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그럼 나, 부사장님한테 소개해 줘.”
“......”
이번에는 최홍서가 말을 잃었다. 박동하가 이해성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꽤 예전부터 어렴풋이 짐작했다. 오늘 이렇게 얽힌 감정을 풀어보려고 온 자리에서 그를 소개해 달라고, 정면으로 요구받을 줄은 몰랐지만.
“아무 사이도 아니라며. 소개 못 해줄 이유 없잖아.”
“너도 부사장님 이미 알고 있잖아. 대본 스터디에서 늘 만나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소개.”
독기가 느껴지는 박동하의 표정을 마주하고 있던 최홍서는 더듬더듬 테이블 위의 맥주를 집어 들었다. 박동하가 코웃음을 치는 소리가 차가웠다.
“옷도 가방도, 취향 다 바뀌었네?”
갑작스럽게 대화의 방향을 트는 박동하의 말에 최홍서는 마시던 맥주를 내려놓았다. 박동하가 최홍서의 옷차림을 찬찬히 훑어 내려갔다. 베벌리힐스의 편집숍에서 구입한 바지와 카디건, 그리고 이해성의 스타일리스트가 엄선해서 보낸 후드 티셔츠와 가방은 모두 살짝 낙낙한 오버사이즈에 요란한 무늬 없이 담백한 컬러와 디자인을 가지고 있었다.
“명품 아니면 유명 디자이너 제품인 건 똑같지만.”
이해성의 개인 스타일리스트는 이제 자신의 고객이 선물하고 싶어 하는 ‘익명의 VIP’의 취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익명의 VIP’의 취향에 부합하는 상품을 발견할 때마다 분당으로 보내왔다. 그런 물건들은 최홍서도 모르는 사이, 포장이 개봉되고 태그가 제거된 채로 세탁되어 3층 드레스룸에 몰래 침투했다. 마치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이거, 아저씨 스타일리스트분이 또 보내신 거예요?’
최홍서가 그렇게 물을 때마다 이해성은 늘 똑같이 둘러댔다.
‘LA에서 사 왔던 거 아닌가? 그때 워낙 많이 샀잖아. 그래서 네가 기억 못 하나 보지.’
옷과 가방, 신발 따위가 저희들끼리 번식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할 정도로 드레스룸이 채워지고 있었지만, 최홍서는 가볍게 한숨을 쉴 뿐 그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그의 즐거움인 것 같았으니까.
“원래는 더 대놓고 로고 플레이하는 게 형 취향이었잖아. 누가 봐도 명품이구나 딱 티 나는 거. 아... 옷 입는 취향도 부사장님한테 다 맞춘 거야?”
조리대를 사이에 두고 주방 안쪽에 선 박동하가 입술 한쪽을 끌어 올리며 이죽거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윤혜안’의 취향이 예전과 달라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박동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최홍서였으니까.
“부사장님 취향은...”
최홍서의 입술이 달싹거리자, 박동하는 눈을 가늘게 뜬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이쪽에 집중했다.
“아마 이런 옷이 아닐 거야.”
딱 한 번 보았던 이해성의 전 남친 중의 한 사람을 떠올리면서, 최홍서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모르긴 몰라도, 자신보다는 그 남자가 이해성의 원래 취향에 더 가까울 것이다.
키가 훌쩍 크고 늘씬하면서도 다부진 체형에, 그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음을 한눈에 알 만큼 태도나 몸짓에서 우아함과 여유가 자연스레 드러나는 사람.
한때는 그 남자 때문에 깜짝 놀랄 정도의 질투심에 휩싸인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해성의 취향이 아닌데도 그의 관심과 애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더 안심하는 자신이 있었다.
취향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접근한 게 아니라, 최홍서라는 인간 자체에 끌렸다는 거니까.
“나, 부사장님 좋아해.”
“...뭐?”
