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컴백 (163)화 (163/185)
  • 163화

    이해성이 붙여준 경호원은 지하 주차장이 아닌 건물 앞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최홍서는 호텔 같은 오피스텔 로비를 지나 정문을 빠져나갔다.

    하아.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자 하얀 입김 끝에 그의 모습이 보였다.

    “......”

    대기하고 있어야 할 RV카는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이해성의 세단이 세워져 있었다. 코트도 걸치지 않은 니트 차림의 이해성이 세단에 기대있던 몸을 세우면서 두 팔을 살짝 벌려 보였다. 그의 미소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도 최홍서는 크로스백의 끈을 쥔 채 그의 앞으로 타박타박 걸어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진해졌다. 가방끈을 쥔 채로 얌전히 그의 가슴 앞에 자신을 대령했다. 스니커즈를 신은 최홍서의 두 발이 이해성의 깔끔한 로퍼 사이에서 멈췄다. 일요일이라 그의 옷차림이 전반적으로 캐주얼했다.

    음. 힘을 주는 소리와 함께 이해성이 자신의 연인을 꽉 껴안았다. 며칠이나 못 봐 그리웠던 것처럼.

    “차에 타서 해요.”

    그의 어깨에 입술을 묻은 채로 소곤거리자, “그 말, 괜히 야한데?”라는 반응이 돌아왔다. 연인을 품에서 놔준 이해성은 아쉬운 얼굴을 하면서도 순순히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세단은 박동하의 오피스텔 앞을 벗어나 금세 영동대로로 섞여 들어갔다.

    “뒤풀이에 안 가셨어요?”

    “아... 누구 씨가 없는 뒤풀이는 지루해서. 지루한 거 잘 못 참는 거 알잖아.”

    “집에서 기다리고 있죠, 왜.”

    “마침 딱 귀가하는 길에 그 오피스텔이 있어서 들러봤지. 그리고 가끔은 홍서 경호팀도 일찍 퇴근시켜 줘야 좋아할 거고.”

    이해성은 제대로 된 답변을 주지 않고 장난스럽게 받아치기만 했다. 하지만 최홍서는 이유를 짐작했다.

    갑자기 또 식은땀을 흘리면서 쓰러질까 봐, 반점의 개수가 더 늘어날까 봐, 최홍서의 혼이 윤혜안의 육체를 떠나버리는 끔찍한 일이 일어날까 봐. 아무리 경호원과 함께 있다 해도, 이해성은 자신이 없는 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겁내고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혹시 잠깐 눈을 뗀 사이, 최홍서가 무당을 찾아갈까 봐.

    이해성은 경호원을 붙인 것만으로는 점점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집에서조차 서로 다른 공간에 있는 것을 오래 견디지 못했다. 눈앞에 최홍서가 있고, 함께 있다고 해서 온전히 안심하는 것도 아니었다.

    믿지 못하는 불신과는 달랐다. 불신이 아니라, 불안이었다. 그는 병적인 극도의 불안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애써 꾸민 장난스러운 대화와 미소로 최홍서 앞에서는 그것을 감추려 노력할 뿐.

    “기다리고 있었다고 뿔난 거야?”

    신호 대기에 차를 멈춰놓은 이해성이 물끄러미 자신을 보는 시선을 자각하고는 이쪽을 보았다. 그리고 최홍서의 후드를 꾹꾹 잡아당기며 장난을 걸었다. 최홍서는 고개를 저었다.

    “기다려 줬는데 왜 뿔이 나요.”

    후드를 당기던 이해성의 손이 이번에는 최홍서의 뺨을 넓게 감쌌다. 그의 커다란 손은 늘 뺨을 벗어나 귓가를 건드렸다. 귀를 하나 새로 빚어내듯 귓바퀴와 귓불을 가만가만 문지르는 손길에, 갑갑하게 뭉쳐있던 속이 조금은 풀어지는 듯했다. 좋은 향기가 풍기는 그의 손목 안쪽에 얼굴을 비비자, 듣기 좋은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는 놀란 토끼처럼 빨개지더니. 지금은 좋아하네?”

    “아저씨 아까 일부러...!”

