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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 (167)화 (167/185)

167화

“ARA 이해성이? 윤혜안이랑? 스폰서가 아니라?”

충격받은 얼굴로 멍해진 박동하는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자신이 목격했던 일들을 더듬어보는 것 같았다. 박동하의 표정은 점차 충격에서 경악으로 변해갔다. 테이블 위 어딘가를 보고 있던 박동하의 눈이 최홍서를 향했다. 녀석의 목 관절은 기름칠을 해주지 않아 삐걱거리는 녹슨 기계 같았다.

“부사장님 같은 분이... 대체 왜 형이랑?”

그 순간만큼은 박동하의 질문은 그저 순수한 의문, 의아함이었다.

박동하가 말하는 ‘이해성이 연인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는’ 대상이 ‘윤혜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최홍서는 순간적으로 그 질문에 빠져들었다.

아웃포커싱.

이해성이 말했던 아웃포커싱은 첫눈에 반했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최홍서가 지금껏 알아 온 이해성은 그것만으로 누군가에게 이만큼 정성을 들일 사람은 아니었다. 흥미로움, 호기심. 첫 만남의 아웃포커싱은 아마도 계기일 뿐이었으리라.

“난 꽤 탐욕스러워서 그런 불합리함은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 같은데. 팀을 위해 그렇게 몇 년을 혼자 희생한다는 게 대단한 것 같아요.”

최홍서에게 삶이 얼마나 절실한지, 얼마나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는지. 이해성은 그 노력을 알아봐 준 사람이었다. 누구도 관심 두지 않는 발버둥을 알아봐 준 VIP에게 마음이 녹을 수밖에 없었다. 이해성 자신도 아마 최홍서의 그런 점에 자꾸 눈이 갔을 테고. 사람의 외모보다는, 향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이해성과 윤혜안이 연인이라는 사실에 기막혀하는 박동하를 맞은편에 앉혀놓고, 그와의 첫 만남까지 거슬러 올라갔던 최홍서는 흐릿한 미소와 함께 박동하를 건너보았다.

“그러게. 그 말엔 나도 동의할 수밖에 없겠다.”

한결같이 경계를 풀지 않는 박동하의 눈이 ‘윤혜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 향기가 좋다고 하시는데, 나한테서 무슨 향기가 나는지 나도 잘 모르겠거든.”

“그게 뭐야? ARA 이해성이 형한테 푹 빠졌다고 자랑이라도 해?”

“혼잣말 같은 거였어. 신경 쓰지 마.”

“그래서? 지금 비밀을 공유했으니까 형 말을 믿어달라는 거야?”

“넌 계속 부사장님 얘기를 꺼내고... 나는 너한테 부사장님을 소개할 수가 없으니까. 사실을 얘기하기로 한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네 앞에서 부사장님 얘기가 나올 때마다 널 기만하는 게 될 거 아니야.”

여전히 힘을 준 두 눈과 꽉 다문 입술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박동하의 감정이 처음보다 느슨해졌다는 건 알아챌 수가 있었다. 그렇게 속고 또 속았었다는 ‘윤혜안’을 다시 또 믿으려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박동하는 이번엔 ‘윤혜안’에게 배신당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더욱 다잡은 최홍서는 테이블 앞으로 더 바짝 들어앉았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하나씩 알게 될 때마다 나도 정말 괴로워. 근데... 나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존재하는데, 기억 안 난다는 핑계로 계속 숨을 수는 없는 거잖아.”

진심이었다. 나는 윤혜안이 아니고, 그러니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 간단히 생각해버릴 수 없는 문제였다. 최홍서는 이제 윤혜안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감사하게도 이 상황이 계속 이어져 간다면, 앞으로도 계속 사회적으로는 윤혜안으로 살아야만 했다.

그렇기에 책임지려고 하는 것뿐이었다. 내가 어떤 속사정을 가지고 있든, 사람들에게는 기억 안 난다는 말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

반점은 늘어만 가고, 언제까지 그의 곁에 있을 수 있을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가 없다. 윤혜안이 벌려 놓고 간 문제의 뒤치다꺼리가 아니더라도 내 코가 석 자였다. 착한 사람이 되려는 목적이 아니라, 살려고, 윤혜안으로 살아보려고 하는 발악이었다.

