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형님하고는 이번 영화 같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크림 맨션> 출연 배우시죠?”
“네.”
남자의 악수는 정중하면서도 힘이 있었다. 자신감에 차 있는 사람의 악수였다. 얼굴 생김새나 표정에서 전해지는 분위기도 그랬다. 한서 그룹 오너 패밀리로 태어나, 외모까지 이만큼 갖췄으니 자신감이 없는 쪽이 더 이상하기는 했다.
검은색 터틀넥 스웨터 차림의 남자는 이해성 쪽을 힐끗 바라보고는 어조에 미묘한 신중함을 실어 말했다.
“형님께 개인적으로 의미가 큰 작품이라서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홍서의 목소리가 순간적으로 바싹 말라 떨렸다. <크림 맨션>이 어째서 이해성에게 의미가 큰 작품인지, 너무나 잘 알았으니까.
두 손을 모으고 꾸벅 머리를 숙여 인사하는 최홍서의 어깨에 이해성의 손이 툭 내려앉았다.
“혜안 씨, 이 전무가 우리 영화 투자자도 아닌데 그렇게 공손히 대할 거 없어요. 혜안 씨하고는 동...갑은 아니고, 겨우 한 살 연상이거든.”
“진짜요? 스물일곱 살?”
남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최홍서를 다시 봤지만, 놀라기는 최홍서 쪽도 마찬가지였다. 남자가 흔히들 말하는 노안이어서가 아니라, 그 당당한 체격과 신장, 자신만만한 여유로움 때문에 도무지 이십 대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 무례했다면 죄송해요. 아무리 많아도 스물네다섯 살이겠지 생각했거든요. 제가 아주 잘 아는 어떤 사람만큼이나 동안이시네요.”
아무리 직접적인 영향권 안에 없다고 해도, 재벌가 사람이 톱스타도 아닌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은 일개 배우를 이런 식으로 대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이해성의 사촌답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사람이 정말 이서경과 친형제인가. 그런 의문이 남자를 유심히 살피게 만들었다.
“그거, 지인 씨 얘기인가?”
여전히 ‘윤혜안’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이해성이 피식거렸다. 남자의 시선이 이해성을 향했다. 정지인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불리자 최홍서도 이해성을 돌아보았다.
“그럼, 정 배우가 동안이 아니라구요?”
“정 배우야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마스크가 맞지. 근데 네가 그렇게 자랑스럽게 얘기할 일은 아니라는 거지.”
장난치는 이해성은 즐거워 보였다. 사건 이후, 정지인 커플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많이 가까워졌다고 들었는데, 그런 격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대화였다. 그의 곁에 정지인 같은 사람이 있어 주었다는, 그것만으로도 조금은 다행이었다. 감사했다.
『홍서야, 버티자. 버텨야 기회도 잡는 거니까. 우리 버티자. 응?』
결국은 버티지 못하고 손을 놓아 추락해버린 결말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지인이 건넸던 위로의 말들이 가치를 잃는 것은 아니었다.
“지인 씨의 엄청난 팬이야. 나중에 자리 한번 만들어 주면 좋을 것 같은데.”
“아, 그으래요?”
‘윤혜안’을 정지인의 팬이라고 소개한 이해성의 말에, 남자는 완전히 다시 봤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최홍서를 보았다.
“보는 눈이 있으시구나. 정 배우 어떤 작품을 제일 좋아해요?”
“<이터널 나이트>에서의 이수 연기가 진짜 최고이고, 저는 <내일 일기>도 좋아합니다.”
<이터널 나이트>의 방영 도중에 최홍서는 생을 마감했었다. 작품을 끝까지 다 본 것은 윤혜안의 몸으로 되살아난 후였다. 스스로를 뱀파이어로 여기며 살아간 비운의 인간을 연기하는 정지인은 그때까지 보여주었던 배우로서의 자신을 완전히 뛰어넘고 있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선지 정지인은 연기에 대한 인정과 인기를 모두 얻은 시점에서 방송계를 떠났고, 지금은 연극배우로 완전히 전향한 상태였다. 거기까지는 최홍서도 알고 있었다.
