 혼자 앉아있는 남자는 이해성이었다.
그것을 알아본 순간 최홍서는 창문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달려들 수 있는 몸이 없었다. 창문을 아무리 두드리려 해봐도 그럴 수 있는 손이 없었다.
윤혜안의 몸으로 깨어나기 전, 목소리도 육체도 없이 곳곳을 떠돌던 때와 똑같았다. 미칠 듯한 공포가 엄습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은 공포였다. 그러나 육체가 없으니 숨이 막힐 리도 없었다.
아저씨, 아저씨!
목이 터져라 그를 불렀다. 그러나 가장 작은 속삭임조차도 될 수 없었다.
그는 깊은 수심에 잠겨 있었다. 극도로 야윈 옆모습은 야위다 못해 날카로웠다. 허벅지 사이에 늘어뜨린 두 손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은 눈이었다.
가끔씩 어깨를 크게 들어 올려 숨을 들이마실 뿐, 그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힘없이 늘어뜨린 그의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슬픔을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하아...
그가 큰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그는 최홍서를 보지 못했다.
깊은 피로감으로 충혈된 그의 두 눈은 대각선 맞은편, 사원을 향하고 있었다. 핏기 없이 메마른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는 인내하고 있었다. 그리고 끝내 더 버티지 못하고 오른쪽 눈에서 눈물 한 줄기를 흘려보냈다. 곧 그는 마디와 힘줄이 불거진 마른 두 손으로 얼굴을 뒤덮은 채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무너져 내렸다.
그제야 최홍서는 깨달았다.
도시는 태국 방콕이었고, 자신의 육신을 화장한 날이 틀림없었다.
아저씨, 아저씨! 제발 나 좀 봐요! 나 여기 있어요, 아저씨!
아무리 간절히 불러도 소리는 그에게 닿을 수 없었다. 그를 껴안고 슬픔을 위로하고 싶어도 팔다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 있지도 않은 육신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했다.
울지 마요. 내가 미안해요. 살아서, 그래서 같이 싸우자고 했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내가 더 강하지 못해서.
그의 모습을 더는 보지 못하도록 시야가 멀어졌다. 멀어지지 않으려,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 해도 그의 곁에 있으려, 미친 듯 버둥거려 보아도 헛수고였다. 광활한 우주 어딘가로 끌려가듯이 그에게서 멀어지기만 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한 방콕의 하늘에 신비로운 보랏빛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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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풍경이 평소와 달랐다. 어둑하고 안락한 분위기는 같은데, 천장의 높이나 마감이 분당 집이 아니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불안함에 얼른 시선을 옮기며 이해성의 모습을 찾았다.
“......”
이런 식으로 의식을 잃고 쓰러진 게 이미 한두 번이 아니었다. 늘 눈을 뜨면 그의 집 침실이거나, 그가 곁에 있었다. 이번에도 그럴 거라 생각하며 그 짧은 순간, 감정을 다스리려 했지만 침대 곁을 지키고 서 있는 건 이해성이 아니었다.
“누, 누구야. 누구야!”
커튼을 여며 어둑한 실내에 우두커니 서 있는 시커먼 인영에 최홍서는 누운 채로 경기하듯 펄쩍 뛰었다.
“접니다. 부사장님 수행원입니다.”
남자는 당황하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최홍서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최홍서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꿈의 연장선에서 미처 다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공포가 극에 달했다. 팔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다리로 이불을 차며 정신없이 이해성을 불렀다. 꿈속에서처럼.
“아저씨, 아저씨!”
지금은 안될 것 같았다. 이해성이 아닌 누군가가 자기의 몸을 만지고, 이해성 없이 다른 누군가와 한 공간 안에 있는 걸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떤 강한 힘이 양 손목을 꽉 붙잡았다.
“싫어, 싫어! 안 가! 안 가요! 잘못했어요! 조금만... 조금만 더 여기 있을게요! 제발!”
“홍서야!”
“......”
“홍서야! 나야.”
이해성의 목소리였다.
버둥거림을 멈춘 최홍서는 얼굴을 가린 팔 사이로 실눈을 떴다. 놀라고 걱정스러운 표정의 이해성이 바로 앞에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기도 전에 그저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아저씨... 흐윽, 흐... 아저씨...”
그를 부를 수가 있었다.
“어, 홍서야. 나야. 나 여기 있어. 그래, 놀랐지?”
