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대신 사진으로라도 진단은 받을 거야.”
이해성은 강 실장을 호출했다. 아무리 강 실장이라도 최홍서와 함께 있을 때는 웬만해서는 3층으로 부르는 일이 드물었는데, 이번에는 최홍서의 의사도 묻지 않았다. 그만큼 단호했다.
최홍서의 점퍼를 벗긴 이해성은 환부를 더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상의 좀 벗어서 보자. 다른 곳에는 더 없는지.”
그가 너무 심각하게 걱정하는 듯해서 최홍서는 거부하지 않고 입고 있던 후드와 티셔츠를 벗었다.
“아래쪽에 두 개가 더 있네.”
혹시 차갑지는 않을까, 조심스럽게 맨살에 손을 대면서 이해성은 거의 절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일반적인 발진도 아닌 것 같고... 홍반인가...”
“부사장님, 부르셨습니까.”
이해성은 드레스룸 입구에 나타난 강 실장을 얼른 내부로 들였다.
“아, 실장님. 예전에 주성이 피부 봐주셨던 분 있잖습니까. 성함은 기억이 안 나는데... 고려 병원 나와서 개원하셨다던...”
“네, 이승준 원장님이요.”
“그분께 사진 좀 보내보죠. VIP 피부에 이런 증상이 갑자기 나타났는데 걱정입니다.”
VIP는 이 집에서 ‘윤혜안’을 가리키는 은어였다. 모두가 윤혜안으로 알고 있는 사람을 윤혜안으로 부르고 싶지도, 윤혜안으로 부르는 것을 듣고 싶지도 않았던 이해성이 지시한 호칭이었다.
이해성은 강 실장에게 최홍서의 등을 보이려 했고, 최홍서는 돌아서지 않으려 머뭇거렸다. 별것도 아닌 문제로 이해성이 윤혜안 때문에 유난스럽게 군다는 인상을 주고 싶지가 않았다. 티는 내지 않아도, 강 실장을 비롯해 이 집 사람들 모두 이미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으니까.
“아저... 씨...”
가렵거나 아프지도 않고 고작해야 두세 개일 뿐이라며 이해성을 말리려던 최홍서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아저씨’라는 말이 나갔다. 얼핏 살핀 강 실장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한순간 시선이 이쪽을 향하기는 했다.
“저 정말 괜찮아요. 그냥 좀 건조했었나 봐요. 월요일에 바로 병원에 다녀올게요.”
“피부과 질환은 웬만한 병원 가지고는 안 돼. 주성이... 내 동생이 아토피로 오래 고생했거든. 동생을 담당했던 좋은 전문의가 있으니까 그분께 사진 몇 장만 보내보자.”
모든 일에 최홍서의 감정을 우선해 주는 이해성이었지만, 이 문제에서는 물러날 기미가 없어 보였다. 강 실장의 도움을 받아 증상이 일어난 부위를 몇 차례 촬영한 이해성은 그 사진을 최홍서에게도 보여주었다.
후드 티셔츠를 다시 뒤집어쓴 최홍서는 그가 건넨 핸드폰을 살펴보았다. 사진 속에는 도넛이나 반지 모양의 붉은 반점이 찍혀 있었다. 상처는 언뜻 화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의외로 굉장히 또렷한 색과 모양에 조금 놀랐지만, 당장 가렵거나 아픈 증상이 없으니 크게 걱정되지는 않았다. 이해성의 생각은 그와 다른 것 같았지만.
“내가 급한 일이라고 했다고 전해요.”
“알겠습니다. 연락 오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럴 거 없이 내 쪽으로 직접 연락 달라고 해줘요.”
“알겠습니다.”
강 실장이 드레스룸을 나간 뒤 이해성은 티셔츠를 다시 입느라 흐트러진 최홍서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최홍서는 그에게 핸드폰을 건네고 점퍼를 다시 집어 들었다.
“산책 가려고?”
“가기로 했잖아요. 아픈 것도 아닌데요, 뭐. 나가서 바깥 공기 좀 마셔요.”
이해성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최홍서를 따라나섰다.
두 사람은 정원 중앙의 호수를 향해 이어진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다. 이해성의 분당 저택 세 개의 정원 중 메인 정원은 인도네시아 발리의 ‘따만우중’, 즉 ‘물의 궁전’으로 불리는 유명 정원을 본떠 설계되었다.
실제로 발리에서 제작해 운반해 왔다는 힌두 신들의 석상이 수십 개 자리했고, 호수 중앙에는 발리의 또 다른 유명 관광지인 ‘름뿌양 사원’의 조형물 ‘천국의 문’이 재현되어 있었다. 그 역시 발리의 장인이 직접 제작한 작품이었다.
실제 발리의 ‘천국의 문’ 앞에는 물이 없지만 거울을 반사 시켜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사진을 촬영하고 오는 것이 관광객들 사이에서 인기라고, 이해성은 설명했었다.
하지만 이곳 저택의 ‘천국의 문’은 실제로 호수 위에 지어져 물 위에 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진 촬영을 위해 여행했던 발리에서 ‘물의 궁전’과 ‘천국의 문’을 돌아보았던 이해성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종교적 신념을 떠나 미적인 취향으로 이 정원을 꾸미게 된 것이다.
최홍서 역시 처음 돌아보자마자 이 정원을 좋아하게 되었다. 겨울이라 푸르른 맛은 부족해도 이국적인 석상들과 물이 어우러진 풍경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현실과 천계 사이 그 어디쯤 존재하는 듯 비밀스러운 분위기가 이상하게 평온함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얄궂게도, 이 저택을 지을 당시의 이해성은 이 정원에 ‘바르도’라는 이름을 붙였다.
