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컴백 (165)화 (165/185)

165화

“그런 것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그런 것밖에라고 하지 마요. 날 그렇게 대해준 사람, 아저씨뿐이었으니까.”

그에게 안긴 동시에 그를 안고 있었다. 이렇게 있을 때면, 눈을 감아 그의 모습을 보지 못해도 불안하지 않았다. 이렇게 단단하게 붙잡아주는 이가 있는데, 간단히 사라질 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무엇이 자꾸 감정을 흔드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떠올리지 않으려 애쓰는 기억들은, 실은 현재의 자신이 가장 제대로 마주해야 하는 기억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최홍서는 그의 니트의 등 부근을 계속 고쳐 그러쥐었다. 망설이지 않고 매달리듯이. 그리고 그의 어깨와 목덜미에 얼굴을 비볐다. 어리광 부리듯, 혹은 자신의 체취를 남기려는 듯이. 모두 과거에는 선뜻 하지 못했던 행동이었다.

“VIP들 비위를 맞추면서, 최소한의 자존심이나 감정도 없는 장난감 도구처럼 웃어야 했던 나를, 아저씨는... 내가 VIP라고...”

숨통을 끊을 것처럼, 이해성이 팔에 힘을 주었다. 귓가와 뺨 아래에 닿아오는 그의 숨결이 거칠었다.

“말 그대로잖아, 홍서야. 아주 중요한 사람. 너 외에 내 VIP가 누가 있겠어. 유일하게 중요한 사람이고, 내 집에서 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신경 써야 할 사람이야.”

그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최홍서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향수의 잔향 때문일까. 기억의 공격은 피할 수가 없었다. 끓어오른 뜨거운 감정은 기어이 눈물로 배출되었다.

“그게 아니에요. 지금 말고... 예전에, 예전 최홍서였을 때...”

목덜미에 축축한 물기를 느낀 이해성은 조심스레 최홍서를 놓아주었다. 얼굴을 들여다보며 뺨을 닦아주는 손길은 늘 그랬듯 귀한 것을 다루듯 섬세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천천히 얘기해 봐. 괜찮으니까. 응?”

“처음에, 서초동 게스트룸에서 자고 갔던 날요. 일어나니까 아저씨가 없어서... 그런데 어떤 분이 2층 드레스룸에 계시다고... 거기서, 강 실장님하고 얘기하는 걸 들었어요.”

“......”

“강 실장님한테, 내가... 이 집의 VVIP라고.”

그 말을 듣고 몰래 드레스룸을 빠져나와 침대에 다시 누웠을 때처럼, 막을 새도 없이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최홍서의 두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한 자 한 자 유심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이해성이 갑작스럽게 거친 동작으로 최홍서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죽음 이전의 어느 한 순간.

심지어, 이해성 자신도 최홍서가 듣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것은 또 하나의 강력한 증거였다.

이미 최홍서라고 온전히 믿고 있었으면서도, 다시 한번 그 사실을 확고하게 해주는 증명 앞에서 그는 거세게 동요했다. 커다란 어깨를 들썩거리며 숨을 몰아쉬는 호흡이 최홍서의 뺨에 닿아왔다. 얼굴 이곳저곳을 다급하게 더듬어 만지던 그는 견딜 수 없다는 듯 다시금 연인을 격렬히 품에 껴안았다.

“그걸 듣고 있었어?”

“진짜 VIP가 나를 VIP라고... 그것만으로도 과거가 다 보상되는 것 같았어요.”

하아... 평소의 달콤한 한숨과는 다른, 억장이 무너지는 것처럼 진한 한숨이 이해성의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새어 나왔다.

자신을 향해 둥그렇게 구부린 넓은 등을 다시 한번 두 팔에 가득 안으면서, 최홍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였다.

“꼭 말하고 싶었어요. 아저씨는... 내가 아는 한, 유일하게 VIP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어요.”

“......”

“그래서 존경했고, 그래서 사랑하게 됐어요.”

