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그러나 정작 이해성은 멋쩍은 내색 하나 없이 사무적인 이야기를 이어갔다.
“ENA 엔터테인먼트에 개인적으로 약간 투자 중입니다. 대형 기획사는 아니지만 믿을 만한 곳일 겁니다. 고지운 씨가 원한다면 계약 후 재기 가능하도록 지원하죠.”
이해성의 제안을 들은 고지운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연예계는 이제 질렸어요.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이 밀어주면 나도 뜰 줄 알았지만... 보니까, 아무리 밀어줘도 안 되는 애는 안 되더라구요. 나 포함.”
자조적으로 비린 웃음 뒤에는 머그컵을 빙빙 돌리며 덧붙였다.
“난 애초에 재능도 없고 끈기도 없어서... 이제 그쪽엔 아무 미련도 없어요.”
이해성은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거래에 응한다면, 영상에서 고지운 씨를 특정할 수 있는 부분은 전부 편집으로 들어낼 겁니다. 조성현 위주로 영상을 다시 조합할 테니 그 부분은 안심해도 됩니다.”
그런 뒤에야 이해성은 그때껏 눈을 가린 채 자신의 가슴에 안고 있던 최홍서를 살며시 놓아주었다. 그사이 호흡은 안정되었지만 여전히 안색이 파리했다. 마른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보던 이해성이 고지운에게 말했다.
“물 한 잔 주겠습니까.”
고지운이 다른 머그컵에 생수를 따라왔을 때, 이해성은 최홍서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고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로 머그컵을 받아 든 이해성은 최홍서에게 그것을 몇 모금 먹였다. 맞은편 서랍장 앞으로 돌아간 고지운은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고지운이 실제로 본 ARA 이해성은 조폭 두목처럼 보는 순간 움츠러들면서 더럭 겁이 나는 외형을 갖고 있었다. 일단 키가 아주 큰 데다 체격까지 좋은데, 검은색 롱 코트를 입고 있어 더 위압적이었다.
만약 이해성이 배우라고 가정한다면(배우를 하고도 남을 마스크였으니까), 재벌 역할보다는 조폭 역할에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주먹 쓰고 칼 쓰는 끄나풀 말고, 명문 대학까지 졸업한 엘리트 간부. 요즘 영화나 드라마엔 그런 설정도 많으니까. 하지만 저 말끔하고 단정한 손으로 상대의 배때기에 칼을 쑤시는 장면을 그려보니 그건 또 그것대로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하여간 이강문 회장의 손자로 태어나 ARA 그룹을 책임질 후계자로 살아온 사람이라, 다음 달 카드 결제일 걱정하고, 유럽 여행 가려고 적금 붓고, 주말에 별로 친하지도 않은 회사 동료의 결혼식에 가는 대신 캠핑을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는 평범한 사람들하고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아무리 쓸모가 있다지만 영상 하나에 10억을 주겠다는 사람이다. 이해성 정도라면 아이돌 멤버 한 명이 아니라 그룹 하나를 자신의 노리개 삼을 수도 있었다. 그런 사람이 아이돌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금이야 옥이야 정성을 들이는 모습은 고지운에게 확실한 구경거리였다.
‘윤혜안’ 역시 이해성에게 온전히 의지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이해성이 유도하는 대로 숨을 쉬고, 머리와 어깨, 등을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스스로를 그대로 내맡기고 있었다.
하얗게 얼굴이 질린 윤혜안은 아직 힘들어 보였다. 하긴, 그 영상을 봤으면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이해성처럼 아무 반응 없는 쪽이 별난 거고.
아니면... 영상을 보고 기억이 돌아오기라도 한 건가? 윤혜안도 결국 조성현과 스폰 관계였으니까. 아마 내가 당한 것과 비슷한 일을 겪었겠지.