“너도 그랬잖아, 동하야.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갑자기 연기력이 달라지고 그럴 수가 있냐고. 그런 거 다 너무 이상한 일이잖아!”

“......”

박동하의 시선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아랫입술을 깨문 녀석의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울음을 참는 얼굴이었다. 임상진 대표의 말이 아마도 맞을 것이다. 녀석은 누군가를 끝도 없이 미워하기만 할 수 있을 만큼 모질지 못했다. 심지어 원망하는 대상이라 하더라도.

“나도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 사고 이후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서, 기억도 사라지고, 내가 예전과는 달라졌다고... 그렇게 믿고 기회를 줄 수는 없을까?”

박동하는 이제 손바닥으로 얼굴을 마구 짓이기듯 훑어냈다. 손바닥 뒤에서 드러난 녀석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티탄’ 얘기도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지난번엔 내가 미워서 그렇게 말했던 것도 있잖아. 다시 뭉치게 되면 나 정말 레슨도 착실히 받고, 연습도 열심히 할게. 예전 안무도 전부 다시 외우고. 어?”

“늦었어...”

“......”

“이미 늦었다고...”

벌게진 것은 얼굴만이 아니었다. 그렇게 절망적으로 중얼거리는 박동하의 눈도 금세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드르르륵. 핸드폰 진동음에도 박동하는 경기하듯 놀랐다. 최홍서가 이 개별실에 나타났을 때처럼 과민한 반응이었다. 옆자리 의자 위에 핸드폰을 내려뒀었는지, 팔을 뻗어 메시지 내용을 확인한 녀석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물을 들이켰다.

“늦고 아니고가 어디 있어? 내가 노력하고, 네가 믿어주면 되는 문제인데. 네가 더 이상 나 의심하지 않을 수 있도록 내가 꾸준히 노력하는 모습 보일 테...”

“그게 아니야!”

테이블 위를 내려치듯 팔꿈치를 올려놓은 박동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것처럼 꽉 움켰다.

“나도... 나도 어쩔 수 없었어... 형은 나쁜 사람이었잖아. 항상 그랬잖아. 그냥, 그냥 계속 나쁜 사람이었으면...”

그때였다. 노크도 없이 개별실 문이 열렸다. 두 사람의 고개가 일시에 출입구 쪽을 향했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한쪽 손을 슈트 팬츠 주머니에 찌른 채 삐딱하게 웃고 있었다.

“이거,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건들거리며 들어서는 얼굴. 조 사장이었다.

“혜안아. 잘 있었어?”

직원의 안내도 없이 불쑥 들어온 조 사장은 얼어붙어 있는 박동하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죽었다 살아났는데도 날 안 찾아와서 섭섭하다 했더니...”

갑자기 조 사장은 피식거리기 시작했다.

“ARA 그룹 회장님이 되실 이해성 같은 대어를 잡았을 줄이야. 그럼 뭐, 한낱 건설회사 대표이사 조성현 따위야 잡어로밖에 안 보이지. 이해해, 이해해.”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조 사장은 테이블 가장자리의 물병을 잡아 잔 속에 가득 따랐다.

조 사장이라니. 일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최홍서는 이 상황을 파악해 보려 애썼다. 하지만 윤혜안의 기억이 전혀 없으니, 감도 잡히지가 않았다. 턱이 쇄골에 닿도록 고개를 떨군 박동하의 반응으로는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가득 따른 물을 고작 한 모금 입술에 댄 조 사장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혜안이가 기억을 잃었단 얘기를 듣고,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

“기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추억 몇 가지 챙겨왔다.”

조 사장이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핸드폰에서 영상이 재생됐다.

화면이 어둑해 최홍서가 앉은 자리에서는 흐릿한 실루엣밖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음성만으로도 영상의 내용은 충분히 추측할 수 있었다.

[아, 아빠... 아빠, 좋아... 존나 못생긴 할배들 흐물거리는 좆만 빨다가... 아빠랑 하니까... 하아, 아, 씨발 너무 좋아...]

영상 속에서 흘러나오는 과장된 교성음.

