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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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뻑 땀을 흘리며 앓고 난 뒤에 으레 그렇듯, 잠에서 깬 최홍서는 몸이 거뜬했다. 깨끗이 비어 오히려 맑아진 기분이었다. 실내는 무덤 속처럼 고요했고, 시야에 이해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문득 불안해진 최홍서는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옆구리 부근에 몸을 말고 엎드려 있었던 티파니가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았다.
“티파니, 여기서 잤어?”
냐아.
“밤새 같이 있어 준 거야?”
작은 얼굴을 이곳저곳 꼼꼼히 마사지하듯 문질러주었다. 오늘따라 관대한 녀석은 기분 좋은 듯 골골거리더니 순순히 무릎 위로 올라왔다.
티파니를 껴안고 윤기 흐르는 털과 따뜻한 몸을 쓰다듬으면서 어젯밤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어젯밤 일이 맞긴 하겠지? 시간이 그보다 더 많이 지난 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레스토랑에서 조 사장이 떠난 후에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그다음 기억을 전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떤 강하고 따스한 힘이 자신을 소중히 들어 올리던 감각만이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그마저도 꿈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긴 했지만.
최홍서는 파자마 소매를 걷어보았다. 이해성의 파자마는 넉넉히 헐거워 팔꿈치까지 쉽게 밀려 올라갔다. 이번에는 상의 자락을 들추어 가슴과 배를 내려다보았다. 역시나 반점이 더 늘어있었다. ‘그 증상’이 있고 난 후에는 매번 그랬다. 뒷목 부근에 몇 개 생기는 것으로 시작했던 반점은 이제 흉할 정도로 개수가 늘었다.
징그러울 만도 한데 이해성은 개의치 않았다.
눈살 한번 찌푸리지 않고 연고를 발라주었으며, 섹스의 횟수도 줄지 않았고, 온몸에 키스를 퍼붓고 빨고 깨무는 애무의 방식도 여전했다. 하지만 최홍서 입장에서는 솔직히 그에게 벗은 몸을 보이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파자마 소매 아래, 손등까지 퍼진 반점을 내려다보았다. 연고를 꼼꼼히 발라둔 탓에, 커튼을 여민 어슴푸레 속에서도 반점은 반들거렸다. 침묵 속에 멀거니 앉아 최홍서는 손등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티파니, 아저씨 어디 갔는지 알아? 아저씨 찾아보자.”
연고 바른 반점을 보고 있자니 미간이 시큰하게 울렸다. 멀리 갔을 리 없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그가 보고 싶었다. 최홍서가 몸을 일으키자, 티파니도 침대에서 폴짝 뛰어 내려갔다. 이해성을 찾아가자는 말을 정말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침대에서 일어난 최홍서가 찾는 사람이 누구인지 뻔하다고 여긴 건지. 녀석은 망설임 없이 앞장섰다.
침실에서 서재로 바로 연결되는 복도의 중문이 한 뼘 정도 열려 있었다. ‘나 여기 있으니까 자다가 깨도 놀라지 마’라고 이해성이 남겨둔 표시나 마찬가지였다. 최홍서는 문틈으로 쪼르르 사라진 티파니의 뒤를 따랐다.
복도 끝과 연결된 서재에서 이해성이 강 실장과 이야기 중이었다. 대화의 정확한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서재를 짓누르고 있는 무겁고 진지한, 그리고 긴박한 분위기만큼은 느낄 수가 있었다. 내면에서는 아무리 불안에 시달려도, 이해성은 웬만해서는 최홍서에게 그것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강 실장과 대화하는 목소리에서 날카로움, 억눌러도 미처 다 감춰지지 않는 분노가 배어났다.
티파니가 먼저 서재로 달려 들어가 일인용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대화가 즉시 중단되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출입구 쪽을 향했다. 최홍서는 강 실장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이해성에게 물었다.
“들어가도 돼요?”
“그럼요.”
