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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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 평소라면 조성현은 수년째 회원으로 있는 녹스 호텔의 피트니스 클럽에서 수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을 시각이었다. 운동은 골고루 즐기는 편이어도 야외 활동은 선호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비교적 정적인 데다 사교 운동에 가까운 골프는 더더욱 조성현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12월의 추위를 뚫고 이른 시간부터 골프장의 클럽 하우스에 나와 있는 이유는 접대 때문이었다.
“겨울 라운딩은 또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어. 안 그런가, 조 사장?”
“그럼요, 사장님. 환경이 험한 만큼 정복감도 대단하죠.”
“역시. 자수성가한 사람답게 조 사장도 도전을 즐기나 보군. 진정한 골프인이라면 겨울 라운딩도 즐길 줄 알아야지. 춥다고 스크린 골프장에나 처박혀 있어서야 되겠나?”
희끗한 머리가 반쯤 벗어진 노년의 입구에 선 남성이 조성현의 답변이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남자는 오늘 접대 자리의 핵심 인물이었다.
한국 국토 개발 공사(GX)1)가 북아프리카 4개국 정부와 협약을 체결하고 대대적으로 진행하게 된 국토 정비 및 개발 사업의 시행사 선정이 내년 초에 있을 예정이었다.
박용훈은 바로 그 GX의 사장으로, 그에게 시행사 선정권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조성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사업권을 반드시 따내야만 했다.
JS 건설의 회장까지 나서서 조성현을 식사 자리에 따로 불러 이번 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몇 년째 성장률이 부진하다며 긴 잔소리를 늘어놓은 회장은 마지막에 가서는 만일 사업권을 따내지 못하면 옷 벗을 각오를 하라고 핏대를 세웠었다.
최근 국내에서는 건축 사업이 더 이상 이전처럼 활발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의 경제 성장을 마친 나라에서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그런데도 회장은 경영진의 무능함을 이유로 내세우며 무조건 성장률을 더 높이라는 식이었다.
이러니 다이아 수저 싸 물고 태어난 것들은 안 된다는 거야... 씨발, 사업의 시옷도 모르는 것들이 목 조르면서 명령질이나 해대다가 결과가 나오면 그게 지들 능력인 줄 알지.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조성현은 어쩔 수 없이 GX의 박용훈에게 공을 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GX의 해외사업본부장을 두 달간 접대한 끝에 어렵게 박용훈과의 인사 자리를 만들었고, 오늘은 세 번째 접대였다. 하필이면 박용훈이 골프에 빠져있는 탓에, 그 세 번이 모두 골프 접대였다.
차라리 영계나 밝히는 영감이었으면 좀 좋아?
이른 아침부터 골프장 클럽 하우스에서 갈비탕이나 먹고 있자니 조성현은 성격에 안 맞아 죽을 맛이었다.
“사장님, 그... 이번 북아프리카 사업건 말입니다. 조 사장님이 여러모로 적격자라서요. JS에서 해외사업부문을 오래 맡기도 하셨고, 또...”
수천만 원을 챙긴 후에야 박용훈 사장과의 자리를 마련해 준 본부장이 은근하게 본론을 꺼내 보았다. 일이 잘 성사됐을 경우, 2천만 원을 추가로 더 지원받기로 약속했으니 본부장도 적극적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본부장은 라운딩 나와서까지 일 얘기인가? 그 건은 고려 중이라 했을 텐데.”
그러나 박용훈 사장은 즉시 이맛살을 찌푸리며 불편을 드러냈다.
라운딩 접대 정도만으로는 꿈쩍도 안 할 인간이기는 했다. 색(色)에는 둔감한 대신 영감은 돈을 밝혔다. 사업 규모가 대단한 만큼 1, 2억으로는 꿈쩍도 안 하겠지. 5억 정도 들인다 치면 연봉의 6분의 1 수준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5억이 아까워 JS 건설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을 수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곧 짭짤한 부수입을 올릴 예정이기도 하니, 그 정도는 투자로 여길 수 있었다.