    대본 스터디 전, 복도에서 뻔히 박동하가 보는 앞에서 귓불을 만졌던 일이 떠올랐다. 그 일을 좀 이해성에게 따지려고 발끈했던 최홍서는 순간 말을 끊고 두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신장에 비례해 커다란 손은 두께도 상당했다. 그가 완전히 힘을 빼고 있을 때는 두 손으로 붙잡아야 할 만큼 묵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길고 곧은 손가락과 전체적으로 미끈하게 빠진 조형미 때문에 조금도 투박해 보이지 않았다. 모양 좋고 큼직한 손톱은 끝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이해성의 머리카락 한 올, 슈트와 셔츠, 넥타이의 조화, 손톱까지도 ARA 그룹의 이미지로서 세심하게 관리되었다. 거스러미가 일어나거나 조금이라도 손톱 끝이 자란 상태는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걸어 다니는 ARA 그룹의 광고판이었으니까.

    최초의 목적도 잊은 채 그의 손을 이리저리 감상하던 최홍서는 곧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킁킁. 킁킁. 주로 손끝에 코를 대고 여러 번 냄새를 맡았다. 이해성은 어깨까지 떨면서 아주 즐거워했다.

    “뭐 하는 거야? 귀엽게. 티파니 흉내인가? 홍서도 턱 쓰다듬어 줄까?”

    “아저씨 담배 피우셨어요?”

    “아...”

    즐거워하던 그의 얼굴에서 순간 웃음이 사라졌다. 아... 눈을 굴리며 시선을 피하던 그는 바뀐 신호를 따라 차를 출발시켰다.

    “30분 전에. 손도 씻고 가글도 했는데. 냄새 역한가?”

    핸들을 잡고 있던 손을 들어 손끝의 냄새를 맡아보는 그는 순간적으로 평범한 남자 같았다. 담배를 끊은 걸로 알고 있는 연인에게 흡연의 흔적을 들키고는 멋쩍어하는, 그런 평범한 남자의 평범한 연애 일상. 그가 타고 있는 차나 그의 외모 등은 차치하고.

    “아니요, 그래서 말한 건 아니고...”

    “다시 손을 댔더니 되돌리기가 쉽지 않네. 끊을게. 응?”

    “너무 스트레스받는 것보다는 피우고 싶을 때는 피우면서 점점 줄여가는 게 나아요.”

    “잘 아네. 홍서도 피우다가 끊은 건가?”

    최홍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쪽엔 원래부터 호기심이 별로 없어서. 끊으려고 하는 주변 사람들 보니까 그렇더라구요.”

    “홍서 성격에 데뷔 준비하면서부터는 더더욱 멀리했겠네.”

    “잔소리하려던 건 아니에요. 건강을 위해서 안 피우셨으면 한 거지, 피우는 게 딱히 싫은 것도 아니고.”

    이해성은 운전하는 중간중간 이쪽을 향해 웃어 보였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는 의미의 미소였다.

    “그리고, 다시 피우는 거 이미 들키셨잖아요.”

    “음? 언제? 아... 그때.”

    이해성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약간은 씁쓸하게, 어둡게 웃었다. ‘윤혜안’이 최홍서라는 걸 아직 확신하지 못했던 당시. 그의 제안으로 ‘상담’을 받고, 호텔에서 함께 나와 집까지 데려다주던 자동차 안에서 이해성은 담배를 피웠었다. 어렵게 끊었다고 얘기했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는 모습에 가슴이 찢기는 듯했었다. 왜 다시 담배를 쥘 수밖에 없었는지, ‘윤혜안’ 모습 속의 최홍서는 알고 있었으니까.

    “진짜였네.”

    “뭐가요.”

    “내가 왜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됐는지, 윤혜안 씨는 그것도 다 알 것 같다고. 내가 그랬었잖아.”

    “......”

    “다 알았겠구나.”

    최홍서는 그의 옆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단단해 보이는 그의 얼굴 위를 뒤덮은 감정의 일렁거림을 놓치지 않고 전부 눈에 담았다. 이렇게 함께 있는 ‘평범한 연애 일상’이 자신들에게는 전혀 평범하지도 않고, 일상도 아니라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될 수 있는 한, 그를 더 많이 봐두고 싶었다.

    “왜 다시 피우는지 다 아니까... 굳이 담배 얘기를 꺼냈던 거야.”

    또 한 번 신호에 멈춰 선 이해성은 혼잣말하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천천히 최홍서를 돌아본 그의 얼굴은 격렬한 감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눈앞의 연인을 알아보기까지, 믿기 힘든 어려운 과정들이 그의 내면에서 되살아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몰래 피우지 마세요. 차라리 내 앞에서 피워요.”

    감정의 격랑 속에서 조금이라도 그를 구해내기 위해 최홍서는 웃어 보였다.