고지운은 서랍장에 기대 있던 몸을 주춤주춤 바로 세웠다. 이해성이 싸고도느라 그 어깨와 팔에 가려져 윤혜안의 창백한 얼굴은 반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 잊고 잘 살 수 있었던 사람의 기억을 괜히 끄집어낸 건가 싶어 찜찜했다.
아니,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해. 저쪽은 천하의 이해성이 붙어있는데. 나는 새도 떨어뜨리고, 죽은 사람도 살려내겠지.
머그컵을 찾아 소주를 몇 모금 더 들이켠 고지운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근데...”
“......”
“편집을 해도... 조성현은 이 영상 출처가 나라는 걸 알 텐데요...”
고지운에게서 거의 반쯤 등을 돌리다시피 앉아있던 이해성과 그에 의해 가려져 있었던 최홍서가 동시에 고지운을 돌아보았다.
머뭇거리며 얘기하는 고지운은 불안정해 보였다. 머그컵의 손잡이를 엄지로 긁어대는 손끝에서 초조함이 묻어났다.
“조용히 찌그러져서 살라고. 조금이라도 자기 심기 건드리면 내 영상, 사진 전부 풀어버린다고 했었어요. 집 앞 편의점도 얼굴 들고 못 나가게 만들어 주겠다고...”
최홍서의 턱을 살짝 들어 안색이 어느 정도 회복된 것을 확인하면서, 이해성은 연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답변했다.
“고지운 씨가 조성현에게 불이익을 보게 될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약속하죠.”
“어떻게요? 그걸 어떻게 약속하는데요? 그, 그 영상들이 그 개새끼 손에 있다는 것만 생각하면... 잠도 못 자겠고 밥도 못 먹겠는데!”
내동댕이치듯 머그컵을 내려놓은 고지운은 머리를 감싸 안고 무릎 사이로 고개를 푹 떨궜다.
이번에는 최홍서가 그런 고지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스스로 스폰서를 두길 원했던 윤혜안이나 고지운, 그리고 강간당하는 장면을 낱낱이 촬영 당해 그것으로 협박 받으며 성매매에 동원되어야 했던 최홍서 자신. 서로 배경 상황은 같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 찍힌 영상이나 사진으로 협박 받으며 산다는 것이... 그런 자료가 악한들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어떤 지옥인지... 그것만큼은 최홍서도 잘 알았다. 돌아보면, 자신이 미치지 않고, 언젠가 끝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 시간들을 지나왔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알아요. 지금 고지운 씨가 어떤 기분일지.”
나직하게 들려오는 ‘윤혜안’의 목소리에 고지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최홍서를 숨기듯이 고지운에게서 반쯤 등을 돌리고 앉아있던 이해성이 몸을 돌려 두 사람 사이를 열어주었다. 최홍서는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조금 나섰다.
“그 자료들을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겠죠.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머릿속에서 시간을 돌려보기도 할 거예요. 그때 내가 이랬어야 했나? 저랬어야 했나? 그러다가 조성현보다 자기 자신이 더 싫어질 거구요.”
인생은 간혹 명확히 눈에 보이는 가치들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만약 명도훈이 첫 만남에서부터 호스트바에서 일해보지 않겠냐고 권했었다면, 최홍서는 거절했을 것이다. 이후에 명도훈을 다시 만나지도 않았겠지. 편의점 알바를 계속하다가 부모님 등쌀에 밀려 기숙사제 공장 같은 곳에 취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명도훈이나 이서경을 만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에 휘말렸을 수도 있겠지. 살아보지 않은 인생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거니까.
이유나 상황이 뭐가 됐든, 호스트로 일했던 경력에 대해서까지 핑계를 댈 생각은 없었다. 그때 단호하게 정리했다면 이후의 끔찍한 일들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그런 후회와 자책을 해보지 않았겠는가? 수도 없이, 이서경이나 명도훈을 욕하고 저주한 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욕하고 저주했었다. 너는 그래도 싼 새끼라고.
