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아저씨.”
최홍서는 뺨을 감싼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얘기를 들어 달라고, 간절함을 담아 바라보았다. 이해성은 무엇보다 다정하게 최홍서의 눈을 마주하면서도, 그 간절함만큼은 모른 척했다.
“우리 애기, 그래서 그랬던 건데... 그 응접실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널 두고도 난... 내 앞에서 또 쓰러질 생각이냐며 비아냥거리기나 했었지.”
진한 후회로 물들어 최홍서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물러졌다. 그의 가슴도 함께 물러지고 있음을 알 것 같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테니까요. 그래서 그런 거잖아요.”
최홍서의 위로에 그가 쓰게 웃었다.
“그래. 그런 상상력을 발휘할 만큼 내가 낭만적인 사람도 아니었지.”
마주 선 두 사람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던 이해성의 시선이 다시금 최홍서에게 맞춰졌다. 하아, 한숨 끝에 입김이 다시 부풀었다. 오늘 그는 유난히 한숨이 잦았다. 두 손을 아래로 툭 떨어뜨렸던 이해성이 장갑을 벗어 점퍼의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맨손으로 최홍서의 볼을 감싸 눈 밑을 엄지로 부드럽게 훑었다. 가죽 장갑과 달리 그의 피부는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따스함이었다.
그는 자주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싸주었고, 그때마다 최홍서는 그가 단지 뺨이 아닌 자신의 심장을 조심스레 감싸주는 것만 같았다.
“너와의 추억이 있는 장소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윤혜안이... 그걸 빌미로 내 호기심을 자극하려 한다고 생각했어. 그때는.”
“알아요. 나 정말, 그때 일로 아저씨 조금도 원망 안 하니까... 아저씨도... 미안해하지 마요. 나는...”
“홍서야.”
그는 최홍서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주 드문 일이었다.
“미안해하고, 아주 많이 미안해하고. 그리고, 그 무당 얘기는 없었던 걸로 하면 안 될까. 홍서가 아팠던 그 장소들, 앞으로는 그런 장소들만 피하면 되는 거잖아. 음?”
최홍서가 무당 얘기를 다시 꺼내려 한다는 것을 이해성은 알고 있었다. 최홍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의 어깨너머로 ‘천국의 문’이 내다보였다. 진짜 ‘천국의 문’은 발리를 찾는 대부분의 여행객들이 반드시 찾는 인기 관광지라고 했다. 새벽부터 름뿌양 사원으로 향한 사람들은 번호표를 받고 대기하다가 순서대로 소위 인증샷을 찍는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의 문’에서 찍는 그 인증샷을 제외하면 사원에 다른 볼거리는 별로 없다며 불만족스러워하기도 한다고, 이해성은 얘기해 줬었다.
어렵게 다시 만난 연인과 가보고 싶은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세계의 곳곳을 그와 다녀보고 싶었다. 두 발로 걷고, 두 눈으로 담고, 다채로운 맛을 느껴보길 원했다. 그렇게 느끼는 감상을 자신은 부족하게나마 가사로 남기고, 그는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다. 그런 상상을 종종 해보곤 했다. 최홍서라고 해서 정말 그와 함께 가보고 싶은 곳이 무당집인 것은 아니었다.
분당의 이 넓은 저택도 세계에 비하면 감옥과도 같이 비좁았다. 이곳에 틀어박혀 불안에 떨면서 서로를 끌어안고, 그 불안을 섹스로 해소하는 시간을 보내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소비해 버리기엔 시간도 이해성도 너무 소중했다.
최홍서는 장갑을 벗고 이해성의 두 손을 붙잡았다. 제 손보다 한마디 이상이나 더 길고, 더 두툼한 그의 손을 어떻게든 제 손안에 가두어 온기를 전해주려 애썼다.
“보이지 않는 관념에 대한 믿음과 정성.”
“......”
“인터뷰에서 그 얘길 하셨던 건... 아저씨도 만신님이 하신 말을 조금은 믿는다는 거 아니에요?”
“그건 달라, 홍서야.”
최홍서가 하는 대로 힘을 풀고 얌전히 두 손을 맡기고 있던 이해성이 한순간 힘을 줘 최홍서의 손을 붙잡았다.
“그 사람이 한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의미를 곱씹어 본 것뿐이야. 네가 홍서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느끼면서도 그런 자신이 미친 게 아닐까 생각했던 시기였으니까. 네가 홍서라고 믿기 위해 근거가 되는 말이 필요했을 뿐이야. 그 외 다른 의미는 없어.”
“귀신이 몸을 얻고, 송장이 혼을 얻었다고... 그분이 그랬었잖아요.”
“......”
“송장은 영혼을 잃은 윤혜안이고, 귀신은 육체를 잃고 윤혜안 안에 혼으로만 남은 저를 말한 거 아니었을까요? 그분이 정말 뭔가를 알고 있...”
“홍서야.”
이해성이 또 한 번 최홍서의 말을 막았다. 이제 그는 최홍서의 양쪽 상박을 꽉 붙잡고 있었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애매한 말로 사람을 현혹하는 게 일이야. 정말로 네가 윤혜안이 아닌 최홍서라는 걸 분명하게 알았다면, 있는 그대로 말했으면 될 일이지 않아? 불분명한 소리를 던지고 거기에 상대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거라고. 그 사람들 수법일 뿐이야.”
최홍서의 몸을 흔들면서 설득하려 애쓰는 이해성의 눈이 번들거렸다.
