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활주로에 완전히 자리를 잡은 비행기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한순간 몸이 휘청거리며 기울었다. 등허리와 소파의 틈 사이로 들어온 이해성의 팔이 최홍서의 허리를 꽉 붙들었다. 귀 바로 아래, 턱이 끝나는 지점에 입술을 묻은 그가 귓속말처럼 속삭였다.
“알아. 나도 그래.”
“일부러 장난치시는 거 다 아는데. 왜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가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야 내가 홍서한테 특별하니까.”
“......”
그제야 용기를 얻어 그를 돌아보았다. 미소를 보여주는 얼굴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최홍서도 미소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맞아요. 감정 변화가 정말 무딘 편인데... 아저씨한테만 다르게 반응해요.”
“나한테만 다르게 반응한다... 기분 좋은 말인걸?”
향기를 음미하듯 나른한 표정으로 이해성이 최홍서의 코끝에 자신의 코끝을 비볐다.
“홍서가 그렇다는 거 나도 알지. 끓는점은 높고 어는점은 낮아서 글리콜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니까.”
잘 알려지지 않은, 정말 열정적인 소수의 팬들만 알고 있는 부분까지 캐치하고 있는 그의 정보력에 최홍서는 가벼운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그럼, 분당으로 들어오는 거지?”
따라 웃으며 그렇게 속삭인 이해성의 귓속말은 청각에 입 맞추는 키스 같았다. 동거를 확실시하고 싶어 하는 그의 질문에 최홍서는 웃음기 남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가뿐히 들어 올려지는 상승감과 함께 그사이 비행기는 이륙에 성공했다. 창밖에 기울어져 있는 LA에 잠깐 시선을 주었던 최홍서는 이해성의 손끝을 슬그머니 붙잡으며 어렵게 운을 뗐다.
“그래도 소속사는... 일단 그대로 유지할게요.”
1인 기획사를 마련해 줄 테니 지금의 회사에서 나와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게 어떠냐고, 이해성은 그런 제안도 해주었었다. 지금 최홍서의 발언은 그 제안에 대한 대답이었다.
이해성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약간 실망한 듯한 기색이 비쳤다. 하지만 곧 표정을 가다듬은 그는 최홍서와 눈을 맞추고 뒷얘기를 기다려 주었다.
“윤혜안이 ‘티탄’ 그룹을 나오면서, 멤버들에게도 그렇고 회사에도 타격을 많이 줬던 것 같아요.”
“......”
“이렇게 몸을 빌리고 있으니까, 윤혜안이 벌려 놓았던 일들을 조금이나마 수습하고 싶어서요.”
그것이 윤혜안에게 보답하는 길인지는 잘 모른다. 지금까지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이것에 적응하느라 윤혜안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유조차도 없었다. 지금도 여유롭지는 않았다. 여전히 불안정하고 막막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윤혜안의 몸을 빌려 한 가지만큼은 분명하게 이루었다.
이해성을 다시 만나 마음을 전하고 그에게 직접 용서의 말을 들었다. 아니, 그는 용서를 구할 필요조차도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육체에 진 신세는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한때는 벌이고 단죄라고 느꼈던 이 환생을 지금은 행운으로 여겼고, 이 행운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알 수 없어도, 윤혜안이라는 이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싫든 좋든, 윤혜안의 탈을 쓰고 살아가야 하는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 이름에 들러붙은 때와 먼지를 털어내야만 했다.
이해성이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윤혜안은 실제로 스폰서를 뒀었어. 그것도 여러 명을 거쳐 갔던 것 같아.”
“그건 저도 어렴풋이 짐작은 했어요.”
“회사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원했던 스폰이었어. 꽤나 요란하게 주변을 어지럽히고 다녔던 인물인 만큼 원한도 샀을 거고, 인간관계도 복잡할 거야.”
걱정스러운 이해성의 목소리를 들으며 최홍서는 그에게 눈을 맞췄다.
“무슨 일이 있으면 아저씨한테 전부 말할게요.”
“회사를 그대로 유지하는 건 반대 안 하겠지만, 개인적으로 경호와 차량을 지원하는 문제는 양보 못 해. 홍서가 말하기 어렵다면 강 실장이 회사와 얘기하도록 조치할 테니까.”
“아저씨가 안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게요.”
그제야 이해성의 표정에서 염려와 경직이 조금이나마 옅어졌다. 최홍서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손이 옆구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다시금 부드럽고 나긋해진 목소리와 손짓이 최홍서의 청각과 촉각을 간지럽혔다.
“나 불안하게 하지 않을 거지?”
그의 숨결에 뺨의 솜털이 떨릴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금방이라도 키스를 할 것처럼 다가온 그의 입술 때문에 최홍서의 날숨이 가늘고 길어졌다. 눈꺼풀을 내리뜨면서 최홍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옆구리에 머물던 손이 위로 올라와, 티셔츠의 네크라인 주변을 만지작거렸다.
“서울에 가면 당분간은 셔츠나 터틀넥만 입어야겠다.”
네크라인 위로 드러난 키스 마크 위를 손끝으로 누르면서 이해성의 목소리는 약간 상기되었다. 목덜미만이 아니었다. 말리부에 머무는 동안 그가 남겨놓은 섹스의 흔적이 옷 안에, 전신에, 은밀한 곳까지 가득 넘쳤다.
입술과 입술이 반 정도만 서로 겹치도록 비스듬히 누르면서, 그가 한 번 더 속삭였다.
“겨울이라 다행이네.”
달칵.
8km 상공에서 그가 좌석 벨트의 잠금을 해제하는 소리는 어깨가 움츠러들도록 자극적이었다. 꿈같은 재회가 이루어졌던 캘리포니아가 까마득히 멀어지고 있었다.
