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그리고, 그 사람을 앗아간 개새끼들 하나하나를, 내가 어떻게 용서하겠어.”
이제 그는 분노를 더 숨기려 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나 곧 연인 앞에서 부정적 감정을 드러낸 것을 후회하듯 고개를 돌리며 담배의 필터를 깊이 빨았다. 계속된 수면 부족과 날카로워진 신경 탓에, 이마와 눈썹뼈에서부터 콧대로 이어지는 옆얼굴의 실루엣과 턱뼈의 윤곽이 더욱 두드러졌다. 담배를 입술로 가져갔다가 재를 터는 의식을 통해 그는 감정을 다스려 보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여느 때와 달리 쉽지 않아 보였다.
생강차를 한 모금 마셔 입술을 축인 최홍서는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일인용 소파 하나를 혼자 차지하고 몸을 말고 있던 티파니가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았다. 그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책상에 느슨하게 기댄 이해성 앞으로 걸어갔다.
“담배 냄새나잖아. 이쪽으로 오지 마.”
조금 전까지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있던 분노는 어디로 가고, 힘이 빠진 그의 목소리는 거의 풀 죽은 것처럼 들렸다.
“딱히 담배가 싫은 거 아니라고 했는데. 왜 안 믿어줘요?”
책상에 기대앉아 평소보다 눈높이가 낮아진 이해성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나한테 굳이 숨기려고 하는 게 더 섭섭한데.”
“뭐 좋은 거라고 네 앞에서 피우겠어.”
“나 그래도 아저씨 애인이고 스물여덟...인데, 진짜 애기처럼 나 교육이라도 하려구요?”
그 말에는 이해성도 동의하는지, 싱겁게나마 피식 웃어 보였다. 연기를 한 모금 호흡한 그는 담배를 쥐지 않은 손으로 앞에 선 최홍서의 손끝을 가만히 톡 건드렸다. 감히 꽉 붙잡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듯이.
“무섭지 않은가?”
“뭐가요.”
“내가 다시 보이지 않아?”
“왜요?”
그런 말을 왜 하는지 의중을 도무지 모르겠다고, 최홍서의 얼굴에는 순수한 의문만이 가득했다.
“이유가 뭐가 됐든, 손에 피 묻힌 사람이잖아.”
“......”
“키스도 안 하고 싶고, 옆에 오기도 싫고. 한동안 괴물 보듯이 하지 않을까 겁먹었었는데.”
“겁먹어요? 아저씨가?”
“홍서한테는 겁먹지.”
붙들지는 않고, 손끝 한 마디만 겨우 걸고 있는 이해성의 손을 최홍서 쪽에서 먼저 꼭 붙잡았다.
“아저씨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내가 아저씨를 다르게 볼 일 없다는 거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 거죠?”
“...너를, 네 사랑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야. 내가 너무 겁이 많아진 거지.”
시선을 떨어뜨린 그는 담배를 입술로 가져갔다. 물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커다랗기만 한 사람이고, 사람을 죽이도록 명령했다고 자백한 사람인데. 태산도 짊어질 수 있을 듯 넓고 두툼한 어깨가 이 순간 최홍서의 눈에는 안쓰럽게만 보였다. 손에 쥔 그의 손가락을 더 꼭 붙들었다.
“개인적으로 복수하는 건 분풀이일 뿐이라고 끝까지 이성을 지키려던 그런 사람이 마음을 돌렸어요. 그게 나 때문인데... 어떻게 내가 그 마음을 몰라줄 수가 있겠어요.”
최홍서는 붙잡은 그의 손을 마사지하듯 두 손으로 쥐고 열심히 주물렀다.
“그 메일들 때문에 아저씨가 많이 고통스러웠을 걸 알아서... 그게 마음 아플 뿐이에요.”
얌전히 왼손을 내맡기고 있었던 그가 한순간 최홍서의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자기 앞으로 더 바짝 끌어당겼다.
“나는 그 일을 조금도 후회 안 해.”
확신에 찬 눈이 최홍서를 올려다보았다.
“수개월이나 의식불명 상태였던 ‘윤혜안’이 깨어난 날이, 하필 이서경이 태국에서 피살된 바로 그날이라는 거. 절대 우연이라고 생각 안 하거든.”
“아...”
자신이 죽은 후에 이서경이나 명도훈이 어떻게 됐는지, ‘X군 스캔들’의 결말을 검색해 봤던 건 윤혜안의 몸으로 눈을 뜨고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오랫동안 그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속부터 몸이 떨릴 지경이었으니까.
이서경이 총격을 받아 타국에서 사망했다는 뉴스는 충격적이었지만, 일말의 동정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짜에도 그다지 신경 쓰지 못했었다. 자신이 윤혜안의 몸으로 눈을 뜬 날과 동일하다는 것까지는 더더욱 알아채지 못했었다.
두 날짜가 겹친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전율을 느끼는 사이, 이해성이 최홍서의 손등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최홍서는 그런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평소에 그가 자주 해주듯이.
“후회하지 마요. 이서경도 끝까지 자기가 한 짓을 후회 안 했을 텐데, 아저씨가 왜 후회를 해요?”
