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최홍서의 반응에 조성현은 만족스러운 듯 씨익 웃었다. 이해성이 성관계 중에 불붙은 담배로 최홍서의 몸을 지지는 취미라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는 게 분명했다.
테이블 아래로 끌어 내린 최홍서의 손등을 이해성의 손이 넓게 뒤덮었다. 힘 있으면서도 다정하게 꽉 잡아주는 손은 속에 담아 둘 것 없다고, 일일이 상종할 필요 없다고, 달래주고 있었다.
저깟 인간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신경 쓸 필요 없다는 거, 머리로는 알겠는데. 저깟 인간이 이해성의 사랑을 폄하한다는 생각에 분하고 속이 터졌다.
이 반점이 어떤 반점인가.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해성이 하루 두 번 꼬박꼬박 정성껏 연고를 발라주는 자리였다. 보기 싫을 법도 한데, 애무를 할 때면 일부러 더 반점 하나하나마다 입을 맞춰주었다.
눈시울이 뜨겁게 붉어졌지만, 우는 모습을 보인다면 더 분할 것 같았다. 이해성의 손을 꽉 붙잡고 힘껏 참았다.
“당신들 같은 인간이 어떻게 알겠어. 이게 어떤 상처인지를.”
증오 가득한 ‘윤혜안’의 표정과 말씨에 조성현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저었다.
“하... 저거. 버리지 말아 달라고, 사랑한다고, 홀딱 벗고 매달리던 그걸 찍어놨어야 하는 건데.”
아까워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얘기한 조성현은 이번엔 이해성을 보며 눈썹을 치떴다.
“저게 담배빵이 아니면, 그럼 우리 부사장님은 어떤 취향이실까. 제일 예쁜 애들을 꼴리는 대로 할 수 있는데도 왕자님처럼 굴진 않으실 텐데.”
“돈을 주고 상대를 조종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는 건, 일상에서 정복욕이 충분히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겠죠. 그런데 내 경우엔 그렇지가 않아서.”
조성현이 아무리 흔들어대도 이해성의 물 잔은 흔들리거나 넘쳐흐르지 않았다. 조성현은 그게 마음에 안 들어 어쩔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혜안이랑 제 영상, 못 보신 거죠?”
“내가 그걸 봐야 합니까?”
“하긴. 저한테 보낸 그 영상, 고지운하고 찍은 걸 보셨으면 혜안이하고의 영상은 볼 엄두도 안 나실 겁니다. 일반인이 감당하기엔 약간 벅찬 취미라.”
조성현은 영상 속 자기 모습이 자랑이라도 된다는 듯이 거들먹거리며 얘기했다.
“그렇게 자랑스러우면, 굳이 영상 유출을 막으려고 이 자리에 나올 필요도 없었겠죠.”
이서경이 협박용으로 남겼던 무수한 영상과 사진을 이해성은 단 한 장도 확인하지 않았었다. 최홍서의 것이라면 더더욱 피했다. 얼마나 악한 짓을 당했는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충동도 있었지만, 그 아이가, 홍서가 그것을 바라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하물며, 아무 상관도 없는 윤혜안의 영상을 손에 넣는다 한들 관심이 생길 리가 없었다. 지금 그 영상의 유출을 막으려 애를 쓰는 건 그것이 앞으로 최홍서의 새 삶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뿐이었다. 조성현은 이해성이 ‘윤혜안’을 지키려 한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이해성은 더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루해서 못 견디겠다는 투의 작은 한숨이었다.
“이봐요, 조성현 씨. 단지 내 성질 긁으려고 여기 나온 거라면 협상은 없었던 일로 하고 일어나겠습니다. 설마 내가 두려워서 협상을 제안했다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두려워서가 아니면 뭡니까 그럼?”
“귀찮아서입니다.”
“......”
“양측 영상이 모두 공개될 경우, 누가 더 불리할까요? 난 내가 가진 돈, 권력, 인맥. 모든 걸 동원해서 혜안이 자료들 확산을 막고 회수할 겁니다. 악의적으로 조작된 자료고, 윤혜안은 그 피해자라는 기사를 동시에 지겹도록 뿌려댈 거구요. 자극적인 스캔들이라 믿고 싶은 대로 믿으려는 사람들이 초반엔 분명 존재하겠지만, 연예계만이 아니라 사업도 다 그렇죠. 밀고 나가면서 버티는 쪽이 결국 살아남는 겁니다. 2~3년 잠잠해진 뒤 윤혜안은 거짓 스캔들의 피해자로 등장해 다시 활동을 이어가겠죠. 비슷한 전례가 연예계에 없지도 않구요. 난 그렇게 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할 겁니다. 그런데, 조성현 씨는 어떨까요?”
긴 이야기를 막힘없이 풀어놓은 이해성은 차가운 눈으로 조성현을 보았다.
“다만, 거기까지 일을 키운다는 건 나에게도 좀 귀찮은 일이라서. 최대한 에너지를 덜 들이고 해결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라는 겁니다. 관심 없다면 일어나죠.”