그가 어떠한 초자연적인 것도 믿지 않는 사람임은 알고 있었다. 무당을 찾아가 보자는 말에 쉽게 동의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예상보다 더 단호했다. 어쩌면 그건, 예상보다 더, 그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다그치듯 대한 행동을 후회하는지, 이해성은 곧 최홍서의 어깨를 꽉 붙든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자신의 하관을 짓이기듯 쓸어내고는 최홍서의 맨손을 붙잡았다.
“뭐가 됐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네 마음 알아. 나 역시도 마찬가지니까. 확실한 방법만 있다면, ARA라는 이름까지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나도 그 방법을 원해.”
“......”
“하지만 무속이든 뭐든, 종교적 방법으로 이 일을 해결하려 하진 않을 거야. 그런 방법을 내가 어떻게 믿겠어, 홍서야?”
“아저씨, 내가 윤혜안의 몸에서 깨어났잖아요. 그것도 믿을 수 없는 일이잖아요.”
최홍서는 거의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애원하듯 말했다.
자신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이해성이었다. 그걸 모르지 않았다. 지금 이렇게 거부하는 건 단순히 무속을 믿지 않는 본인의 신념 때문이 아니라는 것, 그것도 알았다.
잠시 말없이 최홍서의 눈을 마주하던 이해성이 붙잡고 있던 최홍서의 손을 왼쪽 가슴으로 가져갔다. 그의 가슴에 꽉 마주 닿은 손바닥 아래에서 펄떡거리는 박동이 느껴졌다.
“그건 내 심장으로 확인했으니까.”
“......”
“예전 네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지금 내 앞의 이 사람이 너라는 걸 믿고. 예전의 널 대하던 것과 똑같은 정성으로 지금의 너를 봐. 무당이 무슨 뜻으로 지껄인 말이었든... 그게 내 신앙이고, 그게 내 연심이야.”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최홍서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점퍼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찔러 넣었던 장갑의 한쪽이 툭 떨어졌다. 미처 허리를 숙일 틈도 없이, 장갑은 거센 바람에 쓸려갔다. 돌길 위를 굴러가는 장갑을 허망하게 눈으로 좇는 사이, 이해성이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것을 주워 왔다.
늦은 오후를 향해 가는 만큼, 문을 나섰던 순간보다 더 기온이 낮아진 듯했다.
풀이 꺾인 채로 서 있는 최홍서 앞으로 되돌아온 이해성은 찬바람을 맞아 빨개진 최홍서의 손을 입김으로 데웠다. 그리고 주워 온 장갑을 끼워주었다.
“스페인 잡지에 실린 인터뷰 다 읽어본 거지?”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거기서 말했던 ‘사연’이라는 거. 홍서 얘기야.”
“......”
“널 잃은 후에 삶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됐었으니까.”
주워 온 왼쪽 장갑을 끼워 준 이해성은 최홍서의 점퍼 주머니에서 오른쪽 장갑을 꺼내 마저 끼워 주었다.
“너와 만나서 남들처럼 감정을 키워갔던 것, 그런 너를 개 같은 놈들에게 억울하게 빼앗기고, 그리고... 기적처럼 다시 되찾은 것까지.”
“......”
“네가 나의 이야기고, 나의 사연이야.”
‘개 같은 놈들’을 향한 분노로 잠시 진동했던 이해성의 목소리가 즉시 평정을 되찾고 차분해졌다. 양쪽 장갑을 모두 끼워 준 이해성은 이제야 안심된다는 듯, 보기 좋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최홍서를 마주했다.
“사연 있는 남자도 좋지만, 이제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억지로 입술 끝을 끌어 올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푸르름을 잃은 이 정원처럼 스산한 미소였다. 빈털터리가 되었음을 시인하듯 참담했다.
최홍서는 한 걸음 남짓한 거리를 지워버리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의 양 옆구리로 팔을 둘러 몸통을 껴안았다. 그의 어깨 위로 눈만 빼꼼 나온 채로 그 너머를, ‘천국의 문’을 보았다. 윤혜안이 자신과 키 차이가 그리 나지 않아서, 그 점이 고마웠다. 예전부터 이 위치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좋았으니까.
“맞아요. 아저씨 말이 맞아요. 봉안당이나, 한남동 맨션이나, 서초동 빌라... 그런 곳에만 안 가면 되는 거예요.”
“......”
“제가 잘못했어요.”
하아, 어깨를 끌어 올렸다가 푹 꺼뜨리면서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최홍서를 껴안았다.
“잘못한 거 없어. 너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아. 너는... 그냥 하나만 지켜주면 돼. 나 불안하게 하지 않을 거지?”
“안 그래요. 안 그럴게요.”
말리부에서도 했던 약속을 똑같이 반복했다.
최홍서를 안은 팔이 몸을 죄듯 강하게 힘을 주었다.
“나 모르게 그 무당을 찾아간다거나,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하는 거지?”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해요.”
내가 다시 돌아온 데에 아주 조금이라도 나 자신의 바람이 섞여 있다면, 그건 복수를 위해서도 아니고, 내가 죽은 뒤 ‘X군 스캔들’이 어떻게 종료되었을까 하는 궁금증 때문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오직 이 사람, 이 사람이 눈에 밟혀서일 테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을 안심시키는 것만이 내가 할 일의 전부였다.
닿는 순간엔 차갑다고 느꼈던 이해성의 구스 점퍼는 껴안고 있는 사이 금세 따뜻해졌다. 최홍서는 그 표면을 두 손으로 꽉 움켰다.
이해성 동생의 아토피를 진료했었다는 피부과 의사에게서 연락이 온 건, 두 사람이 ‘물의 궁전’을 등지고 돌아섰을 무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