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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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늘어져 있던 몸뚱이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들어 올리는 움직임은 무척이나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실수로 아주 작은 흠집이 생기는 것조차 지극히 두렵다는 듯.
아기. 그래, 부모가 첫아기를 품에 안듯 극진한 애정이 묻어났다. 부모에게도 소중히 다뤄진 기억은 없지만, 일반적인 부모의 손길이 어떤 것인지 그것까지 모르지는 않았다.
기억의 첫 꼭지부터 가난은 공기나 햇빛, 바람 같은 자연스러운 환경이었고, 부모의 불규칙한 수입은 가정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었다. 적지 않은 3남 1녀의 형제는 부모의 방치 속에서 저희들끼리 마구잡이로 자라났다. 형들은 최홍서를 분풀이 상대로 삼기 일쑤였고, 동생은 온순한 편이 아니었다. 다른 형제들도, 최홍서도, 앞으로의 삶에 토대가 될 두텁고 단단한 애정 관계나 사회성, 스스로를 보호할 기본 규칙 등을 다지지 못한 채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지내야 했다.
최홍서는 숙제를 하지 않아 혼나는 아이였고, 준비물을 제대로 챙기지 않아 주의를 받는 아이였다. 미술 시간에 북 찢어낸 스케치북 한 장과 눈치를 보며 빌린 서너 가지 색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아이였다.
아이 역시 그 상황이 즐겁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타개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갖지 못했다. 그저 그것이 자신의 역할, 자신의 자리라고 여겼다. 누구도 소중히 여겨주지 않았기에, 아이는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몰랐다.
훗날 팬들이 붙여준 글리콜이라는 별명처럼, 끓는점도 어는점도 낮은 무던한 성정 덕에 아이는 그럭저럭 주어진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원망하고 분노하고 반항하는 형제들은 아이의 눈에 더 힘들어 보였다. 그저 입을 닫고 구석 자리를 지켰다. 한 명이라도 침묵해야 집안이 덜 시끄러웠다. 아이는 그것을 터득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이의 내면에 애정과 보살핌을 희망하는 갈구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진작 포기했기에 달라고 떼쓰지 않았던 것뿐.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가, 2학년이었던가.
전교생 앞에서 영어로 발표할 기회를 가진 같은 반 아이가 있었다. 의복도 항상 깔끔하고, 가방이나 학용품도 좋은 것에다, 쾌활한 성격으로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은 아이였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질문을 하면 늘 적극적으로 손을 들었고, 틀린 답을 말해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아이.
그 아이는 특히 영어를 아주 잘해서, 담임 선생님은 종종 그 아이를 교탁 앞으로 불러내 친구들 앞에서 몇 마디 영어를 하도록 했었다. 아이를 바라보는 선생님의 흐뭇하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최홍서는 항상 홀린 듯 훔쳐보곤 했었다. 그건 세상에서 가장 황홀한 맛 같았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서 그런 눈빛을 받는다면, 초코우유와 딸기우유와 아이스크림과 케이크를 한꺼번에 먹는 것 같은 그런 맛이 날지도 모른다고. 아이는 막연히 상상해 보았었다.
‘선생님, 너무 떨려요! 못 하겠어요! 나, 안 할래요! 엄마한테 전화해 주세요!’
전교생 앞에서의 발표를 앞두고, 그 친구는 평소와 다르게 긴장한 모양이었다. 초등학교 1, 2학년에게는 벅찬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친구는 선생님에게 매달려 울음을 터뜨렸었다. 선생님에게도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는 친구의 천진함이 부러웠다. 그것은 받아들여진 아이들만의 특권이었다. 거부당한다는 아픔을 모르는 아이만이 가능한 특권.
‘막상 시작하면 연습한 대로 너무 잘할걸? 지금 기다리는 시간이 긴장되는 것뿐이야.’
선생님은 몸을 낮춰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럴 때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면서 천천히 숫자를 세보자.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숫자 세는 것만 생각하면서. 그건 할 수 있지?’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고,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선생님은 직접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주었다. 단순한 어린아이는 눈물을 매단 눈으로 하나씩 접히는 손가락에만 집중했다.
반 친구들과 줄을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최홍서에게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어린아이에게 선생과 부모는 구원자이자, 영웅이자,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신과도 같았다. 그런 존재가 알려주는 세계의 비밀 하나하나는 아이에게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유년기를 통틀어 거의 유일하게 최홍서에게 ‘교육의 결과’로 남은 것. 그조차도 곁에서 주워들은 남의 것이었다. 최홍서를 위해 최홍서에게 주어진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최홍서는 그 습관에 기댔다. 체육 시간에 달리기 순서가 다가왔을 때도, 학년이 바뀌고 새로운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도, 그다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호스트클럽에 첫 출근을 하던 날도, 최홍서와 자고 싶어서 목을 맨다는 ‘구찌 손님’에게 2차를 거절하러 나갔던 날도...