가까이 훅 들어가는 카메라 앵글 속에서 헐떡거리는 벗은 몸의 주인공은 볼 것도 없이 윤혜안이었다.

최홍서의 입술이 벌어지고, 가슴을 구부린 채 밭은 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이 부사장 만나서 돈 얘기나 하려 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일이 재밌게 돌아가길래 계획을 약간 수정했지.”

의자 좌석의 가장자리를 두 손으로 움킨 채 최홍서는 호흡을 다스리려 애썼다. 벌써 바닥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그 증상’의 전조였다. 정신을 단단히 다잡아야 했다.

윤혜안이 거쳐 갔다는 여러 명의 스폰서 중 한 명이 조 사장이었다는. 거기까지는 알 것 같았다. 아마도 박동하의 핸드폰을 통해 이곳에서의 대화를 전부 듣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런데 대체 무슨 이유로 이 자리에 나타나,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없었다.

“추억이 기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됐나 보네. 다행이다, 혜안아.”

매끄럽다 못해 미끈거리는 목소리로 다정한 척 얘기한 조 사장이 박동하의 접시 위에 올려진 메뉴를 가져가 뒤적거리며 이어 말했다.

볼륨을 줄이기는 했지만, 테이블 위에서는 여전히 윤혜안의 섹스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기억은 처음부터 멀쩡했던 것 같긴 하지만 말이야. 동하야, 넌 그렇게 당하고도 또 쟤 말을 믿었어? 기억을 잃었으면, 문 앞에 서 있는 날 보고 그런 표정은 왜 지었겠어?”

쯧쯧쯧... 박동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혀를 찬 조 사장은 메뉴로 관심을 돌렸다.

“아니야, 동하야. 그게 아니라, 다른 일로... 저분 얘기를 들은 게 있어서, 그래서 그런 표정이던 거야.”

최홍서는 식은땀을 흘리며 해명했다. 기억을 하든 안 하든,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박동하는 무겁게 고개를 떨구었다.

이제야 상황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윤혜안이 팀을 나간 후, 궁지에 몰린 박동하가 선택한 해결책은 사채 따위가 아니라 아마도 ‘스폰서’였던 모양이었다.

조 사장은 윤혜안뿐만 아니라 박동하의 이런 영상과 사진도 얼마든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걸 빌미로 박동하를 협박했겠지. 윤혜안을 통해 이해성을 끌어내도록.

그렇다면 이해가 됐다. ‘윤혜안’을 몰아붙이면서도 마치 자신이 쫓기고 있는 것처럼 불안정해 보였던 박동하의 최근 모습들.

『부사장님은... 그거 할 때도 다정하셔? 그런 분은 이상한 요구 같은 것도 안 하시겠지?』

왜 그런 말을 했었는지, 그 말 속에 숨은 진짜 의미도 이제야 분명해졌다. 박동하는 그때, 자기의 스폰서인 조 사장을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정하지도 않고, 이상한 요구를 하며, 원치 않는 짓을 시키면서 협박하는 자신의 스폰서를.

“식사는? 다들 생각 없나? 난 지금 굉장히 허기진 상태라 뭘 좀 먹어야겠는데.”

메뉴의 뾰족한 모서리로 입술 끝을 톡톡 두드리는 조 사장의 얼굴을 노려보던 최홍서는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동하와 만나기로 돼 있던 자리인데, 약속도 없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그만 가보겠습니다.”

“앉아.”

메마르고 단호한 조 사장의 목소리에서는 조금 전까지 유들거리던 기름기가 완전히 빠져있었다.

“전화해. 이해성, 내려올 필요 없다고.”

“......”

조 사장이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핸드폰을 쥐고 흔들면서 최홍서를 올려다보았다.

“아니면, 뭐? 오늘 이 자리에 부사장님 모셔놓고 바로 상영회라도 벌이게? 나야 둘 다 상관없지.”

조 사장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최홍서는 천천히 다시 착석했다. 재킷 주머니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다 손이 미끄러져 두 번이나 전화기를 놓쳐 떨어뜨렸다.

최근 통화목록을 여는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목록에는 온통 한 사람뿐이었다. 당근판매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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