조성현은 자신의 하드와 핸드폰에 저장돼있는 윤혜안의 자료들을 떠올렸다. 그것들만 생각하면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그 자료들 덕에 이해성에게 모욕을 주고 두둑한 용돈까지 뜯어낼 생각을 하면 박용훈 사장의 역겨운 얼굴을 보면서 억지웃음을 지을 필요도 없었다. 저절로 웃음이 났으니까.
“그래요, 본부장님. 모처럼 이렇게 야외에 나와서 일 얘기 서두르실 거 있습니까? 이만 슬슬 아래층으로 이동하실까요?”
“그러지. 든든하게 식사도 마쳤더니 몸이 좀 풀리네.”
“오늘 기온은 낮아도 해가 좋아서 그런지 그린이 그렇게 얼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얼었다고 한들 어떤가. 내가 영하 5도에 눈 덮인 필드에서도 90타를 친 적이 있는 사람이네.”
“아, 네. 사장님. 저도 그 얘기 들었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시종일관 웃는 낯으로 박용훈의 비위를 맞춰주느라 조성현은 얼굴에 경련이 날 지경이었다. 하지만 인내할 가치가 있었다. 사업권을 따내지 못하면 옷을 벗어야 한다는 건, 반대로 사업권 획득에 성공할 경우 사내에서의 입지가 더 탄탄해짐을 의미하기도 했다.
스타트 하우스로 내려가니 오늘 이용할 카트가 대기 중이었다.
“사장님, 1층 카페에서 오뎅을 판다고 제가 들어서요. 식사는 하셨지만, 뜨끈하게 드실 수 있도록 국물하고 준비해 볼까요?”
“오뎅? 조 사장은 배울 만큼 배운 분이 오뎅이라니?”
오늘 일행 중 한 명이자, 박용훈의 주요 측근이기도 한 현 국토교통부 제1차관이 혀를 차며 지적하자, 박용훈 사장은 고개를 저으며 조성현의 편을 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나 같은 옛날 사람은 오뎅이라고 해야 입에 붙는 법이거든. 어묵이라고 하면 영... 맛도 덜한 것 같아서 말이야.”
물론 조성현은 그것을 계산하고 한 말이었다.
“역시 조 사장도 나처럼 자수성가한 사람이라 마음이 통하네. 이런 날씨에 야외에서 오뎅 한 꼬치, 아주 좋지. 조 사장이 의외로 이런 소소한 챙김을 잘하는군.”
일행들이 연습 그린에서 간단히 몸을 푸는 동안, 조성현은 어묵을 사기 위해 자신의 비서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평소라면 이런 일에 직접 나설 이유가 없었지만 박용훈 같은 타입에게 잘 보이려면 사소한 부분이라도 발로 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중요한 이유였다.
골프장 스타트 하우스 내의 카페에서 비서가 어묵을 주문하는 동안, 조성현은 창밖으로 박용훈 패거리들을 내다보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노친네 씨발 노망이 났나. 어디서 나를 지랑 한 묶음으로 퉁쳐? 지방에서 농사나 짓던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게.”
자수성가라고는 해도 지방의 작은 읍면 출신인 박용훈 사장과 달리 조성현은 전형적인 강남 키드였다. 종합병원을 소유한 의사 집안이라거나 대대로 고위 관직자를 배출한 권력형 집안이라거나. 그 정도의 화려한 배경을 가진 집안 출신은 아니었다. 조부가 시류를 잘 타 일찍 강남으로 이주했던 덕분에 부동산으로 재미를 보았고, 덕분에 조성현의 아버지는 유복하게 자라며 부족하지 않을 만큼 공부해 대기업 부장 정도의 직급으로 퇴직했다.
조성현 역시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조성현의 성장 과정에서 그 정도 가정환경은 지극히 평범한 수준이었다. 초고속 승진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는 중에도 조성현 자신의 명문대 선배들 덕을 봤으면 봤지 부모나 집안 덕을 본 적이 없었다.
소위 다이아 수저로 불리는 환경의 인간들을 혐오하는 동시에, 박용훈 사장과 같은 평범한 서민 출신들에 대한 조롱과 무시가 조성현의 의식 바탕에 깔려 있었다.
아부를 해대는 측근들에게 둘러싸여 연습 퍼팅 중인 박용훈을 잘근잘근 씹듯이 바라보던 조성현은 핸드폰을 꺼내 ‘로미오’라고 저장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네.]