“아... 전부 윤주호랑 같이 나왔던 거네.”
씁쓸한 얼굴로 뒷목을 주무르며 중얼거린 남자는 곧 언짢은 감정을 떨치고 쾌활하게 말했다.
“정 배우, 내년 봄에 연극 작품 새로 들어가요. 꼭 가셔서 응원해 주세요.”
“네, 꼭 가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갈게요! 항상... 항상 응원한다고... 전해 주시...”
최홍서 자신도 생각조차 못 한 순간에 울컥, 무언가가 치받쳐 올라왔다. 울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말을 잇기가 힘들었다.
“혜안 씨, 약속 늦겠어요. 그만 내려가 봐야죠.”
이해성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 준 덕에 최홍서는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해성이 열어준 현관 밖으로 나서면서 그를 돌아보았다.
“전화해. 바로 내려갈게.”
그렇게 속삭이는 이해성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문틈 사이로 이쪽을 바라보는 이해성의 표정이 내키지 않아 보였다. 내가 괜히 울컥하는 모습을 보여서 그렇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억지로나마 웃어 보였다.
“그 정도로 팬인 거예요? 나까지 덩달아 살짝 울컥했잖아요, 형님.”
닫히는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사촌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최홍서는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너한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그때 같이 보자.』
저 사람이 바로 지인이 형이 나에게 소개하려 했던 연인. 그리고 이서경의 동생.
최홍서는 저도 모르게 턱에 힘을 주고 어금니를 꽉 물었다. 상관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치자면 이해성 역시 이서경과 사촌이었고 핏줄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둘을 엮어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지인이 형이 선택했고, 형이 사랑하는 사람. 그렇다면 분명히 경계할 필요 없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남자에 대해 자꾸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남았다.
정지인과 연인 사이라는 이해성의 얘기를 듣고 어떤 사람인지 사진을 검색해 본 적은 있다. 하지만 분명 오늘이 초면이었다.
복도를 얼마쯤 천천히 걸어가던 최홍서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비 오는 평일 저녁의 호텔 복도는 쥐 죽은 듯 고요하고, 음산하기까지 했다.
어디서 봤던 남자인지 알 것 같았다.
목소리도 팔다리도 없이, 공(空)의 상태와 같은 우주에서 방콕의 루프톱으로, 그곳에서 다시 처음 보는 어떤 응접실로, 거기서 다시 바닷속으로...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떠돌던 기억. 그 기억이 끌어 올려졌다.
네 남자가 마주 앉아있었던 응접실. 그곳에서 정지인의 옆자리에 있던 남자였다.
『팔다리 하나쯤 잘라내 버리고 싶다고 생각 안 하세요?』
남자는 분명 이서경에 대한 복수를 제안하고 있었다. 이해성이 그 질문에 무엇이라고 답했었는지, 그것 역시 똑똑히 되살아났다.
『개인적 보복은 그 애를 위한 것도 뭣도 아니야. 그저, 내 분풀이일 뿐이지.』
떨고 있던 최홍서는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그래, 그렇게 얘기했던 사람이 이서경을 죽였을 리 없었다. 이서경을 죽인 건 다른 어떤 세력이겠지. 뉴스에서 말했던 그대로, 적이 너무 많은 인간이었으니까.
긴 복도의 허리에서 멈춰, 이해성이 있는 객실 쪽을 돌아보고 있던 최홍서는 다시 앞을 향해 걸어 나갔다. 두툼한 카펫에 묻혀 최홍서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하나, 둘, 셋...
단정한 유니폼 차림의 레스토랑 직원을 따라 복도를 걸으면서, 최홍서는 심호흡과 함께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나갔다.
