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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 (180)화 (180/185)
  • 180화

    [기억이 안 나도 내가 한 짓이라는 건 변함없다고, 내가 그랬었잖아. 내가 예전에 너한테 많이 나쁘게 했고, 그런데도 넌 매번 나를 받아줬으니까. 이번엔 내가 도울 기회를 줘.]

    “어떠... 크흑, 흡... 어떻게 그래... 내가 형을 그, 흐윽, 흐, 그 자리로 불러냈는데...”

    한 번 터진 눈물은 가없이 흘러넘쳤다. 서로 뒤섞여 있었던 윤혜안에 대한 원망과 죄책감, 조성현이 주입한 질식할 듯한 공포. 해소해 주지 못하고 꾹꾹 억눌러두기만 했던 감정들이 주체할 수 없이 뿜어져 나왔다.

    [네가 나를 이용해서 부사장님을 불러내는 데 실패했다고 해도 조성현은 물러나지 않았어. 다른 방법을 찾았지.]

    전화 너머 윤혜안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박동하가 전혀 모르는 윤혜안의 일면이었다. 아니, 의식 불명에서 깨어난 후로 윤혜안이 예전과 비슷했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그런데도 기억을 잃었다는 말을 선뜻 믿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이전의 윤혜안을 떨쳐내기가 힘들었으니까.

    “스폰을... 흑, 스, 스폰을 받는 게 아니었어... 흡... 하면 안 되는 짓이었는데... 조성현 말이 맞아... 내가, 흐흑, 내가 내 발로 찾아갔던 건데... 누굴 탓하겠어...”

    박동하는 이제 어깨를 들썩이며 강하게 흐느꼈다. 통화 중이라는 생각도 잊은 채 횡설수설하며 자신을 탓했다.

    공포라는 한 평 감옥에 갇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떠안고 있었던 감정을, 그 누구도 아닌 ‘윤혜안’에게 털어놓고 있었다.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윤혜안’이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었던가.

    전화 너머 윤혜안은 박동하의 울음을 잠시 그대로 듣고 있기만 했다. 그러다 침착하지만 확신을 가진 목소리로 말했다.

    [벼랑 끝에 사람을 세워놓고, 한 손에는 날이 시퍼런 칼을 들고... 뛰어내릴래? 칼로 쑤셔질래? 그렇게 물으면, 거기에 어떤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게 아니잖아. 둘 중에 대체 뭘 고를 수 있겠어.]

    “흐으으, 흑... 흐윽...”

    [뛰어내릴 건지 칼로 쑤셔질 건지, 그걸 택하라고 협박한 조성현이 죄인인 거지. 뛰어내리기를 택했든, 칼로 쑤셔지기를 택했든. 네 잘못이 아니야. 나도... 누군가가 이렇게 말해줘서 겨우 알게 됐지만. 나도 이제는 그 사람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

    박동하는 윤혜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고, 그러는 사이 박동하의 울음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었다. 서럽게 목 놓아 울던 아이가 눈앞에서 흔드는 새로운 장난감을 보며 서서히 울음을 줄여 가듯이.

    손바닥으로 볼의 눈물을 훔쳐내면서 박동하는 홀린 듯 윤혜안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눈물을 닦아낸 손바닥은 흥건했다. 그것을 바지춤에 문지르면서 울음 끝을 삼켰다.

    [용서받고 되돌릴 수 있는 잘못은 실수고, 그럴 수 없는 잘못은 죄라고. 우리 시나리오에 있는 네 대사 기억하지?]

    “어, 기억해...”

    박동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조금 전에도 연습하고 있던 대사였으니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과거의 나나 지금의 너나, 스폰을 받은 것도 큰 잘못일 거야. 누군가 타인을 해치진 않았어도, 우리 자신을 해친 거나 마찬가지인... 아주아주 큰 실수.]

    “......”

    [근데 조성현은 타인까지 해쳤어. 합의하지 않은 영상을 촬영하고 협박해서 여러 명의 인생을 망쳐왔고, 지금도 망치고 있고, 앞으로도 몇 명이나 더 그렇게 될지 몰라.]

    “......”

    [나는 그게, 죄와 실수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생각해. 아니, 그렇게 생각하게 됐어. 어떤 사람 덕분에.]

    “크흐, 흑... 흡...”

    왜인지 박동하는 다시금 울음이 터져버렸다.

    윤혜안은 변한 것이 아니다. 고작 그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 박동하가 모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지금 윤혜안이 말하는 ‘어떤 사람’ 때문에.

    지금 윤혜안이 자기에게 해주는 말에는 어떤 거짓도 연기도 섞이지 않았다는 것을 박동하는 느낄 수 있었다. 오직 서로를 진실로 사랑하는 사이만이 그런 식으로 상대를 변화시킬 수 있겠지.

