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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 (177)화 (177/185)

177화

“아니, 조 사장. 이게 다 뭔가? 이거 자네가 보낸 거 맞지?”

“응? 어디... 나한테도 똑같은 게 왔네?”

“사장님, 차관님. 제가... 제가 다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이 사람, 이런 건 또 언제 다 준비를 했어?”

“......”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던 박용훈이 조성현을 돌아보며 시원스레 웃었다. 그들에게 거의 달려들다시피 하려던 조성현은 우선 걸음을 멈추고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분명 자신에게 전송된 것과 똑같은 영상을 받아본 거라 생각했는데, 박용훈 사장의 얼굴을 보니 그게 아닌 듯싶었다.

“내가 겨울 라운딩도 매력적이라 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날씨가 온화한 곳에서 골프 실력도 제대로 발휘되는 법이니까.”

“그래, 박 사장. 우리 조 사장이 그래도 스케일이 있는 분인데. 북아프리카 사업 건이 국내 골프장 몇 번 들락인다고 결정 낼 수 있는 규모가 아니라는 거야 잘 아시겠지. 거기다 동남아도 아니고 하와이라니. 제대로야 조 사장은."

국토부 차관의 맞장구에 박용훈 사장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조 사장 영업 센스는 내가 인정해야겠군.”

박용훈 패거리들에게 날아간 메시지 내용이 무엇인지. 조성현은 그제야 어느 정도 파악이 될 것 같았다. 하와이 골프 여행과 관련된 내용인 듯했다.

“그, 그럼요. 사장님. 차관님하고 날짜만 잘 맞춰주시면 제가 바로 세팅하겠습니다.”

조성현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뻣뻣한 얼굴 근육을 움직여 웃어 보였다. 고비는 넘겼지만 좆같은 상황에 몰렸다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이해성 쪽에서 영상을 손에 넣은 게 틀림없었다. 영감들에게 하와이 골프 여행 메시지를 넣은 건 본보기나 마찬가지였다. 언제든 영상을 풀어버릴 수 있다는 경고장을 날린 것이다.

영상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지금 당장은 영상의 출처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가지고 놀던 개·고양이 중 하나가 떠돌이 신세가 된 것에 앙심을 풀고 이전 주인을 물기로 했겠지. 한때나마 제 주제에 맞지 않는 따뜻한 실내에서 안락을 누리게 해주었던 은혜를 갚지는 못할지언정...

당장 돌아가 예상치 못한 사고를 막을 대책을 세우고 싶었지만, 이 접대를 팽개칠 수는 없었다. 하와이 골프 여행에 들떠 시끌벅적하게 카트에 오르는 영감들을 향해 반쯤 썩은 억지 미소를 짓는 조성현의 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조 사장님?”

영감들 뒤에서 마지막으로 카트에 막 오르려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조성현의 이름을 불렀다. 정말 조성현이 맞는지 확인해 보려는 어조로 말끝을 올리면서.

씨...발.

돌아보지 않아도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저 개새끼가 아주 작정을 했구나. 숨 쉴 틈조차 안 주겠다 이거지?

먼저 카트에 올랐던 영감들이 조성현 뒤로 다가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 기웃거리고 있었다. 기름 오른 그 낯짝들에 경이로움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조성현은 등 뒤의 인물에 대한 자신의 예상을 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게 누구신지... 부사장님. 이 시간에 여기서 뵙...네요.”

뒤를 돌아보며 반가움을 가장하던 조성현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흐지부지 늘어졌다. 목소리의 주인공이 이해성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 곁에 버젓이, 보란 듯이, 윤혜안을 대동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익숙한 뒷모습이 보여 혹시나 했는데, 조 사장님이셨네요.”

차분히 얘기하는 특유의 허스키 보이스를 들으니 조성현은 내장이 다 비틀리는 것 같았다. 일부러 찾아왔으면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태연히 여우짓을 하는 얼굴.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저 얼굴이 굴욕감으로 일그러지는 걸 좀 보겠다는데. 이거 일이 쉽지 않았다.

“뒷모습만 보시고도 저라는 걸 알아보셨다니, 영광인데요? 하하...”

“혼자가 아니시군요? 일 관계로 운동 나오셨는데 제가 실례를 했나 봅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박용훈 패거리들은 기다렸다는 듯 대화에 끼어들어 적극적으로 손을 내저어 보였다. 박용훈이 특히 엄한 표정으로 조성현의 등을 마구 찔러댔다.

“조 사장, 뭐 하고 있나? 이런 때는 일행을 소개해 드려야 예의지.”

“아, 예... 잘 아시다시피 ARA의 이해성 부사장님이십니다. 그리고 이쪽은...”

박용훈의 등쌀에 소개하지 않고 넘어가기는 틀린 것 같았다. 조성현은 어느새 카트에서 내려선 영감들을 한 명씩 이해성에게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이해성입니다.”

“아이고, 어젯밤 꿈자리가 그리 좋더니 귀한 분 뵈려고 그랬나 봅니다. GX의 박용훈 사장입니다. 운동 나온 길이라 명함도 없고, 실례가 이만저만이 아니네요.”

“저도 명함이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요.”

“별말씀을요. 부사장님이야 한국 땅에서 명함이 필요 없는 분이시죠.”