    “그래도... 천천히라도 좋으니까 꼭 끊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허벅지 위에 힘없이 툭 늘어뜨려져 있던 이해성의 손이 다가와 최홍서의 손등을 덮었다. 그저 손을 잡으려는가 싶었는데, 그는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끊으라시면 끊어야죠. 누구 말씀이라고.”

    그의 농담에 최홍서도 웃음으로 마주했다. 새끼손가락으로만 연결되어있는 그 고리가 너무 약해 보여서, 손가락을 건 채로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신호가 바뀌었지만, 이해성은 최홍서에게 붙들린 오른손은 그대로 두고 차를 출발시켰다.

    “차라리 내 앞에서 피우라고 할 때. 설레던데? 그런 박력이 다 있었네, 우리 애기가.”

    “절 애기로 보는 사람 아저씨밖에 없어요.”

    “홍서도 열두 살 연하는 애기로 보일걸.”

    그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열두 살 차이인 것도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젠 한 살 더 벌어졌잖아. 한층 더 심한 도둑놈이 돼버렸어.”

    이해성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최홍서가 살아있었다면 스물여덟 살이 됐겠지만, 윤혜안은 지금 스물일곱. 마흔인 그와는 열세 살 차이였다.

    “도둑놈 아니에요. 그때도 지금도, 아저씨가 나한테서 뭘 훔쳐 간 건 하나도 없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제가 도둑이죠. 그렇게 덧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를 속상하게 만들 뿐일 것 같아서.

    “날 그렇게 봐줘서 고맙긴 한데... 홍서 시간 좀 훔쳐도 될까?”

    “데이트하기엔 좀 늦지 않았어요? 내일 월요일인데.”

    “데이트긴 데이트인데, 좀 긴 데이트. 당분간 출근 안 하거든.”

    “출근을... 안 해요?”

    “서준영 씨 덕분에 크랭크인도 연기됐고, 홍서랑 여행 다녀오고 싶어서 휴가 냈어.”

    “그래도 되는 거예요?”

    “그래도 되지. 뭐, 여행 가서도 틈틈이 업무 처리는 해야겠지만.”

    “서준영 선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미국 미네소타주에 있는 클리닉에 홍서 검진을 예약해 놨어.”

    서준영 얘기 따위에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듯, 혹은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듯. 이해성은 홍서의 말을 가로챘다. 그의 목소리가 경직되어 있어서 최홍서도 서준영 얘기를 다시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미국 내에서도, 세계적으로도, 일류로 꼽히는 병원이야. 그곳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검사는 전부 진행할 거야.”

    무엇이 목적인 여행인지 알 것 같았다. 최홍서는 붙잡고 있던 이해성의 손을 저도 모르게 더 꽉 쥐었다.

    “방법 꼭 찾겠다고 약속했잖아.”

    이해성도 마주 힘을 주었다.

    “그쪽에선 분명 뭔가를 알아낼 거야. 그 반점도 어떻게든 해줄 거고. 한국 의학 수준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본 거니까.”

    최홍서는 아직 카디건 주머니에 들어있는 무당 이종익의 명함을 떠올렸다. 의학이나 과학 같은, 검증된 체계와 이치의 힘으로 일을 해결하고 싶어 하는 이해성의 심정을 알지만... 의식 불명으로 숨만 쉬고 있던 사람의 몸에서 다른 이의 혼이 깨어난 그 자체가 체계나 이치로 설명될 수 없는 일종의 오류였다. 이치의 외부에서 일어난 오류를 이치로 바로잡을 수가 있을까.

    “아저씨.”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살피는 검진이라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그래도 검진일 뿐이야. 불안해할 거 없어. 내가 계속 같이 있을 거야. 응?”

    그때 그 무당을 한 번만 더 찾아가 보면 안 되냐고. 그렇게 물으려던 최홍서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리고 씩씩해 보이는 얼굴로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우리 언제 출발해요?”

    “일주일 뒤 출국이야.”

    “그럼, 미국 가기 전에 한 가지만 부탁이 있어요.”

    약속대로 박동하에게 이해성을 소개하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박동하가 원한 ‘그런 소개’가 되게 할 수는 없었다. 이해성을 그런 자리에 내보낼 생각도 없었고, 그럴 생각이 없는 이해성을 내보내 박동하를 속일 생각도 없었다.

    좀처럼 어리광 부리는 일이 없는 연인의 부탁이 무엇일지 궁금해하며 이해성은 조수석을 힐긋거렸다. 일요일 늦은 밤. 분당으로 이어지는 도시 고속화 도로는 시원하게 뚫려 있었다. 20분 이내에 목적지에 도착하겠지만 그 정도면 시간은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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