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그리고, 춘천은 요즘 어떻습니까.”
춘천이란, 춘천교도소를 의미했다. UB 엔터테인먼트의 前 사장, 명도훈이 수감되어 있는 곳이었다.
한동안 이해성은 명도훈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었다. 이대로 이렇게 춘천에 처박아두는 건가 싶을 정도로. 강 실장은 남몰래 그렇게 되기를 바라왔었다. 눈곱만큼이라도 명도훈을 동정해서가 아니라, 이해성이 그 사건으로부터, 죽은 자를 위한 복수심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여전합니다. 보고드려왔던 대로 다른 수감자에게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수준이라, 명도훈의 신고나 항의도 처리가 안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런, 고생이 많겠네. 얼마나 나오고 싶겠어요.”
닦아내기가 무섭게 솟아나고, 턱 끝에서 뚝뚝 듣는 땀방울을 가슴팍 위에서 아무렇게나 문질러내면서, 이해성의 시선은 여전히 멀리 산을 향하고 있었다.
“슬슬 착수하죠.”
“......”
“특별 사면, 준비해 줘요.”
“......알겠습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듯 보이는 강 실장의 표정에서 미세하게 불안이 묻어났다. 이대로 명도훈을 춘천에 처박아두고 잊어버리기를 기대한 자신의 바람은 아무래도 이루어지지 않을 모양이었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면서도 강 실장은 그 ‘할 말’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더 지시하실 부분은...”
“휴가를 좀 맞추죠.”
“네?”
“한 달 정도 비워줘요. 대외비로, 조용히.”
“......”
“출근만 안 해도 되게끔.”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해성의 업무들이 반드시 회사에 나가야만 처리할 수 있는 종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성은 늘 성실히 출근했었다. 오너 패밀리의 규칙적인 출근만으로도 직원들의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다는 게 그의 방침이었고, 그것은 실제로 효과가 있었다.
이해성이 개인적인 이유로 이렇게까지 긴 휴가를 지시한 것은, 강 실장이 기억하는 한 두 번째였다. 최홍서의 사망 이후 두 번째.
태국 방콕까지 가서도 최홍서의 화장을 직접 볼 수 없었던 이해성은 귀국 후 휴가를 내고 옥천의 별장에 틀어박혔었다. 그러니 강 실장에게는 이 지시가 염려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검진받으려면 미국도 다녀와야 하고, 강 실장도 알다시피... 건강이 많이 안 좋지 않습니까? 요양차 조용한 곳에서 좀 쉬게 할 생각입니다.”
어제저녁, 이해성은 주차장에서부터 3층 침실까지 VIP를 직접 업어 옮겼었다. 핏기 없는 입술이 허옇게 일어난 VIP의 머리카락이 비 맞은 사람처럼 젖어 있었다. 심한 오한에 시달리듯, 혹은 귀신에 들리기라도 한 듯 몸을 떠는 것도 강 실장이 직접 봤었다.
“왜, 대답이 없죠?”
이해성의 추궁에 강 실장은 조심스럽게 답했다.
“미스터 버드께서 걱정하셨습니다.”
“나를? 아, 잠을 못 자는 것 같다고? 근데... 지금 내가 지시한 내용과 그게, 무슨 연관이 있죠?”
닦아내도 닦아내도 계속 흘러내리는 땀이 이젠 귀찮다는 듯, 이해성은 가슴팍과 아랫배를 한 번 더 훔쳐내고는 트레드밀의 손잡이에 타월을 아무렇게나 걸쳐 놓았다.
“강 실장은, VIP가 마음에 안 드는군요.”
“그런 판단을 내릴 권한은 제게 없습니다. 다만...”
“다만?”
“VIP가 분당에 들어오신 후로 부사장님께서 건강을 돌보시지 않는 것 같아서 염려될 뿐입니다.”
“건강... 참 편리한 말이죠.”
그렇게 중얼거린 이해성이 트레드밀을 중지시켰다. 기계가 서서히 느려지며 경사도를 낮추는 동안, 이해성은 강 실장이 건넨 새로운 타월로 땀을 닦아냈다.
“왜요, 내가 미친 사람 같은가?”
“부사장님.”
“최홍서를 흉내 내면서 나에게 접근하려는 의도가 있는지 조사를 해보라고 하더니, 이젠 분당에 들어 앉히고, 아예 최홍서처럼 대하고 있다고. 내 정신 건강을 염려하는 겁니까?”
“부사장님은 누구보다 사리 분별이 또렷하신 분입니다. 그렇게 느끼시도록 말씀드렸다면 죄송합니다.”
“VIP를 아예, 홍서라고 부를까요?”
“제가 주제넘었습니다.”
강 실장은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이며 뒤로 물러섰다.
“그 사람, 너무 언짢게 보지 말아요, 강 실장님.”
조금 전까지, 노기가 끓던 이해성의 어조가 문득 부드러워졌다. 트레드밀에서 내려온 이해성이 강 실장의 어깨에 툭, 손을 내려놓았다. 190cm가 넘는 장신에 잘 단련된 육체를 가진 남자의 손은 그가 가진 직책과 의무만큼이나 무거웠다.
“강 실장님은 내가 중심과 기준을 잃고 날뛰게 되길 원치 않는 분이잖아요.”
“......”
“그 사람 잘못되면 이번엔 내가, 별장에 처박히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요.”
강 실장의 어깨를 한번 꽉 쥔 이해성은 격려하듯 가볍게 그것을 흔들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내 옆에 있도록, 강 실장님이 빌어줘야죠.”