그럼요, 그럼요. 그렇고말고요. 어디 한국 땅에서만입니까? ARA가 이제 글로벌 기업인데요! 일행들이 앞다투어 박용훈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누군가는 한술 더 뜨기도 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부를 떨며 비위를 맞추는 쪽은 조성현이었는데, 이제는 박용훈과 그 일행들이 이해성에게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저러다 벌러덩 배 뒤집고 누워서 재롱이라도 떨 기세네. 조성현은 속으로 빈정거리면서도 겉으로는 억지웃음을 지은 채 그들의 대화에서 한발 물러나 있었다.

“훤칠하시다는 얘기야 워낙 들었는데, 정말 미남자이십니다. 왕장1)께서도 상당한 미남이셨는데, 이렇게 말씀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뵈니 부사장님이 더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농담을 곁들인 박용훈 사장의 칭찬에 다른 이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이해성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슬그머니 말머리를 돌렸다.

“이전에 박 사장님께서 국토부 차관을 지내실 때 당시 장관이셨던 남경익 전 장관님께서 조부와 막역한 사이셨죠. 덕분에 남 전 장관님은 사석에서 몇 번 뵈었는데, 사장님과는 기회가 닿지 못했었네요.”

“그랬죠, 그랬죠. 남 장관님을 모시던 시절에 회장님께서 도움을 많이 주셨더랬죠. 부사장님께서 저 같은 사람이 차관을 지냈던 것을 다 기억하고 계시니 감개무량합니다.”

박용훈 사장은 감격해서 눈물이라도 쏟을 기세였다. ARA 이해성과 연을 쌓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 이상 골프는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는 내 앞에서 그렇게 뻣뻣하게 거드름을 피우더니. 아들뻘 되는 이해성 앞에서는 성은이라도 입은 것처럼 잘도 굽실거리네. 벨도 없는 새끼들. 그래, 권력의 주인이 수차례 바뀌더라도 한서 그룹과 ARA 그룹의 위상은 그대로일 테니까. 그 권력도 결국 ARA의 돈으로 굴러가는 거니까.

좋아하는 아이돌을 만난 열성팬처럼 꿈꾸는 듯한 박용훈 패거리의 얼굴을 보면서, 조성현은 눈치채지 못하도록 혀를 찼다. 지금은 일단 최대한 빨리 이들을 서로 떨어뜨려 놓는 게 우선이었다.

“그럼, 서로 인사도 대강 나누셨고... 그만 부사장님을 보내드릴...”

“아, 인사를 나누다 보니 소개가 늦었네요. 이쪽은 제 동행, 배우 윤혜안 씨입니다.”

조성현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이해성이 곁에 서 있던 윤혜안의 등을 앞으로 밀어 내세우며 영감들에게 정식으로 소개한 것이다.

“아... 네...”

입매와 눈가에 파랗게 앳된 흔적이 남은 이 청년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 영감들은 머리를 굴리기 바빴다.

쉽게 말해 ARA의 안방마님으로 깍듯이 대접해야 하는지, 첩실 정도로 적당히 예의를 지키되 관심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것이 나은 관계인지를 계산하는 것이다. 그것에 확신이 서기 전에는 섣불리 반응하지 않으려 몸을 사리는 것이 조성현의 눈에 뻔히 보였다.

“제가 취미로 소소하게 영화 투자를 하고 있어서요. 새로 투자 중인 영화에서 만나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나이 차가 꽤 있다 보니 어울려 지내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지 모르겠네요.”

“아이고, 부사장님 무슨 말씀을요! 이렇게 나이 차이가 있는 젊은이들과도 허물없이 어울리시는 모습이 보기 좋기만 한데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아주 재능 있는 배우라서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 같은 사람들에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마는 부사장님께서 응원하시는 배우라는데 미약한 힘이나마 당연히 보태드려야지요.”

박용훈 사장과 강민욱 차관은 이해성과 윤혜안에게 조그마한 문제라도 생기면 자신들의 몸으로라도 막을 기세였다.

“차관님 말씀을 들으니 든든하네요. 자, 혜안 씨도 인사드려요.”

“안녕하세요, 배우 윤혜안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단정한 골프 웨어 차림의 윤혜안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날. 녹스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식은땀을 비 오듯 흘려가며 겁을 먹었던 윤혜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조성현이 익히 알고 있는, 독기가 파랗게 올라 표독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던 과거의 윤혜안과도 달랐다.

그래, 영상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 내 협박은 걱정도 안 된다 이건가?

이해성이 윤혜안을 대동하고 이곳에 나타나, 조성현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 영감들에게 버젓이 윤혜안을 소개한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컸다.

그것은 윤혜안을 뒷방에 숨겨두지 않겠다는 의미였고, 일이 잘못될 경우 권력이 윤혜안을 감싸도록 하겠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이제 조성현이 가진 패는 윤혜안이 가진 패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해졌다.

새파랗게 어린 동성 애인 데리고 다니면서 버젓이 소개하는 것도 모자라, 그까짓 데리고 노는 애 뒤치다꺼리에 이렇게까지 전력을 다해? 할아버지 죽고 아버지 죽고 나니, 이해성도 눈에 뵈는 게 없네. ARA도 이제 내리막이야. 씨발 내가 ARA 주식 싹 다 팔아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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