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차갑게 돌아서서 먼저 식당으로 들어가는 박동하를 바라보던 최홍서는 한숨을 쉬며 그 뒤를 따랐다. 이해성과 강 감독의 등장으로 수군거림은 중단되어 있었다.
총괄 PD가 심각한 얼굴로 강 감독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이해성은 다리를 겹쳐 꼬고 무릎 위에서 두 손을 깍지 낀 채 무표정한 얼굴로 중심에서 약간 벗어나 있었다. 바로 이 집의 2층 응접실에서 이루어졌던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오르게 하는 모습이었다. 액자 속 그림처럼 무기질 같아서, 어떤 감정도 속셈도 읽어낼 수가 없었던 VVIP. 큰 소리를 낼 필요도 없이 작은 목소리만으로도 사람들의 입을 다물어버리게 만들던.
아마도 그것이 이해성이 사람들을 대하는 기본 태도일 것이다. 장난스러운 모습이나, 늘 입가에 머물러있던 자상한 미소, 허물없이 구는 메신저 대화는 자기에게만 보여주는 특별한 예외라는 걸 알았다.
ARA의 이해성인 데다, 열두 살 연상. 이해성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이도 훨씬 많고, 덩치도 커다란 사람’.
그것만으로도 그는 최홍서에게 어려울 수밖에 없는 존재였기에, 이해성 나름대로 어렵지 않은 사람이 되어보려 애썼던 것이다.
그때는 미처 생각해 볼 여유도 없었지만, 지금은 안다. 이모티콘을 써가며 실없이 구는 메신저 한 줄조차도 그의 노력이고 배려고... 그리고, 최홍서의 마음을 얻으려는 적극적 대시였음을.
“주목 부탁드려요. 스터디를 시작하기 전에 오늘은 전달 사항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리운 회상에 빠져있던 최홍서의 의식이 현재로 끌려 나왔다. 총괄 PD가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끌고 있었다.
“이미 기사로 접하신 분들도 계실 텐데, 아쉽게도 서준영 배우께서 <크림 맨션>과 함께하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몇몇은 굳은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고, 몇몇은 입을 다문 채 시선을 떨어뜨렸으며, 또 다른 몇몇은 ‘결국 기사가 맞구나’ 싶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최홍서는... 이해성을 쳐다보았다.
언제부터 ‘윤혜안’을 보고 있었는지, 이쪽을 향하고 있던 그의 시선에 덜컥 붙잡혀버렸다. 한 교실 안에서 단체로 혼나던 중에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다 교사와 눈이 딱 마주친 것처럼 뜨끔했다. 겨우 눈이 마주친 것뿐인데, 혹시 누구 본 사람이 없는지 자기도 모르게 주변을 살피게 됐다.
아니, 겨우 눈이 마주친 것뿐이 아니다. 흥미가 있어서 일부러 빤히 보는구나. 이해성의 눈빛을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최홍서는 얼른 총괄 PD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감독님이나 제작사 측과 오래 논의한 끝에 내린 결정이구요... 갑작스러운 하차인 만큼 따로 인사드릴 자리를 갖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서준영 배우님께서 대신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준영 선배, 정말 인도로 가시는 건가요?”
서준영 기사에 가장 관심을 드러냈던 젊은 남자배우가 긴장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언제 돌아오시는데요?”
“저희가 서준영 씨 소속사가 아니라서 그런 자세한 부분까지는 모르겠네요. 더 궁금하신 부분은 개인적으로 직접 연락해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서준영이 갑자기 빠지게 되면서 안 그래도 처리해야 할 문제들이 많으니, 그런 시시한 질문으로 귀찮게 하지 말라는 투였다.
“배우분들도 아시다시피, 투자자분들도 감독님도, 저희 제작사에서도, <크림 맨션>에 거는 기대가 매우 큽니다. 모든 제작진과 배우들이 한뜻으로 힘을 합쳐야만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건, 네,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들 잘 아시리라 믿구요.”
총괄 PD의 발언에는 뼈가 있었다. 서준영은 한뜻으로 힘을 합치는 데에 방해가 되었기에 퇴출되었다는 의미를 은근하게 비치는 듯했다.
“자, 그래서 펫로스 증후군에 시달리는 의사 역할로 새로운 배우를 물색하게 됐습니다. 그때까지 대본 리딩과 크랭크인이 연기될 예정이에요.”
크랭크인이 연기된다는 얘기에 배우들은 다시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자, 오디션 당시 최종 후보에까지 올랐던 배우들 중에 선택하게 될 거라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구요. 크랭크인 연기로 발생되는 모든 비용은 이해성 부사장님께서 충당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이해성을 향했다. 차마 대놓고 쳐다보지는 못하고 곁눈질로 힐끔거렸다.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서준영은 이해성 눈 밖에 나서 잘린 게 확실하구나.
최홍서 역시 그런 의혹이 들기는 했다.
무릎 위에서 단정히 깍지 낀 채 혼자만의 상념에 잠겨 있는 것 같았던 이해성이 자기에게로 모이는 시선을 느꼈는지, 멈칫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좌중을 둘러보았다.
“왜요? 다들 서준영 씨를 인도로 보내버린 게 나라고 생각하시는 건가?”
당황스러울 만큼 직접적인 그의 발언에 사람들의 시선이 우왕좌왕 흩어졌다. 이해성은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한숨을 쉬었다. 억울함을 가볍게 호소하는 듯한 한숨이었다.
“그럼 적어도 이제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나진 않겠네요.”
오해를 사더라도, 그거라면 불만 없다고. 그렇게 잘라버리는 이해성의 발언은 더 큰 의혹을 남겼다.
