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컴백 (174)화 (174/185)

174화

“하지만 그 영상이 이해성 손에 있다면, 그럼 얘기가 다르겠죠?”

“......”

이번에는 고지운의 표정도 달라졌다. 무너져 있던 자세가 차츰차츰 바로 돌아왔고, 눈빛은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고지운 씨가 가지고 있다는 그 영상이 저희 기대에 미치는 수준이라면 거래하고 싶군요. 영상 가치에 따라 대가는 아쉽지 않게 책정해 드리죠. 조성현 목을 확실하게 조를 수 있을 정도의 영상일 경우, 최대 10억까지 제안하겠습니다.”

“시, 시... 십억이요?”

“주거지는 따로 마련해 드리죠. 현금만 10억입니다.”

고지운은 마른침을 삼키며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갑작스럽게 들이켰던 술기운이 다 가신 얼굴로 아랫입술을 쉴 새 없이 잘근거렸다. 이해성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그를 채근했다.

“우선, 영상 먼저 체크할 수 있을까요?”

나른하게 들릴 정도로 온화하게 매너 있는 요청인데도 어딘가 완곡한 명령처럼 들리게 하는 이해성 특유의 어법.

좁은 집안을 가만히 둘러보고 있던 최홍서는 무릎이 서로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은 이해성을 스윽 돌아보았다.

“감독님과 배우분이 괜찮으시다면 연기를 조금 볼 수 있을까요?”

강우현 감독의 자택에서 이해성을 처음 만났던 날. 이해성은 그날 최홍서를 그렇게 대했었다. 지금이야 그게 이해성의 사무적인 태도라는 걸 알지만, 당시 최홍서의 눈에는 별난 VIP였다. 톱스타도 아닌 연예인 나부랭이를 그 정도 매너로 대하는 VIP는 처음이었으니까.

거리를 두고 딱딱하게 대했던 처음부터, 그때부터 이해성은 그랬다. 조 사장의 추잡한 요구로부터의 구원이었고, 접대 자리를 제대로 된 연기 오디션으로 만들어 준 구원이었다.

최홍서의 시선을 느낀 그가 이쪽을 돌아보았다. 아주 살짝 입술 양 끝을 당기는 것만으로도 그는 최홍서에게 안정을 줄 수 있었다.

나도 그럴 수 있다면. 그가 맨발로 바닷가를 달리게 만들고, 제대로 잠들지도 못하게 하는 대신... 그를 둘러싼 모든 불안을 내가 종식시킬 수 있다면. 편안한 미소와 함께, 좋은 꿈을 꾸면서, 내 곁에서 곤히 잠든 그를 볼 수만 있다면.

그러기 위해서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최홍서는 그를 향해 씩씩하게 마주 웃어 보였다.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그사이 계속 고민하던 고지운이 마음을 굳혔는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등 뒤의 서랍장을 뒤져 깊숙한 곳에 숨겨둔 핸드폰을 하나 가지고 왔다.

“그 인간 엿 먹이려고 하는 거면 도움이 되긴 할 거예요. 스폰으로 연예인 따먹으려는 인간들 다 그렇지만, 그 인간은 특히 더, 진짜 상종 못 할 개변태거든요. 침대에서 정상위로 섹스하려고 자기가 그 큰돈을 쓰겠냐면서...”

쓰게 웃으며 코웃음을 친 고지운은 핸드폰의 전원을 켜고 이것저것 만지며 조작했다. 고지운이 이해성에게 핸드폰을 건넸을 때, 화면에는 일시 정지된 영상이 하나 띄워져 있었다. 그리고 허망하게 텅 비어 있었던 고지운의 눈빛에도 무언가가 번뜩거렸다.

“아무리 지 잘난 맛에 사는 인간이라도 세상에 그딴 게 뿌려지는 건 겁나겠죠.”

