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최근 통화목록을 여는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목록에는 온통 한 사람뿐이었다. 당근판매자님.
“스피커폰으로 돌려.”
명령조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박동하의 옆, 최홍서와는 대각선으로 마주 본 자리에 느슨하게 앉은 조 사장이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핸드폰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알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바로 영상 공유되는 거. 똑바로 하자.”
그러고는 드디어 영상을 정지시켰다.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둔 최홍서는 ‘당근판매자님’과의 통화를 시도했다. 손가락을 접어가며 숫자를 헤아릴 틈도 없었다. 레스토랑으로 내려오라는 연락만 기다리며 대기 중이었는지, 신호가 채 한 번 가기도 전에 그의 목소리에 닿았다.
[여보세요.]
“저예요.”
아저씨라고, 덧붙이지 않았다. 그건 최홍서에게 호칭이 아닌 애칭이었고, 저들에게 그것을 알려줄 마음은 없었다.
[응, 알지.]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하고 다정한 음성이었다.
“저기... 오늘, 동하랑 둘이서만 얘기해도 돼요? 부사장님 소개는 나중에 하고.”
[왜? 얘기가 잘 안됐나?]
“아니요, 그 반대. 생각보다 얘기가 잘 풀려서요. 오늘은 동하한테 얘기도 좀 듣고, 서로 오해도 풀고... 그럴까 해서요. 여기까지 같이 와줬는데 미안해요. 그래도... 되죠?”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발성이나 어투에 불안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반대로 그가 골라준 얇은 니트는 식은땀으로 축축해져 가고 있었지만.
[애기가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해야지.]
“자리 옮기진 않을 거예요. 여기서 얘기 좀 더 하다가... 객실로 바로 갈게요.”
[그래. 기다릴게.]
“네.”
[...너무 늦지 마. 내가 기다리니까.]
약간의 망설임 뒤에 그가 신중하게 당부했다. 그들이 듣고 있다는 것도 개의치 않고, 이해성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최홍서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부드럽게 감싸는 듯한 목소리가 뒤이었다.
[난 달리 가고 싶은 곳도 없어. 여기 있을 거야. 애기, 그거 알지?]
“네, 알아요. 늦지 않게 갈게요.”
이번에도 최홍서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는 이곳의 상황을 모르고 있을 텐데도,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 같은 대화에 자꾸만 목이 메었다. 통화를 마친 최홍서는 접시 위에 올려져 있던 냅킨으로 얼굴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애기?”
통화가 종료되자마자 조 사장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천하의 이해성 입에서 나온다는 소리가 애기? 야... 윤혜안이 애기라니. 애기가 다 얼어 죽었다. 아니면, 뭐, 플레이라도 하는 중이었어?”
지금 느끼는 구토감이 ‘그 증상’ 때문인지, 조 사장의 역겨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금니를 깨물고 치미는 토기를 인내하면서 최홍서는 무릎 위에서 냅킨을 두 손으로 꽉 비틀었다.
“아, 지금 생각해 보니까 말이야. 혼자 고고한 척하는 거에 비해 이해성도 침대에서는 여간 상스러운 게 아닌가 봐? 이해성이 너 전에 누굴 깔고 다녔는지 내가 아는데. 거기도 너 못지않은 걸레였거든.”
“걸레로 닦아내는 게 결국 더러운 오물이라는 거. 조 사장님도 아시죠?”
팔꿈치를 테이블에 괴고 두 손을 입술 앞에서 가볍게 깍지 낀 조 사장이 피식거렸다.
“네가 걸레면, 내가 오물이라는 소린가? 죽다 살아나더니 우리 혜안이, 비유 실력이 상당히 늘었네.”
“......”
“그럼 뭐, 이해성은 그 걸레를 깨끗하게 빨아주는 세탁기라도 되는 거 같아? 내가 오물이면 그 새끼도 오물이야.”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하죠.”
순간 조 사장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조 사장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핸드폰 액정 위를 두드려 영상을 다시 재생시켰다.
