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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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첫눈이 늦을 거라던 뉴스는 사실이었다.
습한 안개가 서울을 감싸고, 어제부터 시작된 가는 비가 종일 부슬거렸다. 저녁 무렵인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한서 그룹 계열의 녹스 호텔.
오늘 저녁 이 호텔의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박동하와 만나기로 약속했고, 이해성과 최홍서는 하루 일찍 도착해 느긋하게 둘만의 시간을 즐겼다.
높은 지대에 지어져 저층에서도 시원한 전망을 자랑하는 호텔이었지만, 안개와 비 때문에 바로 아래 호텔의 정원이나 겨우 보일 뿐이었다.
객실 창가에 선 최홍서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호텔을 떠올렸다. 생을 마감했던 태국 방콕으로 옮겨가기 전 머물렀던 곳이 자카르타였다. 그곳 객실에서 바라보았던 자카르타의 도시 풍경도 이렇게 안개로 인해 흐릿하게 번져 있었고, 그곳에서 이미 최홍서는 스스로의 결말을 어느 정도 각오하기 시작했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X군 스캔들’이 빠르게 확산되고, 아이돌 출신 배우이자 최홍서와도 아는 사이였던 고지운이 X군으로 몰렸었다. 자택에서 자살을 시도했던 고지운은 당시 병원에서 회복 중이었고, 이제 대중은 다음 X군을 찾아 사냥을 시작할 참이었다.
악의적으로, 특정인에게 불리하도록, 진실이 거세되고 재편집된 그 ‘X군 스캔들’의 출처는 물론 이서경이었다. 이서경이 최홍서에게 보낸 경고장이었던 것이다.
피고름으로만 꽉 찬 과거는 이해성까지 고통스럽게 만들 게 뻔했다. 그 과거를 책임지고 정리해 달라고 그의 권력 뒤에 숨을 것인지, 자신이 굴복하고 말 것이라 생각하며 입 안에 떨어지기만을 기대하고 있는 이서경에게 최소한 한 방을 먹일 것인지. 최홍서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저항의 방식은 한정적이었다.
“밖에 뭐가 보이나? 안개 때문에 뷰가 별로지?”
뒤쪽에서 들려온 이해성의 다정한 목소리에 최홍서는 몸을 돌려세웠다. 옷을 다 갖춰 입은 이해성이 드레스룸에서 막 빠져나오고 있었다.
브이넥 니트 안에 옅은 푸른색 셔츠를 받쳐 입은 그는 손목시계의 스트랩을 조정하면서 복도를 걸어왔다. 단정하지만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지는 않은 편안한 모습이었다. 바꿔 말하면, 지나치게 격식을 차리지 않고도 몸에 밴 품위와 정돈된 행동거지 덕분에 모든 움직임이 아름다워 보였다.
그의 말대로였다.
이목구비, 팔다리, 체형. 육체 자체의 아름다움보다 더욱 고유한 것은 그 육체를 다루고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그가 젓가락질하는 법, 운전하는 법, 일 관계로 통화할 때면 단호한 내용을 부드럽게 전달하는 화법, 그리고 지금 이렇게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걸음걸이까지. 이해성이 존재하는 모든 방식을 사랑했다.
“왜 그래? 빤히 보기만 하고.”
“멋있어서요. 그래서 열심히 봤어요.”
“음... 이런 칭찬에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좋아하는 사람이 말해 주니까 새삼 쑥스럽네?”
“아저씨 진짜 멋있어요. 슈트 입고 있을 때도, 이렇게 입고 있을 때도, 집에서 더 편하게 입고 있을 때도...”
“아무것도 안 입고 있을 때도?”
“......”
이해성이 최홍서의 등허리를 감아 당기면서 은근한 장난기를 담아 물었다. 맞닿은 하반신으로 서로를 느끼는 것은 언제든 짜릿했다. 어제 오후 객실에 체크인한 후, 꼬박 하루를 이곳에서 단둘이 있으면서 충분히 서로를 만지고 맛보고 느꼈음에도, 맞닿는 순간에 피어오르는 열정은 매번 새로웠다.