장난기를 담고 있지만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평소의 그와 다르지 않았다. 책상 뒤쪽에 서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그는 서둘러 재떨이에 그것을 꺾어버렸다.
“그냥 피워도 되는데.”
“막 끄려고 했었어.”
이해성은 다급히 변명하며 연기를 손으로 휘저었다. 실내에는 공기청정기 두 대가 가동되고 있어 그다지 매캐하지 않았는데도.
이해성이 눈짓을 보내자 강 실장이 인사 뒤에 서재를 빠져나갔다.
“일하는 중이었어요?”
“음, 뭐 이것저것. 우리 미국 가기 전에 해결해놓을 일들.”
두루뭉술하게 대답하면서 이해성은 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태블릿의 커버를 덮어버렸다. 그리고 책상 뒤에서 돌아 나와 최홍서와 마주 섰다. 좀 전까지 다소 신경질적으로 느껴질 만큼 날카로웠던 분위기는 어디로 가고, 포용적인 미소와 눈빛을 가진 최홍서의 다정한 연인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럴 때의 이해성은 평생 언성 한 번 높여본 적 없고, 벌레 한 마리 죽여 본 적 없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최홍서의 눈에는 그랬다.
최홍서의 허리를 안은 그가 이마를 살짝 부딪쳐왔다.
“애기 일어났어요?”
왠지 평소보다 더 애 취급하는 태도였지만, 최홍서는 쑥스러워하는 대신 그를 마주 안았다. 얇은 니트를 입은 넓은 등에 팔을 둘러 어깨에 손을 걸고, 목덜미에 관자놀이와 뺨을 기댔다. 희미하게 풍겨오는 그의 살냄새와 체온에 닿자,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소중한 무언가를 다시 마주한 듯 향수(鄕愁)가 일었다.
“깼을 때 옆에 없어서 미안해. 급히 처리해야 하는 일이 좀 있어서.”
얼굴을 기대오는 연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정돈해 주면서, 이해성은 그 이마에 입술을 묻었다.
“열은 내려간 것 같고. 컨디션 어때?”
“좋아요. 울렁거리지도 않고.”
“그럼 뭐 좀 먹자. 애기 너무 오래 빈속이었어.”
최홍서는 그의 품에서 몸을 약간 떼어냈다.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며 집중해 주는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해성의 등에 두르고 있던 팔로 허리춤을 엉성하게 붙잡은 채, 최홍서도 그의 미소에만 집중했다.
“그전에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배고프지 않아? 간단하게라도 뭐 좀 먹으면서 얘기하면 좋겠는데.”
“일어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입맛이 없어요. 얘기 끝나면 같이 먹어요. 아저씨도 식사 전이죠?”
“먹고 싶은 거 없어? 계란죽 준비하라고 할까? 두부도 좀 부쳐서. 홍서 좋아하잖아.”
대화가 끝나더라도 식욕이 생길 것 같지는 않았지만, 무언가를 먹이고 싶어 안달하는 그를 안심시키려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최홍서를 소파에 앉힌 이해성은 내선으로 식사 준비와 따뜻한 차를 부탁했다.
몇 가지 내용을 지시하는 이해성의 옆모습을 바라보면서 최홍서는 저도 모르게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나갔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하나, 둘, 셋... 그러다 접은 손가락을 펼쳐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자조 섞인 웃음이 흘렀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는 오히려 이 습관의 힘이 필요 없구나 싶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길래 혼자 웃고 있어.”
이해성이 옆자리에 와서 앉으며 물었다. 최홍서는 직접적으로 대답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아저씨, 그때 나 32층에서요.”
“......”
“손가락으로 숫자 세기를 안 했어요. 안 무서웠거든요.”
온화하기만 했던 이해성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긴장이 감돌았다. 최홍서는 이해성의 손등 위에 살며시 제 손을 덮었다. 푸른 힘줄이 선명하게 돋은 폭이 넓은 손등은 무엇이든 으깰 수 있는 힘을 가졌겠지만, 왜 그런지 이 순간 최홍서의 눈에는 무르게만 보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선택을 후회해요.”
