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이해성은 천천히 걸어가면서 통화를 연결했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간 듯했고, 곧이어 진료 내용이 이어졌다.
“네, 고양이라면 한 마리 기르고 있습니다.”
고양이라는 말에 최홍서의 눈이 커졌다. 진단 방향이 의외이기는 이해성도 마찬가지였는지 목소리에 의아함이 묻어났다.
“아니요, 그런 증상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다시 한번 살펴보죠.”
걸음을 멈추고 최홍서와 서로 눈을 맞춘 상태에서 이해성은 통화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전화를 귀에서 잠시 떼고는 염려스러운 눈으로 물어왔다.
“가려운 증상, 정말 없어?”
최홍서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목뒤를 만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렵지는 않다고 하네요.”
한동안 의사의 소견에 귀를 기울이며, 이해성은 마주 선 최홍서의 귓바퀴를 번갈아 만지작거렸다. 아마도 빨갛게 얼어 추워 보인 모양이었다.
“고양이가 걸리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이 걸릴 수가 있습니까.”
의사의 답변을 듣는 이해성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리 속 시원한 소견을 듣지는 못한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휴일에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강 실장님 통해서 진료 예약하고 직접 찾아뵙죠. 그럼.”
통화를 마친 이해성은 최홍서의 어깨를 감쌌다.
“밖에 너무 오래 있었나 보다. 추워 보이네. 얼른 들어가자.”
바람을 맞은 얼굴 쪽이 약간 얼어있을지 몰라도, 점퍼와 목도리, 장갑으로 이해성이 워낙 꽁꽁 싸매놓은 덕분에 몸이 추위를 느끼지는 않았다. 그래도 최홍서는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재촉했다.
춥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도, 실내의 훈기가 닿자 얼었던 피부가 녹아내리고, 바짝 힘을 주고 있었던 가슴이 편안해졌다. 먼저 점퍼를 벗어 강 실장에게 건넨 이해성은 최홍서가 점퍼를 벗는 것도 도와주었다.
“일단 사진상으로는 고양이에게 전염된 피부병으로 보인다고 하시네.”
“고양이 피부병이요? 오늘 빗질해주면서 봤을 때도 그런 증상은 없었는데...”
혼자 충분히 할 수 있는 간단한 일도 이해성은 꼭 입혀주고 벗겨주고, 심지어 먹여주려 했다. 최홍서가 정말 아기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이 그의 즐거움이라면 굳이 정색하고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처럼 강 실장이나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단둘이 있을 때조차도 쑥스럽기는 했지만. 그의 즐거움을 강탈해야만 할 정도의 쑥스러움은 아니었다.
“고양이에게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도 보균 상태일 수 있다네. 면역력이 약한 사람은... 전염될 수 있다고.”
최홍서가 면역력이 약해져 티파니에게서 피부병이 전염된 거라면, 그 잘못은 자기에게 있다는 듯. 이해성은 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 실장에게 최홍서의 점퍼도 건넨 그는 최홍서의 환부를 다시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증상을 봐서는 링웜이라는 고양이의 피부병이 확실한 것 같은데, 이렇게 증상이 뚜렷하게 나타날 정도면 반드시 간지럽다고... 그게 아무래도 이상하니까 내원해서 진료를 받는 게 좋겠다고 하시네.”
일단 두 사람은 아래층 주방에서 티파니를 붙잡았다.
티파니에게 전염된 피부병일지 모르니 이해성은 혼자 처리하겠다고 했지만, 최홍서는 만약 그게 맞다면 이미 옮아버린 후라 상관없다고 따라나섰다.
아무도 없는 주방 바닥에 주저앉아 두 사람이 합세해 녀석의 모든 곳을 꼼꼼히 살펴봤다. 그러나 피부병으로 보이는 증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털 결도 곱고 윤이 나서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해 보였다.
빗질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귀찮게 굴었다는 이유로 녀석은 굉장히 심기가 불편해졌다. 주방의 빌트인 수납장과 아일랜드 조리대 사이의 복도에 앉아, 최홍서는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수제 츄르로 달래주었다.
조리대를 등받이 삼아 이해성과 나란히 앉아서, 티파니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정신없이 츄르를 먹는 동안에는 녀석을 마음껏 쓰다듬을 수 있었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지 보균 상태일 수도 있으니까. 주말에도 운영하는 동물병원이 있을 텐데, 많이 걱정되면 지금 같이 다녀올까?”
“그래도 돼요?”
최홍서는 츄르 끝을 열심히 핥는 티파니를 걱정스레 내려다보았고, 조리대에 뒷머리를 기댄 이해성은 그런 최홍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팔을 뻗어 최홍서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티파니의 등을 쓰다듬는 최홍서의 손길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안 될 게 뭐가 있어. 약국에서 살 수 있는 연고도 있다고 하니까. 나간 김에 홍서가 사용할 연고도 사 오고.”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내용물이 거의 없어지자, 티파니는 츄르를 쥔 최홍서의 손에 자신의 두 앞발을 올리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 녀석을 위해 더 뒤쪽에서부터 한 번 더 츄르를 힘껏 짜내보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해성이 뒷머리에 얹고 있던 손으로 최홍서의 머리를 가볍게 당겼다. 이마 가장자리를 마주 대고는 명백한 ‘연인의 목소리’로 물었다.
