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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 (173)화 (173/185)
  • 173화

    고지운은 서울의 서쪽 끝자락에 살고 있었다. 지은 지 20년 이상 된 듯한 5층짜리 원룸 건물은 큰 도로에서도 한참 떨어진, 원룸촌에서도 구석진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해성과 차에서 내린 최홍서는 허름한 건물과 그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주인이 방치하고 있는지, 건물 곳곳에 페인트가 벗겨지거나 비늘처럼 일어나 있었고, 붉은 녹물이 낡은 건물 표면을 타고 흘러내린 자국이 선명했다. 주변의 다른 건물들과 달리 1층 공동현관에는 도어록 장치도 되어 있지 않았고, 그 앞으로 먼지가 수북했다.

    최홍서가 알던 고지운은 빚을 내서라도 이런 변두리의 원룸에 살 사람이 아니었다. 이곳에 고지운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멀쩡히 최홍서였던 시절. ‘레이어드’의 숙소 집들이에 고지운도 초대됐었다. 고지운은 다른 ‘레이어드’ 멤버의 친구였지만 이상하게도 최홍서를 잘 따랐었다. 잘 따른다고 해도 워낙 까칠한 성격이라 날을 세우지 않는 정도이긴 했지만.

    그날 고지운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누군가 그의 새 스폰서 얘기를 꺼냈었다. 고지운이 스폰서에게 강남의 아파트를 받았다고. 그 스폰서가 만약 조 사장이었다면 아마도 아파트를 고지운의 명의로 사준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고지운은 5층 건물의 4층에 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이해성과 최홍서는 준비해 온 선물을 가지고 계단을 올라갔다.

    층계참마다 매달린 창문은 오래도록 청소되지 않아 먼지층이 그대로 굳어 부옇게 흐렸다. 그 탓에 실제보다 더 어둑하고 음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떤 사생활을 가졌든, 도덕적으로 어떤 사람이든, 한때나마 인사를 하고 지냈던 사람의 몰락을 마주한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는 최홍서의 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그 심정을 알아챘는지, 앞서 4층에 먼저 도착한 이해성이 복잡한 표정으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지막 계단에 올라서자, 그는 팔을 뻗어 뒷목에 손을 감아왔다. 평소 즐겨 입는 큼지막한 후드 티셔츠와 패딩 점퍼 대신 단정한 셔츠와 코트를 입은 최홍서를 천천히 눈에 담으며 따뜻한 손이 부드럽게 목을 주물렀다.

    “이렇게 차려입었는데, 왜 더 어려 보여?”

    최홍서는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보았다.

    “아까는 대졸 신입사원 같다면서요.”

    “음... 내가 그랬나?”

    문득 그는 눈썹을 치키며 딴청을 피웠다. 그러곤 목을 받치고 있던 손으로 코트의 어깨와 소매를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옷은 분명히 몸에 잘 맞는데. 어깨선도 이만큼 내려오는 것 같고, 소매도 팔보다 더 길어 보이고. 꼭... 내 옷을 걸친 것처럼 헐거워 보여. 왜지?”

    “아저씨가 나를 자꾸 어리게만 보니까 그렇죠.”

    “그래, 내 눈엔 아빠 슈트를 입은 어린애처럼 보여. 그저 귀엽고,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고, 고생은 이제 몰랐으면 해.”

    “......”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홍서는 차에 가서 기다리는 게 어떨까? 혼자 다녀올 테니까.”

    최홍서는 두어 번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차에서도 두 번 정도 같은 질문을 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을 더 단단히 먹을 수 있었다.

    “실제로는 그저 귀엽기만 한 어린애가 아니니까, 내 마음 진짜 튼튼하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리고... 나랑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하는 건 아저씨면서. 왜 자꾸 차에 가 있으래요?”

    “농담하는 거 보니까 진짜 괜찮을 것 같긴 하네.”

    그제야 그의 얼굴이 조금이나마 풀어지고 미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흠... 코로 길게 숨을 내쉰 그는 다시금 최홍서의 뒷목을 감아 살짝 힘주어 당겼다. 그리고 앞머리를 내린 평소와 달리 반듯하게 드러낸 이마에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그의 마른 입술은 건조하지만 따뜻했다.

    “고지운에게서 뭔가 나오지 않더라도 실망하지 마. 지금 강 실장도 여러 방면으로 조사 중이니까.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응?”

    최홍서는 이해성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어드’ 숙소의 집들이에서 고지운은 좀처럼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겉돌았었다. 다들 모여있는 식당에서 빠져나와 혼자 거실에 앉아있던 고지운을 최홍서가 발견했을 때. 녀석은 상당히 불안정해 보였었다. SNS에서 ‘골리앗’과 찍은 사진을 발견한 순간, 당시의 대화는 더 생생히 되살아났다.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 말이야. 우리 같은 놈들이 그런 사람들 약점을 잡을 수 있는 방법 뭐 없을까?』

    그날 어둠 속에 앉아 최홍서에게 조언을 구하던 고지운은 상당히 절박해 보였다.

    『이 사람이 나를 쉽게 버리지 못할 이유 하나만 만들어 두면... 앞으로 진짜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스폰서가 자기를 버리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다 할 수 있는 사람 같았다. 고지운은 박동하와는 달랐다. 그 당시의 고지운이라면, 분명히 뭔가를 손에 넣었을 것 같았다.