최홍서를 자신의 두 다리 사이로 바짝 당겨놓은 이해성이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달라진 눈높이 덕에 그의 얼굴이 더욱 가까웠다.
“법적 처벌이니 개인적 처벌이니... 난 그딴 거 하나도 모르는 놈이지만, 이서경이 죽어도 싼 놈이란 건 알아요. 아저씨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말없이 최홍서와 눈을 맞추고 있던 그가 스르륵 고개를 기울였다. 담배를 건 오른손으로는 책상 가장자리를 짚고, 왼손으로 허리를 감아 안았다. 마른 입술이 목덜미에 닿고, 넉넉한 사이즈의 파자마 칼라 사이로 미끄러졌다.
최홍서는 입맞춤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손등에 키스했을 때부터, 그는 반점이 일어난 자리마다 입을 맞추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이해성으로 살아있는 한, 조성현이 가졌다는 그 영상이 세상에 새 나갈 일은 없을 테니까.”
“어떻게 하려구요.”
“별로 복잡할 거 없는 일이야. 가장 빠르고 깔끔한 방법으로 처리할 테니까. 그딴 문제 때문에 우리 일요일 출국이 미뤄질 순 없잖아?”
배달 앱에서 먹고 싶은 요리를 골라 담아 핀테크 서비스로 결제하면 된다고. 그 정도로 간편한 일이라는 듯한 어조였다.
헐렁하게 벌어진 칼라 사이의 깊은 목 뿌리에 입을 맞춘 이해성이 최홍서의 가슴에 턱을 괴고 올려다보았다.
“홍서야, 나 이해해 줄 수 있지? 응?”
“아저씨.”
“이서경을 죽인 것도 홍서는 내 잘못 아니라고 했잖아.”
“아니에요, 아저씨. 그게 아니에요.”
이해성의 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은 최홍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서경이든, 명도훈이든, 조 사장이든. 아저씨가 용서할 수 없으면 용서하지 마요. 그 대신...”
“......”
“내가 아저씨 공범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이해성이 천천히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는 오른손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 가기만 하고 있던 담배를 비벼 꺼버렸다.
“우리한테 일어난 일이잖아요. 아저씨 손만 더럽히면서, 그 뒤에 숨어서 나 혼자 안락하고 순진무구한 거, 난 싫어요. 뭘 하려는 건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나한테도 다 알려줘요.”
“홍서야...”
“조성현 같은 사람들. 이서경 같은 사람들. 합법적이고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상대할 수 없다는 거. 나도 알아요. 복수하지 말라는 그런 온실 속 화초 같은 소리 안 해요. 대신, 나도 같이 해요.”
함께 복수하자는 말에 이해성은 헤어지자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최홍서는 그런 이해성의 양손을 붙잡았다. 단정하고 말끔하지만 아주 커다랗고, 그만큼 무거운 두 손을.
“아저씨 손에 피가 묻었다면, 내 손에도 묻은 거예요.”
“......”
“나쁘게, 이기적으로 사랑해요. 우리 같이.”
위아래로 손가락끼리 서로 걸듯이 닿은 손끝을 이해성이 힘을 줘 붙잡았다. 말 안 듣는 아이를 타이르듯이.
“홍서 많이 아프잖아. 괜히 그런 일 속사정 자세히 알았다가 또 아프거나 그러면 어떡해? 좋을 것도 없는 일인데. 조성현 건만, 마지막으로 이것만 내가 알아서 처리하면 안 될까?”
이해성은 책상에 기대앉았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번엔 최홍서의 양어깨를 쥐고 압박하듯 밀어붙였다. 그 힘에 밀려 최홍서는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났다. 니야? 두 사람이 싸우는 거라 생각했는지, 여전히 몸을 말고 얌전히 엎드려 있던 티파니가 소파에서 뛰어 내려왔다.
“날 지켜주려는 아저씨 마음은 잘 알아요. 하지만, 아저씨가 나한테 가르쳐준 사랑은 그런 게 아닌데 어떡해요?”
“내가 어떻게 너한테 칼을 들게 하겠어, 홍서야.”
최홍서는 어깨뼈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힘을 준 이해성의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저씨보다 많이 어려도... 그래도 나도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살아야만 했어요. 아저씨 생각보다 나, 많이 독해요.”
“독한 게 아니야. 강했던 거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목소리를 열 수가 없었다. 어색한 표정으로 애써 웃어 보이기만 했다. 어깨를 붙들고 있던 이해성의 손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강해져야만 버틸 수 있었던 널 아니까, 나만큼은 널 애지중지하고 싶은 거고.”
소파에서 내려온 티파니가 초조한 몸짓으로 계속해서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불안한 목소리로 울어대는 통에 최홍서는 녀석을 안아 들어야만 했다.
“알아요. 아저씨가 날 애기라고 부르는 이유도 알고... 그래서, 아저씨 곁에 있으면 과거의 나까지 보살핌 받는 기분이에요. 아저씨랑 만나기 이전의 나까지두요.”
