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배우분이라 그런지 분위기가 확실히 남다르십니다. 얼핏 봐도 평범한 청년은 아니네요. 우리 같은 반늙은이들이 몰라본 것을 너무 섭섭해 마요. 연예계 그쪽 일을 워낙 몰라서 그런 것이니까.”
조성현의 속사정과 무관하게, 박용훈과 패거리들은 윤혜안이 자기 손자라도 되는 것처럼 반갑게 맞아주고 있었다.
“아닙니다. 저도 이름이나 얼굴이 많이 알려진 편이 아니라서요. 이렇게 인사드릴 수 있는 것만 해도 영광입니다.”
“젊은 사람이 외모만큼이나 말씨도 반듯하네요. 이러니 부사장님께서 좋게 보실 수밖에!”
“이렇게 미남 두 분이 나란히 나와 계시니 골프장이 아주 영화 촬영장 같습니다!”
윤혜안을 ARA의 비공식 새 안방마님이라고 결론 내린 영감들은 한동안 윤혜안에게 아부를 떠느라 야단이었다.
영화 투자자와 출연 배우로 만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맞아 어울리는 사이라고. 이해성은 윤혜안을 그렇게 소개했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여기 없었다. 나이라도 서로 엇비슷했다면 사회적 위치에 상관없이 또래끼리 만나 우정을 쌓는구나 생각했겠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혜안이가... 아, 혜안 씨가 요즘 골프에 관심을 가져줘서, 오늘은 CC 분위기만 좀 보여주려고 같이 나와봤습니다.”
‘혜안이’라고 격의 없이 불렀던 이해성은 곧 ‘혜안 씨’로 호칭을 정정해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의도된 실수였다.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진짜 실수로 보이고 싶으면 당황한 표정을 연기하는 성의라도 좀 보여주시죠, 부사장님? 조성현은 삐딱해지려는 표정을 관리하기가 점점 힘에 부쳤다.
“윤 배우 같은 젊은이가 골프에 관심을 가져주니 참 좋네요. 요즘 골프의 대중화다 뭐다 해서, 꼴 같지도 않은 젊은 사람들이 클럽에 들어와 물을 흐려놓는데... 윤 배우 같은 분이라면 대환영입니다.”
“아이구, 대환영이죠! 이렇게 만난 것도 너무나 인연인데, 실례가 안 된다면 윤 배우 사인이라도 받아둘 수 있을까요?”
“저야 당연히 해드리고 싶은데, 종이를 가진 게 없어서...”
“여기, 내 모자에 해주면 됩니다. 곧 유명 배우가 되실 분한테 미리미리 받아놔야죠.”
강민욱 차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쓰고 있던 골프 모자를 벗어 내밀었다. 이에 질세라 박용훈 사장은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내밀었다.
“윤 배우, 나는 그럼 이 장갑에 해줘요. 여기 받아놓고 필드에 나올 때마다 사람들에게 자랑해야겠어.”
못 봐주겠군.
윤혜안이 누구인지도 몰랐던 영감들이 이제는 오랜 열성팬이라도 된 것처럼 그를 둘러싸고 사인을 받고 악수를 하는 광경에, 조성현은 어깨까지 털면서 혀를 찼다. 조금 전까지 조성현 자신이 박용훈 패거리에게 했던 똑같은 짓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반걸음 물러서서 급작스러운 팬미팅 광경을 말없이 지켜보던 이해성의 시선이 영감들의 어깨너머로 조성현을 향했다.
조소도 분노도 표하지 않는 그 잔잔하고 평온한 눈빛에 조성현은 몸서리가 났다.
저 혼자 고고한 척하는 저 눈빛. 그 누구도 자신의 평온을 훼방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조성현은 언제나 이해성의 그 고요가 마음에 안 들었다.
지금은 윤혜안, 예전에는 최홍서. 저 역시도 얼굴과 몸이 마음에 드는 예쁜 인형들을 끼고 다니면서 즐길 대로 즐기는 놈인 건 마찬가지면서, 지금도 그때도 혼자 깨끗한 척이지. 네놈과 나의 차이는, 이강문 회장의 손자로 태어났냐 아니냐, 그것밖에 없어.
이해성과 마찬가지로 팬미팅에서 물러나 있던 조성현은 흥분한 영감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저희가 티오프 시간이 다 돼서요. 부사장님 시간을 너무 뺏은 것 같기도 하고. 사장님, 차관님. 그만 이동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영감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저희가 너무 반가워서 그만... 너무 주책을 부린 게 아니었으면 좋겠네요.”
“아닙니다. 혜안 씨를 반가워해 주셔서 저도 즐거웠습니다. 기회가 되면 꼭 다시 뵙죠.”
윤혜안의 어깨에 손을 올린 이해성은 마지막에는 조성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마 조만간 다시 뵙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안 그렇습니까, 조 사장님?”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 라는 듯한 태도에 조성현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조성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이해성은 윤혜안과 함께 클럽 하우스 쪽으로 사라져버렸다.
카트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영감들은 이해성과의 만남에 들떠 계속 떠들어 댔다.
“조 사장, 자네는 말이야. 저런 분과 연이 있었으면 진작 말하지 않고.”
“사람이 겸손해서 그래. 조 사장이 참 알면 알수록 진국이야.”