최대 투자자를 험담했기 때문에 잘린 건지, 최홍서와 윤혜안을 싸잡아 걸레라고 떠들어댔기 때문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이해성과 강 감독의 심기를 계속 거슬러 왔던 행동들이 축적되어 만든 결과인지. 사람들은 궁금한 듯했다.
하지만 단 하나, 앞으로 <크림 맨션>의 현장에서 ‘윤혜안’을 건드릴 사람이 없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인도로 선교 활동을 가고 싶을 만큼 독실한 기독교 신자는 더 이상 없었으니까.
누가 볼까 봐 마음 졸이던 것도 잊고, 최홍서는 이해성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이번엔 이해성 쪽에서 눈을 맞추려 들지 않았다.
누가 재벌 3세 모범생이라고?
몇몇 배우들의 표정에서 그런 생각이 역력했다.
■
띠리링.
현관을 열어준 박동하는 손님을 맞이하지도 않고 먼저 등을 보이며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최홍서는 맥주 두 캔이 든 비닐봉투를 부스럭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이 집에서 이사 나갈 예정이라던 용재의 말대로, 이곳저곳에 박스가 널려 있었다. 지난번 방문 때와 달리 집안이 영 어수선했다. 단지 이사를 앞두고 있어서가 아니라, 어딘가 쫓겨가는 듯한 다급함과 불안정함이 공기 중을 떠돌고 있었다. 하지만 용재에게서 이사 얘기를 들었다는 말을 꺼내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버젓이 눈에 보이는 박스들을 모른 척하는 것도 어색했다.
“이사라도 가려고?”
거실의 둥근 식탁 위에 맥주 봉투를 내려놓으면서 최홍서가 물었다. 박동하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그 질문 속에 어떤 의도가 있지는 않은지 ‘윤혜안’의 얼굴을 한동안 유심히 살폈다.
“왜? 나 같은 무색무취 잡초한테는 분수에 넘치는 집이었는데. 잘됐다 싶어?”
“......”
무색무취 잡초. 아무래도 예전의 윤혜안이 박동하를 두고 그렇게 말했던 적이 있는 듯했다. 이젠 그 정도는 추측할 수가 있었다.
“싸우자고 온 거 아니야. 앉아서 얘기하자. 마실래?”
봉투에서 맥주를 꺼내면서 물었지만, 식탁에서 몇 걸음 떨어진 자리에 멀찍이 선 박동하는 가까이 다가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주먹을 꽉 말아 쥔 채 핏발 선 눈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형은... 그 코딱지만 한 오피스텔, 부사장님이 거기서 그냥 살래? 부사장님한테는 예전에 살던 것 같은 강남 아파트로 옮겨달라고 조르지 않나 봐? 착한 척하느라 얼마나 힘들겠어.”
최홍서는 풀 탭을 따고 혼자 맥주를 마셨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내고는 심호흡 뒤에 준비한 말을 꺼냈다.
“많이 고민해 봤어.”
“뭘.”
“지금이라도, 너나 다른 ‘티탄’ 멤버들에게 조금이나마 보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에 대해서.”
“보상? 윤혜안이 보상? 하, 그렇게 잡아떼더니 드디어 기억이 돌아온 거야?”
“아니.”
“아직도 부정하는구나. 진짜 징하다, 윤혜안.”
“네 믿음을 사겠다고, 아닌 걸 거짓말할 순 없어.”
“거짓말을 할 순 없다고? 형이 밥 먹듯 해대면서 사람 미치게 했던 게 거짓말이잖아! 그럼 이제 와서 해체 때 얘긴 왜 꺼내는 건데?”
“네 말대로,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내가 한 짓이라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박동하와 마찬가지로 의자에 앉지 못하고 식탁 앞에 서 있던 최홍서는 저도 모르게 맥주캔을 구겼다. 현관에서 초인종을 누르기 전, 손가락을 접으며 다섯까지 숫자를 세었음에도 ‘윤혜안’의 과거를 자신의 과거로 수용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외면하고 피한다고 해서 저절로 해결될 일도 아니었다. 이 모습으로 살아있는 한.
이해성을 떠올렸다. 내가 윤혜안이 아닌 최홍서라는 걸, 단 한 사람, 그가 믿어주고 있다면 상관없었다. 나머지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박동하와의 대면을 마치고 분당 그의 집으로 돌아가면, 자신을 홍서라고 부르며 맞아줄 이해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심장 박동이 어느 정도 침착해졌다. 최홍서는 신중해 보이도록 노력하면서, 지난 며칠간 몇 번이나 입안에서 굴려본 말을 조심스레 건넸다.
“너무 늦지 않았다면, ‘티탄’... 다시 시작해 보지 않을래?”
“......”
박동하는 한동안 정지 상태였다. 재결합 제안을 들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드르르륵, 드르르륵. 침묵을 깨고 어디선가 핸드폰 진동음이 들려왔다. 주방의 조리대 위였다. 멀뚱히 서 있던 박동하는 초조한 걸음걸이로 주방을 향해 걸어가 핸드폰을 확인했다. 짧은 진동음으로 봐서는 전화가 아닌 메시지 같았다. 메시지를 확인하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메시지 때문이 아니라, 집에 와 있는 윤혜안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집어던지듯 핸드폰을 내려놓은 박동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마구 비벼댔다. 그러곤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최홍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에게 보상하고 싶다고 했지?”
“그래.”
“부사장님이랑 형, 아무 사이 아니라고도 했고.”
“...그래.”
“그럼 나, 부사장님한테 소개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