최홍서의 품에 안겨 있는 티파니가 갑갑하게 눌리지 않도록, 이해성은 살포시 연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최홍서의 이마에 그의 입김이 따뜻하고 간지러웠다.
“그럼, 내가 칼 쥔 손은 홍서가 모르게 하면 안 될까?”
“그 상대가 아무리 죽어도 싼 쓰레기라고 해도, 손에 묻은 피는 마음에 어둠이 돼서 남아요. 내가 아저씨 품에서 환하게 웃을 때, 아저씨 안에는 내가 모르는 어둠이 있는 거, 난 싫어요. 아저씨가 칼을 쥐고 있는 손에 내 손을 얹기만 하게 해줘요. 돌덩이같이 단단한 어둠이 남더라도, 그걸 둘이 나눠 갖는 게 낫잖아요.”
안아주길 바라는 것 같아 품에 들었더니, 티파니는 이번엔 더 날카롭게 울어대며 몸을 비틀어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서재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두 사람 주변만 맴돌았다. 고개를 바짝 들어 올려다보며 높은 목소리로 울어대는 녀석 때문에 더 이상 대화가 불가능했다.
최홍서는 바닥에 앉아 티파니를 쓰다듬었다. 목덜미 주변부터 시작해 겨드랑이 쪽으로, 녀석이 좋아하는 부분을 천천히 주무르면서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었다.
“티파니, 티파니. 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 괜찮아, 우리 싸우는 거 아니야.”
머리 위에서 한숨을 내쉰 이해성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카락을 흩트리며 말했다.
“간식이라도 좀 가지고 와볼까?”
“그래야겠어요. 이런 적은 처음이라 걱정이... 돼...서...”
계속 울어대며 불안하게 앞발을 핥는 티파니의 회색 장모를 쓰다듬던 최홍서가 문득 손을 멈추고 이해성을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그때 뭐라고 했었죠? 티파니 이름.”
“이름?”
“보석 브랜드 이름이 아니라고... 오피스텔에서 그런 얘기 했었잖아요.”
“아, 프레디 머큐리의 고양이 이름에서 따온 걸 거야. 아주 닮았거든.”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의 질문에 이해성은 얼떨떨해하며 대답해 주었다.
“혹시, 그 사람 고양이 중에 ‘로미오’도 있어요?”
“그렇긴 한데...”
“나, 나... 뭔가 짚이는 게 있어요.”
흥분이 묻어나는 얼굴로 몸을 일으킨 최홍서는 다급하게 이해성의 팔을 잡아끌었다.
“핸드폰. 아저씨 핸드폰 좀 빌려줘요.”
잠금을 해제한 핸드폰을 받아 든 최홍서는 소파로 가서 앉으면서 SNS 앱을 찾았다. 글보다는 사진과 영상 공유를 기반으로 하는 젊은 세대가 주로 사용하는 SNS였다.
ARA 이해성의 핸드폰에도 의외로 해당 앱이 다운로드 되어 있었다. ‘최홍서’의 계정을 팔로잉했었으니까. 그 계정은 여전히 남아있었고, 그러니 이해성 역시 앱을 삭제했을 리가 없었다.
무슨 일인지 채근해 묻지 않고, 이해성은 조용히 최홍서 옆에 와서 자리를 잡았다. 티파니가 그의 무릎 위로 뛰어 올라왔고, 그는 녀석이 좋아하는 곳들을 부드럽게 마사지해 주며 최홍서의 손을 주시했다.
“티파니 이름이 진짜 그 밴드 보컬이 길렀던 고양이 이름에서 따온 거라면... 동하 고양이도 아마 그럴 거예요. 이름이 로미오였거든요.”
동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은 윤혜안이 자발적으로 고양이를 길렀을 것 같지는 않았다. 가족들이 반려견을 기르고 있던 것으로 봐서 박동하는 고양이보다는 강아지와 더 친숙할 가능성이 높았다. 조성현과 스폰 관계였던 두 사람이 하필 그런 이름의 고양이들을 기르게 된 것을 우연이라 생각하기 어려웠다.
최홍서는 ‘프레디 머큐리’가 생전에 함께했던 고양이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SNS 검색창에 입력해 나갔다. ‘프레디 머큐리’의 반려묘 이름을 붙인 고양이를 스폰 상대들에게 선물하는 게 조 사장의 의식이라면, 분명 윤혜안과 박동하 외에도 그 대상이 더 존재할 것 같았다. 그것이 조성현의 약점을 잡는 어떤 실마리가 될지도 몰랐다.
오스카, 톰, 제리, 딜라일라...
스폰을 받은 대상은 분명 연예인일 테니 게시물을 등록하기만 했다면 검색 결과 상위에 노출될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좀처럼 이렇다 할 게시물이 눈에 띄지 않았다. 초조하게 움직이던 최홍서의 손이 멈춘 건 대여섯 번째 이름을 검색했을 무렵이었다.
“......”
“......”
최홍서와 이해성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골리앗 #반려묘 #초보집사
따위의 해시태그를 달고 여러 색이 혼합된 단모의 고양이와 함께 찍은 2년 전 게시물의 주인공. 고지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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