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뭐 이 새끼야?”
여유를 가장하고 있던 서준영은 그쯤에서는 더 참지 못하고 분을 드러냈다. 그러나 최홍서의 표정과 태도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감독님이 경고하셨었잖아요.”
“......”
“부사장님이 지금 세상에서는 전지전능한 반신(半神)이나 마찬가지라고. 괜히 신을 노하게 했다가 화 입지 말고, 입단속하라고. 감독님이 그렇게 조언해 주셨는데도, 선배님 계속 경솔하게 행동하고 계시잖아요. 상황 파악 못 하고 계신 거, 맞는 것 같은데요?”
어느새 다른 사람들도 대화를 중단하고, 둘의 팽팽한 말싸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중 소수는 염려 섞인 불안한 시선을 보내왔고, 그 외 대부분의 시선이 보내오는 의미는... 물론 싸움 구경에 대한 단순 흥미였다.
가슴 앞에서 단단히 팔짱을 낀 서준영은 한쪽 입꼬리를 당기며 조롱하듯 웃어 보였다. 약이 오를 대로 올라 얼굴 근육이 움찔움찔 떨렸다.
“요즘 세상에 돈 있고 권력 있다고 반신? 웃기지도 않아. 넌 그렇게 돈과 권력에 붙어 비굴하게 사는지 몰라도, 세상엔 나 같은 사람도 아직 있거든. 누군가는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바른말을 해야 하지 않겠냐?”
“돈 있고 권력 있는 사람을 욕한다고 그게 다 바른말이 되나요? 못 배워먹은 제가 보기에도 선배님 입에서 나오는 부사장님 얘기는 잘해봐야 근거도 없는 악담, 질 낮은 뒷담화 수준이던데요.”
풉. 최홍서의 말이 끝나자마자 누군가가 그 짧은 정적을 비집고 웃음을 터트렸다. 김이정 배우였다. 반박의 여지없이 정곡을 찔린 서준영을 향한 비웃음이었다.
최홍서와 김이정을 번갈아 찌를 듯이 노려본 서준영은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을 애써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아... 이제 보니 이해성이 자막을 지우겠다는 게, 다른 이유가 있었나 보네.”
한 음절 한 음절에 적대심을 가득 담은 서준영의 표정은 표독스럽기 짝이 없었다. 상대에게 반드시 상처를 주고야 말겠다는, 광기에 가까운 의지가 눈빛에 흘러넘쳤다.
추하디추한 얼굴이었다. 혐오스럽거나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것처럼 최홍서의 표정이 구겨졌다.
진실이 무엇인지에는 아무 관심도 없이, 자신의 기사에 신나게 악플을 달아대던 사람들이 바로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자 구토가 치밀 것 같았다.
“최홍서는 버림받고, 이젠 누구누구한테로 이해성의 관심이 옮겨 갔나 봐?”
계속되는 최홍서의 침묵을 항복으로 받아들였는지, 공격력을 회복한 서준영은 신이 나서 입을 나불거렸다.
“근데 이해성 취향도 차아암 한결같다.”
“......”
“하나같이 걸레들이네?”
한 방 크게 제대로 먹였다는 의기양양한 눈매와 입매.
어떠냐? 정신이 다 어질어질하지? 라는 태도로 턱을 들고 뻐기는 서준영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최홍서는 분노에 입술을 비틀었다.
“취소하세요.”
“뭘. 나무를 나무라고 하고, 한강을 한강이라고 하고, 걸레를 걸레라고 한 말을 취소해야 돼? 이유를 모르겠는데?”
“부사장님 모욕한 말, 취소하시라구요.”
“하, 너를 걸레라고 한 건 괜찮은데, 부사장님 취향이 걸레라고 한 건 취소해라? 와... 없는 자리에서도 그렇게까지 충성할 필요는 없지 않냐? 비굴한 건 피에 새겨진 거라 답도 없나 보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 자기 기분대로 오물 같은 말이나 지껄이느니 차라리 비굴한 게 낫겠네요. 그렇게 다른 사람을 오락거리 삼아 씹어대면 즐겁습니까? 취소하세요. 취소해요!”
“......”
즉시 달려들 거라 생각했던 서준영은 반응이 없었다. 시선도 최홍서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최홍서의 어깨너머를 지나쳐 좀 더 위를 보고 있었다. 주변인들도 조용했다. 말하면 할수록 분해서 떼를 부리듯 큰소리를 냈던 최홍서가 씩씩거리는 호흡만 공간 속에 울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눈송이가 내려앉는 것처럼 가볍게, 커다란 손이 머리 위에 툭 얹어졌다.
