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컴백 (179)화 (179/185)

179화

“정말 그럴까요?”

“......”

“그 말,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어요?”

이해성에게서 균열과 동요를 발견한 조성현은 진심으로 유쾌해졌다.

“하하... 부사장님도 발끈하실 때가 다 있네요. 이런 모습 좋은데요? 저와 다를 거 없는 사람 같고.”

좀 더 도발하면 이해성의 가면이 벗겨질 것 같았다. 조성현은 이 순간만큼은 그걸 위해서라면 진심으로 옷을 벗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진짜 저를 JS 옥상에 세우기라도 하시게요?”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주먹을 날릴 것처럼 이해성은 조성현을 향해 곧장 돌진했다. 아니, 분명 그러려고 했다. 윤혜안이 붙잡지만 않았더라면, 그 점잖으신 모범생 재벌 3세 ARA 부사장님이 골프장 로비에서 몸싸움을 벌일 수도 있었다.

거의 두 팔을 감아 껴안듯이 이해성의 팔에 매달린 윤혜안은 조성현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어떤 일이 벌어져도 부사장님이 조성현 씨와 다를 거 없는 사람이 될 리는 없습니다.”

“뭐? 조성현 씨?”

과거에는 감히 상상도 못 했던 호칭으로 자신과 맞먹으려 드는, 예전에 데리고 놀다 버린 고양이의 도발에 조성현은 헛웃음이 새었다. 조성현이 픽픽거리며 어깨를 들썩이는 그 짧은 사이, 이해성은 벌써 냉정을 되찾았다. 윤혜안의 어깨를 감싸 안은 이해성의 표정과 목소리는 다시금 견고했다.

“내일, 약속 장소를 바꾸죠. 녹스 호텔에서 봅시다. 변호사 준비해 와요. 우리, 몇 가지 합의해야 할 내용들이 있는 것 같으니까.”

“예, 그러죠, 부사장님. 내일 뵙죠. 저 따위와 합의까지 해주시는 아량을 베풀어주시니 이거... 감사의 의미로 우리 혜안이가 울고 자지러지는 포인트 두어 개쯤 알려드리겠습니다.”

돌아서려던 이해성의 걸음이 멈췄다. 이번에야말로 이해성의 평온이 박살 났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조성현은 전신이 따 짜릿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돌아본 이해성의 표정과 눈빛에는 어떤 균열도 없었다. 윤혜안을 그 자리에 세워놓은 이해성은 다시 천천히 조성현 앞으로 되돌아왔다.

“조 사장은 자기 욕구 채우는 데에만 급급해서 상대가 느끼는 곳도 제대로 모를 것 같은데. 조 사장 같은 남자들이 꼭... 섹스도 잘할 줄 모르더군요. 좆도 작고.”

“하하... 다른 건 몰라도 조... 크흑!”

응수하려던 조성현의 어깨에 이해성의 오른손이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프로 샵 안에서 그랬던 것처럼 간단히 툭 두드리는 힘이 아니었다. 뼈를 으스러뜨릴 듯 강한 기운이 어깨를 내리누르고 조여왔다.

“아. 그렇더라도, 조 사장 성의를 봐서 나도 뭔가 보답을 해야겠죠.”

“이거 놓...고...”

“조장연 씨의 콩쿠르를 참관해 볼까 합니다. 1월에 일정이 또 잡혀있더군요.”

“......”

한순간, 조성현의 반항이 확 사그라들었다.

“그런데 조장연 씨는 참 이력이 독특해요. 고만고만한 콩쿠르에서는 거의 휩쓸다시피 입상을 하는데, 왜 규모 있는 콩쿠르에는 참가할 생각조차 안 하는지. 아깝게.”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젓는 이해성의 손을 조성현이 거칠게 걷어냈다. 입술이 닿기 직전의 거리까지 바짝 들어선 조성현이 눈알을 굴리며 이를 갈았다.

“이... 미친 새끼야... 나하고의 일이면 나하고 끝내. 애는 왜 건드려?”

조장연은 미국에서 바이올린 유학 중인 조성현의 외아들이었다. 중간은 가는데 영 탁월하지는 않아서, 뒷돈으로 입상이 가능한 콩쿠르에만 열심히 참가시키며 이력을 관리하는 중이었다.

다가오려는 경호원들에게 괜찮다는 표시를 해 보인 이해성은 고개를 숙이는 대신 눈꺼풀을 느슨하게 내리떠 조성현을 깔아보았다.

“그쪽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니 재밌네요. 조성현 씨가 나를 물 먹이려고 윤혜안 씨 머리채를 잡길래, 나도 머리채 잡을 사람을 물색한 것뿐입니다.”

“고상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당신도 위선자일 뿐이야.”

“여태 내가 고상한 척한다고 생각했습니까? 왜 그런 생각을 했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이해성이 다시 조성현에게 눈을 맞췄다.

“그렇다면 그건 조 사장 착각이죠. 굳이 스스로 더러워지지 않아도 만사가 형통한 위치에 있었을 뿐, 필요하면 나도 손을 더럽힙니다.”

“윽!”

그리고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손가락을 활짝 펼친 이해성의 커다란 손이 조성현의 얼굴을 뒤덮으며 꽉 쥐었다.

“쓰레기를 만지지 않으면, 그걸 내다 버릴 수도 없으니까.”

얼굴을 틀어쥔 채 조성현을 뒤로 몇 걸음 밀어낸 이해성은 내던지듯 손을 놓았다. 이해성에게 달려들려는 조성현을 경호원들이 막아섰고, 이해성과 윤혜안은 함께 로비를 빠져나갔다.

