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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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하와 통화를 마쳤을 즈음, 최홍서와 이해성을 태운 SUV는 서울양양고속도로를 한창 달려 하남시를 크게 끼고 돌고 있었다. ‘최홍서’의 유골이 안치된 봉안당 근방이라 풍경이 눈에 익었다.
최홍서는 한동안 전화를 붙든 채로 차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고만 있었다. 커다랗지만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따뜻한 손이 머리 위로 가만히 내려앉았다.
“애기, 울어요?”
이런 순간에 농담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해서, 최홍서는 붉어진 눈으로 실없이 웃어버렸다.
“그냥... 기분이 이상해서요.”
“뭐가 이상한데.”
다 얘기해 보라는 듯. 자기에게만큼은 뭐든 얘기해도 된다는 듯. 부드럽게 울리는 낮은 목소리는 자상했다.
“사실 동하랑은 이전에도 아무 인연이 없었고, 윤혜안 몸으로 깨어난 뒤에도 사이가 좋지는 않았는데... 근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가서요. 예전의 나 같다고 느끼는 건지.”
예전의 최홍서는 이런 감정을 누구에게 털어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감정을 돌아보기 시작하면, 수습할 수도 견딜 수도 없을 것 같았기에 더 앞만 보고 달려갔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해성과 함께였다.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까지 큰 위로와 힘이 될 줄 몰랐었다.
그래서 더더욱, 조성현을 처리하는 과정을 이해성과 함께하고 싶었다. 딱딱한 어둠 덩어리를 이해성 혼자 품고 가게 할 수는 없으니까.
“홍서랑은 상황이 다르지. 그쪽은 스폰을 받는 것만큼은 본인이 선택했던 거니까. 이후에 일어난 일은 합의 없이 벌어진 범죄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최홍서에게는 끝없이 너그러운 이해성이지만, 그 외 문제에는 가감 없이 객관적이었다.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미련이 남는 얼굴로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그렇더라도... 상황에 떠밀리듯 정신 차려 보니까 화류계에 발 담그고 있었던 경험이 있으니까. 그 실수 때문에, 이후에 벌어진 끔찍한 일들이 다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나도 겪어 봤으니까요. 그래서 이해하고 싶은가 봐요. 박동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누구나 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 타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기의 욕구를 채우려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그 차이인 거겠지.”
머리 위에 가볍게 툭 놓여있던 이해성의 손이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미끄러졌다.
“그리고 그 차이가 너무나 결정적인 차이인 거고.”
“실수와 죄의 차이처럼요?”
더 아래로 내려간 손은 최홍서의 뒷덜미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티셔츠의 네크라인 안으로 살짝 들어온 그의 손가락 끝에서 약간의 땀이 촉촉하게 묻어났다.
“그래.”
오래 울고 난 뒤처럼 몸이 나른했다. 골프장에서 조성현을 상대했던 일이 계획대로 잘 풀려 안심이 된 걸까 생각했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급체나 몸살과도 비슷하지만 어딘가 기묘하게 붕 뜨는 감각. 이제는 때와 장소에 무관하게 자주 겪다 보니 그 차이를 민감하게 잡아낼 수 있었다.
서서히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최홍서는 무거운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였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조금 자도 돼요?”
“물론이죠. 잠들 때까지 안아줄까?”
그가 농담을 하는 거라 생각해 힘없이 웃었다.
“굿당에서 내려오던 길에, 그때도 내가 안아주니까 홍서 진정했었잖아.”
“그땐 아팠던 거고. 지금은 그냥 졸린 건데.”
“어, 알아. 아픈 거 아니지, 지금은.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
가끔 최홍서가 지금처럼 이해성의 말을 정정할 때면, 이해성은 못 견디게 귀엽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다. 명도훈이라면 건방지다고 몇 분이나 욕설을 퍼부었을 텐데. 같은 말과 행동도 상대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진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의아했다.
하지만 지금 최홍서를 바라보는 이해성의 그것은 그저 귀엽다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증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이해성도 알아챈 것이 분명했다. 알면서도 그는 모르는 척해주고 있었다.
안전벨트의 잠금을 풀어버린 이해성이 바로 곁으로 바짝 다가왔다. 중간 좌석의 벨트를 채우고, 최홍서 쪽을 바라보며 몸을 돌려 앉았다. 침대에 나란히 모로 누운 것처럼 좌석 등받이에 관자놀이를 대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의 팔이 아랫배를 가로질러 옆구리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모레면 미국 가니까. 조금만 더 참자. 정말 조금만. 응?”