“크랭크인이 얼마 안 남았죠?”
나긋하고 풍부한 저음을 살짝 할퀸 듯한 목소리. 이해성이었다.
최홍서는 뒤를 돌아보거나 위를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어디서부터 듣고 있었을지 가늠되지 않았다. 그러나 얼핏 쾌활하고 다정해 보이는 음성 속에 차갑고 단단한 심이 느껴지는 것으로 봐서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건 절대 아니었다. 남들은 눈치채지 못해도 최홍서는 알았다. 그는 분명 칼을 숨기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자리에서, 굳이 ‘윤혜안’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애정을 담아 머리카락을 흩트린 그는 ‘윤혜안’의 양어깨에 손을 얹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제 정말 코앞이네요. 기대가 큽니다.”
다들 살얼음 위를 걷는 듯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필 뿐, 누구도 그의 말에 선뜻 맞장구를 치지 못했다.
“감독님 작품들이 워낙 다 훌륭하다 보니 그간 여러 영화제에서 많은 수상을 하셨지만, 유난히 칸과는 인연이 없으셨잖아요. 물론 경쟁 부문에 초청된 작품이야 여럿이었는데... 이상하게 수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죠. 물론 수상 여부가 작품의 가치를 말해주는 건 아니고, 감독님도 명예에 연연하시는 분이 아니지만... 이번 <크림 맨션>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갖춘 강우현 감독의 마스터피스가 될 거라고, 개인적으로 아주 기대가 커요. 투자를 결정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 영광스러운 여정에 동참하고 싶었거든요.”
‘윤혜안’의 어깨를 마사지하듯 꾹꾹 누르면서, 이해성은 희망찬 어조로 덧붙였다.
“이번엔 황금종려상까지 노려봐야죠.”
그의 밝은 목소리와 미소에 사람들은 그제야 서서히 긴장을 풀었다. 이해성이 좀 전의 말다툼을 듣지 못했거나, 들었다 하더라도 조용히 넘어갈 거라 예상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분위기였다.
“무슨 얘기 중이야. 부사장님, 또 칸 얘기 꺼냈구나?”
주방 쪽에서 가사도우미와 함께 나타난 강우현 감독이 이해성에게 눈을 흘겼다.
“우리 배우들 부담 주지 말라니까.”
“부담을 주려는 게 아니라 야망을 갖자는 거죠. 다들 취미로 영화 찍는 거 아니잖아요.”
“뭐야, 이제 보니 배우들이 아니라 나한테 부담 주는 거야?”
‘윤혜안’의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살짝 흩트린 뒤, 이해성은 강 감독과 함께 상석 쪽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언제나처럼 강우현 감독의 취향대로 뒤풀이에는 와인이 동원되었다. 어떤 불호령이 당장 떨어지는 건 아닐까 바짝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뒤풀이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사색이 되어 있었던 서준영의 얼굴빛도 점차 정상으로 돌아왔다. 힐끔힐끔 이해성의 눈치를 살피는 태도를 보니, 찜찜함을 완전히 털어버리지는 못한 듯했다.
“지난번에 중요한 볼일이 있다면서 스터디 미뤄달라고 했었잖아요. 볼일은 잘 마쳤어요?”
자리가 무르익자 강우현 감독이 생각났다는 듯 이해성에게 물었고, 이해성은 와인 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 기대 이상의 결과를 내고 왔죠. 협조해 주신 덕분입니다.”
“스터디야 우리끼리 해도 되는데, 이번 스터디는 꼭 참석하고 싶다고 한 주만 미뤄달라고 하더니. 오늘 정작 뒤풀이에만 나타났잖아.”
“저야 여러분들 응원차 오는 사람인데, 뒤풀이에 참석했으면 스터디 참석한 거죠. 안 그렇습니까?”
섭섭해하는 강우현의 핀잔을 받아친 이해성이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을 둘러보며 넉살 좋게 물었다.
맞아요! 맞습니다!
ARA 이해성이자, 이 영화의 최대 투자자에게 반기를 들 사람은 없었다.
“안 그래요?”
“......”
“윤혜안...씨?”