“......”
“내 생각보다 더 많이, 아저씨한테 내가 소중했어요. 근데 내가 그걸 몰랐어.”
“홍서야.”
“그래서 앞으로는 안 그럴 거예요. 내가 아저씨를 지키겠다고 혼자 행동하는 것보다, 우리가 같이 진흙탕에 뒹구는 게 아저씨한테 더 나은 거... 맞죠?”
마른침을 삼키는 이해성의 울대뼈가 내려앉았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가만히 손등을 덮고 있던 최홍서의 손끝을 갑자기 힘주어 꽉 붙잡았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감정이 가득 일렁거리는 얼굴로 자신의 연인을 바라보며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거면 돼. 진흙탕? 그런 건 잠깐이야. 해결하면 돼. 근데 네가 없는 건... 해결될 수가 없는 문제야. 해결하지 못할 문제를 남겨놓고 사라져버리는, 그것만 아니면 돼.”
최홍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문제는 함께 있으면서 해결하면 된다. 그런데 서로를 잃어버리면, 그 문제는 해결될 수가 없었다.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말할 것이다.
“조성현 사장 아시죠? JS 건설 대표이사.”
“......”
“윤혜안의 섹스 영상을 가지고 있어요.”
이해성의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는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저 고요히 최홍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걸 빌미로 아저씨를 불러내서 협박할 셈이에요, 그 사람.”
내내 최홍서의 눈에 고정하고 있었던 그의 시선이 가슴께로 느슨하게 떨어져 내렸다.
“아저씨, 알고 있었어요?”
눈을 맞추자고, 최홍서는 그의 손을 당겼다.
“어제 그 자리에 조 사장이 나타났었고, 무슨 소리를 지껄였는지. 아저씨 다 알았던 거죠?”
나를 보라고, 팔을 당기는 연인의 채근에 이해성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눈을 들었다.
“나쁘게, 이기적으로 사랑할 거라고. 이미 말했었잖아.”
그의 목소리에서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사과도 하지 않을 거고, 앞으로는 미행이나 도청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할 수도 없다는 의지였다.
“신사인 척 착하게 기다리는 거? 다 해봤어. 크게 손해만 봤지.”
싸늘하게 식는 그의 얼굴은 과거의 스스로를 조소하고 있었다.
“네 현재와 과거까지 낱낱이 조사하고, 24시간 사람을 붙이고... 그게 보호가 아닌 감시라고 해도, 아예 그때 미친놈처럼 굴 걸 그랬다고. 수백, 수천 번. 그 순간으로 돌아가, 알량한 양심의 싹을 잘라버리는 꿈을 꿨어.”
점점 격양돼가는 어조와 기름을 부은 것처럼 번들거리던 눈빛이 한순간, 최홍서의 이해를 애걸하듯 순하게 누그러졌다.
“너의 삶이더라도 네가, 네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나를 못 떠나게 하는 꿈.”
미행이든 도청이든. 과거의 그가 농담처럼 얘기했던 납치든 감금이든. 최홍서는 상관없었다. 그런 감시를 그만두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려던 것도 아니었다. 그는 오해하고 있었다.
“그럼 왜 조 사장이 그 방에 나타났다는 걸 알았을 때, 바로 들이닥치지 않았어요?”
“......”
“내가 스스로 말할 수 있게 기다려 준 거잖아요. 예전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족쇄를 채워 곁에 주저앉히고 당신의 인형으로 만들기보다, 내 두 다리로 직접 곁에 와주기를 바랄 사람이니까, 당신은. 혹시 넘어져 다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나를 따라다니는 한이 있더라도.
진통을 참아내는 것 같은 얼굴로 말없이 바라보기만 하는 이해성의 손에서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최홍서는 그의 어깨 끝에 가만히 이마를 묻었다.
“아저씨가 나에게 주는 어떤 사랑도, 나쁘거나 이기적일 수 없다는... 그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