한순간 혼자만의 생각에 깊이 빠져있던 최홍서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허벅지로 식탁을 치는 바람에 맥주캔이 쓰러지고 탄산이 섞인 누런 액체가 쏟아졌다. 재빨리 캔을 세워두고 식탁 위에 있던 티슈로 쏟아진 맥주를 훔쳐냈다.
이해성이 박동하를 좋아한다는 것도 아니고, 박동하가 일방적으로 그를 좋아한다고 말한 것뿐인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도 아니고, 그게 진심인지도 알 수 없는 건데. 그런데도 그의 일부를 누군가에게 뺏기기라도 한 듯 심하게 가슴이 벌렁거렸다.
“멋있잖아, 부사장님.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어. 다가가려고 열심히 노력했고. 근데...”
“......”
“부사장님은 형만 보시더라?”
쏟은 맥주를 전부 닦아낸 최홍서는 천천히 손을 멈췄다. 조리대 너머 박동하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싱크대에 기대서서 손톱을 잘근거리는 눈은 초점이 맞지 않았다. 그저 눈을 뜨고 있기만 할 뿐,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형을 싫어한다고 생각했을 때도, 생각해 보면 부사장님 관심은 형뿐이었어. 부사장님 같은 분이 누굴 싫어한다는 자체가 관심의 표현이었던 거겠지.”
남성을 연애 대상으로 두고 있는 사람이 이해성에게 흥미를 못 느낄 수가 있을까? 그의 지위나 재력, 남성적으로 아주 잘생긴 외모와 당당한 체격에서 풍기는 압박감이 부담스러울 수는 있어도 그에게 매력이 없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최홍서는 그렇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니 박동하가 이해성을 좋아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건 없었다.
하지만 진심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윤혜안’을 곤란하게 하기 위한, 혹은 본색을 드러내게 하기 위한 목적일 수도 있으니까.
한참 입술과 손톱을 씹어대던 박동하는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냈다. 소주잔도 아닌 물컵에 벌컥벌컥 소주를 따라서는 맥주라도 되는 것처럼 여러 모금을 들이켰다.
하아, 하... 잔을 내려놓은 녀석은 숨을 크게 들이쉬면서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냈다.
“부사장님은... 그거 할 때도 다정하셔?”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본 박동하의 눈에는 그사이 실핏줄이 터져 있었다.
“그런 분은 이상한 요구 같은 것도 안 하시겠지? 배우들한테도 항상 젠틀하시잖아. 서준영 선배야, 솔직히... 그 선배가 잘못한 건 맞으니까.”
어깨를 털며 피식 쓰게 웃은 박동하는 손에 쥔 잔에 남아있던 소주를 또 마구 들이켰다. 그러고는 천천히 식탁 쪽으로 걸어왔다. 취기인지 광기인지,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최홍서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거 할 때도, 진짜 그렇게... 쓰다듬어 주고 예뻐해 주셔? 오늘, 복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애인처럼?”
했던 말을 후회하는지,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린 박동하는 다시 이를 악문 것 같은 표정으로 최홍서를 보았다.
“형처럼 살았던 사람이 부사장님 같은 분을 만나는 건... 그건 진짜 아니잖아. 너무 불공평하잖아. 안 그래?”
탁. 거슬리는 소리가 날 만큼 박동하는 식탁 위에 거칠게 컵을 내려놓았다. 최홍서의 맞은편에 서서 식탁 가장자리에 구부정하게 손을 짚은 박동하는 도발하듯 피식거렸다.
“왜 그렇게 봐? 옛날처럼 따귀라도 때리게?”
따귀라는 말에 최홍서는 움찔했다.
“근데 어쩌나. 이제 나도 형이 그딴 식으로 나올 때마다 겁먹고 떨던 박동하가 아니거든. 아니, 아닐 수밖에 없게 됐거든.”
갑작스럽게 마구 삼켜댄 술 때문인지, 아니면 감정 때문인지, 순간적으로 박동하의 눈에 물기가 어린 것처럼 보였다. 눈가가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깐이었다. 곧 적대감을 채운 벌건 눈을 들어 ‘윤혜안’을 노려보았다.