“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맞장구를 쳐준 것으로는 부족했는지, 이해성은 ‘윤혜안’을 콕 집어 되물었다. 터틀넥의 끝부분을 잡아당겨 그 안에 턱을 넣은 채 움츠리고 있던 최홍서는 얼떨결에 이해성과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이해성은 만족스럽게 씨익 웃어 보였다. 그 웃음의 의미는 아마도 이 자리에서 최홍서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안 그래요?’와 ‘윤혜안 씨?’ 사이 잠시의 여백. 그리고 윤혜안이라는 이름에 미묘하게 힘을 준 어조. 그것은 둘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사인, 장난 같은 것이었다. 윤혜안이라고 힘주어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역으로 자신이 실은 최홍서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처럼 들렸다.
둘만의 비밀.
너는 사실 최홍서고, 우리 둘만이 그 비밀을 공유한다는 증명 같은... 앞으로는 윤혜안이란 이름이 그가 붙여준 애칭처럼 느껴질 것만 같았다.
“근데, 옷이 불편한가? 계속 잡아당기네요.”
“아니요, 이건 그냥 괜히...”
“그래요. 잘 어울려요. 터틀넥.”
와인 잔을 다시 입술로 가져가면서 계속해서 미소를 보내오는 이해성에게서 황급히 눈길을 돌리면서, 최홍서는 거의 마시지 않고 있었던 와인을 벌컥벌컥 비워냈다. 왜 터틀넥을 입을 수밖에 없었는지 다 알면서. 그야 여기 있는 사람들은 그의 말뜻을 짐작조차 못 하겠지만... 그럼에도 최홍서에게는 이해성의 발언이 아주 과감하게 느껴졌다. 다들 보는 앞에서 그가 키스 마크를 남기기라도 한 것처럼.
그 외에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뒤풀이 분위기였다. 그렇게 별일 없이 지나가나 싶었다.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의 서준영만큼이나 최홍서도 그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서준영의 모욕적인 발언을 없었던 일로 칠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서준영으로 인해 이해성이 감정을 소모하는 건 더 원치 않았다.
자리가 파하고, 흥이 오른 몇몇 사람들은 강 감독의 자택을 떠나 2차로 어디에서 모일지를 의논했다.
주축이 되어 인원을 더 모으던 젊은 배우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나던 서준영을 잡아 세웠다.
“준영 선배, 선배도 당연히 2차 가실 거죠?”
“아... 오늘은 빼줘.”
“선배가 빠지신다구요? 농담이시죠? 명단에 넣습니다?”
“아냐, 오늘은 진짜 집에 가야 돼. 술이 안 받아. 뒤풀이에서도 겨우 마셨어.”
술자리를 즐기는 고정 멤버 중에서도 서준영은 으뜸이었다. 최홍서는 그런 시간까지 남아본 적이 없지만, 시작했다 하면 아침 해를 보고 해장국과 소주로 마무리를 해야만 귀가하는 타입이라고 들었다.
그런 서준영이 고작 2차를 사양하고 있었다. 재벌 눈치는 보지 않는다며 큰소리치던 기세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서준영 씨, 2차 안 갑니까?”
이해성이 이 자리에서 서준영에게 직접 말을 건 첫마디였다.
“아... 네, 뭐... 오늘 술이 좀 안 받아서요.”
서준영은 씁쓸한 얼굴로 대강 대답했다. 모두가 듣는 자리에서 허세를 부렸으니, 이제 와 굽실거리는 태도를 보이기는 자존심이 허락지 않겠지.
“그럼,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감독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가방을 어깨에 걸친 서준영은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하고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입구를 향했다. 이 자리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려 서두르는 몸짓이 눈에 훤히 보였다.
“2차 안 가실 거면 잠깐 저 좀 보고 가시죠, 서준영 씨.”
“......”
정지해 침묵한 것은 서준영만이 아니었다. 식당에 남아있던 모든 이들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이해성의 표정에서는 분노나 악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감독님, 2층 응접실 좀 빌려도 되겠죠?”
그렇게 얘기한 이해성은 핸드폰을 꺼내 들여다보며 식당을 빠져나갔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어디서부터 들었던 거지? 최홍서는 좀처럼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드르륵, 코트 주머니 안에서 짧은 진동이 느껴졌다. 이해성일 거라는 직감에 최홍서는 얼른 메시지를 확인했다.
당근판매자님 : 오래 안 걸릴 거야. 먼저 귀가해요. 집에서 봐^^ (오후 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