■
“용서받고 되돌릴 수 있는 잘못은 실수고, 그럴 수 없는 잘못은 죄래요.”
강우현 감독과 피디, 주요 배우 등 테이블 주변에 둘러앉은 십여 명은 박동하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당신들이 나한테 저지른 건! 그건... 그건 실수 아니잖아.”
약간은 과장된 듯한 톤으로 대사를 이어가던 박동하는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눈동자를 불안정하게 굴리며 주변을 살폈다.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그 분위기만으로도 자신의 파트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읽어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은 대사를 생략해버릴 수도 없었다.
“그건 죄니까! 죗값을 치러야지!”
박동하는 할 수 없이 자신 없는 태도로, 고함을 지르듯 마지막 대사를 처리했다. 그것이 오늘 대본 스터디의 마지막 씬이었다.
“음...”
강 감독의 애매한 반응이 이어졌다. 박동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면서 침통한 표정으로 대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짓이 거칠었다.
“모두들 오늘도 수고했어요. 그런데 동하가 오늘 좀 집중을 못 하는 것 같네? 스터디가 오랜만이라 그런가?”
“죄송합니다.”
감독의 말투는 평소처럼 온화했지만, 박동하는 턱 끝이 쇄골에 닿을 만큼 고개를 푹 떨구었다.
“아니, 사과 듣자는 건 아니고. 동하 씨 기본기 탄탄한 건 아니까. 컨디션이 안 좋은가 해서.”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 캐릭터 심리가 잘 잡히지 않아서... 그치만 리, 리딩 때는 꼭 만족하실 만한 해석을 해오겠습니다!”
“응, 중요한 씬인 만큼 복잡한 심리가 담긴 건 내가 알지. 좀 더 고민해 봐요. 그렇게 막 비장할 건 없어. 현장에 나가면 즉석에서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하니까. 영화 촬영이 그래서 재밌는 거잖아?”
강 감독의 다독거림에도 박동하의 표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잿빛으로 구겨져 가고 있었다. 대각선으로 맞은편 자리에 앉은 최홍서에게는 녀석의 표정과 거기에 담긴 감정까지 훤히 보였다.
대형 작품에서 첫 주연이라 동하, 기대가 컸는데... 너무 안됐어요ㅠㅠ
용재 매니저에게 들었던 박동하의 소식이 의식될 수밖에 없었다. 대본 스터디에 늘 성실하게 임했던 녀석이니,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인 오늘 씬을 대충 준비했을 리가 없었다. 아마도 그 일이 박동하에게 영향을 준 것 같았다.
“이제 곧 본격적인 대본 리딩도 시작할 거고, 다음 달이면 드디어 크랭크인이죠? 우리 배우분들 모두 잘해주고 있으니까 컨디션 조절만 잘 하자구요.”
강 감독의 활기찬 목소리에 배우들은 그제야 가라앉아있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크랭크인을 향한 기대감으로 밝게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오늘은 뒤풀이 전에 전달 사항이 하나 있는데, 작품 외적인 일이라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고.”
다시 한번 강 감독에게로 시선이 쏠렸다.
“이해성 투자자가 지난번에 제안했었던 글귀 말이에요. 최홍서 군을 추모하는 내용을 엔딩 크레딧에 삽입하자고 했던 거. 그 건은 취소하기로 얘기가 돼서, 배우분들도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될 것 같아요.”
강우현 감독은 별일 아니라는 듯, 이미 결정된 일이니 알아두기만 하면 되는 부분이라는 듯 발표했다. 그러고는 평소처럼 뒤풀이 술자리를 지시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일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강 감독의 말대로 배우들의 연기와는 무관한 작품 외적인 부분이었으니까. 드디어 코앞으로 다가온 크랭크인에 들뜬 모습들이었다.
“사람들 다 모아놓고 거창하게 발표까지 했으면서 갑자기 왜 마음이 변했대요?”
그런 궁금증을 가진 배우는 아주 소수였다. 젊은 배우의 의문에 조원태가 나서서 고개를 저으며 덤덤히 답했다.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 생각이야 우리가 알 수가 있나.”
최홍서는 이유를 알았다.
최홍서의 죽음을 추모하고자 준비했던 글귀인데, 이제 이해성에게 최홍서는 죽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멀쩡히 살아서 곁에 있는 연인을 추모한다는 건 이제 그에게 오히려 끔찍한 일이 돼버린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준영이 코웃음을 쳤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보죠. 좋지도 않은 일로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글을 넣자니, 영화 망하라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처음부터 멍청한 생각이긴 했잖아요.”
“부사장님은 명문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시고, 스탠퍼드에서 경영학 박사 과정을 수료하신 분인데요.”
서준영의 비꼬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말끝을 자르듯이 최홍서의 반박이 이어졌다.
“그래, 수료. 박사 졸업이 아니라 수료. 그게 대단한가? 나도 한서 그룹에서 이강문 손자로 태어났으면 스탠퍼드 박사든 하버드 박사든 다 수료했겠다. 돈으로.”
“선배님 눈에 남의 성취는 전부 우스워 보이나 보네요. 부사장님이 똑똑한 분이라는 건 몇 마디만 나눠봐도 알겠던데요.”
“윤혜안 씨는 미국에서 고등학교 중퇴하고 오지 않았나? 고등학교 중퇴가 최종학력인 사람이 누구를 똑똑하다 아니다, 그런 판단을 내릴 정도의 지적 능력이 돼?”
“선배님이 아무래도 상황 판단력이 떨어지는 편이라는 걸 알아볼 정도의 지적 능력은 있는 편이죠.”