이해성의 경호원들에게서 풀려나자마자 조성현은 전시되어 있던 골프 클럽을 뽑아 프로 샵의 진열대 하나를 완전히 박살 내 버렸다. 상점의 직원과 골프장의 안전요원들이 달려와 저지하자, 조성현은 클럽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 분을 못 이겨 씩씩댔다.

“지랄 떨지 말고 청구서나 보내. 돈 주면 될 거 아니야.”

“용서받고 되돌릴 수 있는 잘못은 실수고, 그럴 수 없는 잘못은 죄래요.”

바로 앞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의 소음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실내에 박동하의 목소리가 긴 선처럼 이어졌다. 그 목소리는 떨리는 손으로 그은 선처럼 삐죽삐죽 불안정했다.

“하... 진짜 제대로 안 할래, 박동하? 너 <크림 맨션>에서도 짤리고 싶냐?”

식탁 위에 펼쳐져 있던 시나리오 위에 이마를 박은 박동하는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짰다.

조성현은 주연으로 거의 내정돼 있었던 드라마의 캐스팅도 엎어버렸고, 앞으로의 연예계 활동도 얼마든지 방해하겠다고 했었다. 조성현이 몰래 촬영한 그 영상들. 그중 하나만 세상에 공개해도, 조성현은 연예계 활동이 문제가 아니라 박동하의 인생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연기 레슨도 취소했고, 지금 남은 건 <크림 맨션>밖에 없는데. 이것만큼은 진짜 잘 해내야 하는데. 강우현 감독에게 지적받았던 부분을 아무리 되풀이해 연습해 봐도 집중이 되지 않았다. 집중이 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윤혜안은 어떻게 됐을까. 조성현은 이해성 부사장에게 뭘 요구하려던 거지? 돈? 부사장님이 돈을 주고 나면 그럼 윤혜안은 조성현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건가? 그렇게 된다고 해도 절대, 절대 나를 용서 안 하겠지?

드르르륵, 드르르륵.

식탁 위 가까운 곳에 두었던 핸드폰이 요란하게 덜덜거렸다. 조성현이라면 조금만 늦게 받아도 지랄할 걸 알기에, 얼른 일어나서 전화를 집어 들었다.

“......”

그러나 발신인은 윤혜안이었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전화기를 꽉 쥐고 마른침만 삼키던 박동하는 떨리는 손으로 통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요.”

[지금 오피스텔이야?]

윤혜안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어? 어...”

[상황이 좀 급하니까 본론부터 얘기할게.]

“......”

[조성현한테 영상으로 협박 받았어?]

“......어.”

[조성현이 네 영상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거지?]

“어.”

[나를 통해서, 부사장님 만날 수 있게 자리 만들라고. 그렇지 않으면 영상을 뿌리겠다고. 그런 협박이었겠네? 그래서 부사장님 소개해 달라고 했던 거고?]

시나리오에 메모를 적어 넣던 펜을 쥐고 알 수 없는 선을 마구 그어대던 박동하의 손이 뚝 멈췄다.

“어, 어떻게... 알았어?”

[앞뒤 상황이 딱 그렇잖아. 대본 스터디 때 늘 일찍 와서 기다리던 애가 시간에 쫓기듯 와서 연기도 불안정해지고.]

전화 너머에서 윤혜안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당시에는 생각 못 했지만, 조성현 만나고 나서 돌아보니까... 그런 상황이었겠더라고. 퍼즐이 딱딱 맞잖아.]

생각지도 못한 전개에 박동하는 말을 잃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박동하가 알던 윤혜안이라면, 이쪽의 사정 같은 걸 고려해 줄 리 없었다. 박동하가 협박을 당했든 뭐든, 윤혜안 자신을 곤경에 처하게 했다는 그 결론만 중요했을 테니까.

내가 알던 그런 윤혜안이었다면. 계속 그런 사람으로 남아있었다면.

그럼 나도 죄책감을 덜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의 윤혜안은 그렇지가 않아서, 망설여지고, 그러다 다시 또 실망하고, 다시 또 혼란스러웠던 지난 몇 달간.

펜을 쥔 박동하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한동안 조성현 피해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피해 있으라니? 어떻게?”

[한 시간 뒤에 부사장님 수행원이 그쪽으로 갈 거야. 여행 가방 꾸리고 여권 챙겨서 기다려. 나머지는 알아서 해주실 거야.]

박동하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나 못 가. 그날... 레스토랑에서 형한테 보여줬던 영상... 조성현이 내 것도 그런 거 수십 개나 갖고 있어... 난 아무 데도 못 가.”

[괜찮아. 그 영상들 봉인되게 할 테니까. 네가 지금 조성현에게 노출돼있는 게 더 위험해.]

“형이 기억을 잃어서... 그래서 조성현이 어떤 인간인지 다 까먹어서 그래. 오늘 온다고 했어. 대기하고 있으라고. 없으면 난리 날 거야. 내 영상이고 사진이고 다 뿌려질 거라고.”

[그런 일 절대 없을 거야. 약속할게. 조성현은 오늘 자기 살길 찾느라 바빠서 아마도 네 오피스텔에 가지도 못할 거고.]

“아니야, 안 돼. 난 못 가.”

박동하는 갈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펜을 쥔 손이 노랗게 질리도록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데, 그 펜 끝이 노트 위에 그려놓은 선은 가늘게 떨리며 희미하기만 했다.

[동하야.]

“......”

[내가 예전 기억 잃어버렸다는 거, 이제 믿어?]

“믿어... 이젠 믿어...”

[......]

“...미안해.”

보이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박동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푹 숙인 얼굴의 그늘 속에서 고여있기만 했던 눈물이 노트 위로 무겁게 툭 떨어졌다.

“미안해, 형.”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