직원이 안내한 개별실은 입구에서 가장 먼 깊숙한 위치, 건물의 코너에 자리해 양면이 모두 통유리였다. 맑은 날이었다면 멋진 야경을 조망할 수 있었겠지만, 안개에 비까지 겹친 터라 창문 너머는 온통 습기에 번진 흐릿한 어둠뿐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 앉아있던 박동하는 문이 열리자 죄지은 사람처럼 어깨를 크게 움찔거리며 돌아보았다. 어지럽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최홍서의 뒤를 힐끔거렸다.
“뭐야. 부사장님은?”
“조금 후에 오실 거야. 부사장님 없이, 너랑 나, 둘이서 먼저 해야 할 얘기가 있어서.”
“내가 만나고 싶은 건 부사장님이라고 분명히 얘기했지? 또 거짓말한 거야?”
박동하는 금세 흥분해서 테이블을 흔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진정해. 오실 거야. 네가 내 말을 못 믿을 가능성이 커서, 그걸 증명해 주기 위해서라도 오시기로 했어.”
“......”
녀석은 그제야 입을 다물고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치를 살피며 최홍서 몫의 잔에도 물을 따라준 직원이 갸름한 메뉴를 각자의 앞에 하나씩 놓아주었다.
“메뉴 먼저 올려드리겠습니다. 주문은 일행분이 모두 도착하신 후에 도와드리도록 할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최홍서의 대답 뒤에 직원이 조용히 물러갔고, 기다렸다는 듯 박동하가 신경질적으로 쏘아대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길래 우리 둘이 먼저 해야 하는 건데? 부사장님 만나기 전에 얘기 맞춰달라는 그딴 소리면 나 이제 형이 하라는 대로 안 해.”
“그런 거 아니야.”
침착하면서도 단호하게 얘기한 최홍서는 우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내가 과거에 너와 좋지 못했다는 건 이제 잘 알았어. 내가 기억을 못 한다는 걸 네가 믿기 힘든 이유도 알 것 같고. 네 말대로, 내가 기억을 잃은 척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더라고.”
맞은편에서 박동하가 코웃음을 쳤다.
“우리가 좋지 못했던 건 아니지. 팀에서 제일 잘나가는 것도, 팀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도 형인데... 나 같은 게 감히 형한테 맞서서 좋지 못한 관계를 만들 수나 있겠어?”
“그래. 정정할게. 내가 너나 다른 멤버들에게 좋지 못한 사람이었어.”
“......”
“하지만 네가 믿지 못해도 기억을 잃은 건 사실이어서, 이제라도 너에게 신뢰를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내 딴에는 많이 고민해 봤어.”
박동하는 윤혜안에게 원한을 가진 사람이었다. 게다가, 서준영처럼 박동하가 인도로 ‘봉사 활동’을 가지 않는 이상, 앞으로 수개월에서 많게는 1년 이상 작품을 함께 할 사이이기도 했다.
저쪽에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재수 없게 굴던 서준영과는 달랐다. ‘윤혜안’이 원한의 이유를 제공했다는 게 명백한데, 지금은 저 자신이 윤혜안인데. 어떻게 그것을 무시하겠는가. 박동하에게 지금의 ‘윤혜안’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로 과거의 일을 회피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물 잔을 내려놓은 최홍서는 헛기침 뒤에 마음을 먹었다.
“부사장님, 소개해 달라고 했었지?”
“......”
“부사장님이랑 나는... 저, 정식으로 교제 중인 연인 사이야.”
‘정식으로 교제 중인 연인 사이’라는 설명은 이해성의 아이디어였다. 자신들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는 게 좋겠다고, 그는 거절하기 어려운 진지한 얼굴로 최홍서를 압박해왔었다.
“...연인?”
맛없는 요리라도 입에 넣은 것처럼 박동하의 얼굴이 구겨졌다.
“네가 어떤 의미로 부사장님을 소개해 달라고 했는지 확신할 순 없지만, 이 사실을 숨긴 채 부사장님을 소개한다면, 너를 기만하는 거라 생각해서. 그래서 미리 얘기하려고 한 거야.”
“ARA 이해성이? 윤혜안이랑? 스폰서가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