    “흑, 흐윽... 미, 미안해, 형... 나 이제 진짜 믿어... 형이, 흑, 예전하고 다른 사람이라는 거... 흐윽, 기억, 다 잃었다는 거. 이제 진짜 믿어. 부사장님이랑 형이, 흡, 스폰 같은 게 아니라는 것도 다... 흐흐, 흑...”

    [그래, 고마워. 믿어줘서 고마워.]

    전화 너머에서, 그동안 내내 의연했던 윤혜안의 목소리에도 울음기가 섞여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한 번만 더 나 믿고, 아니, 부사장님 믿고, 지금 빨리 짐부터 챙기자. 나는 조성현을 막지 못해도 부사장님은 막을 수 있어.]

    어떻게든 눈물을 삼키고 침착하려 애쓰는 윤혜안의 목소리를 들을수록 박동하의 울음은 더 커져갔다.

    [동하야, 박동하. 내 말 듣고 있지? 지금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 울더라도 짐 챙기면서 울어야 돼. 어?]

    “아, 알았어...”

    [로미오는 케이지에 넣어놔. 네가 돌아올 때까지 부사장님 댁에서 돌봐주실 거야.]

    통화를 마친 박동하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티슈로 아무렇게나 훔쳐냈다. 한 시간 안에 짐을 싸라고 하는데 뭐부터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직 수습되지 않은 채 그대로 벌려져 있는 감정이 들썽거려서 한동안 그저 허둥거리기만 했다. 그러다 캐리어부터 펼쳐놓고는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그 안에 던져 넣기 시작했다. 여름옷과 겨울옷이 뒤섞였고, 중요한 것과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 공존했다.

    사실 반드시 필요한 것도 없었다. 한적하게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니었으니까. 박동하는 그저 캐리어를 가득 채우기만 하는 게 목적인 사람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캐리어가 꽉 차자, 그것을 덮고 지퍼를 채웠다.

    로미오, 이제 로미오를 챙겨둬야 할 차례였다.

    주인의 불안을 알아챈 건지, 로미오는 짐을 싸는 내내 박동하의 곁을 맴돌았었다. 박동하는 바닥에 앉아 그런 로미오를 쓰다듬었다.

    “로미오. 너 이제 한동안 부사장님 댁에서 지내야 돼. 너 진짜 엄청 호강하는 거다? 미움받지 않게, 나랑 지낼 때처럼 착하게 잘 있을 수 있지?”

    잠시의 이별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미오는 박동하의 허벅지에 몸을 비비다 그 곁에 바짝 몸을 붙이고 엎드렸다.

    “마지막으로 간식 한 번 더 줄까?”

    냐아? 간식이라는 말에 녀석은 곧바로 반응했다. 엎드렸던 몸을 벌떡 세우고 귀를 쫑긋거렸다. 그 모습에 박동하는 짧게나마 웃음이 났다.

    엉망으로 채운 캐리어를 현관에 끌어다 놓고, 졸졸 따라붙는 로미오와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에서 비닐 팩을 하나 꺼내자, 로미오는 꼬리를 곧게 세우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니야아.

    빨리 달라고, 녀석은 고개를 바짝 들고 올려다보며 보챘다.

    비닐 팩 안에서 낱개로 개별 포장된 츄르를 하나 꺼내 로미오가 먹기 좋도록 끝을 잘라 내밀었다. 처음엔 얌전히 선 채로 할짝거리던 녀석은 곧 앞발을 박동하의 손 위에 올려놓고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이게 그렇게 맛있어?”

    녀석은 이번엔 대답도 없었다.

    이 집에 찾아왔던 날, 윤혜안이 두고 갔던 수제 간식. 그날 밤 박동하는 잠들지 못하고 한참을 뒤척거리다 다시 주방으로 나왔었다. 불도 켜지 않은 주방에서 우두커니 서 있다, 쓰레기통을 뒤져 이 비닐 팩 뭉치를 다시 꺼냈었다. 왜인지 몰라도 완전히 버릴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번만큼은 윤혜안의 말이 진짜일지 모른다고,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일까?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그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동안 하나씩 꺼내서 먹였던 츄르는 이제 두세 개 정도만 남아있었다. 마지막까지 필사적으로 츄르에 덤벼드는 로미오의 등을 쓰다듬는 박동하의 눈에 다시금 물기가 어렸다.

    “어떻게 만드는 건지. 다음에... 형한테 꼭 물어볼게.”

    눈시울이 빨개지도록, 눈물을 흘리지 않게 인내하면서, 박동하는 재차 다짐했다.

    “꼭 물어보고 만들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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