“아무것도 안 입고 있을 때가 제일 멋있는 것 같기도 해요.”
“호오...”
이런 대답을 들려줄 줄은 몰랐다고, 이해성이 눈을 크게 뜨면서 즐거워했다. 마냥 어린애로만 알았던 상대에게서 예상치 못하게 맹랑한 답변을 듣고 즐거워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는 품 안의 연인을 내려다보며 코끝을 가볍게 흔들었다.
“나도 한다면 해요. 딱 그런 얼굴이네?”
손을 놓은 자리에, 그는 이번엔 입을 맞추었다. 약간은 거칠고 따뜻한 입술이 코끝을 살짝 뭉개듯 힘을 주었다. 인중으로 내려간 입술이 최홍서의 윗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입술은 다른 피부보다도 더 따뜻했다. 그 온기에 노곤하게 녹아내릴 듯했다. 최홍서는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어떤 바람에도 흔들림 없는, 넓고 깊게 뿌리를 내린 밑동 굵은 나무를 껴안는 것처럼 안심이 되는 포옹이었다. 좀 더 내밀하게 겹쳐지는 키스를 기대하며 입술을 벌린 순간, 벨 소리가 두 사람을 방해했다.
“아... 부탁해둔 게 왔나 보네.”
딥 키스 대신 짧은 입맞춤으로 마무리하면서, 이해성은 명백히 아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출입문을 향해 가면서 이쪽을 돌아본 얼굴은 또 금세 설레 보였다.
언뜻 보이는 방문자는 호텔리어가 아닌 이해성의 수행원이었다. 거실로 돌아오는 이해성은 잘 포장된 작은 상자를 하나 들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라고, 그는 식탁 앞에 서면서 작은 상자를 눈높이로 들어 보였다.
“그게 뭔데요.”
“풀어봐.”
버석거리는 포장지를 반쯤 벗겼을 때부터 최홍서의 손과 호흡이 떨렸다. 이해성은 그런 최홍서의 등 뒤로 다가가 아랫배를 느슨하게 감싸 안아주었다.
“홍서가 분당으로 들어올 때 벌써 주문해 뒀었는데, 오더메이드라 이제 도착했어. 제조 방식이 까다롭거든.”
최홍서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비비면서 그가 비밀처럼 낮게 속삭였다.
아무것도 써 있지 않은 심플한 상자 안에 든 것은 향수였다.
이해성이 특별히 주문해서 사용하는, 누구와도 겹치지 않는 고유의 향기. 소월로를 함께 걸었던 첫 데이트에서 최홍서가 이해성의 향기로 처음 인식한 향이기도 했고, 첫 잠자리를 하고 난 뒤 이해성이 선물한 향수이기도 했다. 이해성과 최홍서만이 공유하는 향기.
쉽게 상자를 열어보지 못하고 말을 잃은 최홍서를 대신해 이해성이 나섰다.
“알아. 내가 똑같은 병에 다른 향수를 선물하면서 심술부렸었지.”
최홍서의 몸을 힘주어 한 번 안았다 놔준 이해성은 곁으로 다가와 상자를 개봉했다.
그는 ‘윤혜안’의 생일파티를 얘기하고 있었다. 개별 휴게실로 ‘윤혜안’을 데려간 이해성은 이 향수를 선물했었다. 아니, 이 향수와 병만 같은 다른 향수를.
“반응을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어.”
“......”
“그때 이미 조금씩, 윤혜안을 의심하는 단계를 지나고 있었으니까.”
“어떤... 단계로요?”
“윤혜안은 최홍서와 인연도 없었고, 우리 둘만의 일들은 어딘가에서 기록으로 봤다고 해도 최홍서의 말투까지 알 수는 없을 텐데. 수집한 정보를 가지고 흉내를 낸다고 해서 이런 게 가능한가? 그런... 답이 없는 혼란.”
향수를 상자에서 꺼낸 이해성은 최홍서가 입고 있는 검은색 니트의 소매를 살짝 걷었다.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둔 채 최홍서는 그의 옆얼굴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6번이라고 했던 거네요. 있을 수가 없는 일이어서.”