속삭임 같은 목소리에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서 그의 어깨 가장자리에 이마를 기댔다.
미국. 바로 얼마 전에 그곳에서 이해성과 함께 돌아왔는데. 달나라에 가자는 말처럼 허황되게 들렸다.
모레라는 말도 그랬다. 아주 가까운 미래인데도 백 년 후, 혹은 다음 생의 약속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식은땀을 흘리며 잠 속으로 빠져들어 꿈을 꾸었다.
다음 생에, <어린 왕자>의 B-612만큼이나 작아 보이는 달나라에서 이해성과 만나는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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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성이 약속 장소로 마련한 녹스 호텔의 스위트룸은 공교롭게도 의식 불명에서 살아 돌아온 ‘윤혜안’이 <크림 맨션>의 최종 오디션을 보러 왔던 그곳이었다. 원형 식탁이 놓인 개별 공간은 당시 ‘윤혜안’의 대기실이었다.
최홍서는 다시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넓은 창을 통해 내다보이는 서울의 하늘은 잔뜩 흐렸다. 눈이 올 듯 비가 올 듯, 낮게 내려앉은 잿빛 하늘을 손으로 만져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최애기.”
등 뒤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최홍서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미리 도착해 서재에서 변호사와 몇 가지를 정리하고 있던 이해성이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최홍서를 향해 검지를 까딱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창문에 너무 가까이 있으면 위험해.”
장난스럽게 말하고 있지만, 그가 불안해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최홍서에게는 트라우마가 남지 않았다. 대신, 이해성은 고층을 선호하지 않게 됐다. 정확히는, 최홍서가 고층에 있는 상황을 꺼리게 된 듯했다. 창가를 떠난 최홍서는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최애기는 뭐예요?”
“최홍서인데 애기니까 최애기죠.”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냐고, 그는 진지한 얼굴과 어조로 답했다.
“굳이 윤혜안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를 거고.”
그렇게 덧붙이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최홍서의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갑자기 생각나서 그렇게 불러봤는데. 마음에 안 드나?”
엷은 웃음을 띠고 있던 최홍서는 고개를 저었다. 이해성도 마주 웃었지만 그것 역시 활짝 핀 미소는 아니었다.
“마지막 마무리라도 내가 혼자 만나서 처리하는 건 어떨까? 얼굴색이 많이 안 좋아.”
“아저씨야말로 잘생긴 얼굴이 말이 아니에요.”
반점이 올라온 목덜미를 감추기 위해 터틀넥을 입은 최홍서의 목덜미를 매만지면서, 이해성의 웃음이 더 어두워졌다. 최홍서는 모든 애를 동원해 명랑한 표정과 목소리를 지어내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하루만 참으면 되는 거잖아요. 맞죠?”
“그래, 맞아. 검진만 받고 나면 그 후에는 우리 둘이 실컷 쉴 거고.”
“말리부에서처럼 둘이서만 조용히 휴가도 즐기고, 그때 못 갔던 하이킹도 가요.”
“음, 아무래도 하이킹은 이번에도 못 갈 것 같은데?”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가늘게 뜬 채 농담하는 그의 등 뒤에서 수행원이 나타나, 조성현 측이 도착했음을 알려왔다.
프레지덴셜 스위트에는 열두 명 정도를 위한 회의실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조성현과 그 변호사는 이해성과 최홍서가 들어서자 예의상 자리에서 일어나 보였다. 양측 모두 변호사는 한 명뿐이었고, 수행원도 비서도 동행하지 않기로 사전에 합의되어 있었다. 서로 딱딱한 분위기 속에서 의례적인 악수와 소개가 오가고, 착석하자마자 바로 본론이 시작되었다.
변호사들끼리의 대화가 먼저 시작됐다.
“부사장님 측에서 요구하는 세부 합의 사항은 미리 검토해 보셨겠죠.”
“대부분 제 의뢰인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사항들이더군요.”
“쌍방이 서로 영상이 공개되지 않기를 바라는 줄 알았는데요. 어떤 점을 불리하다고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그쪽이 제 의뢰인의 약점을 더 많이 쥐고 있지 않습니까.”
“영상 공개를 빌미로 먼저 협박해 온 쪽은 조성현 씨입니다.”
“아... 됐어요, 됐어. 대리인이랍시고 변호사들끼리 떠드는 얘길 듣고 있는 건 성미에 안 맞아서.”
늘어지듯 의자에 기대앉아 맞은편의 두 사람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던 조성현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끼어들었다.