거기까지 얘기한 고지운은 ‘윤혜안’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쪽도 잘 알겠지만, 조성현, 자기가 자수성가했다는 거에 자부심이 엄청나요. 재벌들은 운 좋게 집안 잘 만난 거지, 능력도 없으면서 아랫사람 쪼아대는 것만 할 줄 아는 병신들이라고. 맨날 재벌들 무시하는 소리만 하는데, 흥, 내가 보기엔 열등감이에요 그거.”

“......”

“재벌들 부럽다, 뭐 그 비슷한 소리만 해도 발작하잖아요.”

동의를 구하듯 얘기해도 ‘윤혜안’이 아무 반응이 없자, 고지운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 깨어난 다음에 기억 잃었다고 그랬었나?”

소주를 한 모금 더 마신 고지운은 덤덤히 얘기했다.

“그쪽이랑 나, 조성현이 동시에 만났었어요. 자기가 조성현 만났던 건 알고 나한테 온 거죠? 그거 땜에 협박받고 있으니까 약점 잡으려고 하는 거... 맞잖아요.”

“맞아요. 조성현에 대해 아는 게 있으면 뭐든 얘기해 주면 됩니다.”

최홍서 대신 이해성이 나서서 대답했다.

“다른 애를 동시에 만나는 걸 굳이 숨기려고도 안 하는 인간이에요. 근데 이것저것 물어보면 또 지랄을 해서... 나도 뭐 자세히 아는 건 없지만요. 질투하는 걸 존나 싫어하거든요. 니가 지금 나랑 연애하는 줄 아냐고.”

소주가 얼마 남지 않았는지, 고지운은 머그를 깊숙이 기울였다.

“조성현은요, 처음엔 진짜 좋은 스폰서처럼 굴어요. 폼 나는 집에 살면서 폼 나는 차 끌게 해주고, 폼 나는 역할도 잡아다 주거든요. 입에 담지도 못할 변태지만, 그 인간 말대로 연애하려고 만난 거 아니니까요. 날 위해서 돈을 전혀 안 아끼는 것처럼 보이니까 말을 잘 듣게 돼요. 놓치면 안 되겠다 싶어서 나도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거든요. 근데 사실은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는 거예요. 그쪽한테는 그룹을 버리고 나오라고 했죠? 나한테는 자기가 골라주는 작품만 하게 했어요. 자기가 골라준 작품에 실제로 꽂아 줄 능력도 되니까 더 말을 잘 듣게 되더라구요. 근데 나중에 정신 차려 보면 실력은 하나도 안 늘었고, 조성현 도움 없이는 시시한 역할 하나 못 따는 신세가 돼 있는 거죠, 뭐.”

고지운과 윤혜안이 자살을 시도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스폰서와의 관계가 끝난다면 그건 연예계 생활도 끝나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그 스폰서가 자신의 섹스 영상과 사진을 수도 없이 소유하고 있고, 심지어 그걸로 협박까지 해 온다면?

최홍서는 눈을 내리깔면서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32층에 다시 서 있는 것 같은 아찔함에 순간적으로 눈앞이 어지러웠다.

“왜 그래? 몸이 안 좋아?”

이해성이 최홍서의 상체를 붙잡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에요. 잠깐 심호흡 좀 했어요. 영상, 같이 확인해야죠.”

이해성은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의 눈에 자신의 눈을 맞추는 순간에 최홍서는 그의 모든 감정을 전해 받을 수가 있었다. 충격이나 상처를 받지 않도록 지켜주고자 하는 다정한 따뜻함. 자신을 향한 애틋한 보호 본능.

최홍서 역시 그에게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답했다. 괜찮다고, 이 과정 하나하나를 전부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고.

흠... 어쩔 수 없다는 듯, 신음 같은 한숨을 낮게 흘린 이해성이 고지운에게 말했다.

“불편하다면 볼륨은 제거하고 재생하겠습니다.”

“......”

고지운은 미간을 좁히면서 인상을 썼다.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표정이었다.

“왜 그러시죠?”

“아니, 그냥요... ARA 이해성이잖아요. 근데, 나 같은 놈 입장도 생각해 주는 게... 그런 게 그냥 신기해서요. 소문대로 진짜 모범생이구나... 싶어서.”