“그래. 선택지는 분명 5번까지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중엔 답이 없잖아? 평소의 나는 절대 선택지 밖의 답을 고르지 않는 사람이지만...”
말을 멈춘 이해성은 잠시 호흡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식탁 앞에 나란히 선 최홍서를 돌아보며 눈을 맞췄다. 놓치기 쉬운 옅은 미소와 함께 그가 말했다.
“6번을 선택했고, 그게 정답이었지.”
걷은 소매 아래 드러난 최홍서의 손목을 향해 향수가 분사되었다. 손목 안쪽이 아닌 바깥쪽에. 분사하는 그 순간, 곧바로 후각을 점령한 향기는 순식간에 최홍서의 기억과 감정으로 퍼져나갔다. 향기는 이해성, 그리고 이해성과의 모든 기억, 그 자체였다. 들썽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알아요. 아저씨가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인 거 너무 잘 알아요. 그래서... 기대 못 했어요.”
“똑같은 병에 다른 향수를 선물해서 내가 미웠어? 잔인했지?”
최홍서는 오른쪽 손목을 들어 좀 더 가까이에서 향기를 들이마시며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잔인하다니, 결코 그렇지 않았다. 곁에 선 이해성이 최홍서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귀 뒤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정말 안 섭섭했어? 향수 냄새가 다르단 걸 안 순간 홍서... 표정을 못 숨기던데?”
“마음은 좀 아프긴 했는데. 아저씨가 나한테 그러는 게 아니라 윤혜안한테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 안 미워하려고 노력한 거야?”
이해성은 최홍서의 어깨를 돌려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미안함과 행복함이 교차하는 복잡한 얼굴이 최홍서를 내려다보았다.
“안 미워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해성은 확신을 가지고 또박또박 그렇게 얘기하는 연인의 눈을 잠시 그대로 바라보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해성을 사랑하는 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고, 그것만큼은 자신 있다는 듯 얘기하는 최홍서의 눈에는 한 점의 의혹도 없었다.
하아. 달콤한 한숨 끝에 이해성이 최홍서의 어깨를 당겨 가슴에 안았다. 서로의 귀와 뺨을 마주 댄 채로 이해성은 품 안의 몸을 몇 번이나 고쳐 안았다.
“미워하지 않기만 해?”
최홍서가 열없이 웃으며 이해성의 등에 마주 팔을 둘렀다.
“좋아해요. 사랑도...하고. 많이.”
“음.”
힘주는 소리와 함께 그가 으스러뜨릴 듯 최홍서를 꽉 안았다. 어깨와 가슴의 뼈가 뻑적지근해질 정도의 힘이었다. 이런 힘에 의해 붙잡힌다면, 사라질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의 힘.
“병이 같고 내용물은 다른 향수. 병은 달라도 내용물은 똑같은 이 향수. 홍서는 어떤 게 더 좋아?”
“당연히 이 향수가 좋아요. 이게 좋아요.”
“그거야, 홍서야. 나도 그래.”
“뭐가요?”
“용기(容器)가 중요한 게 아니라, 향이 중요하다고. 겉모습이 아니라, 그 안에 든 향기가 너야.”
“아...”
구겨지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그의 니트를 손안에 그러쥐며 눈을 감았다. 목덜미와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저씨.”
“응.”
“해성 씨.”
“...응.”
이번에는 낮은 웃음소리 뒤에 대답이 따라왔다.
“해외 스케줄에서 좋은 호텔에 좋은 객실 잡아줬던 거, 아저씨였죠?”
“......”
한순간 그의 몸이 경직됐다. 지금 말하는 ‘해외 스케줄’이 죽음 이전을 얘기하고 있음을 알아챈 것이다. 곧 나직한 한숨이 들려오고, 커다란 손이 최홍서의 뒤통수를 천천히 쓰다듬어주었다.
“그런 것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그런 것밖에라고 하지 마요. 날 그렇게 대해준 사람, 아저씨뿐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