조성현은 이해성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오른쪽에 앉은 변호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사인하겠습니다.”
더 지체되지 않고 협의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기까지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정도였다.
대리인인 변호사들이 공증 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해 먼저 자리를 떠난 뒤에도 뭉그적거리며 앉아있던 조성현이 최홍서를 데리고 회의실을 막 빠져나가려는 이해성을 불러 세웠다.
“잠깐 부사장님과 저, 둘이서만 얘기 좀 할까요?”
이해성은 잠시 고민했고, 최홍서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합의서 사인도 다 끝났는데, 그냥 가면 안 돼요?”
“괜찮아. 저쪽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어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오히려 우리 쪽에 유리한 허점을 던져줄 수도 있고.”
최홍서의 등을 토닥인 이해성은 복도 저쪽에서 대기 중인 수행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직접 복도 중간까지 최홍서를 데리고 가서 인계해 주었다.
귀 뒤로 깔끔하게 넘긴 최홍서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매만지다, 고개를 기울이며 뺨에 짧게 입을 맞췄다.
“경호팀하고 같이 응접실에서 기다려. 응?”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수행원과 함께 거실 쪽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여러 번 뒤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해성이 회의실로 돌아왔을 때, 한쪽 벽면에 설치된 TV에서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TV는 조성현이 들고 있는 태블릿과 연동되어 있는 듯했다. 윤혜안과 조성현의 섹스 영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부사장님께서 한 번은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이쪽저쪽으로 의자를 돌리면서 앉아있는 조성현의 표정은 원하는 것을 마침내 손에 넣은 아이처럼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조성현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 이건 계약 위반 아닙니다? 부사장님께 보여드리는 거니까 유출 아니잖아요.”
이해성은 변화 없는 표정으로 영상을 보았다. 영상 속 윤혜안은 이해성의 눈에 지금의 최홍서와 전혀 다른 인물처럼 보였다. 아무리 같은 이목구비를 가졌다 한들,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고 다른 표정을 짓고 다른 생각을 품은 전혀 다른 두 사람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얼굴을 가진 지금의 최홍서를 몇 번이나 안아보았다. 섹스 중의 표정이나 신음, 반응도 전혀 달랐다.
지금 네 곁을 지키는 사람은 정말 ‘최홍서’라고. 영상은 오히려 이해성에게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더 분명하게 인지시켜 주고 있었다.
영상 속 윤혜안이 지금의 윤혜안과 완전히 다른 개별적 인물로 보인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이해성은 그 영상을, 영상 속의 낯선 윤혜안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충분히 음미했을 때, 조성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든 한 번은 나에게 굴욕감을 주고 싶다는, 그 욕구를 결국 참지 못하네요.”
“제가 좀 똘기가 있죠. 누구와는 달리 맨몸으로 여기까지 기어 올라온 놈이거든요. 부사장님한테 꼬리 흔들면서 아부만 떠는 놈들하고는 다를 겁니다.”
“힘들게 기어 올라온 곳에서 다시 미끄러지고 싶은가 봅니다.”
이해성은 테이블 가장자리를 쓰다듬으면서 한숨을 섞어 말했다. 의자에서 일어난 조성현이 이해성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미끄러질 땐 미끄러지더라도 원하는 걸 손에 넣는 그 순간의 쾌감은 포기 못 하죠.”
몇 걸음 앞까지 다가와 멈춘 조성현은 이해성에게 태블릿을 건넸다.
“사본은 이 태블릿에 있는 게 마지막입니다. 보시고 나서 영상을 삭제하시든, 태블릿째로 파기하시든, 아니면 은밀히 소장하고 즐기시든... 그건 부사장님 뜻에 달렸죠. 제가 이렇게 사용했던 고깃덩이라는 거, 그거나 좀 알고 즐기시라구요.”
이해성은 손에 받아 든 태블릿을 힐끗 내려다보았고, 조성현은 이해성의 어깨에 툭 한번 손을 올리고는 회의실을 떠났다.
영상을 정지시킨 이해성은 태블릿을 내려놓은 뒤 핸드폰을 꺼내 강 실장과 통화를 연결했다.
“상대측에서 서류에 사인을 하기가 무섭게 계약을 위반해서요. 어떠한 형태로든 사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항목 위반입니다. 협의 내용을 믿을 수 없겠어요.”
[준비했던 계획, 실행할까요.]
전화 너머 강 실장의 어조에는 흥분도 비탄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 말을 듣는 이해성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창밖의 서울을 향하고 있던 이해성의 시선이 태블릿 속, 정지된 화면 위로 옮겨갔다. 긴 손가락으로 태블릿을 조작해 영상을 감추면서, 그는 결론을 내렸다.
“반드시 VIP 모르게 진행돼야 합니다. 조심해 줘요.”
간결한 대답 뒤에 통화를 종료한 이해성은 태블릿을 집어 들고 TV와의 연결을 해제했다. 리모컨으로 TV 전원까지 모두 끄고 돌아서려는 순간, 열린 문으로 경직된 표정의 경호원이 등장했다.
“부사장님, VIP가 몸이 많이 불편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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