하지만 이해성을 만나고 사랑하면서 최홍서는 생각을 바꾸었다. 이후에 일어난 그 끔찍한 일들까지 자신의 책임일 수는 없었다.
강간당하며 촬영되고, 그것으로 협박 받으며 끌려다니는 삶.
나는 그러한 삶을 <선택>한 적이 없다.
그런 취급을 당해도 싼 새끼는 이 세상에 없다.
“스폰서를 뒀었다는 게 떳떳한 일은 아니어도, 그렇다고 해서 그런 영상을 촬영 당하고 협박 받아도 되는 건 아니니까. 억울하고 불안하고, 그러다가도 자기 자신이 싫어지는 그 심정. 잘 알아요.”
“기억, 잃은 거 아니었어요?”
한층 누그러진, 이제는 우호적이기까지 한 고지운의 얼굴이 ‘윤혜안’을 향했고, ‘최홍서’가 차분한 음성으로 답했다.
“똑같은 경험을 해야만 공감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앞으로 나서 앉은 최홍서의 뒷덜미에 손바닥을 감으며, 이해성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고지운 씨가 불이익을 보게 될 일이 없다고, 어떻게 확신하냐고 물었죠?”
고지운과 최홍서, 둘 모두가 이해성을 보았다.
“조성현이 영상을 가지고 협박하니까 고지운 씨는 조성현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잖습니까? 조성현이 가진 돈과 힘 때문에.”
“......”
“조성현도 내가 영상을 가지고 협박하면 내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최홍서의 목을 부드럽게 주무르던 이해성은 뒤로 길게 늘어진 코트 자락을 잡아당겼다. 무릎을 꿇고 앉은 최홍서는 그대로 제자리에 다시 끌려 돌아왔다.
“자기 나름대로는 위협하겠답시고 목이 터져라 울어대도 잡아먹히는 건 결국 개구리지, 독수리가 아니죠. 생태계 피라미드에 반전은 없으니까요.”
그제야 고지운은 안심이 되는 눈치였다. 자기 손에서는 제대로 된 힘을 쓸 수 없었던 영상도, 그게 이해성 손에 들어갔다면 강력한 무기가 되리라는 걸 인지한 것이다. 마른침을 삼킨 고지운이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열었다.
“영상, 넘겨드리면 되는 거죠?”
“잘 생각했어요.”
거래 절차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를 주고받은 뒤, 이해성과 최홍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지운도 손님들을 배웅하기 위해 주섬주섬 뒤를 따랐다.
“일이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는 어디 조용한 곳에서 푹 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이번 일로 통화했던 강 실장 기억하죠? 강 실장이 준비해 줄 겁니다.”
고지운에게 마지막으로 그렇게 얘기한 이해성은 먼저 현관으로 나가라고, 최홍서의 어깨를 당겼다. 그런데 최홍서는 좀처럼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고지운을 힐끔거리며 머뭇거렸다.
“근데, 고양이는 어떻게 됐나요? 안 보이는데...”
“고양이요? 골리앗 말하는 거예요?”
고지운은 그것까지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다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곧 이해성이 알아내려고 한다면 손에 넣지 못할 정보는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성현이 ‘퀸’의 엄청난 팬이에요. 거기 보컬이 고양이를 여러 마리 길렀다는데... 어느 날 상의도 없이 데려와서는 키우라고 하더라구요. 처음엔 억지로 키웠는데. 나중엔 그 인간은 죽이고 싶어도 골리앗은 예뻤죠. 내가 이 꼴로 살게 되고 나선... 엄마 집에 보냈지만요. 제대로 돌보질 못하니까.”
죄책감을 느끼는지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던 고지운이 눈을 들어 최홍서를 보았다.
“아마 그쪽도 있었을 텐데, 고양이... 기억해요?”
“건강하게 잘 있어요. 믿음직스럽고.”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아주 살짝 웃어 보였다. 고지운이 그런 최홍서를 유심히 보았다.
“예전하고 인상이 많이 달라졌네요.”