그러나 울지 않기란 불가능했다. 믿을 수 없는 자백을 들은 사람처럼 얼떨떨해진 표정의 이해성이 제 몸에서 최홍서를 천천히 떼어냈다.

최홍서의 속눈썹에서, 눈꼬리에서, 눈물이 흐르기가 무섭게 이해성은 그것을 재빨리 지워냈다. 최홍서의 눈물이 바닥으로 추락하면, 지금 손에 넣은 것들이 전부 부서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해성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있었지만, 그는 결코 그것이 흘러내리도록 하지 않았다.

“나는, 홍서가 나를 그렇게 사랑해 주는 사람이라서 사랑했어.”

“......”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고, 어려운 수업을 들은 아이처럼 올려다보는 연인의 얼굴을 보며 이해성은 최선을 다해 웃어 보였다. 눈물의 물기에 젖어 반들거리는 입술을 엄지로 훑으면서 다른 손가락으로는 뺨 위를 쓰다듬었다.

“약속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제 그만 울어야지. 젖은 타월로 얼굴 좀 씻어 줄게. 이리 와.”

이해성은 최홍서를 욕실로 데려가려 손을 이끌었고, 최홍서는 이해성의 허리를 안고 매달렸다. 대체로 말 잘 듣는 아이인 최홍서에게는 아주 드문 일이었다.

“떨어지기 싫어? 그럼, 물 줄까? 물 좀 마시자.”

“호텔 떠나기 전에, 내 방에서 마지막으로 했던 일이... 이 향수를 뿌린 거였어요.”

허리에 최홍서를 매단 채로 미니바의 생수를 잡으러 가려던 이해성은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아저씨 향기가 나서... 우리가 함께 있는 것 같아서, 나 괜찮았어요. 그러니까... 내가 얼마나 무서웠을지, 그런 생각 하면서 아프지 마요.”

최홍서는 이해성이 말했던 ‘여한’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투신하기 전, 제 손으로 고발했던 명도훈은 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었다. 눈물 속에서 하나하나 제 손으로 삭제해야만 했던 이해성이 빌려주었던 카메라 속 사진들은 전부 복구되어 ‘람파스’의 사진전 <컴백>을 장식했다. 자신을 기어코 죽음까지 몰아붙였던 이서경은 ‘누군가’에 의해 피살되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윤혜안으로 깨어나 좁은 오피스텔로 거처를 옮기고, 그곳에 마련했던 성전에는 이해성이 선물해 줬던 오리지널 포스터 대신 조잡한 모조품들을 들여놨었다. 그 옆에는 이해성이 최홍서에게 선물했던 향수 대신 다른 향수를 채운 병이 있었다.

지금의 나는 가짜. 짝퉁.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다시 최홍서로서 사랑받으면서, 그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그 집의 서재에는 그가 선물했던 오리지널 영화 포스터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고, 이제 병만 똑같은 ‘가짜’가 아닌, 최홍서에게 주었던 것과 똑같은 향수가 제 손에 있었다.

여한이 없었다.

남은 한은 없으나, 기원하는 소망은 있었다.

이 사람이 더는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사람이 아프지 않다는 확신만 있다면, 그것을 위해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었다. 모든 여한을 씻어내 준 사람이 아닌가.

“안 돼, 홍서야. 이렇게 하다가 너 또 아플 수 있어. 우리 지금은 그런 생각 하지 말자.”

“아저씨... 사랑해요. 정말이에요.”

“나도 정말 사랑해. 왜 내가 믿지 않을 거란 듯이 얘기해. 응?”

매달려있는 최홍서의 뺨을 두 손 안에 가둔 이해성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얼굴을 코앞에 들이밀었다.

“지금 우리 이렇게 서로 안고 있잖아, 홍서야. 예전 일은 그만 생각해. 자, 나 봐. 내 생각만 해. 그래야 안 아파.”

여전히 눈꼬리에 눈물을 매단 채로 그의 눈에 집중하려 했다. 애쓸 것도 없이 눈앞의 세계에는 온통 이해성뿐이었다.

“최홍서가, 네가 누굴 사랑해?”

“...이해성.”