“형한테 뭘 더 바라는 게 아니야. 나한테 보상하고 싶은 게 진심이라면, 그냥 식사 자리만 한번 마련해 주면 돼. 어려운 거 아니잖아.”
“알았어.”
“......알았다고?”
요구한 것은 본인이면서, 박동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순간적으로 몸을 뒤로 물렀다. 최홍서의 대답은 차분했다.
“부사장님하고 식사 자리만 만들어 주면 된다며. 해보겠다고.”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윤혜안’의 대답에도 박동하는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또 무슨 꿍꿍이냐는 듯 날카로운 시선으로 얼굴 곳곳을 찔러댔다.
니야. 냐아? 작은 울음소리에 박동하의 어깨너머를 건너보았다.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로미오가 뒤늦게 복도 쪽에서 나타났다.
“날짜랑 시간 정해지는 대로 연락 줄게. 그 정도는 네가 부사장님한테 맞춰야 할 거야. 그리고 이거.”
등 뒤로 둘러매고 있던 크로스백을 가슴 앞으로 돌린 최홍서는 팩에 넣은 작은 꾸러미를 꺼내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의자를 거쳐 식탁 위로 뛰어오른 로미오가 코와 주둥이를 가까이 대며 관심을 보였다.
“지난번에 네가 안 가져간 거. 당연히 다시 만든 거야. 로미오 한번 먹여 봐.”
가방의 지퍼를 닫은 최홍서는 맥주를 훔친 티슈를 쓰레기통에 넣고 거실을 빠져나갔다.
“너무 늦지 않았다면 ‘티탄’ 다시 해보자고 했지?”
운동화를 거의 다 신었을 때쯤, 등 뒤에서 박동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체를 세운 최홍서가 돌아봤을 때, 박동하는 원망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한 표정으로 입가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유감이지만, 너무 늦었어.”
한 자 한 자 씹어뱉듯 그렇게 얘기한 녀석은 방문객이 현관 밖으로 사라지는 것도 보지 않고 다시 복도 쪽으로 사라져버렸다.
박동하가 복도를 거의 다 지나 거실에 다다르자, 띠리링, 현관이 닫히고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멈춰 선 채로 박동하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꽉 쥔 두 주먹이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안 속아... 절대 안 속아. 윤혜안, 이번에는 네가 등신이 될 차례야.”
로미오가 이리저리 건드리고 있는 비닐 팩 꾸러미를 낚아챈 박동하는 그것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식탁에서 뛰어 내려온 로미오는 쓰레기통을 앞발로 긁으며 계속 울어댔다.
주방 조리대 위에 남아있던 소주병을 쥐고 컵에 따르면서, 박동하는 로미오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그만해, 로미오. 그건 못 먹는 거야. 윤혜안이 어떤 인간인지 몰라? 거기에 독을 넣고도 남을 인간이라고.”
그러나 녀석은 좀처럼 쓰레기통 앞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졸라댔다. 냐아, 냐아, 냐아.
“못 먹는 거라고 했지?!”
한 컵 가득 따른 소주마저 비워낸 박동하가 쓰레기통 쪽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가냘픈 울음소리가 그쳤다. 쓰레기통을 긁던 손톱 소리도 멈췄다.
박동하의 얼굴이 후회로 금세 흐려졌다. 무릎을 꿇고 앉아 로미오를 품에 안았다. 녀석이 좋아하는 부위를 쓰다듬어 주면서 몇 번이나 되풀이해 사과했다.
“미안... 미안해. 로미오. 미안해... 용서해 줄 거지?”
로미오가 다시 울음소리로 답했다. 녀석의 작은 얼굴에 마주 비비던 박동하의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나, 용서받을 수 있는 거지?”
박동하는 그 나약한 물기를 얼른 손등으로 훔쳐 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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