“애초에 저처럼 비빌 곳 없는 놈이 부사장님 상대로 뭘 해 봤자 계란으로 바위 치기죠, 뭐.”
그러고는 사전에 교환한 요구 사항이 적힌 서류의 한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눌러댔다.
“다른 건 다 그렇다 쳐요. 근데 이게 대체 뭡니까? 윤혜안 외에 제삼자의 영상이나 사진 등 어떠한 형태의 자료도 유출하지 않는다. 이건 왜 껴 있는 겁니까?”
이해성이 답했다.
“그런 자료가 한 장이라도 새어 나간다면 언론이든 방송이든 자료 출처부터 찾으려 할 겁니다. 조성현 씨가 출처라는 게 밝혀지고, 행여 조사라도 받게 되면, 결국 혜안이에게도 피해가 올 수 있겠죠.”
“와... 그렇게까지 철저히 막아두시겠다?”
“대충 할 생각이었다면 오늘 이 자리를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이해성이 침착하고 차분할수록 조성현의 얼굴은 괴상하게 일그러져가고, 반대로 눈빛은 광인과 같은 불길한 빛으로 형형해졌다.
“그까짓 놀잇감 때문에 부사장님이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나오실 줄 몰랐습니다. 그냥 몇 푼 오가는 걸로 끝내자 하실 줄 알았더니. 이렇게 판을 키우시네요. 좆같게.”
“조성현 씨는 오늘 합의로 영상 하나를 접어두는 것뿐이지만, 이쪽은 한둘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조성현 씨 영상에, 조장연 씨 콩쿠르 비리, GX와의 북아프리카 사업 건까지 접어주는 거 아닙니까. 오히려 조성현 씨에게 아주 유리한 협상 같은데요.”
“북아프리카 계약 건? 그게 왜 부사장님이 날 위해 접어주는 게 됩니까?”
“어제 봐서 알 텐데요.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 계약을 성사시킬 수도 있고, 불발시킬 수도 있다는 걸.”
“......”
씨발. 소리 내어 발음하지는 않았지만, 조성현은 입 모양으로 분명하게 욕설을 지껄였다.
고개를 숙였다 들어 올린 조성현은 여유를 가장하면서 의자 등받이에 털썩 몸을 묻었다. 그러나 꽉 말아 쥔 채 의자 손잡이를 탕, 탕, 내리치는 주먹에 잔뜩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뭐, 계획은 틀어졌을지언정, 이 상황은 기분 나쁘지 않네요. 제가 실컷 단물 빨다 버린 걸레를 부사장님께서 쓰고 계시다니. 어쨌든 어느 한 부분에서만큼은 제가 부사장님보다 앞서갔다는 거 아닙니까. 영광이라고 해야 되는 건가, 이거?”
“그렇게 나를 자극해서 뭘 얻으려는 겁니까? 이해가 안 되네.”
“모든 인간이 꼭 어떤 이득을 위해서만 움직이진 않잖아요. 난 그냥 뭐랄까... 부사장님의 진실된 모습을 보길 원한달까.”
손잡이를 내리치는 것을 그만둔 조성현은 이번엔 사무용 의자를 좌우로 빙빙 돌리며 초조한 분위기를 드러냈다.
“부사장님이나 나나, 쟤네들 끌고 가서 하는 짓은 똑같은데. 침실 밖에서 날 개변태 취급하면서 쟤들을 구해준다고 부사장님만 왕자님이 된다는 게. 내 입장에선 억울할 법도 하잖아요?”
최홍서는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분노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뭐 눈엔 뭐만 보인다면서요.”
“......”
이해성에게 맞춰져 있던 조성현의 시선이 최홍서에게로 옮겨왔다.
“돈 있고 힘 있으면 다 당신들 같은 줄 알죠? 누가 누구랑 하는 짓이 똑같다구요? 역겨운 소리 그만해요. 토할 것 같으니까.”
조성현의 눈빛에 분노와 흥미로움이 함께 번들거렸다. 스르륵 몸을 기울여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괸 조성현은 두 손을 깍지 끼고 거기에 얼굴을 기댔다.
조성현에게서 나온 다음 멘트는 예상 밖이었다.
“혜안아, 손이 왜 그래? 담배빵이라도 당하는 거야?”
과장되게 염려스러움을 연기하는 가증스러운 표정과 목소리.
최홍서는 저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있던 손을 확 끌어 내렸다.
조성현이 말하는 담배빵은 반점이었다. 사라지지 않고 계속 증식하는, 원인 불명의 반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