티벳 불교 용어에서 유래한 바르도의 해석에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이해성은 ‘중간계’라는 의미에 집중했다. 탄생과 죽음 사이, 잠들어 있음과 깨어 있음 사이, 우매함과 깨달음 사이. 어떤 극단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어떤 상태로 강요받지도 않는, 모든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상태로 이 정원에 머물기를 원해 ‘바르도’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그리고 최홍서가 이후에 알아본 바에 의하면, 티벳 불교에서 말하는 ‘바르도’, 중간계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죽음과 환생 사이.
그러니 그 정원에서 최홍서가 편안함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 자신의 상태와 꼭 알맞은 정원이었으니까.
이해성의 말대로 기온은 그리 낮지 않은데 바람이 제법이었다. 그래도 신선한 공기를 폐 속 깊이 들이마시니 무거웠던 머리와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듯했다. 후우, 긴 숨을 내쉬는 최홍서의 입술에서 새어 나온 김이 매서운 바람에 휩쓸려 순식간에 흩어졌다.
이해성이 최홍서의 왼쪽 어깨를 꽉 껴안고는 추위를 털어내 주려는 듯 위아래로 팔을 문질러주었다.
“많이 추워졌다. 올해는 눈이 적을 거라고 하던데.”
“첫눈도 평년보다 늦을 거래요.”
“첫눈 오는 날 뭐 할까?”
“......”
산책로는 호수를 양쪽으로 가르는 곧게 뻗은 돌길로 이어졌다. 왼쪽은 배를 타고 놀 수 있도록 탁 트여있었고, 오른쪽 호수에는 ‘천국의 문’과 석상들이 모셔져 있었다. 돌길로 들어서면서 최홍서의 걸음이 느려졌다.
“하고 싶은 게 있나 본데? 뭐야, 말해 봐.”
최홍서가 뭔가 원하는 게 있다는 생각에 이해성은 즐거워 보였다.
“뭐든지 괜찮아요?”
“당연하지. 누가 원하는 건데, 뭐든 다 들어줘야지.”
돌길의 한가운데서 최홍서는 걸음을 멈췄다.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 올려다보았다. 바람이 강하고 공기는 쨍하게 차가운데, 햇볕은 강렬했다. 이해성의 머리 뒤에서 빛나는 태양 때문에 그를 똑바로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한참 입술을 달싹거린 끝에 최홍서는 용기를 냈다.
“한남동 예전 숙소... 아직 그대로라고 하셨었죠?”
“거기 가보고 싶어? 홍서 집이고, 내 집인데, 그게 뭐가 어려운 일인가? 말 나온 김에 오늘 다녀올까?”
장갑을 낀 최홍서의 두 손을 덥석 붙잡으며 이해성은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그의 얼굴이 그늘 없이 환해 보였다.
그 얼굴에서 미소를 뺏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최홍서를 다시금 고민에 빠뜨렸다. 하지만 그건 서로가 진실을 기만해 얻은 미소였다. 불안 위에 지어진 미소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전 생에서, 죽음으로 얻은 깨달음이었다.
“아니요, 거긴... 꼭 가보고 싶은 곳은 아니에요.”
“그럼 어딘데 그래. 괜찮으니까 말해 봐. 길게 휴가를 내서라도 꼭 같이 가줄 테니까.”
최홍서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이해성은 이제 걱정스럽게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봉안당에서 아저씨랑 마주쳤을 때. 그때 처음 쓰러졌었어요.”
최홍서의 목소리는 불안정하게 떨렸고, 이해성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식은땀이 나면서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다가 어느 한순간에는 그걸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더라구요. 그러면서 의식을 잃었어요.”
“......”
“그 이후에 비슷한 증상이 있었던 건, 강 감독님 댁 2층 응접실에서였어요.”
이해성은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아아... 감탄하듯 입술이 벌어졌고, 그 사이에서 흐트러진 숨이 새어 나왔다.
강우현 감독의 2층 응접실은 이해성과 최홍서가 처음 만난 곳이자, 두 사람이 연인이 되기로 약속한 장소였다.
“그다음은...”
“서초동 빌라였던 건가?”
이해성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낮고 침착했지만, 화가 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차가운 금속성을 띠고 있었다.
최홍서는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의식중에 계속해서 최홍서의 장갑 낀 손을 쥐고 있던 이해성이 자기 손에 강한 힘을 주었다. 손가락에 피가 안 통할 정도의 힘이었지만 최홍서는 손을 놓아 달라고 하지도, 아프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말을 안 하면 더 나쁜 상황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얘기했어요.”
“그래, 잘했어. 뭐든지 같이 알고 있는 게 더 나아.”
이해성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었다. 마른침을 삼키고 아랫입술을 혀로 축이고는 최홍서의 뒷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다독였다. 그러다 한순간 경직된 눈으로 최홍서의 양 볼을 감싸 눈을 맞췄다.
뺨에 닿은 그의 가죽 장갑의 감촉이 싸늘했다.
“하고 싶은 거, 가보고 싶은 곳. 다 함께해 주신다고 했죠?”
“......”
“만신님을... 다시 만나보고 싶어요.”
시선을 맞춘 상태에서 이해성의 눈과 호흡이 차갑게 얼어갔다. 그의 입술 끝에서 피어오르는 입김마저도 새파란 결빙 같았다. 얼음 조각처럼 굳어있었던 그가 한참 만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아저씨.”
“그건 절대 안 돼.”
비틀린 입술에서 나온 목소리는 눈빛보다 호흡보다 가죽 장갑보다 더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