벨이 두세 번 울리기 전에 전화가 연결됐다. 박동하였다.
“오늘 대기해. 들를 테니까.”
[며, 몇 시쯤이요? 오늘 연기 레슨 있는 날인데...]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바닥을 치던 조성현은 눈을 번득이며 이를 갈았다.
“뭐 잘못 먹었어? 12시에 끝날지, 4시에 끝날지, 저녁 식사에 술까지 처먹고 끝날지. 그것까지 계획하고 내가 너한테 보고드려야 하냐? 레슨 취소하고 대기하고 있으면 될 일 아닌가? 동하야, 안 그래도 지금 기분 좆같은데, 오늘 더 험하게 놀아줄까?”
[아니요, 아니에요. 취, 취소할게요. 레슨 취소하고 집에 있을게요.]
겁을 잔뜩 집어먹은 목소리에 작은 만족을 느끼며 조성현은 통화를 끝냈다.
주연으로 얘기가 거의 끝났던 드라마의 캐스팅을 취소시키고, 지금 살고 있는 오피스텔에서 나가게 하는 것도 박동하가 말을 잘 듣게 하는 데에 효과가 있었지만, 역시 가장 효율적인 건 영상이었다.
조성현이 가지고 있는 영상을 본 이후부터 박동하는 아주 순한 개가 되었다. 오줌을 지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지금까지 다른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윤혜안을 겁주는 장면을 직접 보게 만든 것도 굿 초이스였어. 협박이 말로만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확실히 알게 할 필요가 있지.
비린 미소를 지으며 입꼬리를 올리는 조성현 앞으로 비서가 어묵을 올린 쟁반을 가지고 왔다.
“사장님, 어묵 나왔습니다.”
“박용훈하고 강민욱한테는 내가 줄 테니까 넌 본부장 맡아.”
“네, 알겠습니다.”
어묵과 국물이 든 넉넉한 크기의 두꺼운 종이컵을 들고 카페를 빠져나갔다.
“자, 오뎅이 나왔습니다. 생각보다 푸짐한데요? 뜨거우니 조심들 하시구요.”
“이거 옛날식 오뎅이 아니네. 보기에 깔끔하기는 해도 이런 건 어릴 때 먹던 그 맛이 아니라서 말이야. 왜 옛날에는...”
또 그놈의 옛날 타령을 해대는 박용훈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사이, 점퍼 안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비서가 소지하고 있는 공적 핸드폰이 아닌, 조금 전 박동하에게 전화를 걸었던 조성현의 개인 핸드폰이었다. 이쪽으로 들어오는 연락은 훨씬 더 은밀하고 중요한 경우가 많아 웬만해서는 놓치지 않았다.
“자, 사장님. 이제 카트로 가시죠.”
비서를 따라 이동하는 박용훈들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으면서 조성현은 핸드폰을 꺼냈다.
“뭐야, 이건.”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뿐인데, 알 수 없는 계정으로부터 메신저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조성현 사장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자그마한 선물을...’ 미리 보기에 떠 있는 자신의 이름을 보고는 별생각 없이 대화창을 클릭한 조성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씨발... 뭐... 이게 뭐야.”
조성현은 반사적으로 미친 듯이 영상의 볼륨부터 줄였다.
섹스 영상. 그러나 조성현 자신이 촬영했던 상대방의 모습만 나오는 섹스 영상이 아니었다. 원본에서 조성현 부분만 잘라내 확대한 것이다 보니 화질이 그리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영상 속 남자가 조성현이라는 것을 알아볼 정도로는 선명했다.
영상의 발신인이 누구인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조성현의 입매가 강하게 비틀리고 뺨이 경련을 일으켰다.
“이해성. 이 좆같은 새끼가... 기어이 해보자는 거지?”
띠링. 띠링. 띠링... 띠링.
그때였다. 몇 걸음 앞서가던 조성현 일행들의 핸드폰에서 순차적으로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알림음이 들려왔다.
피가 식는다는 감각이 무엇인지, 조성현은 똑똑히 느꼈다.
핸드폰을 쥔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영감들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는 것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