“가난한 사람이 모두 돈 앞에 비굴하지는 않은 것처럼, 힘 좀 있다고 해서 모두가 조성현처럼 살진 않습니다. 사람은 다 제각각이죠.”

“......”

“뭐, 대다수가 재수 없는 건 사실이긴 합니다만.”

이해성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했는데 고지운이 풉, 짧은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스스로도 이 상황에 웃음이 나온다는 게 어이가 없었는지 얼굴을 짓이기듯 문질렀다. 그러나 정작 이해성 본인의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리고, 실망시켜서 미안하지만. 내가 그렇게 소문처럼 모범생은 아닙니다.”

“......”

“한 번 작정하면, 이면불한당(裏面不汗黨)1)이 따로 없죠.”

“이... 불... 뭐요?”

무슨 소린지 통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지운이 물었고, 이해성은 고개를 저으며 핸드폰을 들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이제 영상을 봐도 될까요?”

잠시 풀어져 한숨 돌리는 듯했던 고지운의 표정이 다시금 무거워졌다. 그리고 신중하게,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볼륨은 그대로 두고 보세요. 지껄이는 말들도 예술이니까.”

뒤쪽 서랍장에 등을 기댄 채 그렇게 대답한 고지운은 소주가 든 머그컵을 기울였다.

최홍서와 함께 볼 수 있도록 이해성은 핸드폰의 위치를 조정했다. 그리고 화면에 띄워져 있는 삼각형의 화살표를 터치했다. 침실이 아닌 욕실에서 촬영한 영상이 재생되었다.

그사이 고지운은 냉장고로 가서 소주 한 병을 더 따라왔다.

영상을 보는 동안 최홍서는 몇 번이나 욕지기를 느꼈다. 금방이라도 먹은 것을 게워낼 것 같은 토기를 억지로 참아냈다. 분명 티 내지 않은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이해성이 어깨에 팔을 둘렀다. 무너지지 않도록, 추락하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듯이 안아주는 힘이었다. 무리하게 강한 척하지 않고 그에게 몸을 기댔다.

침대에서 정상위 섹스를 하려고 큰돈 쓰는 게 아니라고 했다는 조성현. 권력자들의 그 심리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최홍서조차도 입을 틀어막게 될 정도였다.

조성현은 이서경에 버금가는 변태였다.

아니, 심리적 충격으로 치자면 이서경의 취향보다 더 극악했다.

영상이 공개된다면 나라 전체가 발칵 뒤집힐 스캔들이 될 게 분명했고, 조성현이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자수성가의 결실들도 전부 물거품이 될 것이다. 그 정도 파급력을 가진 영상이었다.

숨결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이해성에게 거의 완전히 안기다시피 한 상태에서 시선만 영상을 향하고 있던 최홍서는 이해성의 코트 깃을 꽉 붙들고 있었다.

스스로 눈을 감거나 시선을 돌려버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문이라도 당하는 사람처럼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흐으, 흑...”

호흡이 완전히 흐트러져버린 순간, 동시에 눈앞이 어두워졌다. 부드럽고도 따뜻한 움직임에 의해서. 어깨를 안고 있던 이해성의 손이 다가와 얼굴 위쪽을 넓게 가려준 것이다.

약 1시간짜리 영상은 겨우 15분쯤 재생되었고, 이해성은 그것을 정지시켜버렸다. 눈을 덮은 최홍서의 얼굴을 자신의 가슴팍으로 당기면서, 이해성의 시선은 맞은편에 앉은 고지운을 향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좋네요. 10억으로 거래하죠.”

이해성의 커다란 손 아래 드러난 최홍서의 입술이 핏기 없이 떨고 있는 것과 달리, 이해성의 목소리나 안색은 영상을 보기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지운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린 채였다.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10억을 실제로 제안받은 것에 대한 충격이기도 했고, ARA의 이해성이 눈앞에서 서슴없이 벌이는 애정행각 때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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