“그래요?”
“내가 알던 형이랑... 많이 닮았어요. 예전엔 사람들이 닮았다고 해도 난 그렇게 생각 안 했었는데. 지금은, 그 형이랑 되게 닮았어요. 그냥 인상 자체가.”
내가 알던 형.
고지운이 눈앞의 ‘윤혜안’을 보면서 ‘최홍서’를 떠올려줬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이해성의 말을 빌리자면, 지금 고지운이 최홍서를 떠올린 건, 윤혜안의 이목구비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든 최홍서만의 향기 때문일 테니까.
나를 알아봐 준 것이나 다름없다고. 최홍서는 그렇게 여겼다.
두 사람이 대화하기 편하라고 그랬는지, 이해성은 먼저 현관 쪽으로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고지운이 그런 이해성을 눈짓으로 가리키면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근데... 사귄 지 오래됐어요?”
“......”
“이혼하긴 했지만 그래도 결혼도 하지 않았었나?”
“스폰서라고 생각 안 해요?”
최홍서의 놀란 질문에 고지운은 피식 웃었다.
“누군 뭐 스폰서 없었나.”
“......”
“세상 어떤 스폰서가 고작해야 데리고 노는 애를 그렇게 대해요? 딱 봐도 사귀는 거지.”
이해성이 현관을 향해 있던 몸을 다시금 돌려세웠다. 고지운은 뜨끔한 표정으로 이해성의 눈치를 살피며 뒤로 물러섰다.
“연예계에 미련도 없다고 하셨는데, 카페라도 하나 오픈해 드리는 게 좋겠네요. 강 실장 통해서 컨설팅 사무소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당분간 생계에 도움이 될 겁니다.”
갑자기 이런 추가 제안을 왜 하는 건지, 고지운은 얼떨떨한 듯했다. 고지운은 모르겠지만 최홍서는 이해성이 그런 제안을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스폰 관계가 아닌 사귀는 사이로 봐주어서, 최홍서 자신도 기분이 좋았으니까.
현관을 나서자 이해성은 최홍서의 손을 찾아 쥐었다. 남자 둘이 나란히 걸어 내려가기엔 좁은 계단이었지만, 거의 껴안다시피 서로에게 붙어 계단을 내려갔다.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의 뒷좌석에 올라탔을 때, 운전석의 수행원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이해성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음, 상당히 괜찮은 건수네요. 이쪽에서도 자료를 입수했습니다. 고지운이 좋은 영상을 가지고 있더군요. 기대한 것보다 더 가치가 있어요. 바로 영상 공유하죠. 조성현 스케줄은 입수했습니까?”
이해성이 통화하는 동안 자동차는 좁은 골목을 천천히 요령 좋게 빠져나갔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오후인데도, 다닥다닥 붙은 원룸촌 골목은 비가 쏟아지기 직전처럼 어둑했다.
“내일 오전? 잘됐네요. 세팅하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통화를 마친 이해성에게 최홍서가 물었다.
“강 실장님이에요?”
“조성현이 내일 골프 접대가 잡혀있다고 하니까 그쪽으로 작은 선물을 하나 보내주려고.”
“근데 아까 그 집에서 했던 말이요. 아저씨가 무슨 불한당이라고 했던 거.”
“아, 이면불한당?”
뭘 말하는지 알겠다고, 이해성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웃고 있던 그의 얼굴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그대로 최홍서를 향했다. 따뜻한 손이 다가와 뺨을 넓게 감쌌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엄지가 피부 위를 살살 쓰다듬었다.
“누가 너에게 발을 걸어 넘어지게 했다면, 그 사람은 두 다리를 잃게 된다는 뜻이야.”
무서운 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그의 목소리는 사이사이 진득하게 꿀이 스며든 바삭한 페이스트리 같았다. 얼굴을 감싼 그의 손바닥에 최홍서는 말없이 뺨을 비볐다. 티파니가 하듯이. 위로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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