차관의 핀잔에 박용훈 사장이 오히려 조성현을 감싸고 나섰다. 이제 조성현은 그냥 조성현이 아니었다. 이해성과 더 깊은 연을 이어줄 수도 있는 조성현이었다.
어이없게도 그것은 이해성이 직접 나타나 붙여준 타이틀이었고, 그 타이틀의 힘이 유지된다면 이번 계약을 따내는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카트의 안전바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조성현은 옆자리에 앉은 박용훈의 장갑만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기억을 잃었기 때문인지, 기억을 잃었다는 콘셉트 때문인지. 박용훈 사장의 장갑에 남긴 윤혜안의 사인은 조성현이 기억하고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모양새였다.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만 협박이 아니다.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게 해주겠다는 약속도 때로는 협박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해성은 지금 조성현에게 두 가지의 협박을 모두 가하고 있었다.
이런 진짜 뭣같은...
조성현은 골프 백에서 클럽을 꺼내 들고 카트를 때려 부수고 싶을 만큼 분이 끓어올랐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하는 타이밍인지. 그것조차 계산이 안 될 정도로 둔하지는 않았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어갈 만큼 주먹을 꽉 쥔 조성현은 내내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사장님, 잠깐... 먼저 가셔서 1홀 돌고 계시면 제가 금방 쫓아가겠습니다.”
“무슨 소린가? 어딜 가려고 그래?”
“제가 가서 부사장님께 식사라도 같이 할 수 있는지 여쭤보겠습니다. 오늘이 어려우면 다음 약속이라도...”
“아, 그래? 그럼 얼른 가서 한번 여쭤보게. 날짜나 시간이야 우리가 부사장님께 다 맞추면 되는 거니까.”
카트에서 거의 뛰어내리다시피 한 조성현은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려갔다. 에스컬레이터를 몇 계단씩 뛰어 올라가 클럽 하우스 로비로 들어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해성을 찾았다.
로비에 입점해 있는 프로 샵에서 이해성과 윤혜안은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 전시되어 있던 모자를 양손에 든 이해성이 그중 하나를 윤혜안에게 씌워보고 있었다. 경호원 두어 명이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캐주얼 평상복 차림이어도 자세나 분위기만으로 경호원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숨을 미처 다 추스르기도 전에 조성현은 성큼성큼 로비를 가로질러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 이거 다행이네요. 부사장님 벌써 떠나신 줄 알고 걱정했는데요.”
과장된 목소리에 이쪽을 돌아본 이해성은 뒤쫓아올 줄 알았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그렇게 숨이 찰 정도로 급하게 달려오시고.”
“아까는 영감님들도 계시고... 너무 갑작스럽게 뵌 탓에 말씀도 제대로 못 나눴잖습니까. 뵙기로 약속한 토요일이 바로 내일인데, 그 하루도 기다릴 수가 없을 만큼 부사장님이 많이 급하신 것 같아서, 그래서 제가 이렇게 달려왔죠.”
분노가 끓는 눈빛을 그대로 던지면서, 조성현은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말했다. 이해성은 대답 대신 보일 듯 말 듯 아리송한 미소만 입가에 잔잔히 띄우고 있었다.
“저한테 보내주신 선물을 보니 누굴 만나고 오신 것 같더라구요, 부사장님이.”
“그래요, 누굴 좀 만났습니다.”
“하하... 이거 정말... 이해성 부사장님의 슬픈 표정 한번 본다는 게, 이게 쉬운 일이 아니네요.”
허리에 손을 짚은 조성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다 고개를 숙인 자세 그대로 눈을 쳐들어 이해성을 노려보았다.
“예, 제가 졌습니다. 그래서, 씨발 뭘 어떻게 할까요?”
잠자코 조성현을 지켜보고 있던 이해성은 흠, 입을 다문 채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사장님 가랑이 사이로 기기라도 할까요?”
이번에도 이해성은 반응이 없었다. 윤혜안에게 씌워주었던 모자를 벗기고는 손에 쥐고 있던 나머지 모자 하나와 함께 경호원에게 건네며 계산을 부탁했다. 그러고 난 후에야 조성현의 어깨를 툭 두드리며 윤혜안과 함께 그 곁을 지나쳐갔다.
“내가 아니라, 윤혜안 씨 가랑이 사이로 기는 건 어때요?”
조성현은 벌건 눈으로 휙 뒤를 돌아봤다. 매장과 로비와의 사이에는 따로 벽이나 문이 없었다. 매장 앞에서 곧바로 두 사람을 따라잡은 조성현은 그 앞을 막아섰다.
“어울리지도 않는 말장난 치지 마시고 본론이나 말씀하시죠, 부사장님.”
“왜요? 그건 못 하겠습니까?”
“가지고 놀던 고양이의 가랑이로 기느니, 옷 벗고 JS 본사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게 낫죠.”
웃는 낯으로 빈정거리던 조성현은 처음으로 이해성의 얼굴에서 균열을 보았다. 기름칠할 시기를 놓쳐 삐걱거리는 기계처럼,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인 이해성의 눈에서 분노를 넘어선 옅은 광기가 넘실거렸다.
“정말 그럴까요?”
“......”
“그 말,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