“윤혜안, 분위기 파악 안 되지?”
지금의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가 만들어내는 자지러지는 거짓 교성은 끔찍했다. 청각을 고문받는 것처럼, 최홍서는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번 일요일. 오후 9시까지, 여주에 있는 내 별장으로 이해성 데리고 나와. 위치는 동하가 보내줄 거다.”
“여긴 못 오게 하라더니, 이번엔 또 데리고 나오라구요?”
“어떤 경호원이나 수행원도 없이. 넌 이해성을 거기까지 데리고 오기만 하면 돼. 그렇게만 하면 이 영상이 유출될 일은 없어.”
“그걸 어떻게 믿죠?”
“어차피 내 목표는 네가 아니라 이해성이거든. 내가 너네처럼 아무것도 아닌 애들 데리고 싸움해서 뭘 얻겠냐, 안 그래?”
조 사장은 옆에 앉은 박동하의 어깨에 툭 팔을 걸쳤다. 그러곤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고 있는 박동하의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박동하는 조 사장이 무슨 짓을 하든 아무 반응도 없었다. 넋이 빠진 사람 같았다.
휘청거리며 기울어진 박동하의 몸을 놔준 조 사장은 정갈히 놓인 커트러리 중 포크를 집어 들고 그 끝을 테이블 위에 쿡쿡 내리눌렀다.
“내가 그 양반한테 쌓인 게 꽤 되거든. 부모 제비뽑기 잘한 것밖에 없는 개새끼가 씨발, 지 위에 사람 없는 줄 알지.”
조 사장이 이해성에 의해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것은 최홍서가 직접 목격한 장면만 해도 두세 번이었다. 이해성과의 첫 만남 자리에서도 그랬고, 제작 결정 파티 때는 훨씬 더 철저하게 뭉개졌었다. 이후에 조 사장은 <크림 맨션> 투자에서 아예 발을 빼게 됐었다. 그러나 물론 그 모두는 조 사장 본인이 자초한 결과일 뿐이었다.
이해성에게 이를 갈고 있던 조 사장이 윤혜안을 통해 복수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고작 돈만 요구할 게 아니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이 남자는 이해성에게 굴욕을 주려 할 것이다.
죽음 이전과 김빠질 만큼 똑같은 상황에 차라리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강제로 유린당하며 찍힌 영상이든, 스스로 원해서 스폰서를 찾아가 찍힌 영상이든, 결국은 똑같은 협박 도구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영상들이 이해성의 발목을 잡는 것까지 똑같았다.
나에게서는 아무것도 가져갈 만한 게 없으니까. 나를 통해서 그를 무너뜨리는 게 목적일 수밖에. 열이 올라 시큰거리는 눈동자에 힘을 주고, 최홍서는 정신을 잃지 않으려 버티고 버텼다.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주 한적하고 인적도 드문 곳이지.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무도 모를 만큼. 우리 혜안이는 그냥 하루 바람 쐰다고 생각해.”
“토요일로 하죠.”
“역시 윤혜안. 시원시원해.”
조 사장이 예상했던 대로라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요일엔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요.”
일요일에는 이해성과 함께 미국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조 사장이 어떤 계획을 세워놓았든, 이해성이 자기를 위해 준비한 계획을 이깟 놈 때문에 일그러뜨릴 생각은 없었다. 결코 그렇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조 사장은 이번엔 아예 어깨까지 떨면서 킬킬거렸다.
“그래, 그래. 그게 맞지. 전 국민의 포르노 스타가 되게 생겼는데, 지금 이해성하고 연애하는 게 대수야? 윤혜안 정도면 아직 글로벌 스타까진 안 되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만족스럽게 키득거리던 웃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조 사장은 포크를 툭 던지듯 내려놓았다.
“혜안아, 윤혜안.”
친근하게 부르는 목소리와 표정이 가증스러움을 더 배가시켰다.