데뷔 후, 무대에 오르기 전에도 항상 숫자를 세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그렇다고 믿었다. 실은 숫자 세기 덕분이 아니라, 연습과 노력의 대가임을 알았다. 알면서도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혼자는 안심이 되지 않으니까. 절대적인 누군가가 가르쳐준 방법이 자신을 구원해 줄 거라 믿고 싶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그건 나를 위해 마련된 마법도 아니었는데.
자신을 소중하게 안아 드는 품속에서 최홍서는 어린아이로 돌아간 듯했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 그 시절의 최홍서는 받지 못했던 무한한 애정 속에서 보호받고 보살핌 받고 소중히 여겨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고, 어떠한 분풀이나 착취의 대상도 되지 않는다. 강인한 두 팔과 다정한 품 안에서 안심하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다.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충만한 행복감에 입가에 편안한 미소가 지어지면서도, 눈에서는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눈물이 솟았다. 그 깊은 곳은 먼 과거인지도 모르겠다. 무언가가 가득 채워지면서 그 자리에 고여 있던 눈물을 밀어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지금 흐르는 이 눈물은 가장 깊숙한 곳에 맺혀있던 고름일 것이다.
이런 절대적인 애정을 줄 수 있는 존재는 최홍서가 아는 한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에서, 그를 보기 위해 애를 썼다. 몇 번이나 느리게 깜빡거리고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내쉬는 숨결이 불같이 뜨거웠다.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에 걸터앉은 이해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지만 소리가 없기에 그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최홍서의 팔에 연고를 바르고 있었다. 처방해 준 약이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샤워 후, 아침저녁으로 두 번씩 매번 정성스레 모든 반점에 꼼꼼히 연고를 발랐다.
그만 발라도 될 것 같다고. 몇 번 그렇게 말렸었지만, 이제는 최홍서도 순순히 몸을 내주었다. 그 행위 자체가 그에게 위안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접으며 숫자를 세는 습관처럼.
“...아저씨.”
입술과 입안, 목구멍까지 바싹 말라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잔뜩 쉰 목소리에 이해성의 얼굴이 이쪽을 향했다. 눈을 뜬 최홍서를 발견한 그는 다른 무엇보다 먼저, 안심시키는 미소와 함께 손바닥으로 뺨을 쓸어주었다. 그리고 곧 물에 적신 거즈 수건으로 입술과 입안에 수분을 공급해 주었다.
“여기 우리 집이야. 괜찮으니까 좀 더 자. 아직 열이 높아.”
“우리... 빵집 해요.”
물기 덕분에 목소리를 내기가 한결 편안했다.
이해성은 엉뚱한 얘기를 들은 것처럼 웃으면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최홍서의 얼굴과 목덜미를 손으로 만져 열을 가늠해 본 그는 열에 들뜬 헛소리로 결론을 내린 듯했다.
“왜, 우리 홍서 빵 먹고 싶은가? 좀 더 자고 일어나면 얼마든지 사줄게. 빵이 아니라 빵집을 원하는 거면 그걸 사도 좋고. 뭐든 상관없으니까 빨리 낫기만 해.”
최홍서의 오른손을 두 손으로 감싼 이해성이 붙잡은 손에 입을 맞췄다.
“모리셔스로 가서 빵집 하자고, 아저씨가 그랬잖아요.”
“......”
최홍서의 손가락에 입술을 묻고 있던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빠져나갔다. 바라보는 눈동자가 드물게 격렬히 흔들렸다. 최홍서에게서 죽기 전, 과거의 얘기가 나올 때면 늘 그랬다. 눈앞의 이 사람이 정말 자신의 연인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면서 그는 전율했다.
누구도 소중히 여겨주지 않았기에, 아이는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만큼은 알게 되었다. 그에게는 자신이 너무나 지극하도록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이번에는 미련한 선택을 하지 않겠다. 그에게 다 털어놓고 함께 도망가는 것이 그를 혼자 남겨두는 것보다 나았다.
“그래, 맞아. 우리 홍서 잘 기억하고 있네. 근데 홍서야, 그건 홍서한테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얘기지.”
최홍서의 손을 기도하듯 더 꼭 감싸 쥐면서 이해성이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나쁜 일은 아무것도 없을 텐데, 우리가 왜 모리셔스로 도망가겠어.”
두 손안에 가둔 최홍서의 손에 그는 몇 번이나 입을 맞췄다.
“홍서는 그냥 푹 자고, 빨리 열이 떨어지기만 하면 돼. 응?”
“......”
“나쁜 일은 아무것도 없을 거야. 내가 약속해.”
알 것 같았다. 녹스 호텔의 그 레스토랑 개별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나타났었는지. 이해성은 전부 알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조 사장의 명령으로 이해성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최홍서가 단 한 번도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은 것처럼. 이해성 역시 단 한 번도 ‘홍서’라는 이름을 입 밖에 내지 않았었다는 것에 생각이 닿았다. 애기라는 애칭보다 홍서로 부를 때가 훨씬 많은데도. 그때 이미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말인가 더 하고 싶었지만, 열을 이길 수 없었다. 이불을 정돈해 주고 얼굴을 쓰다듬어주는 그를 좀 더 바라보려 눈꺼풀을 깜빡거리다, 다시금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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