“못 가게 해서 서운했어?”
“아니요. 서운한 건 아니고...”
“그럼, 삐졌어?”
이번에는 최홍서의 아랫입술을 검지로 톡 건드리면서, 그가 낮게 웃었다. 간지러운 귓속말 같은 웃음이었다.
“그런 거 아닌데. 삐지고 그러지 않는데.”
삐졌다는 말에 발끈한 것이 눈에 훤했는지, 그는 이번엔 관자놀이에 입술을 꾹 누르면서 좀 더 웃었다.
“그럼, 풀 죽었구나?”
“......”
“홍서야, 내가 제대로 된 방법 꼭 찾을 거야. 나 믿고 기다려줄 수 있지?”
표면은 거칠고 온도는 따뜻한 입술을 가만히 느끼면서,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티파니의 등을 쓰다듬던 손을 그의 등허리에 둘렀다.
츄르가 조금도 남지 않았음을 몇 번이나 확인한 티파니는 서로의 몸에 팔을 두른 채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산책 전에 그랬던 것처럼 최홍서의 옆구리와 허벅지에 제 몸을 비비면서 그르릉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츄르를 다 먹자마자 곧바로 자리를 떴을 녀석인데, 오늘따라 서비스가 후했다. 이해성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녀석의 울음소리나 몸짓이 자신을 위로하고 안심시키려 하는 것 같았다. 내 불안을 녀석도 눈치챈 걸까.
도도하게 구는 것 같아도, 티파니만의 방식과 속도로 자신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이해성에게, ‘당근판매자님’에게서 처음 전화가 걸려 왔던 그 밤에도, 티파니는 자신을 위로했었다.
허벅지에 몸을 비비는 녀석의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골골거리는 녀석의 작은 몸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도 같았다.
“강 실장님 잘 따른다고 섭섭해해서 미안해.”
최홍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사과했지만, 이해성은 녀석의 작은 머리를 다소 과격하게 쓰다듬으며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애기 발진이 너 때문이라고 밝혀지면, 너 인마, 진짜 많이 혼날 줄 알아. 엉?”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녀석을 만지는 손길과 표정에서는 사랑스러움이 묻어났다.
넓고 넓은 저택의 공간을 두고 굳이 이 좁은 공간에 셋이 모여 있는 모습이 문득 우스워서 피식 실소가 흘렀다. 위태로운 불안 속에서도 불을 밝히고 빛을 발하는 따뜻한 행복의 순간들이었다.
전화로 예약한 동물병원까지는 함께 이동했지만, 티파니를 데리고 병원에 간 건 이해성 혼자였다. 그의 수행원이나 고용인들과 달리 동물병원에서 마주치게 될 사람들은 함께 고양이를 데리고 나타난 ARA 이해성과 윤혜안에게 호기심을 보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 큰일이 생기지는 않겠지만 굳이 귀찮은 일을 만들 필요도 없기는 했다.
이해성과 티파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최홍서는 그의 수행원과 차에 남았다. 이해성은 외부에서 절대로 최홍서를 혼자 두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생활에도 빨리 익숙해지는 게 좋을 듯했다. 어쩌면 머지않아 저택 내에서도 이해성이 귀가하기 전에는 누군가와 반드시 함께 있도록 지시할지도 몰랐다.
혼자 남으니 어두운 불안이 몰려왔다. 생각을 따돌리기 위해 최홍서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휴일인 데다 종일 이해성과 함께 있어서 핸드폰에 거의 신경을 못 썼는데, 서너 시간 전에 용재 매니저에게서 여러 개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용재 매니저 : 형 어떻게 지내세요? (오후 3:01)
용재 매니저 : 형한테 외부 경호 붙고 나서 한 번도 못 뵀네요ㅠㅠ (오후 3:01)
용재 매니저 : 요즘 힘들어서 그런지 동하도 저한테 자꾸 연락해서 형 어떻게 지내는지 묻고 그러던데 (오후 3:02)
용재 매니저 : 언제 한번 또 동하랑 셋이 뭉쳐요 (오후 3:02)
용재 매니저 : 형이 원하시면 ‘티탄’ 다른 멤버들도 제가 모아볼게요 (오후 3:02)
용재 매니저 : 아 물론 형이 불편하시면 안 하구요! (오후 3:03)
용재 매니저 : 그리고 이 말씀은 진짜 안 드리려고 했는데 (오후 3:28)
용재 매니저 : 동하 그 집에서 이사 나간대요 (오후 3:29)
용재 매니저 : 전에 그 드라마 주연 캔슬되고 이후로 계속 잘 안 풀리나 봐요 (오후 3:30)
용재 매니저 : 여튼 동하가 말은 안 해도 형 깨어나신 뒤로 나름 의지했던 것 같아요 시간 나실 때 동하한테 연락 한번 주세요 (오후 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