    초인종은 고장이었다. 이해성이 두어 번 문을 두드리자, 누구냐는 질문도 없이 현관이 열렸다. 문틈으로 보이는 고지운의 행색에 최홍서는 크게 놀랐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방문객들의 얼굴을 번갈아 힐끗 쳐다본 고지운은 그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뒤로 물러났다.

    “들어오세요.”

    7, 8평 남짓한 원룸은 서둘러 어설프게 치운 티가 났다. 그런데도 아무리 좋게 말해도 깔끔하게 청소된 집은 아니었다. 며칠 바빠 손을 못 댄 것과는 달랐다. 방 주인이 생활에 의욕을 잃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곳곳에 묻어있었다.

    “이렇게 지내는 사람이다 보니 뭐 내드릴 것도 없네요.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겉치레는 신경 쓰지 마시죠.”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하는 고지운에게 이해성이 간결히 답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침대 옆, 비좁은 공간에 둘러앉았다.

    예전의 고지운이었다면 이런 집에서 살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어쩔 수 없이 살게 되었다 한들 사람을 집으로 부를 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고지운은 외출은 하고 싶지 않다며 만남의 장소로 제집을 선택했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지쳐있는 상태라는 거겠지...

    “불쑥 연락드려 놀라셨을 텐데, 만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물입니다. 받아두시죠.”

    이해성은 가지고 온 대형 쇼핑백을 고지운 앞으로 밀어 놓았다. 명품들의 명품이라 불리는 상당한 고가 브랜드의 쇼핑백이었지만, 고지운은 고개만 끄덕 숙여 보일 뿐 선물에 그다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최홍서가 알고 있던 고지운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삶에 아무런 희망도 낙도, 하다못해 집착도 없는 사람.

    “근데 저 같은 사람을 왜 보자고 하신 건지...”

    자살 소동 이후, 연예계를 은퇴하다시피 하고 은둔 중이었던 고지운은 인연도 없었던 ‘윤혜안’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얘기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다. ARA 이해성이 비밀리에 제안할 것이 있다고, 무조건 만나서 얘기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고지운 씨에게도 아마 나쁜 얘기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조성현 사장 알고 계시죠?”

    이해성은 뜸 들일 것 없이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조 사장 이름이 나오자 고지운은 눈에 띄게 표정 변화를 보였다. 초조한 시선으로 앞에 앉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앉은 채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 그건 왜요? 그 인간이 뭐라고 떠들었든 난... 난 죄지은 거 없어요!”

    “아니요, 그게 아닙니다. 혹시 고지운 씨가 조성현의 약점 같은 걸 알고 계시지 않나 찾아와 본 겁니다.”

    “약점이요...?”

    “저희가 조성현 때문에 약간 골치를 앓고 있어서요. 조용히 입 다물게 할 방법을 찾는 중입니다. 고지운 씨가 그쪽으로 저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죠.”

    이해성의 목소리에서는 조급함이나 초조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별것 아닌 일상적 문제를 의논하는 것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상대가 겁먹지 않도록 그는 대답을 채근하지도 않았다.

    고지운은 여러 번 마른침을 삼켰다. 아랫입술을 씹어대면서 이해성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눈빛에 조금 전보다는 빛이 감돌았다.

    “영상이... 이, 있긴 있어요.”

    최홍서는 자기도 모르게 숨을 깊숙이 들이마셨다. 이해성이 팔을 뻗어 최홍서의 손등을 꾹 붙잡아주었고, 최홍서는 그런 이해성의 손끝을 꽉 붙들었다. 고지운의 시선이 그렇게 하나로 엉킨 두 손을 힐끗 쳐다보았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시간이 좀 더 흘렀다.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앉아 입술만 씹어대던 고지운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자그마한 냉장고를 열어 소주병을 꺼내고는 머그컵 하나에 콸콸 따라 선 채로 들이켰다.

    두 사람에게서 등을 돌리고 싱크대 앞에 선 고지운은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내고 한동안 크게 어깨를 들썩거리며 숨을 쉬었다.

    “나중에 날 버리려고 하면, 그때 협박할 생각으로 몰래 찍어놨던 건데...”

    자조하며 피식거리는 웃음소리 뒤에 고지운은 머그컵을 들고 자리로 되돌아왔다.

    “정작 버려질 때는 영상 얘긴 꺼내지도 못했어요.”

    소주를 몇 모금 더 들이켠 뒤 쓴 목소리가 이어졌다.

    “따지면, 내가 가진 게 더 핵폭탄급인데... 그런데도 겁이 나더라구요.”

    “뭐가 말입니까.”

    “그 인간이 가진 돈이나 힘이요.”

    무슨 그런 당연한 걸 묻냐고, 삐딱한 웃음으로 대답한 고지운은 다시 또 소주를 찾았다.

    “난 그 인간이 돈이나 대줘야 겨우 역할 하나 딸 수 있는 B급 C급이고, 그 인간은 뭐 재벌까진 아니어도 나 같은 거 하나 매장할 만큼의 돈이나 힘, 인맥은 충분하잖아요. 그딴 영상도 나 같은 놈 손에 있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거... 그냥 쓰레기일 뿐이라는 거...”

    “그래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 이해합니다.”

    이해성이 건조한 음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 영상이 이해성 손에 있다면, 그럼 얘기가 다르겠죠?”

    “......”

    이번에는 고지운의 표정도 달라졌다. 무너져 있던 자세가 차츰차츰 바로 돌아왔고, 눈빛은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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