이해성은 체육관에 딸린 샤워실로 걸음을 옮겼다. 밤새 앓았던 최홍서를 깨우지 않기 위해 2층에서 샤워를 마친 후 3층으로 올라갔다. 조심스럽게 마스터룸의 문을 열었다. 한낮이었지만 암막 커튼을 드리운 침실은 어둑했다. 그 어둠 속에서 티파니가 고개를 번쩍 들고 형형한 두 눈으로 이쪽을 보았다.
이해성은 슬리퍼 소리조차 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침대로 다가갔다. 옷도 갈아입지 않은 가운 차림에 머리카락도 말리지 않은 상태였다.
“......”
최홍서는 하얀 이불로 얼굴을 반쯤이나 가린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제야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이는 듯 엷은 미소를 지었던 이해성은 바로 다음 순간엔 눈썹 사이를 좁혔다. 그는 허리를 숙여, 최홍서의 코 아래에 손가락을 대보았다. 검지에 닿아오는 간지러운 날숨을 느끼고서야 잠시 눈을 감은 채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눈과 코를 빼꼼히 내놓은 곤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살살살, 입술과 하관을 가린 이불을 끌어 내렸다.
최홍서의 머리맡에 몸을 말고 이해성을 지켜보고 있던 티파니가 순간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냐아. 녀석은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왜? 하지 말라고?”
이해성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나한테서까지 지키려고 안 해도 되거든?”
녀석은 귀찮은 듯 고개를 돌리고 앞발을 내저으며 이해성의 손을 떨쳐내려 했다.
“내가 너보다 훨씬 더 걱정하고 사랑하거든?”
티파니를 상대로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스스로가 문득 우스워져서 이해성은 눈썹 위를 쓸면서 피식거렸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내가 미친 것 같냐고 강 실장을 몰아붙였지만,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겠군.
티파니는 폭신한 이불 위를 사뿐사뿐 걸어와, 이불 끝을 살짝 끌어 내리고 있는 이해성의 손 위에 제 앞발을 얹었다.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이런데도 홍서는 네가 자기를 안 따른다고 슬퍼하잖아.”
손등 위에 올려진 티파니의 앞발을 엄지로 쓰다듬으면서, 이해성은 목소리를 더 낮췄다.
“네가 생각해도 네 집사가 귀엽지?”
이해성과의 실랑이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녀석은 주둥이를 몇 번 크게 벌리고 입맛을 다시더니 곧 최홍서의 머리맡으로 돌아가 다시 몸을 말았다. 그래도 여전히 시선은 이해성을 향하고 있었다. 언제든 허튼짓을 하면 달려들겠다는 듯이.
턱없이 빛이 부족한 어슴푸레 속에서 잠든 얼굴을 하염없이, 질리지도 않고 바라보았다.
이 얼굴을 왜 윤혜안이라고 생각했을까.
홍서라는 걸 어떻게 몰라볼 수가 있었을까.
지금 이해성의 눈에는 영락없는 최홍서였다. 이목구비가 이전과 똑같아서가 아니다. 우리가 누군가라고 인식하는 생김새란, 눈이 어떻고 코가 어떻고 그런 것이 아니다. 이목구비를 움직이고 생기를 부여하는 고유의 표정과 눈빛이 바로 한 사람의 고유함임을 이제는 알았다.
눈앞에 잠들어 있는 사람은 이해성에게, ‘뜻하지 않은 사고’로 얼굴이 다소 달라진 최홍서일 뿐이었다.
사랑스러움과 애틋함이 넘치는 시선으로 연인을 바라보던 이해성은 이불 끝을 쥐고 있던 손으로 입술과 그 주변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애기, 왜 자꾸 아파? 응?”
가끔씩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끝도 쓸어보았다.
“티파니가 링웜도 아니라는데... 반점은 없어지지도 않고.”
티파니의 곰팡이 배양 검사 결과는 어제 보고받았다. 병원에서는 티파니가 감염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링웜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해성은 최홍서의 가슴 위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사죄하는 모양으로 그 몸 위에 엎드렸으나, 가슴을 누르지 않으려 표면만 살짝 닿아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미약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의 움직임을 느낄 수가 있었다. 최홍서가 살아있었다.
어둠 속에서, 이해성은 엎드린 자세 그대로 얼굴을 들었다. 침대 머리맡의 티파니가 여전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든 최홍서의 가슴에 턱을 괴고, 이해성은 팔을 뻗어 티파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네가 홍서 잘 지켜야 돼. 뺏기지 않게. 이 몸은 이제 홍서 거니까.”
냐아. 녀석의 대답은 왠지 믿음직스러웠다.
이해성은 흐릿한 미소와 함께 다시금 최홍서의 뺨을 쓸었다.
“홍서야, 이건 절대 벌받는 거 아니야. 너랑 내가 다시 만났는데 어떻게 벌이겠어? 이건 상이야. 아주 큰 상.”
밤새 열과 헛소리에 시달렸던 사람 같지 않게, 최홍서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벌은 내가 주는 거야. 네가 그랬잖아. 내가 반신(半神)이라고.”
이서경이 태국 방콕에서 피살되었던 날. 바로 그날.
동호대교에서 투신해 몇 개월간 의식 불명 상태에 빠져있었던 아이돌 그룹 멤버가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했었다.
당시에는 알지도 못했었고, 알았다 한들 관심을 두지도 않았을 일이었지만. 현재의 이해성은 인지하고 있었다. 그 아이돌 멤버가 ‘윤혜안’이었다.
이서경이 죽임당한 날, 최홍서가 윤혜안의 몸으로 눈을 뜬 것을 이해성은 더 이상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죽어 마땅한 인간이 아직 하나 더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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