“난 말이야. 네가 반반한 얼굴에 드러운 성질머리뿐인 잔챙이라 생각했거든? 큰물에서 놀아볼 머리도 없고, 그릇도 안 되면서... 욕심만 존나 많은.”
“......”
“근데 네가 이런 기회를 물어다 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냐, 응?”
조 사장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가득 따라뒀던 물 잔을 축하하듯 눈높이로 들어 보이고는 몇 모금 마신 뒤 내려놓았다.
“이래서 사람은 미리미리 증빙자료를 준비해둬야 하는 거야. 영상이 없었어 봐. 혜안이가 이해성 애를 낳았어도, 손가락만 빨아야 했을 거 아니야. 동하 너도, 인마. 잘 새겨들어.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인생 수업이야.”
박동하의 등을 툭툭 친 조 사장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고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이쪽을 보았다.
“근데 혜안아, 과거 일로 여태 꽁해 있는 건... 아니지?”
하아, 곤란하다는 한숨이 이어졌다.
“알잖아. 난 스물다섯이 넘으면 못 만나는 거. 그래도 넌 워낙 동안이라 예외로 길게 만났던 건데.”
“......”
“스폰서가 다른 애로 갈아탔다고 다리에서 뛰어내리네 어쩌네... 그 개지랄을 떨면 어떡하냐. 내가 뭐 죄책감이라도 가지길 바란 거야? 내가 그럴 놈으로 보였어? 너도 참 남한테 관심 없어.”
쯧쯧, 혀를 차며 손가락질하던 조 사장은 물을 한 모금 더 마시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넋 나간 채로 앉아있던 박동하가 뒤따라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의자가 넘어갔다. 그걸 일으키는 박동하를 돌아보면서 조 사장은 또 한 번 혀를 찼다.
이제 곧 끝난다. 조금만 버티면 이해성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최홍서는 그것만 되뇌면서 냅킨을 쥐어짜고 있었다.
“윤혜안, 우리 잘하자?”
물 잔을 내려놓은 조 사장이 핸드폰을 흔들어 보였다.
“기억이 싹 밀렸는지 어쨌는지 몰라도, 내 성질은 기억하지? 한다면 하는 거.”
조금만 방심하면 그대로 의식을 잃을 것 같았지만, 최홍서는 끝까지 조 사장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핸드폰을 재킷 안주머니에 넣고 곧 룸을 나갈 것 같았던 조 사장은 문득 최홍서에게로 다가왔다.
조 사장의 손이 땀에 젖은 최홍서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쓸어 넘겼다.
“내가 뭘 어쨌다고 땀을 이렇게 흘려. 사람 마음 약해지게. 너 이 정도에 쪼는 애 아니잖아.”
내려다보는 눈길이 역겨웠다. 최홍서가 너무나 잘 아는 눈빛이었다. 자신을 오직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만 품평하고 탐하는 욕정의 응집. 우욱, 욱. 실제로 구토를 하지는 않았지만, 울렁거림을 참기 어려웠다. 고개를 앞으로 빼면서 윽, 윽, 거려야 했다.
그것에 개의치 않고 조 사장은 이번엔 최홍서의 턱을 쥐어 치켜올렸다.
“이해성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가? 옛날에 실컷 먹고 버렸던 건데, 아직 단물이 있어 보이네?”
턱을 쥔 엄지가 아랫입술을 뭉개듯 훑고 지나갔다. 최홍서는 고개를 털어 그 손을 떨쳐냈다. 덥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열이 오른 눈으로 붉게 노려보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조 사장이 짧게 웃었다.
“이 맛에 한때 물고 빨았지.”
팬츠 주머니에 한 손 찌른 조 사장은 박동하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개별실을 떠났다. 마침내 혼자였다.
긴 숨을 내쉬며 배와 가슴에 힘을 풀면서 최홍서는 무너져내렸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오른쪽을 바라보았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부연 밤안개가 세상을 흐릿하게 감추고 있었다. 아직도, 여전히, 눈이 아닌 비였다. 그와 함께 눈을 보고 싶은데. 기다리는 눈은 아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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