따뜻한 미소와 입맞춤이라는 부상이 뒤따랐다. 그리고 단단한 포옹까지.

“그래, 잘했어. 착하다, 우리 홍서. 너무 잘했어.”

그것만 생각하면 되는 거야. 지금부터 우리는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 안 하기로 하는 거야. 우리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것만 생각하기로. 그것을 지지하는 쪽을 선으로, 그것을 방해하는 쪽은 전부 악으로 규정하는 거야.

그의 속삭임이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환청 같았다.

“객실로? 음...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이해성은 4인용 소파에 반쯤 길게 누워있었다. 그 몸 위에 엎드린 최홍서는 이해성의 니트 옆구리 부근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런 최홍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기도 하고, 손가락 사이에서 비비기도 하면서, 이해성은 사촌 동생과 통화 중이었다.

“그래, 그럼. 어차피 30분 정도는 나 혼자 있을 것 같으니까.”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듣는 목소리의 울림이 좋았다. 힘찬 심장박동도. 그의 몸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통화를 끝낸 이해성이 고개를 숙여 최홍서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그 사촌 동생분이 인사하러 오신대요?”

“일부러 따로 말 안 하고 왔는데, 그 녀석한테 얘기가 들어갔나 봐.”

이해성이 말하는 그 사촌 동생이라면, 정지인의 연인이었다. 이해성에게 들어서 이제는 최홍서도 알고 있었다.

“홍서는? 좀 진정됐어?”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은 다른 날로 다시 잡아도 돼.”

“향수, 흠, 향수 때문에 갑자기 감정적으로 돼서... 그랬던 거예요.”

감정을 마구 분출했던 순간이 겸연쩍었다. 갈라진 목소리를 헛기침으로 바로잡으며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켰다. 뒤따라 일어난 이해성이 식탁 위를 가리키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향수 다 버려야겠다. 우리 홍서 이렇게 울게 만들고.”

어린아이를 울게 만든 죄 없는 돌부리나 책상 모서리를 혼내는 것 같은 어투였다. 말만 그렇게 할 뿐 진짜 그럴 생각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최홍서는 슬그머니 일어나 식탁 의자 위에 두었던 가방 안에 향수를 챙겨 넣었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몰래 웃고 있던 이해성이 최홍서를 배웅하기 위해 소파에서 일어났다. 헛기침으로 웃음기를 지워내면서.

“둘이 우선 얘기하고 난 뒤에 전화 줘. 바로 내려갈 테니까.”

“그럴게요.”

“걱정 안 시킬 거지?”

“네.”

고개를 끄덕이며 야무지게 대답하는 얼굴을 한 번 더 엄지로 살살 문지르면서 이해성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해성의 사촌 동생이자, 정지인의 연인이 도착한 것은 최홍서가 객실을 막 떠나려 할 때였다. 세 사람은 현관 안쪽에서 짧게 인사를 나눴다. 이해성과 그의 사촌 동생만으로도 결코 좁지 않은 복도가 꽉 차는 느낌이었다. 신장과 체격, 남성적인 미남형의 얼굴은 사촌이라 해도 상당히 닮아 보였다. 오히려 이서경이 이 둘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겼었다. 이들에 비하면 좀 더 마르고, 더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인...

“혜안 씨, 몇 번 얘기했던 사촌 동생, 기억하죠? 녹스 호텔의 팀장... 아, 전무로 승진한 게 언제인데. 자꾸 실수하네.”

이서경을 떠올리자마자 속이 거북해지려던 최홍서는 다정하게 등을 만지는 이해성의 손길에 정신을 가다듬고, 눈 앞의 남자, 자신의 연인만큼이나 커다란 남자를 쳐다보았다.

“입에 안 붙어서 그렇죠, 뭐. 반갑습니다, 이한입니다.”

“안녕하세요. 윤혜안입니다.”

악수를 하는 손의 모양이나 크기도 이해성과 닮은 꼴이었다.

이 사람이 지인이 형의 연인. 그리고 이서경의 동생.

“형님하고는 이번 영화 같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크림 맨션> 출연 배우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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