그를 부르면 그가 답해주고, 그를 안으면 그의 팔이 마주 안아주었다. 이것은 기적이었다. 꿈을 꿀 때부터 울고 있었던 건지, 최홍서 자신도 의식하지 못했던 눈물이 이해성의 어깨로 끝없이 흘러내렸다.
“꿈에서 깼는데, 깼는데도 아저씨가 없어서... 흑, 흐흑, 그래서...”
“어, 그래. 그래서 홍서 놀랐구나. 미안해. 무슨 일이 있어도 자리를 비우면 안 됐는데. 내가 미안해. 미안해, 홍서야.”
떨어지지 않으려 꼬옥 매달려오는 최홍서의 애틋한 몸짓에, 이해성은 뒷머리를 꾹꾹 쓰다듬어주었다. 터무니없는 이유로 우는 아이를 어르듯, 지치지 않고 몇 번이든 무조건적으로 사과했다. 이해성의 등을 안고, 셔츠가 구겨지도록 꽉 그러쥔 최홍서의 손이 덜덜 떨고 있었다.
“아니, 아니에요. 아저씨는... 잘못한 게 어, 크흡, 흑, 없어요...”
최홍서는 고개를 저으며 이해성의 품으로 더, 더 파고들었다. 손만이 아니라 목소리도 극심히 떨렸다.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가 깨어날 때. 이해성이 바로 곁에 없었던 적은 전에도 몇 번인가 있었다. 그럴 때는 늘 분당 집의 익숙한 침실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반응이라니... 이런 적은 없었다.
나는 이렇게 누군가를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나는 이렇게 누군가를 의지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었는데.
의지할 수 없어서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던 건지,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어서 의지하지 않았던 건지. 그걸 알 수는 없었다. 한 가지 이 순간에 분명해진 건, 의지하는 것이 늘 폐가 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를 더 의지했어야 했다.
수행원을 조용히 내보낸 이해성은 최홍서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그대로 안고 기다려 주었다. 등을 쓸어 주었고,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고, 관자놀이에 입을 맞춰 주었다. 그저 그렇게 말없이 기다릴 뿐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최홍서는 조금씩 꿈틀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해성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웅얼거리며 물었다.
“여기... 어디예요? 집 아니죠?”
“호텔이야. 열이 너무 높아져서 집까지 이동하는 게 몸에 부담될까 봐.”
“그럼 아직 미국 아니에요?”
최홍서를 안은 그대로 이해성이 낮게 웃었다. 아주 희미한 웃음소리인데도, 이렇게 꼭 붙어 서로 안고 있으니 그의 웃음이 최홍서의 몸에 울림을 남겼다.
“그렇게 오래 자지 않았어.”
연인의 얼굴을 보려 고개를 깊숙이 숙인 이해성이 최홍서의 눈가에 입을 맞추고 귓속말하듯 속삭였다.
“지금이라도 집으로 갈까? 홍서가 편한 대로 해. 짐은 내일 공항으로 가져오라고 해도 되니까.”
“오늘은 그냥 여기 있어도 돼요?”
“뭐든지... 홍서가 원하는 대로 하면 돼.”
아주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도, 이런 말을 들어본 기억은 없었다. 누군가와 연애를 하며 달콤한 말을 주고받을 기회도 없었다.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서로 이런 말들을 주고받는지, 그건 모르겠다. 하지만 최홍서가 확실히 알게 된 건, 이해성의 말은 진심이고, 그는 실제로 그렇게 해준다는 사실이었다. 단 한 가지, 이종익 선생을 찾아가는 것만 제외하고.
최홍서는 그의 어깨에서 천천히 얼굴을 떼어냈다. 아직 그의 셔츠를 붙든 손은 그대로였다. 이해성이 이마와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세심히 떼어주었다.
“기운 나려면 뭐 좀 먹어야지.”
악몽을 꾸고 겁에 질려 소동을 피운 것이 뒤늦게 창피했다. 손등으로 괜히 뺨을 쓸어내면서, 그의 가슴께를 내려다보고 말했다.
“그럼 우리, 술 마셔요.”
“술? 몸도 안 좋은데.”
“어디가 아파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거, 아저씨도 알...”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한 최홍서는 말을 멈췄다.
그의 얼굴이 호텔에 도착했을 때보다 더 엉망이었다. 열에 시달리며 앓고 난 사람이 최홍서가 아니라 그인 것처럼. 조금 전 꿈에서 보았던, 무너지기 직전의 얼굴처럼.
너무 놀라고 겁이 나서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다는 막연한 예감만이 있을 뿐,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